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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브리서 6장 4~6절 해설 ] 히브리서 6장 4-6절의 문자적 해석

히브리서 6장 4-6절의 문자적 해석


칼빈주의 색안경을 쓰고 히브리서 6장 4-6절을 들여다보면, 4절 내용이 비췸만 받고 맛만 보고 참여하기만 했지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니라는 해석을 낳습니다.  
 
알미니안주의 색안경을 쓰고 들여다 보면, 영락없이 구원을 받은 후에 타락하면 영원히 구원을 잃어버린다는 해석이 나옵니다.  
 
세대주의자 럭크만은 히브리서가 환난기 유다인들에게 주어진 말씀이므로, 히 6:4-6은 은혜시대의 교회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말씀이라고 주장합니다. 환난기의 유다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구원받게 되고, 따라서 행위에 실패하여 타락하게 되면 당연히 구원을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다들 자기 해석이 성경에 있는 그대로의 문자적 해석이라 주장합니다만, 문자적 해석이란 성경의 전후문맥과 전체적인 흐름과 본문의 역사적, 교리적, 문법적 이해에 따른 해석을 의미합니다. 물론 진리의 영의 인도가 우선하지만, 진리의 영의 인도는 성경의 문자적 증거와도 일치하며 상호모순되지 않습니다.  
 
먼저, 히브리서는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이 자기 동족인 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 서신이라는 사실을 문자 그대로 인정하고서 이해해야 합니다. 물론 권위역 킹 제임스 성경을 최종권위로 믿어야 인정하겠지만 말입니다... 바울이 이방인에게 분배하는 그 복음이 원래는 원 가지인 히브리인들에게 먼저 적용되는 복음이기 때문에, 자기 동족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히브리서를 기록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히브리서는 유다교의 율법주의로부터 히브리 크리스천들을 보호하기 위해 쓰여진 서신이기 때문에, 유다교 율법주의와 진정한 히브리인의 신앙을 비교하여 잘 분별하면서 읽어야 제대로 문맥파악을 할 수 있습니다. 원래 히브리인의 신앙은 아브라함의 믿음에서 출발하여 처음 확신을 끝까지 견고히 잡아서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들이 되는 그것입니다!!!(히 3:14). 모세의 율법은 범법으로 더해진 것으로서, 신약으로 개혁될 때까지만 히브리인들에게 지워진(부과된, imposed) 것입니다!!!(히 9:10). 
 
셋째, 히브리서 6장은 그리스도의 교리의 기본원리를 떠나 완전함으로 나아가는 길이 곧 아브라함에게 맹세로써 약속하신 말씀을 성취하는 길임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교리의 기본 터를 닦은 후에 다시 율법주의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며, 오히려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라서 완전케 되는 길로 나아가 그 믿음을 끝까지 완성하는 것만이 그리스도의 왕국에 참여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히 6:13-16; 12:2,3.28; 13:21).  
 
넷째, 율법은 그림자요 옛계약이지만(10:1), 지금은 개혁의 때가 되었으므로(9:10), 오직 실체이자 상속의 새유언인 그리스도의 신약을 굳게 붙잡고 끝까지 흔들림 없이 믿음의 길로만 달려갈 것을 권면하는 내용이 히브리서입니다(히 9:14,15; 10:35-39; 12:1-3).  
 
히브리서의 이러한 맥락을 잘 이해하고서 히 6:4-6을 들여다 보면, 사도 바울이 무엇을 얘기하고자 하는지 제대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제, 본문 자체의 정확한 문자적 해석을 시도해 보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3절과 4절의 연결부분입니다. 3절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우리가 이것을 할 것이다"고 했는데, 그 의미는 우리가 믿음을 끝까지 지키면, 하나님께서 기초에서 완전에 이르기까지 책임지시고 약속을 성취하신다는 것입니다(6:1,12). 4절은 이유와 결과를 나타내는 접속사 'For'(이는, 왜냐하면)로 시작됩니다. 앞뒤 문장의 인과관계가 확실하면 우리말에서 대개 생략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유나 원인 혹은 결과적 용법의 의미가 들어가 있습니다. 즉, 믿음으로 시작한 것을 끝까지 믿음으로 완성하게 되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인데, 왜냐하면....식으로 의미가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1절에서 15절까지를 하나의 맥으로 보아야 합니다.).  
 
믿음에서 출발하였으면, 다시 출발점으로 되돌아가지 말고, 출발점을 떠나 골인지점까지 계속 인내로써 믿음의 레이스를 달려가야만 완전함에 이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이유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For it is impossible...)! 대체 무엇이 불가능하다는 말입니까? 사도 바울은 불가능한 어떤 것에 대해 강조하고자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성령 안에서 시작하였다가 육으로 완전해진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갈 3:3)!!! 믿음으로 시작하였다가 율법의 행위로 완전케 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에게는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히브리인들에게는 히브리서를 통해서 믿음 더하기 율법의 행위가 사실상 불가능함을 역설하였습니다(갈 3:1-4; 히 6:4-6). 생각해 보십시오. 유다인 중에서 복음으로 거듭나서 믿음의 새출발을 한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다시 율법주의로 되돌아갈 수 있단 말입니까?  
 
한번 비췸을 받고, 하늘의 선물을 맛보고, 성령님께 참여한 자가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맛보고, 오는 세상의 권능들을 맛보았다는 것은, 분명히 구원을 받았고 거듭난 경우를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 가운데서 거듭났다고 확신하는 분들 중에 이 이상의 체험을 내세울 수 있는 분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것은 성령 안에서 시작한 사실을 명확히 증거하는 말씀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 안에서 믿음으로 출발한 히브리 그리스도인이 다시 율법주의로 되돌아가는 일이 과연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불가능하다는 말을 사도 바울은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불가능성(impossiblity)은 유다인의 불가능성입니다. 즉 유다인이 다시 율법주의로 되돌아가는 것은 마치 하나님의 아들을 새로이 십자가에 매달아 공개적으로 욕보이는 저주받을 행위이므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한번 욕보였다가 그렇게 혼이 났는데도, 또 다시 욕을 보이는 것은 더 이상의 기회가 없다는 것입니다.그런데도 세대주의는 유다인들이 다시 율법의 행위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까? 그것은 유다인들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저주하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에는 유다인일지라도 오직 믿음뿐입니다!!! 믿음에서 떠나 다시 율법의 행위로 되돌아가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영원히 저주받을 일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대환난기의 유다인이라도 말입니다.   
 
자, 이제 6절을 살펴 보십시오: "만일 떨어져 나간다면"(If they shall fall away).무슨 뜻입니까? 흔히들 배도라고 말하는 이 "떨어져 나감"(falling away)은 구원을 상실한다는 뜻일까요? 이 구절만 보면 자칫 그렇게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6절은 9절로 바로 접속이 됩니다. 만일 떨어져 나간다면 새롭게 됨이 불가능하지만, 그러나 이 말이 너희에 대해서 하는 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가정법을 사용하여 거듭난 유다인이 율법의 행위로 되돌아가 배도한다면(If), 다시 새롭게 함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히브리서의 수신자인 거듭난 유다인들에 대해서는 "너희에 대해서는 구원에 동반되는 것들이 있음을 확신하노라"고 말했습니다. 유다인의 구원에 동반되는 것들, 즉 구원의 열매들이 무엇이라 했습니까? 너희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10절), 소망의 확신(11절)이 구원의 열매들이라 했습니다. 이 열매들은 이방인 크리스천인 테살로니카인들에게서도 발견되었던 것입니다(살전 1:3). 살전 1:3에서 테살로니카 크리스천들에게서 발견된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는 동일하게 히브리 크리스천들에게서도 발견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히 6:4-6의 정확한 문자적 이해를 통해서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구원받은 히브리 크리스천은 율법주의로 되돌아가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둘째, 따라서 히브리 크리스천은 믿음의 출발점을 떠나 완전함에 이르는 골인지점을 향해 끝까지 인내로써 믿음의 길을 달려가야만 한다. 그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계승하는 참 히브리인의 신앙이다.  
셋째, 구원받은 후에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주님을 새로이 십자가에 매달아 욕보이려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주장하는 것으로서 명백히 저주받을 가르침이다(갈라디아주의 저주와 같은 맥락임.).  
넷째, 유다인의 구원은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동반한다. 믿음의 행위는 구원의 증거이지만, 율법의 행위는 저주와 영벌의 증거이다.  
 
이제, 히브리서 6:4-6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 분명히 이해가 되셨을 줄로 믿습니다.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으신다면, 혹 아직까지 기존 신학사상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으니, 십자가의 안약을 바르신 후 다시 살펴 보시기를 권면드립니다.  
 
히 6:4-6은 히 10:26-39과도 같은 맥락입니다. 진리의 지식을 받은 후에 고의로 죄를 짓는다는 것은, 신약의 진리를 알고서도 다시 율법주의로 되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제가 세대주의를 뜸씨라고 경고하는 것도 유다인들이 환난기에 다시 율법으로 되돌아가서 율법의 행위로써 구원받는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시대가 달라지므로 경륜도 달라진다고 주장하지만, 그런 주장은 성경에 없는 주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여러 가지 이상한 교리들에 끌려 다니지 말라"(히 13:8,9)고 말씀하신 것처럼, 오직 믿음뿐입니다! 이 시대에는 믿음만이라 하셨다가, 잠시 후 환난기에는 "아니다 이제는 믿음 더하기 율법의 행위다"라고 하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얼마 전까지 저주받을 영벌의 이단교리라 하셨다가 이제는 말을 바꾸어서 그것이 오늘날 구원받을 참 복음이다라고 하실 주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앞서 구원의 신비에 대해 설명하였듯이,  
알곡 심판의 때까지는,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뒤로 물러가 멸망에 이르지 말라고 권면하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두렵고 떨리는 가운데서 믿음의 길을 끝까지 달려가야 마침내 알곡으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생명의 책에 기록했다가 지워버릴 수도 있는 기간이 바로 시험과 증명의 기간이고, 우리 인간의 편에서는 믿음이 파선하지 않도록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것이 혼의 구원에 이르는 길이 됩니다. 이 기간 동안 밥티스마의 순종과 열매를 통하여 분별은 가능하지만, 미리 판단하고 결론지어 정죄하는 것은 안됩니다. 아직은 구원의 신비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알곡 심판이오기도 전에 "너는 영원히 구원받았어", "너는 구원 받았다가 잃어버렸어"라고 단정짓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권의 침해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 "너는 가룟 유다야, 너는 베드로야"하고 미리 판단해 버린다면, 주님의 심판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는 것은 주님의 심판권에 대한 도전이요 모독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각자는 겸손히 피조물의 자리로 돌아가서 성경 말씀을 자세히 살피며,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우리의 구원을 점검하고 이루어나가며, 서로 돌아보아 그 날이 가까옴을 볼수록 더욱 격려하여야 할 것입니다. 신약성경이 믿음을 요구함과 동시에 우리의 행위를 요구한다면(그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의 행위인 것입니다. 믿음과 믿음의 행위는 하나이며 서로 분리할 수 없습니다. 행위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믿음이며, 죽은 정통(the dead orthodox)입니다!   
 
색안경들을 벗고서 보면 잘 보일텐데, 왜들 더듬고 헤매는지 모르겠습니다. 매일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주님 가신 고난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 이 시대에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모든 지체들에게 은혜와 평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