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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찬 자료 모음

[ #카발라 신비주의 ] 유대교 신비주의 카발에 대한 연구






아돌프 프랑크의 「카발라」 해설


아돌프 프랑크의 이 책은 유대교 신비주의의 주류를 이루는 카발라(‘전통’이란 뜻)를 상세히 해설한 것이다. 금세기에 카발라 연구로 명성을 얻은 게르숌 숄렘(Gershom Sholem)의 저서들이 나오기까지는, 사람들을 카발라를 이해하기 위해 이 책을 많이 읽었다. 그러나 지금이라고 해서 이 책의 가치와 권위가 줄어든 것은 아니다.
프랑크는 이 책에서 단순히 카발라사상을 소개하고 해설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카발라를 논의할 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여러 논점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 그 중 가장 핵심적인 카발라의 기원문제와 카발라 경전인 「조하르」와 「세페르 예치라」의 진실성 문제를 그는 충분한 자료를 검토하면서 예리하게 다루고 있다. 비록 숄렘은 프랑크와 견해를 달리하고 있지만, 프랑크는 카발라가 중세에 발생한 것이라고 보지 않으며, 그 기원을 훨씬 올려 잡는다. 카발라사상은 고대부터 전해져 온 것이며, 유대교 신학의 정수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구약성서에 대한 비유적, 상징적 해석은 카발라의 성서해석 방법의 특징이다. 특히 히브리 문자에 수치(數値)를 부여하여, 성서의 본문을 종횡으로 변형시켜 해석하는 방법은 일반적인 구약해석법에서는 매우 낯설고 기이하게까지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신학사상의 핵심으로 들어가면, 카발라를 유대교 신학의 정수라고 하는 말이 헛말이 아님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신론에서 이러한 특성이 두드러지는데, 이를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아도 중세 스콜라신학과 신비주의 신학의 내용이 고스란히 유대교적으로 표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카발라는 유대교 영지주의라고도 말할 수 있다. 실제로 카발라에서는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우주창조의 모순에 대해 말하고 있고, 영지주의의 구원자인 소피아(희랍어로 지혜의 뜻)를 히브리어로 바꾸어 호크마(히브리어로 지혜의 뜻)라고 표현하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카발라 사상을 통해 그리스도교 신학의 깊이를 탐구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탈리아의 휴머니스트였던 마르칠리오 피치노(Marcilio Ficino)와 삐꼬 델라 미란돌라(Pico della Mirandolla), 그리고 독일의 신비주의자 야콥 뵈메(Jakob Bohme)이다. 그 외에도 여러 그리스도인들이 이를 탐구하여 이른 바 ‘그리스도교 카발라’의 체계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프랑크는 이 책에서 이러한 카발라 사상을 신론, 세계관, 영혼론의 측면에서 고찰한 후, 플라톤 사상,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사상 및 필로의 사상과 비교함으로써 카발라 사상의 보편적 가치를 확인하고 있으며, 그리스도교 사상과도 비교하고 있다.
카발라는 어느 종교보다도 폐쇄적인 유대교의 한 복판에서 가장 보편적이고도 본질적인 신학사상을 꽃피웠다는 점에서 특별한 가치가 있다. 이들은 가장 유대교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비유대교적이다. 그래서 카발라를 연구하면, 이를 통해 편협한 유대교사상을 넘어서서 유대교신학의 깊이와 보편적 가치를 더욱 깊이 인식하게 될 것이고, 여러 다른 사상 및 종교에 대한 인식도 깊어질 것이다. 오래 전에 카발라연구가들이 그 일을 이미 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 번역본은 카발라를 철학적, 신학적으로 고찰한 책이다. 카발라 신학에 생소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겠지만, 이 책을 통해 유대교 신학의 깊이를 한껏 맛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영국의 사상가 카알라일이 “아무 데나 깊이 들어가라. 그러면 거기에는 노래가 있다”라고 한 말의 뜻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될 것이다. 더욱이 이른바 실천적 카발라(practical Kabbalah)의 측면에서 여러 가지 능력을 계발하기 위해 카발라를 이용하는 경향이 주로 알려져 있어서, 카발라의 진정한 신학적 가치가 오히려 훼손되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이 책을 통해 카발라 신학의 진정한 가치를 확인하기를 바란다.


카발라
카 발 라
히브리 종교철학












아돌프 프랭크
이 서 하 옮김
차  례


 영역자 서문.................................................................................................................3


 제 1 부  카발라 서적들...........................................................................................4
    제 1 장  카발라의 古代性.................................................................................6
    제 2 장 「세페르 예치라」의 진실성...........................................................13
    제 3 장 「조하르」의 진실성.........................................................................19
 제 2 부  교리의 분석..............................................................................................42
       
    제 4 장 「세페르예치라」...............................................................................42
    제 5 장 「조하르」: 카발라의 비유적 방법................................................52
    제 6 장 「조하르」: 카발라의 신론..............................................................55
    제 7 장 「조하르」: 카발라의 세계관..........................................................79
    제 8 장 「조하르」: 카발라의 영혼관..........................................................87


 제 3 부  카발라와 유사한 사상들.....................................................................103
    제 9 장  카발라와 플라톤 철학...................................................................103
    제 10장  카발라와 알렉산드리아학파.........................................................107
    제 11장  카발라와 필로의 사상...................................................................117
    제 12장  카발라와 그리스도교.....................................................................138
    제 13장  카발라와 갈대아-페르시아 종교.................................................143
 역자해설...................................................................................................................161





영역자 서문
존 C. 윌슨(John C. Wilson)
  이 책은 원래 불어로 쓰여져 La Kabbale; ou la philosophie religieuse des Hbreux (Paris, 1843 초판, 중판 1889, 1892)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책의 충실한 (영어)번역본이다. 저자인 아돌프 프랑크(1809-1893)는 히브리학자이자 동방학자로 여러 권의 저서를 냈고, 모세오경을 번역했으며, 생 마르땡(St. Martin)과 그의 스승 마르띠네스 빠스깔리스(Martines Pasqualis)에 대한, 프랑스 신비철학자들에 대한 연구를 출판했다. 그러나 이 모든 수고는 그의 부업이었다. 그는 꼴레쥬 드 프랑스에서 자연철학과 법철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생활비를 벌었다. 그는 이 분야에서도 많은 저작을 남겼다.
  이 책에서는 원서에 있던 너무 학문적인 요소들은 제거했다. 거기에는 히브리어로 된 각주와 카발라의 기원과 의미를 다룬 옛 문헌들을 검증한 서문이 포함된다. 이 학문적인 요소들을 참고하고자 하시는 분들은 1889년과 1892년의 프랑스판과 1927년에 뉴욕에서 간행된 I. 소스니츠(I. Sossnitz)의 영역본을 보시면 된다. 이 번역본은 소스니츠의 역본에 기초를 두고 있지만, 그것을 아주 상세히 검토한 것이므로 사실상 새로운 번역이다.


                        
             








                제1부 카발라 서적들


               제1장  카발라의 고대성
  카발라의 열렬한 숭배자들은, 카발라가 최초의 인간이 타락한 이후 그에게 원래의 고귀함과 복된 상태를 회복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천사들이 하늘에서 내려 준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이들은, 히브리인들에게 율법을 준 사람(모세-역주)이 시나이 산에서 40일간 머무는 동안, 하느님에게서 그것을 직접 받아, 70인의 장로들에게 전함으로써 성령의 선물을 그들과 나누었으며, 그들이 계속 그것을 구전하여, 마침내 에즈라가 율법과 함께 그것을 기록하도록 명령을 받았다고 추측한다. 그러나 구약성서의 모든 책들을 아무리 자세히 검토할지라도 극히 심오하고 순수한 비전(秘傳)이나 가르침의 내용을 조금도 밝혀내지 못한다. 그것은 오직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만을 위해 보존되어 있다.
  히브리인들은 초기 국가상태의 다른 모든 나라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 국가의 기원과 바벨론 포로기 사이에는 예언자, 제사장, 시인들 외에 진리의 전달자나 마음의 목자를 알지 못했다. 시인과 예언자는 서로 차이가 있지만, 이 둘은 혼동되기 예사였고, 제사장은 가르치지 않고 의식의 화려함을 통해 주의를 끌었다. 교사들-종교를 과학인 것처럼 가르치고 교리를 영감의 언어로 바꾸는 사람들, 한 마디로, 신학자들-에 대해서는 그 이름이나 존재에 대한 언급이 이 중 어느 시기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이 “전통의 교사들”을 의미하는 탄나임(Tannaim)이라는 일반적인 이름으로 처음 나타난 것은 그리스도교 시대가 되기 전 3세기 초(BC. 3C-역주)인데, 이는 성서에 명백하게 표현되어 있지 않은 모든 것이 “전통”이라는 새로운 권위의 이름 하에서 가르쳐졌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모든 교사들 중 가장 오래되고 가장 존경받는 이들 탄나임은 긴 역사를 지니고 있는데, 그 마지막 고리가 「미슈나」(Mishna)를 편집한 경건자 유다이다. 그는 선조들의 모든 말을 수집하여 후손들에게 전했다. 이 탄나임 중에는 랍비 아키바(R. Akiba)와 시메온 벤 요하이(Simeon ben Yohai) 및 그의 아들과 그 친구들이 있는데, 카발라의 가장 오래된 내용을 이들이 만들어 낸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스도교 시대의 제2세기 말에 유다가 죽은 후 새로운 교사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아마라임(Amaraim)이라 불리웠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에겐 (가르침에 대한-역주) 아무 권위도 없다고 여기고, 자신들이 탄나임에게서 배운 것을 단지 반복하기만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탄나임의 가르침들을 알렸던 것이다. 이 주석들과 새로운 전통들은 300여 년이 지나면서 엄청나게 많아져서 마침내 전통의 종결과 완성 즉 「게마라」(Gemara)란 이름으로 집대성되었다. 결국 이 두 개의 전승모음집(미슈나와 게마라-역주)이 우리가 먼저 탐구해야 할 것인데, 이들은 그것이 형성된 때부터 오늘날까지 종교적으로 보존되어 탈무드(Talmud)라는 이름으로 합쳐져 있다. 이들에 대한 연구는 카발라 체계의 밑바탕이 되는 사상을 탐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카발라의 기원이 되는 시기와 장소를 담고 있는 자료의 탐구라는 점에서라도 필요하다.
  「미슈나」에서(학기가 2장) 우리는 다음과 같이 놀라운 구절을 발견한다. “창조이야기(창세기)는 두 사람에게도 설명할 수 없고, 메르카바(Merkaba) 이야기는 한 사람에게도 설명할 수 없다. 그가 현명하여 스스로 지혜를 이끌어낼 수 있는 자가 아니라면”.
  탈무드의 한 랍비인, 랍비 제라(Zerah)는 훨씬 더 진지한데, 그는 장(章)의 제목조차도 극히 존엄하고 극히 신중한 사람-이를 원문 글자대로 번역하면, “내면에 고독으로 가득 찬 마음을 지닌 사람”이다-에게가 아니면 알려 줄 수 없다고 덧붙인다.
  분명히, 이는 창세기나 에스겔서 본문을 말하는 것일 리는 없다. 에스겔서에서는 예언자가 그발 강 둑에서 본 하늘의 전차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성서 전체는 모든 사람이 읽는 것이란 말이다. 기억할 수 없는 때부터, 전통을 주의깊게 준수하는 사람들은 성전에서 적어도 1년에 한 번은 성서를 통독할 의무가 있다. 모세 자신이 대개 모세오경이라고 이해하고 있는 율법을 연구하라고 권고했으며, 바벨론 포로 이후에는 에스라가 회중 앞에서 율법을 낭독했다(에스라 2:8). 위의 「미슈나」 인용구가 창조 이야기나 에스겔서를 유대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석하지 말라는 뜻이라고 볼 수는 없다. 문제는 그것의 비밀한 해석이거나, 또는 그 내용이 알려져 있다 하더라도 신비의 봉인(封印)이 찍힌 채 가르쳐진 교리이다. 그것은 원리에서나 형식에서나 일정한 형태가 정해져 있는 학문의 봉인인데, 그것이 몇 개의 장(章)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그 각 장 앞에는 그 장의 요약문이 붙어 있는 것으로 이를 알 수 있다.
  위의 인용구는 에스겔의 환상(vision)에 대한 것이 아니다. 에스겔의 환상은 몇 개의 장에 걸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 장, 정확히 말하면 제1장에만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환상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각각의 중요성은 서로 같지 않다. 즉 한 부분은 두 사람에게 가르쳐 질 수 있으나, 다른 부분은 완전히 공개가 금지되어 있으니, 한 사람에게도 알릴 수 없다. 그가 가장 혹독한 조건을 충족시킨다 하더라도 우리가 마이모니데스(Maimonides)를 믿는다면, -그는 비록 카발라에 문외한이지만, 카발라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창세이야기”라는 첫부분은 자연과학을 가르친 것이고, “하늘전차 이야기”라는 두 번째 부분은 신학에 대한 가르침을 의미한 것이다. 이 견해는 모든 카발리스트들이 받아들였다.
  이 신비하고도 성스러운 학문에 입문하기 위해서는, 지성과 높은 지위 뿐 아니라 상당한 나이가 있어야 했다. 이러한 조건들(현대의 카발리스트들도 물론 이를 준수하고 있다)이 충족된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반드시 이 엄청난 비밀의 짐을 수용할 만한 지성과 도덕적 능력이 있다고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 비밀이 그의 신앙과 종교적 계율준수에 위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 중 흥미있는 것을 탈무드 자체에서 볼 수 있는데, 비유적인 표현으로 되어 있어서, 뒤에 설명할 것이다.
    교사들이 가르쳤다. 네 사람이 낙원에 들어갔다. 그들은 벤 아자이(ben Azai), 벤 조마(ben Zoma), 아헤르(Aher) 그리고 랍비 아키바(R. Akiba)였다. 벤 아자이는 낙원을 한 번 둘러보고는 죽었다. 그에게는 성서의 이런 구절이 해당될 것이다. ‘주의 목전에는 그의 성도의 죽음이 값지도다’(시편 116:15). 벤 조마도 한 번 둘러보고는 미쳐 버렸다. 그와 같은 사람에 대해 성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네가 꿀을 찾거든 그것을 너무 먹고 토하지 않도록 충분할 만큼만 먹어라’(잠언 25:16). 아헤르는 낙원을 파괴했다. 아키바만이 평안히 들어갔다가 평안히 나왔다.
  이 구절을 그대로 받아들여 피안의 장엄함에 대한 외적인 묘사를 했다고 보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탈무드는 천국을 말할 때, 인용된 본문에 있는 것과 같이 완전히 신비한 표현은 결코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전설에 나오는 두 사람처럼, 어떤 사람이 죽기 전에 선택된 자를 위해 예비된 하늘의 권능을 보고서, 신앙과 이성을 상실했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가장 유명한 유대의 대가들과 같이, 네 명의 거장들이 들어간 낙원이란, 위에 말한 신비의 학문일 뿐이라고 하는 데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학문은 불신앙보다 더 치명적인 정신이상이나 탈선으로 이끌수도 있으므로, 지성이 약한 사람에게는 위험한 것이다.「게마라」가 탈무드에서 그토록 유명한 아헤르에 대해, 그가 ‘낙원을 파괴했다’고 한 것은 후자(탈선-역주)를 말한 것이다. 게마라에 의하면, 아헤르(그의 본명은 엘리샤 벤 아부아[Elisha ben Abua]이다)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지혜로운 교사들 중 하나였다고 하는데, 그의 이름이 아헤르로 바뀌었다(아헤르는 글자대로 하면 “다른”이란 뜻인데, 즉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것은 그가 겪은 변화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가 자신에게 치명적인 호기심에 이끌려 그 비유의 정원에 들어갔다가 나왔을 때, 그는 공공연히 불신자가 되어버렸다. 「게마라」에 의하면, 그는 악의 세태에 빠져버렸고, 도덕을 파괴했으며, 신앙을 배신하고, 타락한 생활을 했고, 심지어 유아살해의 비난을 받기까지 했다. 참으로 그의 오류는 어디에 있었던가? 그는 종교의 가장 중요한 비밀을 탐구하고는 어디로 가 버린 것인가? 「예루살렘 탈무드」는 아헤르가 두 개의 최고원리를 알았다고 분명히 기술하고 있다. 이 모든 이야기를 담고 있는 「바빌로니아 탈무드」는 우리가 이같은 사실을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 아헤르가 하늘에서 하느님 다음 가는 천사인 메타트론(Metatron)의 능력을 보았을 때, “최고의 권능이 둘 있는가 보다”라고 외쳤다고 전한다.
  우리는 이 문제에서 너무 오래 지체해서는 안된다. 더 중요한 다른 사실들을 인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적할 것은, 그 천사, 또는 메타트론이라 불리는 그 존재는 카발라에서 매우 커다란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가시적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그이다. 그는 우주의 모든 계(界, spheres)와 모든 행성과 천체를 다스린다. 물론 그는 이 모든 것을 통솔하는 천사들도 다스린다. 그의 위에는 하느님의 본질의 지성적 형상들과, 너무 순수하여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력을 행사할 수 없는 영들 외에 아무 것도 없다. 또한 그의 이름이 지닌 수치(數値)는 전능자의 이름이 지닌 수치와 같다는 것도 알려져 있다.
  우리가 곧 입증하겠지만, 카발라는 분명히 이원론보다 일원론에 훨씬 더 가깝다. 그러나 하느님의 지성적인 본질이 세상을 지배하는 권능과 분리되어 있다는 카발라의 비유적인 주장은 「게마라」에 묘사된 이단설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같은 자료에서 마이모니데스의 고찰이 붙어 있는 마지막 인용문은 우리의 요점을 완전히 드러내 주고 있다. 유대교 최초의 신학자들인 탄나임 중 몇몇은 말로써, 즉 구두로 일종의 철학, 종교적 형이상학을 가르쳤다는 것이다. 탈무드가 우리에게 말해 주는 바로는, 고대에는 하느님의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세 가지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즉 저 유명한 테트라그람마톤(Tetregrammaton) 또는 네 글자로 된 이름이라고 하는 것과, 성서에는 없는 두가지 이름, 즉 첫째는 12글자로 된 이름과 둘째는 42자로 된 이름이 그것이다. 첫번째 이름은 대중에게는 금지되었지만, 각 학파에서는 자유롭게 그 이름이 쓰였다. 본문은 말하기를, “현인들은 그 이름을 아들들과 제자들에게 매주 한 번씩 가르쳤다”고 한다.
  12글자로 된 이름은 원래 훨씬 더 널리 유포되어 있었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불경건한 자들이 늘어나자 그것은 제사장들 가운데 가장 신중한 자들만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그들은 그 이름을 축복기도 중에 그 형제들에게 작은 소리로 암송해 주어야 했다.” 끝으로 42글자로 된 이름은 신비 중의 가장 거룩한 신비로 여겨졌다. “그것은 신중하고, 나이가 지긋이 들고, 성질이 거칠지 않고, 무례하지 않고, 완고하지 않고, 주변사람들에게 온후한 사람에게만 가르쳤다.” 탈무드는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이 비밀의 가르침을 받아 그것을 조심스럽게 순수한 마음으로 지킨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과 인간의 친애함을 얻을 것이며, 그의 이름은 존경받고, 그의 지식은 잊혀지지 않게 보호될 것이며, 그는 우리가 사는 세상과 내세라는 두 개의 세상을 상속받을 것이다.“
  마이모니데스는 적절하게도, 어떤 언어에도 42글자로 된 이름은 없으며, 알파벳에 모음이 없는 히브리어에는 물론 없다고 지적한다. 그는 결론짓기를, 42글자가 몇 개의 단어를 이루고 있어, 각 단어가 지고하신 분에 대한 결정적인 개념이나 근본적인 특질을 표현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그 모두가 합해 하느님의 본질에 대한 참된 정의를 전하는 것이라고 했다. 마이모니데스는 계속하여 이렇게 말했다. 이 이름 자체 안에 연구할 내용이 들어 있어, 그에 대한 지식이 가장 현명한 자에게만 맡겨졌다고 할 때, 이는 분명히 하느님의 본질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그 분의 유일성과 만유의 독특성을 더 잘 설명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물론 4글자로 된 이름의 경우에도 그렇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성서에 그토록 자주 나타나고, 성서 자체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고 미묘한 정의를 내린 이름이, 현자들이 1주일에 한번 소수의 선택된 제자들의 귀에 속삭여지는 비밀이 될 수 있겠는가? 탈무드가 하느님의 이름에 대한 지식이라고 한 것은, 신학이나 형이상학의 작은 일부일 뿐이다. 마이모니데스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이것이 망각에서 보호된다고 한 이유이다. 왜냐하면 활동적인 지성, 즉 이성이 자리잡은 개념에게는 망각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깊이 있는 연구가요 공인된 탈무드의 대가이자, 그에 못지 않게 자유사상가였던 사람이 상식을 가지고 제시한, 이러한 고찰을 배척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관찰을 더 추가하고자 한다. 그것은 상식적 견해로 보기에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우리의 연구가 다루고 있는 개념체계에서는 가치있는 일이며,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다. 신성한 히브리 이름들과 카발라의 10세피로트(Sefiroth)들의 이름들과, 여기에 불변화 접속사“와우”(v)를 추가하여 그 글자들의 수를 계산하면 정확히 42개가 된다. 선택된 소수들에게조차 그토록 외경심을 갖고 제한되었던 세 번째의 신성한 이름이 이것이 아닐까? 여기서 마이모니데스의 모든 주석이 완전히 정당성을 얻는 것이다.
  우선 이 42글자들은 하나의 이름이 아니라 몇 개의 단어를 형성한다. 다음으로 이 각 단어들은 적어도 카발리스트들의 견해로는 하느님의 본질적인 특성, 또는, 카발리스트들에겐 마찬가지 얘기지만, 필요한 존재형태 중의 하나를 표현하고 있다. 카발라학과 「조하르」(Zohar), 그리고 조하르 주석가들에 따르면, 이 모든 단어들은 다 합하여, 이해할 수 있는 만유의 최고원리에 대한 가장 정확한 정의를 나타낸다. 일반 사람들의 신앙과 큰 차이가 있는 그러한 하느님 개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입문자 집단에 한정시키는 극도의 신중함을 보인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당분간 이 점을 내세우지 않을 것이며, 지금도 그 중요성을 결코 과장하고 있지 않다. 우리는 단지 인용구에서 나타난 증거를 제시한 것으로 만족한다.
  그런데 「미슈나」가 편집되었을 때, 창조와 하느님의 본질에 대한 비밀한 가르침이 있었다. 「미슈나」를 연구하고 분절(分節)하는데 대한 합의가 있었고,「미슈나」라는 이름은 그것을 알지 못했던 사람들에게조차 일종의 종교적 외경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이 가르침이 얼마나 오래 존속했을까? 만일 그것을 정확하게 확정할 수 없다면, 그 기원을 뒤덮은 짙은 그림자가 언제 생겼는지를 이야기할 무슨 방법이 있을까? 이것이 우리가 이제 대답해 보려고 하는 문제이다.
  가장 믿을만한 역사가들의 견해에 의하면, 「미슈나」의 편집은 늦어도 창조 후 3949년, 그리스도 탄생 후 189년에 끝났다. 경건자 유다가 자신의 선인(先人)들, 즉 탄나임이 자신에게 전해 준 교훈과 전통을 단지 수집하기만 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창조와 메르카바에 대한 비밀을 경솔하게 드러내지 말라고 한 인용구는 그 구절이 들어 있는 책보다 더 오래된 것이라고 분명히 결론지을 수 있다. 우리가 이 말들이 누구의 말인지 아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 자체가 더욱 이 말들이 오래된 것임을 입증해 준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단지 한 사람의 견해를 표현한 것이라면, 그 말들이 율법적인 권위를 지니지 못했을 것이고, 그런 상황에서 보통 그렇듯이, 그 말을 한 사람의 이름이 붙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 가르침 자체가 그것을 드러내지 말라는 율법보다 필연적으로 먼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일반인들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학자들과 교사들 사이에 전파될 위험이 있다고 인식되기 이전에, 이미 알려져 권위를 얻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모한 대담성을 발휘하지 않더라도, 그것의 성립연대가 늦어도 기원 후 제1세기 말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이는 정확히 아키바와 시메온 벤 요하이가 살았던 시대인데, 카발리스트들은 카발라의 가장 중요하고, 가장 유명한 저서들이 이들에 의해 쓰여졌다고 주장한다. 「이드라 랍바」(Idra Rabba)-고대의 유명한 조하르의 단편-가 시메온 벤 ?鄂舅缺? 절친한 친구이자 가장 열렬한 제자 중의 하나라고 밝힌 칩포라의 랍비 요세(R. Jose of Zippora)도 이 세대에 속한다. 우리가 대부분의 인용구를 끌어오고 있는 탈무드의 글들은 거룩한 메르카바의 지식이 분명히 그에게서 기원했다고 말하고 있다.
  카발라의 책은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카발라의 개념들이 오래된 것임을 증거하는 권위있는 글 중에는 옹켈로스(Onkelos)가 쓴 모세오경의 갈대아어 번역판이 있다. 이 유명한 번역은 하느님의 계시로 여겨져 대단한 존숭을 받았다. 바빌론 탈무드에 의하면,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기록된 율법과 구전(口傳)의 율법을 받았을 때, 이것도 함께 받았으며, 그것이 전승에 의해 탄나임시대까지 내려왔고, 옹켈로스는 단지 그것을 베끼는 영광을 누렸을 뿐이라고 추정한다. 수많은 현대신학자들은 그리스도교의 기초가 옹켈로스에게서 놓여졌다고 믿는다. 그들은 특히 멤라(Memra)라는 말 속에서 하느님의 제2위격(位格)을 인식하라고 주장하는데, 멤라는 실제로 “말” 또는 “생각”을 의미하며, 번역자(옹켈로스-역주)가 어디서나 여호와의 이름을 대신하여 쓴 말이다. 
  아주 명백한 것은, 번역판의 정신이 「미슈나」, 탈무드, 표준적 유대교, 심지어 모세오경 의 정신과 모순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그것은 신비주의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 가능하고 중요한 것이면 어디서나 사실 또는 형상이 개념으로 대체되고, 글자 그대로의 의미를 희생시켜 영적 의미를 드러내며, 하느님의 특질을 묘사하기 위해 신인동형론(anthropomorphism)이 사용되고 있다.
  죽은 문자를 숭배하여 우상숭배로 퇴락해 버린 시대, 사람들이 율법의 구절들과 단어들과 글자들이나 세며 인생을 보냈던 시대에, 공적인 교사들과 합법적인 종교지도자들은 엄청나게 증가한 외형상의 종교의식 때문에 의지 뿐 아니라 지성마저 파괴해 버리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 모든 물질적이고 현실적인 사고방식에 대한 이러한 혐오는 높은 이상주의를 위해 문법과 역사를 희생시켜 버리는 습관과 결부되어, 신비주의의 모든 특성과 주장을 지닌, 그리고 분명히 훨씬 오래된 비밀한 가르침이 있음을 분명히 보여 주었다. 끝으로 카발리스트들은 그들의 목적을 이루고, 그들 자신의 개념을 계시의 말들 속에 짜 넣기 위해, 때로 다소 비합리적인 수단을 사용하곤 했다. 그러한 수단 중의 하나가 글자들의 수치를 바꿈으로써, 또는 좀 더 나은 방식으로는, 일정한 계획에 따라 한 글자를 다른 글자로 바꿈으로써, 새로운 알파벳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이러한 방법은 옹켈로스보다 오래된 한 번역판에서 뿐 아니라 탈무드에서도 자주 사용되었다. 옹켈로스보다 오래된 번역판이란 요나단 벤 우찌엘(Jonathan ben Uzziel)의 아람어 판을 말하는데, 그는 노(老) 힐렐(Hillel the Aged)과 동시대인이며 그의 제자였고, 헤롯의 통치 초기에 대단한 권위를 가지고 가르쳤던 인물이었다.
  확실히, 그러한 과정은 애매하게도 매우 다양한 개념을 낳을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인공적인 언어를 발명할 수 없으며, 적어도 대중에게서 그들의 사상을 숨기기로 결심하지 않는 한 그 언어의 열쇠를 고의로 간직할 수 없다. 더욱이 탈무드가 비슷한 방법을 자주 사용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가 묘사해 온 방식, 그리고 우리가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믿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다. 따로 떼어 생각한다면, 이러한 사실이 별로 특별한 가치는 없을 테지만, 우리가 위에 묘사한 것들과 관련해 보면, 그것은 무시할 수 없는 일이다. 이들을 함께 비교하여 고찰해 보면, 기원 후 1세기 말 이전에, 유대인들 사이에는 「미슈나」, 탈무드 경전들과 구별될 수 있는 심오하고 고귀한 학문이 유행하고 있었으며, 그것은 철학이 필요해서 뿐만 아니라, 사유와 독립심을 갈망하여 나타난 신비적 가르침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과 경전의 통합적 권위를 더욱 높이고자 했던 신비교설이다.
  이 교설의 수호자들을 이제부터 서슴없이 카발리스트들이라 부를 것인데, 그들을 에세네파와 혼동해서도 안되고 그럴 수도 없다. 에세네파는 훨씬 더 이전부터 알려져 있었으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통치 이후까지도 얼마간 그 관습과 신앙을 유지하고 있었다. 사실 우리가 이 점에 대해 신뢰할 만한 유일한 저술가들인 요세푸스와 필로를 이야기한다면, 이 유명한 교파의 목표는 본질적으로 도덕적이고 실천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일종의 평등과 형제애를 가르치고자 애썼으며, 이는 후일 그리스도교의 창시자와 사도들이 아주 놀랍도록 자세히 설파한 것이다. 반면에 카발라는, 아주 오래된 자료에 따르면, 완전히 사변적인 학문이며, 창조와 하느님의 본질의 비밀을 밝히고자 했던 것이다.
  에세네파는 중세의 신앙공동체와 아주 유사한 조직사회였다. 그들의 생활방식은 그들의 정서와 이념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더우기 그들은 여인이든 어린이든 순수한 삶으로 자신을 구별지은 모든 사람들을 그들 가운데 받아들였다. 카발리스트들은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출판에 의해 그들의 비밀이 드러나 버린 시기까지, 언제나 자신들을 신비로 감싸고 있었다. 그들은 아주 가끔씩, 그것도 수많은 신중한 고찰을 거친 후, 몇몇의 새로운 신입자들을 위해 문호를 반쯤 열였는데, 그 신입자들은 언제나 지성적인 엘리트들 중에서만, 충분히 나이가 들어 신중함과 지혜를 보증할 만한 사람들 중에서만 선발되었다.
  끝으로, 에세네파는 안식일 준수에서 지나치게 바리새적이기까지 했지만, 아무 두려움 없이 전통을 공개적으로 거부하고, 종교의례보다 도덕성을 명백히 선호했다. 그들은 심지어 모세오경이 명한 희생과 의식을 모두 거부하기까지 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자들과 이슬람신자들 중의 카르마티안(the Karmathian)처럼, 카발라의 거장들도 그들 입장에서는 모든 종교의례의 실천을 고수했다. 그들은 대개 전통을 공격하지 않았으며, 그들 스스로 전통을 지켰다. 우리가 이미 지적한대로, 그들 중 일부는 가장 존경받는 미슈나학자들에 속했다. 우리는 그들이 후에 이러한 신중한 습관을 포기하는 일이 아주 가끔 있었다는 점을 덧붙일 수는 있다.


  제2장 세페르 예치라(Sefer Yetzirah)의 진실성
  이제 우리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카발라 체계가 처음 형성된 기초가 된다고 보는 원전을 다루게 되었다.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온 서적들의 제목을 보면, 이런 류의 책이 상당히 많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우리는 현재까지 보존되어 있고, 그 오래됨과 중요성으로 우리의 관심을 끄는 책들만을 고찰할 것이다. 그러한 책들 두 권이 창세설화와 거룩한 메르카바에 대한 탈무드이 개념과 완전히 일치한다. 하나는 「창조의 책」(Book of Formation, Sefer Yetzirah: 필자가 이하에서「창조의 책」과「세페르 예치라」를 수시로 섞어 쓰고 있어서 역자도 있는 그대로 섞어 번역했음-역주)이라 하는데, 물리학의 체계는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일종의 우주론을 담고 있다. 이 우주론은 모든 현상을 제1원리의 직접적인 결과로 설명하는 습관이 탐구정신을 질식시켰던 시기와 나라에서 나올 법한 그러한 우주론이다. 결국 외부세계에서 인식된 어떤 일반적이고 피상적인 관계가 자연에 대한 학문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또 다른 책은 「조하르」(Zohar)라고 불리는데, “광명”(brightness)이란 뜻이며,「다니엘서」의 다음 구절에서 나온 제목이다. “현명한 사람은 하늘의 밝음같이 빛날 것이다” 이 책은 특히 하느님, 영들, 인간의 영혼, 한 마디로 말해서 영적 세계를 다룬다. 이 두 권의 책은 가치와 중요성에서 어느 것에도 비할 수 없다. 내용이 더 풍부하고, 더 포괄적이며, 또한 난해함으로 가득차 있는 「조하르」가 더 중요하지만, 「세페르 예치라」가 더 오래된 책이다.
  그 의미도 연대도 확정되지 않은 탈무드 구절들이 「세페르 예치라」가 오래되었음을 입증하는 역할을 해왔다. 우리는 이 구절들이 야기한 논쟁들과 전설들 뿐 아니라 이 구절들 자체도 무시할 것이다. 그러한 논쟁으로 해서 이 책의 참된 모습에 대한 우리의 시야가 제약되기 때문이다. 그 구절들은 이 책의 성격과 심원한 기원을 보여 주기는 것으로 족하다. 
  1.  이 책이 담고 있는 체계는 그 제목이 전해주는 개념과 모든 면에서 일치한다. 그 최초의 명제에서 그렇게 확신할 수 있다. “31개의 놀라운 지혜의 길에 의해, 영원하신 분,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 살아계신 분, 전능하신 분, 영원 가운데 거하시는 가장 높으신 하느님, 그 이름이 심오하시고 거룩하신 분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
  2.  이 책이 창조의 사역(使役)을 설명하는 방식과, 숫자와 글자에 부여한 중요성을 보면, 이 원리가 후에 무지와 미신에 의해 어떻게 남용되었는지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언급한 우화들이 어떻게 퍼졌으며, 숫자와 글자에 자연질서를 변화시키는 힘을 부여한 이른바 실천적 카발라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아는 데 도움이 된다.
  이 책의 형식은 단순하고도 고상하다. 과시나 논쟁의 모습과는 닮은 데가 조금도 없다. 다만 규칙적으로 금언(金言)이 배열되어 있는데, 그것도 고대의 신탁처럼 모두 간결하다.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후대에 영혼을 지칭하는 데만 사용된 용어가 모세오경과 구약성서 전체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살아 있는 사람의 몸을 지칭하는데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책에는 외부에 기원을 가진 단어가 많이 나온다. 일곱 행성의 이름과 몇 번 나오는 천상의 용의 이름은 분명히 갈대아인들의 학문과 언어의 일부인데, 갈대아인들은 바벨론 포로기간에 히브리인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탈무드와 철학과 과학을 다루는 좀 더 근대의 히브리어 저작에서 자주 쓰이는, 순수하게 희랍적이고 라틴적이고 아랍어적인 표현은 「세페르 예치라」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일반적인 규칙으로서, 그리고 감히 단언하건대 틀림없는 규칙으로서, 이런 특성을 지닌 모든 작품은 희랍문명과도 아랍문명과도 무관하며, 그리스도교가 탄생하기 이전 시대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교 이전의 것이라고 보기를 주저하지 않는 이 저술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와 철학의 흔적이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인정된다.
  「세페르 예치라」는 첫 번째 명제를 기술하고 나서, 세 개의 용어가 있음을 덧붙인다. 즉 세는 것, 세어지는 것, 세는 행위 자체가 그것이다. 가장 오래된 주석가들이 번역한 바로는 주체, 객체, 고찰 또는 사유라는 행위이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제12권에 있는 유명한 구절을 상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지성(the intelligence)은 지성적인 것(the intelligible)을 파악함으로써 자신을 이해하고, 바로 그 이해와 인식(comprehension and cognition)이라는 행위를 통해 지성적인 것이 된다. 그러므로 지성과 지성적인 것은 동일하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용어는 후대에 본문에 첨가된 것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 용어들은 그 앞의 명제들과도 뒤의 명제들과도 아무런 관련성이 없기 때문이다. 이 용어들은 이 책의 다른 부분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하느님이 지혜로 세상을 창조할 때 쓰인 32가지 방법을 뜻하는 10개의 숫자와 22개의 글자(히브리어 알파벳의 수-역주)의 용법은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끝으로 이 용어들이 왜 물질세계의 여러 부분 사이의 관계만을 다루는 글에 나오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만투아 판(the Mantua edition)에 인쇄되어 있는 두 개의 사본 -하나는 책 뒤에 있고, 하나는 여러 주석들 중간에 있다- 사이의 차이는, 결코 어떤 비평가들이 주장하는 것만큼 크지는 않다. 공정하고 상세하게 비교해 보면, 두 사본은 중요하지 않은 몇 가지 점에서만 차이가 있고, 그런 차이는 고대의 모든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고대의 작품들은 그것이 오래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필사자의 부주의와 무지, 그리고 주석가들의 무모함으로 인한 훼손을 수 세기에 걸쳐 겪어 왔던 것이다. 사실 두 자료 모두 기본개념이 같고, 같은 체계를 설명하고 있다. 두 사본 모두 같은 방식으로 장(章)이 나눠져 있고, 장의 수가 같으며, 같은 주제에 대해 같은 순서로 장이 배열되어 있다. 더욱이 같은 개념이 같은 용어로 표현되어 있다. 차이점은 여러 명제들의 수와 위치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한 사본은 명제가 반복되어 있는데, 다른 사본은 명제가 요약되어 있고, 한 사본은 명제가 연결되어 있는데, 다른 사본은 나뉘어져 있다. 끝으로, 한 사본이 다른 사본보다 단어와 의미가 더 분명하다. 
  마지막에 말한 차이점을 보이는 구절은 오직 하나 뿐이다. 제1장 끝에 10개의 숫자와 일치하는 우주원리가 열거되어 있는데, 한 사본은 무엇보다 먼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영이 온다고만 말하고 있는데 대해 다른 사본은 이 살아 계신 하느님의 영이 성령이며, 이는 동시에 영과 음성과 세계(Spirit, Voice and World)라고 부언하고 있다. 분명히 이 개념은 가장 중요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이는 덜 분명한 사본에서 누락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곧 입증하겠지만, 그것은 전 체계의 기초이자 결과이다. 더욱이「창조의 책」은 10세기 초에 랍비 사아디아(Rabbi Saadia)에 의해 아랍어로 번역되고 해설되었는데, 사아디아는 고상하고 논리 정연하며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그는 「창조의 책」을 인간지성의 주요하고도 가장 오래된 기념비 중 하나라고 보았다. 그의 이러한 증언을 신뢰하는 것이 부적절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사아디아를 계승한 12세기와 13세기 주석가들이 똑같은 확신을 표명했음을 지적해 두어야겠다.
  고대의 모든 저작들처럼, 「세페르 예치라」는 제목과 저자명이 없고, 다음과 같이 이상한 말로 끝나고 있다.
   족장 아브라함이 이 모든 것의 의미를 숙고하고, 검토해 보고, 탐구하여 그 의미를 파악했을 때, 우주의 주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시어 그를 친구라 부르시고, 그와 그 후손과 영원한 계약을 맺으셨다. 그 때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믿었다. 그것이 그에게 의로운 행위로 여겨졌다. 그래서 하느님의 영광이 그에게 임했다. 이 구절은 아브라함에 대한 것이다. ‘내가 너를 네 어머니의 태(胎) 안에 짓기 전에, 나는 너를 이미 알았노라.’
  이 구절은 현대의 창작이라고 해석할 수 없다. 아주 약간 변형된 모습으로, 이 구절은 만투아판의 두 사본에 모두 존재하며, 가장 오래된 주석서들에도 나온다. 우리의 견해로는, 저자들이 「창조의 책」에 대한 관심을 놓이기 위해, 이 책이 히브리인들의 최초의 족장이 알았던 것, 그에게 한 분이시자 전능하신 하느님의 개념을 알게 했던 것과 똑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아브라함 자신이 이 책의 저자라고 여겨져 왔다. 그의 이름은 이 책에서 종교적인 존경심을 가지고 언급된다. 「세페르 예치라」에 대한 모제스 보트릴(Moses Botril)의 주석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유일신론의 원리를 믿지 않던 당시 사람들에 반대해 이 책을 쓴 것은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그 분에게 평안이 있기를!)이었다. 이는 적어도 랍비 사아디아(의인을 기억하는 일은 복이 있도다!)께서 그의 책「철학자의 돌」(The Philosopher's Stone)에서 주장하신 바이다. 그의 말에 의하면, ‘갈대아의 현자들이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신앙 때문에 그를 공격했다. 갈대아의 현자들은 세 파(派)로 나뉘어 있었다. 첫 번째 파는, 우주가 서로 대립하는 두 개의 원초적 원인에 종속되어 있으며, 하나의 원인이 만든 것을 다른 것이 분주히 파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견해는 이원론자들의 견해와 일치한다. 그들은 선의 창조자와 악의 창조자 사이에는 공통된 것이 아무 것도 있을 수 없다고 하는 원리에 자기들의 이론을 두고 있다. 이 두 개의 원리가 서로 상대의 활동을 불가능하게 해서, 이런 식으로는 아무 것도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두 번째 파는 상황을 결정 짓는 세 번째 원리를 인정하게 되었다. 끝으로, 세 번째 파는 태양 이외의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았으니, 그들은 태양을 생사의 유일한 원리라고 여겼다.’
  누구나 존경하는 사아디아의 당당한 권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 견해를 따르는 사람들은 없다. 족장 아브라함의 이름은 그 후 오랫동안 아키바로 대체되어 왔다. 아키바는 가장 열정적인 전통고수자의 한 사람이요, 자기 조국의 자유를 위해 몸바친 순교자로서, 그가 만일 아테네와 로마의 고대국가에서 활약했다면 후대에 의해 가장 존경할 영웅들 가운데 포함되었을 것이다.
  아키바는 「세페르 예치라」의 저자로서 아브라함보다는 덜 의심스럽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이론도 마찬가지로 근거없는 것이라고 믿는다. 탈무드 도처에서 아키바를 거의 신적인 인간으로 표현하고, 그를 모세보다 뛰어난 인물이라고까지 높이고 있지만, 어디에서도 그가 메르카바나 창세학(the Science of Genesis)의 대가 중 하나로 보지는 않는다. 우리는 어디에서도 그가 「창조의 책」이나 그런 류의 다른 책을 썼다는 추측을 보지 못한다. 반대로, 그는 하느님의 본성에 대한 아주 고상한 개념을 지니지 않았다고 몹시 비난받았다. 갈릴리 사람인 랍비 요세(Rabbi Jose)가 아키바에게 말했다. “랍비 아키바여, 도대체 당신은 언제까지 계속 주님을 모독할 작정이오?” 그에 대한 열정은, 그가 전통을 중요하게 여기고, 모든 일상생활에 필요한 규칙을 전통에서 열심히 이끌어내고, 40년 동안 정열적으로 가르침을 펴고, 또 아마도 영웅적으로 죽은 데서 나온 산물이다. 아키바의 제자라고 하는 2만 4천명은, 한 사람 이상에게 카발라의 중요한 비밀을 드러내면 안된다는 「미슈나」의 금지사항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다.
  현대의 몇몇 비평가들은 「세페르 예치라」라는 같은 제목의 다른 책이 두 권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 중 하나는 족장 아브라함이 지은 것인데 오래 전에 사라졌고, 다른 하나는 훨씬 현대의 것인으로 지금 남아 있는 책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조잡한 무지로 인한 것이다. 모리누스(Morinus)는 이 견해를 16세기 연대기 작가에게서 벌어왔는데, 그 작가는 아키바에 대해 말하면서 이렇게 썼다. “아키바는 카발라를 존중하여 「창조의 책」을 쓴 사람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쓴 또 다른 「창조의 책」이 있으며, 이에 대해서는 랍비 모세스 벤 나아만(Rabbi Moses ben Nahman)이 놀랍고도 위대한 주석을 썼다.”
  13세기 말에 쓰여져, 위에 언급한 연대기가 나온 몇 년 뒤에 만투아판으로 출판된 이 주석은 분명히 현재 우리 손에 있는 책과 관계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가진 책의 본문을 충실히 보존하고 있으며, 16세기 역사가가 그것을 읽지 앉은 것은 분명하다. 더욱이 아브라함을 이어 「세페르 예치라」를 저술한 사람으로 아키바의 이름을 든 최초의 인물은 14세기의 카발리스트였던 이사끄 드 라뜨(Issac de Lattes)였다.  그는 「조하르」 서문에서 이렇게 묻는다. “아브라함에서부터 구전되어 온 책을 기록해도 좋다고 누가 랍비 아키바에게 허락했는가?” 이 질문은 분명히 오직 하나의 「세페르 예치라」만이 있음을 암시한다. 이렇듯 「창조의 책」의 저자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의 이름을 가리고 있는 베일을 벗길 사람은 우리도 아니다. 우리는 심지어 우리가 지닌 무력한 방법으로 그것이 가능할지 의심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 점에 대해 불확실하다고 비난받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결코 우리가 밝혀 온 명제들까지 불확실하게 하지는 않는다. 그 명제들은 순수하게 철학적인 탐구를 위해서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제3장 조하르의 진실성
  조하르, 또는 「빛의 책」은 카발라의 우주적 암호로 훨씬 더 흥미롭지만 또한 훨씬 더 어렵다. 그것은 모세오경에 대한 온건한 주석의 형태를 취하여, 영적인 본질에 대한 모든 문제를 완전히 독자적인 태도로 다루고 있는데, 때로는 현대 최고의 지성조차도 긍지를 느낄 만큼 높은 가르침에까지 나아간다. 그러나 그러한 높은 지성을 견지하는 경우는 드물고, 극도의 무지와 미신을 드러내는 언어와 감상(感傷)과 개념에 빠지는 일도 자주 있다. 성서시대의 힘찬 단순성과 순진한 열정을 볼 수 있는가 하면, 직접 중세를 접하게 하는 인명, 사실, 보고(報告), 습관 등도 볼 수 있다.
  사상과 형태의 이러한 불균등성, 광범한 여러시대에서 말미암은 여러 특성들의 이 환상적 혼합, 그리고 마지막으로 두 개의 탈무드(「베빌론 탈무드」와 「예루살렘 탈무드-역주)가 「조하르」에 대해 아무 말도 없는 점과 13세기 말까지 조하르에 대한 자료가 없는 점, 이 모든 것이 이 책의 기원과 저자에 대해 참으로 많은 견해를 낳게 했다.
  「조하르」의 기원과 오래됨에 대해 사람들이 말한 모든 것은 두 사람의 저자들이 편견없이 요약한 바 있다. 아브라함 벤 솔로몬 자쿠토(Abraham ben Solomon Zacuto)는 그의 세페르 유하신(Sefer Yuhasin:「족보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조하르」의 빛은 세상을 비추고 있으며, 그 책은 율법과 카발라의 가장 심오한 신비를 담고 있다. 「조하르」가 시메온 벤 요하이의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하더라도 그의 작품이 아니다. 「조하르」는 그의 말에 기초하여, 그의 제자들이 편집했다. 다음에 그들은 자신들의 과제를 다른 제자들이 계속하도록 맡겼다. 「조하르」는 「미슈나」와 구전된 율법의 모든 견해와 개념을 알만큼 오래 산 사람들이 썼기 때문에, 결국 진리와 조화를 이루었다. 그 책은 랍비 모세스 벤 나아만과 랍비 아셰르(Rabbi Asher)가 죽은 후에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이 책에 대해 알고 있었다.
  유명한 연대기인 「전통의 사슬」(The Chain of Tradition)의 저자인 랍비 게달리아(Rabbi Gedalia)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창조 후 5500년경(1290 AD),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기를, 예루살렘 방언[아람어 방언]으로 쓰여진 「조하르」의 모든 부분은 랍비 시메온 벤 요하이에 의해 쓰여졌으나, 신성한 언어[히브리어]로 쓰어진 모든 부분은 그가 쓴 것이 아니라고 했다. 다른 사람들은 단언하기를, 랍비 모세스 벤 나아만이 거룩한 땅(이스라엘을 말함-역주)에서 그 책을 발견하여 카탈로니아(Catalonia)로 보냈고, 거기서 그 책이 아라곤(Aragon)으로 보내져 모세스 데 레온(Moses de Leon)의 손에 들어갔다고 했다. 결국 거기서 학자인 모세스 데 레온이 이 모든 주석을 고안해 내어 랍비 시메온 벤 요하이와 그 친구들의 이름으로 출판하여, 학자들로부터 이익을 이끌어내려 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생겼다. 그가 가난하고 빚에 쪼들려서 그렇게 했다는 말까지 덧붙여졌다...  내가 관심을 가지고 살펴 본 범위 내에서는, 이러한 견해는 아무 근거가 없다. 반대로 나는 랍비 시메온 벤 요하이와 그의 경건한 친구들이 이 모든 것과 그 이상의 것을 참으로 말했다고 믿는다. 그 당시 그것들은 제대로 편집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긴 시간이 지나서야 따로따로 있던 부분들이 수집되어 순서가 정해졌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리의 스승이신 경건자 유다가「미슈나」를 편집했을 때도 그러했기 때문이다. 미슈나의 여러 사본들은 처음에 사방으로 흩어져 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 방법으로 랍비 아쉬(Rabbi Ashi)도 「게마라」를 수집했다.
  요컨대, 저자 문제에 대해서는 세 가지 답변이 있다. 어떤 학자들은, 히브리어로 쓰여진 몇몇 구절을 제외하면 -이 구절들은 오늘날 알려져 있는 어떤 사본이나 어떤 판본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조하르」는 전적으로 시메온 벤 요하이의 작품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학자들은 「조하르」를 모세스 데 레온이라는 이름을 쓴 자의 작품이며, 13세기말이나 14세기 초 이전의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한다. 또 다른 학자들은 이 극단적인 두 설을 화해시키려고 노력하여, 시메온 벤 요하이는 자기 가르침을 구두로 전하는 데 만족했으며, 제자들이 암기하거나 노트에 기록한 그의 말들이 그의 사후 몇 세기가 지나기까지 「조하르」라는 책으로 모아지지 않았다고 가정한다.
  첫 번째 설은 글자 그대로 본다면, 진지하게 논박할 가치가 별로 없다. 먼저 그 기초가 될만한 사실을 탈무드에서 살펴보자.
  어느날, 랍비 유다, 랍비 요세, 랍비 시메온이 만났다. 유다 벤 게림이라는 사람이 곁에서 있었다. 랍비 유다가 [대화를] 시작하며 말했다. ‘이 나라[로마]의 작품들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들은 다리를 만들고, 시장과 공중목욕탕을 만들어 놓았다.’ 랍비 요세는 침묵을 지켰지만, 랍비 벤 요하이가 대답했다. ‘그들이 지은 것은 무엇이든지 자신들의 관심에서 지은 것이오. 창녀들을 끌어들이려고 시장을 만들고, 자신들의 쾌락을 위해 공중목욕탕을 만들고, 세금을 물리려고 다리를 만들었소.’ 유다 벤 게림이 밖에 나가 자신이 들은 것을 이야기했다. 그 소식이 케사르[로마정부]의 귀에 들어갔다. 케사르는 다음과 같은 판결을 내렸다. ‘유다는 로마정부를 칭찬했으므로 작위를 올릴 것이요, 요세는 침묵을 지켰으므로 키프러스로 유배할 것이요, 시메온은 정부를 비방했으므로 사형에 처할 것이다.’ 랍비 시메온은 아들과 함께 즉시 연구하는 집(일종의 학교 내지 연구소-역주)으로 숨었고, 그의 아내가 매일 빵 한 조각과 물 한 그릇을 가져왔다. 그러나 체포령이 더욱 엄혹해지자, 그는 아들에게 말했다. ‘여자는 마음이 약하니, 만일 고문을 당하면, 네 어머니가 우리 있는 곳을 말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거기를 떠나 깊은 동굴로 가서 숨었다.
  거기서 기적에 의해 성 요한의 빵나무와 생물이 그들에게 제공되었다. 시메온과 그의 아들은 옷을 벗고, 모래 속에 목만 남기고 파묻혀서, 율법에 대한 명상을 하며 나날을 보냈다. 그들이 동굴에서 12년을 보냈을 때, 예언자 엘리야가 와서 동굴 앞에 서서 외쳤다. ‘누가 요하이의 아들에게 케사르가 죽었으며, 체포령이 철회되었다고 이를 것인가?’ 그들은 밖으로 나와 사람들이 씨뿌리고 쟁기질하는 것을 보았다.
  (탈무드가 말하고 있지 않은) 전승이 있다. 이 12년간의 고독과 위험 속에서, 시메온 벤 요하이는 그의 아들 엘레아자르의 도움을 받으며, 유명한 작품을 썼는데, 그 작품에는 아직 그의 이름이 붙어 있다는 전승이다. 이 이야기에서 전설적인 요소를 뺀다 하더라도, 이 추측을 정당화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체포령을 받은 두 사람이 고통을 잊으려고 한 명상의 내용이나 결과를 우리가 모르기 때문이다. 더욱이 「조하르」에는 그리스도교 시대의 제2세기(AD 2세기-역주)에 예루살렘이 파괴된 몇 년 후에 죽은 시메온 벤 요하이가 결코 알 수 없었던 수많은 사실들과 인명들이 나온다. 예를 들면, 「미슈나」는 그가 죽은 후 거의 6년이 지나 쓰여졌는데, 그가 어떻게 그것이 여섯 부분으로 나뉘어진 것에 대해 말할 수 있었겠는가? 또 「게마라」는 거룩한 유다가 죽을 때 편집이 시작되어 그리스도 탄생 후 500년이 될 때까지 끝나지 않았는데, 그가 어떻게 그 저자들과 방언에 대해 묘사할 수 있었겠는가? 그가 어떻게 티베리야 학파(the School of Tiberias)에 의해 이루어진 모음부호의 이름들과(히브리어는 자음 뿐이므로 후에 모음부호를 정해 정확하게 발음할 수 있도록 했다-역주) 여러 혁신들을 알 수 있었겠는가? 그 학파는 6세기 초 이전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몇몇 비평가들은 「조하르」에 나오는 “이스마엘 사람들”(Ishmaeites: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아들로 이삭의 이복형인데, 후에 아랍민족의 조상이 되었다. 창세기 11장-역주)이 현대 유대인들의 저작에 나오는 아랍인 이슬람 교도들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다음 구절들을 보면, 그런 해석을 부인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달은 선의 상징인 동시에 악의 상징이다. 보름달은 선을 의미하고, 초승달은 악을 의미한다. 달이 선일 수도 있고 악일 수도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 자녀들과 이스마엘의 자녀들은 모두 달을 상황 판단의 대상으로 여겼다. 보름달일 때 월식이 일어나면, 그것은 이스라엘에게 좋은 징조가 아니고, 반대로 초승달일 때 식[일식-원저자의 주]이 일어나면, 그것은 이스마엘에게 나쁜 징조이다. 예언자의 말씀[이사야 29:14]이 이렇게 입증된 것이다. “그들 중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리워지리라.”
  그러나 지적해야 할 것은, 이러한 말들은「조하르」 원본의 일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들은 「신실한 목자」(The Faithful Shepherd)라고 하는 오래되지 않은 주석에서 빌어온 것이다. 이 주석은 최초의 편집자가 자신들의 권위로 틈이 있을 때마다 「조하르」에 삽입한 것이다.
 「조하르」에서 훨씬 더 결정적인 구절을 발견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시메온 벤 요하이의 한 제자가 자기 스승의 입에서 직접 들었다고 한 구절이기 때문이다.
  이스마엘이 태어나고 할례(割禮, circumcision: 이스라엘이 선민임을 나타내는 표시로 남자의 성기 껍질을 베어내는 의식, 포경수술과 비슷함. 창세기 17:10-역주)를 받은 시간에 저주가 있기를! 주님 -그 분의 이름이 복되시기를- 께서 무엇을 하셨던가? 그 분은 이스마엘을 천상의 연합(the celestial union)에서 배제하셨도다. 그러나 그들이 계약의 징표를 받을만하기 때문에, 이 아래(지상-역주)에서는 거룩한 땅에 그들의 분깃을 보존해 두셨도다. 그러므로 이스마엘 자손들은 거룩한 땅을 지배하도록 운명지어져 있으며, 이스라엘 자손이 그리로 돌아오는 것을 훼방할 것이다. 그러나 이 상태는 이스마엘 자손의 운이 다하면 끝날 것이다. 그 후 그들은 지상에서 끔찍한 전쟁을 부추기리니, 에돔의 자손들이 연합하여 그들과 대적하고, 그들에 대해 전쟁을 일으킬 것인데, 일부는 땅에서, 일부는 바다에서, 일부는 예루살렘 근처에서일 것이다. 승리는 이쪽에 있다가 저쪽에 있다가 할 것이다. 그러나 거룩한 땅은 에돔 자손의 손에 넘어가지는 않으리라.
  유대 작가들은(즉, 히브리어를 쓴 작가들은) 에돔이란 말로 처음에는 이교도인 로마를, 다음에는 기독교화된 로마와 모든 고대민족들을 지칭했다. 여기서는 이교도인 로마를 말하는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에, 이 구절은 틀림없이 예루살렘 멸망 이전의 사라센과 기독교 십자군 사이의 전쟁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이제 주지의 사실이므로 재론할 필요가 없다. 마지막으로 살펴 볼 것은, 시메온 벤 요하이가 「조하르」의 유일한 저자일 수는 결코 없으며, 그 책이 13년 간의 명상과 고독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기 위해, 그 개념들의 설명과 거의 언제나 연관이 되어 있는 이야기들을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방대한 카발라 자료 중에서 경탄할만한 부분인「이드라 유타」(Idra Yuta)라는 단편에서, 시메온 벤 요하이가 임종에 임박해서 자기 아들 엘레아자르를 포함해 소수의 제자들과 친구들을 불러 마지막 교훈을 했다는 이야기를 접하게 된다.
  그가 엘레아자르에게 말했다. “너는 가르칠 것이고, 랍비 압바(Rabbi Abba)는 글을 쓸 것이고, 나의 다른 친구들은 침묵 속에 명상할 것이다.” 스승 벤 요하이가 말을 했다고 되어 있는 곳은 좀체로 드물다. 그의 가르침을 그의 아들이나 친구들이 암송했고, 그의 사후에 그들이 함께 모여 그의 가르침을 기억하여 나누고, 공동의 신앙 위에서 서로를 일깨웠다. 그들은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한 성서구절이 자신들에게 해당한다고 생각했다. 길에서 만나면, 그들의 대화는 재빨리 습관적으로 명상의 주제로 옮아갔고, 구약성서의 몇 구절을 순수하게 영적인 의미로 해석했다. 여기 수천의 예 중의 하나를 되는대로 뽑아 본다.
  랍비 유다와 랍비 요세가 함께 여행을 하고 있었다. 랍비 유다가 친구에게 말했다. “내게 율법에 대해 뭔가 얘길 좀 해 주게. 그러면 하느님의 영께서 우리에게 임하실 것이네. 사람이 율법의 말씀을 명상할 때마다, 하느님의 영이 함께 하시거나, 길을 보여 주시기 때문이네.”
  따라서 아주 분명한 것은, 「조하르」의 저자가 누구이건간에, 그는 그 책을 시메온 벤 요하이의 것으로 보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가 시메온 벤 요하이의 마지막 순간과 죽음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조하르」가 인용하고 있는 책들은, 그 책들의 내용 중 광범하게 흩어져 있던 단편들만이 우리에게 전해져 왔다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 책들은 「조하르」보다 오래된 것들이라 여겨진다. 다음 구절이 늦어도 13세기 말의 것이라고 볼 수 있다면, 코페르니쿠스의 몇몇 제자들이 썼다고 믿을만 하다.
  
      장로(長老) 하무나(Hamuna)의 책은 지구가 천체처럼 자전하고 있음을 완전하게 설명하고 
      있다. 즉 (지구가 구체이므로-역주) 어떤 사람들은 위에 있고, 어떤 사람들은 아래에 있다
      는 것이다. 또 모든 피조물은 항상 같은 위치에서 살고 있더라도 그 지역의 기후에 따라
      자기 모습을 적응시켜 살고 있다고 한다. 지구의 어떤 곳이 밝을 때, 다른 곳은 어둡고, 어
      떤 곳이 낮일 때, 다른 곳은 밤이며, 언제나 낮인 나라, 적어도 밤이 잠시 밖에 안되는 나라
      들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의 빈궁함에서 벗어나려고 그 책을 쓰는 데 긴 세월을 바쳐야 했던 불행한 협잡꾼, 누군지 잘 알 수도 없는 13세기의 한 랍비를 숭배하는 것 말고는 달리 대안이 없는 것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이 책의 비밀한 특성과 고유한 가치로 인해 모세스 데 레온이 저자가 아니라는 것은 쉽게 입증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훨씬 더 적극적인 논리를 가지고 있다. 「조하르」는 특별한 방언이 아닌 아람어로 쓰여져 있다. 데 레온이 무슨 꿍꿍이로 자기 시대에 쓰지도 않는 언어를 사용할 생각을 했을가? 모리누스가 주장하는 대로, 그가 여러 다른 사람의 이름 밑에서 자기 생각이 가리워지길 원해서, 그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들 시대의 언어로 말한 것처럼 써서, 자신의 허구에 진리의 외양을 덮어 씌우려 했던 걸까? 그러나 위대한 학자였던 데 레온은 시메온 벤 요하이와 그 친구들이 「미슈나」의 저자들 중에 속한다는 것을 알았던 것은 틀림없다. 그들이 예루살렘 방언을 썼다 하더라도, 히브리어로 책을 쓰는 것이 더욱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주장하기를, 데 레온은 실제로는 히브리어로 글을 썼으며, 그가 「조하르」를 창안해 낸 것은 아니지만, 자기 의견을 그 책에 삽입하여 그것을 위조했으며, 그 위선이 곧 밝혀진 것이라고 한다. 그런 히브리어 「조하르」 판본이 우리에게 전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이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진위를 차치하고, 그것은 우리의 견해를 확증해 준다. 더구나 모세스 데 레온이 히브리어로 카발라 책을 쓴 것은 아주 확실하며, 그 제목은 「하느님의 이름」 또는 단순히 「이름」(Sefer ha-Shem: 직역하면 「이름의 책」임-역주)이다. 그 책은 아직도 사본으로 남아 있으며, 모세스 꼬르도베로(Moses Cordovero)가 목격한 바 있다. 그가 인용한 몇몇 구절을 보면, 그것은 「조하르」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애매한 것들 몇 가지에 대한 아주 상세하고도 아주 섬세한 주석이다. 예를 들어 보자. 서로 다른 통로, 즉 모든 세피로트 사이의 영향과 상호관계는 무엇인가? 어떤 통로들이 하느님의 빛 또는 만물의 원초적 실체를 한 세피로트에서 다른 세피로트로 인도하는가? 같은 사람이 먼저는 갈대아-시리아 방언으로 「조하르」를 써 놓고 -어려운 언어를 써서 흥미를 더하려 했든, 일반 사람들이 자기 사상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려 했든- 나중에는 모든 사람이 이해하게 하려고 자기가 그렇게 애써, 학자들까지도 거의 잊어버린 언어로 숨겨놓은 비밀을, 다시 히브리어로 설명하고 개진할 필요를 느끼는 일이 가능한 것일까? 이것조차 독자들이 단서를 잡을 수 있게 하려는 또 하나의 술수라고 보아야 할까?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 지나친 속임수요, 자신이 그로 인해 비난받고 있는 초라한 목적을 위해 너무 많은 시간과 인내와 노력을 쏟는 일이다. 그런 책략은 너무 어리석은 모순과 엄청난 시대착오에 대해 비난받아 온 사람이 하기에는 너무도 박식하고 너무도 복잡한 것이다.
  우리가 「조하르」를 모세스 데 레온의 시대보다 훨씬 오래 전에 유럽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쓰여진 작품이라고 볼 만한 또하나의 이유가 있다. 「조하르」에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흔적이 전혀 없고, 그리스도교와 그 창시자에 대한 언급도 전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와 아리스토텔레스는 13세기와 14세기에 유럽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행사했다. 그런데 어떻게 스페인의 가난한 한 랍비가 이 시기에 종교적 주제에 대한 책을 쓰면서, 광신적인 탈무드 저자들과 후기 작가들이 그렇게도 자주 공격을 퍼부었던 기독교에 대해 아무 불평도 하지 않고 사아디아와 마이모니데스와 같은 과정을 추구했던 기타의 모든 사람들이 했던 것처럼, 소요학파의 철학의 피할 수 없는 영향에 굴복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창조의 책」에 대한 모든 주석에서, 당시와 몇세기 전의 모든 철학적, 종교적 걸작들에서, 우리는 「논리학」(Organum:아리스토텔레스의 대표작 중 하나-역주)의 언어와 스타기라 사람(the Stagirite: 옛 마케도니아의 도시 스타기라 출신, 즉 아리스토텔레스-역주)의 영향력을 발견하게 된다.
  이 영향이 없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사실이다. 우리는 세피로트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에 대한 은밀한 모방을 찾아 볼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범주론은 논리적 가치 밖에 없지만, 세피로트는 훨씬 고도의 형이상학 체계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카발라와 희랍철학 체계에 유사한 면이 있다면, 그것은 플라톤 철학의 체계이다. 그러나 모든 종류의 신비주의에 대해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더욱이 플라톤은 자기 모국 밖에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끝으로 주목할 점은 「조하르」에 표현되어 있는 카발라 체계에 본질적이며 카발라 체계에만 쓰여진 개념과 표현들이 13세기말 훨씬 이전에 나온 작품들에서도 발견된다는 점이다.  「세페르 예치라」의 주석가들 중 하나인 모세스 보트릴에 의하면, 카발리스트들이 이해한 빛의 방사(放射, emanation: 하느님의 빛이 방사되어 만물이 형성되었다는 것, ‘유출’이라고도 번역한다-역주)교리는 사아디아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보트릴은 다음 구절을 인용하고 있는데, 그에 의하면 이 구절은 「철학자의 돌」(The Philosopher's Stone)(사아디아의 작품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틀린 것이다)에서 글자대로 인용한 것이다.
  오, 그대, 원천에 있는 저수지에서 물을 긷는 사람이여, 유혹을 받아 빛의 방사의 교리 중 어느 것이라도 드러내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것은 모든 카발리스트들에게 위대한 신비이다. 이 신비는 율법의 말씀 속에 감추어져 있으니,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치 말라”는 말씀이 그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아디아는 자신의 「신앙과 견해」(Beliefs and Opinions)에서, 「조하르」에서 설명하고 있는 체계의 기초가 되는 이 교리(빛의 방사 교리-역주)를 아주 격렬하게 공격했다. 다음 구절이 그 증거이다.
        나는 때때로, 창조주의 존재는 부정할 수 없지만, 무엇인가가 무(無)에서 창조될 수 있다는 것은 우리 마음이 인식할 수 없다고 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이제, 그들은 창조주가 맨 먼저 존재한 유일한 존재이므로, 그가 자기 자신의 실체에서 모든 것을 이끌어 내었다고 주장한다. 그런 사람들 [하느님이 그들의 견해를 멀리하시기를!]은 우리가 말한 다른 사람들보다 지각이 훨씬 떨어진다.
  이 구절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옳다는 것은 그 책의 같은 장(章)에서 입증되고 있는데, 그장에서는 이 구절이 말하는 믿음이 「욥기」에서 확증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런즉 지혜는 어디서 오며, 명철(明哲)의 곳은 어디인고?... 하나님이 그 길을 깨달으시며 있는 곳을 아시나니”(욥기 27:20, 23)
  사실 우리는 여기서 「조하르」가 가장 상위의 세 세피로트의 이름으로 삼고 있는 이름들을 보게 되는데, 그들은 다른 모든 세피로트들을 포함하고 있다. 즉 그 세피로트들은 지혜, 지성 그리고 그들 위에, 장소(place) 또는 무(無,Non-Being, non-etre) -그것이 아무 특질도, 형태도, 조건도 없는 무한을 나타내므로 그렇게 불린다- 인데, 이 무는 모든 실체가 없는 상태이므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무에서 나왔다는 것은 이런 의미라고 카발리스트들은 말하고 있다. 같은 저자(사아디아-역주)는 또한 우리에게 심리학 이론을 제공하고 있는데, 그것은 시메온 벤 요하이 학파의 것이라고 여겨지는 이론과 일치한다. 그는 「조하르」에서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는 영혼의 선재설(先在說)과 윤회설이 그의 시대에 자신들을 유대인이라 부르면서 그들의 엉뚱한 주장을 성서의 증거를 가지고 확증한 몇몇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다고 이야기한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 성 제롬(St. Jerome)은 자신의 서신 중 하나에서, 성스런 책들이 신성(神性)을 나타내는 10개의 신비한 이름(decem nomina nystica)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성 제롬이 완전하게 열거하고 있는 이 10개의 이름들은 「조하르」에 나오는 10개의 세피로트 또는 하느님의 특질과 완전히 같다.
  이것이 「조하르」의 가장 오래된 단편이 「신비의 책」(Sifra d'Zeniuta)이 말하는 바인데, 이 속에는 카발라의 최고원리들이 요약되어 있다.
  인간이 하느님께 기도하기를 원할 때, 그는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들을 부를 수 있다. 에예(Eh-yeh), 여호와(Jehouah), 야(Yah), 엘(El), 엘로힘(Elohim), 예도우드(Yedoud), 엘로히-제바오트(Elohi-Zebaot), 샷다이(Shaddai), 아도나이(Adonai) 등이다. 아니면 10세피로트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 즉 왕관, 지혜, 지성, 아름다움, 은혜, 정의 등이다.
  모든 카발리스트들은 하느님의 10개의 이름과 10세피로트는 동일하며 같은 것이라고 하는 원리에 동의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이름들의 영적인 부분은 신적인 수(數)들의 본질 자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성 제롬은 그의 글 몇 군데에서, “창세기에 대한 어떤 히브리 전승(傳承)”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그 전승은 천국, 항상 히브리어로 불리워진대로 하면, 에덴동산이 세상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다고 한다는 것이다.
  유일하게 비유적인 유대 전승은, 탈무드에서 창세 이야기라고 부르는 것 속에 나타난 전승들이다. 이 전승들에 대한 믿음은 「조하르」와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 「조하르」에서는 최고의 지혜, 창조를 시작하고 완성한 하느님의 말씀, 모든 지성과 모든 생명의 원리를 진정한 에덴, 또는 더 높은 에덴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언어에서나 사상에서나 카발라가 영지주의 교파와 본질적으로 유사하다는 것인데, 특히 시리아에서 발생한 영지주의 교파들과 나자레네파(Nazarene)의 종교법전과 매우 유사하다. 후자는 몇 년 전에 발견되었는데, 시리아어에서 라틴어로 번역되어 있었다. 이 유사성에 대한 증거는, 후에 카발라 체계와 다른 종교 내지 철학체계 사이의 관계를 밝히는 부분에서 제시할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마법사 시메온(Simeon the Magician), 엘크사이트(Elcsaite), 바르데사네스(Bardesanes), 발렌티누스(Valentine)의 가르침이, 이레네우스(Irenaeus)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와 같은 몇몇 교부들의 작품들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단편들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알려져 있음을 지적해둔다. 그런데 13세기의 랍비가 이러한 저작들에 익숙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는 없다. 그가 저자일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는 그 책은 그가 어떤 다른 저서에도 문외한이며, 특히 그리스도교 저작에는 더욱 그렇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우리는 영지주의가, 비록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것과 똑같은 「조하르」가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그 전통과 이론으로부터 많은 것을 빌어왔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여기서 논한 가정과 또 하나의 가정을 구별할 것인데, 그 가정은 카발라가 아랍 신비철학의 모사품이라고 주장한다. 그 아랍 신비철학은 11세기 초 무렵 칼리프가 지배하는 동안 나타났으며, 그 때 철학이 신비주의에 처음 족적을 남겼다. 이 견해는 오래 전에 단순한 추측으로 나타났던 것인데, 최근 톨루크(Tholuck)가 다시 제기했으며, 그는 자신의 풍부한 학식을 가지고 이를 뒷받침했다. 이슬람철학에 대한 희랍철학의 영향을 탐구하는 서론에서, 이 박식한 동양학자는 결론을 내리기를, 빛의 방사교리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체계와 동시에 아랍인들에게 알려졌으며, 테미스티우스(Themisitius), 스미르나의 테온(Theon of Smyrna), 가자의 아이네우스(Aeneus of Gaza), 요한 필로포누스(Johann Philoponus)의 주석들을 통해, 다시 말해서, 불완전한 형태이긴 하지만 알렉산드리아의 개념들을 통해서 아랍인들에게 전해졌다고 한다. 한 때 이슬람 사상의 토양에 뿌려진 이 씨앗은 발아하여 급속히 방대한 체계를 이루었으며, 이것이 플로티누스(Plotinus)의 경우처럼 이성을 뛰어 넘는 열정을 자극했다. 그것은 모든 존재가 하느님의 실체에서 튀어 나왔다고 주장하면서, 완성을 향한 마지막 단계인 인간이 망아상태(ecstasy)와 자아의 소멸을 통해 그 실체와 다시 합일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톨룩이 우리에게 카발라의 참된 유일한 근원으로 받아들이게 하려 한 것이 바로 이 반은 아랍적이고 반은 희랍적인 신비주의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 그는 먼저 카발라 서적들의 진실성을 공격한다. 그는 특히 「조하르」를 공격하는데, 그는 카발라 자체가 훨씬 오래된 것임은 인정하지만, 「조하르」는 13세기 말의 편찬물로 본다. 그런 다음, 그는 카발라에 들어 있는 개념들과 아랍 신비주의의 내용을 이루고 있는 개념들 사이의 밀접한 유사성을 논증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가 카발라의 진실성에 대한 논쟁을 더 진행시키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아직 그것에 대해 논박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의 저서의 마지막 부분이자 분명히 가장 흥미있는 부분만을 다룰 것이다.
  첫째로 생각되는 것은, 히브리사상과 아랍사상 사이의 유사성이 아무리 완벽하게 제시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전자가 후자의 모조품이라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슬람철학보다 더 오래되고, 알렉산드리아의 희랍철학보다 더 오래 된 공통의 근원에서, 상이한 경로를 통해 두가지 사상이 파생되었다고 보는 것은 불가능한가? 톨룩은 아랍인들이 알렉산드리아의 철학을 간접적으로만 알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들은 플로티누스와 이암블리쿠스(Iamblicus)와 플로클루스(Proclus)의 작품을 접한 일이 없으며, 이 작가들의 작품 중 어느 것도 아랍어나 시리아어로 번역된 일이 없다. 포르피리우스(Porphyrius)의 작품들도 순전히 논리적인 주석인 「범주론」에 대한 서론만을 담고 있을 뿐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슬람이 침략해 오던 시대에, 동양의 지혜라는 이름으로 고대에 계속 그토록 명성을 떨쳤던 고대 페르시아의 사상과 조로아스터교 사제들의 철학이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이 사상들이 압바시드 왕조의 지배를 그토록 유명하게 만들었던 지적 운동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우리는 아비센나(Avicenna)가 동양의 지혜에 대한 책을 한 권 썼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무슨 권리로 그보다 더 현대의 작가가 겨우 몇 구절의 인용구에 힘입어, 「조하르」가 신플라톤 사상의 수집물일 뿐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가?
  톨룩은 아랍의 신학자이자 도덕주의자인 알 까잘리(Al-Gazzali:1580-1111)의 글 속에 있는 한 구절에 우리의 주의를 돌리게 한다. “물질적 세계와 우리가 이야기한 세계 사이에는 우리 몸과 그림자 사이의 관계와 같은 관계가 있다”. 고대 페르시아의 한 종파 사람들인 제르두스티아 교인들(The Zerdustians)도 자신들의 신앙의 근본원리를 표현하는데 똑같은 용어를 써서 똑같은 비교를 했다는 것을 그가 어째서 기억하지 못할까?
  유대인들에게는, 바벨론 포로기부터 디아스포라(diaspora) 시기까지, 그들이 바벨론 땅이라 부른 곳과 지속적인 관계가 있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오래 다루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후에 다시 고찰할 것이다. 다만 「조하르」가 자체의 가르침과 완전히 일치하는 한 예로서 “초기부터 동양의 자손들에게 알려져 있던” 동방의 지혜를 특히 인용했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 인용문이 아랍인들을 말하고 있지는 않다. 히브리 작가들은 아랍인들을 언제나 “이스마엘 자손들” 또는 “아라비아의 자녀들”이라고 부른다. 「조하르」가,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에 대한 알렉산드리아 주석가들의 영향으로 당시에 생긴 다른 나라의 철학에 대해, -세상의 최고(最古)의 것이라고 추정한다 - 그런 말로 이야기 했을 리가 없다. 또한 이 철학을 아브라함이 그의 첩(사라를 말함. 이스마엘의 어머니-역주)의 자녀들에게 전하고, 그들을 통해 동방 여러나라들에게 전해진 유산으로 제시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실은 아랍신비주의와 「조하르」에서 가르쳐진 원리는 유사성보다도 차이점이 더 많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아랍 신비주의는 모든 류의 신비주의에 공통적인 일반개념 몇 개를 접하고 있을 뿐이지만, 「조하르」는 두 체계 모두의 형이상학의 가장 본질적인 점을 밝히고 있어, 그들의 기원이 서로 다르다는 점에 의심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그 차이점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을 인용해 보면 이렇다. 아랍신비가들은 하느님 안에서 만물의 유일한 실체와 우주의 내재적 원인을 인식하여, 하느님이 세 가지 다른 측면으로 자신을 계시 내지 현시(現示)하신다고 가르친다. 첫째는 단일성(Unity) 또는 절대적 존재의 측면인데, 여기서는 아직 분화(differentiation)가 나타나지 않는다. 둘째는 분화의 측면인데 여기서는 우주 만물이 자신들의 본질과 인식 가능한 형태 속으로 분화하기 시작하며, 하느님의 지성에 자신들을 드러낸다. 끝으로, 우주 자체의 측면인데, 세계의 참모습인 하느님을 볼 수 있게 된다.
  카발라체계는 훨씬 더 복잡하다. 사실 카발라 체계도 하느님의 실체를 모든 생명, 모든 빛, 모든 존재가 영원히 흘러나오는 유일한 실체, 고갈될 수 없는 근원이라고 본다. 그러나 그것은 무한 존재의 세 가지 현시, 세 가지 일반적 형태 대신에 열가지, 즉 10개의 세피로트를 인정한다. 이 10개의 세피로트들은 세 개의 삼위일체로 세분되며, 이는 다시 한 개의 삼위일체와 한 개의 최고형태 속에서 하나가 된다. 전체로 보면, 세피로트는 오직 존재의 제1등급, 제1 영역(界)을 나타내는데, 그것을 방사의 세계(the World of Emanation)이라고 부른다. 각각 분리되어 있고 무한히 다양한 그 세피로트 밑에 순수한 영의 세계, 또는 피조세계(Creation)가 있다. 계(界)들의 세계, 또는 지성의 세계가 그것들을 지도하는데, 그 세계를 창조의 세계(the World of Formation)라 부른다. 끝으로, 가장 낮은 등급이 있는데, 활동의 세계(the World of Work or the World of Action)라 부른다.
  아랍신비가들도 세계의 모든 영혼들이 나온 하나의 큰 영혼(a collectuve soul)을 인정한다. 이 만물을 낳는 영을 그들은 영들의 아버지, 무함마드의 영, 근원, 다른 모든 영들의 모델이자 실체라고 부른다.
  이 아랍의 개념 속에서 카발리스트들이 말하는 천상의 인간인 아담 카드몬(Adam Kadmon)의 모델을 찾아 보려는 시도가 계속 있었다. 그러나 카발리스트들이 아담 카드몬이라는 말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이 영보다 높다고도 낮다고도 보는 지성과, 영적 생명의 원리만이 아니다. 그것은 세피로트의 총체이며, 빛의 방사의 세계의 총체이며, 가장 추상적이고, 가장 불가피한 특성의 절대 존재, “점”(point) 또는 절대 무(無, Non-Being)에서부터 자연의 산출력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다. 히브리 사상 체계에서 그토록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윤회개념의 흔적이 아랍신앙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의 작품에서 우리가 「조하르」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비유를 찾는다거나, 전통에 대한 끊임없는 호소를 ?O는다거나, 성 바울이 디모데전서에서 제시한 바 있는 끝없는 계보(genealogis interminatis)에 의해 수를 증가시키는 대담한 인격화를 ?O는다거나, 고대 동방의 정신에 아
주 어울리는 거대하고 환상적인 비유를 찾는다면, 이는 헛수고이다.
  톨룩은 자신의 저서 끝에서 스스로 자신의 원래 주장을 철회하고 -그의 솔직함은 그의 학문에 어울린다- 카발라가 아랍 신비철학에서 나왔다고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결론지었다. 이슬람 사람들의 철학과 언어를 깊이 연구한 사람의 말이기 때문에 권위가 있는, 그 자신의 말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가 추론에 의해 내릴 수 있는 결론이 무엇인가? 내 생각에는, 거의 없다. 두 사상 체계에서 유사한 것은 모두 신플라톤주의자들에게서 뿐 아니라, 시바인들과 페르시아인들의 책 속에 있는, 그보다 고대의 가르침들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반면에 그러한 개념들이 카발라에서 취하는 특별한 형태는 아랍 신비가들에게는 전혀 낯선 것이다. 더구나 카발라가 정말 아랍 신비가들과 접촉한 데서 나왔다고 확신하려면, 아랍 신비주의에서 세피로트를 찾아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세피로트의 흔적조차 없다. 아랍 신비가들은 하느님이 자신을 계시하신 한 가지 양식만을 인정했다. 이 점에서 카발라는 시바인들의 가르침과 영지주의에 더 가깝다 ...
  카발라의 아랍 기원설이 용납될 수 없다고 입증되었을 때, 「조하르」를 13세기의 작품이라고 보는 다른 설도 그 마지막 지지를 상실하게 된다. 「조하르」는 아주 중요하고 광범위한 체계를 담고 있다. 그토록 방대한 체계는 하루에, 그것도 무지와 맹신의 시대에, 경멸과 박해 아래 신음하고 있는 나라에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카발라 체계의 선례(先例)나 요소들을 중세에서 찾을 수 없다면, 우리는 그보다 더 이전의 시대에서 그 기원을 찾아야 한다.
  이 이론은 어떨까? 시메온 벤 요하이가 정말 (「조하르」의 기초를 형성하는) 형이상학과 종교의 가르침을 자기 아들이 포함된 소수의 제자들과 친구들에게 전했고, 이 가르침이 처음엔 철저한 비밀로서 구전되다가 점차로 공개되었다고 보는 이론 말이다. 그리고 이 전승들과 주석들이 불가피하게 더 선대의 주석들과 함께 섞이고, 게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수정되어, 마침내 13세기 말 경 팔레스타인에서 유럽으로 흘러들어 왔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조심스럽게 추측으로 제시되었던 이 견해가 곧 확실하게 밝혀져 인정될 것을 바란다.
  왜냐하면, 이 이론은 유대민족의 다른 종교적 대작(大作)들의 역사와 완전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미슈나」와 「예루살렘 탈무드」, 「바벨론 탈무드」등과 같이 「조하르」는 여러시대의 전승과 여러 스승들의 가르침이 하나의 공통원리로 묶인 모음집이다. 한 역사가가 지적한 대로, 이 이론은 틀림없이 아주 오래된 다음과 같은 확신과 일치한다. “나는 이 작품이 너무 방대해서, 완성이 되면 낙타 한 마리의 짐이 되었으리라고 전통으로부터 배웠다.” 한 사람이 그런 주제들에 대한 글을 쓰는 데 평생을 바쳤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자신의 창착력에 대해 그러한 증거를 남길 수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끝으로, 같은 언어로 쓰여져서 「조하르」 원본만큼 오랬동안 알려진 「조하르」증보판에, 「조하르」는 결코 전체가 출판되지 않을 것이라고, 글자 그대로 표현하면, 그것은 시간의 끝에 가서만 밝혀질 것이라고 써 있다.
  그 기원을 알기 위해 「조하르」 자체를 검토해 보면, 우리는 곧 「조하르」를 한 명의 저자가 지었다고 볼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이 책은 분명히 일관성 없는 문체로 전해졌으며(어떤 구절들은 거의 완전히 아람어로 쓰여져 있으나, 어떤 구절들에서는 랍비들이 쓰는 히브리어에 아람어 어미가 붙어 있다), 표현방법, 일반원리의 적용 및 세부사항의 고려에서 만큼이나 그 체계에서도 일관성이 없다.  중요한 예를 많이 들지 않고, 또 번역으로는 나타낼 수 없는 -이는 식물을 죽이지 않고 원산지에서 뜯어낼 수 없는 것과 꼭 같다- 언어에 대한 여러 사실을 주장하지 않고, 우리는 이미 언급한 세 부분을 「조하르」의 나머지 부분들과 구별하는 주요한 차이점들을 지적할 것이다. 그 세 부분들이란 다음과 같다. 첫째, [일반적으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지는] <은폐의 책>(Book of Concealment)이 있고, 다음에 <큰 모임>(Great Assembly)이 있는데, 여기서는 시메온 벤 요하이가 그 친구들과 함께 나오며, 세 번째는 <작은 모임>(Lesser Assembly)인데, 여기서는 시메온이 임종에 임해 살아남은 제자들에게 마지막 교훈을 하고 있다.
  이 각 부분들 사이에 긴 이야기들이 있어, 처음에는 이 부분들이 카발라의 방대한 모음집 속에서 사라진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이것들은 사건과 사상이 전개되어 가면서 완전히 결합된 전체를 이룬다. 그 부분들에서, 하느님의 특성들과 그 특성들이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것, 세상이 창조된 방법,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비유적이며 형이상학적인 언어로, 일관성 있고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저자는 결코 높은 사변에서 시작하여 세부적이고 실제적인 문제로 내려오거나, 율법이나 종교의식의 준수를 권장하지 않는다. 어디서도 이 부분들의 진실성을 의심하게 하는 인명이나 사실이나 문구조차 찾아 볼 수 없다. 여기서는 그 형식의 독창성이 높은 사상을 한층 드높이고 있다. 
  듣는 자들에게 확신을 주려고 권위를 사용하는 것은 항시 말을 하는 스승이다. 그는 남이 자신에게 가르친 것을 논증하거나 설명하거나 반복하지 않는다. 그 대신, 그는 확신을 가지고 말하고,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신조로서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특징은 특히 <은폐의 책>에서 볼 수 있는데, 이 책은 매우 알기 어렵긴 하지만, 전체 작품의 실제적 요약이다. 라틴 격언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는 마치 권위를 지닌 듯하다.”
  「조하르」는 <은폐의 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우아한 비유를 하고 있다.
  홀로 산 속에서만 살아 도시의 길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을 상상해 보자. 그는 밀을 파종해 자연상태의 밀만을 먹고 산다. 어느 날 그 사람이 도시로 나간다. 그는 좋은 빵 한 덩이를 받고 이렇게 묻는다. ‘이 물건은 무엇에 쓰나요?’ 그들이 그에게 대답한다. ‘그건 먹는 빵이요.’ 그는 그것을 가져다 즐겁게 먹는다. 그런 다음 그가 다시 묻는다. ‘이건 뭘로 만든거요?’ 그들이 그건 밀로 만들었다고 대답한다. 그 후 얼마가 지나 사람들이 그에게 기름으로 반죽한 케이크를 준다. 그는 그것을 가지고 다시 묻는다. ‘그런데 이건 뭘로 만든거요?’ 그들이 그에게 대답한다. ‘밀로요.’ 얼마 후 사람들이 그에게 기름과 꿀로 반죽한 로얄 페이스트리(가루반죽과자-역주)를 주었다. 그는 똑같은 질문을 한다. 그리고 그는 혼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 모든 것에 통달한 사람이다. 나는 그들이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드는 데 쓰는 밀을 먹고 살았으므로, 그 음식들을 근본적으로 맛보고 있다.’ 이 생각을 하고는 그는 사람들이 먹는 데서 느끼는 모든 즐거움을 멀리했고, 그러한 즐거움은 그에게서 사라져 갔다. 학문의 일반원리에서 머물러 있는 사람도 이와 같다. 그는 그 원리들에서 나온 모든 즐거움을 모르기 때문이다.
  「조하르」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그 전개 양식이 다르다. 그 부분은 자유롭게 생각하고  끊임없이 실행하는 계획을 가지고 -그 가운데 제2차 자료(the Second Texts)는 아무렇게나 끌어들인 것이 아니라 특정한 주제를 다루게 되어 있다- 주어진 개념의 체계를 계속 설명하기보다는, 마치 주석처럼 일관성이 없고 혼란스럽게 쓰고 있다. 이미 지적한대로, 성서에 대한 연구는 구실일 뿐이지만, 이 말이 개념의 영역 자체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으면 그 본문이 한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넘어가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이것은 시메온 벤 요하이 학파에 보존되어 있던 주석과 전승들이 논리적 질서에 근거한 관습적 체계와 결합되지 않고, 시대정신 속에서 모세오경의 주요 구절로 되어 버렸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이러한 견해는, 성서 본문과 그 주석격인 「조하르」의 일부 사이에 아무런 관련성도 없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로 확증된다.
  사실에 대한 기술에서도, 비록 수적으로 많지 않고 종류도 다양하기는 하지만, 매우 일관성이 없고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여기서는 더 이상 형이상학적 신학이 철저히 관철되지 않고 있다. 가장 대담하고 가장 수준 높은 이론과 함께, 외적인 제의(祭儀)에 대한 가장 세속적인 세부사항이라든지, 다른 모든 신앙의 궤변론자들과 같이, 「게마라」연구가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수많은 책을 쓴 유치한 질문들을 보게 되는 경우가 자주 있다. 그 기본 사상 뿐 아니라 형태에서도,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것들은 모두 훨씬 더 근대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 반면에 첫 번째 부분의 단순성과 순진한 신앙의 열정은 성서시대와 성서의 언어를 생각나게 할 때가 자주 있다.
  우리는 마지막 부분에서 한 가지 예만을 들고자 하는데, 그것은 시메온 벤 요하이의 죽음 이야기로, 그가 자기 가르침을 편찬하라고 부촉한 제자 랍비 압바(Rabbi Abba)의 말이다.
       거룩한 빛 [시메온을 제자들은 그를 그렇게 불렀다]께서 말씀을 멈추셨을 때는 그 분의
      말씀이 다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나는 계속 글을 쓰고 있었다. 나는 좀 더 오랫동
      안 글을 쓰고 싶었지만, 더 이상 아무 말씀도 듣지 못했다. 나는 머리를 쳐들지 못했다. 그
      빛이 너무 강렬해서 바라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갑자기 나는 격렬하게 요동쳤고, 이렇게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생명과 행복의 장구한 나날과 햇수가 네 앞에 있도다.’ 다음에 나는
      다른 목소리를 들었다. 그 목소리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당신께 목숨을 구(求)했는데, 당신
      께서는 그에게 영원한 생명(eternal years)을 주셨나이다.’
  그 분이 하루 종일 그 집에 머물렀다. 누구도 감히 그 분 가까이 가려 하지 않았다. 그 분을 둘러싸고 있는 불과 빛 때문이었다. 그 날 나는 온종일 땅바닥에 엎드려 마음껏 애통해 했다. 그 불이 떠나자, 나는 성자 중의 성자인 거룩한 빛이 이 세상을 떠난 것을 알았다. 그 분은 팔다리를 쭉 뻗고 오른쪽으로 누워서 얼굴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의 아들 엘레아자르가 일어나, 그 분의 두 손을 잡고 그 손에 입맞춤을 퍼부었다. 그러나 나는 기꺼이 그 분의 발이 닿았던 곳의 먼지를 먹었다.
  그 때 그 분의 모든 제자들이 그 분을 위해 곡하러 왔다. 그러나 아무도 침묵을 깰 수 없었다. 마침내 그들의 눈에서 눈물이 흘렸다. 그 분의 아들 랍비 엘레아자르가 땅에 세 번 쓰러졌다. 그는 ‘아버지! 아버지!’ 하는 말 밖에 못했다. 랍비 히아(Hiah)가 먼저 일어섰다. 그가 말했다. ‘오늘날까지 거룩한 빛께서 우리에게 빛을 주시고 우리를 지켜주셨다. 이제 우리는 그 분께 마지막 영광을 돌려드리는 일 밖에 할 수가 없다.’ 랍비 엘레아자르와 랍비 압바가 일어나 그 분께 수의(壽衣)를 입혀 드렸다. 그 후 그 분의 모든 친구들이 곡을 하자 온 집안이 향기를 발했다. 랍비 엘레아자르와 랍비 압바 두 분만이 그 분을 관가(棺架)에 실어 밖으로 나갔다. 관가가 떠났을 때, 그들은 하늘에서 그의 모습을 보았다. 그의 얼굴 앞에는 눈부신 빛이 빛나고 있었다. 그들은 한 목소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와서 랍비 시메온의 결혼잔치에 참석하라.’
  요하이의 아들 랍비 시메온은 그러한 사람이었다. 주께서는 그를 통해 매일 영광을 받으셨다.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그의 몫은 아름답다. 그에 대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네 길을 끝까지 가서, 평화 가운데 안식하며, 네 몫을 시간의 끝까지 누리라.’
  이 글들은 제자들이 시메온에게 존경심을 품었고, 카발라학파 전체가 그의 이름에 종교적 귀의심을 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가 지지하는 이론에 대한 또 하나의 증거가 있는데, 이것은 틀림없이 더욱 결정적인 증거로 보일 것이다. 그것은 다음의 인용문인데, 어느「조하르」판본에나 다 들어 있는데도, 이 구절이 인용되어 있는 것을 본 일이 없다. 두 부류의 스승들, 즉 「미슈나」의 스승들과 카발라의 스승들 사이의 차이점을 논한 후에, 본문은 계속하여 이렇게 말한다.
  예언자 다니엘이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그는 후자에 대해 말한 것이다. ‘현명한 자들은 하늘의
  밝음과 같이 빛날 것이다.’ 그는 「밝음의 책」(Book of Brightness:「조하르」-역주)을 연구하는
  자들에 대해 언급한 것이다. 그 책은 노아의 방주처럼, 한 도시에서 2명만을 받아들이고, 한 왕국
  에서 7명만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때로는 한 도시에서 1명이며, 한 가족에서 2명이다. 다음 구절이
  성취되는 것은 그들을 통해서이다. ‘모든 남자는 강물에 던지리라’(출애굽기 1:22-역주). 그 강물은
  이 책의 빛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조하르」에 들어 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이 쓰여져서 오늘날의 「조하르」라고 하는 책명으로 알려졌을 때는, 「조하르」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조하르」가 수 세대에 걸친 카발라 연구자들의 노력으로 수 세기를 통해 점차로 형성되었다고 결론 짓지 않을 수 없다.
  또 하나의 매우 귀중한 구절을 통해, 우리는 시메온 벤 요하이가 죽은 후 오랫동안 그의 가르침이 그가 살고 가르쳤던 팔레스타인에 보존되어 있었으며, 바벨론에서 보내진 사자(使者)들이 그의 말을 수집하러 왔음을 알 수 있다. 여기 실제로 「조하르」가 전하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랍비 요세와 랍비 헤제키아(Rabbi Hezekiah)가 함께 여행을 하고 있었는데, 이야기가 전도서의 한 구절(3:19)에 이르렀다.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느니라.” 두 랍비들은 어떻게 인간 중에 가장 지혜로운 자라는 솔로몬 왕이 “신앙없는 자들을 위한 문을 여는” 말을 쓸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를 논의하는 동안, 뜨거운 햇빛 속에서 긴 여행을 하느라 지친 한 사람이 다가와 마실 물을 청했다. 그들은 그에게 포도주를 주고, 그를 샘으로 인도했다. 원기를 회복하자, 그 낯선 이는 그들에게 이야기하기를, 자신도 같은 신앙을 지녔는데, 온 생애를 바쳐 율법을 연구한 아들의 중재로 이 학문에 입문하게 되었노라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가 오기 전에 그들이 토론하고 있던 문제를 그에게 제시했다. 그 낯선 이가 그 문제를 어떻게 풀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단지 그가 대단한 찬사를 받았고, 그들은 정말 마지 못해 그와 헤어졌다는 점만은 말해 둬야겠다. 얼마 후 그 두 사람의 카발리스트들은 이 남자가 친구들(the Friends, 이는 카발라에서 가르침에 통달한 사람을 칭하는 말이다) 중의 하나이며, 그가 [시메온 벤 요하이와 그 제자들의 말을 수집하기 위해] 바빌로니아 동료들에 의해 팔레스타인으로 파견된 사람이었음을 알았다. 그는 당대의 가장 유명한 대학자들 중 한 사람이었으나, 자기에게 돌아올 존경을 아들에게 돌린 것은 그의 겸손이었던 것이다.
  「조하르」에 기록된 다른 모든 사실들은 분위기가 같고 같은 무대에서 일어난다. 사베이즘(Sabeism)이나 이슬람 신앙과 같은 동양종교에 대한 언급은 자주 있지만, 반면에 그리스도교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는 사실은, 현재와 같이 구성된 「조하르」가 13세기 말엽까지는 유럽에 소개되었을 수가 없음을 입증해 준다. 사아디아기 지적했듯이, 그 가르침들 중 일부는 그 당시보다 이전에 이미 알려져 있었으나, 모세스 데 레온 시대 이전, 나아마니데스(Nahmanides)가 거룩한 땅으로 출발하기 이전에는, 유럽에 「조하르」의 완전한 사본이 없었음이 확실한 것 같다.
  「조하르」에 담긴 사상에 대해 말하자면, 시메온 벤 요하이 자신이 그런 사상을 소개한 사람이 자신이 처음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단지 동료들이 고대서적에서 가르친 것을 제자들에게 되풀이 했을 뿐이다. 그는 특히 장로 예바(Jeba the Elder)와 장로 하무나(Hamuna the Elder)의 이름을 들고 있다. 그는 카발라의 가장 위대한 비밀이 드러나는 순간, 하무나의 그림자와 그를 따르는 의인 70명의 행렬이 들으러 올 것을 바라고 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나 책들이 존재했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조하르」의 저자들은 시메온 벤 요하이를 카발라학의 창시자로 내세우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음을 확실히 하고 싶을 뿐이다.
  가장 진지하게 주목해야 할 사실이 또 하나 있다. 「조하르」가 스페인에서 출판된 지 한 세기 이상이 지나서도, 「조하르」의 내용을 이루고 있는 사상들 대부분을 알고 구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인물 중 한 사람이 모세스 보트릴인데, 그 자신이 말한 바대로, 그는 1409년에 카발라와 그것을 가르칠 때 주의할 점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카발라는 더 순수하고 더 거룩한 철학일 뿐이다. 다만 철학의 언어가 카발라의 언어와 같지는
    않다.... 카발라는 그 논의에서가 아니라, 전통에서 앞서 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스승
    이 제자에게 카발라의 지혜를 전했을 때, 제자는 자신이 배운 지혜에 대해 너무 확신을 가져서
    는 안된다. 그는 스승이 허락할 때까지는 이 학문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이 권리 -즉 메르카바
    에 대해 말할 권리- 는, 그가 자신의 지성을 입증하고, 가슴 속에 심겨진 씨앗이 열매를 맺었을
    때 그에게 허락된다. 그러나 그가 피상적으로 이해했음이 드러나거나, 명상에 의해 일정한 경지
    에 이른 사람들의 상태에 이르지 못했다면, 그에게는 침묵을 권해야 한다.
  보트릴은 「조하르」를 이름조차 몰랐던 것 같다. 그의 책 어느 부분에서도 그 이름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는 수많은 아주 고대의 작가들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데, 그들은 랍비 사아디아, 랍비 하이(Rabbi Hai), 바빌로니아 학파의 수장인 랍비 아론(Rabbi Aaron)등 동방의 거의 모든 작가들이다. 때때로 그는 자기 스승에게서 구전된 가르침에 대해 말하고 있어, 카발라에 대한 지식을 나아마니데스와 모세스 데 레온이 출판한 사본에서 이끌어 온 것이라고 가정할 수는 없다. 시메온 벤 요하이를 가장 유명한 대표자로 보는 카발라체계는 13세기 전에 뿐 아니라 그 후에도 여전히 몇몇 제자들이 쓴 수 많은 전승에 의해 보존되어 전해졌다. 그러나 다른 제자들은 선조들의 방식에 더 충실하게 전승을 기억 속에서 경건하게 지켰다.
   「조하르」에서는 그리스도교시대 제1세기와 제7세기 후반 사이에 나타난 전승들만을 볼 수 있다. 사실 그 전승들을 더 후기의 것이라고 보기는 불가능하다. 「조하르」는 카발라에 속한 것인데, 카발라의 일부인 메르카바에 대한 가르침이 당시에 이미 알려져 있었고, 시메온 벤 요하이 자신이 선배들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더 후대의 것이라고 보기도 역시 불가능한데, 그런 결론을 정당화할 아무런 사실도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논박해야 할 반대의견이 두 개 더 있다. 우리가 앞에서 번역한 구절에 분명히 요약되어 있는, 현대 우주론의 기반이 되는 원리 -코페르니쿠스체계- 가 어떻게 7세기 이전에 알려져 있을 수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꾸준히 제기되었다. 7세기는 우리가 카발라 체계의 주요원리의 기원을 최대치로 잡은 시점이다. 대답은 이렇다. 우리가 「조하르」를 13세기의 위조품이라고 가정한다 하더라도, 이 구절은 폴란드 천문학자(코페르니쿠스-역주)의 탄생보다 앞선 시기의 것이 된다. 「조하르」에 들어 있는 그 사상은 고대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그 사상을 피타고라스학파에게서 나왔다고 한 사실로 증명된다.


  하늘을 전부 연구했다고 주장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지구가 천체의 중심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탈리아학파, 달리는 피타고라스학파라고 알려진 철학자들은 정반대의 학설을 가르친다. 그들의 견해에 의하면, 중심은 불이 차지하고 있으며, 지구는 그 중심을 도는 원운동으로 밤낮이 생기는 하나의 별일 뿐이다.
  
  교부들은 철학을 공격하면서, 창세기가 가르치는 우주론체계와 실제로 조화될 수 없는 이 견해를 그대로 두지 않았다.
  [락탄티우스(Lactantius)가 말했다] 그들의 발이 그들의 머리 위에 있는 사람들이 있고, 모든 것이 거꾸로 되어 있고, 나무와 식물이 거꾸로 자라는 나라들이 있다고 믿는다는 것은 불합리하다.... 우리는 이러한 오류의 씨앗을 지구가 둥글다고 주장한 철학자들 가운데서 발견한다.
  성 어거스틴은 비슷한 말로 같은 주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끝으로, 가장 고대의 「게마라」저자들조차도 대척지(對蹠地)와 지구구체설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이것이 알렉산더가 손에 구체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는 이유라고 예루살렘 탈무드에 써 있다. 그러나 코페르니크스에서 시작된 그 논쟁은 다시 나타나게 된다. 중세에는 우주의 진정한 구조가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프톨레미의 이론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카발라의 외적 역사에 대한 순전히 서지학적(書誌學的) 고찰을 끝맺는다. 우리가 검토한 책들은 열광주의자들이 확신있게 주장해 온 것처럼, 초자연적인 기원을 지닌 것이거나 선사시대와 같은 고대의 것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또한 회의적인 비판자들이 가정하는 것처럼, 야비한 이익을 바란 사기꾼이 만들어 낸, 아무거나 잘 믿는 자들을 노린, 사상도 신앙도 없는 책들도 아니다. 반복하는 것이 되지만, 「세페르 예치라」와 「조하르」 두 권의 책은, 여러 세대 동안 이루어진 작품들이다. 그것들이 담고 있는 가르침의 가치가 어떠하든 그것들은 보존할 가치가 있다. 그것들이 종교적 독재가 횡행하던 시대에 한 민족이 지적 자유를 위해 오랫동안 인내하며 해 온 투쟁의 기념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것들이 담고 있는 체계는 그 기원과 그 체계가 행사해 온 영향력으로 인해, 그 자체로 인류사상사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제2부 교리의 분석


                  제4장 ?세페르 예치라?


  일부 학자들의 맹신과 또 일부 학자들의 회의론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카발라의 기념비라고 인정한 두 권의 책은 이 가르침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자료를 갖추고 있다. 우리는 본문의 의미가 모호하여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주석을 이용할 것이다. 그러나 이 책들을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단편들은 여러 시대의 자료에서 선별하지 않고 비판없이 이끌어 온 것이므로, 일관성이 없다.
  어떤 단편들은 신화적인 내용일 뿐인데, 그 가장 본질적인 요소들은 이미 <욥기>와 <이사야>의 환상에 나타났던 것들이다. 그것들은 매우 상세한 내용을 다루면서, 악령들 뿐 아니라 천사들의 기능에 대해서도 우리에게 알려 주는데, 그것이 말하고 있는 개념들은 너무 오랫 동안 원래부터 신성불가침한 것일 뿐 아니라 굉장한 것으로 생각되었던 지식과 연관되어 있다고 알려진 것이었다. 다른 단편들은 분명히 가장 최근의 것인데, 탈무드의 전승을 닮은 수많은 편견과 편협한 바리새주의(pharisaism: 율법의 문자적 준수를 주장한 유대교 일파. 아집과 편협성의 대명사로 쓰임-역주)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들은 그 이름만 들어도 우상숭배적인 존경심을 일으키게 하는 한 유명한 분파의 견해(시메온 벤 요하이의 학파를 말함-역주)에 자만과 무지가 뒤섞인 것이다. 끝으로, 가장 숫자가 많은 단편들은 모두 고대 카발리스트들의 진정한 신앙을 가르치고 있다. 그것들은 자기 시대의 철학에 다소라도 관심이 있고, 고대 카발리스트들의 제자와 전파자로 살고자 했던 모든 이들의 관심을 끌었다.
  강조해야 할 것은 앞서의 묘사가 「조하르」에만 적용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먼저 분석할 「창조의 책」은 그렇게 포괄적이지도 않고, 우리의 마음을 항상 그렇게 높은 경지로 끌어올리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그것은 놀라운 독창성으로 매우 일관성 있는 체계를 구성하고 있다. 우리는 형언할 수 없이 놀라운 과학의 신비를 찾기 위해 이 책을 탐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를 하나의 공통원리 속에 다양한 요소들을 결합시키고, 우주의 계획을 인식하도록 인간의 이성을 일깨우는 하나의 노력으로서 보려고 한다.
  성서도, 또 어떤 종교서적도 하느님이라는 개념에 의지하지 않고, 또 스스로 최고의 의지와 최고의 사상(하느님의 의지와 사상-역주)의 해석자로 주장하지 않으면서, 그 무대인 세계와 현상을 설명한 일이 없다. 그와같이 <창세기>에서는 여호와의 말씀에 의해 빛이 무에서 나온다. 여호와는 천지를 창조하고 나서, 자신의 작품이 자신의 지혜에 값하는 것인지를 판단한다. 지상에 빛을 부여하고 나서, 그는 태양과 달과 별들을 하늘에 고정시킨다. 먼지를 취해 그 속에 생명을 불어넣어 자기 피조물 중 마지막인 가장 아름다운 피조물(인간-역주)을 창조함으로써 그는 자기 형상을 닮은 인간을 창조한 목적을 설명한다.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책에서는, 그 과정이 거꾸로 되어 있다. 이 역전(逆轉)이 인류의 지성사에서 처음 일어난 것이라면, 그것은 매우 중요한 역전이다 그것은 인간을 하느님의 개념에까지 끌어올리는 세계의 모습이다. 창조주의 지혜와 유일성을 단번에 그리고 동시에 보여주는 것은 창조작업을 지배하고 있는 통일성(unity)이다. 우리가 이미 말한대로, 이것이 이 책 「세페르 예치라」 전체가 -전에도 그랬듯이- 족장 아브라함의 독백인 이유이다. 이 책에 들어 있는 사유로 인해 히브리인들의 조상이 성좌숭배에서 영원한 하느님에 대한 예배로 돌아섰다고 추측된다. 이는 12세기 스페인의 철학자이자 히브리시인인 유다 할레비(Judah Halevi)가 잘 표현했다. “「세페르 예치라」는 하느님이 한 분이심과 전능하신 분임을 여러 가지 예를 들어 가르치고 있다. 그 예들은 한편으로 다양하며 한편으로 통일적이다. 그것들은 그들을 인도하시는 한 분 하느님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지금까지는 모든 것이 이성의 한계 내에 있다. 그러나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을 찾아 그것을 통해 하느님의 생각과 지혜를 알려고 우주를 탐구하는 대신에, 「세페르 예치라」는 사물과, 생각의 표현(signs) 사이에 전체적인 유사성이 있음을 보여 주려고을 노력한다. 또는 지혜가 사람으로 하여금 지혜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간직하게 하는 방법을 보여 주려고 애쓴다. 신비주의는 언제나 지성의 행위를 외적으로 표현하는 일에 대단한 중요성을 부여했음을 주목하라. 언젠가 유명한 프랑스 작가가, 글을 쓰는 기술은 인간의 발명품이 아니라 계시를 통해 인류에게 주어진 선물임을 입증하려고 애를 쓴 일이 있다.
  히브리어 알파벳 22개의 글자와 1에서 10까지의 숫자는 각기 고유한 수치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각각이 다른 모든 숫자의 수치를 표현하고 있다. 이 두 유형의 상징들은 합쳐서 32가지 “불가사의한 지혜의 길”(marvelous paths of Wisdom)이라 부른다. 본문에 의하면 이 길을 가지고, “영원하신 분,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 살아계신 하느님, 우주의 왕, 자비와 은혜가 충만하신 하느님, 측량할 수 없는 하느님, 영원 가운데 거하시는 분, 그 이름이 높고 거룩하신 분이 자기 이름을 세우셨다.”
  이 32가지 지혜의 길에 우리는 세 가지 다른 형태를 추가해야 하는데, 이것들은 그 의미가 매우 모호한  세 개의 용어로 표현된다. 그것은 희랍어 용어인 “주체”, “객체”, “사유행위 자체”와 매우 유사하다. 이미 지적했듯이, 이 용어들은 본문에는 낯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이 유다 할레비에게는 아주 다른 의미로 이해되었다는 것을 지적해야 한다. 그것은 본문의 성격에도 모순되지 않고, 그 용어의 어원에도 모순되지 않는다. 그는 다음과 같이 자기 견해를 피력했다.
   스파르(s'far)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계수(計數), 창조된 것들(the created bodies)의 무게를 재는 것을 뜻한다. 한 육체를 조화롭고 유익하게 조정하기 위해 필요한 이 계수는 숫자에 근거해 있다. 전개(수학용어임-역주), 측정, 무게, 운동들의 상호관계, 음악적조화 -이 모든 것은 스파르(s'far)라는 말로 표현된 수에 근거해 있다. 빌딩의 이미지가 먼저 건축가의 마음에 생기지 않으면, 빌딩이 건축가의 손을 통해 나올 수 없다. 십푸르(Sippur)는 언어, 또는 오히려 하느님의 언어, 살아계신 하느님의 소리를 뜻한다. 이 언어가 말 속에서 가정한 형상을 존재하게 했다. 즉 ‘빛이 있으라’, ‘하늘이 있으라’ 등이다. 사물이 존재하게 되면 말이 별로 필요없다. 이것이 또한 세페르(sefer)인데 글이란 뜻이다. 하느님의 글은 그의 피조물이며, 하느님의 말씀이 그의 글이며, 하느님의 의지가 그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본성 안에는 스파르, 십푸르, 세페르가 일체이지만, 인간의 인식에는 그것이 셋이다.
  이 해석은 이 이상한 체계를 아주 적절히 설명하고 있다. 이 체계는 그 이상(理想)을 우주의 각 부분에서 뿐 아니라, 전체에서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알려진 상징을 가지고 그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세피로트는 10개의 숫자 또는 추상적 계수를 나타내는 말이다 -여기서는 제일 먼저 그런 뜻으로 나타난다. 그것들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가장 일반적인, 그러므로 가장 본질적인 형태로서- 말하자면 우주의 범주들로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계의 기본요소 또는 불변의 원리를 추구할 때, 항상 10이라는 수를 만날 수 밖에 없다.
  열 개의 세피로트가 있다. 아홉이 아니라 열이다. 열 하나가 아니라 열이다. 당신의 지혜와 당신의 지성으로 그것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라. 그것들에 대해 당신의 탐구, 당신의 사유, 당신의 지식, 당신의 사상과 상상력을 끊임없이 훈련하라, 그 원리에 모든 것을 맡겨라. 그리고 창조주의 기본원리에 근거하여 그 분을 되찾으라.
  다시 말하면, 지성의 눈에는 세계의 존재 뿐 아니라 하느님의 행위도 이 열 개의 수라는 추상적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이 열 개의 수 각각은 시간이든 공간이든 또 다른 특질이든 그것의 어떤 무한성을 나타낸다.
  적어도 이것이 우리가 다음 명제에 부여하는 의미이다. “미래에든 과거에든, 선에서든, 악에서든, 높이에서든, 깊이에서든, 동에서든, 서에서든, 남에서든, 북에서든, 10개의 세피로트에는 끝이 없다.” 여기서 무한자를 생각하는 상이한 관점이 더도 덜도 아닌 10이라는 점을 주목하라. 이 구절에서 우리는 모든 세피로트의 일반적 특성 뿐 아니라, 그것들이 어떤 오소들과 원리들에 해당하는지를 알게 된다. 한 쌍의 세피로트는, 비록 서로 대립할지라도, 한 개념-하나의 무한-의 일부이다. 본문은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10개의 세피로트는, 손가락이 10개 있고 5쌍이 있지만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과 같다.” 마지막 말이 앞의 모든 말에 대해 증거일 뿐 아니라 설명이기도 하다.
  세피로트의 개념은 외적인 사물을 통해 나타난 상관관계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아주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엄격히 분석해 보면, 그것은 무한과 절대적 통일성, 시간. 공간의 개념 및 그것이 없으면 감각의 영역에서 선도 악도 있을 수 없는 어떤 불변의 질서에 속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 적어도 겉보기에는 물질적 요소에 더 큰 중요성을 부여하는 해석이 있다.
  첫 번째 세피로트, 즉 ‘하나’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영이다. 그 이름 복되시며, 영원에 거하시는 이의 이름 복되시도다! 그것은 영, 목소리, 그리고 말씀 즉 성령이다.
  ‘들’은 영에서 나오는 호흡인데, 그것은 22개의 글자를 내포하고 있으나 단 하나의 호흡을 이룬다.
  ‘셋’은 호흡 또는 공기에서 나오는 물이다. 하느님은 물 속에서 어둠과 공허와, 진흙과 점토를 파내서 그것을 낙원의 모습으로 만들었다.
  ‘넷’은 불인데, 물에서 나왔으며, 하느님은 그것으로 자신의 영광의 보좌와 천상의 수레바퀴(Ophanim), 세라핌과 시종천사들을 만드셨다. 그 분은 세 가지 모두를 가지고 자신의 거처를 지으셨으니,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바람을 사자(使者)로 삼으시고, 타오르는 불을 시종으로 삼으시는 분.’
  그 다음의 6개 숫자는 세계의 상이한 극(極)들, 다시 말해서 기본적인 4방위(동서남북)와 상하를 나타낸다. 그것들의 상징은 여호와의 이름을 이루는 첫 번째 세 개의 히브리 글자(YHWH라는 이른바 신성 4문자중 YHW를 말함-역주)로 만들 수 있는 여러 가지 말들이다.
  이와 같이 그 안에 실제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공간의 6방위와는 달리,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요소들(공기. 물. 불의 생성 과정을 말함-역주)이 서로에게서 나와 점점 더 물질적으로 될수록 공동의 기원인 성령에게서 점점 더 멀어진 것이다. 이것이 빛의 방사설이라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세상이 무에서 나왔다는 대중의 신앙을 부정하는 교설이 아닌가? 다음의 말은 그 점을 분명하게 해 준다. “10 세피로트의 끝은 처음과 붙어 있다. 이는 화염이 횃불에 붙어 있는 것과 같다. 주님은 한 분이시며 그 분에 버금가는 자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는 그 한 분 앞에서 무엇을 헤아리려고 하는가?”
  우리가 대단한 신비를 다루고 있음을 인식하게 하려고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네 입을 닫고 말하지 말며, 네 마음을 닫고 생각치 말라. 네 마음이 너무 분주하거든 원래의 자리로 돌려 보내라. ’달려 돌아가라‘(run and return)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계약이 이루어진 것은 이 구절에 근거한 것이다.“ 마지막 말은 아마 카발리스트들이 자신들의 원리를 일반대중에게서 숨기기 위해 사용한 맹세문에서 쓰였을 것이다. 두 구절 중 첫 구절에 들어 있는 탁월한 비유는 「조하르」에서 자주 반복되어 나오는데, 그것이 확대되고, 전개되어 하느님에 대해서 뿐 아니라 영혼에 대해서도 적용되고 있음을 볼 것이다. 외적인 특성에서 뿐 아니라 의식에서도 존재의 모든 영역에서 언제나 방사를 통한 창조는 불꽃, 또는 빛이 비춘다(radiation)고 표현되었다.
  여기에 인류의 사상사에서 유명한 또 하나의 이론이 뛰어난 모습을 하고 나타나 세피로트 이론과 합체되었는데, 그 두 이론 사이의 구별은 실제보다 더 분명하다. 그 두 번째 이론은 말씀, 또는 하느님의 말씀의 이론으로, 하느님의 영과 동일시되며, 절대적 형상(form)으로서 생각될 뿐 아니라, 만물을 산출하는 요소요 우주의 본질(substance) 자체라고 여겨진다. 실로 옹켈로스의 갈대아 역 성서에서처럼, 하느님이 성서의 설화 속에서 인간으로서 개입할 때마다, 그것이 하느님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상이나 영감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신인동형론(神人同形論)을 피하는 것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세페르 예치라」는 분명히 상세하고도 명백하게 서술하기를, 성령과 목소리와 말씀은 하나이며 같은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그 자체에서 물질적 특성을 지닌 모든 요소를 제거해 버리는 데 성공했다. 마지막으로,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언어로 이른 바 “사물의 물질적 원리”일 뿐 아니라, 세계로 화한 말씀이다. 더욱이 카발라의 이 부분이 인간이 아니라 우주만을 이루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처음의 10개의 숫자들에 대한 이러한 고찰은 「창조의 책」에서 매우 분명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것들은 우주 전반에 적용되며, 형태보다 실체와 더 깊은 관계가 있다. 우리가 이제 하려고 하는 고찰에서는, 우주의 여러 부분들을 서로 비교하고, 전에 그것들을 공통원리 속으로 해소시키려 했듯이, 이제는 그것들을 공통의 법칙 아래로 이끌어 가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본질에보다 형상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그것들은 22개의 히브리 알파벳을 기반으로 한다. 그러나 그 책의 첫부분에 나오는 이러한 사상의 상징에 예외적인 역할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 22개의 글자는 그것들이 나타내는 소리(sounds)와 관련지어 생각할 때만, 말하자면 지성적 세계와 물질 세계 사이의 경계선 위에 설 수가 있다. 그것들이 하나의 물질적 요소, 즉 호흡이나 공기로 해소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모든 언어에 불가결한 글자들이며, 결국 마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또는 불변의 측면인 것이다.
  그 체계 전체로 보나,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 보나, 위에 인용된 말들은 다른 해석의 여지가 없다. ‘둘 [우주의 두 번째 원리]은 영에서 나온 환경(the atmosphere)이다. 그것은 22개의 글자가 새겨진 공기이다. 그 글자들은 다 함께 단일한 하나의 호흡을 이룬다.“ 이렇듯 인간 목소리의 가장 단순한 발음인 알파벳이 여기서는 플라톤 철학의 개념들과 아주 비슷한 역할을 한다. 우리가 우주 전체에서 지고의 지성(a Supreme Intelligence)을 인식하는 것은 그 글자들이 있음으로써이며, 그것들이 사물에 남긴 영향 때문이다. 그리고 끝으로, 성령이 자연 속에 자신을 계시하는 것도 그것들을 통해서이다. 그것이 다음 명제의 의미이다. ”22개의 글자에 형태와 수치를 부여함으로써, 또 그것들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섞어 조합함으로써, 하느님은 형태를 지닌 모든 것과 형태를 지닐 모든 것의 혼을 만드셨다. 이 글자들 위에 거룩하신 분(축복이 있으소서!)은 심오하고 거룩한 자신의 이름을 세우셨다.“
  “세 어머니”, “7개의 중복글자(doubles)', "12개의 단일글자(simples)"등으로 불리는 그 글자들은 여러 부류로 나뉘어졌다. 글자들의 기능이 지금까지 살펴 본 수의 구분으로 완전히 대치되었다. 아니 좀 더 명확하게 말해서, 옳든 그르든, 자연의 세 영역 안에서 3, 7, 12 라는 숫자를 발견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그 세 영역이란 다음과 같다.
  1. 세계의 일반적 구성
  2. 해(年)의 분류, 또는 해가 기본단위인 시간의 배분
  3. 인간의 구조
  명확히 서술되어 있지는 않지만, 여기서 우리는 대우주와 소우주의 개념, 또는 인간이 단지 우주의 한 이미지, 말하자면 축소판이라는 믿음을 발견한다.
  세계의 일반적 구성에서는, 어머니들-말하자면 3이란 숫자-이 물, 공기, 불이라는 요소들을 나타낸다. 불은 하늘의 실체요, 물은 압축에 의해 땅의 실체가 되고, 공기는 이 두 대립적 원리 사이에 놓여 있다. 이 두 원리를 권위로써 나누고 또 화해시킨다. 3은 또한 한 해의 기본적 계절들을 생각나게 한다. 여름은 불에 해당하고, 겨울은 일반적으로 동양에서 비(雨)나 물이 우세한 것으로 표현하고, 온화한 계절은 봄과 가을의 결합에서 나온다. 끝으로, 똑같은 삼위일체가 인체구조에서도 보이는데, 머리, 가슴, 배가 그것이다. 내가 잘못 보는게 아니라면, 이것들은 현대의 어떤 의사가 “생명의 삼각대(三脚臺)”라고 부른 기관들의 기능이다.
  다른 모든 신비적 조합(組合)에서와 마찬가지로 3이라는 숫자는 아주 필요불가결한 형태여서 도덕적 인간의 상징인데, 도덕적 인간에게는 “공로의 저울, 죄의 저울, 그리고 둘 사이를 결정하는 법의 언어”를 볼 수 있다. 
  7개의 쌍은 대립물, 또는 두 개의 상반되는 목적에 기여하는 것들을 나타낸다. 우주에는 7개의 항성이 있어, 그 영향이 때로는 좋고 때로는 나쁘다. 한 주에는 7(日) 7야(夜)가 있고, 인간의 몸에는 7개의 출입구가 있으니, 두 눈, 두 귀, 두 개의 콧구멍과 입이다. 끝으로 7이라는 숫자는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행복한 일과 불행한 일을 나타내는 숫자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류는 너무 임의적이어서 이 책에서는 다루지 않겠다.
  12개의 단일 글자는 점성학의 12성좌와 1년의 12개월, 인체의 주요한 부분, 우리의 가장 중요한 특성들에 해당한다. 즉 보기, 듣기, 냄새맡기, 말하기, 영양섭취, 생식, 행위 또는 접촉, 운동, 분노, 웃음, 생각, 잠이 그것이다. 이는 탐구정신의 시작인데, 그 방법이 놀랍기는 하지만, 그것 자체가 독창성의 증거이다.
  이와 같이 12개의 알파벳으로 표현되는, 지성의 물질적 형태는 또한 존재하는 모든 것의 형태이다. 인간, 우주, 시간을 넘어서면 무한 외에는 아무 것도 인식될 수 없다. 이 세 개념은 “진리의 충실한 증인들”이라고도 불린다. 변화가 있기는 해도, 각각은 자체의 중심과 질서를 지닌 체계를 구성한다. 본문에 의하면, “1이 3보다, 3이 7보다, 7이 12보다 우세하지만, 그 체계의 각 부분은 다른 부분과 분리될 수 없다.” 천상의 용(龍)은 우주의 중심이며, 가슴은 인간의 중심이다. 끝으로 천궁도의 회전은 해(年)의 기초를 구성한다. 최초의 것은 왕좌에 오른 왕과 비교할 수 있고, 두 번째 것은 신하들 가운데 있는 왕과, 세 번째는 전쟁 중인 왕과 비교할 수 있다.
  우리는 이 비유가 우주를 지배하는 완전한 질서와 인간의 통일성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인간 안에 존재하는 모순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사실 덧붙이자면, 인체의 12개의 주요기관은
  전쟁을 하기 위한 것처럼 서로서로 동맹관계에 있다. 그것들 중 셋은 사랑을 하기 위한 것이고, 셋은 미움을 위한 것이며, 또 셋은 생명을 주는 것이고, 나머지 셋은 죽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렇듯 악은 선과 마주하는 것이니 선이 선만을 낳듯이, 악에서는 악만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즉시로 아무것도 다른 것 없이는 이해될 수 없다는 설명이 나온다.
  끝으로, 이 세 체계 위에, 인간 위에, 우주 위에, 시간 위에, 세피로트의 숫자들과 알파벳 글자 위에 “자신의 거룩하신 거처에서 영원무궁도록 만물을 다스리시는 진실한 왕이신 주님”이 계시다. 「세페르 예치라」의 진실한 결론을 이루는 이 말 다음에, 극적인 절정이 오는데, 그것은 우상숭배자 아브라함이 참 하느님의 종교로 개종하는 것이다.
  그 체계는 모든 형태의 이원론을 절대적 통일성으로 대체하는 데서 극치에 이른다. 그 이원론은 성서의 이원론 뿐 아니라, 이교철학의 이원론도 의미하는데, 그것은 물질 속에서 영원한 본질을 발견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법칙은 성서의 이원론 뿐 아니라 하느님의 의지와 언제나 일치하지는 않는다. 창조에 대한 성서적 개념은 하느님의 의지, 그러니까 무한한 존재를 세계의 유일한 원인, 유일하게 실제적인 근원이라고 본다. 그러나 동시에 이 둘, 즉 우주와 하느님은 절대적으로 구별되고 다른 두 개의 실체(substances)라고 본다. 「세페르 예치라」에서는, 하느님이 참으로 절대적 존재이므로 규정할 수 없다고 본다. 즉 권능과 존재가 충만하신 하느님은 글자들과 숫자들 위에 계신다. 그러나 그 밖에 계신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이 세계에서 구별해 내는 원리와 법칙 밖에 계시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각 요소들은 하나의 우월한 요소 속에 근원을 두고 있고, 모든 요소들은 말씀, 또는 성령 속에 공동의 기원을 두고 있다. 우리가 생각을 표현하는 저 불변의 기호(signs)를 발견하는 것도 말씀 속에서 인데, 그 기호는 모든 존재의 영역에서 이러저러한 형태로 자신을 되풀이해 나타내며, 그 기호들을 통해 존재하는 모든 것은 똑같은 계획의 표현으로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계측할 수 있고 규정할 수 있는 모든 것 중에 가장 미묘한 것이며 최초의 수(數)인 말씀 자체는, 가장 섬세하고 가장 절대적인 하느님-최고의 사상 또는 지성-의 현시(現示)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러므로 가장 높은 의미에서, 하느님은 물질이자 우주의 형상이다. 그런데 그 분은 <이> 질료요 <이> 형상일 뿐 아니라, 그 분 밖에서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고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분의 존재는 모든 것의 바탕에 있으며, 그러므로 만물은 그 분의 흔적(imprint)을 지니고 있고, 또한 만물은 그 부분의 최고 지성의 상징이다.
  이 대담한 추론은 「조하르」에 나타난 사상의 기초이다. 그러나 그 설명은 우리가 개괄한 것과 아주 판이하게 다르다. 이 세계의 구체적 형상들과 이 세계에 종속된 원리들을 귀납적으로 비교하여, 최고원리, 보편적 형상, 끝으로 절대적 통일성에까지 점차적으로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절대적 통일성이라는 결론을 주장한다. 실로 모든 영역 사이의 관계는 외적인 형식에 의해 깨어지지만, 그것을 관통하는 종합적 특성은 명명백백하다.
  다음으로, 우리는 「밝음의 책」(또는 「광휘의 책」)(Book of Brightness, or Book of Splender)은 「창조의 책」이 끝난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후자의 결론이 전자의 전제가 된다. 두 번째로, 더 중요한 차이점은 인간 마음의 보편적 법칙에 대한 설명에서 볼 수 있다. 우리는 글자들과 숫자들을 대신하여 내적인 형태, 불변의 개념을 -한 마디로 그 말의 가장 넓고 가장 고상한 의미에서 이데아(ideas)를- 보게 된다. 하느님의 말씀인 로고스는 자연 속에 외적으로 자신을 나타내지 않고 제일 먼저 인간과 지성 속에 나타난다. 그것은 원형(Archetype), 또는 천상의 인간(Celestial Man), 즉 아담 카드몬(Adam Kadnom)이라 불린다.
  비할 바 없이 오래된 어떤 단편들 속에서, 절대적 통일성(absolute unity)에 치우치지 않고, 생각 자체(thought itself)를 보편적 본질로 여기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빛의 방사(emanation)라는 좀 조야한 이론 대신에 이 능력(power:'생각‘을 말함-역주)이 정연하게 발전한다는 이론을 본다. 고대 히브리인들 속에서 오늘날[1843-영역자 주] 독일을 지배하고 있는 철학사상(독일관념철학을 말함-역주)을 찾아보려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독일 철학사상의 원리, 심지어는 헤겔학파가 독점하고 있는 표현들까지도 우리가 지금 밝혀 보려고 하는 잊어버린 전통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또 그렇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카발라 속에서 상징이 이렇듯 이데아로 전환된 것과 같은 일이, 모든 위대한 철학 체계와 인간 지성의 모든 위대한 개념 속에서 반복된다. 합리주의의 기반이 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 지닌 언어적 형상이 칸트의 범주론으로 발전되지 않았는가? 관념론에서는 피타고라스와 수의 체계가 플라톤의 미묘한 이론보다 먼저 있지 않았는가? 사회사상에서도 모든 사람들이 같은 혈통에서 나온 것으로 밝혀지지 않았는가? 인간의 의무와 권리가 동일하다거나 본성과 기능의 하나라고 하는 데서 그 형제됨을 발견하기 전에, 그 형제됨은 육체 속에서 먼저 발견되지 않았는가? 여기는 더 이상 일반적인 사실을 논할 자리는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세페르 예치라」와 「조하르」 사이의 관계가 분명해졌기를 바란다.


       제5장 「조하르」:카발라의 비유적 방법
  「조하르」의 저자들은 자신들의 사상을 가장 애매하고 가장 논리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모세오경에 대한 간단한 주석으로 표현했다. 그런데 그들이 성서의 해석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그들이 성서의 평범한 의미로부터 모든 것을 이끌어 내면서, 그것을 지지하기 위해 성서 주석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그들의 해석법이며, 일반적으로 말해서, 상징적 신비주의에는 그 외의 다른 기반이 없기 때문이다. 카발리스트들 자신의 말에 따르면,
       율법에서 단순한 이야기와 보통의 말 밖에 보지 못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만일 그렇
      다면 우리는 오늘날에도 높이 찬양받을 만한 율법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단순한 문구만을 찾으려 한다면, 우리는 지상의 율법학자들-그들 중 많은 사람이 훌륭하지
      만-에게 가기만 하면 될 것이다. 그들에게 제안하여 그들의 말과 모범안을 따라 율법을 만
      들면 될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율법의 모든 말씀은 높은 의미와 미묘한 신비
      를 담고 있다.
  율법의 암송은 율법의 옷이다. 그 옷을 율법 자체로 여기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다윗이 이 말을 했을 때는 그것을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들을 (즉 율법의 옷 밑에 숨겨진 것들을[시편119:181]) 보도록 제 눈을 열어 주소서’
  좋은 옷을 입은 사람들을 보면, 그 옷 외에 더 이상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옷을 가치있게 하는 것은 몸이다. 그리고 훨씬 더 소중한 것은 영혼이다. 율법 또한 그 몸을 갖고 있다. 율법의 몸이라 부를 수 있는 계명들이 있으며, 그것들을 모아놓은 보통의 암송은 그 몸을 가리는 옷이다. 생각이 부족한 사람들은 율법의 암송이라는 옷만을 본다. 그들은 그 밖에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며, 이 옷 밑에 숨겨진 것을 보지 못한다. 많이 배운 사람은 옷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그 옷이 가리고 있는 몸에 대해 생각한다. 끝으로 최고의 왕[하느님-역주]의 종들인 현자들은 시나이 산에 거주하는데, 그들은 모든 것의 기초인 영혼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영혼은 율법 자체이다. 때가 오면, 그들은 율법 속에서 숨쉬고 있는 저 영의 영(the spirit of that spirit)을 관상하게 준비될 것이다.
  이렇게 일반사람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신비한 의미를 소박하게, 또는 교묘하게 위장함으로써, 카발리스트들은 먼저 자신들이 성서를 구성하고 있는 역사적 사실들과 적극적인 교훈들을 넘어서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공개적으로 종교적 권위와 부딪치지 않고 스스로에게 완전한 자유를 보장해 주는 그들의 유일한 방법이다. 아마도 그들이 자신들의 양심을 위안할 필요를 느꼈을 수도 있다. 우리는 똑같은 정신이 훨씬 더 분명한 형태로 표현된 예를 볼 수 있다.
  에서, 하갈(아브라함의 첩-역주), 라반, 바알람의 나귀, 바알람 자신이라는 말과 같이 만일 율법이 보통의 말들과 암송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면, 그것이 왜 진리의 율법, 완전한 율법, 하느님에 대한 충실한 증언이라 불리는가? 현자들은 왜 그것을 금이나 진주보다 더 귀하게 여겨야 했는가?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모든 말씀은 가장 높은 의미를 숨기고 있다. 모든 암송구절은 그것이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더 높고 더 거룩한 이 율법이야말로 진정한 율법이다.
  교부들의 저작에서 비슷한 견해와 표현을 보게 되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오리겐(Origen)이 말했다] 우리가 율법의 글자들을 고수하고, 유대인들과 사람들이 이해했던대로 율법에 쓰여진 것을 이해해야 한다면, 나는 그런 율법을 우리에게 주신 분이 하느님이라고 주장하기를 부끄러워해야 한다. 나는 인간의 법, 예컨대 아테네, 로마 또는 라케데모니아(Lacedemonia)의 법에서 더 위대하고 더 합리적인 것을 많이 발견하기 때문이다.
  분별력이 있는 인간이라면 도대체 누가, 아침과 저녁 이야기가 나오는 창조의 첫째, 둘째, 셋째날이 태양과 달과 별이 없이 존재할 수 있었다고 믿을 수 있겠는가? 첫째 날에는 하늘조차 없었다. 하느님이 동쪽에 위치한 에덴 동산에서 나무를 심는 농부와 같이 일하셨다고 믿을만큼 저급한 인간이 어디에 있을 것인가? 또 나무들 중에는 생명나무가 있고, 다른 나무 하나는 선악을 알게 할 수 있다고 믿으란 말인가? 나는 이러한 겉모습 뒤에  신비가 숨겨져 있다고 보는 데 주저할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끝으로, 오리겐은 역사적 의미와 도덕적 의미, 그리고 신비적 의미를 구별했다. 그러나 그는 옷이라는 직유(直喩)를 사용하는 대신에, 역사적 의미를 몸에, 도덕적 의미를 혼에, 신비적 의미를 영에 비유했다. 거룩한 말씀과 이러한 임의적 해석 사이에 명백한 관계를 설정하기 위해 고대 카발리스트들은 임의적인 체계에 의존했는데, 「조하르」에서는 이것을 아주 드물게 볼 수 밖게 없으나, 현대 카발리스트들은 광범하게 사용하고 있다. 그러한 체계가 3개 있다. 첫째는 게마트라(Gematra)인데, 하나의 단어를 같은 수치를 가진 다른 하나의 단어로 바꾸는 것이요, 둘째는 노타리콘(Notarikon)인데, 한 단어의 각 글자가 다른 단어의 첫글자가 되는 것이며, 셋째는 토무라(Tomurah)인데, 글자의 위치가 바뀐다. 예컨대, 마지막 글자들이 처음으로 오고 그 반대로도 된다. 이러한 체계들이 어떤 중요한 사상의 기초가 되는 것이 결코 아니며, 이는 많이 논의된 바 있으므로, 우리는 우리 연구의 본질적인 주제로 옮겨 가려 한다. 그것은 성서주석이라는 것을 통일시키는 기반이 되는 교리이다. 
  우리는 먼저「조하르」의 가장 오래된 단편들에 나타난 하느님의 본질과 특성을 밝혀 볼 것이다. 다음에는 이 단편들이 나타내는 모든 존재의 창조 또는 하느님과 우주의 관계에 대한 사상을 살펴볼 것이다. 끝으로, 인간을 고찰할 것인데, 「조하르」에서 무엇을 인간의 주된 측면으로 인식했는지, 인간의 기원과 본성과 운명을 어떻게 묘사했는지를 볼 것이다.


 제6장 「조하르」:하느님의 본질에 대한 카발라의 이해


  카발리스트들은 하느님에 대해 두 가지 방식으로 말하는데, 이 사실이 그들의 사상의 통일성을 손상시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들이 하느님을 정의하고, 그 특성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 본질에 대한 엄밀한 개념을 제시하고자 할 때, 그들은 이 주제에 필요한 완벽한 명료함으로, 형이상학의 언어로, 그리고 형이상학의 표현을 써서 말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그들은 하느님을 전혀 파악할 수 없는 존재, 우리가 상상으로 부여하는 어떤 형태에서도 영원히 벗어나 있는 존재로 표현한다. 그럴 때 그들의 표현은 시적이고 상징적이며, 상상력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상상력과 싸운다. 그 때 그들은 신인동형론을 분쇄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이게 되는데, 그들은 신과 인간의 비율이 엄청나게 크다고 주장함으로써, 어떤 비유도 할 수 없게 된 인간의 놀란 마음이 무한이라는 개념을 믿지 않을 수 없도게 한다.
  <은폐의 책>은 거의 이런 식으로 쓰여져 있다. 그러나 거기서 쓰고 있는 비유들은 너무도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드라 랍바>의 한 구절로 우리의 논점을 입증해 볼 것이다. (<이드라 랍바>라는 이 두 단어는 ‘큰 모임’을 뜻한다. 이 제목이 붙은 단편들은 시메온 벤 요하이가 자신의 제자 10명에게 전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 후에 그들 중 일부가 죽어 7명이 되었을 때, 그들은 ‘작은 모임’을 만들었으며, 벤 요하이는 임종시에 그들에게 이야기했다)
  시메온 벤 요하이는 곧 제자들을 불렀다. 그는 그들에게 주님을 위해 일할 때, 즉 율법의 참 의미를 알릴 때가 왔다고 말했다. 자신의 날은 다 세어졌으며(죽을 때가 되었다는 뜻-역주), 일꾼은 적은데, 주님의 목소리는 점점 더 급박하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밝힐 신비를 제자들이 결코 모독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게 했다. 그들은 들판으로 자리를 옮겨 나무그늘에 앉았다. 시메온이 막 침묵을 깨려할 때, 한 목소리가 들렸고, 그들은 두려움으로 무릎이 서로 부딪쳤다. 저 목소리는 뭘까? 그것은 이야기를 들으러 모인 천상의 모임에서 나온 목소리였다. 랍비 시메온이 기뻐 외쳤다. “주여, 저는 당신의 목소리 [하박국 3:1] 를 들었나이다. 그러나 저는 예언자가 ‘저는 두렵습니다’라고 한 것과 같은 말을 덧붙이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은 두려워할 때가 아니라 사랑할 때이기 때문이니, 이렇게 기록된 바와 같습니다. ‘너는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할 것이니라!’
  이 엄숙한 서론에 이어 하느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완전히 비유적이고 긴 묘사가 나온다. 부연하면 다음과 같다.
  하느님은 오래 전부터 계신 자들 중 오래 전부터 계신 분이며, 신비 중의 신비요, 알려지지 않은 이들 중 알려지지 않은 분이시다. 그 분은 자신에게 고유한 형상을 지니고 계셔서, 우리에게는 한없이 오래되신 분처럼, 오래되신 분 중 오래되신 분처럼, 알려지지 않은 이들 중 알려지지 않은 분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그 분을 아는 형태 속에서도, 그 분은 여전히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분으로 계신다. 그 분의 옷은 흰색처럼 보이고, 그 분의 모습은 눈부시다.
  그 분은 자신의 의지대로 다루시는 격렬한 불꽃의 보좌에 앉아 계신다. 그 분의 머리에서 나오는 흰 빛은 40만 세계를 비추신다. 이 흰 빛은 오는 세상에서 의인들이 받을 유산이 된다. 하루하루의 날이 그 분의 두뇌에 의해 불 밝혀진 1만 3천 세계를 본다. 그 분은 그것들을 지탱하시니, 그 분만이 그 무게를 견디신다. 그 분이 머리에서 이슬을 뿌리시니 죽은 자들이 새 생명으로 살아난다. 그것이 이 구절 [이사야 26:19]의 의미이다. ‘당신의 이슬은 빛의 이슬과 같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성자들의 자양분이 되는 것은 이 이슬이다. 그것은 오는 인생에서 의인들을 위해 준비된 만나이다. 그것은 ‘성스러운 열매’의 밭에 떨어진다. 그 이슬은 모든 색을 포함하고 있는 다이아몬드처럼 흰색이다. 그 얼굴의 길이는 두개골의 꼭대기에서부터 7천 3백만 세계이니, 긴 얼굴이라 불리운다. 그것이 오래되신 분 중 오래되신 분이라 이름이 붙은 이유이다.
  이 마지막 구절에서, 길고 거대한 얼굴은 하느님의 실체인데, 우리가 곧 보겠지만 첫 번째 세피로트이다.
  그러나 「조하르」의 나머지 부분을 이 예만 가지고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했다면, 우리는 진리를 놓친 것이다. 여기서도 고상함과 장엄함보다 동방사람들이 종종 비유를 마구 쓰는 데서 나타나는 기묘함, 편견, 관습 등이 더 분명히 나타난다. 생명과 지식의 영원한 불을 나타내는 빛나는 머리는 해부학적 연구의 주제가 된다. 이마나 얼굴, 눈이나 두뇌, 머리칼이나 수염, 그 어느 것도 빠뜨리지 않고, 모든 것이 무한을 묘사하는 수(數)와 명제를 표현할 기회가 된다. 이는 분명히 신인동형론, 나아가 물질주의라는 비난을 받게 하는 것이었다. 현대의 어떤 작가들도 카발리스트들에게 이런 비난을 했다. 그러나 그 비난이든 그것을 자극한 표현방법이건간에 더 이상 고려할 가치는 없다. 오히려 철학이나 인간 지성사에 매우 흥미있는 것으로 보이는 주제가 들어 있는 단편들 몇 개를 번역해 보자.
 첫번째 단편은 매우 길다. “거룩하신 자가 가라사대,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나로 그와 동등이 되게 하겠느냐? 하시니라”라는 이사야서의 말씀(40:25)이 진정 무슨 뜻인지를 밝힌다는 구실 하에, 그 단편은 열 세피로트의 창조 또는 하느님의 주요한 특성들과 하느님 자신의 본성을 설명하고 있다. 하느님은 자신의 본질 가운데 은폐되어 계시지만,
  세상에 어떤 형태도 만들기 전에, 어떤 이미지도 낳기 전에, 하느님은 형태도 없고 아무 것과도 유사함이 없이 홀로 계셨다. 창조 전에, 그 분은 형상이 없으셨으니, 누가 그 때의 그 분을 인식할 수 있으랴? 
 그러므로 어떤 이미지로도, 어떤 형상으로도, 심지어 그 분의 거룩한 이름으로도, 심지어 한 글자 또는 이오타(iota) 하나로도 그 분을 표현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이것이 ‘주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 너희는 아무 형상도 보지 못했다’고 하신 말씀(신명기 4:15)의 의미이다. 말하자면, 너희는 어떤 형태나, 어떤 이미지로 표현할 수 있는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천상의 인간(아담 엘-로-오, Adam-el-lo-oh)의 형상을 만드신 이후에는, 그 분은 그것을 전차(메르카바)로 사용하여 내려오셨다. 그 분은 여호와라는 거룩한 이름의 형태로 불리기를 원하셨다. 그 분은 자신의 특성들에 의해 알려지기를 원하셨으니, 그 특성들 하나하나에 의해 알려지고자 하셨다. 그리하여 자신이 자비의 하느님, 정의의 하느님, 전능하신 하느님, 만군의 하느님, 스스로 계신 분이라 불리는 것을 스스로 허락하셨다. 그 분의 의도는 자신의 특성을 알리고, 그 분의 정의와 자비가 인간의 행위 뿐 아니라 세상을 어떻게 감싸고 있는지 알리려는 것이었다. 그 분이 자신의 빛을 모든 피조물에게 발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어찌 그 분을 알 수 있었겠는가? ‘온 땅이 그의 영광으로 충만하도다’(이사야 6:3)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사실일 수 있겠는가? 그 분을 감히 그 분 자신의 특질 중 하나하고라도 비교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그 분은 흙에서 태어나 죽도록 운명지어진 인간과는 조금도 같지 않으시다. 그 분은 모든 피조물과 모든 특질을 넘어 계신 분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특징과 이미지와 모습을 제거했을 때는, 이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남는 것은 바다에 비유될 수 있다. 바닷물은 그 자체가 무한하고 형태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닷물이 땅 위로 흐르면 어떤 형상(Dimyon)이 생긴다. 다음과 같은 계산을 할 수 있다. 바닷물의 근원과, 땅을 덮기 위해 거기서 솟아난 것, 이들이 둘을 이룬다. 다음에 엄청난 깊이의 구덩이를 팠을 때 웅덩이가 생기듯이, 거대한 웅덩이가 생긴다. 그 웅덩이가 근원에서 솟아나온 물로 가득찬다. 그것이 바다 자체이며 세 번째가 된다. 엄청난 깊이의 웅덩이가 일곱 개의 운하로 나뉘는데, 그것들은 일곱 개의 긴 그릇과 비슷하다. 근원과 분출물과 바다와 일곱 개의 그릇이 합쳐 열이 된다. 만일 그 그릇들을 만든 장인(匠人:Master)이 그것들을 부수면, 그 물은 근원으로 돌아가고, 물 없는 그릇 조각들만 남는다. 이와 같이 원인 들 중의 원인(the Cause of Causes)이 10 세피로트를 낳은 것이다. 왕관(Crown)은 끝없는 빛이 나오는 근원으로, 최고원인(Supreme Cause)를 지칭하여 그 이름이 무한(Ayn Sof)이다. 그 상태에서는 형태도 모양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이해할 방법도, 알 길도 없다. 그것이 다음 구절의 의미이다. ‘너에게서 너무 높이 있는 것을 명상치 말며, 네게 숨겨져 있는 것을 탐구치 말라.’ 그때 그릇 하나가 존재하게 된다. 그것은 이오타-[히브리]글자 요드와 같이-처럼 작지만, 하느님의 빛이 그것을 관통한다. 이것이 지혜의 근원이다. 그것이 지혜이며, 그 때문에 최고원인이 완전한 지혜이신 하느님(the All-Wise God)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그 다음에 그것이 바다와 같이 큰 그릇을 만든다. 그것은 지성(Intelligence)이라 불리는데, 거기서 ‘모든 것을 아시는’(Intelligent) 하느님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그러나 하느님은 스스로 선하시고 지혜로우시다는 것을 기억하자. 지혜는 자신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지혜로우사 스스로에게서 나오는(emanate) 빛으로부터 지혜를 낳으시는 분으로 인해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기 때문이다. 지성은 스스로를 인식할 수 없지만, 모든 것을 아시어 자기 자신의 본질에서 나오는 것으로 지성을 끝없이 채워 주시는 분을 통해 자신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 분이 물러가시기만 하면 지성은 말라 버린다. 이것이 ‘물이 바다에서 줄어지고 하수가 잦아서 마름 같으니이다’라고 한 구절(욥기 14:11)의 의미이다.
  끝으로, 바다는 일곱 갈래로 나뉘어진다. 이 일곱 갈래에서 자비 또는 숭고함, 아름다움, 승리, 영광, 왕국, 기반 또는 기초라 부르는 7개의 귀중한 그릇이 나온다. 그리하여 하느님은 위대하신 분, 또는 자비하신 분, 강하신 분, 존엄하신 분, 승리의 하느님, 모든 영광의 주인이신 창조주, 만유의 기초라 불리우신다. 마지막 특성이 모든 세계 뿐 아니라 다른 모든 것을 유지하고 있다. 끝으로, 그 분은 우주의 왕이시다. 만유가 그 분의 권능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 분은 그릇의 숫자를 줄일 수도 있고, 거기서 나오는 빛을 증가시킬 수도 있다. 또 그 분이 원하시면 그 반대도 가능하다.
  하느님의 본질에 대한 카발라의 견해 거의 전부가 이 글 속에 들어 있다. 그러나 이 글은 아직 혼란의 여지가 약간 있다. 한편으로 보면, 이 내용은 대단히 많이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또 한편으로 보면, 각 원리들은 더욱 정확하고 상세한 진리를 요구한다. 그래서 본문 내용 대신에 우리 자신의 생각을 대치시키지 않고, 이 글을 몇 개의 근본적인 명제로 바꾸어, 그 각각의 명제를 「조하르」에서 뽑은 다른 발췌문들을 가지고 설명하고 동시에 정당화해 보려 한다.
  1.  하느님은 무엇보다 무한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그 분은 모든 존재들의 총합이나 자신의 특질들을 합친 것으로 생각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특질들이나 거기서 나온 영향이 없다면 다시 말해, 유한한 형체가 없다면 그 분을 이해하는 것도 아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 원리는 이렇게 분명하게 표현되었다. ‘창조 이전에 하느님은 형태가 없었고 아무 것도 유사하다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이 상태에서는 어떤 지성도 그 분을 인식할 수 없었다.’ 다음 구절에서 같은 사상이 인정되고 있다.
  하느님이 자신을 현시하시기 전, 모든 것이 아직 그 분 안에 숨겨져 있었을 때, 그 분은 알려지지 않은 자 중 가장 알려지지 않은 자였다. 그 상태에서 그 분은 의문을 표현하는 것 외에 다른 이름이 없었다. 그 분은 인식할 수 없을 만큼 미세한 점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 분 자신의 생각이었다. 이 생각으로 그 분은 신비하고 거룩한 형태를 만들기 시작했다. 끝으로, 그 분은 그것을 눈부시게 빛나는 옷, 다시 말해 우주로 덮었다. 우주의 이름은 반드시 하느님의 이름 속으로 들어간다.


  우연하게도, 이 글은 글자대로는 번역할 수 없는 말의 놀이를 담고 있다. 그것은 다음 구절의 해석에 근거하고 있다.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이사야 40:26). 그리고는 ‘누가(me)와 ’이 모든 것‘(eyleh)이란 히브리어 단어 두 개를 결합하여 하느님의 이름(엘로힘, Elohim)을 만들어낸다. 그리하여 「조하르」는 우주와 하느님이 하나의 같은 이름을 지니고 있어 분리할 수 없다고 결론 짓는다.
  <이드라 주타>(Idra Zuta)는 나아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오래 전부터 계신 분 중 오래 전부터 계신 분은 동시에 알려지지 않은 자들 중 알려지지 않은 분이다. 그 분은 스스로를 만유에서 분리하시지만, 그 분은 분리되지 않으신다. 그 분이 만유와 다시 결합하시기 때문에, 만유는 그 분과 결합되어 있다. 그 분 안에 있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 분은 하나의 형상이 있지만, 그 분은 형상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분은 하나의 형상을 취하여 만유를 존재케 하신다. 먼저 그 분은 자신의 형상으로 하여금 9개의 빛을 발하게 하시고, 그 9개의 빛은 그 분에게서 빌어온 형상 덕분에 눈부신 광채를 만방에 발하니, 하나의 빛줄기가 자신의 광채를 흩뿌림과 같다. 오래 전부터 계신 분 중 오래 전부터 계신 분, 알려지지 않으신 분 중 알려지지 않으신 분은 하나의 횃불과 같아, 그 넘치는 광채로 우리 눈을 부시게 하는 광채에 의해서만 인식할 수 있다. 이 빛을 그 분의 거룩한 이름이라 부른다.
  2. 무한한 존재가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나타내신 10개의 세피로트는 단지 그의 특성들일 뿐이다. 그것들은 자체로는 아무런 실체가 없다. 이 각각의 특성들 속에 하느님의 본질이 완전히 나타나 있다. 그것들 모두가 합하여 하느님의 모든 현시(現示) 중 가장 완전하고 가장 높은 최초의 현시를 이룬다. 이것이 원형적 인간 또는 천상의 인간(아담 카드몬[Adam Kadmon], 아담 엘로[Adam E-lo-oh])라 불리운다. 이것이 에스겔의 신비한 전차를 지배하는 인물이며, 지상의 인간은 그의 어렴풋한 복사판이다.
  [시메온 벤 요하이가 제자들에게 말했다] 인간의 형상은 열등한 것이거나 뛰어난 것이거나를 막론하고 위로 하늘에 있는 모든 것과 아래로 땅에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 오래 전부터 계신 분 중 오래 전부터 계신 분이 인간의 형상을 자기 자신의 형상으로 택한 것이 그 이유 때문이다. 인간의 형상이 존재하기 전에는 어떤 형태도, 어떤 세계도 없었다. 인간의 형상은 모든 것을 내포하고 있고, 모든 것은 오직 인간의 형상 덕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없다면 아무런 세계도 없다. 성서에 이르기를, “주께서 지혜로 땅을 세우셨다”(잠언 3:19)로 했기 때문이다.
  천상의 사람(Adam d'leeloh)과 지상의 사람(Adam d'letatoh)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하나가 없었다면 다른 것도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에 대한 완전한 믿음은 천상의 사람에게 의존하고 있으며, 예언자 에스겔이 전차 위에 사람의 모양 같은 것을 보았다고 말했을 때, 그가 말한 것이 바로 천상의 사람에 대한 것이었다. 다니엘이, “내가 밤에 환상을 보았는데, 하늘의 구름과 함께 사람의 자식같은 모습을 한 자가 와서 오래전부터 계신 분에게 가니, 그가 그 분 앞으로 인도되었다”(다니엘 7:13)고 한 것도 이 천상의 인간에 대한 것이다. 이렇듯, 천상의 인간, 또는 하느님의 최초의 현현이라 부르는 것은 단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절대적 형상, 다른 모든 형상들의 근원, 또는 차라리 모든 개념들(all ideas)의 근원, 최고의 생각이며, 다르게 말하면 로고스나 말씀으로 알려진 것이다. 이는 단순한 추측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며, 그 정확성은 그 사상체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확장됨에 따라 더 잘 밝혀질 것이다. 이제 한 구절을 더 인용하려 한다. “오래 전부터 계신 분(그 분의 이름 거룩하시도다!)의 형상은 모든 형상을 포함하는 유일한 형상이다. 그것은 여타의 모든 것을 포함하는 최고의 신비한 지혜이다.”
  3.  우리가 「조하르」의 저자들을 믿는다면, 10세피로트는 하느님께 바쳐진 여러 가지 특별한 이름으로 구약성서에 나타나 있으며, 이는 성 제롬이 마르켈라(Marcella)에게 보낸 편지에서 인용한 10개의 신비한 이름과 같은 것이다. 「미슈나」에서 이 이름들을 발견해 보려는 시도도 있는데, 「미슈나」에서는 하느님이 10개의 말씀으로, 또는 그의 말씀을 통해 나온 같은 수의 명령에 의해 세상을 창조했다고 말한다. 그 모든 이름이 다같이 필요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들이 표현하는 특성과 차이가 하느님의 본성에 대한 미묘한 개념을 일치하게 말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하느님의 본성을 각기 다른 측면들, 카발리스트들의 용어로는 “얼굴들”(faces)로 표현한다.
  시메온 벤 요하이와 그의 제자들은 이 비유를 자주 사용하고 있지만, 현대의 카발리스트들처럼 남용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 점을 좀 더 고찰할 터인데, 그것이 분명히 카발라 전체 체계에서 가장 중요한 점이기 때문이다. 각 세피로트의 독특한 특성을 결정짓기 전에, 그것들의 본질에 대한 일반적 질문을 간단히 살려보고, 카발라 교의의 대가들이 그것들에 대해 가졌던 서로 다른 견해들을 몇 마디로 정리할 것이다.
  모든 카발리스트들은 두가지 질문을 제기했다.
  첫째, 왜 세피로트가 있는가? 다음에, 세피로트는 그 자체로 또는 하느님과 관계에서 볼 때  무엇인가?
  첫 번째 질문에 대해 말하자면,「조하르」본문이 조금도 의문의 여지를 남기지 않고 있다. 하느님의 이름들이 있기 때문에 세피로트가 있으며, 그 둘은 마음에서 혼동되기도 한다. 세피로트는 그 이름들이 표현하는 개념들이자 현상들(things)이다. 만일 하느님에게 이름이 붙여질 수 없거나, 그 분의 모든 이름이 현실적인 적인 것을 지칭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분을 알지 못할 것이며, 또한 그 분은 자신에 대해서조차 존재치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성이 없으면, 그 분은 자신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고, 지혜가 없으면 지혜롭지 못할 것이고, 권능이 없으면 행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모든 학자들이 똑같은 방식으로 답한 것은 아니다. 어떤 학자들은, 하느님은 변치 않는 분이라는 원리로 시작해서, 세피로트를 하느님의 권능의 도구, 하나의 뛰어난 본질의 피조물들이지만 최초의 존재(the First Being)와는 전적으로 다른 것으로 보았다. 그들은 카발라의 언어를 율법의 글귀와 조화시키려고 했다. 이런 사람들의 선두에는 메나헴 레칸테(Menahem Recante)가 있는데, 그는「계명의 동기」(The Motives of Commandments)의 저자로 13세기 초에 저작활동을 했다. 또 다른 학자들은, 무(無)에서는 아무 것도 나올 수 없다는 옛 원리를 논리적 결론으로 하여, 10세피로트를 하느님의 본질과 완전히 일치시키고 있다. 「조하르」가 아인 소프(Ayn Sof), 즉 무한 자체이신 분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들의 견해로 보면 세피로트의 총체이며, 조금도 더하거나 덜하지 않고, 각 세피로트는 같은 무한에 대한 다른 관점일 뿐이다.
  이 두 극단론 사이에 세 번째 관점이 있는데, 좀 더 심오하고 원래의 카발라 저작들의 정신과 더 일치한다. 이 견해에서는 세피로트를 도구나 피조물, 결국 하느님과 구별된 존재들로도 보지 않고, 하나님과 동일하게도 보려 하지도 않는다. 이 중도적 입장에 선 사람들의 주장은, 하느님은 세피로트 안에 현존하시니, 그렇지 않다면 그 분은 그것들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실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분은 자신의 영원성 속에서 그것들 안에 머무시는 것은 아니다. 그 분은 사상과 존재(existence)의 미묘한 형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존재이다. 사실 세피로트는 아인 소프를 결코 포함할 수 없다. 아인 소프는 모든 형태의 근원 자체이며, 그렇기 때문에 형상이 없다. 일반적인 말로 하자면, 세피로트 각각은 하나씩 이름이 있지만, 무한만은 이름이 없고 있을 수도 없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분이며, 이해할 수 없는 분이며, 무한한 분이며, 그 분의 현존을 나타내는 모든 세상보다 위에 계시니, 심지어 방사의 세계조차 넘어 계신다.
  세피로트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하느님의 불변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 10세피로트는 10개의 서로 다른 모양을 한 꽃병들, 또는 서로 다른 색깔의 유리잔들로 비유될 수 있다. 우리가 비유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 분의 절대적 본질은 변치 않고 동일한 것으로 남아 있으며, 하느님의 빛은 태양빛과 같이 그것이 통과해 가는 매개체에 의해 본질이 변하지 않는다. 이 매개체들은 그 자체로 어떤 실체(reality)를 지닌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자기 자신들의 존재(existence)가 없다. 그것들은 단순히 최고의 본질이 스스로를 한정지은 경계만을 나타낼 뿐이며, 무한한 광명을 덮고 있는 희미함(obscurity)을 각기 다른 정도로 나타낼 뿐이다. 그래야 사람들이 그 빛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피로트 속에서 두 가지 요소, 아니 어쩌면 두 가지 측면이라고 하는 것이 더 낫겠는데, 그런 것을 인정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하나는 완전히 외적이고 부정적인 것인데, 육체, 이른바 매개체를 나타내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내적이고 긍정적인 것인데, 영과 빛을 나타낸다.
  그리하여 카발리스트들은 하느님의 빛이 떠난나 버린 깨어진 그릇들에 대해 이야기 한다. 이러한 관점은 이삭 루리아(Issayc Luria)의 「세페르 드루쉼」(Sefer Drushim)에서 볼 수 있는데, 이 책은 크노르 폰 로센로트(Knorr von Rosenroth)가 독일어로 번역 했으며, 「베일을 벗은 카발라」(The Kabbalah Unveiled)에 들어 있다. 이 견해는 또한 모세스 꼬르도베라(Moses Cordovera)가 취한 것인데, 그는 그것을 논리성과 정확성을 가지고 「석류의 정원」(Pardes Rimonim)에서 전개하고 있다. 그의 논리적 명확성에 덧붙여, 꼬르도베라는 그의 선배들과 논적(論敵)들의 견해를 정확하게 기록하고 깊이있게 논하고 있는 점에서도 칭찬받을 만하다. 그의 논의는 역사적으로 가장 정확하기 때문에, 우리는 카발라의 형이상학적 부분에 대한 모든 해석에서 그의 견해를 기초로 삼을 것이다.
  각 세피로트의 특정한 역할은 무엇인가? 세피로트는 어떻게 일정한 집단을 형성하는가?
  모든 하느님의 현시 중 최초이자 최고의 것-한 마디로, 최초의 세피로트-은 왕관(Kether)인데, 그것이 다른 모든 것보다 위에 있으므로 그렇게 이름지었다. 그것은 “모든 원리 중의 최고의 원리, 신비한 지혜, 다른 모든 왕관들을 장식해 주는 왕관들 중 최고의 왕관”이다. 그것은 형태나 이름도 없고, 모든 것, 심지어 모든 특질보다 앞서는, 알려지지 않은 신비, 즉 아인 소프와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왕관은 무한과 구별되는 무한자(the Infinite as distinguished from the definite)를 나타낸다. 성서에서 그 이름을 “나는 존재한다.”(I am)로 나타난다. 그것은 절대적 존재, 어떤 분석으로도 그 깊이를 측정할 수 없는 존재, 규정할 수 없는 존재, 그러나 그 안에서는 모든 규정이 나뉠 수 없는 한 점에서 합일되는 존재이다. 이리하여 첫 번째 세피로트는 “최초의 점”(primitive point) 또는 그냥 “점”(point)이라고도 불린다. “알 수 없는 분 중 알 수 없는 분이 자신을 현시하고자 했을 때, 그 분은 최초로 한 점을 내셨다. 이 빛나는 점이 그 분의 일부인 한, 무한하신 분은 아직 완전히 알 수 없는 분이었고, 전혀 빛을 발하지 않았다.” 이것이 카발리스트들이 ‘자신의 본질에 대한 하느님의 절대적 집중‘(Tsimtsum)이라고 설명한 것이다. 이 집중이 공간, “최초의 허공”(primitive air)을 낳았다. 그것은 진짜 허공(a true void)이 아니라, 창조세계(the Creation)보다 낮은 정도의 빛이었다. 그러나 하느님은 자신 안으로 물러나셨기 때문에, 그 분은 모든 유한하고, 한정되고, 정해진 것과 구별되셨다. 그 분은 여전히 제한될 수 없었으므로, “무”(no-thing or non-being, Ayn)를 뜻하는 단어로 지칭된다.
  「이드라 주타」(Idra Zuta)는 말한다. “그 분이 그런 이름으로 불린 것은, 우리가 이 [원리] 속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기 때문이며, 그것이 우리의 한계 속에서는 파악할 수 없는 것이고, 지혜 자체보다 위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대 형이상학 체계 중 가장 위대하고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 즉 헤겔의 형이상학에서 같은 사상, 심지어 똑같은 구절을 발견한다.
  모든 것은 ‘존재의 순수한 상태’, 완전히 규정할 수 없고, 단순하며 아무 매개도 없는 생각으로 시작된다. 진정한 시작이란 그 이외의 어떤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순수한 존재는 가장 순수한 추상일 뿐이다. 그것은 직접적인 방법으로 인식한다면, 무(non-existent)라고 부를 수도 있는 절대적으로 부정적인 것이다.
  끝으로 우리의 카발리스트들에게 다시 돌아가 보면, 존재 또는 절대적 존재라는 개념 자체는 완전한 형태, 그들의 용어를 쓰자면, 하나의 머리, 하나의 얼굴을 이루었다. 때로 그들은 그것을 “흰 머리”(white head)라고 부르는데, 그 안에 모든 색깔, 즉 모든 개념, 모든 유한한 측면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때로 그들은 그것을 “오래된 것”(the ancient)이라 부르는데, 그것이 세피로트 중 최초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래된 것 중 오래된 것”(Ancient of Ancients), 즉 아인 소프 자체와 혼동해서는 안된다. 아인 소프 자체 앞에서는 가장 눈부신 빛조차도 그림자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보통 “긴 얼굴”(long face)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지칭되는데, 이는 분명히 그것이 “작은 얼굴”(small face)을 이루고 있는 다른 모든 제한과 모든 지적. 도덕적 특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하르」 본문의 말로는, "최초의 것은 얼굴과 얼굴을 마주 하여 볼 수 있는 오래된 것이다. 그것은 최고의 머리, 모든 빛의 근원, 모든 지혜의 원리이며, 통일성(unity)으로만 규정될 수 있다.“
  다양한 형상과 구별되고, 모든 상대적 통일성과 구별되는 이 절대적 통일성에서 두 개의 대등한 원리가 나온다. 그것들은 겉으로는 상반되지만 실제로는 나눌 수 없는 것들이다. 하나는 남성적 또는 능동적인데, 지혜라 불린다. 다른 하나는 수동적 또는 여성적인데, 관습적으로 지성이라 번역되는 말로 지칭된다. 본문에 의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 오래되신 분(그 이름이 거룩하도다!)에 의해 만들어진 모든 것은 오직 남성과 여성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
  지혜는 아버지라 부를 수 있으니, 지혜가 만물을 낳기 때문이다. 그것은 22가지의 놀라운 방법으로 온 우주에 퍼져, 존재하는 모든 것에 형태와 양(量)을 부여한다. 지성은 다음 구절에 있듯이 어머니이다. “너는 지성(understanding)을 어머니라 부를 것이다.”(잠언 2:3)  존재의 일반적 조건으로 확립된 남성-여성이라는 대립명제를 깨뜨리지 않으면서, 「조하르」는 여성적 또는 수동적 원리가 남성 원리에서 나왔다고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들의 신비적이며 영원한 결합에 의해 아들이 나오는데,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의 모습을 취해, 그 두 분을 증거한다. 이 지혜와 지성의 아들은 맏아들이라고도 불리는데, 지식 또는 앎(science)이다.
  이 세 인물이 과거. 현재. 미래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내포하고 있으며 결합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다음에 흰 머리, 오래되신 분 중 오래되신 분 안에서 재결합한다. 왜냐하면 만유(all)는 그 분이며, 그 분이 만유이고 만유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때로 그는 오직 하나의 머리를 이루는 세 개의 머리라고 표현된다. 때로 그는 두뇌에 비유되는데, 그것은 자신의 단일성(unity)을 잃지 않으면서 세 부분으로 나뉘며, 32쌍의 신경을 통해 온 몸에 퍼져 있다. 이는 하느님(Divinity)이 32개의 지혜의 길을 통해 전 우주에 퍼져 계시는 것과 같다.
  오래 전부터 계신 분(그 이름이 거룩하시도다!)은 오직 하나의 머리를 이루는 세 개의 머리와 함께 존재하신다. 그 머리는 가장 뛰어난 것들 중 가장 뛰어나다. 그래서 이 오래 전부터 계신 분 (그 이름이 복되시도다!)은 3이라는 수로 표현된다. 그 외의 다른 빛들 [다른 세피로트]도 그 분에게서 빛을 받기 때문에 역시 3이라는 숫자에 포함된다.


  다음 구절에서는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좀 다른 의미이다. 우리는 여기서 아인 소프 자체를 보는 것이지 지성을 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여기서 지혜라고 부르는 로고스(Logos)의 한 반영, 어떤 전개, 또는 어떤 차원일 뿐이기 때문이다.
  세 개의 머리가 있다. 하나는 다른 것 속에, 하나는 다른 것 위에 조각되어 있다. 머리 하나는 숨겨진 비밀한 지혜이며, 이는 결코 밝혀지지 않는다. 이 신비한 지혜는 다른 모든 지혜의 최고원리이다. 이 위에 있는 최초의 머리는 오래 전부터 계신 분(그 이름 거룩하시도다!)이다. 그것은 모든 신비 중 최고의 신비이다. 끝으로는, 다른 모든 머리를 다스리는 머리, 머리가 아닌 머리이다. 그 의미가 무슨 뜻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하며, 알 수도 없다. 그것이 학식있는 자와 무지한 자 모두를 피해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래 전부터 계신 분(그 이름 거룩하시도다!)은 무(無, No-Thing, Ayn)라고 불리운다.
  여기 우리는 존재 속의 통일(unity in being)을 보며, 지적 현현 속의, 또는 생각 속의 삼위일체를 보게 된다. 그것은 정확히 우리의 최종결론이다.
  때때로 이 삼위일체라는 용어, 또는 원한다면 삼위일체의 위격(位格)들은 생각 뿐 아니라 존재의 연속적이고 절대적으로 필요한 세 국면이라고 표현된다. 또는 독일에서 받아들여 지고 있는 표현을 쓴다면, 세계의 발생을 동시에 나타내는 논리적 과정이라고 표현된다. 이것이 어떤 놀라움을 야기시키든 간에, 그것은 결코 모순이 아니다. 다음 구절이 이를 확인해 준다.
  보라, 생각(thought)이 존재하는 모든 것의 원리이다. 그것은 처음에는 인식되지 않고 자체 안에 갇혀져 있다. 생각이 퍼지기 시작하자, 그것은 정신(spirit)과 함께 살게 된다. 그 시점에서 그것은 지성이란 이름을 갖게 되며, 전처럼 자신 안에 갇혀 있지 않다. 정신 또는 마음 자체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신비들의 가슴 한 복판에서 발전한다. 그리하여 하늘의 모든 합창의 결합체인 한 목소리가 나온다. 그 목소리는 또렷하게, 분명한 말로 이야기한다. 그것이 정신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숙고해 보면, 생각과 지성과 이 목소리, 그리고 이 말은 하나요 동일한 것임을 알 것이다. 그러므로 생각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시작이다. 생각에는 끊김이 없다. 생각 자체는 무(Non-Being, Ayn)와 결합되어 있으며, 결코 그것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것이 다음 말의 의미이다. ‘여호와는 한 분이시며 그 이름도 하나이니라.’
  같은 개념이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또 하나의 구절이 있다. 이것은 훨씬 원래의 것이며, 분명히 훨씬 오래된 것이다.
  ‘나는 ...이다’(I am) 라는 뜻의 이름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합일(union)을 보여준다. 그것은 지혜의 모든 길이 아직 숨겨져 있고, 한 곳에 결합되어 있으며, 아직 서로 구별되지 않는 상태(degree)이다. 그러나 경계선이 정해질 때, 태(胎) 안에 모든 것을 담고, 최고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 그것들을 낳으려 하는 어머니를 지칭하려 할 때, 하느님은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인 나’(I who am)(비로소 규정이 시작된다는 뜻-역주). 끝으로 모든 것이 다 잘 발달되어 어머니의 태를 떠났을 때,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잡았을 때, 그때 존재 뿐 아니라 특별한 생명을 묘사하기 위해 하느님은 자신을 여호와 또는 ‘나는 나다’(I am that I am)라고 부르신다. 이것이 모세에게 계시된 거룩한 이름의 신비이다. 그 외에 아무도 모세와 이 지식을 나눠 갖지 못했다.
  그러므로 카발라 체계가 단지 빛의 방사원리나 본질의 통일성에만 근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본대로, 카발리스트들은 더욱 더 나아갔다. 그들은 독일 형이상학자들이 이제야 우리 시대의 영광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과 아주 비슷한 내용을 가르쳤다. 카발리스트들은 생각(thought)과 존재의 절대적 일치를 믿었다. 결국 세상은 지성의 생각들(ideas)의 표현, 또는 지성의 절대적 형상들의 표현 외에 다른 무엇일 수가 없었다. 요컨대, 그들은 플라톤과 스피노자의 결합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 중요한 사실을 보강하고, 동시에 현대 카발리스트들 중 가장 학식 있는 사람이 선배들의 전통에 충실하게 남아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우리는 꼬르도베라의 주석 중 매우 탁월한 한 구절을 인용하겠다.
  처음 세 개의 세피로트-즉 왕관, 지혜, 지성-는 하나이며 똑같은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첫번째 것은 지식 또는 앎을 나타내고, 두번째 것은 지식이 있는 자를, 세 번째 것은 지식의 대상을 나타낸다. 창조자에 대한 지식은 그의 피조물에 대한 지식과 같지 않다. 피조물에 대한 것이라면, 지식이 지식의 주체와 구별되어, 대상에 의존하며, 대상은 그 다음에 주체와 구별된다. 이러한 분화는 다음의 세 용어로 지칭된다-생각, 생각하는 자, 생각의 대상. 반면에, 창조주는 스스로가 지식이며, 지식이 있는 자이며, 지식의 대상이다. 사실 그 분이 아는 방식은, 자신 밖에 있는 사물에 자신의 생각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분이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인식하여 아는 것은, 그 분 자신을 이해하고 앎으로써이다. 그 분과 하나가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 분이 자신의 실체 속에서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 분은 모든 존재의 원형이며, 모든 존재는 가장 순수하고 가장 완벽한 형태로 그 분 안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피조물의 완성이란, 그들이 자기 존재의 근원과 결합되게 해 주는 이 존재 자체 안에 선천적으로 들어 있으며, 그들이 그 근원에서 물러날수록, 그들은 그 완전하고 미묘한 상태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 세 개의 모든 방식의 존재가 세피로트 안에서 자기 형태를 갖고, 세피로트는 그들이 방사하는 빛의 근원 속에서 자기 형태를 갖는 것이다.
  나머지 일곱 개의 특질들은 현대 카발리스트들이 구성의 세피로트(the Sefiroth of the Construction)라고 부르는데, 이는 명백히 이것들이 세계를 창조하는데 더 직접적으로 관계되기 때문이다. 이 세피로트들은 앞의 세피로트들과 같이 삼위일체의 형태로 발전한다. 그 하나하나 속에는 두 개의 대립물이 중간 것에 의해 결합된다. 하느님의 생각이 가장 완전하게 나타나면, 거기서 두 개의 상반된 원리가 나오는데, 하나는 능동적 또는 남성적인 것이요, 다른 하나는 수동적 또는 여성적인 것이다.
  은총 또는 자비 속에서는 남성원리가 나타나고, 여성원리는 심판에서 나타난다. 이 은총과 자비가 글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라는 것은, 전체의 체계에서 그 두 원리가 행하는 역할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는 의지의 전개 또는 축소라고 불러야 할 것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사실 남성적 영혼이 나오는 것은 은총에서이고, 여성의 영혼이 나오는 것은 심판에서이다. 이 두 가지 특질들은 또한 “하느님의 두 팔”이라고 불린다. 하나는 생명을 주는 팔이요, 하나는 죽음을 주는 팔이다. 그것들이 분리되면, 세계는 존속할 수 없다. 그것들이 따로 기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원래의 구성에서는 자비없는 심판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또한 공통의 중심인 아름다움에서 결합되어 있는데, 그것은 모성적 상징으로 가슴, 또는 심장이다.
  아름다움은 모든 도덕적 특질의 표현 또는 결과로, 또는 선한 모든 것의 총합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 다음의 세 특질은 순수하게 기능적인 것이다. 즉 그것들은 하느님을 만물의 원인, 우주력(宇宙力), 산출원리로서 나타낸다. 이 새로운 영역에서 남성원리와 여성원리를 나타내는 처음의 두 개는 성서와 일치되도록 승리와 영광이라고 부른다. 다음과 같은 규정이 없으면, 그 두 단어의 의미를 확정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승리와 영광이라는 말을 우리는 분량, 증식, 힘으로 이해한다. 우주의 모든 힘들은 그것들 가운데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두 세피로트는 영원하신 분의 무리라고 불리운다.”
  승리와 영광은 공통의 원리 속에서 결합되어 있다. 그것은 보통 생산적인 요소를 나타내는 기관(성기-역주), 또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 뿌리를 의미한다. 이리하여 그것은 형성(the Formation) 또는 기초(Foundation, Y'sod)라고 부른다. 본문에 의하면, “만물은 그들이 나온 기초로 되돌아 갈 것이다. 모든 골수와 체액(體液)과 힘이 거기에 모여 있다. 존재하는 모든 힘은 생산기관에 의해 거기서 나온다.” 이 세 가지 특질들은 성서에서 만군의 하느님으로 나타나는 하느님의 특질의 한 형태, 한 측면을 이룬다. 마지막 세피로트인 왕국(말쿠트)은 어떤 새로운 특질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다른 모든 특질들 사이에 존재하는 조화와, 세상에 대한 그들의 절대적 지배를 나타내는 것이라는 데 모든 카발리스트들이 동의하고 있다.
  이처럼 10세피로트는 전체로서 모여 천상의 인간, 또는 이상적 인간을 구성하는데, 현대 카발리스트들은 이를 “방사의 세계”라고 부른다. 이 10세피로트는 세 부류로 나뉘며, 각 부류는 하느님을 서로 다른 측면에서 보여 주지만, 항상 나뉠 수 없는 삼위일체의 형태로 보여준다. 첫 번째 세 세피로트들은 순수하게 지성적이며 형이상학적이다. 그것들은 존재와 생각의 절대적 일치를 표현하며, 현대 카발리스트들이 ‘지성적인 세계’(intelligible world)라 부르는 것을 형성한다. 다음의 세 세피로트는 도덕적 특성을 지닌다. 그것들은 한편으로는 하느님을 자비와 지혜로 보지만, 또 한편으로는 아름다움과 장엄함의 근원이 자비, 아니 오히려 최고선 속에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덕성들, 또는 그 말의 가장 높은 의미에서 “감정의 세계”(world of feeling)라고 불린다. 끝으로, 이 특질들 중의 마지막 셋은 우주적 영역(the Universal Province)인 최고의 건축가(the Supreme Architect)가 또한 절대적 힘, 전능한 원인임을 가르쳐 준다. 또 동시에 이 원인이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산출하는 요소임을 가르쳐 준다. 이 마지막 세피로트들은 “자연 세계”(natural world), 또는 그 본질과 원리 속의 자연을 의미한다.
  이 상이한 측면들이 어떻게 하나가 되어, 결국 최고의 삼위일체로 돌아가는지는 다음 구절이 지적하고 있다.
  거룩한 합일을 이해하기 위해, 난로에서 또는 불붙은 램프에서 솟아오르는 불길을 살펴보라. 우리는 우선 두 종류의 빛을 보는데, 하나는 흰색으로, 다른 하나는 검은 색, 또 푸른 색으로 빛난다. 흰 빛이 위에 있어 똑바로 올라가고, 검거나 푸른 빛은 아래 있어 흰색의 근원처럼 보인다. 그러나 두 빛은 아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어 하나의 불꽃을 형성한다. 그러나 푸르거나 검은 빛이 이루고 있는 근원이 그 밑에 있는 심지에 붙어 있다. 흰 빛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 그것은 항상 흰빛으로 있다. 그러나 낮은 빛 속에는 몇 개의 그림자가 있다. 더구나 낮은 빛은 상반된 두 방항으로 움직인다. 위로는 흰 빛에 연결되고, 아래는 연소되는 물질에 연결되어 있다. 이 물질은 끊임없이 자신을 연소하며 위에 있는 빛으로 올라간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나의 합일에 재결합되는 것이 이와 같다.
  이 비유에 대한 모든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이 내용이 인간 영혼의 본질을 설명하는 「조하르」의 다른 부분에 거의 글자 그대로 반복하여 나온다는 점을 덧붙일 수 있겠다. 거기서는 인간의 영혼도 하느님의 삼위일체(the supreme trinity)의 희미한 이미지인 삼위일체를 이루고 있다.
  이 마지막 삼위일체는 분명히 다른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으며, 전체 세피로트 이론을 총합하고 있는데, 「조하르」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앞에 나오는 삼위일체들처럼, 그것은 세 용어로 나타나는데, 그 각각은 이미 가장 낮은 삼위일체들 중 하나의 지고한 현시로 나타났다. 왕관은 형이상학적 특질들을 나타내고, 아름다움은 도덕적 특질은, 왕국은 더 열등한 특질을 나타낸다. 그러나 왕관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하나이며 절대적인 존재, 즉 본질이다.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이드라 주타」는 말하기를, 그것은 “도덕적 삶과 도덕적 완성의 최고의 표현이다”라고 한다. 지성과 자비에서 방사된 것으로서, 그것은 종종 동방에 비유되고, 또 지상 만물에 의해 고르게 그 빛이 반사되는 태양에 비유된다. 태양이 없으면 만유는 어둠으로 돌아갈 것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이상(理想)이다.
  끝으로 왕국은 무엇인가? 그것은 결합된 세피로트 전부의 영원하고 편재한 행위이며, 창조 속에 나타난 하느님의 실제적인 현현(顯現, presence)이다. 이것은 ‘쉐키나(Shekinah)라는 말로 완전히 표현되는데, 이는 왕국의 별칭 중 하나이다. 따라서 이 새로운 삼위일체의 진정한 용어는 절대적 측면, 이상적 측면, 편재적 측면이다. 또는 본질, 생각, 삶, 즉 생각과 대상의 결합이다. 그것들은 “중간기둥”이라 불리는 것을 구성하는데, 이는 모든 도해(圖解)에서 그것들이 세피로트를 나타내는데 관습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그것들이 중심에 놓여 있으면서 하나가 다른 것 위에 세로의 직선 또는 기둥모양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상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이 세 용어는 또한 아주 여러 “측면”(faces) 또는 상징적 현시가 된다. 왕관은 그 이름을 바꾸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긴 얼굴, 시간적으로 오래 전부터 계신 분(the Ancient of Days), 그 이름이 거룩하신 오래 전부터 계신 분이다. 아름다움은 거룩한 왕, 또는 단순히 왕이며, 쉐키나, 즉 만유 속의 하느님의 현현은 어머니(Matrona) 또는 여왕이다.
  아름다움이 태양에 비유된다면, 어머니는 달에 비유된다. 달은 자신이 비추는 모든 빛을 자신보다 단지 한 단계 높은 곳에서 빌려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현실적 존재는 단지 이상적 아름다움의 반영 또는 이미지일 뿐이라는 것이다. 어머니는 이브(Eve)라고 불린다. 본문에 의하면, “이브는 만물의 어머니이니, 이 아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녀의 가슴에서 양육되고, 그녀를 통해 복을 받기 때문이다.” 왕과 여왕을 “두 얼굴”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끊임없이 세상에 새로운 은혜를 퍼붓고, 그들의 결합을 통해 창조작업을 계속하는, 아니 창조작업을 영속시키는 일을 하는 한 쌍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 창조를 하도록 만드는 상호 간의 사랑은 두 가지 방법으로 작용하므로 두 종류의 열매를 맺는다.
  때때로 사랑은 위에서 오는데, 남편에게서 아내에게로 가서, 거기서 전 우주로 간다. 즉 지성적인 세계의 심연에서 나온 존재와 생명은 자연물 속에서 더욱 더 증식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때로 사랑은 정반대의 노정을 취한다. 즉 아래에서 올라가는 것인데, 아내에게서 남편에게로, 현실세계에서 이상세계로, 지상에서 하늘로 흘러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간다.    그러한 존재들은 회귀(return)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조하르」자체가 거룩한 영혼들이 여행하는 순환체계 속에서, 이 두 가지 양식의 산출(generation)에 대한 예를 제시한다. 영혼은 그 가장 순수한 본질 속에서 지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지고의 지성(the Supreme Intellifence)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거기서 존재들의 형태가 서로 분화되며, 그것은 참으로 우주적 영혼이다. 만일 그것이 남성의 영혼이라면, 그것은 거기서 은총 또는 전개의 원리를 통과하고, 만일 여성의 영혼이라면, 심판 또는 집중의 원리를 스스로 배태(胚胎)한다. 끝으로, 그것은 왕과 여왕의 결합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에 나오는데, 본문이 말하듯이 왕과 여왕이 “영혼의 생산에 관계 있는 것은, 남자와 여자가 육체의 생산에 관계있는 것과 같다.” 이 길을 통해 영혼은 지상에 내려온다.
  이런 방식으로 영혼은 하느님의 품에 돌아간다. 영혼이 모든 덕성을 갖추어, 임무를 성취하고, 하늘로 갈 만큼 성숙하면, 그것은 자신의 충동에 의해, 경험 뿐 아니라 자신이 불러 일으킨 사랑에 의해 상승한다. 방사의 마지막 단계 또는 현실적 존재(real existence)도 영혼과 함께 상승한다. 현실적 존재는 이렇게 이상적 형태와 조화를 이루게 된다. 왕과 여왕은 또 다른 원인에 이끌려 또 다른 목적으로 결합한다. 「조하르」는 말한다. “이런 식으로 생명은 위와 아래에서 동시에 끌어당겨진다. 근원이 새로워지고, 언제나 다시 가득차는 바다는 그 물을 모든 곳에 공급한다.” 영혼이 아직 육체에 묶여 있는 동안에, 우연히 결합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무아경(exstasy), 신비적 황홀경, 전도(顚倒, reversibility)의 교의를 다루게 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후술하려 한다.
  세피로트에 대한 우리의 설명은, 그것들을 설명하는 데 사용된 상징들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 불완전한 것이 될 것이다. 세 가지 주요한 상징이 있는데, 그 중 적어도 두 개는 「조하르」에서 인정된 것이다. 하나는 10개의 동심원의 형태로 세피로트를 나타낸다. 아니면 공통의 중심이 되는 하나의 점 주위에 그려진 9개의 원으로 나타낸다. 또 하나는 세피로트를 인간의 육체로 표현한다. 왕관은 머리이고, 지혜는 두뇌이며, 지성은 심장이다. 몸통과 가슴-즉 가운데 기둥-은 아름다움이다. 팔들은 은총과 심판의 상징이고, 몸의 아랫부분은 나머지 특질들을 표현한다.
  육체의 질병이 하느님의 여러 이름을 통해 치유될 수 있다는 주장과 실천적 카발라는 대부분 이러한 내용을 완전히 자의적으로 연결한 것에 근거하고 있다. 그것은 「티쿠님」(Tikkunim:「조하르」에 대한 보충-원저자 주)에서 극단적으로 행해졌다. 이상(ideas)이 아주 조잡한 상징들에 의해 질식당하고, 가르침의 쇠퇴 속에서 사상(thoughts)이 형상들로 대치된 일은 이것이 처음은 아니다.
  이 세피로트를 표현하는 마지막 방법은 그것들을 세 집단으로 나누는 것이다. 세로선의 오른쪽에는 “전개적인”(expansive) 특질을, 즉 로고스 또는 지혜, 자비, 힘(승리-역주)을 둔다. 왼쪽에는 같은 방식으로 왼쪽과 나란히 저항과 집중을 지칭하는 세피로트들을 둔다. 지성 즉 로고스의 의식, 심판과 영광이 그것이다. 중심에는 최고의 삼위일체를 나타내는 본질적인 특질들이 있다. 꼭대기에는 공통의 수준보다 위에 왕관을 두고, 맨 밑에는 왕국을 둔다.
  「조하르」는 종종 이런 식의 상징을 암시하고 있다. 그것은 나무에 비유되며, 그 나무의 생명이자 체액은 아인 소프이다. 후에 그것은 “카발라 나무”라고 불렸다. 각 단계마다, 우리는 “자비의 기둥”, “심판의 기둥”, “중심 기둥”을 기억하게 된다. 이 도식은 수평으로 그린 선을 통해 세 개의 부수적인 삼위일체를 나타낸다. 이 도식 외에 현대 카발리스트들은 수로(水路) 그림을 고안해 냈는데, 그것은 물질적인 형태로 세피로트 사이에 가능한 모든 관계와 결합을 표현한다. 모세스 꼬르도베라는 그런 결합을 60만개나 그려낸 작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런 섬세함은 미적분학으로는 좀 흥미롭겠지만, 형이상학에서는 아무런 흥미도 없는 일이다.
  「조하르」에는 세피로트 이론과 함께 아주 이상한 개념이 나온다. 그것은 하느님의 특질들의 영역에서 나타나는 타락과 회복이라는 개념이다. 창조가 실패한 것은 하느님이 피조물과 함께 그 안에 거(居)하려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이며, 하느님이 자신과 자기 피조물 -그 중에는 인간이 가장 완전한 표현이다- 사이의 중간적 형태를 가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명백히 서로 다른 이러한 개념이 하나의 사상 속에 결합되었는데, 그것은 더 발전되었느냐 덜 발전되었느냐 하는 차이는 있지만, <은폐의 책>과 두 권의 「이드라」와 좀 덜 중요한 몇 개의 단편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이상한 방법으로 제시되어 있다. <창세기> (26:31-40)는 이스라엘 왕들보다 앞서 있던 에돔의 일곱 왕들의 이름을 들고 있는데, 그들이 차례로 죽었음을 보도하면서, 그 후계자들을 순서대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 사상 체계들에는 매우 낯선 것이지만, 「조하르」의 저자들이 가시세계에 나타난 하느님의 빛의 방사가 일정한 주기로 회귀한다는 믿음의 근거로 삼은 것이 바로 이 본문이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왕들”이 왕과 여왕으로 인격화된 절대적 존재의 두 가지 형태를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우리의 연약한 지성을 위해 그것을 다시 환원한다면, 그것은 존재의 본질 자체이다. “에돔의 왕들”, 또는 그들이 불리운대로 하면, “고대의 왕들”은 창조와 신의 본질 사이의 중개자로 봉사하기 위해 형상들이 확립되기까지는 존재할 수도 현실화될 수도 없는 세계들이다.
  오래 전부터 계신 분 중 오래 전부터 계신 분, 숨어 계신 분 중 가장 숨어 계신 분이 왕들과 왕권들의 형태를 준비하기 전에는, 막힘도 끝도 없었다. 그래서 그 분은 자신의 본질 안에서 이것들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 분은 휘장을 펼쳐 그 위에 왕들을 그려 그들의 한계와 형태를 그었다. 그러나 그들은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성서에 이렇게 쓰여 있다. ‘이들은 누가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기 전에 에돔 땅을 다스린 왕들이다.’ 이는 최초의 왕들과 최초의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루어진 왕들은 모두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오래 전부터 계신 분]이 그들에게 내려와 자신을 그들에게 알리시기까지는 그들은 존재할 수 없었다.
  이 구절이 우리의 창조보다 앞선 창조와 우리 세계보다 앞선 세계에 대해 말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후에 「조하르」 자체가 이것을 명백히 말하고 있고, 이는 또한 현대의 모든 카발리스트들의 공통된 믿음이다. 그러나 왜 옛 세계들은 사라졌는가? 하느님이 그들 가운데 정기적으로 그리고 꾸준히 머무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본문이 말하듯이, 하느님이 그들에게 내려오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 분이 피조물 가운데 현존하여, 그러한 결합으로 피조물을 영속화하기 위해 스스로 정하신 형태로 아직 자신을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때 자기 자신의 본질에서 동시에 방사하여 만든 세계들은 난로를 떠난 불꽃과 같아서, 그들이 더 멀리 날수록 죽어버렸다.
  옛 세계는 파괴되었고, 형태없는 세계는 불꽃이라 불리웠다. 대장장이가 쇠를 쳐서 불꽃을 사방에 날릴 때 그러한 것 같았다. 이 불꽃들은 옛 세계들인데, 예전부터 계신 분 (그 이름이 거룩하도다!)이 아직 자신의 형상을 구상하지 않으셨고, 일꾼이 아직 일터에 없었으므로, 이 세계들은 파괴되었고 존재할 수 없었다.
  그것이 없으면 유한한 존재들이 존속할 수도 조직될 수도 없는 형상, 하느님의 일꾼을 나타내는 형상, 끝으로 하느님이 그것에 의해 교류하시는, 말하자면, 자신 밖에 자신을 재생산하시는 형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일반적인 방식으로 인식된 인간의 형상이다. 그것은 발전과 영속화의 조건 뿐 아니라 우리 본성의 도덕적, 지적 특질을 포함하고 있다. 한 마디로 그것은 「조하르」의 저자들이 육체 뿐 아니라 영혼과 관련시키고 있는 성적 차이(sexual differentiation)를 지니고 있다. 그들에게는 이 성적 차이란 개념, 아니 인간 영혼의 분리와 재생산이란 개념이 우주적 생명의 상징이며, 존재의 규칙적이며 무한한 발전의 상징이며, 규칙적이며 계속적인 창조의 상징인데, 이는 지속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있을 수 있는 모든 존재의 형태가 연속적으로 현실화되는 것을 통해서이다.
  우리는 전에 이 개념의 뿌리를 만난 일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이상이다. 생명과 존재와 하나님의 생각이 점차적으로 확장된 것은 직접 본질과 더불어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보다 (이전에) 소란스럽고, 혼란스럽고, 비체계적인 빛의 방사가 있었다.
  옛 세계들은 왜 파괴되었는가? 인간이 아직 형태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형태는 모든 것을 포함하고, 모든 것은 인간의 형태에 의해 유지될 수 있다. 이 형태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보다 앞선 세계들은 자신을 존속시키거나 유지할 수 없었다. 그것들은 인간의 형태가 확립될때까지 파괴되었다. 그 세계들은 인간의 형태와 함께 그러나 다른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우리는 이상적 인간이나 하느님의 특질들에 나타난 성적 구별(distiction)을 보여주기 위해 새로운 구절을 끌어들이지 않을 것이다. 다만 우리가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조하르」에서 아주 많은 여러 형태로 반복되고 있는 이 구별은 균형이라는 특징적인 이름이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은폐의 책>은 말한다] 균형이 확립되기 전, 그들[왕과 왕비, 이상적 세계와 현실 세계]은 서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볼 수 없었다. 최초의 왕들은 본질을 발견할 수 없었으므로 죽었고, 땅은 황폐해졌다.... 균형은 존재하지 않는 곳[원초적 무]에 정지되어 있었다. 무게를 잴 대상이 아직 존재치 않았다. 그것은 자신 외에 아무 지지자도 없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완전히 내적 균형이었다. 이 균형이 존재하지 않는 모든 것, 존재하는 모든 것, 존재할 모든 것을 지니고 있으며 지닐 것이다.
  에돔의 왕들과 옛 세계들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카발라 체계에 의하면,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어떤 것도 절대적으로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오직 현실적 우주라는 거처를 잃을 뿐이다. 하느님이 인간의 형태로 다시 자신을 나타내시기 위해 자신 밖으로 발을 내디디셨을 때, 에돔 왕들은 부활하여 어떤 방식으로 다시 생명을 얻고, 다른 이름으로 창조의 일반적 체계 속으로 들어갔다. “성서가 ‘에돔 왕들이 죽었다’고 했을 때, 그것은 그들이 정말 죽었다거나, 그들이 완전히 파괴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 이전 상태로부터 가라앉는 모든 것을 죽음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참으로 아주 아래로 가라앉았다. 또는 무(nothingness) 위로 거의 솟아오르지 못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들은 우주라는 사다리의 마지막 발판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순수하게 수동적인 존재, 또는 「조하르」의 표현을 쓰자면, 자비없는 심판을 나타낸다. 그곳은 모든 것이 엄격함과 심판 뿐인 곳이다. 또는 그곳은 모든 것이 여성적이며 남성적인 원리는 전혀 없는 곳이다. 즉 그곳은 물질에서처럼 모든 것이 저항력과 불활동성(不活動性, inertia) 뿐인 곳이다.


            제7장 「조하르」: 카발라의 세계관


  하느님의 본성에 대한 카발라의 이론을 알고 있으므로, 우리는 창조와 세계의 기원에 대한 개념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어졌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카발리스트들은 그 두 가지 개념을 혼동하고 있다. 만일 하느님이 자신 안에서 생각과 존재의 무한한 총체를 통합하고 계시다면, 그 분 밖에서는 아무 것도 인식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것이 이성을 통한 것이든 경험을 통한 것이든, 우리는 절대자의 한 전개, 또는 특수한 측면만을 아는 것이다. 즉 하느님과 구별되는 영원하고 움직이지 않는 본질이라는 것은 망상이다. 그렇다면 보통 인식하는 바로는, 창조란 불가능하다. 이 마지막 추정은 다음 구절에서 명백히 인정되고 있다.
  아무런 한계도 없고, 그 집중성과 순수함 때문에 인식될 수도 없는, 나뉠 수 없는 점(點)[절대자]이 밖으로 퍼져 하나의 장막을 이루었다. 그 장막은 이 나뉠 수 없는 점을 가리는 역할을 했다. 이 장막은 비록 나뉠 수 없는 점보다는 덜 순수한 빛이지만, 여전히 너무 눈부셔서 바라볼 수가 없었다. 다음에 그것은 밖으로 퍼졌으니, 이 전개가 그 옷이었다. 이처럼 모든 것은 끝없이 하강하는 운동을 통해 존재하게 된다. 그러므로 마침내 우주가 생기게 되었다.
  절대적 존재와 가시적인 자연은 하나의 이름만을 지니고 있으니, 그 이름의 의미는 하느님이다. 다른 구절에서 보면, 우리는 그 목소리가 영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지고한 생각 속에 있는 목소리와 일치하는데, 그 목소리는 물. 공기. 불이며, 동서남북이며, 모든 자연력이다. 이 모든 요소들과 힘들은 영에서 나온 목소리 속에서 결합한다. 끝으로, 가장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면, 물질은 신비한 램프의 가장 아랫부분이다.
  이와같이 카발리스트들은 자신들이, 세계가 무에서 나온 것은 오직 하느님의 말씀의 능력 때문이었다는 일반의 신앙에 충실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무”(nothing)가 그들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세페르 예치라」의 주석가 중 하나인 에이브러햄 디오르(Abraham Dior)의 말에 의하면,
  모든 것이 무(nothingness)에서 나왔다고 주장할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원래 의미의 무가 아니다.  존재는 무에서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 원인을 통해서든 그 본질을 통해서든 인식될 수 없는 무(Non-Being)이다. 그것이 우리가 최초의 무라고 부르는 것이며, 이는 우주보다 앞선다. 그것은 물질적 대상들 뿐 아니라, 세계의 근거가 되는 지혜보다 앞선다. 지혜의 본질을 묻는 것, 그것이 어떻게 무 또는 왕관과 결합하느냐를 묻는 것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하는 것이다. 무 속에는 어떤 분화(分化)도 없고, 어떤 방식의 존재(existence)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혜가 어떻게 생명과 통일되는지도 이해할 수 없다.
  고대인이든 현대인이든 모든 카발리스트들은 창조의 교리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러나 일관되게도, 그들은 또한 격언의 두번째 부분도 수용한다. ‘무도 무에서 나온다‘(ex nihilo nihil)는 것이다. 그들은 보통 이해되고 있듯이, 창조보다 절대적 소멸을 더 믿는 것이 아니다.
  [「조하르」는 말한다] 세상에서 없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 입에서 나가는 입김조차도 그렇다.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그 입김도 자기 자리가 있고 제 운명이 있는 것이니, 거룩하신 분-그 분이 복되시도다-이 그것을 자신의 일에 협력케 하신 것이다. 아무 것도 허무에 떨어지지 않는다. 인간의 말이나 목소리조차 그렇다. 모든 것은 제자리가 있고, 제 운명이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요하이의 몇몇 제자들이 있는 가운데서 미지의 한 노인이 한 것인데, 그는 그들의 신앙에 대한 가장 비밀한 내용 중 하나를 알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 제자들이 서둘러 말을 막았기 때문이다.
  오, 노인이여. 당신은 무슨 일을 한 겁니까? 침묵을 지키는 편이 더 낫지 않았겠습니까? 당신은 이제 돛도 돛대도 없이 망망대해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올라가고 싶으신가요? 당신은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내려간다면, 거기엔 바닥없는 심연이 당신을 기다립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스승의 예를 들어, 그가 언제나 표현을 삼가하여, 안전하게 돌아올 대책이 없으면 결코 바다로 나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말하자면, 그는 자기 생각을 비유의 베일 아래 가리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후에 같은 원리가 아주 솔직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것이 육체거나 영혼이거나 간에 이 세상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은, 그것들이 나온 원리와 뿌리로 돌아갈 것이다. 하느님은 모든 차원의 창조의 시작이요 끝이시다. 모든 차원에는 그 분의 인장(印章)이 찍혀 있어, 그 분은 합일(unity)에 의해서만 인식될 수 있다. 그 분에게 수 없는 형상이 부여되어 있지만, 그 분은 ‘하나’이다.
  만일 하느님이 원인이자 동시에 본질이라면, 또는 스피노자가 그것을 표현하려 했듯이, “우주의 내재적 원인”이라면, 우주는 최고의 완성, 최고의 지혜, 최고의 선의 위대한 작품이라는 결론이 필연적으로 나온다. 이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 카발리스트들은 아주 독창적인 표현법을 사용했다. 그것은 뵈엠(Boehm)과 생 마르땡(Saint Martin)을 포함한 몇몇의 현대 신비가들이 자주 인용한 것이다. 그들은 자연을 “축복”이라 불렀다. 그들은 모세가 창조 이야기를 시작할 때 쓴 히브리어 글자 베트(beth)가 또한 “축복”(Brakah)이란 말의 첫 글자이기도 하다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절대적으로 나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아무 것도 영원히 저주받지 않았다. 악의 천사, 또는 그가 종종 그렇게 불렸듯이, 악의에 찬 짐승(havya besha)조차도 그렇다. 그가 자기 이름과 천사의 본성을 회복할 때가 올 것이다.
  더구나 여기 지상에서는, 선 못지 않게 지혜를 더 볼 수 있으니 우주가 하느님의 말씀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우주 자체가 이 말씀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제 「조하르」의 신비적 언어로 하면, 우리가 이미 본대로 그것은 이런 뜻이다. 하느님의 생각을 정확히 표현한 것이 모든 개별적 존재의 총체이며, 그것은 지고의 지혜의 영원한 형상 속에서 잠재성 속에  존재한다.
  그러나 지금껏 인용한 구절 중 어느 것도 다음 구절보다 더 흥미롭지는 못하다.
  거룩하신 분-그 분은 복되시도다!-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지으시기로 결정하시기 전에, 몇 개의 세계를 이미 지으시고 부수셨다. 마지막 작업이 성취되려 할 때, 우주의 모든 피조물과 세상에 있게 될 모든 것이 -그것들이 어떤 시간대에 존재했든 간에- 자신들이 우주의 일부가 되기 이전의 진정한 형상 속에서 하느님 앞에 있었다. <전도서>의 말씀을 우리는 이런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지금 있는 것은 오래 전에 있었고, 앞으로 있을 것은 이미 있었다.’ 아래의 모든 세상은 위의 세상과 같이 창조되었다. 위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 아래 세상에 이미지 같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일 뿐이다.
  우리가 모든 위대한 형이상학 체계에서 만나게 되는 이러한 높은 신앙에서, 카발리스트들은 신비주의로 인도하는 추론을 끌어낸다. 그들은 우리의 감각에 접해지는 모든 것이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현상들과 대부분의 물질적 형태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생각이나 인간의 지성에서 생긴 일을 가르쳐 준다. 그들은 마음에서 나온 모든 것은 틀림없이 자신을 드러내며, 마음 밖으로 나타나 보인다고 믿었다. 이러한 개념은 천상의 알파벳과 관상학에 대한 신앙으로 나아간다. 다음 구절은 그들이 천상의 알파벳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지를 보여준다.
  세상을 둘러싸고 있는 하늘에는 우리가 가장 심오한 비밀과 신비를 발견할 수 있는 상징과 표시가 가득차 있다. 이 상징들은 성좌(星座)들과 별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들 성좌들과 별들은 현자들의 관상(觀相)의 주제요 신비한 기쁨의 근원이다. 누구든지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아침에 해야 할 첫번째 일은 새벽에 일어나 동쪽을 주의깊게 바라보는 것이다. 그는 글자 같은 무엇이 하늘을 향해 가는데 하나는 올라가고, 하나는 내려오는 것을 볼 것이다. 이 눈부신 모양들은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쓰신 글자들이다. 그것들이 신비하고 거룩한 이름을 만들어 낸다.
  이런 개념들은 진지한 연구에 무가치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성적 습관에 위배되는 모든 것을 조심스럽게 배제하고서, 「조하르」의 체계 중 가장 눈부시고 가장 심오한 사상을 전하려 한다면, 우리는 역사적으로 위대한 진리에 대해 불성실한 사람들일 것이다. 우리는 똑같은 원리에 의해 자라난 이런 류의 헛된 환상을 종종 보아 왔다. 그러나 그것들이 항상 지성이 가장 빈약한 사람들의 산물인 것은 아니었다. 플라톤과 피타고라스도 그들 축에 속한다. 반대로, 모든 위대한 신비주의의 대표자들, 외부의 자연에서 살아 있는 비유만을 본 모든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지적 능력에 따라 수와 개념의 이론을 채택했다.
  카발리스트들은 관상학도 받아들였다. 이 용어는 이미 소크라테스시대에 알려져 있었다. 이도 또한 그들 형이상학의 일반체계가 낳은 결과였다. 만일 우리가 현대의 철학용어를 쓴다면, 그것은 선험적(a priori) 판단 덕분이었다.
  밀교(esoteric science) 스승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관상학은 밖에 나타난 모습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적 자아의 깊이에 신비하게 새겨진 모습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외모는 영혼의 내적 얼굴에 새겨진 형상에 따라 변화한다. 영혼만이 현자들에게 알려진 모든 관상학을 낳는다. 그것들이 의미를 갖는 것도 영혼을 통해서이다. 혼들과 영들이 에덴(지고의 지혜를 종종 이렇게 불렀다)에서 나올 때 그들은 모두 일정한 형상을 지녔으며, 후에 그것이 얼굴에 반영되었다.
  여기에는 수많은 세부적인 관찰이 이어지는데, 그것들 중 일부는 지금도 신뢰할만 하다. 예컨대, 넓고 볼록한 이마는 심오하고 활동적인 마음의 표시이나 지성은 부족하다. 넓고 평평한 이마는 광기와 어리석음을 나타낸다. 양쪽이 눌리고 한 점에서 솟아오른 평평한 이마는 틀림없이 마음이 매우 좁고, 종종 마음이 한없는 공허감에 빠진다는 것을 알려준다. 끝으로, 모든 인간의 얼굴은 네 가지 유형이 있어, 영혼이 지적, 도덕적 질서 속에서 점한 위치에 따라 그 원초적 유형에 접근하기도 하고, 거기서 멀어지기도 한다. 이 원초적 유형들은 에스겔의 전차에 그려진 네 가지 모습이다. 즉, 사람의 형상, 사자의 형상, 황소의 형상, 독수리의 형상이다.
  카발리스트들의 악마론(demonology)은 우리에게 그들이 자연에서 인식한 여러 수준의 생명과 지성을 인격화한 것일 뿐인 것처럼 보인다. 귀신과 천사에 대한 믿음은 오래 전에 사람들의 마음에 뿌리는 내렸는데, 그것은 신의 통일성이라는 엄밀한 교리 곁에 있는 재미있는 신화와 같았다. 그런데 그들이 하느님과 세계의 관계에 대한 자신들의 사상을 숨기는데 그것을 이용하면 왜 안 되었을까? 그들이 창조의 교리를 그 반대의 것을 가르치는데 사용했던 것처럼 말이다. 또 그들이 성서 본문의 말씀을 이용하여 자신들을 하느님의 말씀과 종교적 권위보다 더 높이 끌어올렸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이 견해를 지지해 주는 명쾌한 본문을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거기에는 아주 그럴듯한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도 「조하르」의 주요한 세 개의 단편과 두 개의「이드라」와 <은폐의 책>은 바벨론 포로기의 기념물이었던 것으로만 보이는 천상이나 지옥의 체계를 말하는 일이 결코 없다. 그런데 「조하르」의 다른 부분에서 천사들에 대해 말할 때, 천사들은 인간보다 훨씬 열등한 존재로 나타난다. 그들은 변치 않는 맹목적 충동을 지닌 세력인 것이다. 예를들면,
  하느님은 하늘의 여러 부분에 특별한 영으로 생명을 불어 넣으셨다. 그러자 즉시로 수 많은 하늘의 무리들이 형상을 얻어 그 분 앞에 섰다. 이것이 성서의 말씀(시편 33:6)이 뜻하는 바다. ‘주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어졌도다.’ 주님의 심부름을 하는 높고 거룩한 영들이 한 곳에서 나오고, 의인들의 영혼이 두 개의 수준에서 나왔는데, 그 두 개는 하나로 결합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의인들이 더 높이 올랐으니, 그들의 수준이 더욱 높다.
  성서의 글자에 집착하고 있기는 하지만, 탈무드 연구가들조차도 같은 원리에 동의하고 있다. 그들은 “의인들이 천사들보다 높다”고 말한다.
  모든 천체들과 지상의 요소들에게 생명을 준 영들의 이름과 그들에게 부여된 기능을 고찰해 보면, 그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기가 더 쉬울 것이다. 먼저, 순전히 시적으로 인격화한 존재들이자, 도덕적 특질이나 형이상학적 추상화를 나타내는 이름을 가진 천사들은 다 빼기로 하자. 예컨대, 선한 욕망과 악한 욕망은 항상 실제적인 인물로 나타난다. 다음에는 순수(Tahariel), 자비(Rahmiel), 정의(Tzadkiel), 구원(Peda-el)이라는 천사들이 있고, 비밀의 천사인 저 유명한 라치엘(Raziel)이 있는데, 그는 질투의 눈으로 카발라 지혜의 신비를 감시하고 있다. 더구나 천사들의 위계가 세번째 세계요, 창조의 세계(the World of Farmation)인 행성들과 천체들이 점하고 있는 곳에서만 시작된다는 것은, 모든 카발리스트들이 인정하고 있으며, 카발리스트들의 존재의 일반 체계(general system of beings)와 연결되어 있는 원리이다.
  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는 군대의 대장은 메타트론(Metaton)이다. 그의 위치가 하느님의 보좌 바로 아래이기 때문에 이렇게 불린다. 그는 홀로 창조의 세계, 또는 순수한 영들의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 그의 일은 여러 영역의 통일, 조화, 운동을 유지하는 것인데, 그것은 때때로 자연이라는 이름 아래 하느님으로 여겨져 왔던 맹목적이고 무한한 힘(force)이담당하고 있던 일이었다. 메타트론의 지휘 하에 있는 수만의 부하들은 10개의 범주로 나뉘어져 있는데, 이는 틀림없이 10세피로트를 기념한 것이다. 부관인 이 천사들은 자연의 여러 구역, 모든 영역과 모든 개별적 요소를 담당하는데, 그것은 대장이 전 우주를 담당하는 것과 같은 관계이다. 이와같이 한 천사는 지구의 움직임을, 다른 천사는 달의 움직임을 담당하는 식으로 하여 전체의 천체를 관할한다. 한 천사는 불의 천사(Nuriel)라고 하며, 또 하나는 빛의 천사(Uriel)라 하고, 세번째는 계절의 운행을 관장하고, 네번째는 식물을 관장한다. 요컨대, 자연의 모든 생산물들과 힘들과 현상들은 같은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악마적인 영들을 고찰해 보면, 이 비유의 목적은 분명해진다. 우리는 이미 이런 질서를 지닌 모든 세력에게 붙여진 일반적인 이름에 주목해왔다. 카발라에 의하면, 악마들(demons)은 가장 조악하고 가장 불완전한 형태들이며 존재의 “껍질들”(shells)이다. 요컨대, 생명과 지성과 질서를 결여한 것을 뜻하는 모든 것이 여기 해당된다. 천사들처럼 그들도 10세피로트를 이루는데,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지옥의 여러 층처럼, 어둠과 불순함이 점점 짙어지는 10개의 층을 이룬다.
  처음의, 아니 처음 두 개의 층은 6일간의 창조작업 이전에 <창세기>에 묘사된 세계의 상태를 나타낸다. 즉 거기에는 눈으로 볼 수 있는 형태나 조직이 없다. 제3층은 어둠의 근원인데, 태초에 심연 위를 덮었던 바로 그 어둠이다. 다음에 7개의 천막, 이른바 지옥이 나오는데, 이는 도덕적 세계의 온갖 무질서와 그것이 야기하는 고통들에 대한 체계적인 개관이다. 거기서 우리는 인간 마음의 모든 열정과 모든 악과 연약함이 악령으로 인격화되어, 그러한 모든 결함으로 길을 잃은 이들을 괴롭히는 자들이 되어 있음을 본다. 한 천막에서는 졍욕과 유혹이, 두번째 천막에서는 분노와 폭력이, 또 다른 천막에서는 고독한 방탕의 악령인 심한 불순함이, 또 다른 천막들에서는 범죄, 시기, 우상숭배, 자만 등이 있다.
  일곱번째의 지옥천막은 무한히(ad infinitum) 나뉘고 또 나뉘는데, 거기에는 온갖 종류의 타락에 대한 일종의 특별한 왕국이 있다. 그것은 점차 무한한 깊이와 넓이로 펼쳐지는 심연이다. 이 어둠의 세계에서 최고우두머리는 성서에 나오는 사탄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카발라에서는 사마엘(Samael)이라고 한다. 그것은 독(毒), 또는 죽음의 천사이다. 「조하르」는 단호하게 말하기를, 죽음의 천사와 악한 욕망, 사탄, 최초의 어머니를 유혹한 뱀은 모두 하나이며 같은 자라고 한다. 사마엘에게도 아내가 있는데, 그녀는 악과 관능의 인격화이다. 그녀는 “창녀” 또는 방탕의 여주인이라 불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통 그들은 하나의 상징으로 결합되어, 단순히 짐승(the beast)이라 불린다.
  이 악마론과 천사론을 가장 단순하고 가장 일반적인 용어로 축소시키면, 카발리스트들이 자연의 사물 하나하나, 나아가 모든 자연에서, 아주 상이한 두 가지 요소들을 인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하나는 지성에만 모습을 나타내는 내적인 순수함(inner incorruptiability)인바, 영, 생명, 또는 형상이다. 또 하나는 순전히 외적이고 물질적인 것으로, 타락과 저주와 죽음의 상징이 되었다. 철학자 스피노자의 말로 하면, 고대 카발리스트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만물에는 영혼이 깃들어 있다.”(Omnia, quamvis diversis gradibus, animata tamensunt)고 생각했다.


  
   제8장 「조하르」: 인간영혼에 대한 카발라의 견해


  카발리스트들이 우리의 관심을 끌고, 그들의 체계에 대한 연구가 종교사 뿐 아니라, 철학사에서 큰 중요성이 있는 것은, 주로 그들이 인간에게 부여하는 높은 지위 때문이다. “너는 먼지니 먼지로 돌아갈지니라”라고 창세기는 말하고 있다(3:19). 이 저주 뒤에는 더 나은 미래에 대한 결정적인 약속도 나오지 않고, 육체가 흙과 섞였을 때,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도 없다. <전도서>의 저자는 후손들에게 다음과 같이 이상한 비유를 남겼다.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 같이 저도 죽는도다”(전도서 3:19).
  탈무드는 때때로 의인이 받을 보상에 대해 아주 시적인 표현을 한다. 그들이 천상의 에덴에 앉아, 빛으로 머리를 감싸고, 하느님의 영광을 즐긴다고 한다. 그러나 탈무드는 일반적으로 인간본성을 고상하게 보기보다는 낮추려고 애쓴다.
  너는 어디서 왔는가? 악취나는 티끌에서 왔다. 너는 어디로 가는가? 먼지와 더러움과 벌레들이 있는 곳으로 간다. 너는 어느날 누구 앞에서 너를 변호하며, 네 행위를 해명할 것인가? 왕중 왕 앞에서요, 그 이름이 찬양받으실 거룩하신 분 앞에서이다.
  탈무드학파의 가장 연장자요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들이 했다는 말이 이런 것이다.「조하르」는 완전히 다른 언어로, 우리의 기원과 미래의 운명에 대해,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인간은 창조의 총괄이요 최고의 표현이다. 그래서 그는 여섯째 날까지 창조되지 않았던 것이다. 인간이 등장하자마자, 낮은 세계, 높은 세계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완성되었다. 모든 것은 인간 안에서 총괄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모든 형상을 통합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세계의 이미지, 즉 절대적 존재를 포함한 존재의 보편성의 이미지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또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한한 특질들의 총체라고 여겨지는 하느님의 이미지이다. 인간은 지상에 나타난 하느님의 현현이다. 인간은 원초적 어둠의 심연에서 나와 지상의 아담을 낳은 천상의 아담이다.
  인간이 살과 피부와 뼈와 핏줄일 뿐이라고 생각치 말라. 결코 그렇지 않다.! 진정으로 인간이 되게 한 것은 그 영혼이다. 우리가 피부, 살, 뼈, 핏줄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지 의복, 외투일 뿐이다. 그것들이 인간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지상을 떠날 때, 그는 자신을 가리고 있는 모든 가리개를 벗는다. 그러나 몸의 여러 부분들은 지고의 지혜가 지닌 비밀을 확증해준다. 피부는 하늘을 표현하는 바, 모든 것에로 퍼져 모든 것을 덮어주니 외투와 같다. 살은 우주의 악한 면[순수하게 외적이며 만질 수 있는 요소]을 생각나게 해 준다. 뼈와 핏줄은 하늘의 전차, 즉 하느님의 종들인 내면에 있는 힘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외투이다. 천상의 인간의 깊은 신비는 내면에 있기 때문이다. 천상의 아담은 지상의 아담과 같이 영적이며, 모든 것은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 일어난다. 그러므로 성서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하느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다’(창세기 1:27-역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하늘의 별들과 행성들이 만드는 여러 상징들이 숨겨진 일들과 깊은 신비를 가리켜주듯이, 인간의 육체를 감싸고 있으며 인체의 별들이고 행성들인 피부 위의 상징들과 선(線)들도 그러하다. 이 모든 상징들은 숨겨진 의미가 있으며, 인간의 얼굴을 읽을 줄 아는 현자들이 관심을 갖는 대상들이다.
  가장 사나운 동물도 인간의 외모가 지닌 독특한 힘 앞에서는 무서워 떤다. 그 모습에 반영되어 있는 지성과 위엄 때문이다. 「조하르」에 따르면, 다니엘을 사자들의 분노에서 보호하기 위해 천사는 자기 자신의 얼굴을 보였을 뿐이다. 즉 순수한 인간처럼 보이는 데서 나오는 권위를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장점은 인간이 죄와 의무태만으로 타락하자마자 사라진다고 덧붙이고 있다. 그렇게 볼 때, 즉 인간 영혼이 세상에 나타나시기 이전의 하느님과 대등하다는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자신의 통합성(unity), 자신의 실질적 모습과 3중의 본성으로 인해 어렵지 않게 하느님의 삼위일체를 기억할 수 있다. 인간은 다음과 같은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1) 자기 존재의 최고 수준을 나타내는 영(spirit). (2) 선과 악, 즉 선한 욕망과 악한 욕망의 거처인 혼(soul). (3) 육체에 밀접히 관련되어 있어 낮은 운동, 즉 동물적 삶의 행위들과 본능들의 직접적 원인이 되는 좀 더 조악한 영혼(a coarser spirit).
  이 세 원리, 또는 인간 존재의 이 세 가지 수준이, 그것들을 갈라놓고 있는 틈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존재로 결합되어 있음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전에 하느님의 특질들을 묘사할 때 언급했던 비유로 돌아가야겠는데, 그 단초는 「창조의 책」에 있다. 이 세 가지 영혼에 대한 구절은 수없이 많지만, 우리가 다음 구절을 택한 것은 이것이 뜻을 명확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 요소, 즉 영, 혼, 감각적 생명 가운데서, 우리는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의 참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세 가지가 오직 하나의 존재를 구성하고 있으며, 거기서는 모든 것이 통일되어 있기 때문이다. 감각적 생명은 자체의 빛이 없다. 그래서 그것은 육체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 육체가 필요로 하는 양분과 쾌락을 제공한다. 우리는 여기에 현자의 말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집 사람에게 음식을 나눠 주며, 여종에게 일을 정하여 맡기느니라’(잠언 21:15). 그 짐은 양분을 공급받는 육체요, 여종은 그 뜻에 복종하는 육체의 지체들이다. 혼은 감각의 생명 위로 솟아올라 감각들을 복종시키고 다스리며, 그들이 필요로 하는 많은 빛을 공급한다. 이처럼 동물적 원리는 혼의 거처이다. 끝으로, 영은 혼 위로 솟아올라 혼을 다스리고, 그것을 생명의 빛으로 비춘다. 혼은 이 빛에 비추임 받으며, 전적으로 영에 의존한다. 사후에 혼은 안식처를 얻지 못하나니, 영이 그 근원으로, 오래 전부터 계신 분 중 오래 전부터 계신 분을 향해 올라가, 그 분에 의해 영원히 다시 채워지기까지는 에덴의 문이 혼에게 닫혀 있다. 영은 항상 그 근원으로 올라가기 때문이다.
  예상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이 세 가지 영혼 하나하나는 신적 존재의 다른 수준에 그 근원을 갖고 있다. 천상의 에덴이라고도 하는 최고의 지혜는 오직 영의 근원이다. 「조하르」의 모든 주석가들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혼의 근원이 되는 특질이 있는데, 그것은 자신 안에서 심판과 자비, 즉 아름다움을 결합한다. 끝으로, 동물적 원리는 결코 이 세상을 넘어설 수 없는데, 왕국으로 요약되어 있는 힘의 특질에 근거해 있다.
  이 세 가지 특질에 덧붙여, 「조하르」는 예외적인 또 하나의 요소를 인정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외적 형태로, 육체보다 먼저 있었으나, 육체와는 다른 존재로 인식된다. 요컨대 육체의 이데아(idea)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들 각자를 서로 구별하게 해 주는 개인적 기질을 지니고 있다. 이 이데아가 하늘에서 내려와, 임신하는 순간에 가시적인 존재가 된다.
  지상적(육체적-역주) 결합의 순간에, 거룩하신 분(그 이름이 찬양 받으소서)이 하느님의 도장이 찍힌 인간같은 형상을 내려 보내신다. 우리가 말한 행위(육체적 결합-역주)의 순간에 이 형상이 나타나며, 만일 그 순간에 무엇이 일어나는지 보도록 허락된다면, 그 형상(form)의 머리 위쪽에(above) 인간의 얼굴을 닮은 상(an image)이 있음을 볼 것이다. 이 상이 틀(model)이 되어, 그에 따라 우리가 생겨나는 것이다. 형상이 주님에게서 보내지지 않으면, 그것이 내려와 우리의 머리 위에서 떠다니지 않으면, 아이가 태어날 수 없다. 성서에 이렇게 쓰여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자기 형상(image)대로 사람을 만드셨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올 때, 우리를 처음 맞이하는 것은 이 상이다. 그것은 우리가 자라는 동안 우리와 함께 발달하고, 우리가 지상을 떠날 때 우리와 함께 간다. 그 근원은 하늘에 있다. 혼이 천상의 거주지를 떠나려 할 때, 그 하나하나의 혼은 지고하신 왕 앞에 나아가는데, 그때 이 세상에서 부여될 기질이 새겨진 미묘한 형상(form)을 받는다. 그때 그 상(image)이 이 미묘한 형상(form)에서 나온다. 혼에서 나온 세 번째 것인 이 형상이 우리보다 앞서 지상에 와서 임신의 순간에 우리가 도착하기를 기다린다. 그것은 부부가 결합할 때 항상 와 있다.
  현대 카발리스트들은 이 형상(image)을 “개별적 원리”라고 부른다.
  끝으로, 몇몇 카발리스트들은 자신들의 영혼론(psychology)에 “생명의 영”(vital spirit)이라는 제5원리를 도입했다. 이 원리의 거점은 심장인데, 그것은 물질적 요소의 결합과 조직을 관장한다. 그것은 동물적 생명과 감각적 생명 등의 원리와는 다른데,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스콜라철학에서 성장과 발육에 관한 혼이 감각에 관한 혼과 다른 것과 같다. 이러한 견해는 「조하르」의 비유 구절에 근거하고 있는데, 거기서는 매일밤 우리가 잠잘 때, 우리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 하루 일을 보고한다고 말한다. 그 일은 육체가 생명의 호흡에 의해서만 살아있는 동안에 일어나는데, 생명의 호흡은 심장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개체의 원리와 생명의 영이라는 이 마지막 두 요소는 우리의 영적 존재(spiritual existence)의 일부가 아니다. 영적 존재는 혼과 영의 긴밀한 결합 가운데 완전하게 들어 있다. 이 고등한 두 원리가 일시적으로 감각원리-즉 생명 자체-와 결합하여 지상에 묶여 있게 되는데, 이는 불행이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오리게네스나 영지주의학파와 달리 카발라는 생명을 타락이나 추방이라고 보지 않고, 교육의 한 방법이며 복된 시련이라고 본다. 카발리스트들에 의하면, 형혼은 그 유한한 본성 속에 천부적으로 우주에서 어떤 역할을 하여, 창조에 의해 제시된 광경을 관조하려는 욕구를 지니고 있다. 이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기원에 대한 깨달음(awareness)을 얻기 위해서다. 그리하여 창조세계와 완전히 일체화되지 않고, 하느님의 생각이라 부르는 빛과 생명의 원천으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더구나, 영은 동시에 두 가지의 낮은 원리들과 더 낮은 데 있는 물질까지를 향상시키지 않고는 지상에 내려올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의 생명이 완성되면, 그것은 우주적 존재의 두 가지 양극적 표현이 일종의 화합을 이루는 것이다. 즉 이상과 현실, 형상와 질료, 또는 카발라에서 말하는 대로 하면, 왕과 여왕이 화합하는 것이다.
  의인의 영혼들은 우선 첫째로 위에서 내려온 권능이며 종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왜 그 높은 곳에서 이 세상에 내려와, 자신들의 근원을 떠나 방황하느냐고 묻고자 한다면, 나는 다음과 같은 비유로 대답하겠다. ‘어떤 왕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그는 아들을 시골에 보내, 충분히 성장하여 자기 아버지 궁성의 모든 관습에 따라 훈육을 받을 때까지 거기서 기르도록 했다. 아버지가 아들의 교육이 끝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아들의 어머니인 왕비를 보내 그의 귀환을 축하하게 했다. 그리하여 왕은 아들을 자기 궁성에 맞아 여러 사람들과 함께 기뻐했다.
  거룩하신 분(그 이름이 복되시도다!) 또한 왕비에게서 낳은 아들이 있다. 이 아들은 뛰어나고 거룩한 영혼이다. 그는 아들을 시골, 즉 이 세상에 보낸다. 성장하여 왕국의 관습을 익히게 하기 위해서다. 왕이 아들이 성숙하여 왕의 궁성으로 데려갈 때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 그는 왕비를 불러 축하하게 한다. 영혼은 왕비가 와서 자기가 영원히 살 왕의 궁성으로 안내하기까지는 결코 참으로 지상을 떠나지 못한다. 그러나 그 나라 사람들은 왕의 아들이 그들을 떠날 때는 언제나 통곡한다. 만일 그들 가운데 통찰력이 뛰어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사람들을 호되게 꾸짖을 것이다. ‘너희는 왜 우는 것이냐? 그는 왕의 아들이 아니냐? 그가 너희를 떠나 아버지의 궁성에서 사는 것은 당연하지 않느냐?’ 그리하여 진리를 알았던 모세는 통곡하는 사람들에게 말했던 것이다. ‘너희는 주 하느님의 자녀들이다. 너희는... 죽은 자들을 위해 너희 자신을 해쳐서는 안 된다.’ 만일 모든 의인이 이것을 알 수 있다면, 그들은 이 세상을 떠나야 할 때 그날을 환영할 것이다. 왕비(쉐키나 또는 하느님의 현현)가 그들 가운데 내려와, 그들이 왕의 궁성에 받아들여지고 영원한 기쁨을 누리게 되면, 이는 큰 영광이 아닌가?
  하느님과 자연과 인간 영혼 사이의 이러한 관계 속에서, 우리는 전에 그토록 자주 보았던 것과 똑같은 삼위일체론을 다시 본다. 카발리스트들은 거기에 종교사상의 배타적인 영역이 허용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논리적 중요성을 부여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 하느님의 형상이라는 관점에서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발전단계에서 두 가지 생산적 원리를 포함하고 있는데, 그 두 원리의 결합(union)에서 나오는 중간요소의 도움으로 셋이 하나가 되는 삼위일체는 그 유일한 결과 또는 가장 완전한 표현이 된다. 천상의 아담은 남성원리와 여성원리의 결과이므로, 지상의 인간을 위해, 그 육체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 영혼에 대해 같은 것이 적용되어야 했다.
  「조하르」는 말한다. 남성원리와 여성 원리가 들어 있지 않은 모든 형상은 뛰어나거나 완전한 형태가 아니다. 거룩하신 분(그 분은 복되시도다)은 이 두 원리가 완전하게 결합되어 있지 않은 곳에 거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다음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축복은 이 결합이 있는 곳에만 내려온다.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느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아담)을 부르셨다’(창세기 5:2). 사람이라는 이름은 한 존재로 결합되어 있는 남자와 여자에게만 주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태초에 혼이 최고의 지성을 지니고 나타났던 것과 똑같이, 인간의 반쪽 둘은 각각 우리의 영적 본성의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어, 이 세상에 오기 전에 함께 결합되어 있었다. 그들이이 세상에 보내진 것은 그런 사실을 세상에 알리고 하느님의 품 안에서 새롭게 결합하기 위해서이다. 이 사상이 다음 구절에서보다 더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는 곳은 없다.
  모든 혼과 모든 영은 이 세상에 오기 전에 하나의 존재로 결합된 남성과 여성이었다. 땅 위로 내려오면, 이 두 개의 반쪽은 나뉘어져 서로 다른 육체 속으로 들어간다. 결혼 할 때, 모든 혼과 영을 아시는 거룩하신 분(그 분은 복되시도다)께서 그들을 전처럼 결합시키셔서, 그들은 다시 한 몸과 한 혼이 된다.... 그러나 이 결합은 인간의 행위와, 그의 여정(旅程)이 어떠냐에 따라 다르다. 그가 순수하고, 그 행위가 경건했다면, 그는 태어나기 전에 있었던 것과 똑같은 결합을 누릴 것이다.
  이 구절의 저자는 플라톤의 남녀동체론(男女同體論, hermaphrodites)에 대해 들었을지도 모른다. 이 상상적 존재의 이름은 히브리의 고대전승에는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는 희랍철학자들이 카발리스트들보다 얼마나 저급한가! 우리가 여기서 고찰하고 있는 문제와, 그것의 해결책이 되는 원리 자체는 위대한 형이상학적 체계가 될만한 가치가 있다. 남자와 여자가 영적 본성에서, 절대적 도덕법에 의해 평등한 존재라 하더라도, 그들은 기능이라는 자연적 측면에서는 결코 비슷하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적 차이는 육체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혼에 대해서도 통한다는 「조하르」의 주장에 동의할 만한 이유가 있다.
  방금 설명한 믿음은 영혼선재설과 뗄 수 없다. 그것은 이미 이데아론에 포함되어 있으며, 존재와 사상을 결합시킨다는 이론에 훨씬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거룩하신 분(그 분은 찬양 받으소서)께서 세상을 창조하려고 하셨을 때, 우주는 이미 그 분의 생각 속에 있었다. 다음에 그 분은 사실상 인간에게 속하게 될 혼들을 지으셨다. 그 혼들은 후에 인간의 몸 속에서 취하게 될 형상을 하고 그 분 앞에 나타났다. 하느님은 그들을 하나하나 점검하시고, 이 세상에 내려가도록 정해져 있는 몇몇 혼들을 발견했다. 때가 되자 각각의 혼들은 하느님께 부름을 받아 그 앞에 나아갔다. 그 분께서 말씀하셨다. ‘지상의 이러이러한 곳으로 가서, 이러이러한 몸으로 들어가라.’ 그 혼이 대답했다. ‘오, 우주의 주님이시여! 저는 이 세계에서 행복합니다. 이 곳을 떠나 오염에 몸을 더럽혀야 할 곳으로 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때 거룩하신 분 (그 분은 복 되시도다)이 말씀하셨다. ‘네가 창조되던 날부터, 너는 내가 보낼 세상으로 가도록 운명지워져 있다.’ 그 혼은 복종할 수밖에 없음을 알고, 슬퍼하며 지상으로 가는 길을 택해 우리 가운데 내려왔다.
  우리는 이 사상과 함께 다음 구절에 간단하게 표현된 회상설(回想說)을 볼 수 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자기의 고유한 형상으로, 창조 이전에 하느님의 생각 속에 있었다. 이와 똑같이, 모든 인간의 영혼들은 이 세상에 오기 전에, 지금 이 아래에서 갖고 있는 형상으로 하늘에서 하느님 앞에 존재했다. 그들이 여기서 배우는 모든 것은 여기 오기 전에 이미 알던 것이다.
  그렇듯 중요한 원리가 더 발전되지 못해서, 일반체계 속에서 더 많은 영역을 차지하지 못하게 된 것은 유감스런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주 명백하게 표현되어 있음은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선재설(先在說)을 도덕적 예정설과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후자에서는 인간의 자유가 있을 수 없지만, 전자에서는 인간의 자유가 이교의 이원론이나 성서적 창조설보다도, 절대적 통일성에 대한 신앙에 의해 더 잘 드러날 수 있는 신비이다. 이 신비는 「조하르」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시메온 벤 요하이가 제자들에게 말했다. ‘만일 거룩하신 주님(그 분은 복되시도다!)께서 우리들에게 성서에서 빛과 어둠이라고 부른 선한 욕망과 악한 욕망을 주시지 않았다면, 피조물인 인간에게 있는 [인간 고유의] 장점도 죄책도 없을 것이다.‘ 제자들이 물었다. ’그러나 왜 그렇습니까? 보상도 징벌도 없고, 인간이 죄를 짓거나 악을 행할 수 없는 편이 더 낫지 않습니까? 스승이 대답했다. ‘아니다! 인간은 현재의 모습대로 창조된 것이 좋다. 거룩하신 분(그 분은 찬양받으소서!)께서 하신 모든 일은 필요한 것이다. 율법은 인간을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율법은 하나님의 현현(쉐키나)을 위한 옷이다. 인간도 율법도 없다면, 쉐키나는 입을 옷도 없는 거지 같을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의 도덕적 본성, 선과 악의 개념은 자유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며, 우리가 그 속에 절대적 존재를 그려 넣어야 하는 여러 형상 중의 하나인 것이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영혼이 하나님을 버릴지를 그 영혼이 이 세상에 오기 전에 이미 아셨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앞에서 들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견지명이 그들의 자유를 방해하는 것은 아니었다. 반면에 그 자유를 행사하는 일은 이 시대에 해당되는 일이며, 물질의 구속을 벗어난 영들조차 자유를 남용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악을 행하는 모든 자들은 하늘에 계신 거룩하신 분(그 분은 찬양받으소서!)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심연의 가장자리로 달려가, 지상에 내려올 때를 기다렸다. 우리 가운데 내려오기 전에 영혼들의 상태가 그러했다.
  카발리스트들이 피타고라스의 윤회설을 받아들여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한 것은, 자유와 인간의 운명을 조화시켜, 인간을 하나님의 품에서 영원히 추방하지 않고, 인간의 잘못을 속죄할 길을 제시하려는 목적에서였다. 모든 개별적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영혼들도 자신들이 떠나온 절대적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측면에서 완전함(all perfection)을, 자신들 속에 있는 파괴될 수 없는 근원을 계발해야 하고, 수 많은 시련을 통해 자신들과 자기들의 기원에 대한 의식을 획득해야 한다. 만일 그들이 전생에 이 조건들을 성취하지 못했다면, 그들은 두 번째, 나아가 세 번째 생을 시작하여 항상 새로운 조건으로 옮겨 가는데, 그 생에서 전에 완성하지 못한 덕성을 성취하느냐 못하느냐는 오로지 자신들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우리는 추방을 우리가 원할 때는 언제나 끝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영원히 계속하고자 하면 아무도 막지 못한다.
 [본문은 말하기를] 모든 영혼은 윤회의 시련을 격어야 하나니, 인간이 거룩하신 분(그 분은 복되시도다!)의 방법들을 알지는 못한다. 그는 이 세상을 떠난 후에 뿐 아니라, 여기 오기 전에도 심판대에 불리워 갔음을 아지 못하고 있다. 그는 얼마나 많은 변화(transformation:윤회-역주)와 비밀한 시련을 통과해야 하는지, 얼마난 많은 혼들과 영들이 이 세상에 와서 하늘 왕의 궁전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지 아지 못한다. 끝으로, 그는 영혼들이 투석기에서 쏘아진 돌의 회전과 비슷한 회전(revolution: 윤회-역주)을 겪는다는 것을 아지 못한다. 마침내 이 비밀들이 밝혀질 때가 왔다.          
  성 제롬에 의하면, 영혼의 윤회설은 초기 그리스도교인들 사이에서 비교(秘敎)와 전통적 가치로서 오랫 동안 가르쳐져 왔다. 그것은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에게만 전해졌다. abscondite quasi in foveis viperaum versari, et quasi haereditario malo serpere in paucis. 오리겐(Origen)은, 에서와 야곱이 나기 전부터 싸웠다는 것과, 예레미야가 모친의 태 중에 있을 때 선택받았다는 것, 기타 이 생에서 이전의 선행이나 악행으로 납득할 수 없는 수 많은 일들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윤회설이라고 생각했다. 이 신앙의 기원과 정당성에 대한 모든 의문을 제거하기 위해, 이 알렉산드리아의 사제는 조심스럽게 덧붙이기를, 여기서 문제삼고 있는 것은 플라톤의 윤회설이 아니라, 그와 다른, 훨씬 고상한 이론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다시 하늘로 돌아가는 것을 돕기 위해, 현대의 카발리스트들은 또 하나의 방법을 생각해 냈다. 그것은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은총으로 주신 것이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분리된 영혼들은 율법의 가르침을 성취할 능력이 없으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하나의 생명으로 결합시켜, 마치 소경과 절름발이의 경우처럼 서로 보완할 수 있게 하셨다고 한다. 때로는 결합된 두 영혼 중 하나에게만 추가해야 할 덕목이 필요한 경우도 있어서, 그는 그것을 자기와 결합된, 은총을 더 많이 받은 다른 강력한 영혼 안에서 그것을 ?O는다. 그 때 후자는 어머니와 같이 되어, 더 약한 영혼을 가슴에 안고, 자신의 본질에서 나오는 양분으로 그 영혼을 기르니, 이는 마치 어머니가 자신의 태의 열매를 기르는 것과 같다. 임신(gestation or impregnation)이라는 용어가 어디서 왔는지,또 그 철학적 의미가 있다면 무엇인지는 추측하기가 어렵다.
  우리는 영혼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우리가 지금까지 말한 모든 시련의 보상일 뿐 아니라 끝임을 안다. 그러나 「조하르」의 저자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피조물에게 뿐 아니라 창조주에게도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주는 이러한 합일(union)이 당연한 사실이며, 그 원리는 영혼의 본질 자체(the very constitution of the soul)에 있다. 요컨대 그들은 이 교의를 영혼론의 체계를 가지고 설명하려고 애쓰는데, 우리는 그런 체계를 신비주의자들의 모든 이론에서 볼 수 있다. 인간의 동물적 삶을 지배하며, 결코 지상을 떠나지 못해, 결국 영혼의 운명에서 아무 역할도 못하는 맹목적 힘을 인간 본성과 구별했듯이, 「조하르」는 두 종류의 감정과 두 종류의 인식을 구별한다. 경외심(awe)과 사랑이 첫 번째 두 가지이고, 직접적인 빛과 반사된 빛, 또는 내면의 얼굴과 기타의 얼굴들이 두 번째의 두 가지를 지칭하는데 보통 쓰이는 표현이다.
[본문은 말한다] 내면의 얼굴은 그 빛을 지고의 빛에서 직접 받는다. 지고의 빛은 영원히 빛나며, 그 비밀은 결코 밝혀질 수 없다. 내면의 얼굴이 내면의 얼굴인 까닭은 그것이 숨겨진 근원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위쪽의(superior) 얼굴이니, 그것이 위에서 오기 때문이다. 외면의 얼굴은 위에서 직접적으로 방사한 빛의 반사일 뿐이다.
  이 두 가지 인식을 자주 “밝은 거울”(luminous mirror)과 “밝지 못한 거울”(non-luminous mirror)이라고 부른다. 그것들은 또한 탈무드에서도 이런 이름으로 나온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나님의 뒷보습만 볼 수 있고 하나님의 얼굴은 볼 수 없다고 하셨을 때(출 33:23-역주), 하나님은 이 두 가지 인식을 비유하고 계셨던 것인데, 이것이 지상의 낙원에서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 표현되어 있다. 요컨대, 이는 오늘날 우리가 “직관”과 “성찰”이라고 부르는 것에 해당한다. 
  탈무드에서 모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밝은 거울”, “밝지못한 거울” 등의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은 주목할만 하다. 그러나 탈무드는 「조하르」와 반대로, 모세가 하느님을 밝은 거울 속에서 보았다고 말한다. 또 흥미있는 것은 정통유대교 관습에서 안식일 끝에 촛불을 축복하며 손톱과 손가락 끝을 바라보는 것이 있는데, 이는 「조하르」에 있는 구절에 근거한 관습이다.
  종교적 관점에서 보면, 사랑과 경외심에 대한 정의는 매우 주목할만 하다.
우리는 경외심을 통해 사랑으로 간다. 사랑으로 하느님께 복종한 자는 최고의 경지를 얻으며, 그의 고결함 속에서 내세가 보장된다. 그러나 두려움(경외심)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전혀 섬기지 않는 것이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반대로, 그로 인해 생기는 영혼과 하나님의 합일이 그리 높지 않다 하더라도, 그러한 충성의 맹세는 매우 소중한 것이다. 경외심의 경지보다 더 높은 경지는 하나 뿐이다. 그것은 사랑의 경지이다. 사랑은 하나님과 이루는 합일의 신비를 내포하고 있다. 낮은 경지들과 높은 경지들을 연결하는 것은 사랑이다. 모든 것을 하나가 되는 경지로 끌어 올리는 것은 사랑이다. 이것이 바로 다음 구절의 비밀이다. ‘들어라, 오 이스라엘아, 우리 주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신명기 6:4)
   완성의 최고경지에 이르면, 영혼은 성찰도 경외심도 모른다. 직관과 사랑에 완전히 덮여 버린 이 지복의 존재는 자신의 개체성을 이미 잃은 것이다. 그는 무관심하고 무위(無爲)하며(inactive), 자신의 정체성을 되?O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어, 더 이상 하느님의 실존과 자신을 분리할 수 없다. 실제로 이런 존재가 지성의 관점에서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지를 다음에서 볼 수 있다.
       보라! 영혼이 ‘생명의 보고(寶庫)’라 불리는 곳에 도달했을 때, 그들은 찬란한 빛을 즐기게 되는데, 그 빛의 근원은 가장 높은 하늘이다. 그 빛은 너무도 찬란해서, 영혼들이 빛의 외투를 입지 않았다면 그것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외투로 인해 그들은 눈부신 난로(煖爐)를 들여다 볼 수있는데, 그 난로는 생명의 거주지를 비추고 있다. 모세 자신도 자신의 지상의 옷을 벗어 버린 후에야 이 빛에 다가와 볼 수 있을 것이다.
  영혼이 사랑을 통해 어떻게 하나님과 합일하는지를 알려면,「조하르」가 시메온 벤 요하이 이후 가장 중요한 인물로 평가하는 한 노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
  천상의 가장 신비하고 고귀한 곳 중 하나에 사랑의 궁전이 있다. 거기에 가장 깊은 신비가 있다.하늘의 왕이신 거룩하신 분(그 분은 찬양받으소서!)의 깊은 사랑을 받은 영혼들이, 그 분의 사랑의 입??춤으로 합일하신 거룩한 영들과 함께 있다. 그래서 의인의 죽음을 하나님의 입??춤이라고 하는 것이다. 
        
  본문은 명백하게 말하기를, “이 입??춤은 영혼 자신이 나온 본질과 합일하는 것이다” 라고 한다.
  모든 신비주의 해석가들이 왜 감미롭지만 종종 세속적이기도 한 <아가서>의 표현을 존중했는지를 같은 원리로 설명할 수 있다. 시메온 벤 요하이는 죽기 전에 “나의 사랑하는 이는 내 것이요, 나는 그의 것이로다”(아가 2:16, 6:3-역주)라고 말했다. 그런데 제르송의 신비신학에 대한 글도 같은 인용구로 끝나고 있음은 특히 주목할 가치가 있다. 이 유명한 사람의 이름과 페늘롱의 이름을 「조하르」에 나오는 사람들의 이름과 나란히 놓는 것이 놀랍기는 하겠지만, 「신비신학에 대한 고찰」(Considerations on Mystic Theology)과 「성인들의 금언에 대한 해설」(Explanations of the Maxims of the Saints)이 카발라와 같은 관상(觀想, contemplations)이론을 담고 있음을 보여 주는 데는 아무 어려움이 없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있는데, 카발리스트들처럼 솔직하게 이런 결론을 인정한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존재의 여러 단계들(“일곱 천막”이라고도 한다)에는 “성자들 중의 성자”라고 하는 단계가 있는데, 거기서는 영혼들이 최고의 영혼(the supreme soul)과 합일하여 서로를 완성한다. 이 단계에서 모든 것은 합일과 완성으로 돌아간다. 만유는 한 생각(a single thought) 속에서 합일하는데, 이 한 생각이 퍼져나가 우주를 가득 채우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한 생각의 기초, 즉 그 안에 숨겨져 있는 빛은 결코 파악하거나 알 수 없다. 우리는 오직 거기서 방사되어 나오는 그 생각만을 알 수 있다. 이 마지막 단계에서 피조물은 창조주와 구별할 수 없다. 동일한 생각이 그 둘(하느님과 피조물-역주)을 모두 비추며, 동일한 의지가 둘 다에게 생명을 불어 넣는다(animate). 하느님 뿐 아니라 그 영혼이 우주를 명령하며, 그 영혼이 명한 것을 하느님이 실행하는 것이다.
  이 분석을 완성하기 위해, 우리는 카발리스트들이 전통적 교리에 대해 품고 있는 견해를 몇 마디로 표현해야 한다. 그 견해는 카발라에서는 부수적인 것이지만, 종교의 역사에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다. 「조하르」는 우리의 첫 조상들이 불복종하여 인류에게 가져온 타락과 저주에 대해 자주 이야기한다. 그것은 아담이 뱀에게 굴복하여 자신과 후손들과 모든 자연에게 죽음을 불러들였다고 가르친다. 죄를 짓기 전에 아담은 천사들보다 더 능력있고 더 아름다웠다. 만일 그가 그 때 육체를 지니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 육체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로 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우리의 생리적 욕망과 우리의 관능적 욕망을 전혀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는 최고위(最高位)의 하느님 사자들도 질투하지 않을 수 없는 고도의 지혜로 깨우쳐진(enlightened) 상태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 교리가 “원죄설”과 같은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사실 아담의 후손만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어떤 덕행으로도 없앨 수 없는 범죄를 문제 삼기보다, 현재 뿐 아니라 미래에까지 적용되는 유전적인 불행과 끔찍한 처벌을 문제 삼을 것이다. 「조하르」는 말한다. “순수한 인간은 자신 안에 속죄를 가능케 하는 진정한 희생물을 가지고 있다. 의인들이 속죄물이며, 우주의 속죄수단이 되는 이유가 이것이다.”
  카발리스트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죽음의 천사를 우주에서 최고의 은인(恩人)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율법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그에게서 우리를 보호하려 한 것인 바, 그(죽음의 천사-역주) 때문에 의인들이 내세에 그들을 위해 보존된 저 막대한 보물을 상속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세기>에서 그렇게도 적극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인간타락에 대한 이 옛 신앙은, 영혼의 창조와 마찬가지로 카발라에서 교묘하게 당연한 사실로 주장되고 있다.
아담이 죄를 짓기 전에, 그는 오직 높은 곳에서 빛나는 지혜에만 복종했다. 그는 아직 생명나무에서 떨어져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아래에 있는 것들을 알고 그들에게 내려가려는 욕망에 유혹받아 굴복하게 되자, 그는 악과 친숙해져 선을 망각했다. 그는 생명나무에서 떨어져 나갔다. 아담과 이브가 죄를 짓기 전에, 그들은 하늘에서 오는 음성을 들었고, 높은 지혜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묘하고도 빛나는 그들의 본성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죄를 지은 이후, 그들은 아래에서 오는 소리도 이해할 수 없었다.           
  뱀의 간교함에 속임당하기 전에, 아담과 이브는 육체의 욕구에서 벗어나 있었을 뿐 아니라, 육체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즉, 그들은 지상적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은 선택받은 자들의 거주지에 사는 자들과 같이 순수한 지성이었고, 행복한 영들이었다. 이는 아담과 이브가 순수한 상태였을 동안에 그들이 벌거벗고 있었다고 표현한 성서의 말씀을 설명해 준다. 성스런 역사를 기록한 사람이,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가죽옷을 입혔다고 했을 때(창 3:21-역주),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은, 하느니께서 그들에게 육체와 감각기능을 주셔서 그들이 부주의한 호기심과 선악을 알려는 욕망으로 이끌려 내려온 이 세상에 거주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사상은 필로와 오리겐이 받아들였는데, 여기 그 사상이 아주 분명하게 표현된 여러 구절 중의 하나가 있다.
우리 선조 아담이 에덴 동산에 거할 때, 그는 하늘에 있는 모든 존재들과 같이 고도의 빛으로 만들어진 옷을 입고 있었다. 그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 이 세상의 욕구에 복종하게 되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성서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로는,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혔다는 것이다. 이 일이 있기 전에는 그들이 빛의 옷을 입고 잇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에덴에서 쓰이던 고도의 빛으로 된 옷이었다....인간이 지상에서 이룬 선행은 하늘에서 빛나는 높은 빛을 일부 그에게 끌어내려 준다. 그가 저승으로 돌아가 거룩하신 분(그 이름이 찬양받으소서) 앞에 설 때, 그가 입는 옷이 바로 이 빛이다. 이 옷 덕분에, 그는 선택된 자들의 지복을 맛볼 수 있고, 밝은 거울을 들여다 볼 수 있다. 그것이 모든 면에서 완전하기 위해서, 영혼은 자신이 거해야 하는 두 세계에 맞는 각기 다른 옷-하나는 지상세계를 위해, 하나는 더 높은 세상을 위해-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우리는 죄 자체인 죽음이 보편적인 저주가 아니라 스스로가 원한 악일 뿐이라는 것을 안다. 그것은 사랑의 입맞춤으로 하나님과 합일한 의인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 세상에 모든 희망을 두고 잇는 악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다. 원죄설은 현대카발리스트들, 특히 이삭 루리아(Issac Luria)에 의해 받아들여진 것 같다. 그는 모든 영혼은 아담과 함께 태어났으며, 모두는 하나이자 동일한 영혼을 이루고 있다고 믿고, 그들 모두가 최초의 불복종에 대해 죄가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가 창조 이래 모든 영혼이 그렇게 타락했다고 본다 하더라도, 그는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성취하여 자신들을 고양시킬 능력을 그들에게 부여하고 있다. 그러므로 영혼들을 이 상태에서 이끌어 내어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교훈을 성취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창 1:28 참고-역주). 그러므로 또한 윤회의 필요가 있는 것이니, 단 한 번의 생만으로는 이 회복작업이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또 다른 형태에서조차도, 영혼은 완성을 획득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서, 지상적 존제를 고귀하게 하고, 삶을 거룩하게 하는 일이 언제나 과제로 주어졌다. 그 완성의 필요와 싹은 영혼이 자신 안에 품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설명한 방대한 체계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것은 우리의 계획에 들어 있지 않다. 또 그 철학과 종교적 가르침을 훼손하지 않고 그렇게 할 수도 없다. 그것들은 마땅히 존중되어야 한다. 요약하자면, 「세페르 예치라」와 「조하르」가 표현하고 있는 카발라는 다음과 같은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1. 카발라는 성서에 기록된 모든 사실과 말씀을 상징으로 받아들여, 인간이 스스로에 대해 확신을 갖도록 가르치고 있다. 그것은 권위 대신에 이성을 내세우며, 종교의 품 안에서, 그리고 종교의 보호 하에 철학을 창조한다. 
  2. 카발라는, 자연 밖에 있고, 전능하면서도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항상 활동하고, 항상 생각하며, 실제로 무한한 보편적 본질, 우주에 편만하지만 그것에 의해 제약당하지 않는 원인으로 대치시킨다. 그러한 개념에서는, “창조하는 것”은 오직 생각하고 존재하고 자신을 전개하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3. 카발라는 무에서 튀어나와 무로 돌아가는, 하나님 밖에 있는 순수한 물질세계 대신에, 하느님의 본질이 다양한 사유의 법칙에 따라 자신을 전개하고 현시하는 수 많은 형상들을 인정한다. 만유는 지각력이 있는 형상이 되기 전에, 최고의 지성과 합일 속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두 개의 세계가 있다. 하나는 지성적이며 높은 세계요, 하나는 물질적이며 낮은 세계이다.
  4. 이 모든 형상들 중 인간이 가장 고귀하고 가장 완전한 존재이며, 하느님을 표현할 수 있도록 허용된 유일한 존재이다. 인간은 자신의 이중적 본성 속에서 하느님과 세계를 모두 반영하고 있으며, 그 둘 사이를 맺어 주는 자요, 그 둘 사이의 과도적 존재(the transition)이다. 다른 모든 자연물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무엇보다도 언젠가 자신이 다시 합일해야 할 절대적 본질의 일부이다. 그것은 그가 품고 있는 계발이 이루어짐으로써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일어난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적 형상-인간의 보편적 형상-과 그것의 연약한 복사판인 개별적 인간을 구별해야 한다. “천상의 인간”이라고 하는 전자는 하느님의 본질과 분리할 수 없다. 그것은 하느님의 본질이 최초로 현시된 것이다. 
  이런 요소들 중 일부는 카발라와 동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여러 사상들의 기초가 되고 있다. 그 밖의 요소들은 훨씬 일찍부터 알려져 있었다. 인간의 지성사에서, 히브리인들의 비밀한 가르침이 진정 독창적인 것인지, 아니면 단지 겉보습만 바뀐 복사판인지를 밖혀 내는 것은 매우 흥미있는 일이다.



         제3부 카발라와 유사한 사상들
         
               제9장 카발라와 플라톤 철학
  발생기의 특성이나 그 사상 자체의 특성으로 인해, 히브리인들의 비교적(秘敎的) 가르침에 기초를 제공하고 일정한 유형을 제시했다고 보이는 사상들 중 일부는 철학에 속하고, 일부는 종교에 속한다. 첫 번째 범주에는 플라톤과, 그에게 충실하지 못했던 알렉산드리아 제자들의 사상, 그리고 그들과 혼동하지 말아야 할 필로의 사상이 속한다. 종교에 대해서 말하자면, 우리는 이 시점에서는 그리스도교만을, 그것도 일반적인 방법으로 다룰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하느님과 자연에 대한 웅장한 이론들 중 어느 것도 카발라 전통의 기원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플라톤 철학과 「조하르」와 「창조의 책」에서 가르치는 어떤 형이상학적, 우주론적 원리 사이에 매우 밀접한 유사성이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두 사상 모두에게서, 하느님의 지성, 또는 창조 이전에 자신 안에 있는 원형을 따라 우주를 지으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두 사상 모두에게서, 이념들(ideas) 사이의, 즉 최고의 개념과 그것이 세상에 불완전하게 나타난 사물들 사이의 중개자 역할을 하는 수(數)들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끝으로 두 사상 모두에게서 영혼선재설과 회상설(回想說), 윤회설을 볼 수 있다. 이 유사성은 너무도 놀라운 것이어서, 현대의 카발리스트들은 그것을 인정하면서, 플라톤이 예레미야의 제자라고 설명했는데, 이는 어떤 이들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의인 시몬(Simon the Just)의 제자라고 했던 것과 같다. 사실 어떤 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더 대왕과 함께 팔레스타인에 있는 동안 솔로몬의 저서들을 보았으며, 이것이 그의 철학의 주요한 요소들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런 피상적인 관계를 가지고, 저 아테네 철학자의 작품들이 카발라의 최초의 제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고 누가 감히 주장할 수 있겠는가? 이교도의 마음에서 발원한 이런 이상한 기원을 지닌 사상이 그토록 높이 평가되고, 「미슈나」의 수많은 신비에 감싸여 있다는 것은 더욱 놀라운 일이 아닌가? 그러나 이 견해를 고집하는 자들은 「조하르」가 13세기의 창작물이라고 주장하는 바로 그 비판자들이다. 그런데 이와같이 하여 그들은 「조하르」가 아직 플라톤이 알려지지 않은 시대에 나타난 것으로 만든 것이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들 속에 산재해 있는 플라톤의 인용구와 그에 곁들여 있는 실랄한 비판이 플라톤 철학에 대한 어떤 개념을 전달했으리라고는 아무도 주장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경우라도 우리는 카발라와 플라톤 철학의 실제적인 연관성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 두 사상 사이에 처음에 보였던 유사성은 그들 사이의 차이점에 의해 곧 사라질 것이다. 플라톤은 정식으로 두 가지 원리를 인정했는데, 영혼과 물질, 즉 지성적 원인과 비활성(非活性)의 본질이 그것이다. 물론 그가 말한 것을 가지고서는, 두 번째 것의 개념을 첫 번째 것만큼 명확하게 하기가 어렵기는 하다. 반면에 카발리스트들은 무에서 이루어진 창조라는 것의 불가해성(不可解性)에 자극을 받아, 절대적 단일성(absolute unity)을 자신들의 체계의 기초로 받아들였다. 그 단일성은 곧 일시에, 그리고 동시에, 원인이요 본질이며, 존재할 수 있는 것 뿐 아니라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의 형상인 하느님이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카발리스트들도 선과 악, 정신과 물질, 힘과 저항 사이의 투쟁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 투쟁을 절대적 원리에 귀속시킨다. 그들은 그것을 유한과 무한 사이에서 만물이 발생할 때 나타나는 필연적인 차이로 본다. 그것은 또한 모든 개별적 존재와 그들의 경계 사이에 있는, 즉 존재들의 눈금 위에 있는 가장 멀리 있는 점들 사이에 나타나는 필연적 차이이다. 이 근본적인 가르침이 「조하르」에서는 때때로 심오한 철학적 표현을 통해 해석되고 있지만, 「세페르 예치라」에서는 공식적이고 조야한 형태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독창적인 것이며, 적어도 플라톤의 영향과는 무관하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세피로트론과 비교해 보면, 절대적 통일성이 이원론과 다른 것만큼이나 그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있다.
  플라톤은 지성적 원리와 비활성의 물질 사이에 깊은 골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그는 이데아에서 지성의 형상들 외에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 우리 자신의 지성은 그 최고지성의 조건적이며 한정된 부분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형상들은 그들이 속해 있는 원리와 마찬가지로 영원하며 불멸이다. 왜냐하면, 형상들은 그 자체가 이데아이며 지성이므로, 그것들이 없이는 지성적 원리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것들은 또한 만유의 본질을 나타내지만, 그것은 형상 또는 하나님의 이데아의 흔적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형상들은 비활성의 원리 자체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나타낼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원리가 존재한 이래, 그리고 영원히, 그 원리 또한 자신의 본질과 자신의 독특한 불변의 특성들을 갖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것이 수많은 변화를 겪기는 하지만 그렇다.             
      우리는 플라톤이 물질을 단순한 교섭(negotiation), 즉 독특한 각 존재들을 둘러 싸고 있는 경계로서 묘사하려고 했다는 것을 부정한다. 그는 이 역할을 명백히 수(數)에게 부여하고 있는데, 수는 모든 경계와 비율의 원리이다. 그는 수들과 산출적이며(productive) 지적인 원인을 가지고서 무한을 규정하는데, 무한은 만유가 거기서 산출되어 나온 것, 즉 질료(matter), 또는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과관계와는 무관한 본질에 다소간 상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들(existences), 아니 오히려 존재의 형상들 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즉, 존재(being)의 불변의 양식들 말이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개념들의 집단에서 배제된다. 이것은 카발라의 세피로트와 경우가 다르다. 카발라에서는 질료 자체가 숫자로 표현된다. 카발리스트들은 질료와 그 숫자가 서로 완전히 일치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세피로트는 움직이지 않는 본질 즉, 수동성과 저항의 특성들인 존재(existence)의 형상과 이데아의 형태 즉, 둘 다를 지적 인과관계의 형상들로 제시한다.
  그러므로 세피로트는 두 개의 큰 부류로 나뉘는데, ‘조하르’의 형이상학적 언어로는 “아버지들”과 “어머니들”이다. 이 분명히 상반되는 두 원리는 소멸되지 않는 한 근원-무한-에서 나와 “아들”이라 불리는 하나의 공통의 특질 속에서 재결합하고, 거기에서 다시 떨어져 나와 새로운 형상 속에서 재결합한다. 그러므로 아무도 카발라의 삼위일체적 체계를 플라톤의 삼위일체설과 혼동할 수 없다.
  카발라 체계가 희랍철학과 그 기본개념이 다르다 하더라도, 상대적으로만 독창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왜냐하면, 형이상학에서는 절대적 독창성이란 극히 드물며, 아마도 결코 찾아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플라톤 자신도 자기의 모든 것을 자신의 천재성만으로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이성과 과학에 참으로 가치가 있는 인물이 나타나기 전에, 최고원인, 최초의 존재, 사물의 발생에 대한 모든 위대한 개념은 처음에는 다소간 조잡한 형태로 나타났다. 이와같이 철학적 정신의 독립성과 풍요로움을 해치지 않는 전통은 받아들일 만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독창성을 부정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카발리스트들이 플라톤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진실로 카발리스트들은 가장 독립적인 철학의 근원에서 나왔다. 만일 모든 것을 회의하여, 세우는 것 만큼이나 자주 파괴해 버리는 이 우스꽝스럽고 무자비한 변증법에 의해 양육되었다고 생각한다면, 만일 (플라톤의-역주) 「대화편」을 피상적으로 읽기만 하는 것으로 그들이 가장 세련된 문명의 우수성 속으로 들어갔다고 생각한다면, 「조하르」의 가장 중요한 구절들에서 보이는 비이성적이고 거칠고 무제약적인 상상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흰머리(the white head)에 대한 보기 드문 묘사, 미숙한 세부묘사와 뒤섞여 있는 저 웅대한 비유들, 시나이산의 계시보다 더 오래된 비밀한 계시가 있었다는 가정, 끝으로 가장 자의적(恣意的)인 방법의 도움을 받아 성서에서 자신들의 교의를 발견하려는 저 믿기 어려운 노력 등을 이런 것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러한 특징들 속에서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뛰어나게 종교적인 민족의 가슴에서 솟아나온 이 철학은 자신의 대담무쌍함을 솔직하게 시인하지 않고, 자기 마음의 평화를 위해 권위에서 안식처를 찾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특징들을 자신의 권위와 힘과 깨달음을 이성(理性)에서만 이끌어낸다고 공공연히 단언하고 있는 이상하고 독립적인 철학(플라톤 철학-역주)이 표방하는 완전히 자유로운 선택과 일치시킬 수는 없다. 더욱이 유대인들은 이방인 스승들을 결코 부정하지 않았으며, 그들에게서 때때로 빌려온 지식에 대해 타민족을 존경하는 마음을 금하지 않았다.
  탈무드 연구가들은 어떤 견해의 창시자의 이름을 거명하는 데 대해 매우 신중했다. 그래서 탈무드는 유대인들이 오늘날까지 성서에서 쓰고 있는 글자들 뿐 아니라, 달[月]의 명칭과 천사들의 이름을 앗시리아인들이 전해 주었다고 말한다. 후에 희랍어가 그들 사이에 퍼지기 시작하자, 「미슈나」의 가장 존경 받는 교사들은 희랍어에 대해 말할 때 존경을 표했다.
  끝으로 「조하르」는 아주 주목할 만한 구절에서 말하기를 동방의 책들은 하느님의 율법과 시메온 벤 요하이 학파가 가르친 몇 가지 견해에 매우 근접해 있다고 한다. 이 고대의 지혜는 족장 아브라함이 자신의 첩에게서 태어난 자녀들에게 가르쳤으며, 성서에 의하면, 그들이 동방에 ?탕例杉?. 그런데 카발라의 저자들은 왜 플라톤에 대해서는 기념할 만한 말을 남기지 않았을까? 그들은 현대 카발리스트들처럼 쉽게, 플라톤이 진정한 하느님의 예언자들에게서 교육받았다고 주장할 수 없었을까? 교회사의 아버지라고 여겨지는 카이사레아의 유세비우스(eusenius of caesarea:264-340)에 의하면 이는 BC 2세기나 3세기의 알렉산드리아학파 유대인 철학자인 파네아스의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 of Paneas)가 한 일과 똑같은 것인데, 그는 플라톤의 철학에 따라 성서를 해석하고 나서, 플라톤이 모세오경에서 자신의 모든 지식을 끌어왔다고 서슴없이 그를 비난했다. 이와 똑같은 전략을 쓴 사람은 필로인데, 그는 포르티코학파(the Portico)의 지도자인 철학자 제논(Zeno : 360-270 BC)에 대해 그렇게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카발라 체계의 기원이 플라톤 사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다.
                


           제10장 카발라와 알렉산드리아 학파
  우리가 「조하르」에서 찾아낸 형이상학적, 종교적 교의는 순수한 플라톤 철학보다 이른바 신플라톤 철학과 더 긴밀한 유사성이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조하르」가 신플라톤주의와 공통점이 있음을 지적하기 전에, 카발라가 꼭 신플라톤주의의 복사판이라고 결론짓는 것이 정당한 것일까? 피상적인 비판에 만족하고자 한다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한 마디로 충분하다. 왜냐하면 히브리인들의 비교(秘敎)는 암오니우스 사카스(Ammonius Saccas), 플로티누스, 포르피우스(Porphyrius)가 철학의 모습을 바꾸어 놓기 훨씬 전부터 존재했다고 주장하는 데는 아무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우리는 카발라가 발전하여 궁극적 형태를 확립하는 데 여러 세기가 걸렸다는 이론에 동의한다. 카발라가 알렉산드리아의 이교(異敎) 학파에게서 아주 많은 것을 빌려왔다는 가정은 우리가 계속 진지하게 숙고할 만한 일이다.  마케도니아 군대에 의해 동방에서 변화가 일어난 이후, 많은 유대인들이 정복자들의 언어와 문명을 수용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특히 그렇다.
  카발라가 랍비들의 관습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는 카발라가 팔레스타인에서 우리(유럽인-역주)에게로 전해졌다는 입증된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은 희랍어를 썼으며, 거룩한 땅의 대중적이고 일그러진 방언을 결코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신플라톤학파가 등장하고부터 14세기 중반까지, 즉 유대민족에게서 마지막 학파들과 마지막 족장들과, 그들의 지적, 종교적 삶의 마지막 불꽃이 사라졌던 기간 동안, 이 나라들과 그 문명들 사이의 관계는 어떠했던가? 이 기간 동안 이교의 철학이 거룩한 땅에 스며들어 왔다면, 우리는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의 개입이 있었다고 가정할 수 있다. 그들은 유대교의 거룩한 책들 뿐 아니라 희랍문명의 기념비적인 주요 저작들에도 익숙해 있었으며, 그것은 70인역 희랍어성서(the Septuagint)와 아리스토불루스의 예에서 볼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에 있는 그들의 동포들과 거의 교류가 없었기 때문에, 팔레스타인에서 그토록 큰 역할을 했으며, 공통의 시기(the common era)가 되기 전 2세기 이상이나 거기에 깊이 뿌리를 내렸던 랍비전통을 전혀 몰랐다. 필로의 작품들과, 한 알렉산드리아인의 붓끝으로부터 나온「지혜서」(the Book of the Wisdom)와 「마카비들의 마지막 책」(the last Book of the Maccabees)을 면밀히 검토해 보면, 유대땅에서 가장 성스런 권위를 부여 받은 이름들, 예를 들면 대회당(大會堂)의 마지막 대표자였던 대제사장 의인 시몬(Simon the Just)과 그를 뒤이은 존경받는 탄나임(Tannaim)들의 이름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음을 보게 된다. 우리는 힐렐(Hillel)과 쉠마이(Shemmai) 사이의 유명한 논쟁(이 위대한 두 명의 지도자는 「미슈나」에 나오는데, BC 78 - 44년경, 즉 필로보다 이전에 전성기를 누렸다)이나 나중에 「미슈나」에 수집되어 율법적 효력을 갖게 된 여러 가지 관습에 대한 언급조차 찾아 볼 수 없다. 필로는 자신의 저서 ‘「모세의 생애」(Life of Moses)에서도 이스라엘의 장로들에 의해 보존되어 보통 성서본문과 함께 연구되던 구전(口傳)에 대해 한 마디의 언급도 없다. 그러나 히브리 예언자의 생애(모세-역주) 속에 재미있는 우화를 여기저기 넣기 위해 고안된 이러한 전승은 랍비들의 의식(儀式)에 기초가 되는 전승들과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그것은 우리에게 유대교의 매 시기마다 풍성했던 대중적이고 종교적 권위가 부여되지 않은 전설인 저 「미드라쉬」(Midrash)들을 생각나게 한다.
  반면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도 이집트에 있는 그들의 흩어진 동포들의 운명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지는 못했다. 그들은 단지 현재 우리의 주의를 끌고 있는 판본보다 훨씬 더 오래된 유명한 「70인역 희랍어성서」에 대해 소문을 통해서만 알고 있었다. 그들은 아리스테아스(Aristeas)의 우화를 열심히 받아들였다. 거기에는 그들의 민족에 대한 사랑과 괴이한 일에 대한 호기심이 잘 조화되어 있었다. 여기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탈무드」의 저자들이 「70인역 희랍어성서」(72명의 번역자들이 있었다고 추측된다)를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희랍어와 희랍문학을 몰랐기 때문에 그것을 알 수도 없었다는 것이다. 진실로 그 목적을 위해 (구약성서의 희랍어 번역하는 일을 말함-역주) 특별히 성령의 영감을 받은 72명의 장로들이 모세오경의 본문에 만들어 낸 몇 가지 변형을 열거할 때, 사람들은 10곳을 지적하는데, 그 중 몇몇은 전혀 있지도 않거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곳이고, 대부분의 경우는 우스꽝스럽거나 변형시킬 수 없는 내용이다.
 「미슈나」나 두 개의 「게마라」에서는 철학자 아리스토불루스나 필로, 또는 전에 언급한 외경(外經)의 저자들에 대한 언급을 한 마디도 찾아 볼 수 없다. 더욱 더 놀라운 것은, 「탈무드」가 테라퓨타이파(the Therapeutae)나 심지어 에세네파(the Essenes)에 대해서조차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에세네파는 역사가 요세푸스의 시대에 이미 거룩한 땅에 확고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 두 교파의 기원과 그들이 가르침을 전달하기 위해 사용한 언어를 살펴 볼 때에만, 이러한 침묵을 설명할 수 있다. 두 교파는 모두 다 이집트에서 발생했으며, 그들의 종교적 조국에서조차 희랍어를 계속 사용했던 것 같다. 이렇지 않다면, 「탈무드」의 침묵, 특히 에세네파에 대한 침묵은 훨씬 더 설명할 수 없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이 교파들은 기독교 시대보다 1세기 반 전인 요나단 마카베우스(Jonathan Maccabeus)의 통치기간 동안에 이미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이 자기 동포들-그 중 몇 명은 분명히 유대인들의 자부심을 고취시키는 공적을 세웠는데도-에 대해 그토록 모르고 살았다면, 그들이 똑같이 멀리 떨어진 이교의 학파(알렉산드리아학파-역주)에게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는 가정을 왜 해야 하는 것인가? 우리는 이미 그들이 희랍어를 매우 존중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그들이 당시의 철학적 경향을 따르는 데 충분히 익숙해 있었을까? 우리는 이를 의심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탈무드」나 「조하르」에서 희랍문명의 기념비적 작품들에 대한 언급이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그 언어로 쓰여진 작품이 알려지지 않았는데, 그 언어를 이해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다음으로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나 대부분의 생을 거기서 보낸 요세푸스에게서 우리가 듣는 이야기는, 이 유명한 역사가가 희랍어로 작품을 쓰는 데, 아니 오히려 작품을 희랍어로 번역하는 데 남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다. 그의 작품 어디에선가, 그는 이 주제에 대해 훨씬 더 분명히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스스로 인정하는 것은 자기 동포들에게도 해당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덧붙이기를, 자기 나라에서 언어공부는 이교적인 직업으로 여겨져서 자유민에게보다 노예에게 합당한 일로 본다고 했다. 또 종교적 율법과 성서에 대해 고도로 학식이 있는 사람들만이 높은 존경을 받으며, 학자로 알려진다고 했다.
  그러나 요세푸스는 거룩한 땅에서 가장 뛰어난 가문 중 하나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왕족 혈통이요, 사제계급에 속했으므로, 정치 뿐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자기 나라의 모든 지식을 전수받기에 그보다 더 적절한 인물은 없었다. 더욱이 이교의 학문에까지 몰두했던 이 「유대고대사」(Jewish Antiquities)와 「유대전사(戰史)」(Jewish War)의 저자는, 자기 나라와 자기들 신앙에만 충실하게 머물러 있던 그의 동포들과 같은 망설임이 없었다.
  팔레스타인에서 우리가 믿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희랍어를 썼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우리는 아직 알렉산드리아 철학의 영향에 대한 결론을 이끌어 낼 입장이 못된다. 탈무드는 희랍어와 희랍학문을 명백하게 구별하고 있기 때문이다. 희랍학문과 희랍어는 별개의 것이다. 전자는 존중되고 숭앙되었지만, 후자는 저주받았다. 율법판례집이 필연적으로 그렇듯이, 항상 아주 간결하게 표현하는「미슈나」는, 희랍학문으로 자녀를 양육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이러한 금지가 티누스(Titus)와 전쟁하는 동안 실행되었다고 덧붙인다.
  그러나 게마라는 훨씬 더 명백하다. 그것은 이 금지가 더 이른 시기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우리의 스승들은 다음 사항을 우리에게 가르쳤다. 하스몬 왕가의 왕자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 기간 동안, 히르카누스(Hyrcanus)는 예루살렘을 공격했는데, 아리스토불루스가 포위당했다. 동전을 가득 담은 바구니가 매일 성벽을 내려오고, 그것과 바꾸어 교환해서 희생제를 위한 동물들이 올려 보내졌다. 그 때 공격자의 진영에 희랍어에 능통한 노인이 있었다. 그는 ‘그대들의 적이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 한, 그들은 너희 손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다음 날 동전이 가득 든 바구니가 내려왔으나, 희생제물 대신에 돼지 한 마리가 올려 보내졌다. 이 불결한 동물이 성벽을 반쯤 올라갔을 때, 그 동물이 성벽을 향해 발굽을 내밀었다. 그러자 400파라상(parasang:옛 페르시아의 거리 단위, 약 3.5 마일-역주) 주위에 있는 이스라엘 땅이 전율했다. 그 때 다음과 같은 저주가 선포되었다. ’돼지를 올려보낸 자에게 저주가 있으라. 자기 자녀들에게 희랍학문을 가르치는 우리에게 저주 있으라.‘ 
  
  지진이 났다는 우화적이고도 우스꽝스런 상황과는 상관없이, 이 이야기는 가치가 있다. 그 요지는 명백히 사실인데, 이는 오세푸스의 글에도 나오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히르카누스의 부하들은 포위된 자들에게 한 마리 당 한 드라크마를 받는 즉시 희생제의 동물을 보내겠다고 약속을 해서, 그들이 돈을 보내게 하고는 동물을 보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이 일은 이중으로 가중한 일이었다. 그것은 사람과 한 맹세를 깨뜨린 것이며, 또한 하느님을 모욕한 일이었다. 그토록 마음 졸이며 기다리던 희생제물 대신에 제사장들이 거룩한 장소에서 그들이 가장 역겨워하는 동물을 대하게 되었다는 아주 그럴듯한 상황을 덧붙이면, 신성모독과 위증이 극에 달했다는 것을 잘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범죄에 누가 책임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어디서 그 최초의 충동을 찾을 것인가? 물론 다른 나라의 지혜를 구해 하느님의 율법을 무시한 자들에게서이다. 이 고소(희랍학문에 대한 고소-역주)가 잘 구성되어 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저주가 하스몬가의 전쟁 동안 선포되었는지 티투스와 전쟁하는 동안 선포되었는지는 우리에게 더욱 중요하지 않다. 우리에게 관심있는 것, 그리고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은 희랍학문이 팔레스타인에서는 불신앙의 원천으로 여겨졌으며, 이중의 신성모독이 된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희랍학문을 한다고 의심받는 자들과 랍비의 정통적 가르침을 세우거나 간직한 자들 사이에는 어떤 공감이나 동맹이 있을 수 없었다.
  「탈무드」가 또한 -이 이야기를 사무엘이라는 노스승에게서 들은 랍비유다의 이름으로- 가말리엘의 아들 시몬(Simon, son of Gamaliel)의 말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가말리엘은 <사도행전>에서 그토록 아름다운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행 5:33-42 참조-역주). “내 아버지 집에는 1천 명의 자녀들이 있는데, 그 중 5백 명은 율법을 공부했고, 5백 명은 희랍학문을 배웠다. 오늘날에는 여기에 있는 나와 아시아에 있는 내 사촌만이 남아 있다.” 「게마라」는 이를 주석하기를, “가말리엘 가문을 위해 예외가 행해졌으니, 이는 그들이 왕궁과 가까웠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더욱이 주의할 것은, 전체 문장이 앞의 것보다 신뢰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일반적 전통이 아니고, 이미 자기 근원에서 멀리 떠난 한 개인의 증언에 대한 단순한 소문인 것이다. 가말리엘이라는 인물은 전통이 묘사하고 있듯이, 유대교의 정통성에 대한 그의 고집과 그에 대한 일반의 존경심 때문에 다른 율법교사들과 다르다.
  그런 감정들은 헬레니스트들(the Hellenists)이 경건하지 못하다는 비판과 양립하기 어렵다. 더욱이 이 회당의 족장(가말리엘-역주)은 사도들의 시대에 매우 연로했으므로, 알렉산드리아학파가 세워지기 오래 전에 사망했다. 끝으로, 가말리엘 가문은 예외였기 때문에, 그 사실은 (그것이 무엇이든간에) 그 원인(가말리엘 가문-역주)과 함께 사라졌다. 그래서 우리는 후에 실로 그러한 흔적을 티끌만큼도 볼 수 없다. 이 애매하고 불확실한 글귀를 메우기 위해, 우리는 「미슈나」의 엄격한 말과 완전히 일치하는 또 하나의 구절을 찾아냈다.
  벤 도마(Ben Domah)가 그의 삼촌인 랍비 이스마엘(Rabb Ismael)에게 희랍학문을 공부하게 허락해 달라고 했다. 그 교사는 그에게 다음과 같은 구절을 암송해 주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밤낮으로 그것을 묵상하라“(여호수아 1:8-역주). 그리고서 이렇게 덧붙였다. ”자 이제 밤도 아니고 낮도 아닌 시간을 찾아라. 그러면 네가 희랍학문을 연구하는 데 몰두해도 좋다고 허락하겠다.“
  알렉산드리아 철학이 유대의 교사들에게서 제자들을 찾았다는 가설은, 위에 인용한 구절이 증거하는 바에 의해 완전히 깨졌다. (우리는 그 외의 다른 증거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이 구절에 의해 우리는 그들이 “철학”이라는 단어조차 알지 못했다고 믿을 수 있게 되었다.
  진실로 적들의 절박한 종교적 의무를 -그것은 자기 자신의 것이기도 했다(동족간의 전쟁이였으므로-역주)- 이용하도록 히르카누스에게 충고한 이 노인은 어떤 류의 철학자였단 말인가! 그런 술책은 마키아벨리에게나 걸맞는 것이다! 어떻게 철학이 헤롯의 왕궁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지식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단 말인가? (헤롯은 음험한 술수로 권력을 잡은 자였으므로, 그 왕궁에는 철학이 필요 없었다는 뜻 -역주) 가장 오래되고 가장 유명한 성서주석가인 랍비 솔로몬(R. Solomon)의 견해를 들어보면, 우리의 견해와 일치한다. 그는 “「탈무드」에서는 희랍학문이라는 말을 궁정대신들이 사용한 현학적인 언어라는 뜻으로 썼으며, 일반 사람들은 이 언어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 설명은 매우 올바른 식견이기는 하지만 좀 협소한 것 같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가 언급하고 있는(탈무드의-역주) 그 불확실한 구절은 어떤 일반적인 문화, 좀 더 말하자면 희랍 학문의 영향으로 생긴 어떤 지적 자유를 지적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뿐이다.
  유대인의 종교적 전통이 희랍에서 나온 모든 학문에 대해 굉장한 증오심을 나타내고 있음은 다음 구절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여기서 그들은 카발라에 대해 어떤 열심과 숭배심과 미신적인 경외심을 가지고 말하고 있다.
  한 번은 우리 스승이신 요하난 벤 착카이 (Yohanan ben Zakkai)가 길에 나가 나귀에 올랐는데, 랍비 엘레아자르 벤 아라크(Rabbi Eleazar ben Arak)가 함께 했다. 벤 아라크가 벤 착카이에게 메르카바에 대해 좀 가르쳐 달라고 청했다. 우리 스승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메르카바의 비밀은 현명하여 스스로 지혜를 추론할 수 있지 않은 사람이라면 한 사람에게라도 드러내지 못하게 되어 있다고.“
  엘레아자르가 대답했다. ‘그러면 이 학문에 대해 제게 가르쳐 주셨던 것이라도 당신 앞에서 다시 말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그야 문제될 거 없지, 말하게.’ 우리 스승님께서 대답하셨다. 그러면서 스승님께서는 나귀에서 내려, 머리를 덮으시고 올리브나무 그늘에 있는 돌 위에 앉으셨다. 아라크의 아들 엘레아자르가 메르카바에 대한 이야기를 채 꺼내기도 전에 불길이 하늘에서 내려와 들판의 모든 나무들을 감쌌고, 나무들은 찬송가를 부르는 듯 했다. 그 불길 속에서 한 천사가 이 비밀을 듣는 것에 대한 기쁨을 표현하는 소리가 들렸다.
  후에 두 명의 다른 랍비들이 엘레아자르의 흉내를 내려고 했을 때, 그들은 대단히 놀라운 기적을 경험했다. 검은 구름이 갑자기 하늘을 덮고, 무지개 같은 유성(流星)이 지평선 위에 번쩍였으며, 결혼행진을 보러 모인 호기심 많은 군중들처럼, 천사들이 이야기를 듣고자 서두르는 모습이 보였다.
  이 구절들을 읽고 나서도 여전히, 카발라는 알렉산드리아 철학이라는 태양에서 훔쳐온 한 줄기 빛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그러나 우리는 카발라와 알렉산드리아 철학 사이의 어떤 유사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공통의 기원이 아니라면 설명할 수가 없다. 우리는 이 기원을 유대나 희랍이 아닌 다른 데서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여기서 암모니우스학파도 시메온 벤 요하이의 학파처럼 자신들을 신비 속에 감추고, 자신들의 가르침의 비밀을 결코 누설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것을 지적할 필요는 없다. 적어도 그들의 마지막 제자들 모임을 통해, 그들은 자신들이 고대의 비밀전통의 후계자라고 주장했으며, 그 전통은 물론 신적인 근원에서 나왔다고 했다. 그들 또한 비유적 해석의 학문과 관습에 -같은 정도로- 대가들이었다. 끝으로 그들은 열심과 신앙을 통한 이른바 끼달음(enlightenment)을 이성(reason)보다 위에 두었다.그런데 이것들은 모든 신비주의에 공통된 주장이다. 우리는 이 주장에 오래 머물지 않고, 더욱 중요한 다음의 요점으로 옮겨가려고 한다.
  1.  카발라의 거장들에게 뿐 아니라 플로티누스와 그 제자들에게, 하느님은 만유의 본질적 근원인 내재적 원인(the inmament cause)이다. 만유는 그 분에게서 나와 그 분에게로 돌아간다. 그 분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시작이며 마지막이다. 포르피리우스가 말하듯이, 그 분은 어디에나 계시며, 아무데도 계시지 않는다. 만유가 그 분 안에 있고, 그 분을 통해 존재하므로, 그 분은 어디에나 계신다. 그 분은 어떤 특정한 존재 속에도 계시지 않고, 모든 존재의 총합 속에도 계시지 않으므로, 그 분은 어디에도 계시지 않는다. 그 분은 모든 개별적 존재를 합친 것이 결코 아니므로, 그 분은 존재를 넘어서(above)계신다. 플로티누스는 존재를 하느님의 현현들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본다. 그 분이 존재 위에 계신다면, 그 분은 또한 지성 위에 계신다. 그 지성은 물론 그 분에게서 나왔으나, 그 분에게 도달할 수 없다. 그리하여 그 분이 단일성(the Unity) 또는 최초의 존재하고 불리지만, 그 분에겐 아무 이름도 부여하지 않는 것이 더 적절하다. 그 분의 본질을 표현할 어떤 이름도 없기 때문이다. 그 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분이며, 알 수 없는 분이다. 이것은 아인 소프의 모습과 정확히 일치한다.「조하르」는 그 분을 언제나 알 수 없는 분 중의 알 수 없는 분, 신비 중의 신비라 불렀으며, 세피로트보다 훨씬 위에 두었고, 심지어 최고의 추상(抽象) 속에서 존재를 표현하는 것들보다도 위에 두었다.
  2. 알렉산드리아의 플라톤주의자들에 따르면, 하느님은 오직 삼위일체의 형상 속에서만 인식될 수 있다. 먼저, 플라톤의 용어에서 빌어온 세 개의 용어로 구성된 일반적 삼위일체가 있는데, 그것은 통일성 또는 선, 지성, 세상의 영혼 또는 조물주(the Deniurge)이다. 그러나 이 세 가지 표현 각각이 특정한 삼위일체를 낳는다. 선 또는 통일성은 만유와 관계 속에서, 모든 사랑의 원리 또는 보편적 욕망의 목적이며, 힘과 소유의 충만함이며, 끝으로 지고의 완성이다. 힘의 충만함을 소유한 자로서, 하느님은 자신을 외부로 현시하여 창조의 원인이 되려는 성향을 갖고 있다. 사랑과 욕망의 목적으로서, 하느님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겨 마지막 원인이 된다. 그리고 최고의 완성으로서, 하느님은 이 모든 것을 만유의 시작이자 끝인 값진 덕성으로 변화시킨다. 최초의 삼위일체는 선 자체라 불린다. 다음에는 지성적 삼위일체, 또는 하느님의 지혜가 오는데, 그 품 안에서, 가장 완벽한 일체성 속에서, 존재와 진리와 지성적인 진리, 즉 생각하는 존재와 생각되는 존재와 생각 자체가 휴식하고 합일한다. 끝으로 세상의 영혼 또는 조물주도 삼위일체로 고찰될 수 있다. 즉 조물주적 삼위일체이다. 그것은 보편적 실체, 또는 모든 자연물 속에서 작용하는 힘, 만유의 움직임 또는 발생, 그리고 자신을 낳은 실체의 품으로 만유가 돌아감을 말한다.  
  자연의 이 세 측면들은 다른 세가지로 대치할 수 있는데, 그것들은 상징적으로 많은 올림푸스의 신들로 표현된다. 주피터(Jupiter:희랍신화의 제우스-역주)는 영혼과 육체의 조물주요,넵튠(Neptune:바다의 신, 희랍신화의 포세이돈-역주)은 영혼들의 지배자요, 플루토(Pluto: 명부[冥府]의 신-역주)는 육체의 지배자이다. 이 세 개의 삼위체들 각자는 어떤 방식으로 일반적 삼위일체 속에 섞여 자신들을 상실하는데, 이들은 「조하르」에서 하느님의 특질들을 분류하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모든 세피로트가 세 개의 범주로 나뉘며, 그 세 범주들은 전체로 보면 다시 일반적이며 분리할 수 없는 삼위일체를 이룬다는 사실이다. 첫 번째 셋은 순수히 지적이며, 다음 셋은 도덕적이며, 마지막 셋은 자연 속에 나타난 하느님과 관계가 있다.
  3. 똑같은 방식으로, 만유의 발생, 또는 하느님의 특질들의 현시는 우리가 비교하려고 하는 두 가지 체계에서 볼 수 있다. 이미 말한대로, 플로티누스와 프로클루스(Proclus)는, 지성이 존재의 본질 자체이며, 존재와 지성은 합일(unity) 속에서 절대적으로 일치한다고 가르친다. 이어서 그들이 가르치는 바는,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존재와, 우리가 그것들을 모든 측면에서 고찰할 수가 있지만, 그 모든 측면이란 빛과 실재와 생명을 동시에 낳는 절대적 생각의 전개, 또는 일종의 창조적 변증법일 뿐이다. 진실로 일찍이 어느 것도 항상 불변이며 유일무이한 지고의 통일성 또는 원리로부터 분리되어 있은 적은 없었다. 여기에는 세상에 있는 가시적인 모든 존재들과 힘들(forces)이 포함된다. 두 번째 통일성 속에서, 좀 더 적절히 말하자면 지성 속에서 생각이 분리되어, 주체, 객체, 생각이라는 작용으로 나뉜다. 
  끝으로 더 낮은 수준에서는 다수성(multiplicity)과 수(數)가 무한히 전개되는 반면, 만유의 지성적 본질은 점점 감소되어 순수한 부정(否定)이 되어 버린다. 이 상태에서 그것은 물질이 되는데, 포르피리우스는 어느 구절에선가 이를 “아무런 실체가 없다”(the absence of all existence)고 표현했다. 이를 달리 말하면 진정한 무(a true Non-Being)이다. 같은 개념이 플로티누스에 의해 좀 더 시적으로 표현되었는데, 그는 이를 우리의 지식을 제한하는 그림자들의 이미지(the image of shadows)이며, 우리 영혼의 반성(reflection)이 그것에 지적인 형상을 부여한다고 했다. 「조하르」에 나오는 주목할만한 두 구절을 기억해 보자. 거기서는 생각이 처음에는 완전한 일치(identity) 속에서 존재와 결합하고, 이어 훨씬 더 다양하고 개별적인 자아인식을 획득하면서, 모든 피조물과 하느님의 특질들을 산출한다. 그 요소들 자체는 -나는 물질적 요소들과 공간 속에서 관찰될 수 있는 여러 가지 점(点)들을 말하는 것이다- 생각이 자신의 품에서 영원히 산출해 내는 존재들 가운데 있다. 그러므로 히브리인들의 가르침에서든 알렉산드리아학파의 가르침에서든 모든 비유는 글자대로 볼 것이 아니다. 그 비유들은 최고원리를 빛의 근원이라고 표현하는데, 이 빛은 다함없이, 영원히 광채를 발하며, 무한의 모든 점(all points of infinity)에서 자기 존재를 나타낸다. 프로클루스는 명확히 말하기를, 빛이란 지성이며, 또는 하느님의 지성이 참여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 빛이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다함 없는 근원이란 존재와 생각을 통일시키는 합일(unity)이다. 
  우리가 「조하르」를 분석하면서, 인간 영혼에 대해, 그리고 신앙과 사랑을 통해 영혼이 하느님과 합일하는 것에 대해 말한 것을, 신플라톤학파에 대해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쓸모없는 일일 것이다. 모든 신비사상은 이 점에서 일치하는데, 이는 그것이 신비주의의 기초, 기반 자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다수의 지성들이 접근할 수 없었던 사상체계 속에 있는 그러한 깊이 있고도 일관성 있는 유사성이 인간 능력의 동일성 또는 사상의 일반법칙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 반면에 우리는 팔레스타인의 교사들이 자신들이 그토록 저주하고 파괴한 희랍문화에서 가르침을 끌어냈을리는 없다는 것을 충분히 보여 주었다고 믿는다. 그것은 율법연구보다 훨씬 중요한 학문이었다. 비판을 어느 정도 염두에 둔다 하더라도, 우리는 희랍 철학자들이 유대전통을 유익하게 이용했을지도 모른다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누메니우스(Numenius)와 롱기누스(Longinus)가 모세에 대해 이야기하고, 「이집트의 신비」(Egyptian Myteries)의 저자가 누구든지 간에 그가 천사들과 대천사들을 자신의 신학체계에 받아들인다면, 이는 십중팔구 「70인역 희랍어 성서」의 번역문이 준 영향이거나, 이 세 철학자들과 에집트의 헬레니스트 유대인들 사이의 관계가 끼친 영향 때문일 것이다. 그들이 메르카바의 엄청난 신비를 전수받았다고 결론짓는 것은 불합리하다.
  카발라 체계와 이른 바 알렉산드리아의 플라톤주의 모두의 근원이 되는, 서로 알지는 못하지만 더 오래된 가르침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을까? 그 답을 찾기 위해 톨레미 왕조의 수도를 떠날 필요는 없다. 유대국가의 한 복판에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철학사가들이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진정한 창시자라고 보는 한 사람을 발견하는데, 몇몇 비평가들과 현대의 대다수 유대교 사가들은 그를 유대교 신비주의의 창시자로 본다. 이 사람이 필로이다. 이제 우리가 그의 견해들과 수 많은 저작 속에서 카발라의 최초의 흔적을 발견하기 위해 애쓰면서 탐구대상으로 삼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그의 사상 체계(그런 것이 있는 한)이다. 나는 오직 카발라에 대해서만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필로의 뒤를 따라 세워진 이교철학파들과 관계는 자명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런 철학의 기원이 얼마나 관심거리가 될지 모르지만 현재의 글에서는 그것은 부차적인 고찰대상일 뿐이다.
                


                 제11장  카발라와 필로의 철학


  팔레스타인과 이집트의 유대인들이 서로를 모르고 고립되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미 말했으므로 반복하지 않는다. 그러나 중세 유대작가들이 필로의 이름을 한 번도 언급한 일이 없다는 것은 덧붙일 수 있다. 사아디아도 마이모니데스도, 그들의 후대 제자들도 현대 카발리스트들도, 어느 누구도 그에게 찬사를 바치지 않았고, 지금도 그는 희랍학문에 문외한인 자기와 종교가 같은 신자들(유대교도들-역주) 사이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는  이런 외면적인 사실에 머물러, 그 중요성을 과장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한 철학자 자신의 견해 속에서 우리 문제의 해결책을 찾을 것이다. 그 견해는 현대 비평학의 노력에 의해 빛을 보게 되었다.
  필로의 저작 속에는 체계라고 불릴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견해들이 혼란스럽게 나열되어 있어서 -나는 성서에 대한 상징적 해석을 말하는 것이다- 가장 자의적(恣意的)인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이 혼돈 속의 여러 요소들은 히브리 저작들이 다른 나라들의 지혜 속에 있는 가장 고귀하고 가장 완전한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 주려고 한다는 공통점만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희랍 철학체계에서 빌어온 자료들이 있는데, 그것은 모든 도덕성과 종교의 근본원리들과 일치할 수 있는 것들이다. 즉 피타고라스, 아리스토텔레스, 제논, 그리고 무엇보다도 플라톤의 사상이 그것인데, 플라톤의 용어와 개념은 모든 히브리 철학자들의 저서 속에서 일차적인 것이다. 두 번째 범주에 속하는 자료들은 분명히 그 기원이 외부에 있음을 보여 주는데, 그것은 이성과 학문을 무시하고 인간 영혼을 성급하게 마구잡이로 무한 속으로 밀어넣는 것에서 볼 수 있다. 이 자료는 오직 동방에서만 나올 수 있다. 필로의 사상에 있는 이 이중성은 우리가 풀고자 하는 문제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철학사 일반을 위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다.
  필로가 창조, 존재의 제 1 원리, 하느님, 하느님과 우주의 관계에 대해 말할 때, 그는 명백히 두 개의 교의를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논리적인 노력으로 결코 조화시킬 수 없는 것이다. 하나의 교의는 단지 플라톤의 이원론으로 「티마에우스」(Timaeus)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는 플로티누스와 카발라를 동시에 생각나게 하는 것이다. 이상한 일이지만 모세의 입에서 나오는 것으로 되어 있는 첫 번째 교의를 택해 보고자 한다.
  [저자는 ‘창조에 대하여’에서 말하고 있다] 히브리인들에게 율법을 준 사람은 똑같이 필요한 두 가지 원리를 인식하고 있었으니, 하나는 능동적이고 하나는 수동적인 것이다. 첫 번째 것은 덕성, 지식, 선, 아름다움 자체를 뛰어 넘어 있는 지고의, 절대적인 지성이다. 두 번째 것은 비활성(非活性)이며 생명이 없는 질료인데, 그것은 지성이 그것에게 운동과 형상과 생명을 부여할 때 완전해진다.
  이 마지막 원리를 순수한 추상화로 다루지 않으려고, 필로는 다른 글에서 고대 이교의 유명한 금언을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절대적 시작도 절대적 소멸도 없고 동일한 요소들이 하나의 형상에서 다른 형상으로 옮겨간다고 하는 것이다. 이 요소들은 흙. 물. 공기. 불이다. 「티마에우스」가 말하는 바에 의하면, 하느님은 세상을 완전한 형태를 갖춘 최고의 건축가에게 걸맞는 작품으로 만들기 위해, 하나의 분자조차도 세상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셨다. 그러나 이 물질적인 우주 속에 있는 물질과 존재에게 형태를 부여하기 전에 하느님은 자신의 마음 속에서 지성적인 우주 또는 원형틀(the prototypes), 만유에 대한 불멸의 개념(ideas)들을 시각화했다(visualized).
  세계창조의 유일한 원인인 하느님의 자애로우심이 또한 세상이 왜 멸망해서는 안되는지를 설명해 준다. 하느님은 끊임없이 선하시므로 질서와 조화가 혼돈으로 바뀌기를 원하시지 않으신다. 언젠가 현재의 세상이 더 나은 세상이 되어야 한다고 상상하는 것은, 하느님이 현존하는 만유의 질서에 대한 선하심에서 실패했다고 비난하는 것이다. 이 사상에 의하면 만유의 발생 또는 우주를 만든 권능의 발휘는 필연적으로 시작이 있어야 하지만, 그것이 끝없이 계속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한 번 창조하신 세상을 파괴하고 다른 세상을 만드실 수 없으며, 물질은 일반적인 혼돈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하느님은 만유의 내재적 원인이 아니고, 현대 신학적인 의미에서 창조적 원인도 아니다. 그는 단지 최고의 건축가-조물주(the Derniurge)-일 뿐이다. 그리고 사실 이것은 필로가 희랍철학의 영향을 받아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용어이다. 끝으로, 하느님은 창조세계를 넘어서(above) 계실 뿐 아니라 완전히 그 세계 밖에 계신다. 왜냐하면 무한의 지식과 불가사의함을 지니신 그 분은 물질과 같은 형상 없는(formless) 불순한 실체와 관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이 원리들을 그 뒤에 나오는 교의들과 조화시키도록 해 보자. 하느님은 자신의 활동 속에서 결코 휴식하지 않으신다. 타는 것이 불의 본성이요 냉기를 발산하는 것이 눈(雪)의 본성이듯이, 창조하는 것(to produce)이 하느님의 본성이다. 하느님에 대해서 말할 때, 휴식(rest)이란 활동하지 않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우주의 활동적인 원인(active cause)은 가장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기를 결코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이 휴식하신다고 말한다. 이는 그 분의 무한한 활동이 고통이나 피로함 없이 무의식적으로 발휘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서가 세상이 6일만에 창조되었다고 말할 때, 그것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창조는 6일 동안만 지속된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시작된 일 조차 없다. 왜냐하면 플라톤에 의하면, 시간 자체가 다른 것들과 함께 창조되었으며, 시간은 단지 영원의 덧없는 이미지(a fleeting image)일 뿐이기 때문이다. 전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하느님의 활동을 구성하는 것은 비활성의 질료에 형상을 부여하고, 혼돈과 어둠에서 세계의 창조에 필요한 모든 요소들을 끌어내는 것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느님의 활동은 시간에서 제약받지 않는 것과 같이 공간에서도 제약받지 않는다.
  필로는 명확히 이야기한다. “하느님께서 만물을 내실 때 그것들을 단지 눈에 보이게만 하신 것이 아니라, 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을 만들어 내신 것이다. 그 분은 우주의 건축가 [조물주]일 뿐 아니라, 또한 창조주이시다.“ 그 분은 만유 전체 뿐 아니라 개별적 존재 각자 속에 있는 모든 행위의 원리이다. 왜냐하면 능동성은 오직 그 분에게 속한 것이며, 수동성은 모든 피조물(all engendered things)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만물이 그 분의 현존으로 가득 차 있고, 그 분이 만물을 관통해 있는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같은 이유로, 그 분은 아무것도 자신의 현존을 결여한 채 존재하게 허락치 않으신다. 그러나 어떤 것도 무한하신 분을 가두어 둘 수 없기 때문에, 그 분은 아무 데도 계시지 않으면서 동시에 어디에나 계신다. 이는 우리가 포르피리우스에게서 들은 것과 똑같은 명제이며, 후에 플로피누스의 제자들이 이해한 것과 똑같은 의미로 이해되는 명제이다. 하느님은 어디에도 계시지 않는다. 공간과 시간은 육체와 함께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창조주가 피조물 속에 갇혀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 분은 어디에나 계신다. 그 분은 자신의 다양한 능력으로 땅과 물, 공기와 하늘에 동시에 퍼져 계신다. 그 분은 우주의 가장 작은 분자까지도 가득 채우고 계시며, 서로를 보이지 않는 끈으로 잇고 계신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하느님 자신이 우주의 터전이다. 만유를 포괄하고 계시며, 우주의 안식처이시고, 스스로 자기 자신의 거처이신 분이 그 분이기 때문이다. 그 분은 스스로를 그 속에 제한하시고, 스스로를 그 속에 포함하고 계신 분이다. 만일 하느님이 영혼의 거처(the site of spirit)라고만 본 말브랑쉬(Malebranche)가 스피노자에 아주 가깝게 보인다면, 지고의 존재를 모든 존재의 거처, 육체뿐 아니라 영혼의 거처라고 표현한 사람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무엇이 우주의 수동적 원리라는 이 개념을 이루고 있는 물어야 한다. 그 자체로는 형상도 활동도 없는 이 질료를 우리가 어떻게 실제적이며 필연적인 존재라고 인식할 수 있는가? 그것은 틀림없이 공간보다 먼저 존재했으며, 즉 그것이 전개되기 전에 존재했으며, 공간과 함께 하느님의 품 속으로 옮기워졌다. 필로는 <하느님이 모든 것이다>(God is All)라는 위대한 말을 선언하고야 만다. 
  어떻게 하여 지고의 존재가 자기 자신의 본질인 이 지성적인 거처로부터 이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세계를 포함하고 있는 실제의 공간이 나오게 했는가? 어떻게 능동성 자체요 지성 자체인 분이 수동적이고 비활동적인 존재들을 낳았는가? 이 점에서 희랍철학의 흔적은 동방의 용어와 개념에 의해 완전히 압도되어 버린다. 하느님은 가장 순수한 빛이시며, 모든 빛의 원형이자 근원이시다. 그 분은 셀 수 없이 많은 수의 빛살을 발하시며, 그것들은 모두 지성적인 것이다. 아무 피조물도 그것을 볼 수 없다. 그러나 그 분의 이미지는 그 분의 생각(그 분의 로고스) 속에 반영되어 있다. 우리가 하느님을 이해하는 것은 오직 이 이미지에 의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의 최초의 현시, 또는 보통 쓰는 말로는, 하느님의 최초의 방사(emanation)를 본다. 플라톤의 영향이 다른 영향들에게 압도당하면, 필로에게는 하느님의 말씀이 실제적인 존재가 된다. 후에 알렉산드리아 학파에서는 이 실제적 존재를 인격(a person) 또는 원질(a hypostasis)이라고 불렀다. 천상의 모든 군대를 지휘하는 대천사의 본성이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의 철학자는 이 점에서 멈추지 않는다. 보통 “가장 오래된 자(the most ancient)”, 하느님의 맏아들이라 불리는 이 첫 번째 로고스는 절대적 영역에 있는 생각을 의미하는데, 이 로고스에서 세상을 나타내는 다른 로고스가 방사되어 나온다. 즉 이는 창조력을 나타내며, 그것의 현시가 바로 세상이다.
  
  우리가 <창세기>에서,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셨다는 말을 읽을 때(창세기 2:10-역주), 그것은 일반적인 선함이 하느님의 말씀이신 하느님의 지혜의 방사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 우주를 지으신 분은 자기 작품의 아버지일 뿐 아니라 건축가라고 불러야 한다. 우리는 지고의 지혜에게는 어머니라는 이름을 부여할 것이다. 하느님이 세상의 창조를 일으키려고 신비한 방법으로 결합한 분이 바로 어머니다. 하느님의 씨앗으로 임신하여 정해진 때에 산고 속에 사랑스런 외아들을 낳은 분이 어머니이다. 이 외아들을 우리는 세상이라 부른다. 그리하여 성스런 작가는 지혜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 중 나는 형태를 부여받은 최초의 피조물이다. 시간이 아직 존재하지 않을 때, 나는 이미 존재했다. 왜냐하면 모든 피조물은 당연히 우주의 어머니이자 유모이신 분보다 젊어야 하기 때문이다.’
  「티마에우스」에 있는 한 구절에서 우리는 거의 똑같은 말을 발견하게 되는데, 한 가지 커다란 차이점이 있다. 만유의 어머니이자 유모란 하느님과 완전히 분리된 원리, 비활성이요 형상 없는 질료이다. 위의 인용구를 보면 더욱 더 「조하르」의 사상과 전형적 표현을 생각난다. 거기서도 하느님을 영원한 빛이라고 하고, 만유의 발생을 비유적으로 설명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중심에서 방사된 빛살들(rays)이 점차 어두워진 것이며, 하느님이 자신의 특질들 속에서 자신과 결합한 것이라고 한다. 하느님의 품에서 나와 우주에 생명을 주는 최고의 지혜도 지상낙원에서 발원한 강물이라고 비슷한 말로 표현되어 있다. 끝으로, 두 개의 로고스는 세상이 하느님의 말씀일 뿐이라고 하는 카발라의 원리를 상기시켜 준다. 그 분의 말씀 또는 목소리는 눈에 보이게 나타난 그 분의 생각이다. 그리고 그 분의 생각은 그 분 자체이다. 카발라의 주요한 저작들 속에 종종 표현되어 있는 또 하나의 이미지에서는 우주를 하느님의 외투 또는 옷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여기 필로의 말 속에도 같은 것이 있다. “지고의 존재는 값진 외투와 같이 그 분을 감싸고 있는 눈부신 빛에 둘러싸여 있다. 가장 오래된 말씀은 자신을 옷으로 덮듯이 세상으로 덮고 있다.”
  하느님에 대해 말하는 두 가지 방법이 만물의 탄생과 자연에 대한 이 이중의 이론에서 나온다. 그 때 하느님은 그 분 자신 안에서, 그 분 자신의 본질 속에서 창조물과 무관하게 고찰된다. 때때로 하느님은 만유의 궁극적 이성(理性)이요, 우주의 능동적인 동인(動因)이요, 가장 보편적인 개념이요, 지적인 본성이다. 그 분만이 자유, 지식, 기쁨, 평화, 행복-요컨대 완전함을 지니고 있다. 때로 그 분은 완전 자체요 있을 수 있는 모든 특질들보다 위에 계신 분으로 표현된다. 어떤 것도 우리에게 그 분에 대한 개념을 전해 줄 수 없다. 덕성도 지식도 아름다움도 선함도 심지어 통일성까지도 그렇다. 왜냐하면 우리가 통일성이라 부르는 것은 궁극의 존재에 대한 이미지일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분에 대해 아는 모든 것은, 그 분이 존재하다는 것 뿐이다. 우리에게 그 분은 표현할 수 없고 이름 할 수 없는 존재이다.
  하느님에 대해 말하는 첫 번째 방법에서, 플라톤의 영향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심지어 스토아 학파의 자연철학을 인정하는 것은 쉽다. 두 번째 방식에서는 완전히 다른 개념체계가 나타나는데, 그것은 신플라톤주의적인 합일, 세피로트와 세상을 모두 지배하는 카발라의 아인 소프, 신비 중의 신비, 알 수 없는 분 중의 알 수 없는 분을 꽤 분명히 표현하고 있다. 같은 주석에는 필로가 자신의 종교적 신앙, 또는 철학적 견해로 인해, 피조물과 하느님의 순수한 본질 사이의 매개자로 표현한 모든 것이 들어 있는데, 그것은 필로가 천사들, 말씀, 그리고 다소 애매하게 하느님의 능력들이라는 이름으로 말하고 있는 것들에도 해당된다. 희랍의 이원론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때, 지성적 원리가 질료에 대해 직접 작용하고, 하느님이 세상의 조물주로 인식될 때, 말씀, 또는 로고스는 하나님의 개념이 되며, 모든 개념들의 거처가 되는데, 만유는 그것에 근거해 형성된다. 하느님의 사자들의 군대-즉, 모든 수준의 천상의 위계 속에 있는 천사들-는 그 개념 자체들이다. 이러한 견해는 다음의 단편에서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평범하게 말하자면, 지성적인 이 세계는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할 준비가 되셨을 때 그 분이 품은 생각일 뿐이다. 이는 건축가가 계획에 따라 실제의 도시를 건설하기 전에 마음 속에 이상적인 도시를 생각하는 것과 같다. 그 이상적 도시가 공간을 점유하지 못하면, 단지 건축가의 마음 속에 있는 그림일 뿐인 것처럼, 지성적인 세계도 그 안에 물질적 우주에 대한 계획이 들어 있는 하느님의 생각일 뿐이다. 이 순수한 능력들(unadulterated powers) 중 단 하나라도 빠뜨리지 않고 다 수용하고 포용할 수 있는 곳은 달리 없다. 그러나 이 순수한 능력들은 궁극의 지성이 지닌 모든 능력들보다는 훨씬 못하다. 이것들이 무형의 지성적 세계,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세계의 원형을 만들었던 세력들이다.
  다른 어느 곳에선가 필로는 하느님의 능력들과 생각(ideas)들은 하나이며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들의 과제는 각각의 사물들에게 적절한 형상을 부여하는 것이다. 천사들에 대해서도 거의 같은 방식으로 이야기 한다. 천사들은 영원한 이성 또는 덕성의 여러가지 특별한 형상을 표현하고 있으며, 하느님의 공간 즉, 지성적 세계 속에 거주한다. 그들이 직접 의존하고 있는 권능, 즉 대천사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로고스 자체이다. 그러나 이러한 특징들과 역할들은 우리 저자(필로-역주)의 마음 속에 만유의 내재적 원인이자 진정한 거처인 하느님이 나타날 때 완전히 변한다. 더욱이 자신들의 지성적 가치를 조금도 잃어 버리지 않은 채, 모든 개념들은 실체를 지닌 실재, 능동적 세력이 되고 서로에게 종속되어 하나의 실체, 하나의 세력, 하나의 단일한 지성 속에서 함께 묶인다.
  이리하여 지혜 또는 말씀은 천상에서 온 모든 영향들 중 첫 번째 것이요, 독특한 권능이 되지만, 절대적 존재와 분리되지 않는다. 그는 땅에 물을 대고 생기를 부여하는 샘이요, 전능자의 술잔을 맡는 자(cup-bearer)이다. 그는 영혼의 감로(甘露)를 부어 주는 분이시오, 그 자신이 그 감로이시머, 하느님의 맏아들이며, 모든 존재의 어머니이다. 그는 또한 하느님의 사람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땅의 사람이 6일째 그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고, 성령이 하느님의 형상이라고 부른 그 형상이 바로 영원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는 우주의 대제사장이다. 즉, 무한과 유한을 화해시키는 자이다. 그는 두 번째 하느님이라고 말할 수 있으나, 한 분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해치지 않는다. 이것이 하느님에 대해 호칭들이나 이름이 부여될 때, 성서가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첫 번째 지위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존재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말씀이 때때로 물질적인 형상으로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한다고 하는 필로의 주장을 들어보면, 우리는 이 표현이 실제로 인격화됨을 말하는 것이라고 확신을 갖게 된다. 이 말씀은 족장 야곱이 꿈에 본 그 말씀이요, 불타는 덤불에서 모세에게 이야기한 그 말씀이기도 하다.
  이 지고한 말씀이 어떻게 또 다른 말씀을 낳는지, 강물이 근원에서 솟아나듯이 또 다른 말씀이 지고한 말씀에서 어떻게 방사되는지를 이미 보았다. 이 두 번째 말씀이 선이며, 창조적 덕성이며, 플라톤의 이데아가 실체화한 것이다. 선 아래에는 왕권이 있어, 그것이 모든 피조물들을 바르게 다스린다. 뒤의 두 세력들(선과 왕권-역주)은 그 작용이 인간에게 한정될 때 자비와 정의라고 불리운다. 세 개의 세력 모두는 아브라함을 방문한 세 천사의 모습으로 지상에 나타났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세상의 선과 조화를 구성하는데, 이는 그들이 하느님의 현존이요, 영광인 것과 꼭 같다. 그들은 이 하느님의 현존에서 나와 그 무한의 광휘가 점차 어두워지면서 지상에 내려왔다. 왜냐하면 그들 각자는 그림자이자 빛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늘에 있는 것의 그림자요, 그들 영역의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의 빛이며 생명이다.
  끝으로 그들의 행위는 모든 곳에 나타나 있으며, 그들의 형상은 우주 만물에 나누어 있지만, 그들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은 최초의 존재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처럼 불가능하다. 필로에 의하면, 모세가 헛되이 하느님의 얼굴을 보여달라고 요청한 후에, 적어도 그분의 영광-즉, 그 분의 접근할 수 없는 보좌를 둘러싸고 있는 세력-을 보여달라고 간청했을 때, 하느님 자신이 모세에게 가르치신 것이 이것이다. 서로 다른 여러 종류의 덕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 천사들은 시인들과 성서기록자들이 묘사한 것처럼 인격적으로 나타날 뿐 아니라, 에테르 상태에서 떠돌아 다니는 영혼으로도 보이며 때때로는 인간 육체 속에 깃들어 있는 영혼들과 결합하기도 한다. 그들은 자연의 모든 요소들과 모든 부분들에 생명을 주는 실제적이고 생명이 있는 실체들을 형성한다.


   다른 나라의 철학자들이 신령(demons)이라 부르는 존재들을 모세는 천사들이라 부른다. 이들은 공중에 떠 다니는 영혼들로 아무도 이들이 존재함을 부정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우주의 모든 부분은 생명이 있음에 틀림이 없으며, 각 구성 요소들에는 살아있는 존재들이 거주하고 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지구에는 동물들이 살고 있고, 바다와 강에는 물에 사는 것들이 불 속에는 불도마뱀(salamander)이 -이는 아마 마케도니아에서도 아주 공통된 견해일 것이다- 하늘에는 별들이 있다. 사실 별들이 순수하지 않고 하느님의 영혼들이 아니라면, 그것들에게 원운동이 부여되지 않았을 것이다. 원운동은 당연히 영에게만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공중에도 우리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살아있는 존재들이 거주하는 것이 틀림없다.
  필로가 열렬히 동방사상을 편애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의 혼합주의(syncretism)와 이중적 방향성은 그가 인간문제를 다룰 때 가장 쉽게 볼 수 있다. 플라톤과는 달리, 그는 물질적 존재들 속에서 영원한 이데아의 창백한 흔적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나아가, 감각의 도움이 없으면 고도의 인식에 이를 수 없으며, 물질세계의 모습이 없으면 비물질적이고 불가시적인 세계에 대해 감도 잡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 다음 그는 감각의 영향이 절대적으로 해로운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사람들은 감각과 모든 관계를 끊고 자신 안에서 안식처를 찾으라고 명령한다. 그는 홀로 인간을 구성하는 특권을 지닌 이성적, 지적 영혼과, 우리 신체기관들이 자신들에게 필요한 지식과 생명을 빌어오고 있는 감각적 영혼 사이에 심연이 있다고 한다. 후자는 모세가 말했듯이 피 속에 있으며, 전자는 신의 본질의 방사요 신의 본질의 분리될 수 없는 반영이다.
  이렇게 고상한 관점을 가지고서도 필로는 여전히 인간 영혼에 대한 플라톤적 관점을 견지하고 있는데, 그것은 생각, 의지, 욕망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는 수많은 곳에서 그가 “세속적 지식”(encyclical sciences)이라 부르는 것-즉, 웅변술과, 희랍인들이 매우 소중히 여기는 외적인 문화에 기여하는 기술들-을 가지고 지혜를 준비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 마음은 더 높은 학문을 갈망하기 전에 그런 세속적 지식으로 양육되어야 하는데, 이는 육체가 좀 더 실속 있는 음식을 소화할 수 있게 되기 전에 우유로 양육되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런 지식을 얻기를 게을리하는 자는 이 세상에서 지고 말 것이 틀림없는데, 이는 아벨이 형제 살인자인 그의 형의 일격에 쓰러졌던 것과 같다.
  다른 곳에서 그는 완전히 반대의 것을 가르친다. 말과 외모는 육체와 감각들처럼 경멸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지성과 완전한 진리의 명상 속에서만 살 수 있다. 아브라함에게 자기 고장과 가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하신 하느님의 명령(창세기 12장 참조-역주)은 우리가 육체와 감각과 말을 떠나야 한다는 뜻이다. 육체는 우리가 살도록 규정지어진 땅의 일부일 뿐이며, 감각들은 생각의 종들이요, 형제들이며, 끝으로 말은 우리의 진정한 아버지이신 지성의 껍데기이자 다소간은 그 지성의 거처일 뿐이다.
  똑같은 생각이 하갈과 이스마엘에 의해 좀더 풍부한 표현 속에서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 반항적인 여종과 그녀의 아들은 주인의 집에서 그토록 수치스럽게 쫓겨났는데(창세기 16장 참조-역주), 그들은 세속적 지식과 그것이 낳은 궤변을 나타낸다. 더 높은 수준의 영적 지식을 갈망하는 자가 히브리 족장을 본받아야 함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영혼이 지성에서 안식을 취할 때, 그것은 거기에서 적어도 자신을 성취하고, 자신을 통해 진리와 지혜에 도달할 방법을 찾을까? 필로가 이 문제에 긍정적으로 대답했다면, 그는 플라톤의 가르침을 넘어섰을 것이다. 플라톤에게는 육체와 감각을 떠나 평생 죽는 법을 배우려고 애쓰는 자만이 참으로 지헤로운 자이다. 그러나 우리의 알렉산드리아 철학자는 이 경계를 넘어간다. 이성에서 빌어온 지식과, 철학에 주어진 각성에 덧붙여, 인간은 또한 더 높은 지식과 각성을 필요로 하는데, 이것들은 하느님에게서 직접 나오는 것이며, 은총이요 신비한 선물인 지성과 교류하는 것이다.
  필로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성서에서 하느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읽을 때, 실제의 목소리가 들렸다고 믿어서는 안되고, 인간 영혼이 지순한 빛에 비춤을 받았다고 믿어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은 오직 이러한 방법으로만 인간에게 말씀하신다. 다시 말해서, 율법이 시나이 산에서 선포되었을 때, 성서는 목소리가 <들렸다>고 말하지 않고, 모인 사람들에게 목소리가 <보였다>고 말한다. 여호와가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내가 하늘에서 너희에게 말한 것을 보았다” 하셨다(출애굽기 20:22-역주). 이는 하나의 기적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므로, 합리적 지식이나 단순한 관념의 관조를 뜻하는 것일 수가 없고, 신비적으로 이해되는 계시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사역(使役, works)에 대한 명상에 의해 그 분께로 올라가는 대신 직접적인 현시를 통해 인간이 하느님 자신을 알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또 다른 구절에도 같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는 덧붙이기를, 이러한 상태에서는 우리는 한 눈에 하느님과 그의 말씀과 우주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필로는 자신이 “모든 덕의 여왕‘이라 부르는 신앙을 모든 선 가운데 가장 완벽한 선, 신적인 본질을 합일시키는 접착제라고 본다.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에 나타나는 것이 신앙이다. 왜냐하면 유다가 다말의 얼굴을 덮은 베일을 들춰보지 않고 다말과 관계를 가진 것 같이(창세기 38:12 이하-역주), 신앙은 우리를 하느님과 맺어 주기 때문이다.
  필로는 인간의 자유에 대해 말할 때, 우리 지식의 본질과 기원을 설명할 때와 같은 망설임을 보인다. 때로는 인간은 자유롭다고 하는 스토아학파의 가르침이 승리를 한다. 즉, 예외없이 다른 모든 피조물을 지배하는 필연성의 법칙이 인간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의 특권인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것은 동시에 인간에게 자기 행위에 대한 책임을 부과한다. 오직 그렇기 때문에 모든 존재들 중 인간만이 덕을 행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선의 개념(이데아)를 통해 우주 속에 자신을 현시하시고자 원하시는 하느님은 인간 영혼보다 더 숭고한 성전(聖殿)을 발견하시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이론은 매우 진실하고 현명한 것이기는 하지만, 전에 설명한 몇가지 일반 원리, 예컨대 본질의 단일성, 빛의 방사를 통한 존재의 창조, 그리고 심지어 플라톤의 이원론 등과도 모순된다.
  우리의 철학자는 반대편 이론을 위해 -그는 분명히 그 이론에 더 편안함을 느끼지만- 이 이론을 버리기를 망설이지 않는다. 그 반대편 이론은 그의 풍부한 반(半)동방적 기질과 그의 타고난 천재성의 원천을 보여준다. 여기서 그는 인간에게서 도덕적 책임 뿐 아니라 자유로운 선택권도 제거해 버린다. 일반적으로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악이란 것은, 인간을 창조할 때 하느님의 로고스와 함께 참여했던 열등한 세력들의 활동에서 생긴 불가피한 결과였다. 반면에 선은 하느님께만 속한다. 하느님이 아담을 창조하실 때 당신께 협력하도록 하위의 일꾼들을 부르신 것은, 진실로 지고의 존재에게는 악에 참여한다는 것이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행위와 생각 중 선한 모든 것은 하느님께만 속한 것임이 분명하다.
  이 원리에 따르면, 어떤 일을 자신이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만한 것이며 불경건한 일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자신을 하느님과 비교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느님만이 우리 영혼 속에 선의 싹을 넣으시고 하느님만이 그것을 발아케 하실 자격이 있다. 이 자격을 필로는 그 말의 진정한 의미에서 은총이라고 부른다. 그것이 없으면 우리는 악에 삼키우고, 무(無, nothingness) 또는 물질과 뒤섞여 버릴 것이다.
  이 진실로 신비적인 영향과 함께, 필로는 또 하나의 입장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그것 역시 도덕적 책임을, 그러므로 결과적으로는 자유로운 선택을 위태롭게 하는 이론이다. 그것은 선의 역전가능성(逆轉可能性)이다. 의인은 악인의 속죄제물이며, 하느님이 악인에게 그 분의 한량없는 보화를 아낌없이 주시는 것은 의인 때문이다. 카발리스트들에게 수용되어 우주 전체에까지 적용된 이 교의는 근본적으로 은총의 전개설이다. 은총만이 의인에게 도움을 준다.  그런데 왜 악인에게는 그렇지 않은가? 인간의 자유에 대한 또 하나의 장애물인 원죄에 대해서 이 저자(필로-역주)의 말 속에서 그 정의를 찾아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런 중요한 주제에 대해서는 좀 더 명확하고 확실한 증거를 기대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필로가 인생자체를 징벌과 강제의 상태로 보았다는 것이다. 결국 인간이 인생에 더 깊이 들어가면 그럴수록, 또는 의지나 지성을 통해 자연의 영역에 더 깊이 들어가면 그럴수록, 인간은 하느님에게서 떠나 방황하게 되며, 왜곡되고 타락한다. 이 원리가 필로의 도덕성에 거의 유일한 기반이다.
  때때로 모순이 되기는 하지만, 희랍철학의 영향은 표현 상의 문제에 한정되고, 그 배경은 완전히 동양적이며 신비주의적이다. 예를 들면, 안티스테네스와 제논이 그러하듯이, 필로가 본성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말할 때, 그는 인간의 본성을 육체에 대한 영(spirit)의 전적인 지배, 감각에 대한 이성의 전적인 지배일 뿐 아니라, 계시된 모든 율법의 준수라고도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분명히 인간이 그 율법을 가로채서 이해했기 때문이다. 플라톤과 스토아학파처럼, 그가 후에 “4대 덕목”(四大德目)이라고 부르게 된 것을 받아들일 때, 그는 그것들을 열등하고 순전히 인간적인 덕목으로 본다. 그는 이것들 위에 그것들의 공통의 근원인 선 또는 사랑을 두는데, 이는 하느님과만 관계있는 순전히 종교적 덕목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이미지이며 지순한 방사이다. 그것은 에덴동산, 즉 하느님의 지혜에서 직접 발원(發源)하는데, 거기서만 하느님 안에 있는 기쁨과 즐거움과 환희를 찾아볼 수 있다. 그가 덕과 지혜를 하나로 보는 것은 분명 이런 의미에서이며, 이는 소크라테스의 예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끝으로 필로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를 사용하여 덕이 세 가지 근원, 즉 지식, 본성, 실천에서 나온다고 말할 때,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따르고 있다고 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필로에 의하면 진정한 지식과 지혜는 우리 지성의 자연적 발달에 의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희랍철학자들에 의하면, 본성 자체가 우리에게 선을 향하도록 강요하지만, 필로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서로 완전히 상반되고 서로 갈등을 일으키는 두 가지 본성이 내재해 있어, 그 중 하나는 필연적으로 다른 것에 굴복하게 된다. 따라서 그 둘은 모두 다 충돌과 긴장 상태 속에 있어 휴식을 취하지 못한다. 여기서 도덕적 완전성을 얻는 그의 세 번째 방법이 나오는데, 그것은 율법에 따라 의지와 이성이 우리의 욕망을 다스리는 것 대신에, 가장 고상한 금욕주의를 택하는 것이다. 문제는 악을 단순히 감소시키거나 다소간 일정한 한계 속에 가두어 놓는 것이 아니라, 악의 흔적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한 그것을 끝까지 추적하여, 가능한 한 그 뿌리와 가지를 모두 분쇄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악은 완전히 우리의 욕망 속에 있는 것으로, 필로는 그것이 영혼의 본성과 절대적으로 무관한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필로의 용어를 쓰자면 그 욕망(passions)은 육체에 그 기원이 있다. 그러므로 육체는 굴복시키고 극복해야 한다.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어떤 경우에든 싸워 이겨야 한다. 우리는 삶이라 부르는 이 징벌의 상태에서 우리 자신을 끌어 올려야 한다. 우리는 덧없는 모든 소유물에 절대적으로 무관심함으로써, 우리가 육체라고 부르는 감옥의 한 복판에서 자유를 다시 회복해야 한다.
  결혼의 목적과 결과가 이 불행의 상태를 지속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필로는 노골적으로 결혼을 정죄(定罪)하지는 않지만, 결혼을 선택된 영혼들이 벗어나야 하는 치욕적인 필연이라고 본다.
  이것은 대체로 금욕생활의 주요한 특징들인데, 필로가 테라퓨틱 교파(Therapeutic sect)에 의해 이것들이 실행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라기보다 스스로 그것을 인식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금욕생활은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도덕성의 목적, 최고의 완전함 자체, 행복, 실존(existence)은 영혼이 자신을 완전히 잊고, 열심과 사랑을 통해 하느님과 합일하는 것이다.
  다음의 구절은 현대의 신비가들에게서 빌어오기라도 한 것 같은 말이다.


  오, 나의 영혼이여!  네가 하늘의 선물을 상속받고자 한다면, 우리의 첫 번째 족장 이 그러했듯이 네가 사는 땅 즉 네 육체와 네가 태어난 가족, 즉 네 감각과 네 아버지의 집, 즉 말(word)을 버리는 것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너는 또한 너 자신을 버려서, 하느님께 대한 열정에 취해 있는 저 코리반트들(Corybants)처럼, 너를 벗어나야 한다.
  모든 사회적 덕목보다 훨씬 높은 그러한 원리에 의해 명상생활이 -그것이 유일한 것일 수는 없지만- 제시된다. 그 원리는 사랑이요, 그 목적은 인간의 행복이다. 예배조차도 -나는 외적인 예배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를 그 목적에 인도할 수 없다. 필로는 실로 이 점에서 매우 혼란을 겪고 있다.
      육체가 영혼의 거처이므로 우리가 육체를 돌보아야 하는 것과 똑같이, 우리는 문자로 쓰여진 율법을 지켜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것에 더 충실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것이 상징하는 바를 더 잘 이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덧붙여, 우리는 대중의 비난과 비판을 피해야 한다.
  마지막 말은 꼭 부연설명처럼 들린다. 그것만이 이 철학자의 생각을 표현하고 있고, 그와 카발리스트들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만들고 있다. 그것은 또한 탈무드학자들이 희랍학문을 공부하는 자기 형제들에 대해 갖고 있던 견해를 정당화해 준다.
  카발라의 기원에 대해 앞에 나온 모든 이야기에서 극히 중요한 두 가지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첫째는, 이 전통적 가르침이 필로의 저작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로 모든 희랍사상-사실은 모든 희랍문명-이 필로의 저작에 그렇게 많은 족적을 남겼는데, 왜 카발리스트들의 학문 중에 가장 오래된 저술들 속에서는 그것이 발견되지 않는 것인가? 반복하거니와, 「조하르」에서나 「창조의 책」에서나 어디에서도, 톨레미왕조가 이집트땅에 이식시킨 저 장엄한 문명의 흔적이 전혀 없다. 시메온 벤 요하이와 그의 친구들이, 또는 「조하르」의 저자들이 누구이든, 그들이 자기들의 안내자인 필로의 저작만 가지고,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거의 이름을 말하고 있지 않은 여러 희랍 철학자들에게서 빌어온 사상과, 모든 존재의 본질이요 형상인 하나의 내재적 원리라는 사상에 근거해 있는 또 다른 가르침에 속한 사상을 구별해 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가정은 논의할 가치가 없다. 더구나 우리가 이미 필로의 혼합주의 속에 있는 동방적 측면이라고 부른 것은, 중요한 모든 점에서 팔레스타인의 현자들이 가르친 신비주의와 전혀 다르다. 필로에 의하면, 오직 5개의 하느님의 능력, 또는 특질들이 있을 뿐이지만, 카발리스트들은 10기의 세피로트를 말한다. 비록 그가 열정적으로 빛의 방사와 절대적 합일의 교의를 설명하더라도, 필로는 언제나 절대적 존재와 그 능력들 또는 본질과 그 특질들이라는 어떤 이원론을 견지하고 있어, 그 둘은 건널 수 없는 거리를 두고 나뉘어져 있다. 카발리스트들은 세피로트를 그 안에서 만유의 절대적 원리가 스스로를 제한하고 있는 여러 가지 경계들 -그들의 용어를 쓰면 ‘그릇들’ (vessels)이라고 본다. 그들은 덧붙이기를, 하느님의 본질이 물러서기만 하면 그 그릇들은 깨져서 쏟아질 것이라고 한다. 또 그들은 존재와 생각의 일치를 명백하게 가르쳤다는 것을 기억하자. 필로는 무의식적으로 물질이 하느님과 구별된 하나의 원리이며, 하느님과 같이 영원하다고 하는 플라톤과 아낙사고라스의 사상에 지배당하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인생이 징벌이며 육체는 감옥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또한 그가 왜 결혼을 경멸했는지를 설명해 준다. 그는 결혼을 단지 육체의 감각적 만족일 뿐이라고 보았다. 반면에 카발리스트들은 비록 인간이 관능적인 욕망에 지배되지 않았던 창조의 초기에 지금보다 더 행복했다는 성서의 내용에 동의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인생 전체를 필요한 시련이라고 보며, 인생을 유한한 존재가 자신들을 하느님께로 고양시켜 무한한 사랑 속에서 하느님과 합일하는 한 수단이라고 본다. 카발리스트들에게는 결혼이 단순히 상징인 것만이 아니라, 이 신비한 합일의 시작이며 첫째 조건이다. 그들은 결혼을 영혼 속으로, 하늘 속으로 이끌어 간다. 그것은 서로 완성됨으로써 두 인간의 영혼이 녹아드는 것이다. 끝으로, 필로가 성서에 적용하고 있는 해석방법은 기본적으로 카발리스트들의 방법과 일치하지만, 그들의 모범이 될 수는 없었다.
  필로는 물론 자기 조상들의 언어에 전혀 무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모든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이 사용했던 성서인 「70인역 희랍어 성서」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쉽게 입증할 수 있다. 그의 신비적 해석은, 주로 이 번역본의 용어와 순수한 희랍어 어원학에 주로 근거하고 있다. 그러면 성스러운 언어(히브리어-역주)에 의거하지 않는다면 그 힘을 완전히 잃게 되는 「조하르」의 교묘한 해석법은 어떻게 된 것인가? 더우기, 만일 필로와 카발리스트들이 성서구절에서 일치하거나, 또는 언어는 제쳐 두고라도 진실로 같은 상징으로 같은 개념을 밝혔다면, 우리는 형태 상의 차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그렇지 않다. 이처럼 우리는 「조하르」나 「창조의 책」에서, 우리가 이 알렉산드리아 철학자의 유일한 유산이라고 여기는 저 풍부하고 재능있는 비유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우리의 첫 어머니인 여인 이브 속에 있는 감각들의 현실화, 악을 권한 뱀 속에 있는 육욕을 자극하는 마음, 아담이 이브, 즉 감각들과 결합하는 데서 자극된 카인의 이기주의, 육체를 완전히 부정했으나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무지로 인해 굴복했던 영적인 전형(典型) 아벨, 하갈의 세속적 지식, 사라의 덕성, 이삭 속에서 갱신된 인간의 최초의 본성, 야곱의 금욕적 덕성, 라말의 믿음 등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우리가 믿는 바로는, 필로의 저작은 카발라에 전혀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이 저작들과 그 저자의 성격에서 이끌어 낼 수 있는 두 번째 결론에 이르렀다. 우리는 필로가 얼마나 무분별하게 또 건전한 논리를 무시하고 말하자면 전 희랍철학을 강탈했는지를 보았다. 그런데 우리는 왜  카발라 체계의 지배적 원리들을 생각나게 하는 그의 견해 속에 뛰어난 독창성이 있고, 현명하고, 심오함이 있다고 믿어야 하는가? 그가 자기와 같은 종교를 지닌 사람들의 전통 중 일부에서 이미 다 만들어져 있던 자료를 찾아냈고, 단지 그것을 자기 상상력의 눈부신 색깔로 윤색했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은가? 이런 전통들은 아주 오래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성스런 땅으로부터 이집트에 그것들이 받아들여진 것은, 알렉산드리아 유대인 사이에서 예루살렘에 대한 기억과 자기 조상들의 언어가 완전히 사라지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우리는 추측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사상들 중 일부가 그리스도교 시대보다 1세기 이상이나 전에 알려져 있었음을 확실히 입증하는 사실들이 있다. 첫째는, 필로 자신이 우리에게 확실히 해주고 있는 것인데, 그는 자기 민족의 장로들에 의해 보존된 구전전승, 즉 테라퓨틱 교단의 것이라고 하는 아주 오래된 신비주의 서적 「명상의 생활」(Devita Contemplativa)과 또 성서의 모든 부분에 예외나 유보 없이 적용되는 비유적 해석법에서 자료를 취했다고 한다. 그는 말하기를 “그들에게는 전체 율법이 살아 있는 존재와 같았으며, 그 속에서 육체는 글자로 표현되었으며, 영혼은 매우 깊은 의미로 표현되었다. 거울에 비추어 볼 때 그런 것처럼, 이성적 영혼은 말을 통해 가장 은밀하고 놀라운 경이를 발견한다.” 같은 비유가 「조하르」에서도 사용되고 있음을 기억하자. 단지, 육체 위에는 율법의 옷이 있는데, 이는 성서라는 물질적 사실을 뜻하는 것이고, 영혼 위에는 더욱 거룩한 영혼, 즉 하느님의 말씀이 있는데, 이는 모든 영감과 진리의 원천이라고 하는 점이 다른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필로의 증언보다 훨씬 더 오래되고 믿을 만한 증언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 중 가장 중요한 증언, 즉 유명한 「70인역 희랍어 성서」를 가지고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탈무드는 이 유명한 번역판에 수 많은 오류가 있음을 희미하게 알고 있었으나, 이 번역판을 매우 존중했다. 현대 비평학은 그 번역본이 성서의 신인동형론에 대단히 적대적인 사상에 근거하여 이루어졌으며, 그 속에서 필로의 신비주의의 맹아를 발견할 수 있음을 명확하게 입증했다. 그러므로 성서본문(출애굽기 24: 9, 10)에 모세와 그의 형과 70명의 장로들이 청옥(靑玉, sapphire) 위에 앉으신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보았다고 명백히 기록하고 있는데, 이 희랍어 번역본에서는 그들이 본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그의 거처라고 말하고 있다. 또 예언자 이사야가 보좌에 않으신 하느님과 하느님의 옷자락이 성전을 가득 채운 것을 보았다(이사야 6:1)고 했는데, 「70인역 희랍어 성서」의 역자들에게는 이 이미지가 너무 물질적으로 보였으므로, 그들은 이를 “하느님의 영광”, 히브리인들의 쉐키나로 바꾸었다. 또 여호와께서 정말로 모세와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환상 속에서(in a vision) 말씀하셨다고 하는데, 이 번역자의 생각에는 이 환상이 순수하게 지성적인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우리는 신인동형론의 파괴만을 보았고 하느님을 우리의 지성 너머에 두는, 때로는 미묘한 이미지들에서 하느님이라는 개념이 벗어나도록 하려는 노력만을 보아 왔다. 그러나 이제 문제는 더 흥미로와진다. 주 체바오트(Lord Zebaot) 즉, 만군(萬軍)의 하느님, 다시 말해 성서에서 전쟁의 불길을 자극하고 스스로 전쟁터로 진군해 가는 또 하나의 군신(軍神, Mars)으로 묘사하고 있는 하느님-(“여호와께서 용사같이 나가시며, 전사같이 분발하여,” 이사야 42:13)-에 대해, 희랍어 번역본은 그를 지고의 하느님(Supreme God)이 아니라, 필로가 자기 저술에서 그렇게 자주 말하는 하느님의 능력(forces), 즉 능력의 주 하느님 (The Lord, God of Powers)이라고 함을 볼 수 있다. 또 “새벽의 자궁에서 태어난 이슬”-(새벽의 자궁에서 나온 이슬같은 청년들은 당신의 것입니다. 시편 110:3)-이라는 비유가 나오면, 이 이름을 모르는 번역자는 그것을 날이 새기 전 아침을 알리는 별이 뜨기 전에 하느님이 낳으신 신비한 존재라고 바꾼다. 이것은 곧 로고스인데 세상과 별들이 생기기 전에 있던 하느님의 빛을 말하는 것이다.               
 이 흥미롭고 기념비적인 번역본에서 우리는 또한 수론(數論)과 이데아론의 흔적을 분명히 볼 수 있다. 예컨대, 하느님은 보통 쓰는 말의 의미에서 천지의 창조주가 아니다. 그 분은 단지 그것들이 전에 보이지 않는 상태에 있던 것을 보이게 하신 것이다(이사야 45:18). 히브리 예언자는 묻는다.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느냐? 누가 이 모든 것을 지으사 눈에 보이게 하였느냐?“(이사야 40:26). 이렇게 알렉산드리아의 번역자는 해석한다. 같은 예언자가 우주의 주께서 수많은 군대와 같은 별들을 명령하신다고 표현한 것을, 우리의 번역자는 하느님이 수(數)에 의해 세상을 지으셨다고 한다.
  이 여러 구절에서 플라톤과 피타고라스의 사상이 암시되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지만, 또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수의 이론은 비록 조야한 형태로지만 「세페르예치라」에서도 가르치고 있고, 이데아론은 ‘조하르’의 형이상학에서 절대로 분리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주의할 것은, 「세페르 예치라」에서 발견되는 피타고라스 원리의 응용이 글자 그대로 필로의 저작에서는 반복되고 있으나, 희랍어로 글을 쓴 다른 어떤 철학자의 글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7개의 주요 기관들, 즉 오감과 언어기관 및 생식기관을 가지고 있는 것은 7이라는 숫자의 영향 때문이며, 같은 이유로 영혼에 7개의 문, 즉 두 눈, 두 귀, 콧구멍 두 개, 입 한 개가 있다는 것이다. 「70인역 희랍어 성서」에는 또 하나의 카발라 전통이 들어 있는데, 이는 후에 영지주의의 전유물이 되었다. 성서에서 “지극히 높으신 자가...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라고 말하고 있지만, 알렉산드리아 번역본에는 “주의 천사들의 수효에 따라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신명기 32:8)라고 되어 있다. 분명 기묘하고 제멋대로인 이런 해석은 「조하르」에 나오는 구절과 비교해 볼 때 이해할 수 있다. 「조하르」를 통해, 지상에 70개의 민족이 있으며, 그들은 각각 한 명씩의 천사가 다스리고 있는데, 각 민족은 그 천사를 자기들의 하느님으로 여기며, 그 천사는 말하자면 각 민족 자신의 영혼이 인격화한 것임을 알게 된다. 이스라엘 자손만이 그 천사들 너머에 참 하느님만을 둘 권리를 부여 받았다. 그 참 하느님이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선택하신 것이다. 우리는 「70인역 희랍어 성서」 못지 않게 오래된 한 성스런 작가 즉 예수 벤시락(Jesus ben Sirach )에게서도 같은 전통을 찾아 볼 수 있다.
  틀림없이, 톨레미 왕국의 수도에서 번성했던 희랍철학은 이 유명한 번역본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우리는 「70인역 희랍어 성서」에서 분명히 다른 근원을 지닌, 이집트 땅에서 온 것조차도 아닌 개념들을 발견한다. 만일 종교적 요소들의 비유적 해석, 말씀의 인격화, 절대적 거처(the absolute place)와 말씀의 일치 등과 같이 우리가 주목해 온 모든 요소들이 다른 근원에서 온 것이 아니라면, 만일 이것들이 그 시기 이집트 사상의 일반적 경향의 일부라면, 필로가 사용한 「70인역 희랍어 성서」의 마지막 필자로부터 2세기동안 희랍철학사에서 그런 경향에 대해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은 것은 어찌된 일인가? 그러나 우리는 거의 동시대의 또 하나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거기서 우리는 더 한정된 형태로 똑같은 사상을 발견한다. 그 기원이 히브리라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것은 시락의 아들 예수의 책으로 보통 <집회서>(Ecclesiasticus)라고 부른다.
  이 종교적 작가는 현재 그 손자의 희랍어 번역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데, 손자는 일종의 서문에서 예수(벤 시락-역주)가 유대를 떠나 이집트에 온 것이 틀림없이 에베르게테스 2세(Evergetes 2)의 통치 38년 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 독창적인 작가가 이 때부터 50년 전에 살고 있었다고 추정하면, 그는 그리스도교시대보다 2세기 이전에 살았던 것이 된다. 자기 할아버지가 히브리어로만 글을 썼다고 우리를 확신시키고 있는 번역자의 증언을 절대적으로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시락의 아들 예수는 탈무드에서 종종 요슈아 벤 시락 벤 엘리에제르(Joshua ben Sirach ben Eliezer)란 이름으로 칭송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자. 그 원본이 성 제롬의 시대까지 존지했으므로, 4세기 초까지는 이방인들 뿐 아니라 유대인들도 그 책을 자신들의 성스러운 글들 가운데 하나로 여겼다. 우리는 이 고대 작가의 글 속에서, 우리가 논의해 온 전통 뿐 아니라, 로고스 또는 하느님의 지혜에 대한 교의를 필로와 카발리스트들이 가르친 것과 거의 같은 형태로 발견할 수 있다.
  무엇보다 지혜는 말씀, 또는 갈대아어 번역자들의 말로는 멤라(memra)와 똑같은 능력이다. 그것은 가장 높으신 분의 입에서 나온 바로 그 말씀이다. 그것은 순수한 논리적 존재나, 단순한 추상화로 볼 수 없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높으신 분의 회중(會衆) 가운데서, 자신을 나투고, 자신의 영혼을 찬양하기 때문이다. 이 천상의 회중은 말씀에 복종하는 세력들로 구성되어 있다. 탈무드와 「조하르」는 똑같은 사상을 전하기 위해 아주 유사한 표현을 자주 사용하고 있다. 지혜는 언제나 하느님과 함께 있었다. 세상이 창조된 것은 지혜를 통해서이다. 지혜만이 천상의 각 영역을 구성하고 심연의 깊이로도 내려온다. 지혜의 통치는 바다의 파도와, 지상의 모든 지역과, 지상의 모든 민족과, 모든 인종에 퍼져 있다. 지상에서 거처를 찾으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받고, 지혜는 시온(Zion)에 내려 왔다.
  벤 시락에게는 다른 모든 민족이 한 명의 천사 또는 하위의 권능의 영향 하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지혜의 거주지로서 시온을 택한 것이 단순한 비유라고 보아서는 안된다. 반대로, 인용된 전승이 명백히 주장하고 있듯이, 그러한 선택은 하느님의 영, 또는 로고스가 이스라엘의 에언자들에게 매개체 없이 직접적으로 활동하셨음을 보여준다. 지혜가 실체가 아니라면,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하느님의 종이요 도구가 아니라면, 그것이 어떻게 구름기둥 속의 보좌에 앉아 있다고 생각될 수 있겠는가? 그 구름기둥은 분명 사막에서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갔던 것과 같은 기둥일 것이다. 요컨대 이 책(벤 시락의 <집회서>-역주)의 정신은 「70인역 희랍어 성서」 및 옹켈로스의 갈대아어역과 마찬가지로, 절대적 존재와 이 덧없는 세상의 분리에 근거하고 있는데, 이는 영원하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첫 작품인 매개하는 권능(a mediating power)에 의해 이루어진 분리이다. 그 권능은 하느님 대신에 말하고 행동한다. 그것 자체가 하느님의 말씀이며 창조력이다. 이렇게 하여 유한과 무한 사이의 심연이 메워졌다. 하늘과 땅은 더 이상 나뉘지 않는다. 하느님은 자신의 말씀을 통해 자신을 현시하시고, 말씀은 우주를 통해 자신을 현시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가시적인 것들 속에서 인식된 최초의 존재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때때로 거룩한 영감의 형태로, 또는 예언과 계시의 선물을 통해 직접 인간에게 온다.
  이와같이 한 민족이 다른 모든 민족 위로, 히브리인들에게 율법을 준 한 사람이 다른 모든 사람 위로 치켜 올려졌다.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해 신학과 비평학 사이에는 아무 갈등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집회서>의 가장 정통적인 번역본, 예컨대 사시(Sacy)의 번역본을 살펴볼 때, 말씀의 교의에 대한 언급을 많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혜서> (The Book of Wisdom:「벤시락의 지헤서」-역주)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지혜는 가장 활동적인 것보다 더욱 활동적인 것이다... 그것은 호흡, 즉 하느님의 권능의 방사이니, 전능자의 광명의 아주 순수한 유출이다. 그것은 영원한 빛의 반영이며, 하느님의 위엄을 비추는 흠 없는 거울이며, 하느님의 선하심의 형상이다. 그것은 오직 하나이로되 모든 것을 성취할 수 있으며, 자신 안에서 변치 않고 쉬고 있으되,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느니라. 그것이 때에 따라 거룩한 영혼에게 들어가 그들을 하느님의 예언자들과 친구들로 만드느니라(7:24-27).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는, 이러한 활동의 일반적 성격은 필로의 신비주의에보다 플라톤의 철학에 더욱 가까운 것 같다. 그리고 이 책의 연대와 진정한 기원이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문제를 확정하기 위해 좀 더 많은 연구를 한 비평가를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수집한 사실들을 통해 볼 때, 카발라가 희랍문명의 산물도 아니고, 순수한 플라톤 사상의 산물도 아님은 충분히 알 수 있다. 사실 우리는 알렉산드리아의 독특한 사상이 아직 탄생의 과정 중에 있을 때, 전(全) 카발라 체계의 기초, 즉 만유의 내재적 원인으로 여겨지는 말씀과 하느님의 지혜에 대한 인격화의 원리를 발견한다. 더욱이 우리는 그것을 성서의 전통적 번역과, 순수하게 히브리에 기원을 둔 또 하나의 기념비적 작품(벤시락의 저서-역주)에서 발견한다. 세부적으로 부수적인 개념들까지 살펴보면, 필로의 저작과 히브리 카발리스트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음이 분명해진다.
         
                



             제12장  카발라와 그리스도교


  카발라가 철학에도, 희랍에도, 톨레미왕조의 수도(알렉산드리아-역주)에도 신세를 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필연적으로 아시아에 그 요람이 있음에 틀림없다. 유대교는 카발라를 자기 자신의 노력에 의해 낳았음을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카발라는 유대교에 분명한 영향력을 행사할 만큼 밀접했던 동방의 다른 종교에서 나왔음이 틀림없다. 그리스도교가 그 종교일 수 있을까?
  이 의문이 처음에 대단한 흥미를 야기시킨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숙고해 보기 위해 얼마간이라도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카발라의 근저를 이루는 모든 위대한 형이상학적, 종교적 원리들은 그리스도교 교리보다 앞선 시대의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비교하는 것은 우리의 연구영역을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원리들에 무슨 의미를 부여하든 간에, 그것들의 형태만이 우리에게 사회적, 종교적으로 매우 흥미있는 사실을 말해 준다. 대단히 많은 중세 카발리스트들이 그리교로 개종했다. 그들 중에는 파울 리치(Paul Ricci)와 콘로드 오톤(Conrod Otton), 「세페르 예치라」의 마지막 편집자인 리탕겔(Rittangel)이 있었다. 오톤은 1605년 누렘베르크에서 출판된 「베일을 벗은 비밀」(Galix  Razia)의 저자였다. 라틴어와 독일어로 번역된 히브리 인용문들만으로 되어 있는 이 책의 목적은, 「조하르」와 탈무드의 여러 구절들을 인용하여 기독교 교의의 정당성을 입증하려는 것이었다. 좀 더 근래인 18세기 말엽에는, 또 한 명의 카발리스트인 폴란드 유대인 야곱 프랑크(Jacob Frank)가 「조하르」 추종자들의 교파를 세운 후 수천 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카톨릭의 품으로 들어갔다. 랍비들은 오랫동안 이 위험을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많은 랍비들이 카발라 연구에 적대감을 표시했다. 그러나 다른 랍비들은 오늘날도 카발라를 거룩한 방주(方舟), 거룩한 분 중의 거룩한 분에게 가는 입구로 보고, 이교도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그것을 보호하고 있다. 레온 데 모데나(Leon de Modena)는 1840년 라이프찌히에서 출판된 「포효(咆哮)하는 사자」(Ari Noham)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은 「조하르」가 진짜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는 주요한 카발라 서적들을 출판한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을지 매우 의심스러워 하고 있다. 반면에 크노르 폰 로젠로트(Knorr von Rosenroth), 로이힐린(Reuchlin), 리탕겔(Rittangel) 같이 개종하여 그리스도교인이 된 사람들은 카발라가 유대교 회당과 교회 사이를 갈라 놓고 있는 장벽을 허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라고 보았다. 이렇게 열렬히 바라는 결과가 이루어질 날을 고대하면서, 그들은 「조하르」와 신약성서에서 서로 유사성이 있는 모든 구절을 자신들의 저서에 모아 놓았다.
  이제 카발라와 가장 오래된 영지주의 조직 사이에 공통점이 있는지를 연구해 보자. 그리하여 우리는 카발라 원리들이 유대땅 밖으로 전해졌는지, 그 원리들이 희랍문명에 완전히 문외한인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는지, 따라서 우리가 이 원리들을 동방 종교철학의 소중한 잔재로 여겨서는 안되는 것인지 등을 알아볼 것이다. 이 철학은 알렉산드리아로 이식되어 플라톤 사상과 섞였고, 아레오파고스의 디오니시우스(Dionysius the Areopagite)의 이름을 사칭하여 중세 신비주의에 파고 들어갔다.
  우리는 팔레스타인을 떠나기 전에, 사도들의 시대에, 그리고 아마도 좀 이전 시기에, 사마리아에서 매우 비범한 인물인 마법사 시몬(Simon the Magician)을 만난다. 동료 시민들 사이에서 그토록 비할 데 없는 권세를 누리고(사도행전 8:10), 무한한 찬사를 받은 이 사람은 누구인가?
  시몬은 사마리아의 작은 마을인 기토이(Githoi)출신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원래 키프러스 출신으로 마법사인체 하던 한 유대인에 대해 이야기한 역사가는 오세푸스가 유일한 인물이다. 시몬이 우리로하여금 사람들과 가장 미묘한 선물을 나누라고 자극하는 동기가 아무리 천박한 것이었을지라도, 그는 분명 사기꾼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사도들을 존경했으며, 성령을 나누어 줄 특권을 사고자 했기 때문이다(사도행전 8: 18, 19). 더 나아가, 나는 그의 권위가 잘 알려지고 오랫동안 받아들여진 대중적인 개념에 의해 지지받지 않았다면 헛된 것이었으리라고 말하고자 한다. 우리는 이 사상이 시몬이 행했다고 여겨지는 초자연적 역할에서 아주 명확하게 나타나 있음을 본다. <사도행전>에서는, 고위층에서 하층민까지 모든 사람들이 시몬을 하느님의 위대한 능력이 인간으로 오신 것으로 여겼다고 말하고 있다. “이 사람은 크다고 일컬어지는 하나님의 권능이라“(Hic est virtus Dei quae vocatur magma; 사도행전 8:10-역주).
  성 제롬은 우리의 사마리아 에언자(시몬-역주)가 이것이 하느님의 말씀(Sermo Dei) 외에 아무것도 아님을 이해했다고 말했다. 그가 이 권능을 지니면, 필연적으로 하느님의 다른 모든 특질을 자신 안에서 합일시켰을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히브리의 종교 형이상학에 따르면, 하느님의 말씀 혹은 지혜는 더 낮은 세피로트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 제롬은 또한 시몬의 진정한 자기 찬양을 묘사하고 있다. “나는 하느님의 말씀이며, 나는 진실한 아름다움을 소유하고 있고, 나는 위로하는 자이며, 나는 전능자이고, 나는 하느님 안에 있는 모든 것이다.” 이 표현 하나하나는 카발라의 세피로트 각각에 상응한다. 우리는 또 한 명의 교부(敎父)인 클레멘트(Clement)의 보고 속에서 카발라의 영향을 다시 본다. “마법사 시몬은 자신을 하느님 말씀이 눈에 보이게 나타난 것이라고 여겼으며, 또한 평판이 나쁜 한 여인 속에 하느님의 생각이 인격화되기를 원했다.” 이 말은 하느님의 생각과 상호관련이 있는 여성원리, 또는 배우자를 뜻한다.
  이 이상한 개념은 플라톤 철학이나 알렉산드리아학파-이 학파가 이 때 존재했다 하더라도-에게 지지를 받을 수 없다. 그러나 이는 카발라 체계의 왜곡된 반영이다. 거기서는 지혜, 즉 남성 원리로서 표현된 말씀이 보조자인, 반쪽, 즉, 아내를 갖게 되는데, 이 경우에 그 세피로트는 지성이라 불리운다. 지성은 많은 영지주의자들이 성령이라고 보는데, 그들은 언제나 이를 여성의 형태로 표현한다. 이 영지주의자들 중에는 유대인 엘크사이(Elxai)도 있는데, 그의 모습은 사마리아의 예언자와 많이 닮았다. 그의 이름 조차 -그는 분명히 스스로 그 이름을 택했다- 그가 하고자 한 역할을 암시하고 있다. 이 이교의 우두머리는 성령을 여성원리로 볼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권능일 뿐이라고 본다. 그는 그 하느님 권능이 물질적인 모습을 취한다고 보는 때가 가끔 있는데, 그 모습의 거대한 규모를 상당히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조하르」에 나오는 흰 머리에 대한 비슷한 묘사를 기억하고 있다. 카발리스트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또 하나의 작품인 작자 미상의 「랍비 아키바의 알파벳」(Alphabet of Rabbi Akiba)도 거의 같은 용어로 하느님에 대해 말하고 있다. 말씀 및 성령에 대한 이와같은 개념과 플레로마(Pleroma)를 구성하고 있는, 일반적으로 거룩한 쌍들(pairs)의 개념과 함께, 카발라의 우주 발생론은 시리아인 바르다사네스(Bardasanes)의 저작에서도 볼 수 있다. 빛 한 가운데 계시는 알 수 없는 아버지에게는 한 아들이 있으니, 이 분이 그리스도 또는 천상의 인간(the heavenly man)이다. 그리스도는 자기 때가 되어 자기의 동반자, 배우자와 결합하는데, 이 분이 성령이시며, 이 분이 4대 요소인 공기, 물, 불, 땅을 낳는 데 성공한다. 보기에 따라서는 이 요소들과 총체적인 외적 세계는 「세페르 예치라」에서 처럼 성령의 단순한 방사, 또는 목소리이다. 우리는 순전한 동방의 영지주의 성서인 「나자레우스 문서」(Codex Nazareus)라는 훨씬 더 가치있는 작품에서 마음대로 자료를 이끌어 낼 수 있는데, 왜 <사도행전>이나 <성 에프렘의 찬가>(The Hymns of St. Ephrem)에서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흔적들을 애써 주워 모으기를 고집하겠는가? 성 제롬과 성 에피파니우스(St. Epiphanius)가 나자레네 교단(the sect of the Nazarenes)의 활동시기를 그리스도의 탄생기까지 올려잡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들 교의의 많은 부분과 카발라체계의 가장 근본적인 요소들 사이에는 유사성이 너무 크기 때문에, 우리는 「나자레우스 문서」에서 「조하르」의 단편들을 여기저기 발견하고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된다. 이렇듯 하느님은 언제나 빛의 왕, 또는 빛의 주인이라 불리운다. 그 분 자신이 광휘-무한하고 영원한 빛이다. 그 분은 또한 아름다움, 생명, 정의, 자비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인식하는 모든 모습들은 그 분에게서 방사되어 나온다. 그 분은 창조주요 건축가이시지만, 아무도 그 분의 본질적 지혜와 본질을 알지 못한다. 모든 피조물은 서로 그 분의 이름을 물으나, 그들은 그 분이 아무 이름도 갖지 않았다고 대답하지 않을 수 없다. 빛의 왕이요, 무한한 빛으로서, 그 분은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없으며, 알 수 있는 본성(nature)이 없다. 우리는 다만 순수한 마음, 의로운 영, 사랑으로 가득 찬 믿음을 통해서만 그 분께 도달할 수 있다. 나자레네교단의 교의가 지고의 존재에게서 피조세계의 가장 먼 곳에 내려오는 과정은 우리가 자주 인용한 「조하르」의 구절과 정확히 일치한다.
  영들과 왕들과 피조물들은 기도와 찬양으로 지고하신 빛의 왕을 다투어 찬양한다. 그 분은 놀라운 광채의 다섯가지 빛을 보내 주시는 분이시다. 첫째는 만유를 비추는 빛이요, 둘째는 그들에게 생명을 주는 부드러운 호흡이요, 셋째는 그들의 즐거움을 표현하는 아름다운 선율의 목소리요, 넷째는 그들을 훈계하여 신앙을 증거하게 이끌어 주는 말씀이요, 다섯째는 모든 형태의 원형으로, 그 아래에서 그들이 성장함은 태양 아래서 열매가 익는 것과 같다.
  우리는 이 구절들에서, 카발라가 생각, 호흡 또는 영, 목소리, 말씀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존재의 여러 단계를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는 꽤 친숙한 여러 다른 이미지들이 있다. 그것들은 같은 개념을 표현하고 있다. 즉 어떤 피조물도 생기기 전에, 생명은 영원하고 이해할 수 없게, 빛도 없이, 형태도 없이 자체 안에 숨겨 있었다. 거기서도 말씀은 외투, 또는 지혜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강이라 불리워진다. 이 강에서부터 살아 있는 물들, 또는 카발리스트들에게 뿐 아니라 나자레네 교단 사람들에게도 하느님의 세 번째 현시인 지성 혹은 성령을 나타내는 위대한 물들이 흘러 나온다. 이것이 그 다음에 첫 번째 것에서 멀리 떨어진 두 번째 생명을 낳는다. 이 두 번째 생명은 유샤민(yushamin)이라 불리는데, 그 품에서 창조의 개념이 처음으로 인식된다. 유샤민은 창조의 가장 높고 가장 순수한 모범(type)이다.
  두 번째 생명이 세 번째 생명을 낳으니, 그것은 “제1의 아버지”, “알 수 없는 노인”, “세상의 노인”이라 불리웠다. 그 제1의 아버지가 심연, 즉 검은 물의 우물을 들여다 보았을 때, 그는 거기에 자기 이미지를 남겨 놓았고, 그것이 페타힐(Fetahil)이라는 이름 하에 우주의 조물주, 또는 건축가가 되었다. 그 때 끝없는 에온(eons)이 시작되고, 우리로서는 별 관심이 없는 지옥과 천국의 위계(位階)가 시작된다. 이 세 생명, 플레로마에서 구별할 수 있는 이 세 단계들이 카발라의 세 얼굴들과 동일한 서열을 지니고 있음을 아는 것으로 족하다.  이 카발라의 세 얼굴들에 대한 호칭이 이 교단 사람들의 글에서 종종 발견된다. 그들도 「조하르」에서 처럼 10 세피로트를 상위의 세 특질과 하위의 일곱 특질로 나누었기 때문에, 이 해석은 더욱 더 받아 들일 만하다.
  조물주를 낳은 독특한 사건과 하위의 영들이 점점 더 불완전하게 태어나는 것에 대해서 말하자면, 이것들은 어둠과 악은 하느님의 빛이 점차 약화된 것일 뿐이라는 원리의 신화적 표현이다. 이것 또한 나자레네 문서에 아주 명백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와같이 “육체” 또는 “물질”이라는 말은 어둠의 왕자에 해당하는 말이다.
  나자레네 교단은 또한 두 명의 아담을 인정했는데, 하나는 천상의 눈에 보이지 않는 아담이요, 또 하나는 지상의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다. 지상의 아담은 그 육체 때문에 하위의 영들 즉 별들의 영들의 작품이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신적 생명의 방사이다. 하늘에 계신 그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할 이 영혼은 악한 권세에 유혹되어 이 세상에 갇히게 되었다. 카발리스트들이 천사 라찌엘(Raziel)의 것이라고 여긴 메시지를 우리의 이교도들(나자레네교단-역주)은 가브리엘의 것이라고 하고 있는데, 가브리엘은 그들의 신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인간의 타락 이후 그들을 이끌어,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는 길을 열기 위해, 우리의 최초의 조상에게 진정한 율법, 생명의 말씀을 가져 온 이가 바로 가브리엘이다. 그 말씀은 전승에 의해 신비하게 퍼져 세례요한의 등장 때까지 이르게 되었다. 나자레네 교단에 의하면, 세례요한은 진정한 예언자로, 그 생명의 말씀을 요단강변에서 선포한 인물이다.
  만일 우리가 이집트 영지주의와 바실리데스(Basilides), 및 발렌티누스(Valentin)의 가르침에서 같은 원리들을 보게 된다면, 그 원리들의 기원이 알렉산드리아의 신플라톤주의에 있다고 보는 것은 정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이 두 명의 유명한 이교도 우두머리들의 단편들에서 카발라의 가장 특징적인 요소들을 찾아 보이기는 아주 쉬울 것이다. 그것은 본질의 단일성, 처음에는 하느님의 빛의 집중에 의한, 나중에는 그 빛의 점차적 확산에 의한 만물의 창조, 쌍의 이론(the theory of pairs) 네 세계의 이론, 두 명의 아담, 세 영혼들, 심지어 숫자들과 알파벳 글자들의 상징언어들에까지 이르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을 찾아 보인다고 해서 소득이 될 것은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 글의 이 마지막 부분에서 목적으로 삼았던 것은 이미 성취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카발라의 기초를 구성하는 형이상학적 개념들이 희랍철학에서 빌려온 것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에서 알렉산드리아로 이식된 것임을 앞에서 입증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카발라의 요람이 팔레스타인이나 적어도 유대땅에서는 발견될 수 없음을 입증했다. 
  유대교 회당의 교사들이 카발라의 가르침을 엄중한 신비로 감싸 놓았다해도, 우리는 사마리아인들의 신앙 없는 수도(首都)에서, 그리고 시리아의 이교도들 가운데서, 추상적이고 순수한 형태로 -그것은 사실이다- 그 가르침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들이 팔레스타인에서는 지적 엘리트의 소유였으므로 위대한 형이상학적 체계를 이루었지만, 여기서는 종교적 기본교의로서 가르쳐졌기 때문에 신화적인 인격화라는 특징을 갖게 되었다는 점은 문제가 안된다.
  이 개념들의 기초는 여전히 똑같은 것으로 남아 있다. 그것들의 상호관계에서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것들에게 부여된 형식도, 그것들에 붙어 다니는 다소 기묘한 전승도 변하지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어떤 동방종교가 이 개념들이 직접 유대교로 침투해 들어 가는데 도약판 역할을 했는지를 결정을 해야 한다.
              
    제13장  카발라와 갈대아인과 페르시아인의 종교


  만일 우리 연구의 정해진 한계 내에서, 히브리인들에게 직접적이고도 장기적인 영향을 끼친, 정치권력으로나 문명으로나 탁월한 민족이 있다면, 우리가 제기한 문제를 분명히 풀 수 있을 것이다. 퀴루스(Cyrus) 왕의 무기와 조로아스티교에 의해 한 나라로 통합된 갈대아인들과 페르시아인들의 종교에서 이 조건이 충족된다. 진실로, 한 민족의 역사에서 바빌론 포로라고 불리는 기억할 만한 추방사건보다 더 그 민족의 도덕적 특성을 바꾸고 그 사상을 변화 시킬 만한 사건을 생각 할 수 있을까? 이스라엘인들, 즉 제사장, 평신도, 교사, 일반사람들이 정복자의 땅에서 70년간을 체류한 것이 양편에 아무 영향도 주지 않을 수가 있었을까? 우리는 유대교 회당의 장로들이 자기네 조상들이 유배지에서 천사들과 달(月)들의 이름 및 알파벳 글자들까지도 가지고 왔다고 공개적으로 인정한 탈무드 구절을 이미 인용했다.
  달(月)의 이름들이 우리가 「세페르 예치라」에서 본 것과 유사한 천문학적, 점성학적 지식과 함께 들어 왔을 것이라는 점과, 천사들의 이름이 조로아스터교 승려들이 믿고 있는 천상과 지옥의 위계(位階)와는 완전히 분리되어 들어올 수 있었으리라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또 성문서(聖文書)에서 사탄이 최초로 등장하는 것이 갈대아인들의 <욥기>라는 것이 오랫동안 주목을 받아 왔다. 이 풍부하고 해박한 신화는 탈무드에 수용되어 「미슈나」에 가득 들어 있으며, 또한 시(詩)와 (내가 이 표현을 써도 된다면) 「조하르」의 외피(外皮)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갈대아인들은 무시하기로 하자. 그들은 폭넓고 신뢰할 만한 작품을 남기지 않았고, 더구나 유대인들이 거룩한 땅으로 돌아오기 전에 페르시아인들에게 도덕적으로, 물리적으로 정복당했기 때문이다. 그 대신 우리는 「젠드 아베스타」(Zend Avesta)와 그것에 의거하고 있는 종교적 주석들 속에서, 카발라의 가장 일반적인 원리들이 아니라, 카발라의 거의 모든 원리들이 존재함을 입증할 것이다.
  부언하자면, 우리에게 한 세기 이상이나 알려져 있던 이 방대하고 경탄할만한 기념비적 대작은 아직 -인간 정신의 진정한 학문인- 역사철학(the philosophy of history : 문맥상 ‘철학사’ the history of philosophy의 오식인 듯 함 -역주)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기여를 다하지 못했다. 우리는 그것을 기대해 볼 권리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철학사 지식에 있는 틈을 메우려는 체 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유대와 알렉산드리아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했던 것처럼, 페르시아와 유대 사이에 이루어진 사상의 교류를 밝혀보고 싶은 것이다. 
  먼저 지적해야 할 것은, 유대인이든 그리스도교인이든 모든 연대기 작가들이 다음 사실에 동의한다는 것이다. 즉 네부카드네자르(Nebuchadnezzar:에스라 1:1) 시대 동안에 갈대아에 포로로 있었던 이스라엘인들이 최초로 해방된 것은 그리스도교시대 이전 536년에서 530년 사이로, 퀴루스가 바빌론을 통치하던 초기였다는 것이다. 만일 앙끄띨 뒤뻬롱(Anquetil-Dupperon)의 계산을 믿는다면, 조로아스터는 549년에, 즉 적어도 포로가 된 히브리인들이 조국으로 처음 돌아가기 14년 전에, 포교활동을 시작했다. 그 때 조로아스터는 40세로 그의 인생에서 가장 눈부신 시기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539년까지 계속되었다. 이 10년 동안에 그는 왕궁 전체와 다리우스(Darius) 왕의 아버지인 휘스타스피스(Hystaspis)라고 믿어지는 구스타습(Gustasp) 왕을 개종시켰다. 같은 기간 동안, 이 새로운 예언자의 명성이 인도의 브라만들까지 놀라게 했으므로, 그들 중 하나가 이른 바 사기꾼을 제압하려고 구스타습의 왕궁에 왔다. 그러나 그와 그의 측근들은 자신들의 상대가 지닌 불가항력적인 힘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539년에서 524년까지 조로아스터는 바빌론 제국의 수도에서 공공연하게 자신의 종교적 가르침을 설파했으며, 자기 자신의 가르침을 기존의 전통과 조심스럽게 결합시킴으로써 전(全) 수도를 개종시켰다.
  그러한 급격한 변화를 목격하고 지울 수 없는 강한 인상을 받은 이스라엘인들이, 그 변화가 절정에 달했을 때 고국에 돌아왔는데, 자신들의 가장 은밀한 의견이나 개념에서라도 그 흔적을 전혀 가지고 오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면 과연 합리적일까? 악의 기원에 대한 위대한 질문은 그 당시까지는 유대교에서 다루지 않았던 것인데, 페르시아 종교에서는 그야말로 핵심적인 출발점이었다. 모든 것을 하느님의 개입에 의해 설명하는 데 익숙한 이 동방 사람들의 상상력에 이 질문이 틀림없이 강력히 작용하지 않았을까? 히브리인들은 자신들의 불행에 짓눌려 있었으므로 유배지의 사건에 무관심했다는 주장은 할 수 없다. 성서 자체가 그들 정복자들의 모든 학문, 즉 사상에 히브리 포로들의 가르침이 있음을 어느 정도 만족감을 가지고 지적하고 있는데, 이로 인해 히브리인들은 바빌론 제국의 최고 관직들에까지 나아갈 수 있었다.
  이것이 다니엘, 체루바벨(Zerubabel:우리말 성서의 스룹바벨-역주), 느헤미야(Nehemiah)의 경우인데, 뒤의 두 사람은 자기 동포들을 구하는 데 매우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체루바벨의 지도 하에 4만명이 예루살렘으로 돌아 왔으며, 에스라의 지도 하에 제2차 이주가 이루어졌는데, 이는 제1차 이주 후 약 70년이 지난 때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롱기마누스(Artaxerxes Longimanus)의 치세 때였다. 이 두 번의 이주 사이에, 조로아스터의 종교개혁은 바빌론제국 전역으로 전파되어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뿌리를 내릴 만한 시간을 얻었다.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온 후부터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정복당하기까지, 유대인들은 페르시아 왕에게 종속되어 있었다. 그리고 알렉산더에게 정복당한 이후에도 완전히 나라를 잃고 흩어지기까지, 그들은 유프라데스강을 제2의 고국땅으로 바라봤을 것이다. 한 때 눈물로 그 강들을 적시던 바빌론의 유대교 회당은 포로지도자들의 사회적 종교적 지도 하에 생겼으며, 그것은 팔레스타인의 회당들과 협력하여 랍비 유대교(rabinic Judaism)의 명확한 조직이 되어 갔다.
  그들은 도피처마다 -수라(Sura), 폼파디타(Pompadita), 네하르데아(Nehardea) 등에서- 종교학교들을 세웠으며, 그것들은 대도시의 종교학교들 못지 않게 번성했다. 그들 가운데서 나온 교사들 중에서, 우리는 바빌론 인(人) 힐렐(Hillel)의 이름을 들고자 하는데, 그는 그리스도가 등장하기 40년 쯤 전에 죽었다. 그는 카발라 설화에서 매우 큰 역할을 하는 요하난 벤 지카이(Yohanan ben Zakai)의 스승이었다. 또 위에 말한 학파들이 유대교의 가장 완전한 마지막 표현인 「바빌론 탈무드」를 지었다. 우리는 페르시아만큼 유대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준 나라는 없으며, 어떤 도덕적 힘도 조로아스터의 종교체계와 그 종교의 기나긴 전통 및 주석만큼 유대인들의 정신에 깊이 파고 든 것은 없었다고 결론 지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두 민족 간의 순전히 외적인 관계에서, 그 두 문명의 가장 높은 결론과 근본사상을 나타내는 개념의 비교로 옮겨 가면, 모든 의문은 사라진다. 카발라 체계의 모든 요소가 「젠드 아베스타」에서 발견된다는 것을 지적하기 전에, 페르시아 종교가 일반적으로 유대교에 미친 영향의 예를 몇 가지 들어보자. 그러나 나는 구약성서의 근본교의에 대해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조로아스터 자신이 끊임없이 훨씬 옛 전승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에, 다음 내용을 그 자신의 가르침에서 이끌어 왔다고 보는 것은 정확한 것이 아닐 것이다. 즉, 여섯 가한바르(Gahanbar)에서 쉽게 알 수 있는 6일 동안의 창조, 지상낙원과 뱀의 모습을 하고 우리의 최초의 조상들의 영혼에 반역의 불을 피운 악마의 책략, 이 죄로 인해 아담과 이브가 겪은 끔찍한 징벌과 추방(그들은 천사들처럼 산 후, 동물가죽으로 자신들을 가리지 않을 수 없었으며, 우리가 살아갈 수 있게 모든 기술을 발명해야 했다). 끝으로 공포와 함께 오는 최후의 심판, 영육(靈肉)의 부활 등이다. 이 모든 신앙이 <창세기>에서 처럼 「분데헤쉬」(Bundehesh)(「젠드아베스타」에 의하면, 조로아스터교도들의 가장 오래된 종교서적임)와 「젠드 아베스타」에도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좀 더 이른 시대에서 근원을 찾아야 한다는 확신을 반복하는 바이다. 우리는 조로아스터교보다 훨씬 더 현대의 것인 랍비 유대교에 대해서는 같은 말을 할 수 없다. 파르시즘(Parseeism)의 흔적은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가장 오래된 카발라 스승들은 또한 「미슈나」의 스승들과 회당의 가장 존경받는 장로들 중에 있었다. 오르무즈드(Ormuzd) 자신이 조로아스터에게 말하기를 자신이 에리에네 베에죠(Eeriene Veedjo)라고 하는 기쁨과 풍요의 장소를 주었다(또는 창조했다)고 했다. 온 세상보다 더 아름다운 이곳은 베헤쉬트(Behesht:천상낙원)를 닮았다. 그 때 아흐리만(Abriman)이 이 곳에 물을 대주는 강에서 커다란 독사, 겨울의 어머니를 창조했다(Zend Avesta Vendidad, Vol. 2  P. 264). 또 다른 때에, 아흐리만 자신이 독사의 모습을 하고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왔다.  최초의 남자 메쉬아흐(Meshiah)와 최초의 여자 메쉬아네(Meshiane)를 유혹한 것도 아흐리만이다. “그는 그들의 생각으로 살금살금 다가가, 그들의 마음을 뒤바꾸어 놓고, 그들에게 말했다. ‘물과 땅과 나무들과 동물들을 만들 건 아흐리만이다.’ 이렇게 하여 아흐리만은 태초에 그들을 속였으며, 이 잔인한 자는 마지막까지 그들을 속이려고 노력했다. ”-Zend Avesta, Vol, 3, pp 351, 378.
  유대교에는 인생에 대한 참으로 현명한 금언들과 자비와 하느님의 정의에 대한 참으로 위안이 되는 생각들과 나란히, 어둡기 짝이 없는 미신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 그 근원을 악마론에 의해 생긴 공포에서 찾아야 한다. 악령이 지닌 힘은 매우 크기 때문에, 인간은 일생의 매 순간에 자기 육체뿐 아니라 영혼까지도 빼앗으려고 애쓰는 보이지 않는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인간이 태어나기 이전에도, 악령들은 그 인간에 대한 어머니의 자애와 하느님과 더불어 싸우려고 요람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 그가 이 세상에 눈을 뜨자마자, 그들은 그의 머리를 천 가지의 위험으로 습격하고, 그의 생각을 천 가지의 불순한 환영들로 공격한다. 그러니 그가 항상 이에 저항하지 못한다면, 그에게 불행이 있으리라! 왜냐하면 생명이 육체를 완전히 떠나기 전에는 악령이 언제나 그들의 먹이를 차지하려고 오기 때문이다.
  그런 모든 개념에서, 유대교 전통과 「젠드 아베스타」 사이에는 완벽한 유사성이 있다. 후자에 따르면, 악령 또는 악마들, 아흐리만과 어둠의 자식들은 오르무즈드의 피조물들만큼 많은 숫자가 있다. 천 가지 종(種) 이상의 악령들이 있어, 온갖 형태로 나타나 지상을 배회하며 사람들 사이에 질병을 퍼뜨리고 다닌다. 조로아스터는 오즈무즈드에게 묻는다. “남성악마와 여성악마는 어디에 거주하고 있습니까?  악마들은 50, 백, 천, 만씩 떼를 지어 어디를 배회하고 있습니까? 온갖 곳인가요? ... 인간을 연약하게 하고 질병을 만들어내는 악령들을 분쇄해 주십시오.” 탈무드는 같은 주제에 대해 똑같이 표현하고 있다.
    압바 벤자민(Abba Bejamin)이 말했다. 그 눈이 악령들을 볼 수 있다면, 어떤 피조물도 그들을 견딜 수 없다. 압바예(Abbaye)가 덧붙인다. ‘그들은 우리보다 수가 많고, 들판을 에워싸고 있는 도랑처럼 우리를 에워싸고 있다.’
    랍 훈나(Rab Hunna)가 말했다. ‘우리 각 사람들에게는 왼쪽에 악령 천 명이 오른쪽에 악령 만 명이 있다. 우리가 무리 속에 휩싸였다고 느낄 때는, 악령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무릎이 우리 몸 아래에서 무너질 때는 원인은 오직 그들이다. 우리 사지가 부러진 것처럼 느낄 때, 그 고통은 그들 탓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젠드 아베스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악령들은 서로 결합하여, 인간이 하는 방식으로 번식한다”(Zend Av., Vol. 2.  p 336). 그러나 그들은 또한 우리의 불순한 생각과 자위행위 같은 수치스런 행동과 잠 속에서 하는 음란한 생각으로 일어나는 무의식적인 음탕함을 통해서도 번식한다. 탈무드에 의하면, 악령들은 세 가지 측면에서 천사들을 닮았고, 세 가지 측면에서 인간을 닮았다. 그들은 천사들과 같이 미래를 알며, 날개가 있고, 세상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순식 간에 날아간다. 그러나 그들도 인간처럼 먹고, 마시고, 번식한다. 더구나 그들은 우리의 조상이 고독 속에서 보낸 여러 해 동안 밤마다 그를 괴롭혔던 음란한 꿈 속에 그 기원을 갖고 있으며, 후손들에게서도 같은 원인은 같은 결과를 낳는다. 그래서 이 불행을 피하고자 유대인들과 파르시들(Parsees:배화교도들)이 만든 기도문이 생겼다. 끝으로 인간이 죽는 순간에 유대인이든 파르시든 같은 환영과 같은 공포에 시달린다.
  「젠드」경전들에 의하면, 인간이 악마에게 사로잡혀 심문당할 때, 그 사람은 아직 죽지않은 상태이다. 다루즈(Daroudj:악마) 네소쉬(Nesosh)는 파리 모양을 하고 와서, 머리 위에 앉아, 사람을 사정없이 때린다. 영혼은 육체에서 분리되면, 이 세상과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을 갈라놓고 있는 치네바드(Chinevad) 다리에 도달한다. 거기서 영혼은 두 천사에게 심판을 받는데, 그 중 하나가 미트라(Mithra)이다. 그는 엄청나게 크며, 만 개의 눈을 갖고 있고, 손에는 몽치를 들고 있다.
  랍비들은 동일한 기본사상을 갖고서 그것을 훨씬 더 무섭게 표현하고 있다.
  이 세상을 막 떠나려고 하는 사람이 눈을 뜨면, 그는 방 안에 굉장한 빛이 있음을 알아보게 된다. 그는 주의 천사를 보게 되는데, 그는 빛에 싸여 있고, 그의 몸은 눈이 가득 박혀 있으며, 손에는 불타는 검(劍)을 들고 있다. 이것을 보고 죽어가는 자는 공포에 사로 잡힌다. 그 공포는 그의 몸과 영혼을 가득 채운다. 그의 영혼은 사람이 여기저기로 옮겨 다니듯이 하나의 사지에서 다른 사지에서 날아 다닌다. 그러나 도망치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게 되면, 그는 자기 앞에서 있는 천사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고, 그의 능력에 자신을 완전히 맡기게 된다. 만일 죽어가는 자가 의로운 사람이면, 하느님의 현존(쉐키나)이 그 앞에 나타나고, 그 영혼은 육체를 떠나 날아간다.
   이 첫 번째 시험에 이어 다음 시험이 나타나는데, 이는 무덤의 고문 또는 무덤의 시련이라 불린다. 카발리스트들에 의하면, 여기에는 일곱 가지 시련이 있다. (1)육체와 영혼의 분리, (2)우리가 일생동안 행한 모든 행위의 요점을 반복하는 것, (3)매장시간, (4)무덤의 시련 또는 무덤의 심판, (5) 생령(生靈;Vital spirit)으로 아직 살아 있는 사자(死者)가 벌레에 물리는 것을 느끼는 일, (6)지옥의 징벌, (7)윤회.
  죽은 자가 무덤에 묻히자마자, 영혼이 다시 그와 결합하며, 그가 눈을 뜨면 자기를 심판하러 오는 두 명의 천사를 보게 된다. 각 천사는 손에 두 개의 불타는 막대기(어떤 이들은 불타는 쇠사슬이라고 한다)를 갖고 있으며 영혼과 육체가 동시에 자신들이 행한 악행에 대해 심판을 받는다. 죄인으로 판정된 자에게 재난이 있으리니, 아무도 그를 변호해 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 대를 치면 사지가 떨어져 나가고, 두 대를 치면 뼈가 모두 부러진다. 그러나 그의 몸은 즉시로 회복되고, 징벌이 다시 시작된다.
  우리는 이 전승들의 가치를 더욱 더 인정해야 하는데, 이 전승들이 거의 글자 그대로「조하르」에서 따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조하르」로부터 순수한 랍비저작들과 대표적인 글모음집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다 탈무드와 「젠드 아베스타」에 규정되어 있는 수많은 종교적 관습과 의무를 첨가할 수 있다. 이처럼 파르시는 아침에 잠자리를 떠나자마자 코스티(Kosti)라고 하는 성스런 띠로 먼저 허리를 동이지 않으면 네 발짝을 걸을 수 없었다. 밤 사이에 악마와 접촉하여 더러워졌다는 이유로, 파르시는 손과 얼굴을 세 번 씻기 전에는 자기 몸의 어느 부분도 만지면 안되었다. 우리는 랍비 율법의 추종자들이 똑같은 이유에서 똑같은 의무를 행했음을 볼 수 있는데, 다만 코스티만이 다른 모양의 옷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조로아스터의 제자들과 탈무드 추종자들은 모두 달이 처음으로 전체의 1/4 크기가 되었을 때, 달에게 기도와 감사함으로 인사를 드릴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죽은 자와 신생아를 악마에게서 보호하는 의식은 두 종교에서 거의 같다. 파르시 여인이 아이를 낳으면, 불붙은 등(燈)이나 불을 그 방에 3일 주야 동안 두어야 한다. 유대인들은 죽을 때 똑같은 관습을 지킨다. 악마 릴리트(Lillith)를 신생아에게서 떼어놓는 의식은 더 복잡하다. 그러나 그 이유와 그에 대한 묘사는 라찌엘의 책에 들어 있다.
  유대인 뿐 아니라 파르시들도 지나치다고 할 정도까지 경건례를 행한다. 매 순간, 모든 행위, 육체적, 도덕적 삶의 모든 상황에 대한 기도와 종교적 의무가 있다. 우리가 이 주제에 대해 더 이야기할 자료가 부족한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비교를 끝마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인용한 바 있는, 상식과는 다른, 이상하기까지 한 사실들이 우리의 결론에 확증을 주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정신의 일반법칙을 일깨우는 것은 분명히 그런 믿음과 행위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종교, 즉 고대 페르시아 문명이 유대교의 모든 분야에 수많은 흔적을 남겼음을 보았다. 즉, 천사들로 표현되는 천상의 신화, 지옥의 신화, 끝으로 종교적 의식 등의 분야가 그것이다. 그런데, 카발라 전통이 탈무드의 구전율법과 같은 시기에 같은 방법으로 발전했으며, 같은 용어를 쓰고 있는데도, 유대교의 철학분야 즉, 카발라만이 이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믿을 것인가? 그토록 중요한 주제에 대해 단순한 추측만으로(그것이 아무리 잘 짜여진 것이라도) 만족할 수는 없다. 우리는 카발라의 모든 요소들을 하나하나 들어 그것이 조로아스터교의 형이상학적 원리와 유사함을 보여줄 것이다.
  1. 카발라에서 아인 소프, 즉 이름도 형태도 없는 무한자로 표기되어 있는 부분이 마기( Magi)의 신학에서는 영원한 시간(Zervane Akerene)으로, 다른 자료에 따르면, 무한한 공간으로 표현되어 있다. “공간” 또는 “절대적 장소”라는 용어는 바로 하느님의 이름을 나타내는 히브리어와 상응하는 것이었음을 주목하자. 더구나 이 제1원리, 모든 존재의 유일한 최고 근원은 오직 추상적인 하나님인데, 그 분은 자기 피조물에 대해 직접적으로 아무 것도 행하지 않고, 세계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어떤 형태도 없다. 왜냐하면 선도 악도, 빛도 어둠도 모두 그 분 품 안에 있기 때문이다. 페르시아 역사가인 샤리스타니(Sharistani)가 보존해 온 제르반 교파(the Zervanites)에 따르면, 제르반(Zervan)  자체는 카발리스트들의 왕관처럼, 무한한 빛의 최초의 방사이다.
  2. 갈대아 번역가들이 쓴 멤라(Memra)라는 말의 뜻은 오르무즈드 자신이 호노베르(Honover) 또는 창조의 말씀을 정의한 다음의 말로 쉽게 알 수 있다.
  오 현명한 조라아스터여! 내 그대에게 말하노니, 순수하고, 거룩하고, 현명한 호노베르는 하늘이 있기 전에, 나무가 있기 전에, 오르무즈드의 아들인 불이 있기 전에, 순수한 인간이 있기 전에, 악마가 있기 전에, 존재하는 온 세상이 있기 전에, 모든 덕이 있기 전에 존재했다.
  오르무즈드는 이 말씀(호노베르-역주)으로 세상을 창조했고, 이 말씀에 의해 행위하고 존재한다. 이 말씀은 세상보다 먼저 존재했을 뿐 아니라, 조로아스터교 경전이 말하듯이 이 말씀은 “하느님에 의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과 같이 영원하다. 이 말씀은 무한한 시간과 그것의 가슴에서 흘러 나온 만유 사이의 매개체 역할을 한다. 이 말씀은 모든 완성의 근원과 원형(Model)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것들이 만유 속에서 실현되게 하는 능력이 있다. 끝으로 이 말씀이 카발라의 말씀과 유사하다는 것을 확증해 주는 것은, 그것이 몸과 영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성령이자 동시에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오르무즈드 자신이 명백히 말하고 있듯이, 참으로 오르무즈드의 영혼이라고 밖에 할 수 없기 때문에 성령이요, 그것이 율법이자 동시에 우주이기 때문에, 그것은 말씀 또는 육체, 다시 말해서 눈에 보이게 된 영인 것이다.
  3. 오르무즈드 속에서, 우리는 「조하르」가 “인격”(person) 또는 “얼굴“이라고 부르는 것과 완전히 닮은 것을 발견한다. 사실 오르무즈드는 창조하는 말씀, 그의 영혼을 이루고 있는 ”놀라운 말씀“의 최고의 인격화이다. 우리가 보통 하느님의 것으로 보고 있는 모든 특성들의 합일을 찾아야 할 곳은 영원한 시간이나 최고 원리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오르무즈드 안에서다. 그는 그 합일의 현현, 또는 동방의 용어를 쓰자면, 가장 눈부시고 가장 순수한 빛이다. 파르시들의 경전에는, “태초에 모든 것위에 계신 오르무즈드가 최고의 지식과 순수함을 가지고 세상의 빛 속에 계셨다. 이 빛나는 왕좌, 오르무즈드가 거하시는 이 곳은 최초의 빛이라고 불리운다”고 말하고 있다. 카발리스트들의 천상의 인간처럼, 그는 자신 안에 진실한 지식, 최고의 지성, 위대함, 선함, 아름다움, 에너지 또는 힘, 순수함 또는 광휘를 모두 결합하고 있다. 끝으로, 만물을 창조하거나 적어도 형상을 갖게 한 이, 만물을 기르시는 이는 오르무즈드이다.
  물론 이 특질들 자체, 또는 그것들이 세피로트와 유사한지에 대해 결정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이 오르무즈드 안에서 통일되어 있으며, 무한과 무한한 시간에 대한 관계에서 볼 때, 그의 역할이 아담 카드몬 아인 소프의 관계와 똑같다는 것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샤리스타니를 믿는다면, 오르무즈드가 눈부신 인간의 형태를 하고 나타난 하느님의 의지라고 주장한 거대한 페르시아교파가 진실로 있었다. 사실 조로아스트교 경전들은 오르무즈드가 어떻게 세상을 낳았는지, 그 자신과 그의 적이 어떻게 영원한 분의 품에서 나왔는지, 또 만유의 최초의 본질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느님이 빛으로 비유되고, 세상의 동인(動因: efficient cause)이 더 높은 원리에 종속되고, 우주가 눈에 보이지 않는 말씀의 몸이라고 생각될 때, 우리는 만유를 이 영원한 말씀이 개별화된 것들, 또는 무한한 빛의 여러 빛살들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영지주의의 범신론은 다소간 파르시 신학의 근본원리와 연관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젠드 아베스타」에서는 오르무즈드가 “육체 중의 육체”(the body of bodies)라고 불린다는 것을 주목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것이 혹시 카발리스트들의 기반이 되는, 본질 중의 본질이라는 말은 아닐까? 뷔르누프(Burnouf)는 아주 오래된 펠비(Phelvic)주석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그 주석에서는 「세페르 예치라」와 「조하르」에서처럼, 두 개의 세계가 불타는 숯이라는 상징으로 표현되어 있다. 위의 세게는 불길이요, 눈에 보이는 세계는 불에 타는 물질이다.
  4. 카발라 신앙과 플라톤 철학에 따르면,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처음에 더 완전한 형태로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형상으로 존재했다. 하느님의 생각 속에서는 모든 생각들의 변치 않는 원형(Model)이 있었지만, 그것은 물질의 불완전함을 통해서만 이 세상에 나타날 수가 있다. 선재설(先在說)과 이데아론의 원리가 뒤섞여 있는 이 개념을 「젠드 아베스타」에서는 「페로우에르」(Ferouer)라고 부른다. 위대한 동방학자 뷔르누프는 이 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페르시아인들을「페로우에르」라는 말로, 인식할 수 있는 지성이 부여된 각 존재의 신적 원형이라고 표현했으며, 오르무즈드의 생각 속에 있는 각 존재의 이데아, 각 존재 속에서 숨쉬며 그것을 관찰하고 있는 더 높은 영이라고 표현했다. 이 의미는 본문에 의해서도 전통에 의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의미를 확인해 주는 「젠드 아베스타」의 모든 구절을 인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차라리 우리는 이 가르침의 한 가지 점에 대해 카발리스트들과 조로아스티의 제자들이 아주 분명히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영혼들이 지상에 보내지려 할 때, 자신들이 하느님을 떠나 있는 동안 어떻게 고통을 받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어떤 비참함과 오염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지를 하느님께 묘사하고 있는 「조하르」의 웅장한 구절을 기억해 보라. 파르시들의 종교적 전승 속에도 페로우에르가 똑같은 불평을 하고, 오르무즈드는 여호와가 하늘을 떠나기 싫어하는 영혼들에게 했던 것과 거의 똑같은 식으로 답변한다. 그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그들은 투쟁을 위해 태어났으며, 악과 싸워 창조세계에서 악을 몰아내기 위해 태어났다고 한다. 그는 그들이 그 과제를 지상에서 완수할 때에만 불멸성을 얻어 하늘의 삶을 누릴 수 있다고 말한다.
  세상에서 내가 너희를 육체 안에 존재케 할 터인데, 너희는 그러한 사실에서 무슨 유익을 얻을 것인가! 싸우라! 아흐리만의 자식들을 쓸어 버려라! 마침내 나는 너를 처음의 상태로 복귀시킬 것이니, 네가 행복하리라. 마침내 나는 너를 다시 세상에 살게 하리니, 너는 불멸의 존재가 될 것이며, 언제나 젊고 건강하리라.
  카발라의 개념을 생각나게 하는 또 하나의 특징은 개인들과 마찬가지로 민족들에게도 페로우에르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젠드 아베스타」는 종종 이란의 페로우에르에게 기도하는데, 이란은 조로아스터의 법(law)을 처음으로 인정한 나라였다. 더구나, 다니엘의 예언에서도 보이는(다니엘 10:10 이하) 이 신앙은, 갈대아인들이 정치적, 종교적으로 페르시아인들과 융합되기 오래 전에 갈대아인들 사이에 널리 퍼졌음이 분명하다.
  5. 카발라의 영혼론과 플라톤의 영혼론 사이에 어떤 유사성이 있다면, 카발라의 영혼론과 파르시의 영혼론 사이에는 훨씬 더 많은 유사성이 있다. 이는 오끄띨 뒤페롱(Auquetil-Duperron)이 「금석문(金石文) 아카데미의 회상」(Memoires de l’ Academie des Inscriptions)에서 복원시킨 아주 오래된 전승집에서 볼 수 있다. 카발라 이론에 의하면, 인간 영혼은 서로 완전히 구별되는 세 가지 능력을 지니고 있고, 그것들은 오직 지상의 삶을 통해서만 결합된다. 최고 수준에서는, 하느님의 지성의 순수한 방사인 본래의 영혼이 그 근원으로 돌아가 지상의 오염에 영향받지 않게 운명지어져 있다. 가장 낮은 수준은 물질 바로 위인데, 여기서 영혼은 동작과 지각의 원리일 뿐이며, 무덤가에서 역할이 끝나는 생령(the vital spirit)일 뿐이다. 끝으로 이 두 극 사이에 선악 자유의 원리와 책임의 원리, 도덕적 인간의 자리가 있다. 몇몇 카발리스트들과 대단히 권위 있는 유대교의 몇몇 철학자들은 이 세 가지에 다른 두 개의 주요한 요소를 첨가했다. 그것들 중 하나가 생명의 원리로, 지각의 원리와 구별되는데, 영혼과 육체 사이의 매개적인 능력이다. 또 하나는 원형 또는 이데아라고 할 수도 있는데, 이것은 개체의 분명한 형상을 표현한다. 이 형상은 하늘에서 내려와 임신할 때 여인의 자궁으로 들어가고, 죽기 30일전에 떠난다. 이 30일 동안에 그 형상은 모양이 없는 그림자로 바뀐다.
  파르시들의 신학전통도 인간 영혼 속에 완전히 똑같은 구별을 둔다. 우리가 쉽게 인식할 수 있는 것은, 페로우에르 속에 있는 개별적 유형(type)은 하늘에서 순수하고 독립적인 상태로 존재하다가, 우리가 이미 본 대로, 육체와 결합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생명원리는 보통 디안(the Dian)에게서 분명히 나타나는데, 그의 역할은 육체를 보존하고 육체의 모든 부분에서 조화를 유지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헤야”(He-yah)처럼 디안도 인간의 악에 참여하지 않는다. 그것은 심장에서 나오는 가벼운 증기일 뿐이며, 죽은 후에는 흙과 섞인다. 반면, 아코(Akko)는 가장 높은 원리이다. 그것은 악을 넘어 있는 일종의 빛으로, 하늘에서 와서, 육체가 먼지로 돌아갈 때 하늘로 돌아간다. 아코는 플라톤과 카발리스트들의 순수한 지성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의무에 대한 지식과 미래의 삶과 부활에 대한 예지, 요컨대 도덕적 의식에 국한된다.
  끝으로 우리는 본래의 영혼, 또는 도덕적 인격(person)에 도달했다. 기능이 다양하지만 그것은 하나이다. 그것만이 우리의 행동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에 책임이 있다. 훨씬 덜 철학적이기는 하지만, 젠드 경전들이 똑같이 인정하고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이 인간을 세상의 형상(image)으로 만드는데, 그 형상은 자신의 의식 속에서 두 개의 상반된 원리를 인식하고 있다. 즉, 두 개의 케드라(Kedras)가 그것인데, 하나는 하늘에서 와서 우리를 선으로 인도하고, 다른 하나는 아흐리만에게서 창조되어 우리를 악으로 유혹한다. 이 두 원리들이 인간에게 행동의 자유를 주는 것이다. 이들은 탈무드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하는데, 거기서 그들은 선한 욕망과 악한 욕망이 된다. 즉, 그들은 선한 천사와 악한 천사를 뜻할 수도 있다.
  6. 신화적인 특성이 있긴 하지만, 이흐리만의 개념조차 카발라교의에 보존되어 있다. 어둠과 악은 사마엘(Samael) 속에서 인격화되어 있는데, 이는 하느님의 빛이 천상의 인간에 의해 빛나는 광휘로 표현되는 것과 똑같다. 이 상징에 대한 형이상학적 해석에 대해 말하자면 (악한 원리는 물질, 또는 카발리스트들이 말하는대로 하면, 존재의 마지막 단계인 “껍질”이다),  것은 제르두스티안 교파(the Zerdustians)에게서 발견되는데, 그들은 하느님의 빛과 어둠의 왕국 사이의 관계를 몸과 그 그림자 사이의 관계와 같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독특하기 때문에 더욱 주목할 만한 또 하나의 사실이 있다. 우리는 파르시교도들의 종교법전 중 가장 오래된 부분에서, 어둠의 왕자인 사마엘이 자기 이름의 반을 잃어 버리고 종국에 빛의 천사가 되어, 저주받은 모든 자들과 함께 하느님의 은혜로 돌아오리라는 카발라의 견해를 볼 수 있다. 야크나(Yacna)의 한 구절은 이렇게 말한다. “악 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이 불의하고 불순한 어둠의 왕이 부활의 때에 「아베스타」를 말할 것이며, 율법을 성취하여 저주받은 자들(the darwands)의 거주지에서조차 그것을 입증할 것이다.” 그 때 오르무즈드와 일곱의 최고 수호신들이 한쪽에 보이고, 아흐리만과 일곱의 악한 천사들이 한 쪽에 있어, 함께 영원하신 분, 제르바네 아케레네께 희생제물을 바칠 것이다. 끝으로 이 모든 형이상학적, 종교적 개념들은 아주 특별한 지리체계(地理?系)에 의해 성취되는데, 이것은 「조하르」와 파르시들의 성서들에 모두 약간만 다르게 나타나 있다. 「젠드 아베스타」와 「분데헤쉬」에 따르면, 땅은 일곱 부분(케쉬바르, keshvars)으로 나뉘며, 그 부분들에 일곱 개의 큰 강이 물을 대고, “태초에 쏟아진 물”에 의해 서로 나뉘어진다. 각 부분은 별도의 세계를 이루어 서로 다른 특성을 지닌 거주자들이 살게 되는데, 그 중 일부는 흑인이고, 일부는 백인이며, 일부는 동물처럼 몸이 털로 덮여 있고, 일부는 좀 이상한 형태에 의해 구별된다. 분리된 땅의 큰 부분들 중 하나만이 조로아스터의 율법을 받아 들인다.
  여기 같은 주제에 대한 카발리스트들의 견해가 있다.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그 분은 우리 머리 위로 일곱 하늘(칠층천)을 펼치시고, 우리 발 아래에 많은 땅을 펼치셨다. 그 분은 일곱 개의 강을 만드시고, 7일로 한 주(週)를 삼으셨다.  일곱 하늘은 각각 독립된 성좌와 독특한 성격의 천사들을 지니고 있다. 이 아래 땅들도 마찬가지다. 그것들은 하나가 다른 것 위에(one above the other) 놓여 있고, 그 모든 곳에 서로 다른 성격을 지닌 존재들이 살고 있음은 하늘이 그런 것과 같다. 어떤 존재들은 두 개의 얼굴을, 어떤 존재들은 네 개의 얼굴을, 그리고 어떤 존재들은 단 하나의 얼굴을 갖고 있다. 그들은 피부색도 다른데, 어떤 존재들은 붉고, 어떤 존재들은 검고, 어떤 존재들은 하얗다. 어떤 존재들은 옷을 입고 있고, 어떤 존재들은 벌레처럼 알몸이다. 이 모든 세계의 거주자들이 아담에게서 나왔다고 하는 반대의견이 나오면, 우리는 이렇게 묻는다. 아담이 이 모든 자들을 퍼뜨리기 위해 이 모든 지역을 여행했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그는 아내가 몇 명이나 있었단 말인가? 그러나 아담은 지구 한 켠에서만 살았는데, 그 곳은 가장 높은 곳이며, 높은 상위의 하늘이 둘러싸고 있는 곳이다.
  
  이 묘사와 파르시들의 묘사 사이에 있는 유일한 차이점은, 지표 위에 자연적으로 구분되어 있는 지상의 일곱 지역 대신에, 카발리스트들은 그 지역들이 앙파껍질처럼 층층이 쌓여 있다고 표현한 것 뿐이다.
  「젠드 아베스타」의 영향 하에 나온 종교적 개념들과 카발라에 공통된 기본개념을 이루고 있는 요소들은, 기본적인 형태로 이렇게 간단히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파르시들의 경전에서 천상과 지옥의 모든 신화, 제의(祭儀)의 일부, 더욱이 유대교의 가장 근본적인 교의까지도 모두 찾아내지는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피할 수 없는 추론에서 물러나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카발리스트들이 단지 주체성 없이 모방만 한 자들이라든지, 이방의 개념과 신앙을 검증이나, 적어도 변형없이 채택했다든지, 자기들 경전의 권위를 가지고 자기들의 개념을 은페하기만 했다든지 하는 비난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일반법칙으로 볼 때, 다른 민족의 압제가 아무리 심했다 하더라도, 자신들의 내적 능력의 표현인 자기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남의 삶과 남의 혼을 가지고 사는 민족은 없다. 우리는 카발라가 유대교에서 부수적인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다. 반대로 그것은 유대교의 핵심이며 혼이다. 탈무드가 율법의 외적(外的)인 실행과 준수에 대해 말하고 있는 모든 것을 계승한 반면, 카발라는 사변의 영역과, 자연신학과 계시신학의 엄청난 문제들을 혼자서 간직하고 있다. 더구나 그것은 사람들의 투박한 신앙에 대해 순수한 경의를 표하고, 그들의 신앙 전체와 종교가 심오한 신비에 근거해 있음을 이해하도?? 가르침으로써, 사람들의 존경심을 불러 일으킬 수 있었다. 카발라는 비유적 방법의 원리를 최종 결론에 적용시킴으로써 술책을 부리지 않고도 이 일을 할 수 있었다.
  우리는 탈무드가 카발라를 어떤 존경심을 가지고 대했는지, 카발라가 일반 사람들의 상상력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보아왔다. 한때 카발라에 의해 야기된 정서(sentimeuts)가 상당히 근래에까지 내려왔다. 현대의 바르 코흐바(Bar Kochba)인 삽바타이 체비(Sabbataix Zevi)가 세계의 유대인 사회를 잠시 뒤흔들었을 때, 그가 의존한 것이 카발라 사상이었다. 또 18세기 말엽 헝가리와 폴란드의 유대인들 사이에 격렬한 동요를 일으켜, 조하르파와 신하시딤(Neo-Hassidim) 교단을 낳고, 수천명의 유대인들을 그리스도교의 품으로 인도한 것도 카발라 사상이었다. 카발라를 본질적으로 생각해 보면, 우리는 그것이 「젠드 아베스타」의 신학을 넘어 훨씬 진전된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진실로 이원론은 조로아스터교 사상의 머릿돌이다. 그러나 그것이 보통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절대적이지는 않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절대적 존재를 인정하는 종교의 일부이다. 오직 오르무즈드와 아흐리만이 신적 특성과 실제적인 권능을 지니고 실제로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가 말했듯이, 그들이 나온 무한한 시간, 영원하신 분은 순수한 추상화이다. 영원하신 분을 악에 대한 책임에서 구하기 위해, 세계에 대한 주재권을 그에게서 떨어져 나가게 했으며, 그 결과 선에 대한 모든 관여도 그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그에게는 존재(existence)의 그림자를 지닌 이름 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젠드 아베스타」에는, 거기서 나온 후기의 전승들에서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관한 모든 개념들과 인간의 마음에 있는 모든 위대한 원리들이 다시금 신화적인 베일에 싸여 있으며, 그것들은 그 베일을 통해 가시적인 존재들과 인간의 형상을 한 독특한 인물들로 나타나는 것이다.
  카발라의 교의는 아주 다른 특성을 나타낸다. 여기서 일신론은 만유의 기초이며 원리이다. 이원론과 기타 모든 특성들은 단지 형식일 뿐이다. 하느님, 유일하시고 지존하신 하느님만이 동시에 만유의 원인이요 실체요 지적 본질이다. 즉 만유의 이데아적 형상(the ideal form)이다. 존재와 무 사이, 존재의 가장 높은 형태와 가장 낮은 수준 사이에만 상반성, 이원론이 있다. 하나는 빛이요, 다른 하나는 어둠이다. 그러므로 어둠은 부정일 뿐이다. 빛은 자신이 인식하는 모든 것을 창조하는 영적 원리요, 영원한 지혜이며, 무한한 지성이다. 빛은 스스로의 존재 자체에 의해 인식하거나 생각한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만약 어떤 수준에서 존재와 생각이 융합한다면, 지성의 위대한 개념들은 마음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마음대로 추상화할 수 있는 단순한 형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것들은 본질적이고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다. 즉 그것들은 영원한 본질과 분리될 수 없다. 이것은 세피로트, 천상의 인간, 크고 작은 얼굴의 특성과 똑같다. 예컨대 그것은 카발라의 모든 인격화의 특성과 같다. 그 인격화는 우리가 본대로, 「젠드 아베스타」의 개별적, 신화적 인격화와 아주 다르다.
  (카발라에는-역주) 여전히 「젠드 아베스타」의 개요, 외적인 구도가 남아 있다. 그러나 그 기초의 본질이 완전히 변했고, 카발라는 그것이 탄생했다는 사실 자체로 신화에 대한 독특한 시야를 제공하는데, 이는 바로 그 종교적 감성의 영향 하에서 형이상학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 운동의 열매인 사상체계는, 그 넓이와 깊이가 큼에도 불구하고, 인간 이성의 권리와 능력을 마음대로 발휘할 수 있는 장(場)이 아니다. 신비주의 자체는 카발라에서 가장 높은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비주의는 여전히 외적인 힘, 즉 드러난 말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 이 능력은 분명히 실제보다 더 눈에 띈다. 말할 것도 없이, 비유를 통해 신성한 문자는 곧 인간의 마음과 가장 자유로운 영감에 의해 쓰기 좋은 도구가 되었다. 그러나 고의적이든 잘못해서든, 이런 류의 과정, 세속적인 글로 새로운 사상을 은폐하는 이 방법은 진정한 철학에 대한 치명적인 편견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카발라가 외국문명의 영향 하에 발생했다 하더라도, 그 모든 교의의 바닥에 범신론이 있다 하더라도, 카발라가 유대인의 종교적, 민족적 특성을 견지하고 있다는 것이 그러하다.
  그것은 먼저 성서의 권위에, 다음에는 구전의 율법에서 피난처를 찾음으로써, 유대 신학체계의 모습을 견지했다. 그것이 철학과 인류의 역사에서 받아들여지기 전에, 그런 모습은 깨끗이 지워서, 카발라가 그 자체의 빛 속에서, 즉 인간 정신의 자연스런 산물로 나타나야 했다. 이러한 흔적 제거작업은 프톨레미 왕조의 수도(알렉산드리아-역주)에서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성취되었다. 거기서는 먼저 히브리 전통이 성소(聖所)의 문지방을 넘어서서, 자신의 본질을 상실하지 않은 채, 많은 새로운 사상과 섞여 세계로 펴져 나갔다. 그것들을 자기네 것이라고 생각한 이 전통의 수호자들은 희랍철학의 가장 고상한 결실을 받아들여 점점 자신들의 신앙과 결합시켰다. 반면에 희랍문명의 후계자인 체 하는 자들은 이 결합에 점차로 익숙해져서, 이성과 직관, 철학과 신학이 균등하게 나타나 있는 조직화된 체계 속에 새로운 혼합물을 덧붙이는 것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리하여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고대의 모든 철학적, 종교적 개념을 눈부시고도 깊이 있게 요약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신플라톤주의와 카발라가 모든 본질적인 점에서 유사함-일치함-을 설명해 준다. 그러나 카발라는 비록 헬라화했다 하더라도, 팔레스타인 유대인의 선택된 자들의 작은 모임에 전해져서, 이스라엘의 비밀로 간주되었다. 이것은 이러한 형태로 유럽으로 전해졌으며, 「조하르」가 출판되기까지 구전으로 가르쳐졌다.
  여기서 새로운 방식의 탐구가 시작된다. 즉, 카발라는 15세기초부터 17세기말까지 그렇게도 주목을 받은 연금술철학과 신비철학(레이몬드 룰루스[Raymond Lullus]가 그 최초의 인물이고 프란시스 메르쿠리우스 반 헬몬트[Francis Mercurius van Helmont]가 그 마지막 대표자라고 할 수 있다)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이는 이 문제를 보충할 두 번째 주제가 될 수 있다. 되풀이 하자면,
  1. 카발라는 플라톤 철학의 모방이 아니다. 카발라 체계가 확립된 팔레스타인에 플라톤이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언뜻 보기에 분명해 보이는 몇 가지 유사성이 있지만, 두 교의는 가장 중요한 내용에서 전혀 다르다.
  2. 카발라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모방이 아니다. 첫째는, 카발라가 알렉산드리아 학파보다 앞선 시기의 것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유대교가 언제나 희랍문명에 대해 심한 혐오감을 표현해 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희랍문명이 카발라를 신의 계시라는 지위에 올려 놓았을 때조차도 그랬다.
  3. 필로의 교의가 아주 많은 카발라적 개념을 담고 있다 하더라도, 카발라는 필로의 작품이라고 여겨질 수 없다. 필로는 팔레스타인에 있는 동포들에게 희랍철학을 함께 전하지 않고는 이 개념을 전달할 수가 없었다. 그 사상의 특성으로 보아, 필로는 새로운 교의를 창설할 수 없었다. 더구나 유대교의 기념비적인 작품들 속에서 그의 영향의 흔적을 조금도 찾아 볼 수 없다. 끝으로 필로의 작품들은, 「70인 역 희랍어 성서」와 예수 벤 시락의 작업들, 그리고 「지혜서」 등에 나타난 카발라 원리들 보다 더 후대의 것이다.
  4. 카발라는 그리스도교에서 빌어 온 것도 아니다. 카발라의 근거가 되는 모든 위대한 원리들이 그리스도의 탄생 이전 것이기 때문이다.
  5. 몇몇 페르시아 종파의 신앙과 카발라의 가르침 사이에서 발견된 놀라운 유사성과 「젠드 아베스타」와 카발라의 많고도 분명한 유사점, 조로아스터교가 유대교에 남긴 흔적들, 바빌론 포로 이후 히브리인들과 조로아스터교 교사들 사이의 외적인 관계, -이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카발라의 자료들이 고대 페르시아인들의 신학에서 파생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빌어옴이 카발라의 독창성을 파괴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과 자연의 이원론을 원인과 본질의 절대적 통일로 대치시켰기 때문이다. 만유의 창조를 대립하는 두 세력의 자의적 행위라고 보는 대신, 그것은 만유를 무한한 지성의 성공적이고 섭리적인 현시, 즉 신의 형상들이라고 보았다. 개념이 인격화를 대신했으며, 형이상학이 신화를 몰아냈다. 우리가 보기에 이는 인간정신의 일반법칙이다. 민족 간에나 시대 간에 절대적 독창성이란 없으며, 또한 예속적인 모방이란 것도 없다. 우리가 윤리학의 영역에서 무한한 독립을 얻기 위해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우리의 가장 대담한 발견 속에서 항상 전통의 고리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때로 전통과 권위의 횡포 아래서 움직일 수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의 지성은 언제나 길을 열고, 우리의 개념은 스스로를 내리 누르는 바로 그 힘으로 인해 변화하며, 혁명은 기어이 일어난다.












               역자후기
  아돌프 프랑크의 이 책은 유대교 신비주의의 주류를 이루는 카발라(‘전통’이란 뜻)를 상세히 해설한 것이다. 금세기에 카발라 연구로 명성을 얻은 게르숌 숄렘(Gershom Sholem)의 저서들이 나오기까지는, 프랑크의 이 책이 카발라를 해설하는 데 가장 권위 있는 학술서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이라고 해서 이 책의 가치와 권위가 줄어든 것은 아니다. 
  프랑크는 이 책에서 단순히 카발라사상을 소개하고 해설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카발라를 논의할 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여러 논점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 그 중 가장 핵심적인 카발라의 기원문제와 카발라 경전인 「조하르」와 「세페르 예치라」의 진실성 문제를 그는 충분한 자료를 검토하면서 예리하게 다루고 있다. 비록 숄렘은 프랑크와 견해를 달리하고 있지만, 프랑크는 카발라가 중세에 발생한 것이라고 보지 않으며, 그 기원을 훨씬 올려 잡는다. 카발라사상은 고대부터 전해져 온 것이며, 유대교 신학의 정수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구약성서에 대한 비유적, 상징적 해석은 카발라의 성서해석 방법의 특징이다. 특히 히브리 문자에 수치(數値)를 부여하여, 성서의 본문을 종횡으로 변형시켜 해석하는 방법은 일반적인 구약해석법에서는 매우 낯설고 기이하게까지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신학사상의 핵심으로 들어가면, 카발라를 유대교 신학의 정수라고 하는 말이 헛말이 아님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신론에서 이러한 특성이 두드러지는데, 이를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아도 중세 스콜라신학과 신비주의 신학의 내용이 고스란히 유대교적으로 표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는 카발라 사상을 통해 그리스도교 신학의 깊이를 탐구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탈리아의 휴머니스트였던 마르칠리오 피치노(Marcilio Ficino)와 삐꼬 델라 미란돌라(Pico della Mirandolla), 그리고 독일의 신비주의자 야콥 뵈메(Jakob Bohme)이다. 그 외에도 여러 그리스도인들이 이를 탐구하여 이른 바 ‘그리스도교 카발라’의 체계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프랑크는 이 책에서 이러한 카발라 사상을 신론, 세계관, 영혼론의 측면에서 고찰한 후, 플라톤 사상,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사상 및 필로의 사상과 비교함으로써 카발라 사상의 보편적 가치를 확인하고 있으며, 그리스도교 사상과도 비교하고 있다. 
  카발라는 어느 종교보다도 폐쇄적인 유대교의 한 복판에서 가장 보편적이고도 본질적인 신학사상을 꽃피웠다는 점에서 특별한 가치가 있다. 이들은 가장 유대교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비유대교적이다. 그래서 카발라를 연구하면, 이를 통해 편협한 유대교사상을 넘어서서 유대교신학의 깊이와 보편적 가치를 더욱 깊이 인식하게 될 것이고, 여러 다른 사상 및 종교에 대한 인식도 깊어질 것이다. 오래 전에 카발라연구가들이 그 일을 이미 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 번역본은 카발라를 철학적, 신학적으로 고찰한 책이다. 카발라 신학에 생소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겠지만, 이 책을 통해 유대교 신학의 깊이를 한껏 맛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영국의 사상가 카알라일이 “아무 데나 깊이 들어가라. 그러면 거기에는 노래가 있다”라고 한 말의 뜻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될 것이다. 더욱이 이른바 실천적 카발라(practical Kabbalah)의 측면에서 여러 가지 능력을 계발하기 위해 카발라를 이용하는 경향이 주로 알려져 있어서, 카발라의 진정한 신학적 가치가 오히려 훼손되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이 책을 통해 카발라 신학의 진정한 가치를 확인하기를 바란다. 끝으로 이 역서에 있는 주(註)는 모두 역자가 붙인 것임을 밝혀 둔다. 컴퓨터를 쳐 주신 이규영 누님께 감사드린다.
  
                             
                                         역자 이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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