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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찬 자료 모음

히브리서 6잘 4절~말씀 해석





히브리서 6장 4~6절 말씀은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유명한 구절입니다.
케내스 해긴의 잘못된 해석을 보고 많은 고민을 하게되었습니다.
제 얘기가 옳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제 얘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고민했던 내용들을 나누고자 합니다.

이 말씀의 1차적 수신자들을 빼놓고 바로 '우리'에게 적용하면 안될 것 같습니다. 이 말씀이 쓰인 역사적 배경을 알면 이 구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당시 유대인은 두 부류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아람어를 사용하고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히브리파 유대인들와
헬라어를 사용하고 외국에 거주하는 헬라파 유대인들입니다.

사도행전 6장 1절~7절에 일곱 집사를 세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행6:1)

사마리아인들을 대하는 것 처럼은 아니지만,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은근히 헬라파 유대인보다 우월감이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모두 히브리파였고, 구제를 담당하는 사람들 역시
전부 히브리파 였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 역시
이런 사상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고넬료 사건 이후에야 비로소 베드로는 설교를 통하여 이런 고백을
합니다.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행10:35)
고넬료 사건을 경험하기 전 베드로는 '복음'이 이방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을 위한 것으로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방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바울'을 들어쓰신 하나님의 선택은
이를 고려한 치밀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혈통적으로는 베냐민지파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로마 시민권자
였습니다. 유대 문화와 로마 문화 즉 이방 문화의 공통분모에
서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행해지는 은혜의 때에 노골적으로 사도들이 잘못을
저질렀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 였는지 모르지만, 사도들이 헬라파 과부들보다
히브리파 과부들을 더 편애하였음이 분명합니다. 이 부분은 실수도
아니고 잘못도 아니고 죄도 아닙니다만 이 것을 헬라파 유대인들은
심각하게 받아들였습니다. 평소에 은근히 무시당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실질적으로(?) 피해를 본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는 아름다운 초대 교회 공동체(행2:44~47)의 분열을 조장하는
갈등이요, 은혜를 뒤엎어버릴 만큼 심각했던 위기였습니다.

사도들은 이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단번에 간파했습니다.
문제의 해결책은 바로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들은 그전에 기도를 덜하고 말씀을 덜 가르친 것이 아니었지만,
더욱 더 이에 집중해야겠다고 결정을 내린 것이었습니다.
모든 공동체 갈등의 시작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의 고갈에서 시작됩니다.
은혜는 신비적인 체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기도와 말씀이라는 방편에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구제를 전적으로 담당할 일곱 집사를 세웁니다.
스데반, 빌립, 브로고로, 니가노르, 디몬, 바메나, 니골라
이 일곱 집사의 이름은 바로 모두 '헬라식' 이름입니다.
현민욱과 제임스
위의 두 이름에서 우리는 우리나라 이름과 외국 이름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히브리식 이름과 헬라식 이름은 모두 외국 이름이라
잘 구별이 안되지만, 어쨋든 위 일곱 집사들은 모두 헬라파 사람들이
었습니다. 게다가 니골라는 혈통적으로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유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만큼 폐쇄적인 문화가 아닙니다.
언제든지 여호와를 섬기려는 사람들은 이방신을 버리고 할례를 받고
일정기간의 수행을 통해 유대교에 입교할 수 있었습니다.
니골라는 이방출신 헬라파 사람이었습니다.
사도들의 인사는 이토록 파격적이었던 것입니다.
오해를 해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헬라파 사람들을 섬기려는
사도들의 낮아짐이 드러나는 장면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화합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을 더욱 중요하게 여긴 것입니다.

이제 '회당'에 모이는 부류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앞서 설명드린 것 처럼 큰 명절을 제외하고 멀리 사는 유대인들은
성전이 아닌 회당에서 그들의 모임을 갖고 율법을 강론하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 회당에 모이는 사람들은 회당 중심에 히브리파 사람들이
앉았고 회당 중심의 바깥엔 헬라파, 그 다음 바깥엔 유대교에 입교하여
할례를 받은 이방민족들, 그리고 회당 가장 자리엔 할례를 받지 않았지만 
여호와를 존중하고 율법의 가르침을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경건한 사람들'
이 있었습니다. 

유대교에는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등 여러 갈래가 있습니다.
그런데 신흥 교단(?)이 생겼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기다렸던 메시아가 바로 얼마 전에 십자가 처형을
당했던 청년 예수라고 퍼뜨리고 다니는 불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새 율법을 주장하며, 구원의 방법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라
믿기만 하면 된다고 말했습니다. 할례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민족들에게까지 모두 하나님의 백성인 진정한 '이스라엘인'이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더욱 참을 수 없었던 건, 인간인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소개했던 것이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나무에 달려 죽는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고
명백하게 나와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은 사람을
오히려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다니다니
유대인들의 눈엔 완전히 이단이요 미친 사람들이었습니다.
처음엔 소수였기 때문에, 현자 가말리엘의 지혜에 따라 그냥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리스도교가 전파되는 곳에는
항상 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평화가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실현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고대 로마의 문헌을 살펴보면, 근동지역 곳곳에
유대인들이 종교적인 문제로 분쟁이 많이 발생했다고 적혀있습니다.
주변사람들로부터 '그리스도인'이라 불리웠던 착한 행실로 칭찬받았던
무리가 예상치 않게 '유대인'들과 갈등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할례 받지 않았던 '경건한 사람'들이 입교하기에 까다로운 유대교보다
같은 유대교(?)이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된 그리스도교로
하나 둘 개종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이상한 분위기는 사그러들
기미는 보이지 않고 오히려 부흥했으며 급기야 할례 받았던 이방인들까지
유대교를 버리고 예수를 추종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이단집단의 발흥을 유대인들은 그냥 두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모든 먹거리와 금은 보화는 로마로 유통이 되었습니다.
황제와 로마 귀족들의 유흥을 위해서였습니다.
특별히 이 유통과정에서 유명한 로마의 도로보다 더욱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이 '해상 경로'였습니다.
말보다 배가 훨씬 효율이 높았습니다.
그런데 해상 경로 중 가장 알짜배기인 지중해 연안을
이 '유대인'들이 전부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로마에게 실질적인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당시 예수의 처형을 집행할 당시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봉기를 두려워했습니다. 빌라도가 소유한 군대가
워낙 소수였기도 했지만, 유대인들이 집단적으로 봉기를 일으킬 경우
이 해상 경로가 막히게 되고, 로마 귀족들의 유흥은 반감되게 됩니다.
이는 황제에게 자신의 무능력함을 알리는 일이 되는 것이고,
유대 지방으로 유배되어 자신의 출세의 길이 막혔다고 생각하여
어떻게든 황제에게 잘보여 다시 로마로 복귀하려는 빌라도에겐
악몽과도 같은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로마 재판 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도록 어떤 조치를
취했습니다. 유대인들과 로마 사이에 어떤 모종의 거래가 있었고
로마 시민권자가 아니고 유대인들에 한해서 그들의 율법으로
살인을 할 수 있도록 암묵적인 허가를 내려주었습니다.
유대인들의 그리스도인 박해는 로마법에 저촉되는 불법행위
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처형하기 위해서 빌라도의 손을
이용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한명'이 아니라
수만명의 '작은 예수'들을 죽이기 위해서는 예수를 다루었던
방법으로는 뿌리 뽑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신속한 대처를
위해서 로마법을 무시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로마도 곳곳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이
골칫거리였습니다. 로마는 상대적 소수였던 그리스도인보다
'해상권'을 가지고 있는 힘있는 유대인들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불법을 묵인하는 댓가로 경제적인 이권을 제공받았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로마 입장에서는 분쟁 해소와 경제적 이득, 일석이조의 선택이었습니다.
게다가 로마 군사를 동원할 필요없이 손안대고 코푸는 격이었습니다.

박해 초기에 배교자 '사울'이 등장하면서 그리스도인의 말살정책은
더욱 힘이 들게 생겼습니다. 사울은 자신들이 불법적으로 죽일 수 없었던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교'를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방인들을 율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죽일 수 없지않습니까?
그들은 처음부터 '지옥의 땔감'들이었는데 말입니다.
사울에 의하여 안디옥을 시작으로 빌립보, 에베소등 이단 교회들이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적적인 치료와 그리스도인들의
선행이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기 시작해서,
자신들의 박해와는 상관없이 이 그리스도인들이 점점 불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방출신 그리스도인들의 영향력 때문에 같은 지역에 살고 있었던 헬라파 유대인들의 배교가 점점 발생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율법의 입김(?)이 닿았기 때문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에게는 죽음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박해를 피하기 위하여 유대의 제사도 드리고
몰래 그리스도교의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거짓 교사'들이 일어나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를 믿는 것 이외에도 할례를 받고 율법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갈라디아서는 이런 주장에 맞서는 바울의 피어린 호통입니다.

이런 거짓 교사들의 주장은 박해를 피하기 위해 몰래 예배를
드렸던 사람들의 사상적 피난처가 되었습니다.
이젠 아무런 거리낌없이 유대의 율법도 지키고 예수도 믿을 수 
있었습니다. 복음이 순전하지 못하고 섞여버리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오직 예수만이 구원의 길이라 주장했고,
율법의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길이
바로 율법의 완성을 이룰 수 있다는 교리를 펼쳤습니다.
예수와 율법의 혼합은 자칫
그리스도의 의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의를 섞는 결과요
구원 역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임을 역설했습니다.
(거짓 교사들과 알미니안 주의의 공통점을 아시겠습니까?
그들은 구원 역사에 '인간'의 역할을 강조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실 소수고, 다수의 개종한 유대인들은
가족들의 피눈물어린 고통을 감당할 수 없어서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은 죽으면 되지만 남겨진 가족들은 어찌 하란 말입니까?

이 시기에 바로 개종한 그리스도교 유대인들을 위하여
이 위대한 성경 '히브리서'가 쓰여졌습니다. 

구약의 모든 것은 '모형'에 지나지 않고
진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런 모형의 본질이라고 역설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천사들, 멜기세덱, 아브라함, 모세 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구약 성경을 들어 증명했습니다.

히브리서의 가장 위대한 선포는 11장 믿음의 장이 아니라
바로 1장 3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켤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얼마나 위대한 선언입니까!
유대인들에게 죄를 정켤해하시는 분은 오직 제사의 방편을 허락하신
여호와 한분 뿐입니다. 그런데 그런 비난과 박해에 굴하지 않고
예수가 바로 능력의 말씀을 모든 만물을 붙드시는 하나님이시요,
그 보좌 우편에 앉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죄를 정켤케 하시는 일을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만희가 하나님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하는 문서를 보게된
우리의 심정이 어떨까요? 아마 당시 유대인들의 심정과 비슷할 겁니다.
유대인들에게 이건 사상 최대의 '불온 서적'이며, 잡히면 목숨이 날아가는 글이었습니다.

이 선언은 오직 성령의 역사로만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3년간 구약 성경을 붙들며, 구약 성경에 예표되었던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했던 바울의 신앙고백입니다. 그것을 성령께서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 구절 이후로 등장하는 모든 구약의 논증들을 살펴보십시오.
철저한 지성의 헌신이 무엇인지... 구약 성경의 내적 증거들을
찬란하게 펼치는 바울과 그를 들어쓰신 성령님의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기존의 사상과 배치되는
그리스교의 가르침을 온전히 수렴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방인들과 달리 개종한 유대인들은 철저히 '배교자'라는 주홍글씨와 함께
그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고향으로부터 떨어져야 했습니다.
가족들끼리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아내와 남편이
친척과 친척끼리, 서로 양보할 수 없었던 문제였기에, 분쟁은
더욱 큰 상처를 남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거짓 교사들의 주장은 신앙이 흔들리고 있던 그리스도교 유대인들을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게 하는 사상적 발판을 마련해주었습니다.
철저히 그리스도교를 섬기다가 배교하는 건 어렵습니다. 이미
한쪽을 철저하게 버린 사람이 다시 돌아가는 건 정말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따라 혼합된 복음이면 배교가 쉬워집니다.
유대의 제사와 그리스도교를 동시에 섬기다가 어느 한쪽을
포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배교'가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사단의 치밀하고 교묘한 전략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문제를 잘못된 교리에 입각한 신앙생활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6장 4절에 앞서 5장 12절과 6장 3절을 살펴봐야 합니다.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한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니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찌니라"

바울은 자신의 가르침에 '다른 가르침'이 섞여드는 것을
매우 혐오했고, 배격했습니다. 교리의 오염을 방지하고자 했습니다.

그러고난 다음에 그리스도교를 버리고 다시 유대교로 들어간 사람들을
향해 강력한 권면을 합니다.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구원의 점진적 계시의 역사를 따라, 구원의 길인 예수님이 찬란하게
드러난 시점에서 이제는 유대의 제사의 방편이 더 이상 구원의 길이
될 수 없었습니다.

제사는 모형일 뿐, 원형이 아닙니다. 진정한 죄 사함은 짐승의 피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짐승의 피도 필요한 게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으로 충족합니다. 다른 피가 섞여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제사를 드리는 것은 모순입니다.
자기 가게에서 돈을 내고 빵을 사먹는 것과 같습니다.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본 사람들은 1차적으로
바로 모형인 유대교를 버리고 원형인 그리스도교에 입교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타락했다는 표현은 박해를 이기지 못하고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새롭게 하여 회캐케 할 수 없다는 말씀은 구원의 길인 예수 그리스도
를 버리지 말라는 '강력한 권면'으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다시 유대교로 돌아간 사람들은 기존 유대인들에게는 강력한 선전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들을 다시 받아 줌으로써 자신들을 관대한 사람들로
포장할 수 있었고, 그리스도교로 가봐야 별거 없다는 이미지를
퍼뜨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가리우며,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복음의 문을
막아버리게 됩니다.
바울은 이 것을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모독하는 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이토록 강하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자신의 어조가 강경했음을 깨달은 바울은 뒤의 구절에서 다시 부드러워
집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9절)

'이같이 말하나'라는 표현이 주목해주십시오. 그리고 다음 구절도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
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
니라" (10절)

하나님이 성도를 함부로 버리지 아니하시는 분이심을 강조합니다.
구원의 여부는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그 분의 성실하심과 의로우심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신다 할때에
그들의 '행위'를 보셨다는 말이 아니라, 그 행위를 산출하게 만든
그들의 '중심'을 보셨다는 말씀으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열매에 관하여 앞선 8절이 이를 증거합니다.

다시한번 이제는 강경한 어조가 아니라 부드러운 어조로
4~6절의 말씀을 반복합니다. 새로운 말이 아니라 반복입니다. 반복!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섬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11절, 12절)

4~6절은 11절과 12절과 같은 내용입니다.
11,12절을 위해서 4~6절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4~6절만 따로 뚝 떼어놓고 교리를 정립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바울의 호통은 사랑하는 사람이 구원의 길에서 벗어날까봐
노심초사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지,
타락한 자들에게 지옥 선언하는 발언이 아닌 것입니다.

여기에 무슨 '성공신학'이 있습니까?
그들에게 예수 믿는 것은 더욱 가난해지는 길이요,
지속적인 고난이 뒤따르는 죽음에 이르는 고통의 길이었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직장을 잃고, 친구에게 미움받고, 가족들에게 버림을
받아야 했습니다. 심지어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는 것 뿐만 아니라, 목숨의 위 협까지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믿었기에' 그 길을 걸을 수 있었습니다.

결국 그들의 믿음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믿음과 오래참음으로 말미암아' 이 구절이 이토록
가슴 시리도록 다가오는 요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