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이 세상 어느 누가 과연 자신의 인생은 만족한 인생이었노라고 고백하며 이 땅을 떠날 수 있을까요?
우리는 푸쉬킨처럼 은연중에 삶은 우리를 속일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실제로 자신들은 삶에게 그렇게 당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 같습니다.
제가 삶이라 표현을 했지만 사람들이 정작 섭섭해 하는 것은 그 삶을 주관하고 있는 어떤 힘 있는 존재에 대한 투정일 겝니다.
인생을 앞에 두고 단지 허둥대기만 했던 무능하고 가련한 유년시절과 청소년 시절, 대학 시절은 그야말로 삶에 대한 공상으로 웃었다 울었다했던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도대체 인생은 무엇이며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인지, 그리고 왜 나는 아무런 선택권도 없이 이러한 부모와 이러한 가정과 이러한 나라에 태어나게 된 것인지, 그리고 나는 어떤 존재로부터 주어진 이 인생의 기간 동안 무엇을 하며 지내야 하며, 종국에는 이 땅을 떠나 어디로 가야 하는지 정말 깜깜한 동굴을 지나는 듯 했습니다.
미국의 어느 조종사가 정리를 했다는 머피의 법칙은 꼭 나를 위하여 만들어진 법칙처럼 내가 원하는 것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나의 희망과 상상과는 늘 반대 방향으로 자리를 하는 것 같았고, 저는 그 때마다 누군가 나를 방해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삶이 나를 속이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러던 어느 날 이마에 첫 주름이 생겨날 즈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었고 저는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느 프랑스 시인의 고백처럼 인생에 대한 신뢰와 동의가 제 안에 일어난 것입니다.
삶은 한 번도 나를 속인 적이 없었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된 것이지요.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졌든 이루어지지 않았든 내가 지나간 그 시간은 분명 나에게 유익이었다는 것이 깨달아졌습니다.
어려움은 어려움으로 나의 인격적 성숙에 기여를 했고, 기쁨과 흥분은 그 나름대로 나의 인생의 맛깔스러움을 보태주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 후에도 삶의 이정표가 좀 더 명확했으면 하는 바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때마다 나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의 그 큰 손을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이끄심에 전적인 동의를 하게 되었지요.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며 경륜하시는 창조주이시면서 나의 아버지이시고 나의 벗이며 나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어둡고 추악한 세상 속에서도 그렇게 하나님의 통치에 순응하며 동의하고 그 분을 신뢰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 부릅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있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잠시 나그네로 이방인으로 이 땅에서 억지스러운 일을 당하기도 하지만, 그들의 소망은 이곳이 아닌 하늘에 있기에 얼마든지 견뎌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나라, 즉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임하게 해 달라고 가슴 깊은 진심으로 기도를 합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하나님 나라의 통치 원리는 십자가의 원리입니다.
십자가의 원리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골고다의 저주의 나무 막대기에서 보여주셨던 것처럼 하나님과 나 아닌 다른 이들을 위해 나를 비우고 나를 죽여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이들의 유익을 구하는 삶입니다.
이 세상의 삶의 원리는 힘의 원리입니다.
나의 유익을 위해 언제든지 남을 밟을 수 있고 하나님마저도 어르고 달래서 나를 돕는 힘으로 동원해 버리는 그런 원리이지요.
이 둘은 언제나 충돌을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 땅에서 순조로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고대시대의 나그네와 이방인은 사회법 밖의 외인들이었습니다.
누가 괴롭혀도, 심지어 목숨을 위협해도 그들을 지켜 줄 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이 땅에서 바로 그러한 나그네요 이방인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창세전에 택함을 받습니다. 이 우주가 창조되기도 전에 이미 우리의 이름은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은 그 생명책을 근거로 우주와 역사를 창조하신 것이며, 여전히 창조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의 지킴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식을 자식답게 만드시기 위해 우리의 삶에 깊이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반성문도 쓰게 하시고 때로는 회초리를 대시기도 합니다.
때로는 우리를 번쩍 들어 올려주시며 ‘잘 했다’ 칭찬해 주시기도 하시고, 때로는 우리의 어깨에 손을 얹으시고 다정히 보듬어 안아 주시기도 하십니다. 그 인생이 이만큼 온 것 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삶이 우리를 속이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삶은 우리를 속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야할 길로 정확하게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혹 여러분 중에 지금 칠흑 같은 고통의 터널을 통과하고 계신 분이 있으십니까?
그래서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계신가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우리의 삶은 정직하고 정확하게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성숙시키고 있는 중입니다
혹 자신이 저질러 놓은 엄청난 죄 때문에 하늘나라 백성이라는 자신의 정체성마저 흔들리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자신이 삶에게 속았다고 생각하세요?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더럽고 추악한 존재가 맞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너무나 쉽게 자신의 본 모습을 망각해 버리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아버지를 떠난 자들의 추함이 어느 정도인지를 우리에게 직접 경험케 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며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하지만, 그 지저분한 놀라움을 추스르고 더 이상 그러한 어두움과 더러움이 없는 새 몸과 새 나라를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역시 우리를 향한 정직한 삶의 기여입니다.
우리는 시간이라는 우리 인생을 겪으면서 영원한 집인 하늘나라로 한발 한발 전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기독교는 그 하늘의 집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성도들의 성도다움을 훈련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만들어진 이 땅의 무대 세트에 더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더러운 죄를 반복하는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며 왜 나에게는 구원자가 필요한 가를 배우는 것이고, 허무(虛無)를 향해 돌진하는 역사를 바라보며 왜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 쌓아놓은 물질과 공간은 불 타버릴 수밖에 없는 것인지를 배우는 것이고,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의 삶을 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이 결국 어떻게 그들의 최후를 맞는가를 바라보며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만이 가장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올바른 개혁주의 신앙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것들의 더러움이 폭로되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분의 뜻에 동의하는 자들의 행복이 드러나는 한시적인 역사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와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열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역사와 물질과 공간의 한시적 역할입니다.
그런데, 그 하늘나라를 가르치고 하늘의 소망을 공고히 하는 사명을 가진 교회가 병이나 고치고 사업의 흥왕이나 빌어주고 자녀들의 입신양명을 기원하는 무당집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린 시절 저녁 여섯시만 되면 어김없이 울려오는 애국가에 발길을 멈추고 가슴에 손을 얹으며 마음에도 없는 경의를 표하던 기억이 납니다.
예배당에 앉아 혹시 그런 습관적이며 형식적인 예배를 하고 있는 사람들은 없는지요?
우리는 과연 무엇을 믿는 것이며, 어디를 목적지로 삼아야 하는 것인지 정말 여러분은 아십니까?
오늘날의 기독교는 그저 어떤 힘 있는 존재의 힘을 빌려 자신의 소원이나 이루고 문제해결이나 하는 무속신앙의 모습과 섞여서 광란의 파티를 벌이고 있습니다.
어떤 신학자의 말처럼 한국의 기독교는 이제 비빔밥 종교가 되어 버렸습니다.
한국의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라 기복교가 되었다는 웃지 못할 농담이 정설이 되어버린 듯합니다.
그처럼 구복(求福)자가 어떤 큰 힘을 가진 존재에게 힘을 빌려 자신의 소원을 이루고, 자신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샤먼이라는 무당을 중재자로 세우고 그를 통해 치성을 드리는 것은 샤머니즘이라 불러야 옳습니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목사라는 샤먼을 중재자로 세우고 하나님이라는 그저 힘만 센 비인격적인 어떤 존재를 달래고 닦달해서 복이나 받아내려고 하는 그런 무당종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건 기독교가 아닙니다. 성경은 그와 정반대의 이야기를 합니다.
성경은 예수를 믿게 되면 첫 번째로 찾아오는 것이 ‘고난’이라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오늘날의 수많은 샤먼들은 자신의 세(勢)를 늘리고 과시하기 위해 그 ‘고난’ 이라는 기독교 신앙의 정수를 어줍지 않은 ‘복(福)’으로 포장을 해서 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그 청중이 듣기 싫은 소리는 안해야 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 교회의 강대상에서 ‘죄’와 ‘회개’와 ‘고난’과 ‘심판’ 그리고 ‘자기부인’과 ‘십자가의 삶’ 같은 주제들이 자취를 감추어 버렸습니다.
그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것들이 ‘만사형통’ ‘질병치유’ ‘신비한 체험’ 같은 것들입니다.
과학적 논리로 무장한 현대인들은 과학으로 증명이 되지 않는 신기한 현상 앞에서 맥을 못 추고 넘어갑니다.
물질주의, 실용주의, 역사 낙관주의, 성공주의, 소유 지향성, 맘모니즘에 젖은 현대인 들은 만사형통의 당근 앞에서 허리를 조아리고 연신 ‘주옵소서’를 외칩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스스로 왕이 되고 싶어 하는 아담의 자리가 얼마나 어리석은 자리인지를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의 장중(掌中)으로 회귀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를 지켜 보겠다는 타락한 인간들의 수많은 시도들과 열매들이 참으로 부질없음을 이 역사 속에서 올바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목적을 위해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이 자신의 추악함을 직시할 수 있도록 실수와 실패와 더러운 범죄도 때로 허락하시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인간은 절대 영원한 왕일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시기 위해 질병도 허락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과 은혜로 충만한 참 행복의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게 만드시기 위해 이 옛 하늘과 옛 땅이라는 물질과 공간에 정나미가 떨어지게도 만드십니다.
그러한 사건과 상황과 정황들 속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 만을 소망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숙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자기부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타락한 ‘자기’가 부인되기 시작하면, 지금까지 자기를 왕처럼 섬기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고 다른 이들을 밟아왔던 옛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 아닌 하나님과 다른 이웃들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불태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다 가신 그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가 진정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들에게 참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것을 이 땅에서 배우는 것이고 그렇게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십자가의 삶을 기꺼이 사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을 성경은 ‘천국’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그렇게 자신의 손해로 남의 유익을 챙기는 삶이 과연 만사형통이요 일사천리로 나타날까요?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이 치성(致誠)을 드려 강청(强請)하기만 하면 모든 소원을 들어주시는 것이 기독교라면, 그 탐욕스런 기도 속에서 과연 우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십자가의 삶을 달게 사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날 수가 있겠습니까?
부디 이 책을 통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목적지가 올바로 제시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008년 3월
캘리포니아에서
김성수 목사
목차
제1장 인간과 죄 (1)
제2장 인간과 죄 (2)
제3장 신령과 진리의 예배
제4장 세례
제5장 성경
제6장 헌금
제7장 선교
제8장 안식일과 주일
제9장 삼위일체
제10장 성령 (1)
제11장 성령 (2) 성령세례
제12장 성령 (3) 성령충만
제13장 성령 (4) 성령훼방
제14장 기적
제15장 신비주의와 기복주의
제16장 구약과 신약
제17장 은혜
제18장 믿음
제19장 캘빈주의 오대 강령으로 본 하나님의 사랑
제20장 성찬이란 무엇인가?
제21장 외식이란 무엇인가?
제22장 기도
제23장 주기도문 (1)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제24장 주기도문 (2)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제25장 주기도문 (3) 나라의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제26장 주기도문 (4)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제27장 주기도문 (5)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제28장 그리스도인들의 결혼관
제29장 그리스도인의 고난 (1) 고통 없는 지옥
제30장 그리스도인의 고난 (2) 피할 길은 있는가?
제31장 그리스도인의 고난 (3) 상처와 가계에 흐르는 저주?
제32장 죽음으로 나타나는 성도의 삶
제33장 교회 (1) 교회란 무엇인가?
제34장 교회 (2) 교회의 치리
제35장 교회 (3)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
제36장 교회 (4) 교회의 본무-1 교회, 거룩을 향하여 가는 자들
제37장 교회 (5) 교회의 본무-2 교회, 율법을 즐거워하는 자들
제38장 교회 (6) 교회의 본무-3 하나 되게 하심을 힘써 지키는 사람들
제39장 교회 (7) 교회와 목사
제40장 교회 (8) 교회, 오직 예수로만 위로를 삼는 자들
제41장 교회 (9) 교회와 복음
제42장 교회 (10) 사랑의 공동체
제43장 교회 (11) 온전함을 향하여 온전케 되어지는 교회
제44장 교회 (12) 교회와 직분
제45장 교회 (13) 교회! 무엇을 위해,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
제1장 인간과 죄 (1)
(죄는 바로 불순종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것에 대한 반역이요 거역을 우리는 죄요, 불순종이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를 단순히 수동적이고 정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능동적이요 적극적이며 활동 적이요 의도적인 것으로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심리학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인간은 원래 선하고 가능성이 있는데 좋은 본을 받지 못하고 나쁜 영향을 받아서 죄를 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래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 선한 것들을 잘 개발하고 훈련하면 인간은 얼마든지 선하게 바뀌게 된다는 것이 심리학입니다. 성경은 아이들이 잘 못하면 패라고 합니다. 패서 , 맞는 게 무서워서라도 못하게 만들라고 하십니다. 그 정도로 인간은 죄 중에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행복만을 위해, 자기 욕심만을 위해 살아가는 죄인들인데 정말 사람들이 행복해 하며 사나요? 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못 느끼고 사는지 아십니까? 역설적이지만 죄인들은 인생의 목표를 “행복”에다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
(엡2:1-3)
1 여러분도 전에는 범죄와 죄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2 그 때에 여러분은 범죄와 죄 가운데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살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을 따라 살았습니다.
3 우리도 전에는 그들 가운데서 모두 육신의 정욕대로 살고, 육신과 마음이 바라는 대로 행하여,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날 때로부터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
죄에 빠져 죽어있는 인간은 하나님께 불순종을 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2절에서 “너희가”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었다“고 에베소 교인들에게 질책을 합니다. 그러나 3절에서 곧 ”우리도“ 라고 이방인 뿐 아니라 유대인도 역시 그 죄에 빠진 사망의 상태에 있는 것임을 천명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인류는 불순종의 자녀들이라는 것입니다.
죄는 바로 불순종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것에 대한 반역이요 거역을 우리는 죄요, 불순종이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를 단순히 수동적이고 정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능동적이요 적극적이며 활동 적이요 의도적인 것으로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인간은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안 지을 수도 있는 중간 지대에 태어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죄를 안 짓고 선을 선택하면서 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자유 의지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아담이 가지고 있었던 그 자유 의지는 타락한 이후에 인간에게서 사라졌습니다. 인간은 죄를 지을 수도 안 지을 수도 있는 자유 의지를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하게 불순종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죄인들은 마귀의 손아래에서 눈이 멀어있는 상태입니다.
(고후4:3-4)
3 우리의 복음이 가려 있다고 하면, 그것은 멸망하는 자들에게 가려 있는 것입니다.
4 그들의 경우를 두고 말하면, 이 세상의 신이 그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서,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는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죄인은 악은 의도적으로 행할 수 있지만 선은 의도적으로 행할 수 없습니다. 우주에는 한 악한 정신이 있으며 인간은 그 악한 세력의 종입니다.
더더군다나 그 불순종은 어디서 배운 것이 아니라 “본질상” 그렇게 태어났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3절에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 말은 “날 때부터” 진노의 자녀였다는 것입니다.
(시51:5)
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우리는 날 때부터 죄 중에 출생합니다.
(롬7:18)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성경은 이렇게 모든 인간은 죄 중에 태어나서 선을 행할 수 없는 상태로 난다고 합니다.
(롬5:12)
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는데 그 후손들이 모조리 죄인으로 나더라는 것입니다. 13절을 보세요.
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바울은 모세의 율법이 있기 전에도 죄가 있었다고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 죄라는 것은 그 죄를 규정짓는 법이 있어야 죄로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빨간 불에는 서야 한다는 법이 없으면 빨간 불에 아무리 달려도 티켓을 먹을 이유가 없습니다.
분명 아담과 모세 사이에는 수천 년의 갭이 있습니다. 그럼 율법이 주어지기 전인 그 사이에는 “이것이 죄다“라는 율법이 없었으니 그 동안에 살았던 사람들은 죄를 안 지은 것이냐?
“아니다. 지었다“가 바울의 대답입니다. 바울은 아담 이후로 계속해서 사망이 왕 노릇하더라는 것으로 죄의 근거를 삼습니다. 사망은 죄의 삯입니다. 그런데 율법이 있기 전에도 계속 사람은 죽더라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죄를 짓지 않은 영아들이 죽습니다. 아기들은 자기의 의지를 발동해서 죄를 지을 기회가 없었던 자들인데도 죽는 것입니다. 죄의 삯으로.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에게는 날 때부터 타고나는 원죄가 있다는 것을 강하게 피력하는 것입니다.
(롬5:18-19)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성경은 이렇게 원죄를 정확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고전15:21-23)
21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아담은 전 인류의 머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 교회의 머리이신 것처럼 아담은 전 인류의 머리였습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모두 죄를 지은 것이고 예수님의 은혜로우신 사역으로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하나님 나라로 옮겨져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인 것입니다.
예전에 동양학을 공부하시던 우리 선배의 아버님께서 예배당에 처음 방문하셨을 때 한복에 도포를 입고 앉아서 원죄를 설교하던 목사님께 “거 개 똥 같은 소리 그만 좀 하쇼.”라고 하시고는 다시는 예배당에 발을 안 들여 놓으셨다는 소릴 들은 적이 있습니다. 믿어지지 않는 것이 당연하지요. 저도 그 때는 속으로 ”그 아저씨 말씀한번 잘 하신다” 했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인간에 대해서 , 아니 저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원죄에 관한 교리는 진리 중의 진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심리학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인간은 원래 선하고 가능성이 있는데 좋은 본을 받지 못하고 나쁜 영향을 받아서 죄를 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래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 선한 것들을 잘 개발하고 훈련하면 인간은 얼마든지 선하게 바뀌게 된다는 것이 심리학입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체벌이 없어졌습니다. 때리지 말고 왜 아이가 저렇게 되었는지 “놓고 분석해서 그 결과를 가지고 고쳐나가자“ 그럽니다. 그래서 아이들 다 망쳐 놓았습니다.
성경은 아이들이 잘 못하면 패라고 합니다. 패서 , 맞는 게 무서워서라도 못하게 만들라고 하십니다. 그 정도로 인간은 죄 중에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심리학의 최고봉이 누구입니까? 프로이드 아닙니까? 그는 왜 그렇게 불행하게 살다가 갔습니까? 불가지론자로서 왜 그는 행복하지 못하고 마약과 우울증에 시달리다 떠나야 했습니까? 하버드 대학의 니콜라스 교수가 쓰신 루이스 대 프로이드라는 책에 보면 프로이드의 영향을 받아 불가지론자로 살던 CS 루이스가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느낀 행복과 자유와 끝까지 인간적인 심리학을 의존했던 프로이드의 불행이 극명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환경과 여건을 잘 만들어 주고 좋은 모범을 보게 되면 인간이 정말 선하게 되겠습니까?
인류 역사상 가장 완벽한 환경이 어디였습니까? 에덴이었습니다. 인간은 거기서 타락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환경을 만들어 주면 인간이 타락을 안 할 수 있겠습니까?
불순종이라는 것은 자기에게 순종을 해야 하는 대상이 있다는 것을 못 견디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순종이라는 것은 결국 자기가 자기 인생의 왕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담이 최초에 저지른 죄 아닙니까? 그러나 인간은 애초에 만들어지기를 하나님과 관계하며 그 분 안에 있을 때만이 진정한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아무리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해도 참 만족이 없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예전에 우리 마음대로 우리가 하고 싶은 것들 다 하고 살 때하고 지금 하나님 만나고 하고 싶은 것 절제하면서 살 때하고 어느 때가 더 속 편하십니까? 지금이지요. 이게 진정한 자유입니다.
그게 그리스도인 됨의 증거이기도 하고요.
저는 지금 어느 누구보다도 행복합니다. 제 친구들이 저를 볼 때는 어울리지도 않는 목사가 되어 가지고 고생만 진탕한다고 합니다만 저는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고 그 영원한
나라에서 문명과 문화가 있는 나라에서 새로운 몸을 입고,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면서 하나님께 순종하며 영원히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지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만 생각하면 너무 행복해져서 혼자 씨익 웃는다고요.
해리 아이언 사이드 목사님이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에서 복음을 전할 때의 일입니다.
아이언 사이드 목사님께서 시장을 지나고 있는데 구세군 사역자들이 시장 어귀에서 한 집회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구세군 사역자들은 금방 그 아이언 사이드 목사님을 알아보고
즉석에서 설교를 부탁드렸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아이언 사이드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육체적인 부활을 통해서 어떻게 죄인들을 구원하시는지를 설명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설교를 듣고 있던 어떤 신사 한 분이 명함 뒤에다 무엇을 적어서 건네주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기독교를 반대하는 연설을 하고 다니던 무신론자요 불가지론 자였던 유명한 초기 사회주의자였습니다. 그 명함 뒤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었습니다. 선생 나는 당신과 다음과 같은 문제로 토론하겠다는 도전장을 냅니다. 다음 주일 오후4시 아카데미 과학관에서 “불가지론과 기독교의 대결”이라는 제목으로 공개 토론을 합시다. 비용은 내가 다 대겠습니다.“
아이언 사이드 목사님은 그 카드를 큰 소리로 회중들에게 읽어 주었답니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여러분, 나는 이 도전에 매우 관심이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다음 주일 3시에 이미 다른 집회에서 설교를 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그러나 조금 서두르면 네 시쯤이면 여기 과학관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필요하다면 그 집회에 다른 강사를 소개시켜주고 이 토론에 참여하겠습니다. 그러나 토론을 하기 전에 조건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주장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증인을 몇 명 데리고 왔으면 합니다. 당신은 당신이 주장하는 불가지론과 무신론을 믿고 성경과 기독교를 무시하기로 한 어떤 사람이 구제불능의 삶에서 변화되어 새 사람이 되어 그 삶에 만족하며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을 한 사람 데리고 오시오. 그리고 가난하고 곤고하고 품행이 바르지 못하여 사창가 같은 데서 정욕의 노예가 되어 부패한 삶을 살다가 결국 모든 걸 탕진하고 죄의 삶 때문에 파산하고 파멸된 여자, 그러나 어느 날 선생이 주장하는 불가지론과 무신론에 대한 강연을 듣고 “아, 하나님은 없는 거구나”하고 깨달아 그 지저분한 삶 속에서 건져내져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 여자를 한명 데리고 오시오. 만일 선생께서 불가지론이 해낼 수 있는 표본으로 이런 두 사람을 데리고 오실 수 있다면 저는 다음 주에 그런 사람 100명을 데리고 오겠습니다.
저는 제가 앞에서 묘사한대로 죄에 빠져 시궁창 같은 삶을 살다가 선생이 비웃고 있는 그 복음으로 말미암아 영광스럽게 구원받고 행복한 자유인들을 그 토론의 자리에 증인들로
세우겠습니다.“
그랬더니 어느 한 소녀가 외쳤습니다. ‘선생님, 저도 갈게요.’
구세군 사역자가 외쳤습니다. ‘우리 구세군에서 40명 보내겠습니다.’
여기저기서 그렇게 변화된 많은 사람들이 손을 들고 나섰습니다.
그 신사는 손사래를 치며 슬그머니 그 자리를 떠났다고 합니다.
진짜 행복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 속에서 오는 것입니다. 진짜 자유는 하나님이 이끄시는 삶을 사는 것이 진짜 자유입니다. 저는 매일 저녁마다 맥주 컵에다가 소주를 반병씩 부어서 한 잔 쭈욱 마시고 밥을 먹었던 사람입니다. 지금은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되었고 그럴 수도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짓을 못 한다고 해서 아무런 불만이 없습니다.
제가 항상 그렇게 술을 마실 수 있었던 때를 자유라 합니까? 그 것을 하지 않아도 되게 되어버린 지금이 자유입니까? 꼭 그렇게 술을 마셔야만 했던 때를 가리켜 죄의 종이었던 때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 죄로부터 자유를 얻었습니다. 어떻게요?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 자유더라는 것입니다. 그 진짜 자유를 알면 남들이 볼 때는 그렇게 보이지 않아도 정말 그 속에서 행복을 느끼며 만족하며 살 수 있습니다.
태평양을 건너 한국에서 미국까지 배를 타고 여행을 한다고 해보자고요. 아마 몇 달은 걸릴 거예요. 며칠은 배 안에서 경치도 구경하고 좋겠지만 일주일이 지나고 이 주일이 지나면 점점 답답해 질 것입니다. 걸어서 조금만 가면 배 고물 벽이 나옵니다. 사방 어디로 걸어도 더 이상 넘어가지 말아야 할 난간이 있습니다. 자유롭지 못하지요? 정말 자유로운 곳은 어디입니까? 아무리 가도 막힘이 없는 곳? 바다 속이지요. 그 때 만일 승객들이 자유롭고 싶어서 바다로 뛰어들어 헤엄져 가기로 한다면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 죽어요.
배 안에서 제한된 자유이지만 선장의 지시에 잘 따르고 배를 의지해서 목적지에 잘 도착하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배 위에서 저 아래 상어에게 쫓겨서 다리 한 짝 잘리고 팔 한쪽 너덜너덜하게 되어서 죽어 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야, 참 자유롭다, 진짜 재미있겠다.” 한다고요. 우리 마음대로 우리가 우리의 주인이 되어서 사는 순간 죄인은 가망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내 마음의 주인으로 삼아 그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며 살아가야 진정 평안과 안식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제 눈에는 전부 상어한테 물어 뜯겨서 너덜너덜해진 모습으로 보이는데 그 너덜너덜해진 모습으로 오히려 저한테 자랑들을 합니다. “너 이런 거 할 줄 알아? 너 이런 거 있어?”
그렇게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로 태어나는 죄인들은 육체의 욕심을 따라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게 됩니다.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먼저 성경에서는 육체라는 단어를 여러 가지로 사용합니다. 3절에도 육체라는 말이 두 번이나 나오는데 두 단어가 각기 나타내는 바가 다릅니다.
첫 번째로 성경에서 육체라고 할 때는 “죄의 상태 안에 있는 인간 본성,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우리가 “육”하면 보통 flesh고기만을 떠올립니다. 성경이 말하는 “육” “사륵스”는 단순히 고깃덩어리인 육체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말로 하면 “바싸르”입니다.‘ 바싸르’는 ‘mankind’를 이야기합니다. 사람, 인류를 이야기하지요 , 그러니까 살아서 꿈틀거리는데 필요한 모든 인격, 성품을 포함한, 살아있는 존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히브리말 ‘네페쉬’하고 비슷한 말이겠지요. “존재”는 존재인데 타락 이후 죄악 적인 본성의 충동을 받는 존재를 “육” “육체”라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갈5:17)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니까 성령의 능력과 감동과 역사를 거스르는 인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성경이 “육체”라고 할 때는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의 몸과 본성의 동물적 지체, 즉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의 선정적이고 감성적인 지체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3절을 다시 보시면 육체의 욕심이라는 말과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은 동격으로 나옵니다.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그러므로 보편적인 죄 된 육체는 몸이 하는 일과 마음이 원하는 것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육체의 욕심, 즉 죄인의 몸과 마음이 원하는 것으로 인해 죄(하마르티아)와 허물(파랍토마)이 우리 삶에 나오게 되어 우리는 죽은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원어로 보면 죄들, 허물들이라고 복수로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그것은 몸과 마음의 욕심으로 말미암아 겉으로 나타나게 되는 모든 외적 증상들, 외적인 표징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육체의 욕심에서 그 욕심이라고 번역된 “에피뛰마아”도 복수입니다.
성경에서 “에피뛰미아”가 복수로 쓰일 때는 “금지되고 해서는 안 되는 어떤 것을 향한 강하고 긴박한 탐욕”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욕심, 탐심, 강한 소원이라고 번역이 된 “에피뛰미아”가 어디서도 쓰이는가 하면 누가복음 12장25절에서도 동일하게 쓰입니다.
(눅22:25)
15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그러니까 인간의 안에서 나오는 강한 소원이 다 나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욕구인 배가 고플 때 밥을 원하는 것이나, 졸릴 때 잠을 자고 싶은 것이라든가 목이 마를 때 물을 마시고 싶은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배고플 때 무언가로 배를 채우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즐거움입니다. 졸릴 때 푹 쉴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복입니다.
이렇게 자연스러운 육체의 욕구와 비교해서 죄가 되는 육체의 욕구는 무엇입니까? 바로 과욕!
타락한 인간들은 그 자연스러운 욕구가 절제가 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끊임없이 쏟아 붓고 싶은 것이 타락한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래서 그 욕구는 죄인들 안에서 나오게 될 때는 모두 죄가 되는 것입니다.
(롬7:7)
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여기서 탐심이라고 번역을 한 “에피 미아”는 예수님께서 간절히 원하셨던 그 원하심과 동일한 단어입니다. 예수님께는 아주 당연한 자연스러운 욕구가 인간들에게는 탐심이 되고 죄가 된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탐심이 죄라고 율법으로 말씀해 주시지 않으셨다면 그것들은 자기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라서 그것이 죄인 줄을 알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쾌락과 즐거움이 죄입니까? 쾌락과 즐거움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절제되지 못하는 쾌락과 즐거움이 죄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왜 창조 하셨습니까? 뭔가 시키실 일이 있으셔서 창조하셨나요?
사탄과 싸우는데 군사가 더 필요해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까? 왜 창조하셨죠?
복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어 놓고 보시기에 참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최상의 것들로 선물을 하시고 그것이 기쁘셨던 것이었습니다.
(엡1:3-5)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어떨 때 부모는 제일 기쁘죠? 자식이 껌 팔아서 돈 벌어오면 기쁜가요? 자식새끼 입으로 먹는 거 들어가는 거 볼 때, 제일 기쁩니다. 부모가 해 준 것을 자식이 기쁘게 잘 사용하고 누릴 때 부모는 제일 기쁜 것입니다.
작곡가가 왜 작곡을 합니까? 안 하면 누가 때립니까? 화가가 왜 팔리지도 않는 그림을 열심히 그립니까? 혹 어떤 사람이 많은 돈을 준다고 해도 자기 작품을 이해하지 못할 때 왜 가차 없이 거절을 합니까? 좋아서, 기뻐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기쁘신 뜻을 따라 우리 인간을 만들어 놓고 복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하나님 안에서 마음껏 즐기고 행복해 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그것이 지나쳐 하나님을 잊고 자기의 쾌락과 행복과 즐거움만을 좇다가 다 망했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절제를 하지 못합니다. 언제나 지나친 욕심을 내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배고픔을 달래고 목마름을 달래고 잠을 자는데 있어서도 절제를 하지 못합니다. 지나친 욕심을 부린다는 것입니다. 먹는 것은 인간이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인데 그 먹는 것이 인간을 끌고 가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먹고살기 위해 인생을 겁니다. 다른 이들을 밟고 올라섭니다. 인간은 쾌락을 위해 범죄를 저지릅니다. 청소년 범죄의 90% 이상이 유흥비 마련을 위한 것입니다. 쾌락이 인간을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마약은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환자들에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것이 사람을 끌고 갑니다. 지나친 식욕, 탐욕, 수면 욕 모두 죄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에서 나오는 강한 욕구는 무엇이 있습니까? 비전, 야망, 꿈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야망은 사람을 충동질하고 지배합니다. 그런데 교회라는 간판을 단 곳에서 목사들이 꿈과 비전과 야망을 전합니다. 거기에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모여 광분합니다. 죄 성을 자극해서 사람을 모으는 것입니다.
인간은 명예나 평판을 얻기 위해서 질투, 시기, 악의, 교만, 혐오, 분노를 냅니다. 훌륭하다고 하는 사람들의 전기문이나 자서전을 읽어보면 여러분은 금방 그들이 무엇을 위해 살다 갔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야망과 비전과 꿈을 이루기 위해 인생을 바칩니다.
그리고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을 즐겁게 해 줄 새로운 것을 쫓아갑니다.
(행17:21)
21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바울이 아테네에 갔을 때 느낀 것입니다. 그 곳 사람들은 무엇이든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으로만 시간을 쓰더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것을 얻어 남들에게 자랑하고픈 인간의 욕심에서 나온 것이라는 말입니다.
지식에 대한 욕심은 어떻습니까? 문학과 예술과 음악과 연극과 철학 , 왜 사람들은 그렇게 지식에 대한 욕심이 많습니까? 상대적인 우월감을 누리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죄인들은 자기를 위해, 왕이신 자기 자신을 위해 절제하지 못하고 치달리고 있습니다.
그것을 성경은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죄의 근본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고 그 분께 불순종하며 자기 인생의 왕좌에 자기 자신을 앉히기를 원했던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알콜 중독이나 마약 중독이나 커피 중독이나 일중독이나 도박 중독이나 인터넷 중독이나 쇼핑 중독이나 골프 중독이나 담배 중독이나 다를 바가 하나도 없는 똑같은 죄인 것입니다.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마약 중독하고 커피 중독이 뭐가 다르죠? 똑같이 자기만을 즐겁게 하기 위한 죄입니다.
우리는 사회법 상 “죄”라고 정해 놓은 것만 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서 그런 것을 하지 않는 자기는 꽤 괜찮은 사람으로 착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똑같이 우리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바를 탐욕스럽게 행하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자기 행복만을 위해, 자기 욕심만을 위해 살아가는 죄인들인데 정말 사람들이 행복해 하며 사나요? 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못 느끼고 사는지 아십니까?
역설적이지만 죄인들은 인생의 목표를 “행복”에다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결혼을 하고 가정을 갖게 되면 그 가정의 최고 목표를 “행복”으로 잡습니다.
그래서 서로에게 그 행복을 위해 노력해 주기를 요구합니다. 그러다가 그 행복을 깨는 행위를 하는 것을 보면 못 참습니다. 서로 속으로 “저 인간이 조금만 노력을 해 주면 우리 가정은 행복할 텐데” 하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목표한 행복이 모자라면 인간은 불행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인간은 너무나 간절하게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불행하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가정의 목표는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 명령에 대한 “책임”이며 “순종”입니다. 우리의 삶이 이 땅에서의 행복이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것이듯이 가정의 목표 역시 “순종”과 “책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책임을 지는 법을 가정을 통해 배우는 것입니다.
남편은 예수님의 역할을 하고 아내는 교회의 역할을 하고 아이들은 그로 말미암은 언약의 후손의 역할을 하며 이 땅에서 천국을 배우고 오라고 우리에게 내려진 명령이며 거기에 반응하는 것을 우리는 “책임”이라고 하고 “순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못난 남편이라 할지라도, “저 사람 때문에 내가 불행해”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아무리 남편이 커다란 실수를 했다고 해도
“에그, 이 병 신 아, 그럼 그렇지 네가 한 가지라도 잘하는 게 뭐가 있냐?” 그러면 여러분은 실패하는 것입니다.
2000년 전 이스라엘이 범한 잘못이 뭡니까? 신랑으로 온 예수님이 바보같이 맨 날 얻어터지고 조롱당하고 심지어 자기들을 놔두고 죽어버린 것입니다. 그 예수님을 향해서 이스라엘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저런 무능한 인간, 저게 무슨 신랑이며 메시야냐?
이스라엘은 그래서 망한 것입니다. 아무리 무능한 남편이라 해도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역할로 가정에 주셨으면 거기에 따르라는 것입니다. 속이 터져도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내는 순종을 배우고, 아량을 배우고, 사랑을 배우며, 인내를 배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천생 연분을 만나서 어떤 면에서든지 완벽한 행복한 가정 이루어서 천년만년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을 통해서 천국을 배우고 천국 백성의 자질을 키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역할을 맡은 남편은 아내를 위해 언제든지 십자가에 달릴 준비를 하는 사람입니다.
옛날 페르시아 왕조실록을 보면 고레스 왕 때 실제로 있었던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장군의 아내가 반역죄로 사형 언도를 받았습니다. 뒤늦게 전쟁터에서 그 전갈을 받은 장군은 한달음에 달려 왕의 처소로 들어갔습니다. 그 장군은 고레스 왕에게 “제 아내 대신 제가 대신 죽게 해달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고레스 왕이 그 간청을 듣고 “너희들의 사랑은 죽음도 끊을 수 없겠구나.”하고 둘 다 놓아주었다고 합니다. 손을 잡고 나가면서 남편이 아내에게 “여보, 아까 왕께서 우리를 용서하실 때 우리를 바라보시는 그 눈을 보았소? 얼마나 자비하신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았는지 모르오.” 아내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한 번도 왕을 쳐다보지 않았어요, 저는 오직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는 단 한 사람만 쳐다보고 있었어요.”
아, 리마리오도 아니고 굉장히 느끼하지요? 그렇지만 부럽죠? 그런 책임과 순종을 우리는 가정을 통해 배우는 것입니다.
멋진 이야기입니다. 고레스 왕 때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그런데 그와는 비교할 수 없는 남편이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망치를 들어 자기 몸에 못을 박는 원수인 아내를 위해 실제로 죽어주신 남편이 바로 예수 님 아닙니까? 남편들은 그 예수님의 역할을 가정에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 아내가 되어서 남편을 행복하게 못 해줘? 난 정말 불행한 인간이야” 이러지 마시고 그럴 때 예수의 역할을 잘 해내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이 가정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우리의 행복만을 위해서 사는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책임을 다하고 우리의 욕심을 위해 탐욕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절제를 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그러나 전에는 우리도 똑같이 육체의 욕심을 따라 마음의 욕심을 따라 세상의 풍속을 좇고 불 순종하던 자들이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네 번째로 하나님은 그런 상태에 있는 자들을 어떻게 보시는가를 공부하고 마치겠습니다. 본문 3절 보시면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진노를 발하십니다.
(엡2:3)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사도는 3절에서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은 그렇게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른 이들과 같이”라는 말은 우리를 제외한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이야기합니다. 전에는 우리도 그들과 똑같이 진노의 자녀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타락을 했을 때 하나님은 진노하셨습니다. 그래서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화염검으로 막아버리셨습니다. 노아의 홍수 사건을 통해, 바벨탑 사건을 통해, 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이스라엘을 향한 징벌들을 보면 하나님은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세례 요한은 유대인들에게 “회개하라, 그래서 임박한 진노를 피해라“ 하고 외쳤습니다.
(요3:36)
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롬1:18)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엡5:6)
6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이러한 하나님의 죄를 향한 진노는 지옥에서 최종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지옥에서 죄인들이 경험할 진노는 지금도 연장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불순종의 아들들은 지금 그 하나님의 불같은 진노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의 이기적인 욕심을 따라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결코 만족하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그 욕심을 따라 불안한 삶을 살다가 영원히 지옥에서 그 진노의 불에 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구원받기 전의 상태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위대하신 능력이 우리를 그 처참한 죄의 구덩이 속에서 건져내신 것입니다. 아들을 죽이시고 다시 살리셔서 영광스러운 하늘나라 보좌에 앉히신 그 능력이 우리를 건져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받기 전의 우리의 처지를 이렇게 늘 확인하고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잊지 말게 하시기 위해 구원을 받은 사람들 삶에도 아직 이러한 불순종과 탐욕을 가지고 있는 “육체”가 새로운 영과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여전히 옛사람, 옛 성품이라고 표현되는 “육체”가 남아 있습니다. 그 “육체”에 새 영이 들어와 있는 것을 그리스도인이라 합니다.
(롬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요일1:8)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이렇게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육체도 가지고 있고 새로운 영도 소유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는 늘 투쟁이 있는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뿅 하고 완전한 거룩한 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늘 투쟁하며 괴로워하며 한발 한발 가는 것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육은 절대 선한 것을 하나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영은 절대 죄를 짓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삶은 늘 투쟁의 연속입니다. 왜 그렇게 놔두십니까? 너희들이 어떤 인간이었는지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죄와 싸워서 이기셨으니 예수님의 몸통인 너희들도 싸워서 이기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삶에 동참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전투에 우리도 참가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이미 다 이겨 놓은 싸움에 우리를 불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싸워야 하는 겁니다. 얼마나 더 이야기를 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이처럼 험악하고 불가능한 자리에서 부르신 것입니다. 그 위대한 능력을 동원하셔서 우리를 건지신 것입니다. 정말 그 사실에 감격하십니까? 그러면 그 감격 안에다가 다른 작은 불평, 불만, 고통은 다 녹여 버리세요. 삶이 힘겹고 어려울 때마다 그 감격을 떠올리세요. 그리고 인내 하십시오.
제2장 인간과 죄 (2)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과 어떤 특정한 유사점이 있다는 것을 본문에서 추출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구제 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인간은 타락한 이후에도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하고 있으며 타락한 이후에 그 형상은 완전히 부패되어 거의 소멸된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죄는 행실뿐 아니라 생각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반역하고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는 모든 행위들과 마음에서 나오는 모든 것들을 우리는 “죄의 본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
(엡2:1-3)
1 여러분도 전에는 범죄와 죄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2 그 때에 여러분은 범죄와 죄 가운데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살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을 따라 살았습니다.
3 우리도 전에는 그들 가운데서 모두 육신의 정욕대로 살고, 육신과 마음이 바라는 대로 행하여,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날 때로부터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인간과 죄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인간과 죄에 대해 전체적인 요약을 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유사 이래로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 하고 관심을 갖고 연구를 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사람과 그 사람의 인생에 관한 것들입니다. 계속 발전해 가고 있는 철학은 바로 사람과 인생에 대한 학문입니다.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직도 인간과 인생에 대한 정의가 인간이 만족할 만큼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파스칼의 팡세에 보면
‘인간이란 얼마나 해괴하고 얼마나 진기한가?
얼마나 괴물 같고, 얼마나 혼돈스러우며
얼마나 모순되고 얼마나 신통한가?
만물의 심판자이자 지상의 힘없는 벌레
진리의 관리자이자 불확실과 오류의 무더기
우주의 영광이자 수치‘
라고 기록을 해 놓고 있습니다. 당대의 소피스트들에게 외쳤던 델피 신전에 새겨져 있는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말“너 자신을 알라” 라는 말만 보아도 인간이 얼마나 인간에 대해 모르면서 인생에 대해 아는 척들을 해왔는지 우리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은 인간과 인생에 대해 속수무책입니다.
수많은 천재 철학자들이 인간과 인생에 대해 정의를 내려놓고 사라졌습니다.
수많은 작가들과 예술가들이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대 질문을 가지고 인간과 인생에 대해 연구하고 파고들어 많은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사람들은 “인간과 인생에 대한 바른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관념론 적 인간론은 말하기를 인간은 근본적으로 정신이며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 물질적 육체는 인간의 근본적 본성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생소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플라톤에 의하면 사람에게 있어서 참으로 존재하는 것은 사람의 이성(지성)일 뿐이며 이 정신이 질료(물질,matter)를 취하게 되는데 이 육체는 정신이 존재하는데 방해만 될 뿐이며 이 육체를 벗어나야만 인간은 더 고급한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영혼의 불멸성은 가르치지만 인간의 육체적 부활은 부인합니다.
반대로 물질주의적 인간론은 인간은 오직 물질적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외의 정신적 감정적 영적 삶이란 인간의 물질적 구성의 부산물들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인간은 단순히 자연의 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할 일입니다. 그리고 창조주의 존재도 부인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도덕적 책임의식이니 윤리적 지상명제니 하는 말은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생뚱맞은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사회구조의 한 부분일 뿐입니다. 악이란 사회 구조로부터 발생하고 사회구조의 변경을 통하여 악은 제거될 수 있다고 철저히 믿습니다.
개인은 자기가 행하는 악에 대하여 일차적인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대신 사회가 집니다.
마르크스주의에 있어서 인간이란 한 인격적 개인으로서 중요성을 가지지 못합니다. 오직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만 그 가치가 인정됩니다. 이처럼 마르크스주의의 목표는 개인 구원이 아니라 완전한 사회의 미래적 성취에 있습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사회가 오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계층 간의 갈등들은 제거되고 해소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미래 사회를 달성하기 위해서 폭력을 수반하는 혁명적 행동이 필요할 수도 있다고 그들은 말합니다.
또 다른 물질주의적 인간관은 스키너를 중심으로 한 인간관입니다. 그는 (beyond Freedom and Dignity)라는 책에서 인간은 자기 행위에 대해서 책임 질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인간 행위를 결정짓는 요소는 인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살고 있는 환경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을 완강하게 부인합니다.
인간 안에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마음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의 행동은 전적으로 환경에 의해서 결정이 되고 그 환경이 완전하게 인간에게 알려진다면 인간의 행위는 완전하게 예측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주장을 종합해보면 한쪽은 오직 인간의 이성, 정신, 영적인 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고
다른 한 쪽은 인간의 육체적인 측면만을 절대화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칸트 이후로 존재론보다는 인식론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궁극적인 실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1)인간의 지식이란 무엇인가?(2)그 지식의 원천과 기초는 무엇인가? 같은 인간 지식의 본성, 기원, 그리고 한계 등에 대한 질문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더더군다나 철학과 신학과 문학에 실존주의가 강하게 부상함으로써 인간의 본체(essence)보다는 실존(existence)이 더 중요하다는 사상이 팽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한 인간이 다른 사람들과 공통되는 점들, 인간의 본질과 본체에 관해서는 관심이 줄어들고 한 인간 실존에게 독특하고 유일한 것이 무엇인가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인본주의의 발흥이었습니다.
세계2차 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모든 인간은 근본적으로 선하고 인간들이 지니고 있는 가치들이 중요하다고 ”의심 없이 믿어 왔었습니다. 그런데 두 번에 걸친 잔혹한 전쟁으로 말미암아 그 전체가 뿌리까지 흔들렸고 거기에서 허무주의까지 발흥을 하게 되어서 인간과 인생에 정의를 내려 보려 했던 사람들은 더욱더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그리고 과학이 발달하고 생물학, 심리학, 사회학에서의 새로운 발전은 인간으로부터 인간성을 철저히 앗아가고 있고 인공수정, 시험관 아기, 낙태, 유전공학 같은 것들이 자행되어지고 발달하면서 인간에 대한 존엄성은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성경은 인간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를 공부하겠습니다. 성경이 인간에 관해 가르치고 있는 것은 “인간은 하나님과 피할 수 없는 관계성 속에 놓여있는 존재라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세상 철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다양한 인간론과 인생론은 덮어두고 성경이 말씀하고 계시는 인간론과 죄 론을 다루면서 인간은 누구이며 인간은 왜 이러한 인생을 살게 되었으며 그 해결책은 무엇인지에 대해, 즉 우리가 궁금해 하는 인생에 대해서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지는 인간에 관한 견해는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다”라는 것으로 시작을 합니다. 인간은 자율적으로 독립적으로 탄생되었거나 존재하지 않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창1:1)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1:27)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리고 그 인간을 포함한 모든 만물은 다 하나님께 의존해 있고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느9:6)
6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
(행17:25-28)
25 또 하나님은, 무슨 부족한 것이라도 있어서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26 그분은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셔서, 온 땅 위에 살게 하시며, 그들이 사는 시대와 거주의 경계를 정하셨습니다.
27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28 여러분의 시인 가운데 몇몇도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다' 하고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에게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숨도 쉴 수 없는 그런 의존적 존재임을 천명합니다. 이렇게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가 된 피조물인데 어떻게 창조가 되었는지 성경 창세기부터 차근차근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고 합니다. 다른 모든 피조물은 “각기 그 종류대로” 창조를 하셨죠. 그런데 인간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으셨습니다.
(창1:26-27)
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여기서 형상이라고 번역된 “첼램”은 “자르다” “베다”라는 동사에서 유래된 단어입니다.
그리고 모양이라고 번역된 “데무쓰”는 “무엇 무엇과 비슷하다“라는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르고 베고 깎아서 하나님과 비슷하게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과 어떤 특정한 유사점이 있다는 것을 본문에서 추출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으로 가보세요.
(창1:31)
31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을 다 만드시고 심히 좋아하셨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어진 인간이 처음에는 순결했으며 죄가 없었으며 거룩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투영하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을 대표하는 존재입니다. 미국에 있는 한국 대사가 한국을 대표하듯이 이 세상에 있는 인간은 하나님을 대표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김일성 동상이 북한 곳곳에 세워져 있는데 사람들은 그 김일성 동상을 보면서 그 김일성의 권위를 생각하게 되고 우리의 통치자는 바로 저 김일성 어버이 동무라는 것을 기억하고 염두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사람은 이 땅에서 그런 역할을 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주어진 그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구제 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루이스 벌콥 교수님이나 화란의 신학자이신 GC 벌카워 목사님이나 존 칼빈은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동일한 설명을 하십니다.
인간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형상이란
좁은 의미와 넓은 의미의 형상으로 나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넓고 포괄적인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과 그 존재가 맺고 있는 다양한 관계 속에서 인간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을 행하도록 하게하며 하나님의 소명에 반응해서 살아낼 수 있는 모든 은사들과 재능들이 총체적으로 인간에게 부여된 상태를 넓은 의미로서의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인간의 이성적, 합리적 능력들은 하나님의 이성을 방영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도덕적 감수성도 하나님의 도덕적 성품을 반영시키고 있습니다.
인간이 사회적인 교제를 할 수 있는 것도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교제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결정을 하고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모든 것을 자기의 뜻에 따라 결정하시는 하나님의 결정능력을 조금이나마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미적 감각 역시 저 절묘하고 웅대한 자연의 경관을 만들어 내신 하나님의 미적 감각을 닮은 것이고요. 우리가 노래를 할 수 있는 재는 역시 노래를 부르시며 즐거워하시는 하나님을 닮은 덕택입니다.
그러면 좁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입니까? 협의의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창조될 때 소유하게 된 영적인 특성들, 다시 말해 참된 지식, 의로움, 거룩함을 이야기 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기능적 측면으로의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데요.
(골3:10)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엡4:24)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우리가 새 사람을 입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되면 얻게 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잃어버린 참된 지식과 의와 거룩함입니다. 이렇게 타락하기 전의 인간은 넓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과 좁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 모두를 완벽하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을 닮아 있었습니다.
조금 쉽게 설명을 해드리면 구조적 의미(넓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과 기능적 의미(좁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은 이런 것입니다.
독수리가 날아다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독수리의 날개가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지요.
“난다”라는 결과가 바로 좁은 의미의 기능적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이고 “날기”위해 필요한 구조적인 것을 우리는 넓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왔습니다. 그 죄가 들어온 이후 인간에게 주어져 있던 하나님의 형상은 어떻게 된 것일까요? 완전히 상실되었나요?
(창9:6)
6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니, 누구든지 사람을 죽인 자는 죽임을 당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노아의 홍수가 끝나고 이제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는 일은 없을 것이며 오히려 인류를 구속하시기 위한 자기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땅을 보존시키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을 다시 하시고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이유를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타락한 이후의 사람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신약에서도 한번 찾아볼까요?
(약3:9)
8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9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사람들이 이 세치 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지음을 받았다“는 말 ”게고노타스“는 ”만들어지다“라는 말인데 ”기노마이“의 완료 분사 형입니다. 헬라어에서 완료 시제는 ”계속되는 결과를 가져오는 과거의 행동”을 묘사할 때 사용됩니다. 그러니까 본문이 말하는 사람은 “과거의 언젠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며 그리고 아직도 그 형상을 소유하고 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결론적으로 인간은 타락한 이후에도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하고 있으며 타락한 이후에 그 형상은 완전히 부패되어 거의 소멸된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부분이 계속 존재하며 어떤 부분이 부패되거나 상실 된 것일까요?
타락을 한 인간은 넓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은 계속해서 소유하고 있지만 좁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 그러니까 기능적 측면의 하나님의 형상은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바꿔 말하면 타락한 인간들은 아직도 하나님이 그들에게 부여하신 재능과 능력들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재능과 능력들을 죄악의 불순종의 방법들로 사용이 되게 되어버렸습니다.
원래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의뢰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게끔 주어진 재능과 능력들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불순종하는 데 쓰이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주신 재능과 능력과 은사에서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어 있던 의와 거룩과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은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타락하지 않고 본래적 형상을 가지고 있었을 때 인간은 어떤 상태였습니까?
인간은 하나님을 경배하며 그분을 섬기고, 서로를 사랑하며 섬기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맡기셨던 피조 세계를 지배하고 돌보았습니다.
헤르만 바빙크는 그 상태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아담은 분명 최초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 그러나 아직”완성된 결정체“는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성장과 연단의 필요성을 갖고 있는 존재였다. 하나님은 인간이 불순종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상황에 직면하였을 때 기꺼이 그리고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가를 확인하고 싶으셨다. 그래서 주어진 것이 선악과 였다.” 이렇게 인간은 하나님과 인간서로와 피조 세계와 바른 관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able to sin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시험에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변질된 형상을 갖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광의의 하나님의 형상, 즉 인간의 재능이나 역량, 은사들은 그대로 유지되었다고 했지요? 그런데 그 하나님의 형상들이 다른 방향으로 쓰이게 된 것입니다.
이제 과녁을 벗어나 버렸고 엉뚱한 방향으로 활을 쏘기 시작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을 향해 순종과 경배를 드려야 했던 인간이 우상을 숭배하게 되었습니다.
(롬1:22-23)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옛날 사람들은 나무와 돌로 우상을 만든 반면, 현대인들은 그들이 경배할 그 무엇인가를 찾아서 그 옛날보다 훨씬 미묘한 형태로 우상들을 만들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 돈, 명예, 자식, 쾌락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인간은 하나님을 찬양하던 힘으로 자기 자신을 찬양하는데 씁니다.
둘째 하나님의 형상의 변질은 인간과의 관계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교제를 통해 타인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데 사용하지 못하고 이제 자기 자신만을 위해 다른 이들을 이용하고 밟는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 되었습니다. 남이 잘되면 배가 아픈 치졸한 인간들이 되었습니다.
세 번째로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 속에서 땅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땅을 착취하게 되었습니다. 왕으로서 피조 세계를 보살피고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유익을 위해 피조 세계를 죽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죄는 어떻게 인간에게 들어와서 인간을 타락시켰습니까?
타락한 천사가 내려와서 인간을 미혹했습니다. 천사도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골1:16)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그리고 천사들은 아마 인간이 창조되기 전에 창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욥38:4-7)
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5 누가 그 도량을 정하였었는지, 누가 그 준승을 그 위에 띄웠었는지 네가 아느냐
6 그 주초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이 돌은 누가 놓았었느냐
7 그 때에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 하였었느니라
7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번역이 된 부분이 천사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그 천사들의 우두머리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타락을 했습니다.
(유1:6)
6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어떻게 그 천사들이 타락을 하게 되었는지는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천사가 내려와서 화와를 유혹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 타락한 천사인 마귀는 뱀을 이용해서 하와를 유혹했습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깨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세우시고 하와를 돕는 배필로 주셨고 그 아래 피조 물들을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피조물 중 하나인 뱀이 와서 화와를 유혹합니다. 하와는 아담을 유혹하고 아담은 하나님을 거역합니다. 어떤 과정으로 유혹을 하는지 보세요.
마귀는 먼저 인간의 마음에 의심을 불러일으킵니다.
(창3:1)
1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금방 하와에게 의심이 들어옵니다. 그리고 이내 분노를 일으킵니다. 하와의 대답을 보세요.
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만지지도 말라고 하신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와는 만지지도 말라고 했다고 분노에 찬 대답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정녕 죽으리라“ 고 말씀하셨음에도 하와는 ”죽을까 하노라“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하기 시작합니다. 계속해서 4절을 보세요.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뱀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tm려 “너희가 정녕 죽지 않으리라” 하니까 하와가 하나님을 불신하고 마귀를 믿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곧 마귀가 교만을 불러 일으켜 줍니다.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교만이 들어오자 하와는 그 나무의 열매를 보았습니다. 탐심을 갖고 보는 열매는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게 그녀의 욕망을 자극했습니다. 무서운 불순종으로 끝나버렸습니다.
사탄이 우리를 미혹하는 경로도 이와 너무 흡사하지 않습니까?
그 죄의 결과로 인간들은 수치심으로 압도되었습니다.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그 전에는 그들이 벌거벗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창2:25)
25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이제 인간들은 수치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디를 가렸을까요? 귀를 가렸을까요? 코를 가렸을까요? 나중에 하나님께서 치마를 해 입히신 것을 보면 그들은 생식기를 부끄러워하게 되었습니다. 왜 유독 생식기를 가리게 되었을까요? 생식기관은 생명이 잉태되는 인간 삶의 근본적인 샘과 원천입니다. 이제 죄로 인해 인간의 근본적인 원천이요 샘이 완전히 오염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총체적 타락입니다. 그 죄의 결과 여전히 우리는 그 곳을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치감 다음에 오는 결과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창3:10)
10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그리고 인간들은 곧 책임 회피를 했습니다. 아담은 하와가 먹으라고 했다고 핑계를 댔습니다. 하와는 뱀이 먹으라고 했다고 핑계를 댔습니다. 아담은 에덴을 지켜야 하는 왕이요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는 하와의 죄를 어깨에 짊어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하와에게 죄를 뒤집어씌웁니다.
나중에 신약에서 또 다른 동산지기가 오셔서 그 아담의 실패를 회복하십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왔을 때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그 뒤에 서있으니까 마리아가 동산지기인 줄 알았다고 하는 대목이 나오지요? 일부러 동산 지기라는 말을 갖다 넣은 것은 에덴 동산지기가 실패한 제사장의 역할을 예수님께서 회복하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죽어야할 마리아를 위해 대신 죽어주신 주님의 모습을 우리는 그 동산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아담은 그렇게 성공을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곧 원시 복음이라고 하는 창세기 3장 15절의 말씀을 주십니다.
(창3:15)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한편이 된 뱀과 여자를 원수가 되게 하시겠다고 하신 것은 인간은 하나님 편으로 만드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여자에게도 저주를 하십니다.
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여기서 여자가 남자를 사모하게 된다는 말은 “테슈카”입니다. 그 말은 “지배하다”라는 말입니다. 4장7절에 똑같은 단어가 나옵니다.
(창4:7)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죄가 너를 지배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 이런 말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이제 다투지 않고는 안 되는 사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여자는 남자를 지배하려고 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남자는 여자를 다스리려 합니다. 늘 부딪치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또 자연이 저주를 받습니다.
(창3:17)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이제 인간은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겨우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어버렸고 땅은 수고한 만큼의 결실을 주지 않고 가시와 엉겅퀴를 내게 되어 버렸습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큰 저주는 이제 하나님과의 영적 교류가 끊어져 버린 것입니다.
(창3:22)
22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하나님께서 인간이 이제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고 하십니다. 언뜻 보면 좋은 말 같습니다. 인간이 정말 사탄이 약속한 대로 하나님과 같이 된 것입니까?
거기서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는 말씀은 인간은 원래 하나님이 옳다고 하는 것을 옳다고 하고 하나님이 그르다고 하는 것을 그르다고 순종하면서 하나님 안에서 행복과 기쁨을 누리며 살게 되어있었는데 이제 인간이 하나님처럼 스스로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옳다고 결정을 내라고 스스로가 그르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르다고 판단을 하는 “이제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자들이 되어버렸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끝까지 긍휼을 잊지 않으십니다. 인간이 만약 그 죄에 찢긴 몸으로 생명나무 과실을 먹었다면 그 저주의 모습으로 영원히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얼른 그들을 쫓아내시고 그 생명나무를 막아버리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구원을 받아 영광스러운 새 몸을 얻을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의 결과로 죄는 보편화 되어버렸습니다. 바로 아담의 아들 가인이 아벨을 때려 죽입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이 일어났습니다. 그 죄는 점점 퍼져나갔고 노아의 홍수 때에 하나님은 이미 그 죄가 세상에 관영함을 보셨습니다.
(창6:5)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죄의 보편성에 대해서 기술해 놓은 구약의 몇 군데만 찾아보겠습니다.
(왕상8:46)
46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저희가 주께 범죄 함으로 주께서 저희에게 진노하사 저희를 적국에게 붙이시매 적국이 저희를 사로잡아 원근을 물론하고 적국의 땅으로 끌어간 후에
(욥14:3)
4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
(시58:3)
3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시143:2)
2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
(잠20:9)
9 내가 내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 내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 할 자가 누구뇨
(전7:20)
20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
(롬3:23)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엡2:3)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요일1:8-10)
8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왜 이지경이 되었다고요? 아담이 지은 죄 때문에 이렇게 된 것입니다.
아담이라는 히브리어는 일반적으로 사람을 뜻합니다. 남녀 구별 없이 그냥 사람이라고 할 때 “아담”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런데 이 “아담”이라는 단어는 종종 “인류”를 가리킬 때도 쓰입니다.
(창6:5)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여기서 쓰인 “아담“이라는 말은 전체 인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창세기 1장28절의 문화명령은 전 인류에게 주시는 명령이지요? 이 구절을 그냥 문화 명령에 국한 시키는 것은 성경을 참으로 미시적 관점에서 보는 것이지만 지금 그 부분을 설명하다가는 시간이 너무 많이 가니까 그 부분의 설명은 나중으로 미루도록 하고 지금은 그냥 문화명령이라는 용어를 써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창1:28)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그런 면에서 26절27절의 남자와 여자를 즉, 아담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전 인류를 대표하는 자로서의 사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전 인류가 그로부터 나오게 되고 아담이 앞으로 오게 될 전 인류의 머리요 대표자인 것입니다.
(고전15:22)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전15:45)
45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성경이 예수님을 마지막 아담이라, 두 번째 아담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첫 번째 아담도 예수 그리스도와 유사한 관계로 우리를 향해 서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표하셔서 우리를 구원해 내신 것처럼 인류의 대표자인 아담으로부터 우리는 죄 가운데 태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롬5:14)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오실 자가 누구죠? 예수님이십니다. 아담이 예수님의 모형이라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처럼 누군가를 대표하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히7:9-10)
9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 있나니
10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해가지고 오다가 살렘 왕 멜기세덱을 만납니다. 그에게 자기가 취한 것의 십 분의 1을 줍니다. 레위는 그로부터 180년 후에 태어날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그런데 그 레위가 아브라함이 십분의 일을 바칠 때 그 아브라함 안에서 함께 바쳤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원리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아담 안에서 죄를 지어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원죄로 말미암아 우리는 영적 무능력자들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이제 살아날 수가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3:3)
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6:44)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롬8:7-8)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그러면 그 “죄”라는 것의 본질이 무엇일까요? 무엇을 “죄”라고 합니까?
인간의 죄는 모두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시51:4)
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고 고백을 합니다. 이 말은 모든 죄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라는 것을 다윗이 고백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창조되기 전 세상은 이미 cosmic trouble이 있었습니다. 마귀의 세력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일어선 것입니다. 그 마귀는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지어진 아름다운 천사였습니다.
(겔28:12-15)
12 인자야 두로 왕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그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는 완전한 인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왔도다
13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창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었음이여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예비되었었도다
14 너는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화광석 사이에 왕래하였었도다
15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도다
그런데 그가 반역을 했습니다. 반역의 내용이 뭡니까? 불순종입니다.
(사14:12-15)
12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13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14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15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
그 악한 천사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 인간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하리라” “내가 하리라”입니다.
그로부터 수억만의 인간들이 “내가 무엇 무엇을 하리라”하고 교만과 불순종의 죄를 짓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종종 인간들을 향하여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분을 내고 화가 나면 목부터 뻣뻣해 진다고 하지요? 그런 짐승이 하나 있지요? 뱀입니다. 독사는 화가 나면 목이 뻣뻣해 지면서 목이 부풀어 나는데 그 안에 독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합니다. 인간은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 목을 뻣뻣이 쳐들고 대들 뿐 아니라 독기를 품고 있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에도 그런 부분이 나오지요?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5번이 뭡니까?
“우리는 하나님과 내 이웃을 미워하는 본성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입니다.
(롬8:7)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이렇게 죄라는 것의 본질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는 모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그런 행위 뿐 아니라 표현은 되지 않았지만 마음에서 올라오는 모든 악한 것도 죄입니다. 의지 그 자체가 죄의 첫 원인입니다.
(마15:18-20)
18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19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20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 하느니라
이렇게 죄는 행실뿐 아니라 생각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반역하고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는 모든 행위들과 마음에서 나오는 모든 것들을 우리는 “죄의 본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모든 인간이 그렇게 하나님께 반역하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그 속에서 나오는 것이 하나도 선한 것이 없는데 어떻게 이 세상이 이렇게 유지되고 있는가?
어떤 바이러스에 감염된 인간이 분노를 자제하지 못하게 되어 런던 시 전체가 지옥이 되어버리는 그런 영화가 있었지요? 그렇게 되어야 할 것 아닙니까?
여기서 또 하나님의 일반 은총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양심이라는 것을 남겨 두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도 그 양심이 율법이 되어 자제를 하게 만드셨습니다.
(롬2:14-15)
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그리고 또 한 가지 하나님은 사회법과 지도자들을 두어서 죄를 억제시키십니다. 사회법이 없고 양심이 없다면 이 세상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될 것입니다. 조금만 기분 나쁘게 하면 죽여서 갖다 묻어버리고 싶은 게 인간 아닙니까? 그나마 법이 있으니까 무서워서 안 저지르는 것 뿐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 아래 아직 우주와 함께 지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회개할 때까지만 보존하십니다.
(벧후3:7-9)
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 하시느니라
그 때까지는 일반은총으로 죄를 억제 해 놓으시지만 마지막 때가 되면 그 붙들고 계신 끝을 탁 놓아버리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인은 하나님의 일반 은총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관점에서의 선한 일을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인들은 선한 일을 할 때도 자기를 위해 선한 일을 하기로 선택을 한다는 것입니다. 죄인들이 가끔 선행을 하고 구제를 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 모르고도 저렇게 선한 일 하네 뭐, 하고 반문을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진정으로 남을 위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어떤 일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상실해 버렸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죄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벧후2:19)
19 저희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기는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니라
(요8:34)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롬6)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여기서 “죄의 종”이라는 말 “둘로스”는 “노예”라는 뜻입니다. 항상 주인인 죄가 시키는 대로만 하고 사는 자들을 죄의 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지 않는 자들이 하는 모든 행위(선하게 보이는 행위를 포함해서)는 다 죄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타락한 인간은 자기중심적이 되어서 자기만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자기만을 사랑하느라 하나님을 사랑치 않고 이웃을 사랑치 않고 자연을 사랑치 않고 어떻게 해서든 자기를 위해서 이용을 하고 착취를 하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죄의 경중을 잽니다. “나는 살인죄를 저지르지 않았으니 살인한 자보다는 좀 낫다” “나는 도둑질을 하지 않았으니 도둑질 한 사람보다는 좀 낫다” 그렇게 스스로 위로합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거룩의 높이에서 보면 다 똑같은 죄입니다. “불순종의 죄“ 심지어 성경은 인간이 최고의 선을 행한다고 해도 그것도 죄라고 합니다.
(사64:6)
6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 가나이다
우리가 아무리 선한 일을 해도 그것은 더러운 걸레 같은 것이라 합니다. 다 자기를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꼭 법을 어기고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잘 못한 것만을 죄라고 생각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아들이 나가서 싸움질하고 도둑질을 했다고 해보자고요.
아버지는 당연히 아들을 혼내주어야지요. 그런데 이 아이가 도덕적인, 윤리적인 행위는 잘 해요. 그런데 아버지 말을 무시해요. 아버지가 “이제 TV그만 보고 들어가서 공부해” 그랬는데 들은 척 만 척 하면서 계속 TV만 보면 어떠십니까?
아니, 아예 나가서 “ 난 아버지가 없어, 나한테 아버지가 왜 필요해, 난 혼자서 충분히 살 수 있어” 그랬다면 “흠, 역시 생활력이 강한 녀석이야” 그럽니까? 차라리 나가서 싸움박질 하고 다녀도 들어와서 아버지한테 “아버지 , 나 오늘 조금 센 놈하고 붙었는데 내가 겨우 이겼어, 담에는 더 힘을 길러서 완전히 묵사발 만들어 버릴 거야” 그러면 귀엽기나 하지요.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인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롬1:19-21)
19 하나님을 알 만한 일이 사람에게 환히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환히 드러내 주셨습니다.
20 이 세상 창조 때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 곧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은, 사람이 그 지으신 만물을 보고서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핑계를 댈 수가 없습니다.
21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해드리거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망해져서, 그들의 지각없는 마음이 어둠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행14:16-17)
16 하나님께서는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이 각자의 방법대로 살게 내버려두셨습니다.
17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신 것은 아닙니다. 곧, 하늘에서 비를 내려 주시고, 철을 따라 열매를 맺게 하시고, 먹을거리를 주셔서, 여러분의 마음을 기쁨으로 가득 채워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충분히 자연과 인간의 마음 에 당신을 계시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은 지 얼마 안 되는 분들이 가끔 질문들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기 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다 지옥 가는 거냐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얻지 못하면 모두 지옥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부터 하나님을 알 만한 것들을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자연을 통해서 인간들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감히 인간이 만들어 놓은 색깔로 표현 할 수 없는 온갖 꽃들과 새들과 물고기들과 아름다운 자연의 정경이라든가 매일같이 어김없이 뜨고 지는 해와 일정한 모양으로 변해 가는 달과 사계절을 보면서 어떻게 창조주를 모를 수 있습니까? 인간이 몸 안에 들어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포들이 그렇게 자기 역할을 따라 수 천 가지의 일을 해 내면서 우리 몸이 살아있게 되고 자체적인 방어능력을 갖고 면역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 한의사들이 침을 놓을 때 혹여 침이 혈관이나 급소를 향해 들어오면 혈관이 스스로 그 침을 피하는 것을 아세요? 어떤 고급 카메라가 인간의 눈과 같겠습니까? 이런 것이 우연히 생겨서 진화가 된 것이라고 믿으십니까? 그 모든 자연과 인간 자체가 하나님의 흔적이며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도 인간들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아담 때부터 하나님은 계속해서 예수님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음을 암시하셨습니다.
위에 들어드린 구절을 보시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와 사도행전이 쓰여 진 것은 지금부터 2000년 전입니다. 성경이 지금의 신구약으로 편집이 된 것은 AD400년경입니다. 그 당시는 구약 성경도 아주 희귀하던 때입니다. 그들에게 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미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을 두셨다”
그래서 그 때도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신 사람은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이고 지금도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신 사람만 보지 못한 십자가를 믿고 구원받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아름다움과 선함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흔적입니다.
(딤전4:4)
4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프랑스의 화가 모네가 죽으면서 유언으로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나는 살아오면서 추한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감사함으로 받으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우리에게 유익입니다. 하나님은 베토벤의 재능과 인격을 통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그려내시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진노하십니까?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거룩이라는 것은 먼지 같은 작은 죄도 용납이 안 되는 상태입니다.
백혈병이 심하면 골수를 뽑아내고 다른 골수를 넣습니다. 그렇게 골수 이식을 한 다음에는 무균 실에 넣고 늘 소독을 하고 출입을 합니다. 면역성이 떨어져서 아주 미미한 박테리아나 바이러스에 의해서도 죽을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요. 아무리 작은 박테리아나 바이러스도 용납이 안 되는 무균 실처럼 하나님의 거룩은 죄를 용납하실 수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핑계 댈 수 없는 자들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진노라는 것은 분 냄이 아닙니다. 우리가 분을 내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상해서 나오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가 죄를 지어서 하나님의 마음이 상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죄와는 아무 상관없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 분의 공의로 죄를 멸하시려는 하나님의 속성을 진노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분노와 헷갈리시면 안돼요.
그 하나님의 진노는 무시무시한 것이었습니다.
오죽하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날 기도를 하시는데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이 피해갔으면 좋겠다고 하실 정도로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그 진노가 모든 죄인들을 덮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이러한 죄에 대한 인식이 없이는 복음이 시작될 수 없습니다.
18세기 유럽은 자유주의와 계몽주의 합리주의 이성주의가 판을 쳤습니다. 거기에 진화론이 각광을 받고 있었고 기독교는 그야말로 위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몇 명의 하나님의 종들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조지 휫 필드를 비롯해서 데이빗 브레이너드와 조나단 에드워드 같은 위대한 종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두운 세상에 하나님의 도구로 쓰여 졌습니다. 특히 조나단 에드워드는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청교도를 알프스에 비교하고 루터와 캘빈을 히말라야로 비교하고 조나단 에드워드를 에베레스트라고 비교할 만큼 대단하신 분이십니다.
그 분이 코네티컷의 엔필드에서 설교하신 “하나님의 진노의 손아래 놓여있는 죄인들”이라는 설교는 너무도 유명합니다. 신명기32:35절을 가지고 설교를 하신 것인데 그 분은 지독한 근시여서 설교를 하실 때 등불을 들고 자기 코앞에 원고를 놓고 그냥 읽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성령이 임하시자 사람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들의 죄를 인해 두려워 떨었고 어떤 사람은 “악, 나는 지금 지옥으로 끌려가고 있다”고 소리를 쳤습니다. 그 강대상 옆의 목사님이 에드워드 목사님의 바지를 붙들고 “목사님 하나님의 자비는 어디 있는 것입니까?”하고 소리를 질렀다고 합니다. 영적 대 각성 운동은 그렇게 죄의 자각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한국의 영적 대 각성 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길선주 목사님이 집회 도중에 자기가 어떤 이로부터 100원을 착복한 것을 고백하면서 울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자기들의 죄를 고백하면서 울음바다가 되어버렸다고 합니다. 이렇게 구원은 죄의 자각과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회복해야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의 내용의 핵심은 뭡니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그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하게 소유하신 어떤 분을 공부해 보면 알게 되겠지요.
(골1:15)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고후4:4)
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히1:3)
2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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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본체의 형상이라고 번역된 "카락테르"는 동전 같은 것은 “똑같이 찍어내다”라는 말입니다. (exact representation) “정확한 형상”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이 땅에서 완전하게 정확하게 복사해 내신 분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중심부에는 무엇이 있었는가를 알면 우리에게 회복되어야 할 그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의 중심부에는 무엇이 있었습니까?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빼어 닮은 형상이라면 하나님의 형상의 심장은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불순종이, 시기 질투 교만이 하나님의 형상의 왜곡의 열매라면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순종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열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롬13:10)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갈5:14)
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엡5:1-2)
1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막12:29-33)
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32 서기관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바로 그 하나님과 이웃에 대해 사랑하게끔 만들어진, 사랑이신 하나님의 형상이 타락으로 인하여 부패한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에게는 그 형상의 회복이 필요한 것입니다.
(롬8:29)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미리 사랑하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미리 사랑하신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왜 택하셨는가 하니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기 위해서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바로 그 하나님의 형상대로 우리를 원상 복구해 놓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받은 자들은 당연히 사랑하는 자들로 회복되어 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갈4:19)
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고후3:18)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반사하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신 구속의 목표는 사랑이신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닮아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했지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꼭 알아두고 가자고요.
인간은 피조물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인격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피조물로 지으셨지만 인격체로 대우하고 계십니다. 성경을 주시고 말씀을 하셔서 우리를 인도해 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인격체라 함은 일종의 독립성을 지닌 존재라는 말입니다. 인격체라는 것은 결단력을 지니며, 목적을 세우며 그 목적을 향하여 갈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즉 인격체는 적어도 자신의 선택에 대한 자유를 소유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벌두인’은 인간을 가리켜 “선택권을 소유한 피조물(creature of option)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즉, 인간은 피조물인 동시에 하나의 인격체, 곧 피조 된 인격체(created person)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아주 중요한 진리이며 신비입니다.
즉 피조물인 인간은 종속(dependence)되어진 존재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인격체인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입니다.(freedom)
(롬9:21)
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성경은 이렇게 종속적인 인간의 처지를 묘사하지만
(수24:15)
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이렇게 선택을 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를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피조성과 인격성은 반드시 균형 속에서 살펴져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인간의 피조 성만을 강조하고 인격성을 무시하다보면 우리는 자칫하면 숙명론(Determinism)에 빠지게 되고 피조 성을 무시하고 인격성만 강조하다보면 사람 자체가 신성화 되게 되는 이단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죄를 지었다는 것은 죄를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벌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인간에게 이 인격성이 갖고 있는 자유가 없었다면 인간은 벌을 받을 이유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전적인 긍휼을 의지하지 않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피조물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사람이 인격체라는 것은 구원에 있어서 그 인격체가 할 역할이 있다는 것입니다. 잘 들으셔야 합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그 시작된 구원이 가시적으로 완성될 때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이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절대 인간적인 책임을 면제해 주지 않습니다.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성령의 힘을 입어 눈을 뜨게 되지만 그는 자발적으로 회개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빌2:12-13)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제3장 신령과 진리의 예배
(저는 과거에 이 본문을 읽으면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인간들에게 목마름이라는 것을 남겨 두셨을까’였습니다. 여러분은 생각해 보셨습니까? 왜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에게 목마름이 남아 있을까요? 성경에 나오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당신의 백성을 향하여 ‘열심을 부리시는 하나님’이라고 번역을 해야 맞습니다. 타락한 인간들이 각기 다른 신의 이름을 부르며 각기 다른 예배의 형식을 통해 그들의 신에게 예배를 하지만 결국 그들의 공통된 목적은 자신의 목마름을 해갈하기 위한 ‘자기 유익’입니다. 모든 인간들의 목마름은 그렇게 여러 모양의 ‘예배’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신을 이용하여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만을 의뢰하며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사는 사람들을 반드시 때려죽이게 되어 있다는 사실이 가인이 아벨을 때려죽이는 사건을 통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물로 바쳐지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으므로 우리는 구원받은 자다운 삶을 ‘예수를’‘예수의 성품을’‘순종의 제사를’ 하나님 앞에 제물로 올려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
(요4:20-24)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하나님의 복을 상실한 모든 인간들은 목이 마릅니다. 인간은 원래 하나님을 의존하여 살도록 지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이 떠나 버린 그 빈자리는 늘 목마름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 목마름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만 채워질 수 있는 목마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모두 눈이 멀고 귀가 먹었기 때문에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알지도 못하고 찾지도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이 세상의 것들로 그 목마름을 채우려 노력을 합니다. 그 하나님이 빠져 버린 목마름이 엉뚱한 방향으로 변이를 한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들이 ‘돈, 명예, 이성(異性), 술, 마약, 도박, 취미, 운동, 우상, 인기, 철학’ 이런 것들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것들로 자신들의 목마름을 채우기 위해 일생을 허비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에서 다섯 명의 남편과 한 명의 동거남이 등장하는 것은 바로 타락한 인간들의 잘못된 해갈 방법을 하나의 예(例)로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과거에 이 본문을 읽으면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인간들에게 목마름이라는 것을 남겨 두셨을까’였습니다. 여러분은 생각해 보셨습니까? 왜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에게 목마름이 남아 있을까요? 저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목마름이 남아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목말라 하고 계신다는 증거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49:14-15)
14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호11:8)
8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보세요. 하나님께서 패역 한 이스라엘을 향해 긍휼과 은혜와 사랑을 쏟아 부으시고 싶으셔서 그들을 향해 얼마나 목 말라하고 계신지 너무나 절절하게 기록이 되어 있지 않습니까?
(출20:3-5)
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1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2
여기에서 ‘질투하다‘라고 번역이 된 단어는 히브리어 ’카나‘인데 그 단어를 70인 역에서는 ’젤로스‘라고 번역을 합니다. 그런데 신약 성경에서 그 ’젤로스‘라는 단어는 ’열심‘이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우리가 전에 공부했던 요한복음 2장에 그 단어가 나옵니다.
(요2:17)
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그러니까 성경에 나오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당신의 백성을 향하여 ‘열심을 부리시는 하나님’이라고 번역을 해야 맞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질투라는 것은 어떤 비교 대상이 있을 때 일어나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질투하시는 대상이 누구라고 생각하세요? 바알입니까? 아세라인가요? 진짜 그런 신들이 있습니까? 없지요? 우상은 인간들이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스스로 만들어 놓은 것이기 때문에 실체가 없는 것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질투를 하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은혜와 사랑과 긍휼을 부으시고 싶으셔서 우리를 향해 열심을 부리시는 것‘이라고 번역을 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의 백성들을 향해 목말라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목이 마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하나 하나님께로 돌아 올 때 우리 하나님의 갈증은 해갈이 되는 것이고 그리로 돌아갈 때 비로소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의 갈증도 해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엉뚱하게도 이 세상의 것들로 그 갈증의 해갈을 변이시켜 버린 것입니다.
그러한 잘못된 갈망 중에서 아주 악한 갈망의 변이가 바로 그릇된 예배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내가 목이 마르니 물 좀 주겠느냐?’라는 질문에서부터 시작하여 ‘생수의 이야기’로 생수의 이야기에서 ‘남편의 이야기’로 그 남편의 이야기에서 ‘예배의 이야기’로 이야기가 전개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개인의 잘못된 해갈의 변이에서 전 인류의 해갈의 변이로 이야기가 전개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까지는 조금 이해가 안 가실 텐데 끝까지 한 번 잘 들어보세요.
예수님께서는 ‘내가 목이 마르다’라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의 목마름의 정체를 드러내시고 당신께서 그 목마름으로 죽으시고 우리에게 해갈을 선물하실 것이라는 주님의 의지를 교회들에게 암시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약속하시는 말씀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해갈 방법이 크게 잘 못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에게 남편을 데려오라고 말씀하심으로 그 여인의 잘못된 해갈 방법을 폭로하시는 장면에서 우리는 우리 인간들의 잘못된 해갈 방법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조금 더 구체적으로 그 잘못된 해갈 방법이 어떻게 인류 전체에게 구체적으로 편만하게 퍼져 있는지가 오늘 본문의 예배 이야기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미리 언급했듯이 인간들의 잘못된 갈망 중에서 아주 악한 갈망의 변이가 바로 그릇된 예배입니다. 어떤 분들은 ‘예배‘라고 하면 기독교의 형식적 예배의식만을 떠올립니다.
아닙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다 예배를 하며 삽니다. 예배는 ‘worth + ship' 내가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의 삶의 중심에 올려놓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불교인들도 예배를 합니다. 그들은 그 예배를 예불이라고 부르지요. 이슬람교도들도 알라를 예배합니다. 하루에 다섯 번씩 시간을 정해놓고 메카를 향해 절을 하는 그들의 모습은 가히 우리 기독교인들을 부끄럽게 하고도 남음이 있는 이슬람교도들의 예배의 한 모습입니다.
힌두 교인들도 그들의 신을 예배합니다. 심지어 무신론자들도 예배를 합니다. 그들은 자신을 가장 가치 있는 자리에 올려놓고 자신을 예배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다른 모든 종교들도 결국에는 자신을 예배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확인을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이 이 세상의 모든 종교들은 전부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 어떤 힘 있는 존재의 도움을 청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결국 그들이 섬기는 것은 그들이 부르는 신이 아니라 자기 자신인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들이 각기 다른 신의 이름을 부르며 각기 다른 예배의 형식을 통해 그들의 신에게 예배를 하지만 결국 그들의 공통된 목적은 자신의 목마름을 해갈하기 위한 ‘자기 유익’입니다.
모든 인간들의 목마름은 그렇게 여러 모양의 ‘예배’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왜 타락한 인간의 대표자격으로 등장하는 가인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자로 묘사되는지 아세요? 타락한 인간은 자기 자신의 유익과 자랑을 위해 자기 자신이나 우상에게 예배를 하는 존재라는 것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자들의 예배의 목적도 ‘자신의 노력과 열심을 통한 절대자에게서 얻어낼 수 있는 자기 유익’인 경우가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모든 것을 우상 숭배라고 합니다.
(출20:4)
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출32:1)
1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우상이라는 것의 전제가 뭡니까? '자기를 위하여‘만들어 낸 것은 모두 우상입니다.
이렇게 모든 인간들은 자신의 욕망과 욕심을 위해 무엇인가에게 예배를 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상 숭배를 ‘탐심’이라고 정의를 내립니다.
(골3:5)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그러니까 자신의 유익을 위해 절대자의 힘을 이용하려 하는 모든 사람들의 행위는 우상에게 예배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원래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을 가장 가치 있는 자리에 올려드리고 그분께 전적으로 순종하며 의뢰하며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분께 찬양하는 자로, 즉 예배하는 자로 지어진 것입니다. 그게 우리 인간의 창조목적입니다. 하나님은 그 올바른 예배자의 자리로 당신의 백성들을 이끄시기 위해 인간의 타락을 허락하시고 그들에게 타락한 자들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겪게 하시고 그들을 은혜로 구원해 내시는 ‘역사’라는 것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분의 백성들에게 그러한 경험을 하게 하심으로 그들을 진정한 예배자의 자리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이미 예수 그리스도라는 메시아를 약속하시고서 왜 4,000년이라는 긴 시간을 끄셨는지 아세요? 하나님은 그 긴 시간들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인간들의 죄악상을 역사 속에서 폭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들이 자신들의 목마름을 해갈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모든 것들의 허망함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과학, 문명, 학문, 종교 그 어떤 것도 인간들의 목마름을 완전히 해갈할 수는 없었습니다. 심지어 인간들은 율법을 받고도 그 율법을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은 행복할 수 있는 방법만 안다면 자신들의 힘으로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감히 하나님 앞에서 우리에게 이 세상을 사는 방법을 제시해 주면 우리가 한번 해 보겠노라고 대든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율법을 주십니다. 율법은 인간들을 구원하기는커녕 그들의 죄인 됨을 낱낱이 드러내는 저승사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러한 인간의 역사 속에서 자신들의 본질을 보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크심을 깨닫게 되는 것이며 도저히 그 크신 하나님 앞에 부끄러워 설 수 없는 자신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를 죽이셨다는 사실 앞에 까무러치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복음을 깨달은 자들이고 그들을 진정한 예배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이 모여 사는 곳을 천국이라고 부르는 것이고요.
그러면 이 땅에서 우리 성도들이 지향해야 하는 진정한 예배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올바른 예배와 그른 예배의 모습을 최초로 설명해 주신 곳이 창세기 4장입니다.
(창3:22-4:7)
22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 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1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 하셨으나
5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 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이 구절을 곡해하시는 분들이 하나님은 정성이 담긴 피 있는 제물을 원하시기 때문에 가인의 제사를 열납 하지 않으신 것이라고 설명을 하시는데 이 부분은 제물의 종류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가인과 아벨이 드린 제사는 둘 다 감사제입니다. 히브리어로 ’민하‘라고 하지요. 그 감사제는 양을 드려도 되고 곡식을 드려도 되는 그런 제사입니다. 그러니까 이 부분은 적어도 제물에 관한 문제제기는 아닌 것이 확실합니다.
하나님은 이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통해 예배에 대해 정의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창세기 3장 말미에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흙을 경작하도록 명령하십니다. 그런데 그 흙을 묘사하는 형용사가 ‘근본 된’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아담이 경작해야 할 땅은, 흙은 흙인데 아담의 근본이 된 흙이라는 뜻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흙을 경작하라고 하신 이유가 ‘너는 하나님이 아니라 흙에서 근본 된 자라는 것을 직시하며 하나님처럼 되려 했던 그 죄를 회개하라’는 것이었다.‘는 걸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이야기 바로 뒤에 이어지는 것이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입니다.
왜 제가 3장 말미와 4장의 이야기를 붙여서 읽었는지 아시겠어요? 하나님은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나서 흙을 경작하게 된 일과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통해서 아벨은 아담이 흙을 경작하며 자신의 본질을 직시하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못했던 일을 회개하며 살았던 것처럼 살았기에 하나님은 그의 제사를 열납 하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주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열납 하신 아벨의 제사를 그냥 ’제사’라고 하지 않고 ’아벨과 그의 제사‘라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벨이 드리는 제물이나 아벨의 제사 형식이 훌륭했기에 그의 제사를 받으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고 하나님 위에 올라앉아 자신이 이 세상의 주인으로 살려하는 죄인의 삶은 잘못된 것이라는 정확한 인식 아래 드렸진 제사‘ 이기에 아벨의 제사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다른 말로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인간은 그 절대 상위의 존재 아래에서 그분을 찬양하고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며 그분을 즐기는 참 예배였던 것이고 가인의 제사는 형식과 제물은 동일하게 드려졌지만 자기의 의를 드러내고 자신의 유익을 목적으로 했던 가짜 예배였던 것입니다. 그 결과가 ’죽음‘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신을 이용하여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만을 의뢰하며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사는 사람들을 반드시 때려죽이게 되어 있다는 사실이 가인이 아벨을 때려죽이는 사건을 통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 된 예배라는 것은 자신을 우주의 중심에서 끌어내리고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피조물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 분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겠노라고 나선 자들의 모든 행위가 바로 예배인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자신의 유익과 자랑과 만족을 위해 드리는 어떠한 행위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해갈의 변이를 지적하시는 남편의 이야기 다음에 예배의 이야기를 이어서 붙여 놓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나는 주님과 그 여인과의 대화를 통해 예배가 어떻게 인간 갈망의 악한 변이 일 수 있는가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짚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4:20)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여기서 이 여인이 말한 이 산은 그리심 산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남 유대 사람들이 자신들을 짐승 취급하면서 성전의 접근을 막자 자기들 나름대로 그리심 산에다가 성전을 짓고 그 곳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는 그리심 산에 있는 성전이야말로 진짜 성전이라고 우겼습니다. 왜냐하면 신명기 12장에서 하나님은 한 장소에서만 예배를 받으시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신12:10-11)
10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에 거하게 될 때 또는 여호와께서 너희로 너희 사방의 모든 대적을 이기게 하시고 너희에게 안식을 주사 너희로 평안히 거하게 하실 때에
11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한 곳을 택하실 그곳으로 나의 명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갈지니 곧 너희 번제와 너희 희생과 너희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가 여호와께 서원하는 모든 아름다운 서원물을 가져가고
이렇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성전은 한 곳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사람들과 남 유대 사람들은 서로 자기네 성전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곳이라고 우겼던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사마리아 사람들이 자기네 그리심 산이 진짜 하나님이 지정하신 예배의 장소라고 우기게 된 배경을 보겠습니다.
(창12:6-8)
6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8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사마리아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자기들 땅인 세겜에 단을 쌓고 제사를 드린 것을 근거로 자기네 땅의 제단이 참 제단이라고 우겼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아버지 격인 야곱도 세겜에 단을 쌓고 제사를 드린 것을 증거로 내어놓기도 했습니다.
(창33:18-20)
18 야곱이 밧단아람 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에 이르러 성 앞에 그 장막을 치고
19 그 장막 친 밭을 세겜의 아비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은 일 백 개로 사고
20 거기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하였더라
그리고 이스라엘이 여리고가 무너진 후 가나안 땅에 들어가 치른 첫 번째 전쟁인 아이 성에서의 전쟁에서 이긴 뒤 단을 쌓고 제사를 드린 곳도 사마리아의 에발 산이었습니다.
(수8:30-33)
30 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 산에 한 단을 쌓았으니
31 이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한 것과 모세의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철 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새 돌로 만든 단이라 무리가 여호와께 번제와 화목제를 그 위에 드렸으며
32 여호수아가 거기서 모세의 기록한 율법을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그 돌에 기록하매
33 온 이스라엘과 그 장로들과 유사들과 재판장들과 본토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 제사장들 앞에서 궤의 좌우에 서되 절반은 그리심 산 앞에, 절반은 에발 산 앞에 섰으니 이는 이왕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하라고 명한 대로함이라
사마리아 사람들은 여호수아가 아이 성을 점령하고 가나안에서 처음 제사를 드린 곳이 바로 자기네 사마리아에 있는 그리심 산 옆의 에발 산이고 예루살렘에 지어진 성전은 그로부터 500년 후인 솔로몬 때이므로 자기네 제단이 맞는 것이라고 우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했던 모리아 산도 바로 그리심 산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북 이스라엘이었던 사마리아에 지어진 제단을 전혀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사마리아 땅에 지어진 제단의 계보를 일관성 있게 연계하여 기록함으로 그 제단은 우상 숭배의 표본이었음을 밝힙니다.
북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땅에 성전을 지은 것은 바벨론 포로 이후에 처음 있었던 일이 아니라 그 전에도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왕상12:25-32)
25 여로보암이 에브라임 산지에 세겜을 건축하고 거기서 살며 또 거기서 나가서 부느엘을 건축하고
26 그 마음에 스스로 이르기를 나라가 이제 다윗의 집으로 돌아 가리로다
27 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 가리로다 하고
28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 하고
29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30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이 단까지 가서 그 하나에게 숭배함이더라
31 저가 또 산당 들을 짓고 레위 자손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
32 팔월 곧 그 달 십 오일로 절기를 정하여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 하고 단에 올라가되 벧엘에서 그와 같이 행하여 그 만든 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렸으며 그 지은 산당의 제사장은 벧엘에서 세웠더라
솔로몬의 신하였던 여로보암은 솔로몬이 성전을 짓느라 세금을 많이 거두고 사람들을 동원하는 것에 대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불만을 부추겨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를 뺀 나머지 열 지파를 규합하여 BC931년에 북 이스라엘을 세웁니다. 그리고 북 이스라엘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기 위해 남 유대의 예루살렘으로 드나드는 것을 못 마땅하게 여겨서 북 이스라엘 땅인 벧엘과 단에다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거기에서 제사를 지내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금송아지를 가리켜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고 했습니다.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이지요? 바로 시내 산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고 했던 이스라엘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던 그리심 산의 제단은 시내 산의 금송아지와 벧엘과 단의 금송아지와 같은 줄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심 산의 예배는 우상 숭배의 줄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산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로 적합하지 않은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심 산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그리심 산이 틀리고 예루살렘의 시온 산이 맞다’라고 대답을 해 주셔야 맞지 않습니까? 그런데 뭐라고 대답을 해 주시지요?
(요4:21)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주님은 그리심 산도 아니고 시온 산도 아니라고 하십니다. 물론 예루살렘에서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지정하여 주신 제사였습니다. 그러나 그 제사는 진정한 제물이시며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게 될 구원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제사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의 필연성을 깨닫고 그 은혜를 추구 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종교 행위를 의지해서 ‘자기 의’만을 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만을 위한 다윗 왕국을 재건해 주실 정치적 군사적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 예배도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라기를 통해 ‘누가 이 성전 문 좀 닫아다오’라고 말씀을 하신 것은 유대인들의 예배가 잘못된 예배였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해 주는 부분입니다.
지금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대답을 통해 구약의 제사 자체를 폐하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게 될 신약의 예배라는 것은 장소나 방법에 의해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져야 한다는 것을 밝히고 계신 것입니다.
(요4:23-24)
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할지니라
여기서 신령과 진정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단어는 ‘프뉴마티 카이 알레떼이아’입니다. ‘프뉴마’는 ‘성령’이라는 뜻이고 ‘알레떼이아’라는 단어는 ‘진리, 진실, 실체, 본질’이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우리 개역 성경은 ‘알레떼이아’라는 단어를 ‘진정‘으로 번역을 하는 바람에 많은 분들이 예배는 신령하게 그리고 ’진심 어린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드려야 한다는 권고쯤으로 이 구절을 곡해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이 구절은 예배에 대한 진지한 태도나 마음가짐에 관해 권고하는 구절이 아닙니다.
먼저 ‘진정‘이라고 번역이 된 ’알레떼이아‘가 무슨 뜻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이 ‘알레떼이아’라는 단어는 헬라어 문헌에서 ‘실체와 본질’이라는 뜻으로 주로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 단어는 그림자나 상징이나 예표와 반대되는 의미입니다. 성경에서도 그러한 뜻으로 쓰입니다.
(요1:9)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요6:32)
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요15:1)
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그리고 또 다른 여러 곳에서 ‘참 선지자, 참 왕, 참 생명수’등에 쓰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알레떼이아’라는 단어는 구약에서 이 땅의 것으로 예표가 되었던 모형과 상징과 그림자의 실체와 본질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에 이제 구약의 예표적 예배가 사라질 것이라는 의미에서 쓰인 단어인 것입니다.
여러분 구약의 제사의 모습을 잠깐 머릿속에 떠올려 보세요.
제사장이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제물을 제단 앞에 세웁니다. 그리고 속죄를 원하는 죄인의 머리와 그 제물의 몸에 양손을 얹고 죄인의 죄를 그 제물에게 전가시키는 의식을 행합니다.
그리고 제물이 죽습니다. 그렇게 하여 죄인의 죄가 속해지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위해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지고 하늘과 땅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요 제사장으로 서게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모형으로 그림자로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마리아 여인 앞에 그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서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여인에게 ‘너희는 이제 그림자나 모형이 아닌 실체로 예배를 드려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히9:23-25)
23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24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25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이제 우리의 대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피를 들고 성소나 지성소 정도가 아닌 참 하늘로 들어 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의 영적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땅 위에서의 육적 현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 자신이 지성소가 되어버렸습니다. 우리 자신이 성전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서는 늘 제사, 즉 예배가 드려져야 합니다. 영적으로 이미 천국에 들어가 있는 자들이 지성소가 되어 버린 자기 자신 속에서 하늘의 예배의 실체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어린양 예수가 하나님께 드려졌듯이 성도의 삶 속에서 예수의 성품이, 순결한 삶이 하나님 앞에 제물로 올라갑니다. 이제 대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속에서 우리의 삶을 하나님 앞에 제물로 올려드리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알레떼이아’ ‘진정으로’ ‘실체로’ 예배를 한다는 것은 이제 실체이신 예수를 제물로 바치는 예배를 해야 한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제물은 우리가 바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실체이신 예수를 제물로 바치는 예배를 해야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그 말은 예수님께서 제물로 바쳐지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으므로 우리는 구원받은 자다운 삶을 ‘예수를’‘예수의 성품을’‘순종의 제사를’ 하나님 앞에 제물로 올려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삶은 죽기까지 순종하는 삶입니다. 그 삶은 바로 선악과를 따먹지 않는 삶이며 계명을 지키는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계명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으로 드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하는 자들의 참 모습인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제물이 되는 삶을 내 놓으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제물로 바쳐짐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게 된 성도들은 반드시 그 예수의 삶을 하나님께 올려드리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스스로가 성전이 되어 자신의 삶을 예배의 삶으로 하나님 앞에 올려 드릴 수 있는 자들의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서 미리 나타난 것입니다.
(요2:19-21)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성전이 된 우리의 실존이 예수 안에서 미리 보여 졌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셨습니다. 그 성전이신 예수께서 어떤 제사를 드리셨나요?
(빌2:5-8)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 모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예배였습니다. 자기를 낮추고 죽기까지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는 그 삶이 바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성전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바로 그러한 예배의 삶이 요구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라고 권고를 하심으로 ’지금까지는 너희가 예배의 모형과 그림자를 통해 예배에 대한 힌트를 얻었다면 이제 그 실체인 내가 너희의 제물이 되고 제사장이 되어 제사를 다 드렸으니 너희는 그 실체인 십자가를 근거로 예배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배는 그리심 산이나 예루살렘의 시온 산 같은 장소 적이고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를 제물로 드린 자로서 예수의 삶을 내어놓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사도 바울이 우리가 드려야 할 그 신령과 진정의 예배에 대해 잘 정의를 해 놓았습니다.
(롬12:1-2)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삶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렇게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지성소가 되어 매일 매일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 되었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일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교회가 탄생을 하자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가 되어 오늘날까지 복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게 된 교회가 예루살렘으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으로 흩어지지요? 이제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인 성전이 된 성도들은 성전으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성전인 자기로부터 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뿜어내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일은 오직 성령에 의해 되어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신령과 진정’인 것입니다. 그래서 거듭난 자들은 성령에 의해 그들의 삶이 전체가 예배 화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주일마다 모여서 드리는 공 예배의 개념도 많이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도 마치 구약의 제사 때처럼 시간과 공간에 얽매여서 너무 형식화되어 버린 예배 의식에 빠져 있는 면이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예배 시간과 교회 건물만 빠져나가면 완전히 세상 사람과 방불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건 그림자요 모형으로 주어졌던 구약 시대의 제사를 드리던 자들과 똑같은 삶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오직 예수로, 믿음으로, 복음으로, 말씀으로, 내 진심으로 예배를 드려야 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실체가 오시지 않았을 때는 이 땅의 것들을 수단으로 방법으로 이용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제물도 있어야 했고 감정을 자극하는 음악도 있어야 했고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엄숙함도 있어야 했습니다. 그게 바로 예루살렘 성전의 모습이었습니다. 엄청난 수의 찬양대와 연주자들 그리고 금과 은과 보석과 대리석으로 꾸민 엄숙한 성전의 외양 이러한 모든 것들은 단지 모형이요 그림자였기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실체를 설명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실체가 오셔서 우리 안에 성령이 부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믿음이라는 것이 생겼고 그 믿음에 의해 우리는 이 땅의 것들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충분히 감격스럽고 인위적인 엄숙함과 경건함을 만들어 내지 않아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님을 향한 경외가 솟구치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모여서 감격의 찬양과 교제와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는 자리가 예배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예배는 실체가 오시지 않았을 때 이 땅의 것으로 그 실체를 설명하기 위해 쓰여 졌던 방법과 수단들이 그대로 쓰여 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오감을 자극하기 위해 지나치게 치장을 한 성가대라든지 밴드들을 동원합니다. 사람들이 심심하지 않도록 영화관 수준의 멀티미디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연극도 가미합니다. 목사의 설교도 짧고 재미있고 신선해야 합니다. 예배의 주인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한 예배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늘 그 예배 시간에 자신이 뭔가를 느껴야 직성이 풀립니다. 자기를 감동시키는 데 실패한 예배는 예배가 아닌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예배는 인간의 감정과 인간의 만족에 의해 판단되어지는 가짜 예배인 것입니다. 예배는 인간의 오감을 자극하여 인간을 설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어 성령을 받은 자들이 성령에 의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높이는 자리여야 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인간들의 감정과 기분을 맞춰주는 시간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진짜 성령을 받은 성령과 실체에 의한 예배를 드리게 된 성도들은 자기 기분이 조금 언짢다고, 몸이 조금 피곤하다고, 부부 싸움을 했다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을 놓치지 않습니다. 자신의 기분과 감정에 좌지우지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예배는 성령에 의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예배의 대상, 예배의 주인공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예배에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헌금? 봉사? 제가 예전에 어렸을 때 매주 거르지 않고 들었던 기도가 목사님의 헌금 기도 중에 나오는 ‘빈손으로 나오지 않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빈손으로 온 자라도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다음에는 빈손으로 오지 않게 하소서’라는 기도였습니다.
빈손으로 나온 사람들이 참 듣기 거북한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성경에 그런 구절이 있습니다.
(출23:15)
15 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아빕월의 정한 때에 칠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이는 그 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지니라
(출34:20)
20 나귀의 첫 새끼는 어린 양으로 대속 할 것이요 그렇게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네 아들 중 장자는 다 대속 할지며 빈손으로 내 얼굴을 보지 말지니라
그러니까 예배 때는 반드시 하나님께 무엇을 가져 와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가져오라는 것이지요? 예배에는 반드시 대속 제물을 가져 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대속 제물에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대속 제물은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로 이미 하나님께 드려졌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배의 제물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는 것이지 우리가 준비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좋은 그림이 창세기에 나옵니다.
(창22:7-8)
7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8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 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이렇게 하나님을 알현하는 예배의 준비물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믿음에 근거한 그 하나님의 배려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나오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은혜의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 의뢰하는 마음으로 서는 것입니다. 그게 성령받은 자들이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제물에 의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은혜의 복음 아래 선 사람들은 그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 하나님을 자랑하고 감사의 찬양을 올리게 되는 것이고 이제는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깨달은 사람들이기에 자신의 유익을 위해 남을 밟는 삶이 아니라 자기를 희생해서 남의 유익을 구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예배의 삶인 것입니다.
(히13:15-16)
15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예배의 근거)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 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보세요.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미의 제사는 선을 행하는 것과 서로 나누어주는 행위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배는 형식이나 방법의 차원이 아니라 한 인격과의 만남이고 그 인격의 드러남인 것입니다. 그래서 22절에서 주님께서 구원은 장소나 형식이 아닌 ‘유대인에게서 난다‘라고 ’인격‘을 등장시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구원의 연대적 역사적 관점에서의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언약 체결과 성취의 순서를 유대인에서 출발하여 이방인에게로 전해지는 방식으로 채택하셨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언약의 성취는 유대인에게 먼저 주어지고 그 유대인들에게서 이방인들에게로 전파되는 식으로 진행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의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인 사도들이 전부 유대인인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서 나온 복음은 이방인들에게 먼저 편만 하게 전파가 되고 그 것을 시기한 유대인들에게 다시 들어가는 식으로 진행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제자들을 파송 하실 때에도 유대인들에게 먼저 가라고 하신 것이고 혈루 병을 앓는 여인네에게 거룩한 것을 개에게 줄 수 없다는 다소 잔인한 말씀까지 하시면서 구원의 연대적 역사적 진행 순서에 입각한 표현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제시된 가장 보편적인 해석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난다’는 이 말씀은 주님 자신을 가리키는 말씀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번째 해석은 게할더스 보스를 비롯한 현대 신학자들이 지지하는 해석인데 지금 사마리아 여인과 함께 있는 유대인은 주님 한 분뿐이시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유대인들인 제자들은 모두 양식을 구하러 갔습니다.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너희가 장소나 시간이나 방법을 예배의 조건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구원은 그러한 것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를 믿는 것이다‘라는 의미에서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이라는 단어도 ’단수‘로 썼다는 것이지요.
둘 다 아주 좋은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둘 중에 어떤 해석을 택하든 간에 중요한 것은 예배는 형식과 방법과 장소의 문제가 아닌 인격의 문제라는 것이며 그 예배의 근거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여야 하고 우리는 그 예배의 자리에 은혜를 근거해서 서야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어떠한 것을 준비하여 예배의 자리에 나오셨습니까? 아니 오늘 하루 예배의 삶을 사셨습니까? 그렇다면 그 예배의 삶은 무엇에 근거한 삶이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하나님의 교통하심이 여러분을 예배하는 자로 만드셨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그 은혜를 입은 자로서 매일 매일의 삶을 하나님께 순종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그 분의 계명을 열심히 지켜내는 예배의 삶으로 만들어 내십시오.
제4장 세례
(요3:1-21)
1 바리새파 사람 가운데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대 의회원이었다.
2 이 사람이 밤에 예수께(그, '그에게') 와서 "랍비님,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같이하지 않으시면, 선생님께서 하시는 그런 표적을(예수의 신성을 보여주기 위한 상징으로서의 기적(그리스어 세메이온))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3)다시 나지 않으면(또는 '위로부터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4 니고데모가 예수께 말하였다. "사람이 늙은 뒤에,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5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4)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
7 너희가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내가 말한 것을, 너희는 이상히 여기지 말아라.
8 바람은('프뉴마'는 '영'을 뜻하기도 하고(6절), '바람'을 뜻하기도 함(8절))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는 듣지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
9 니고데모가 예수께 묻기를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하니,
10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네가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 이런 것도 알지 못하느냐?
11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우리가 본 것을 증언하는데,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13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인자 밖에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과 같이, 인자도(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하늘에 있는 인자도') 들려야 한다.
15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
17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로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또는 '정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9 심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빛이 세상에 들어왔지만, 사람들이, 자기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20 악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은, 누구나 빛을 미워하며,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행위가 드러날까 보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21 그러나 진리를 따르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자기의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니고데모는 유대인이요 관원입니다. 그는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요 부자였습니다. 그는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바리새인이었고, 유대인을 대표하는 제사장들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로 구성된 의회와 같은 기관에 속한 자였습니다. 당시는 전체 유대인 중에 바리새인이 6,000명이었으며 산헤드린 공회원이100여명 이었습니다. 그는 그만큼 유대사회에서 유력한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성경은 유대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고 신실한 네고데모가 얼마나 하잘 것 없는 자라는 것을 보여줌으로 그보다 더 형편없는 이방인들을 사랑하셔서 그들을 구원하시는, 개 같다는 이방인들을 사랑하시는 그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지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잘 보시면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를 찾아옵니다. 여기서 밤과 어두움이 상징하는 것은 죄 된 세상을 뜻하는 것입니다.
(요1:4-5) 그의 안에서 생겨난 것은 생명이었으니, 그 생명은 모든 사람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
(요19:39) 또 일찍이 예수를 밤중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에 침향을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왔다.
지금 예수께서 ‘밤’이라는 단어를 통해 독자인 성도들에게 말씀하고 싶으신 것은 유대인의 가장 뛰어난 자도 밤에 속한 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어떠한 조건이나 위치나 지식이나 소유도 하나님 나라 입성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니고데모가 예수께 말합니다.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온 분이란 것을 안다고 합니다. 일견 멋진 신앙고백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안다고 하는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예수님은 안다고 하는 니고데모가 얼마나 모르는 자인지를 설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새롭게 하늘로부터 태어나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시지요? 잘 생각해 보세요. 태어난다는 것은 새롭게 창조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기가 태어날 때 자신의 탄생에 무슨 기여를 할 수 있나요? 태어나는 자는 passive thing입니다. active thing은 어머니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구원을 설명하시며 “니고데모야 네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여기고 있는 부와 명예가 있으니 너는 천국에 가까운 자이다. 이제 조금만 더 노력하면 너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이니 힘내라”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와 반대로 ‘니고데모야 네가 가지고 있는 조건과 상황과 지식과 지혜가 아무리 뛰어나고 화려해도 너는 하늘로부터 나지 않으면 여전히 밤에 속한 자다’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Jesus saying scrap everything you've done Nicodemus. 네가 지금까지 율법을 지킨다고 하는 그 모든 것과 네가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이 아무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길은 우리가 조금만 더 self improvement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조금 더 공부하고 노력하면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결심으로 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구원의 active thing인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거듭남을 거저 받아야만 우리는 비로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네가 다시 창조되지 않으면 절대 넌 가망이 없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성경에는 족보가 많이 나옵니다. 창세기, 역대 상 역대 하에 많이 나오는데 신약에는 딱 두 번 예수님의 족보가 나올 뿐입니다.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3장에 두 번 예수님의 족보가 나오는데 마태복음1장에 예수님의 족보가 어떻게 나옵니까? 아브라함에서 다윗, 다윗에서 바벨론 유수, 바벨론 유수에서 예수그리스도까지 14세대, 14세대, 14세대로 나옵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 예수가 나오시는데 그 분은 성령으로 잉태 되셨다는 것을 굳이 그 족보의 마지막에 붙여 넣었습니다. 14가 세 번이라는 것은 일곱씩 여섯 개를 말합니다. 창조의 숫자, 안식의 숫자, 완전수인 7이 여섯 번나오고 그 여섯 번째 마지막이요 일곱 번째의 시작이 성령으로 잉태하신 예수님이십니다. 눈치 빠르신 분들은 아, 하고 무릎을 치실 것입니다. 즉 일곱 번째 세대로 마무리되는 새 창조의 완성은 다른 말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제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곱 번째 세대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잉태 되었다는 것을 굳이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우리의 노력이나 요구나 열심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하나님에 의해 거듭난 자만이 구원의 방주에 올라 탈 수 있다는 것을 이 족보를 통해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 요한복음의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셔도 되는데 왜 물과 성령이라고 표현 하셨을까요? 그 이유를 찾아보겠습니다. 그 표현은 유대인들이 줄줄이 꿰고 있던 구약을 배경으로 한 표현입니다. 오늘 본문에 그 증거가 나옵니다. 10절을 보세요.
(요3:10)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네가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 이런 것도 알지 못하느냐?
헬라어 원어를 보면 선생이라는 단어 앞에 'ho'라는 정관사가 들어있습니다. 큰 스승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지금 나는 너희들이 잘 알고 있다고 하는 구약 성경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너는 이스라엘의 큰 스승으로서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할 일을 모르고 있다는 말이냐?‘하고 니고데모를 꾸짖고 계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지금 니고데모에게 하시는 말씀들을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는 구약을 배경으로 설명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인용하시는 부분은 에스겔서입니다. 그리로 가서 물과 성령이 뜻하는 바를 찾아보지요.
(겔36:22-26)
22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하여라. '나 주 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하려고 하는 까닭은 너희들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너희가 여러 나라에 흩어져서, 가는 곳마다 더럽혀 놓은 내 거룩한 이름을 회복시키려고 해서다.
23 너희가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면서 내 이름을 더럽혀 놓았으므로, 거기에서 더럽혀진 내 큰 이름을 내가 다시 거룩하게 하겠다. 이방 사람들이 지켜 보는 앞에서, 너희에게 내가 내 거룩함을 밝히 드러 내면, 그 때에야 비로소 그들도, 내가 주인 줄 알 것이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24 내가 너희를 이방 민족들 가운데서 데리고 나아오며, 그 여러 나라에서 너희를 모아다가, 너희의 나라로 데리고 들어가겠다.
25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맑은 물을 뿌려서 너희를 정결하게 하며, 너희의 온갖 더러움과 너희가 우상들을 섬긴 모든 더러움을 깨끗하게 씻어 주며,
26 너희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고 너희 속에 새로운 영을 넣어 주며, 너희 몸에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살갗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며,
이스라엘이 타락하고 범죄 하여 소망이 없는 자들이 되어 하나님께서 가나안에서 쫓아내시고 흩어버리십니다. 그들이 얼마나 소망 없는 자들이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토록 소망이 없는 자들이기에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직접 물로 씻어서 그들의 더러움을 제하시고 하나님의 영을 그들의 마음에 새겨서 다시 창조하시지 않으면 절대 소망이 없음을 에스겔을 통해 계시하신 이 부분을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상기시키시며 다시 설명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물은 깨끗하게 하며 정결함을 주는 것입니다. 물과 성령하면 생각나는 것이 무엇이 있으세요?
먼저 여러분이 알아두셔야 할 것이 있는데 성령이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르와흐’는 ‘바람, 숨, 호흡’이라는 뜻도 함께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럼 생각해 보세요. ‘바람’이 밤새 불어 ‘물’이 갈라진 장면이 있었지요? 바로 홍해가 갈라진 사건입니다. 거기서 모든 죄인들을 상징하는 애굽 군대가 모조리 빠져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쪽에서 보니 애굽에서 탈출한 새로운 자들이 물을 마른 땅처럼 걸어서 올라오는 것입니다. 그게 홍해 사건이 담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홍해 사건은 죄인들이 죽고 새로운 생명이 탄생되어 올라오는 것입니다.
또 물과 성령하면 생각나는 장면이 있지요? 노아의 홍수 사건입니다.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것처럼 노아의 홍수사건도 기식하는 죄인들이 모두 빠져 죽고 하나님의 택한 자들만 방주에 담겨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정결하게 한다는 것의 진의입니다. 정결하게 한다는 것은 단순히 더러워진 것을 씻거나 고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죄를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죄에 대해 죽고 성령에 의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학에서는 그것을 재창조 혹은 새 창조라 부릅니다. 태초에 천지가 창조될 때에 수면(물)위에 하나님의 신(성령)이 운행하셨던 것을 기억하시지요? 옛 창조가 그렇게 물과 성령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성경이 명확히 기록하는 것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인 재창조가 그렇게 이루어질 것임을 미리 예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재창조, 즉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지 우리의 노력과 애씀이 낳는 열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에스겔 37장으로 니고데모에게 말씀을 이어가십니다.
에스겔서 37장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마른 뼈에 생기를 불어넣으니 뼈들이 살이 붙고 힘줄이 붙어 군대가 되는 것을 그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열방으로 흩어진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가 이런 말라빠진 뼈들이라는 것을 그림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죽은 지 너무 오래되어서 먼지가 풀풀 나는 그런 마른 뼈들, 그런 마른 뼈들에 생기가 불어서(‘생기’는 히브리말 “르와흐”로 바람, 성령이라는 말과 함께 쓰인다고 했지요?)
말라빠진 뼈들이 가득 찬 골짜기에 성령의 바람이 부니 그 마른 뼈들이 살아나서 군대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구원받기 전의 우리의 모습이 어떤 자들인지 확인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른 뼈와 같았던 우리들을 여호와의 군대인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시기 위해 성자 하나님께서 직접 십자가에 달리셔서 저주와 심판의 뱀이 되심으로 우리를 멸망에서 구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의 혼돈과 공허가 질서와 충만으로 창조가 되어지는 것과 동일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군대가 탄생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른 뼈와 같은 이들이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 무슨 노력을 할 수 있으며 무엇을 보탤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 14절부터16절까지를 잘 보세요. 두 문장이 댓 구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과 같이, 인자도(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하늘에 있는 인자도') 들려야 한다.
15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
구원이라는 것은 성자이신 예수님께서 저주의 뱀이 되셔서 장대에 달리시고 그 것이 바로 죄인인 자기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십자가라는 것을 믿는 사람만이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에스겔서에서 확인을 했듯이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자들은 이미 죽어서 마른 뼈처럼 먼지가 풀풀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면 누가 그 저주의 십자가를 구원의 십자가로 믿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어떤 자들이 과연 그 예수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정말 그 마른 뼈들이 예수를 믿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율법과 제사제도와 그 많은 언약을 주셨음에도 계속해서 타락하고 실패하여 결국에는 그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 버리는 그 죄인들이 정말 독생자 예수를 믿을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그 눈을 뜨게 해 주시지 않으면 절대로 우리는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죽은 자들이 어떻게 믿습니까? 성령께서 임의로 그 분의 주권으로 우리를 향해 불어오시지 않으면 우리는 믿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다른 자들보다 무엇이 너 나아서 우리를 택하셨나요? 찬송가 가사처럼 “난 알 수 없도다, 난 알 수 없도다”입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신 말씀에서 거듭난다는 말은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위로부터 난다는 말입니다. 위로부터 오신 분이 누구입니까? 이 세상에 위로부터 오신 분은 예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셔서 저주와 심판의 물에 의해 죽으시고 성령에 의해 다시 사신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본문 13절도 명확하게 그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요3: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우리는 바로 그 예수와 함께 죽고 성령에 의해 새롭게 탄생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 오직 그 은혜로만 우리는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예수의 품에 안겨 죽어야 합니다. 복된 니고데모는 결국 그 의미를 알았습니다.
(요19:38-40) 그 뒤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시신을 거두게 하여 달라고 빌라도에게 청하였다. 그는 예수의 제자인데, 유대 사람이 무서워서 그것을 숨기고 있었다. 빌라도가 허락하니, 그가 가서 예수의 시신을 내렸다. 또 일찍이 예수를 밤중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에 침향을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왔다. 그들은 예수의 시신을 모셔다가, 유대 사람의 장례 풍속대로 향료를 바르고, 고운 베로 감았다.
몰 약은 사람이 죽으면 시체의 악취를 없애기 위해 사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동방 박사들이 몰 예수께서 탄생하셨을 때 바로 그 몰 약을 예물로 가져 왔습니다. 그것은 예수는 죽기 위해 왔다는 것을 미리 힌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몰 약은 아주 비싼 물건이어서 일반인들은 잘 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니고데모가 몰 약을 백 근을 가져 왔습니다. 몰 약 백 근을 장례에 쓸 수 있었던 사람은 그 나라의 왕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 것은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물과 성령으로 나야 한다는 사실이 무슨 말인지 알게 된 것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것은 죄에 대해 죽고 성령에 의해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을 그가 안 것입니다. 유대인의 장례법 중 몰 약과 침향을 시체와 함께 세마포로 싼다는 것은 죽은 그가 너무 소중해서 그와 함께 내가 죽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그 하나님이신 예수와 함께 죽은 것입니다. 그게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우리가 참 부러워하는 예수님 곁에서 죽었던 그 강도가 뭐 한 일이 있습니까? 그는 십자가를 지고 예수와 함께 죽은 것밖에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이 낙원에 이르는 것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그게 구원의 길입니다. 너무 심플하지요?
예수께서 우리에게 그러한 은혜를 허락하시기 위해 진노의 놋 뱀이 되신 것입니다. 그 진노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입니까? 오죽하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하나님께 탄원을 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하시던 그 하나님의 독생자가 십자가에서 당해야 할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를 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진노를 예수께 퍼부으셨습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구약의 하나님을 진노의 하나님이고 신약의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라 말합니다. 그것은 틀린 말입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인내의 하나님이시고 신약의 하나님이야말로 진노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단지 그 진노를 그 아들이신 예수께 다 퍼부으신 것이고 그 모든 저주를 예수께서 다 받아 죽으신 것입니다.
사도신경은 그 십자가에서의 진노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를 예수께서 지옥에 내려갔다 오셨다고 말을 할 정도입니다. 'He descend into Hell' 한국어 번역판에서만 지워졌는데 그 말은 예수님께서 진짜로 지옥에 내려가셨었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가 불타야할 지옥처럼 처참하고 고통스러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지옥을 경험하셨다는 말이지요. 성경은 무섭게도 그 사실을 힌트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죽으시기 전에 ‘목마르다’라고 말씀하셨지요? ‘목마르다‘라는 단어를 들으시면 생각나는 비유가 있지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입니다. 거기서 부자가 지옥에서 아브라함에게 뭐라 합니까? 내가 목이마르니 나사로의 손가락에 물을 한 방울만 찍어서 내 목을 축여 달라 부탁하지요? 그게 바로 지옥의 특징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낯 열두시부터 오후 세시까지 태양이 빛을 잃고 세상이 어두워지지요? 어두움, 흑암이 의미하는 바는 저주와 심판, 지옥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그리고 우리를 대표해서 지옥을 경험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지옥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곳인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어떤 분들은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불로 다 태워버리시고, 홍수로 사람을 다 쓸어버리시고,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 대적들을 어린아이까지 다 죽여 버리시는 것을 보고 무시무시한 하나님이라 말을 하기도 합니다. 너무 잔인하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그것이 죄인들이 받아야 할 최종적 형벌인가요? 아닙니다. 처참하게 죽은 그들은 최후의 심판 때 다시 일어나서 그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몇 억 배의 고통 속으로 영원히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지옥입니다. 그것이 바로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그 하나님의 진노가 이 세상에 아주 조금 맛보기로 나타나는 것이 여러 가지 재앙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재앙들을 통해 ‘회개하라’고 요한 계시록의 일곱 나팔을 열심히 불고 계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마지막 심판으로 그 진노를 발하실 때는 우리가 그토록 애정을 쏟아 붓고 있는 이 땅을 비롯한 우주가 전부 불타 없어져 버릴 것입니다. 그만큼 그 진노는 무시무시하고 큰 것입니다. 그 모든 진노가, 전 우주를 태워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진노가 예수그리스도에게 단번에 쏟아진 것입니다. 그 진노를 하나님이신 예수가 받으셨기에 우리 안에 그 크신 하나님께서 들어와 계신데도 여러분과 제가 이렇게 멀쩡히 살아서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인들은 절대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시내 산에서도 하나님은 짐승들조차 하나님께 범접하지 못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들어와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멀쩡하게 그 분과 대화를 하고(기도) 그 분을 자랑하고(찬양) 그 분을 섬깁니다.(예배) 우리가 받아야 할 그 하나님의 진노를 예수께서 받아내셔서 우리가 영생을 얻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그토록 미워하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우리는 죄를 짓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말은 잘하면서도 여전히 죄를 짓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가 되셔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가 없어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죽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계속해서 죄를 짓고 있는 우리는 뭡니까? 예수 그리스도가가 우리의 죄가 되셔서 죽으셨다면 지금도 여러분과저는 매일매일 예수를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우리는 하나님이 그토록 사랑하시는 독생자를,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그 고마운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아무런 죄책 감 없이 습관적으로 죄를 짓는 사람들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이 맞습니까? God hates Sin infinitely. 나의 독생자를 십자가에서 울부짖게 만든 그 죄를 나는 이토록 미워한다고 하나님은 세상에게 여전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계속해서 죄를 짓고 있으면 어떡합니까?
어떤 분은 이런 질문을 하시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그토록 사랑하신다면 자신이 직접 내려와서 죽으실 것이지 아들을 내려 보내셨냐고.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여러분, 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목숨을 요구하시지 않고 이삭을 죽이라고 하셨을까요? 자식을 가져 본 사람은 그 이유를 압니다.
얼마 전 제가 알라바마에 부흥회에 갔을 때 우리 둘째가 폐렴이 걸려서 심하게 아팠습니다. 그 때 그 아이를 보면서 제가 대신 아파 줄 수 있다면 당장 그렇게 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저의 세 아들 중 어떤 아들이라도 피치 못할 사정으로 한 녀석이 죽게 되었을 때 대신 누군가가 죽어서 그 아이가 살 수 있다면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손을 번쩍 들것입니다. 내가 대신 죽게 해달라고 애걸할 것입니다. 부모에게 있어 자식은 부모 된 자의 최고의 자기표현입니다. 그래서 자식이 좋은 대학가고 훌륭한 사람 되면 부모는 그렇게 기쁜 것입니다. 자식은 자신의 목숨보다 더 귀중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당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을 죽이신 것이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가장 소중한 것을 버려 우리를 구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만일 기독교 박해가 다시 시작되어 예수를 믿으면 죽인다하고 저를 고문한다고 한다면 저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의 신앙 때문에 저의 자식들을 바로 제 앞에서 고문하고 죽인다면 그 것은 저의 목숨을 끊어버리는 것보다 수천 배 괴로울 것입니다. 차라리 죽는 게 낫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바로 그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저는 가끔 생각해 봅니다.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토록 괴로워 하셨는지. 예수님은 당신의 아버지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계신지 아셨습니다. 그 아버지가 자신의 죽음을 바라보며 고통스러워하실 것을 생각하신 주님이 그토록 괴로워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 같은 인간들을 위해 그러한 고통을 감수하셨습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다는 구절의 그 참 사랑을 이제 아시겠습니까?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정말 이해하세요?
여러분이 여러분의 삶에 이해 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날 때 이 사랑을 기억하십시오.
‘그렇게 나를 사랑하는 하나님이 왜 나를 이 지경에 그냥 놔두시나?’하고 생각하신다면 여러분은 아직 그 아버지의 사랑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계신 분입니다. 그것은 그토록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너무 사랑하셔서 이 세상에 정 주고 살지 못하도록 하시는 것이며, 여러분의 옛 성품이나 모난 인격을 다듬고 계신 것이며, 정금 같은 여러분의 완성을 위해 잠시 허락하는 훈련의 시간일 뿐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애절하고 절박한 사랑인지 제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의 가장 좋은 땅인 고센 땅에서 잘 살고 있었을 때 그 왕조를 바꿔서 그 이스라엘을 핍박하게 만드신 이유를 아세요?
이 풍요의 땅이 너희들이 거할 곳이 아니란 것을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너희는 그 땅에 정을 두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영원한 나라를 보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하늘을 소망하라고 지금 고난을 통하여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그렇게 외치고 계신 것입니다. 그 사랑에 감사하세요.
‘하나님 이것까지 가져가십니까?’라고 묻지 말고 ‘내가 하나님을 알고 내가 그 천국을 알기에 이 모든 사건과 상황들이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의 표현임을 내가 믿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실력자가 되십시오.
이 세상 모든 것은 다 여러분을 실망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세례는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로 구원을 얻은 자들이 ‘저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죽고 다시 살아났습니다.’라는 신앙 고백의 하나로 치러지는 성례 중의 하나입니다.
로만 카톨릭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세례(영세)를 받지 않으면 지옥 가는 것 아닙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세례라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각인이 되셨습니까?
제5장 성경
(딤후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또는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모든 성경은 교훈과……'),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유능하게 하고, 온갖 선한 일을 할 준비를 갖추게 하려는 것입니다.
저는 개혁신학을 지지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개혁신학, reformed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국어사전의 개념으로 개혁이 원래 있던 것으로부터 돌출 되어 떨어져 나와 새롭게 만들어져 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것 추구하고 새로운 것 만들어 내는 것이 개혁이라 생각합니다. 개혁 교회의 개혁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reformed라는 것은 변질되어진 것에서 원래의 본줄기로 돌아가는 것을 reformed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변함없이 변질됨 없이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로만 카톨릭이 원 가지에서 변질이 되자 ‘안 된다, 하나님의 교회는 이런 것이 아니라 외치며 원래 하나님의 교회로 돌아가야 한다’ 고 외친 것이 바로 reformed, 개혁입니다.
그래서 우리 개혁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이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예수, 오직은혜, 오직 영광을 하나님께 인 것입니다. 그 중 우리는 성경이 정말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세대에 인정되고 있는가를 살펴보려 합니다.
혹자(어떤사람)는 기독교를 체험의 종교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이지 체험의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와 이 세상 모든 다른 종교와의 차이가 바로 이점입니다. 다른 종교는 인간이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서 신을 찾아가는 것이라면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어떤 한 무리의 하나님의 백성들을 찾아오시는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초월적인 하나님께서 우리 제한적 이성의 인간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절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시는데 두 가지 방법으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그 하나가 인간과 자연 우주의 질서 등을 통해서 보여 지는 일반계시(general revelation)입니다. 성경에도 곳곳에 그 일반계시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19:1)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창공은 그의 솜씨를 알려 준다
(롬1:20)
이 세상 창조 때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 곧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은, 사람이 그 지으신 만물을 보고서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핑계를 댈 수가 없습니다.
두 번째가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 직접 설명하시는 특별계시가 있습니다. 그 특별 계시 중 성경에 대해 오늘 살펴 볼 것입니다.
경은 1,500년 동안 쓰인 책입니다. BC1,500년경의 모세에서부터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 승천하신 후 사도들에 의해 쓰인 성경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분량과 시간 속에 기록되어진 책이 성경입니다.
구약이 현재의 39권으로 확정된 것은 BC 90년경의 야무니야 회의에서였고, 신약성서의 정경이 현재의 것처럼 27권으로 결정된 것은 397년 카르타고에서 열린 교회회의에서였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이 같은 성경이 탄생한 것은 AD400년경이 됩니다. 그리고 성경은 장절이 원래 없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책처럼 소제목도 물론 없습니다. 1551년 비로소 독자들이 찾기 쉽고 읽기 쉽도록 장과 절이 구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장과 절은 비전문가에 의해서 나누어 졌기 때문에 어떤 때는 오히려 장절이 구분되어 있어서 오해를 하기도 쉬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 때로는 장절 구분 없이 죽 읽는 버릇을 들이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 개혁주의 신학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성경은 성령의 감동에 의해 쓰인 책이며 절대무오하다는 것을 믿습니다. 즉 축자영감설을 우리는 지지합니다. 한자 한자가 모두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 속에 기록되어졌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 세계의 유수의 신학교들의 많은 수가 이미 자유주의 신학에 의해 점령되었고 그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믿는 자들을 조소하며 예수의 탄생을 신화나 설화쯤으로 취급하고 부활은 더더욱 믿지 않습니다. 그러한 자유주의 신학에 물든 신학교에 다니던 선배 하나가 박사학위 논문을 쓰면서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잠시 언급했는데 담당교수가 코웃음을 치더랍니다. 그 교수님 왈“아직도 예수의 부활을 믿는 바보가 있나?”하시더라 지요. 그런 교육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정상적으로 목사 안수를 받고 번듯한 교회의 목회를 하고 있는 경우를 왕왕 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성경은 하나의 행동 지침서에 불과하며 수많은 오류를 가지고 있는 가치 없는 책에 불과 합니다. 그들은 성경을 노자의 도덕경이나 석가모니의 불경, 어쩌면 초등학교 도덕책과 동류로 보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성경이 다 완성되어 어디서 뚝 떨어졌으리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기록된 것이 1,500년이나 걸렸고 각기 다른 40여명의 저자가 기록을 했으며 신구약이 오늘날의 성경으로 확정된 것도 4세기라고 하니 성경에 대한 신비함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위치가 그렇게 하락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굳게 믿고 있습니다. 성경은 한분의 저자에 의해 한권의 책으로 쓰였으며 그 성경은 어떤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기록된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믿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성경의 단 한 가지 주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이 지신 십자가입니다. 좀 더 거시적(巨視的)으로 주제를 표현하면 성경은 ‘하나님 나라’를 그 주제로 유기적이며 점진적으로 쓰여 있는 한 권의 책인 것입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데에 있어 아주 중요한 두 가지 신학적 관점이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조직신학적 관점이고 두 번째가 성경 신학적 관점입니다. 이 두 가지 관점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 것이 바로 성경의 유기(有機)적 통일성입니다. 쉽게 말하면 성경 육십 육권은 각기 다른 내용을 담고 있는 것도 아니고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세대별로 다른 구원의 방법을 기록해 놓은 것도 아닌 ‘하나님 나라’라는 대 주제 아래 한 권으로 통일이 된 책이라는 것이지요.
머리가 아프거나 소화가 안 될 때 손바닥에 침을 놓아 고치는 수지침을 아십니까?
어떻게 머리가 아픈데 손바닥에 침을 놓습니까? 그런데 낫잖아요? 그게 바로 유기성입니다.
우리 몸은 전체가 그렇게 하나로 통해 있는 것입니다. 발톱이 빠졌다고 발만 아픈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 전체가 고통을 당하는 것처럼 성경도 하나의 유기적 통일성을 갖고 있는 책인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를 찌르면 요한 계시록으로 혈맥이 통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시지요?
그러한 유기적 통일성 하에 신에 관한 개념과 내용을 정리한 것이 조직신학의 신론이고, 인간 구원에 관한 내용과 개념을 정리한 것이 구원론이며,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를 정리한 것이 인간론인 것입니다. 이렇게 조직신학은 성경은 하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전제하에 존재할 수 있는 신학인 것입니다.
성경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신학도 성경 전체가 유기적으로 하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전제하에 시간과 역사를 고려하여 성경을 풀어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아담의 시대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점진적으로 노아의 시대에 나타나고 있으며 어떻게 아브라함의 시대에 나타나고 있고 어떻게 출애굽 시대에 나타나고 있는가,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는 다윗의 시대에 어떻게 나타나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신약 시대에는 어떻게 밝히 계시가 되고 있는가, 이렇게 시간과 역사 속에서 ‘하나님 나라‘라는 성경의 대 주제가 어떻게 점진적으로 밝히 계시가 되고 있는가의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을 성경 신학이라 하는 것입니다. 어렵지 않지요?
그리고 성경만이 직선적인 역사관을 갖고 있습니다. 직선적 역사관이란 순환적(循環的) 역사관과 비교해서 이 땅의 역사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는 역사관을 말합니다.
반면에 동양사상이나 뉴에이지 사상 등에서 주장되는 순환적 역사관은 역사는 시작과 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존재했으며 끊임없이 순환되고 있다는 역사관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피조물을 가리켜 자연(自然)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자연(自然)은 하나님의 이름을 한자로 표기한 것입니다. 스스로 자(自) 그럴 연(然) ‘스스로 있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 이름은 우리가 출애굽기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모세에게 가르쳐 주실 때 들어 본 이름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자연을 거대한 신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들은 신이며 그 것을 깨닫는 자들이 신의 경지에 까지 오를 수 있다는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동양사상이며, 불교이며, 힌두교이며, 뉴에이지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압니다. 사람들이 자연(自然)이라 부르는 것은 신이 아니라 ‘피조물’이며 그 피조물을 창조하신 분만이 ‘스스로 계신 자’라는 것을 말이지요. 그리고 그 분에 의해 시간과 물질과 공간이 창조된 것이고 이 역사는 끝없이 순환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끝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게 직선적 역사관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성도들은 반드시 역사의 종말이 있음을 인지하고 종말론적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순환의 논리에 의해 또 다시 윤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죽음이라는 종말과 심판이라는 무시무시한 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직선적 역사관에 의한 하나님 나라 백성다운 삶을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그 전체가 하나님 나라라는 하나의 주제로 일관성 있게 성도들에게 하늘의 비밀을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주제를 조금 미시적(微視的)으로 분해 해보면 은혜, 사랑, 예수 그리스도, 구속사, 언약, 하나님의 주권 등으로 표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일관성 있게 우리 구원의 유일한 길이신 예수,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등극하신 예수에 관해서만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이고, 그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인 구속사만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며, 그 구속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 나라의 법이요 하나님의 약속인 언약으로 이어지는 책인 것이며,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이 시작하셔서 하나님이 끝내신다는 명확한 그림인 하나님의 주권만이 기록된 책인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창세기의 벌거벗은 아담을 요한 계시록의 의의 흰옷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어떻게 만들어 가시는가를 설명하는 책인 것입니다. 그 방법으로 하나님은 독생자의 죽음이라는 방법을 택하셨으며 그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가 인간으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과정을 반복해서 설명해 주고 있는 책입니다.
성경은 타락, 심판, 구원, 천국잔치의 순서로 일관성 있게 은혜라는 주제를 풀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타락한 인간이 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점진적 계시의 형식으로 써 놓은 것이 성경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 때 가나안에 입성함으로 한번 그 주제 설명이 초보적으로 끝나고, 사사기에서 또 타락하여 사무엘하에서 솔로몬이 성전을 완성함으로 한번 또 끝나고, 열왕기 서에서 또 타락을 보여주고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에서 성전을 완성하고 잔치를 벌이는 장면으로 또 한 번 끝나며,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에서 그 지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냐를 설명하고 아가서에서 하나님과 그 백성들과의 천국에서의 사랑을 묘사하며 또 한 번 끝이 납니다. 그리고 이사야, 예레미야, 예레미야 애가, 에스겔, 다니엘, 호세아에서 또 다시 인간의 타락을 보여주며 학개 스가랴 말라기에서 또 성전을 완성하여 천국 잔치를 다시 보여주고, 말라기에서 ‘봐라 너희들 힘으로는 안 되지?’ 하시면서 마태복음을 여시며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를 등장시키셔서 지금까지 그림자로 보여주셨던 하나님의 백성의 구속의 드라마의 실체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즘 새벽에 요한복음을 강해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4장까지를 마쳤습니다. 거기까지 내용이 바로 예수로 인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구원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해 주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지 않았나요?
주님은 유대인중의 유대인이라 하는 니고데모에게 네가 가지고 있는 배경이 절대 너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시고 인간적인 면에서 전혀 불가능한 사마리아 여인을 등장시켜 그녀가 구원을 받음으로 구원은 이렇게 인간 쪽에서 아무런 근거를 찾을 수 없는 것이란 것을 비교해서 설명해 주시지요. 그리고 스스로는 단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사람, 자기에게 구원을 받을 만한 어떤 근거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38년 된 병자를 구원하심으로 구원이란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밝히 설명해 주며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풍성한 하늘의 떡에 관해 설명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은혜가 성령에 의해 어떻게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적용되는지를 설명해 주시는 것이 사도행전이고 그것을 교리적으로 정리를 해 놓은 것이 로마서이며 고린도서부터 유다서까지가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지침으로 신약의 시내산 언약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대단원의 계시록으로 마치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두 예수에 관한 이야기가 맞는 것입니다. 성경이 직접 그 사실을 확인시켜 줍니다.
(눅24:25-27)
25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들은 참 어리석습니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마음이 참 무딥니다. 그리스도가 반드시 이런 고난을 겪고서,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예수께서는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자기에 관하여 쓴 일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엠마오 마을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을 못 알아보는 제자들에게 선지자의 글들, 즉 성경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자기에 관한 것, 예수에 관한 것이라고 성경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예수에 관해서만 쓰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약 성경에는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가 숨어 있을까요?
(요8:56)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게 될 것을 즐거워하였고, 마침내 보고서 기뻐하였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대상이 누구였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렇지요? 우리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행적에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상을 섬기며 자기의 유익을 위해 아내를 두 번씩이나 팔아먹는 아브라함을 모리아 산의 아브라함으로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에 초점을 두고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불가능한 죄인을 하나님의 벗으로 만드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아들을 죽여 원수들을 살려내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완성이 될 것이라는 것을 예표 하는 것이 아브라함의 이야기의 주제인 것입니다.
(요12:41)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그가 예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그가 예수를 가리켜서 한 것이다.
(히11:24-26) 믿음으로 모세는, 어른이 되었을 때에, 바로 왕의 공주의 아들이라 불리기를 거절하였습니다. 오히려 그는 잠시 죄의 향락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학대받는 길을 택하였습니다.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모욕을, 이집트의 재물보다 더 값진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는 장차 받을 상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이사야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모세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능욕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구약의 우리 믿음의 조상들도 비록 그림자처럼 주어지긴 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 성경도 여러 인물과 역사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책인 것입니다.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가 신약에 와서 그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명쾌하게 정리가 되는 것이지요. 보세요.
(히1:1-2) 하나님께서 옛날에는 예언자들을 시켜서,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으나, 이 마지막 날에는 아들을 시켜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들을 만물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그로 말미암아 온 세상을 지으셨습니다
구약의 수많은 선지자들의 예언과 여러 인물들의 발자취가 전부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그 이야기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품으로 계시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을 마지막 계시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로 수렴이 된다는 말입니다. 성경의 모든 예언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결론지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여러분이 좋아하는 예언은 무엇에 관한 예언입니까? 여러분 중에서도 예언에 관심 있는 분들 많으시지요?
저는 LA에 있는 유명한 목사님들이 하와이까지 비행기 타고 가서 예언 받고 오는 것 많이 봤습니다. 도대체 여러분은 어떤 예언을 듣고 싶어서 그렇게 예언 하는 자들에게 광분하시는 것이지요? LA의 큰 교회에서도 예언의 은사가 있다고 하는 사람 한명 불러다가 수백 미터씩 줄서서 예언 받으려 하는 것을 자주 보지 않으십니까? 대부분 여러분이 원하는 예언은 이 땅에서 자기의 길흉화복에 관한 궁금함이지요? ‘이 땅에서의 나의 미래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그거 아닙니까? 그래서 예언하는 사람이 자신의 성품이나 처한 상황이나 환경 등을 간혹 알아맞히면 놀래서 뒤로 자빠집니다. 일찍이 주역을 심도 있게 공부한 저도 그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정 그런 예언이 듣고 싶으시면 복채(卜債) 들고 저를 찾아오세요. 제가 음양오행(陰陽五行)과 십간십이지(十干十二支), 사주(四柱) 팔자(八字) 잘 짚어서 정확하게 봐 드릴게요.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을 바라보고 이 세상을 목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런 것에 일부러 관심 두고 찾아다니는 사람들을 가리켜 이 땅에 눈을 두고 사는 사람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을 지나면 우리에게 오게 될 영원한 세상을 바라보고 추구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바로 그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소망이 적혀있는 책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성경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온통 이 땅에서의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고 있다면 어찌 그가 하늘에 소망을 둔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의 미래는 성경에 명확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영원한 삶, 그 좋으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영원한 안식‘ 그 거 이외에 뭘 더 알고 싶으신가요? 성경은 여러분이 이 땅에서 어떻게 하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가에 관해 단 한 마디도 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그런 저급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성경에 기록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다 성경에 기록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쓰신 하나님의 책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 이외에 직접 말씀을 하신다면 지금도 성경은 계속 쓰여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어떻게 오늘날에도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는다는 이들이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부목사로 시무하던 교회에서도 담임 목사님께서 예배 시간에 종종 ’지금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제 이름을 부르시며 신장이 안 좋은 성도들의 병을 지금 고쳐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등등의 예언을 하시곤 했습니다. 그게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 맞다면 그 말씀은 성경에 기록이 되어도 손색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니까요. 계시라면서요? 그런 종류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내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라고 자신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성경 말고도 이 세상에 여전히 내려오고 있다는 말 아닙니까? 그러면 우리에게 성경은 절대적 계시가 되지 못합니다. 수많은 계시 중 하나에 불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은 우리 제한된 이성의 인간들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에서 이미 완성이 되어 성경으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책에다가 무엇을 보태거나 빼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강력한 경고의 말씀을 직접 기록해 놓으신 것입니다.
(계22:18-19) 나는 이 책에 기록한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합니다. 누구든지 여기에 무엇을 덧붙이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 책에 기록한 재앙들을 덧붙이실 것이요, 또 누구든지 이 예언의 책에 기록한 말씀에서 무엇을 없애 버리면, 하나님께서 이 책에 기록한 생명 나무와 그 거룩한 도시에서 그가 누릴 몫을 없애 버리실 것입니다.
잘 보세요. 요한계시록은 신약 성경 중에 요한이 가장 마지막에 쓴 성경입니다.
18절에 있는 ‘외에’라는 전치사는 헬라어로 ‘epi’라는 단어입니다. 그 단어는 먼저 선행한 것들 위에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 구절의 진의는 ‘이 구절 앞에 기록된 모든 성경66권위에’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이렇게 성경에다가 뭔가 더 보태면 너희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여전히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 위에다가 ‘내가복음’을 쓰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말씀은 이미 완성되었고 하늘나라에 대한 계시는 이것 한권으로 충분합니다. 여러분,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인정하시지요?
그 것을 인정하지 못하시는 분은 어서 근처의 달마사로 가 주세요.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배우는 성도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목사인 저도 아직 10%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매일 매일 새벽 세시 반이면 일어나서 밤11시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꼬박 성경만 연구하고 성경만 읽습니다. 그런데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얼마나 알고 계시기에 또 다른 계시를 찾아 헤매고 계십니까? 분명하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 공인된 이 성경책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도 제대로 다 알지 못하면서 그게 정말 하나님의 말씀인지, 말하는 자의 속임수인지, 아니면 마귀의 속삭임인지 확인도 안 된 또 다른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다니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그러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됩니다. 정 다른 계시가 듣고 싶으시거든 이 책이나 다 숙지하고 찾아다니세요. 여러분이 고통과 환난의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으시거든, 그리고 행복한 앞날을 맞고 싶으시거든 그런 예언자들을 찾아다니지 마시고 성경을 공부하세요. 하나님은 분명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성도의 무기로 주셨습니다.
(엡6:11)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시는 장비로 완전무장을 하십시오.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구절이니까 한 번 대답해 보세요. 전신갑주에서 유일한 공격무기가 무엇입니까? 성령의 검입니다. 그렇지요? 성경은 성령의 검을 ‘이는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유일하게 성경만을 무기로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직 완성도 안 된 무기를 주시면서 마귀의 궤계에 대적하라고 하실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성경은 완성된 하나님의 말씀이요 계시입니다. 성경 이외에 다른 것에 여러분의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우리 교회는 성경을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성경이 이야기하는 바를 정확히 요약해 놓은 것이라 믿습니다. 그래서 교인들 모두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그리고 벨직 고백서등을 열심히 공부하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영국의회가 선정한 존 오웬을 비롯한 151명의 세계적인 신학자들과 성직자들이 4년여 간에 걸쳐 완성해 놓은 장로교 교리집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장1절에 이렇게 명시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여러 시대에, 그리고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자신을 계시하시고 (히1:1) 자기의 교회에 자신의 뜻을 선포하시기를 기뻐하셨으며, 그 후에는 진리를 더 잘 보존하고, 전파하기 위해서, 그리고 육신의 부패와 사탄과 세상의 악에 대비하여 교회를 더욱 견고하게 하며, 위로하시기 위해서 바로 그 진리를 온전히 기록해 두시는 것을 기뻐하셨다. 이 같은 이유로 성경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자신의 뜻을 직접 계시해 주시던 과거의 방식들은 이제 중단되었다.’ 어떠세요? 명확하지요? 그런데 아직도 계시를 받는다는 이들은 도대체 뭡니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장6절에는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 신앙과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에 관하여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는 모든 계획은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성경에다 성령의 새로운 계시에 의해서든지 혹은 인간들의 전통에 의해서든지 아무 것도 어느 때를 막론하고 더 첨가할 수 없다.’
여러분 오직 성경만이 하나님께서 우리 백성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시는 방법입니다. 다른데서 찾지 마십시오. 혹 영성 깊어 보이는 어떤 이들이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이 지금 나에게 말씀하시길’하면서 이야기를 꺼내거든 얼른 좋은 정신병원을 소개해 주세요. 그런 사람들은 정신 분열 증상을 다분히 갖고 있는 사람들이니까요.
여러분 도대체 성경을 몇 번이나 읽어보셨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이나 제대로 읽어 보셨습니까? 아니 이렇게 명확한 하나님의 말씀도 제대로 다 읽어보지도 않고서 무슨 다른 말을 또 듣고 싶어 하세요? 성경은 무오하며,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경 이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른 특별계시를 주시지 않습니다. 속지 마십시오. 그리고 분별하실 수 있는 실력을 키우세요. 어떻게요? 참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요 .
제6장 헌금
(막12:41-44)
41 예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셔서,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을 넣는가를 보고 계셨다. 많이 넣는 부자가 여럿 있었다.
42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은 와서, 렙돈 두 닢, 곧 한 고드란트를 넣었다.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곁에 불러 놓고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헌금함에 돈을 넣은 사람들 가운데, 이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
44 모두 다 넉넉한 데서 얼마씩을 떼어 넣었지만, 이 과부는 가난한 가운데서 가진 것 모두, 곧 자기 생활비 전부를 털어 넣었다."
‘아니 서머나 교회에서 헌금 설교를 하다니 목사가 드디어 헌금을 강요하기 시작하는구나’ 하고 오해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오늘 주제는 개혁주의 목사들이 설교하기를 많이 꺼리는 내용입니다. “헌금”그러나 헌금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신앙의 본질을 공부하는 데에 빠져서는 안 될 내용이기에 여러분들에게 헌금에 대한 정확한 지도를 그려 드리고자 오늘 교리 설교의 주제를 ‘헌금’으로 택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예수님이 헌금함 맞은편에 앉으셔서 누가 어떻게 헌금하는지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참 재미있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뭐가 그렇게 궁금하셨을까요? 여러 부자들이 연보를 많이 넣고 갔습니다. 그런데 한 과부가 자기의 전 재산을 가지고 왔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그 여자의 전 재산이란 것을 금방 아셨습니다. 많지 않은 돈이었지만 그 여인은 그 것을 모두 헌금함에 넣었습니다. 지금의 돈으로 따지면 1불 정도도 안 되는 아주 적은 돈입니다. 오죽하면 그 렙돈은 너무 가벼워서 연보함에 떨어지는 소리가 구별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에게는 전 재산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여인이 그 돈을 모두 헌금함에 넣고 나면 당장 그 여인의 끼니는 어떻게 될까요? 그것 모르실 예수님이 아닌데 말리지 않으십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 이 대목을 읽으면서 기실 주님의 이런 대응을 기대했습니다. ‘당신의 성의는 충분히 알겠다. 그 마음은 이미 받았으니까 하나만 넣고 하나는 도로 가지고 가라. 가서 식구들하고 빵이라도 사먹어라.’ 그래야 사랑의 예수님답지 않습니까? 그런데 전 재산을 넣은 그 여인을 칭찬하십니다. 주님은 그렇게 자기 백성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열심히 긁어 모으시기만을 좋아하시는 수전노 같은 분입니까?
예수님은 왜 그 가난한 여인이 연보함에 전 재산을 넣은 것을 칭찬 하셨을까요? 어떤 분은 이 본문을 가지고 ‘우리도 그런 여인의 열심을 본받아 헌금에 힘쓰자.’하고 결론을 내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물론 그렇게 결론을 내리면 목사도 좋고 듣는 청중도 이해가 빠르겠지요. 그런 것을 일석이조라고 하나요? 그러나 그렇게 해서 잡은 새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이미 들어서 숙지하고 계신 엉뚱한 결론들은 다 내려놓으세요. 그리고 그 비어진 자리에 오늘 설교를 채워 넣으십시오.
오늘 본문의 논리를 그렇게 결론을 낸다면 우리는 헌금에 힘쓰는 정도가 아니라 버는 족족 다 갖다 바쳐야 합니다. 주님은 자신의 전 재산을 다 바친 과부를 칭찬하셨으니까. 여러분 정말 자신 있으세요? 정말 우리도 그렇게 전 재산 다 갖다 바쳐야 하는 것입니까? 그래야 주님께 칭찬 받을 수 있나요?
이 가난한 과부를 칭찬하신 이야기는 하나님의 교회, 즉 천국 백성의 모습은 어떠한 것인가를 힌트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순절 날 성령 강림 이후 하나님의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그 교회는 예수님의 피 값으로 만들어진 교회였습니다. 거기는 누룩이 들어올 수 없는 순수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였지요. 그래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리 큰 잘 못을 범하지 않았음에도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린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아니니아와 삽비라가 뭘 그리 큰 잘못을 했습니까? 전 재산 다 팔아서 자기 먹을 것 조금 챙기고 교회에 다 헌금했는데 그게 정말 그 자리에서 급살을 맞을 잘못입니까? 그 것은 하나님의 교회는 어떤 작은 티라도 들어올 수 없는 순결하고 순수한 것이라는 것을 성경을 읽는 독자들에게 메시지로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제가 말하는 교회는 이 땅의 지역 교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는 더러움 투성이지요. 하나님의 교회는 창세전에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적 공동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 하나님의 교회는 잡티가 들어 올 수 없는 곳입니다. 그 곳은 천국을 상징하는 곳이었습니다. 거기의 모습이 어떠했나요?
(행4:32-35)
32 많은 신도가 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서, 누구 하나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33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그들은 모두 큰 은혜를 받았다.
34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판 돈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고, 사도들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었다.
네 것 내 것 없이 전 재산을 내어놓고 서로 통용하며 살아가는 그런 곳, 그러므로 핍절한 사람, 가난한 사람이 없는 곳을 우리는 천국이라 하고 그 모형으로 교회를 이 땅에 주신 것이며, 그러한 초대 교회의 모습을 성경에 기록해 놓음으로서 천국에서의 교회의 삶을 힌트 하고 계신 것입니다. 어떻게 사람들이 자기 생명처럼 여기는 자신의 재산을 몽땅 내어놓고 다른 이들과 유무상통할 수 있을까요? 천국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내 소유가 나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나의 힘이요 나의 주인이라는 확신 속에 거하는 자들이 바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거든요. 성경은 지금 그 모습을 그림자로 잠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신명기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궁극적으로 들어갈 곳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신15:4) 너희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없게 하여라. 그러면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에게 유산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에서 너희가 참으로 복을 받을 것이다
인류의 역사상 가난한자가 없었던 때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분명 약속하셨잖아요?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여호와가 명하는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복을 받아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을 것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잖아요? 그런데 왜 역사 속에 가난한 사람이 없었던 때가 없을까요? 답은 간단하지요. 그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만 듣고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한 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약의 한 모퉁이에 그런 공동체가 있더란 것입니다. 그게 교회였습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누군가가 하나님의 명령을 다 지켜 행한 분이 계시다는 것인데 그 분이 누구일까요? 그런 사람이 있었으니까 정말 가난한 자가 없는 공동체가 생겼을 것 아닙니까?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조건을 다 충족시키시고 하나의 공동체를 탄생시키신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모든 자들이 자기의 전부를 내어놓고 서로 나누며 가난한 자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유무상통하는 초대교회의 그림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하늘나라 백성들의 공동체를 모델로 잠깐 그려놓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 속에 들어있는 교회인 것입니다. 가난한 자가 없는 그 공동체 속에 들어와 버린 이들이 성도들인 것입니다. 그럼 이제 우리는 교회에다 모두 다 갖다 바쳐야 하나요?
그럼 이제 주님께서 전부 다 바친 자를 칭찬하신 것이 무슨 의미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성전에 제사를 지내러 갈 때 제물을 가지고 갔습니다. 다 아시지요? 그 제물에 자신의 죄를 전가시켜 태워버림으로 그 사람의 죄가 사해지는 율법의 내용을 따르기 위함입니다. 그 제물은 누구를 상징하는 것이었나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속죄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제물을 태움으로 죄 사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제물이 상징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았던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리키는 상징이었던 것입니다. 조금 비약을 해보면 신약에서의 그 제물이 바로 헌금인 것입니다. 그 중간에 설명할 부분이 많지만 오늘은 헌금에 대해서만 설명을 드릴 것이기 때문에 조금 건너뛰었습니다. 나중에 자세하게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구약에서의 제물이 오실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었다면 신약시대의 헌금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이겠습니까?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겠지요?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완벽하게 들으시고 지켜내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를 영원한 죽음에서 건져내신 참 제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 헌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헌금을 드린다는 것은 이것으로 하나님의 일을 돕겠다고 나서는 것이 아니라 나는 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고 의롭게 되었다는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그렇게 헌금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면 우리가 헌금을 한다는 것은 내 안에 이미 들어와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앞에 내어놓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자, 지금부터 잘 들으세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무엇인지 여러분 잘 아시지요? 우리 성도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로 연합이 되어 하나님께 드려짐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헌금으로 바치는 그 예수 안에 누가 들어있다는 소리입니까? 바로 우리 자신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예수가 내 안에 내가 예수 안에 있는 것이니까요. 그러면 헌금은 결국 무엇을 드리는 것입니까? 바로 나 자신을 모두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헌금인 것입니다.
나는 저주받아 죽어야 할 자였습니다. 그런데 생명의 속전인 은 삼십 냥에 팔리신 예수님께서 나의 속전이 되셔서 죽어야 할 나를 살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예수님 것이 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나’라는 존재는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를 다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순종이라 하는 것이고, 항복이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올 바르게 깨달은 자들은 그렇게 자신을 하나님 앞에 쳐서 복종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순종의 삶이 나오고, 헌금이 나오고, 자신의 것을 비워 남을 살리는 구제와 봉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헌금을 비롯한 종교행위는 전부 나 자신을 하나님께 모두 드리는 행위이기에 주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친 그 여인을 예로 들어 헌금의 내용을 우리에게 메시지로 던지시는 것입니다.
“너는 너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아는 자구나. 그래서 바로 다음끼니가 어떻게 될 것인가도 걱정하지 않고 너희 가진 것을 다 털어 낼 수 있는 믿음의 여인이구나.” 하고 그 여인을 칭찬하시며 우리 교회에게 이 세상에서 어떠한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헌금은 액수의 많고 적음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헌금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참 제물에 의해 내가 구속되었다는 그러한 믿음에서 근거한 것인가 아닌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이제 하나님만이 저의 힘이요 소망이라는 것을 알기에 세상 사람들이 목숨처럼 여기는 이 세상의 힘을 대표하는 물질을 하나님 앞에 이렇게 바칠 수 있습니다’ 이게 헌금의 정신입니다. 그 헌금의 정신을 올바로 깨닫고 실행에 옮긴이들이 고린도서를 쓴 바울에게서 언급이 됩니다.
(고후8:1-5)
1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마케도니아 여러 교회에 베푸신 은혜를 여러분에게 알리려고 합니다.
2 그들은 큰 환난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기쁨이 넘치고, 극심한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넉넉한 마음으로 남에게 베풀었습니다.
3 내가 증언합니다. 그들은, 힘이 닿는 대로 구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힘에 지나도록 자원해서 하였습니다.
4 그들은, 성도들을 구제하는 특전에 동참하게 해 달라고, 우리에게 간절히 청하였습니다.
5 그들은, 우리가 기대한 이상으로, 먼저 자기를 주님께 드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바쳤습니다.
마게도냐 교회 교인들이 성도를 구제하기 위해 연보를 했는데 그들의 상황이 어떠했는지 보세요. 그들은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 있었고 극한 가난에 시달렸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풍성한 연보를 했다는 것입니다. 힘대로 할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서 제발 우리도 그 연보에 동참하게 해 달라고 바울에게 간구를 했다는 것입니다.
이 가난한 사람들이 이 땅에서의 자신들의 안위를 걱정했다면 그렇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어떻게 그렇게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들이 가진 것을 힘에 지나도록 헌금할 수 있었을까요?
그들의 관심은 이미 이 땅의 것들이 아니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늘의 복된 소망이 이미 자리하고 있었기에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드린 것입니다. 그러고도 그게 아깝지 않은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소유가 확실하다면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므로 아까울게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앙고백의 표현이 헌금인 것입니다. 그러한 신앙고백은 하나님께서 주신 참 믿음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이므로 성도는 자원하고 준비하여 헌금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후9:5-7) 그러므로 나는 그 형제들에게 권면하여, 나보다 먼저 여러분에게로 가서, 여러분이 전에 약속한 선물을 준비해 놓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이 이 선물을, 억지로가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난 선물로 마련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점은 이러합니다. 적게 심는 사람은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사람은 많이 거둡니다. 각자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해야 하고, 아까워하면서 내거나, 마지 못해서 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내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보세요. 헌금은 이렇게 아무렇게나 거지 동냥 주듯이 교회에 와서 주머니에 있는 것 꺼내서 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앙고백과 함께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앙 고백 없이 하나님께 소액 투자하고 많은 배당금을 받겠다고 헌금을 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적게 심는 자라 하는 것이며 ‘나는 하나님의 것이므로 나를 하나님께 드립니다.’라는 신앙고백과 함께 헌금을 드리는 자를 많이 심는 자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헌금을 적게 하면 하나님이 적게 보답하시고 헌금을 많이 하면 하나님이 많은 것으로 보답하신다는 그런 식으로 이 구절들을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이 구절의 진의는 적게 심는 자, 즉 복음과 믿음에 근거하지 않고 헌금을 한 자들은 풍성한 천국과는 아무 상관없는 적게 거두는 자로 남게 되고 많이 심는 자들, 즉 믿음에 근거한 자신을 드리는 신앙고백을 근거로 헌금을 한 이들은 천국의 풍성함을 거둔다는 말이 많이 거둔다는 말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당연히 즐겨 낼 수밖에 없지요.
십의 일조가 뭐 그리 대단합니까? 십의 십이 다 하나님 것인데요. 그런 사람들은 십일조 해놓고 자랑하거나 그 것 알아주지 않는다고 실망하지 않습니다. 나와 하나님 사이의 신앙고백에 왜 남의 눈을 의식하는 바보 같은 행동을 합니까? 헌금은 신앙고백으로 드려질 때만 즐겨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니면 아까워서 어떻게 내냅니까? 그러니까 여러분 이 중에 혹시 아직 복음을 제대로 깊이 깨닫지 못하고 아까운 마음에 헌금을 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지금 당장 멈추세요. 그런 사람은 헌금을 안 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 사람은 헌금을 하면 할수록 죄를 짓는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까운 것을 교회에다 갔다 내고는 ‘하나님이 내가 이정도 했는데도 나를 알아주시지 않는다면 정말 나 화날 거야’ 이건 죄입니다.
어떤 집사님이 술을 아주 좋아하셨는데 군인이셨습니다. 군인은 군대 PX에서 술을 사 마실 수 있어 아주 저렴하게 마신다지요. 그런데 헌금을 하려고 하면 5불이면 술이 열 잔인데 하는 생각 때문에 손이 부들부들 떨리더랍니다. 그렇게 아까우면 헌금 하지 마세요. 교회는 여러분이 헌금을 안 한다고 망하고 여러분이 헌금을 많이 해서 흥하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걱정 마시고 정말 온전한 신앙인이 되셨을 때 그 때 아낌없이 ‘나’를 하나님께 드리세요.
여러분이 헌금을 하시면서 이 돈이면 하나님께 꽤 도움이 되겠지 하고 내는 사람이 있다면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돈이 필요해서 헌금을 하라고 하시겠습니까? 오병이어의 기적을 예로 들면서 하나님께 적은 것을 바치면 하나님께서 그 돈을 잘 굴려서 크게 쓰신다고, 그러니까 가진 대로 정성껏 헌금하면 하나님이 그 돈으로 하나님 사업에 잘 쓰실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리고 그렇게 오병이어를 내어놓은 자를 하나님께서 몇 십 배로 축복하신다는 귀신 씬 나락 까먹는 이야기에도 속지 마세요. 여러분은 헌금을 한 만큼 경제적으로 손해입니다.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몇 배로 투자금액을 부풀려 갚아 주실 것이라 오해 하지 마세요. 그럴 심산으로 헌금을 하시는 것이라면 좋은 재테크 상담원을 찾아가세요. 여러분은 헌금을 하면 할수록 이 땅의 것에 오염된 나를 버리는 것이지 이 땅의 것들을 어 많이 얻어내기 위한 투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꾸로 생각하고 계신 거예요.
오병이어의 사건은 여자와 아이 합치면 족히 이만명은 넘는 사람들을 먹이는데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얼마나 쓸모없고 하찮은 것인가를 대비시키기 위한 소품일 뿐입니다. 왜 모세를 팔팔한 40대 때 부르시지 않고 여든 살의 노인이 되어서야 부르셨을까요? 왜 바울을 스데반을 죽이는데 동참하게 하여 평생 그 죄책감에 시달리게 하시면서 그를 부르셨을까요? 그런 잔인한 것은 미리 좀 말려 주실 수 도 있었잖아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니까.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은 너희가 가진 것으로 너희의 힘과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게 해 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우리는 헌금을 하면서 하나님, 이것이 하나님의 일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헌금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 우리는 돈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가장 큰 기쁨을 맛본 자가 누구 일 것 같으세요? 그것을 드린 어린아이와 그것을 받아 예수님께 전한 제자들일 것입니다.
성경 어디에 그 오병이어를 바친 아이를 주님께서 축복하셔서 거부(巨富)가 되게 해 주셨다는 구절이 있습니까? 그것은 단지 전혀 가능성 없는 것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하늘의 풍성함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어린 아이를 생각해 보세요. 조금 전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보리떡입니다. 그것이 수천 배, 수만 배가 되어 백성들의 배를 불리고 있습니다. 조금 전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물고기 두 토막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렇게 수 만 마리의 물고기로 둔갑하고 있습니다. 누가 제일 은혜를 받았겠습니까? 그 것을 내 놓은 아이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어디서 어떻게 나오는지 알게 뭐예요? 하지만 본인은 알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왜 헌금을 하도록 하시는지 아세요? 우리의 돈으로 하나님을 도와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 우리에게 헌금을 하라 명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힘을 대표하는 그 돈을 자신을 위해 쓰지 않고 서슴없이 내어 놓을 수 있는 믿음을 가르치기 위해, 그리고 그러한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헌금을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시험에 합격한 자들이 축복 받은 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헌금은 우리 자신을 축복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인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일이 돈으로 이루어집니까? 정말 사람의 마음을 돈으로 바꿀 수 있나요? 정말 돈으로 죄인들의 회개를 이끌어 낼 수 있나요? 그런데 그 불가능한 우리의 돈으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해 나가시는 것을 보며, 역시 하나님은 위대하시며 오늘도 살아 계시다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실감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좋은 선생님은 자신을 먹여 살릴 등록금을 내주는 학생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르칠 학생이 필요한 사람이 좋은 선생님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도울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가르치실 사람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게 성도입니다. 우리는 헌금을 하면서 그 대열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말이 나온 김에 십일조에 관해서도 설명을 하고 가지요. 여러분 십일조가 뭡니까? 하나님이 왜 이스라엘에게 십일조를 하라고 시키셨지요? 하나님이 하늘나라 재정이 부족하셔서 그렇게 시키신 것입니까?
십일조에서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십일조는 약속의 땅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일조를 명령하신 것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고 난 후였습니다.
(레27:30) "땅의 십분의 일, 곧 땅에서 난 것의 십분의 일은, 밭에서 난 곡식이든지, 나무에 달린 열매이든지, 모두 주에게 속한 것으로서, 주에게 바쳐야 할 거룩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의 땅에서 나는 소산과 가축의 십분의 일을 꼭 하나님께 바치도록 했습니다. 그 것은 하나님께서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은혜로 주신 그 약속의 땅에서 나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것이라는 것을 고백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 는 의도에서 십일조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 땅과 그 땅에서 나는 소산은 하나님의 전투를 통해 너희에게 은혜로 주어진 것이라는 걸 기억하라’ 는 하나님의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이 바로 십일조 인 것입니다.
신명기에 가면 그 십일조가 어떤 것인지 조금 더 계시가 점진됩니다.
(신14:22-23) "너희는 해마다 밭에서 거둔 소출의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 너희는,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처음 난 소와 양의 새끼와 함께, 주 너희의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을 두려고 택하신 곳으로 가지고 가서, 주 앞에서 먹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너희는 주 너희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배우게 된다.
여기 보시면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권속들과 함께 먹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십일조는 그 용도가 우리가 아는 것처럼 단순히 레위 인들의 생활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을 다시 하나님께 바침으로 그 모든 것들이 은혜라는 것을 확인하고, 그 것을 자신과 권속들이 나누어 먹으며 잔치를 벌이는 것이 바로 십일조 인 것입니다. 그런데 23절을 보시면 십일조를 먹으라고 하시면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우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십일조라는 것은 ‘우 양의 처음 난 것‘ 즉 ’맏물‘ ’맏이‘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말하는 ‘맏물‘이 무조건 처음 난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민18:12-13) 가장 좋은 기름과 가장 좋은 포도주와 곡식과 그들이 나 주에게 바치는 첫 과일 모두를, 내가 너에게 준다. 그들의 땅에서 난 처음 익은 열매 가운데서, 그들이 나 주에게 가져 오는 것은 모두 너의 것이다. 너희 집에 있는 정결한 사람은 모두 그것을 먹을 수 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레위 인들과 제사장들의 분깃에 관해서 설명하시는 구절입니다.
아시다시피 레위 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십일조로 그 분깃을 삼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의 분깃을 “첫 소산”이라고 표현을 하시면서 “곧 제일 좋은 기름과 제일 좋은 포도주와 곡식”이라고 부연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바쳤던 것은 단순히 제일 처음 익은 곡식과 제일 처음 태어난 짐승이 아니라 ‘가장 좋은 것‘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거기에는 그렇게 ’가장 좋은 것‘도 하나님이 은혜로 허락하신 하나님의 것이라면 ’그 뒤의 별로 안 좋은 것들은 말할 것도 없이 모두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신앙 고백적인 내용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맏물’은 단순히 첫 번째 태어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맏물이 속해 있는 전체를 대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허락하시는 세상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좋은 어떤 복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그럼 ’맏물’하면 대표적으로 생각나는 게 뭐가 있지요? ‘출애굽, 유월절‘
그러니까 이 십일조는 유월절과도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월절에 애굽의 장자들이 다 죽었을 때 하나님께서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이스라엘의 장자를 모두 살려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이스라엘에게 ‘내가 너희 장자들을 살려 주었으니 처음 난 것은 사람이건 짐승이건 모두 나에게 바치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민3:13) 처음 난 것은 모두 나의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집트 땅에서 첫 번째로 난 모든 것을 칠 때에,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이스라엘에서 처음 난 것은 모두 거룩하게 구별하여 나의 것으로 삼았다. 나는 주다.”
(레27:26) 짐승의 맏배는 새삼스레 거룩한 것으로 바칠 것이 없다. 맏배는 이미 나 주의 것이기 때문이다. 소든지 양이든지 그것들은 다 나 주의 것이다.
이렇게 십일조에는 유월절 어린양에 의해 살아난 ‘처음 난 것‘’맏이‘ 들의 ’대신’ 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바쳐질 ‘맏물’에 대한 명령은 이미 출애굽기에서부터 주어졌던 것입니다.
(출13:11-15)
11 주께서, 너희와 너희 조상에게 맹세하신 대로, 너희를 가나안 사람의 땅에 이르게 하셔서, 그 땅을 너희에게 주시거든(약속의 땅에서)
12 너희는 태를 처음 열고 나오는 모든 것을 주께 바쳐라. 그리고 너희가 기르는 짐승이 처음 낳는 수컷은 다 주의 것이다. (초태생 중 수컷은 곧 ‘장자’를 의미)
13 나귀의 첫 새끼는 다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하나님께서 나귀는 그냥 안 받으시겠답니다. 나귀는 어린 양으로 대신 바치라고 하십니다. 만일 그 나귀를 대신할 어린 양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렇게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만일 나귀 대신 바쳐질 어린양이 없으면 나귀는 목이 꺽여 죽게 됩니다. 여러분 지금 이게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지 잘 아시겠지요? 우리 죄인들은 우리를 대속 하신 어린양이 없었다면 모두 목이 꺽여 줄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너의 아들중 모든 장자 된 자는 다 대속할지니라(인간의 모든 장자들도 다 대속 하라고 하십니다)
14 뒷날, 너희 아들딸이 너희에게 묻기를,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하느냐고 하거든, 너희는 아들딸에게 이렇게 일러주어라. '주께서 강한 손으로, 이집트 곧 종살이하던 집에서 우리를 이끌어 내셨다.
15 그 때에 바로가 우리를 내보내지 않으려고 고집을 부렸으므로, 주께서, 처음 난 것을, 사람뿐만 아니라 이집트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을 죽이셨다. 그래서 나는 처음 태를 열고 나온 모든 수컷을 주께 제물로 바쳐서, 아들 가운데에서도 맏아들을 모두 대속하는 것이다.
이렇게 맏물은 어떤 것을 대표하며 대신하는 ‘대속’의 효능이 있는 것입니다. 십일조가 바로 그 것을 내용으로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계시는 계속 점진됩니다. 이 개념이 히브리서까지 어떻게 이어지는지 잘 보세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장자들 대신에 한 지파를 선택하셔서 전체 이스라엘 지파를 대표해서 장자로 삼으셨습니다. 그게 레위 지파입니다. 레위 지파는 하나님께 전체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바쳐진 대속 물이기 때문에 약속의 땅에서 기업을 받지 못합니다. 그들은 제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는 야곱의 12아들 중 요셉의 두 아들이 각각 한 지파씩을 이루었기 때문에 원래 이 ‘에브라임과 므낫세’지파를 포함하면 13지파임에도 불구하고 레위 지파는 약속의 땅에서 지파로서의 이름을 상실해 버리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12지파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레위 지파는 나머지 12지파를 대신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희생 제물로 바쳐진 것입니다.
(민3:40-41)
40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태어난 지 한 달이 넘은 맏아들은 모두 등록시키고, 명단을 작성하여라
41 나는 여호와라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난 자의 대신에(장자들 대신에, 장자는 이스라엘 전체를 상징하는 것이므로 레위인은 이스라엘 전체를 대신하고 대표하는 사람) 레위인을 내게 돌리고 또 이스라엘 자손의 가축 중 모든 처음 난 것의 대신에 레위인의 가축을 내게 돌리라
그러니까 레위 지파는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해서 하나님께 바쳐진 대속 물 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전체를 하나님의 장자로 여기시고 그들을 애굽에서 건지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겠다는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구속의 약속을 어떻게 이루실 것인지를 레위 인들을 이스라엘의 장자로 삼으셔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는 것으로, 모형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한 대속 물이 하나님께 바쳐짐으로 나머지가 전부 복을 받게 되는 원리,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그림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출4:22)
22 너는 바로에게 말하여라. '나 주가 이렇게 말한다. 이스라엘은 나의 맏아들이다.(분명 이스라엘 전체를 장자라고 부르시지요? 레위 지파만이 아닙니다. 레위 지파는 그 전체 이스라엘을 대표하고 있는 장자들인 것입니다)
이렇게 레위 지파 속에는, 처음 난 것은 전부 하나님의 것이라는 ‘장자’의 개념과 어떤 무리를 대표하여 대속 하는 ‘맏물’의 개념이 겹쳐있는 것입니다.
아까 그 장자와 맏물의 개념이 십일조의 내용이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레위 지파는 전체 이스라엘 민족의 십일조로 하나님께 드려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정리를 할게요.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게 하려는 의도에서 명령하신 율법입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복을 받은 이스라엘이 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확실한 신앙고백으로 십일조가 드려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전한 십일조가 하나님께 드려졌을 때 하나님은 하나님을 알아보고, 인정하며, 순종하는 그 것을 기뻐하시며 이스라엘에게 복을 부어주시는 그러한 복의 순환을 십일조가 담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레위 지파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은혜로 복을 주셨으며, 또 주실 것이라는 것의 표징으로 하나님 앞에 드려진 지파인 것입니다.
그래서 레위지파가 제사를 잘 지내면 이스라엘 전체가 약속의 땅에서 복을 받게 되는 것이고 레위 지파가 제사를 잘 못 드리고 하나님 섬기는 일을 소홀히 하면 이스라엘 전체가 벌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일조라는 것은 하나님께 바쳐진 대속의 제물임과 동시에 자신이 대표하고 있는 사람들의 죄를 대속 하는, 제사를 지내는 제사장의 역할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일조 안에 그 두 가지 내용이 다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일조가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신앙 고백인 것처럼 레위 인들이 하나님께 구별되어 바쳐진 것 또한 그 레위 인들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온 이스라엘이 복을 받게 된다는 구속사 전체가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십일조는 단순히 물질적인 어떤 소득을 하나님께 떼어서 바친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는 아주 중요한 ‘십일조의 정신’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보세요.
(신14:24-29)
24 그러나 주 너희의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을 두려고 택하신 곳이, 너희가 있는 곳에서 너무 멀고, 가기가 어려워서, 그것을 가지고 갈 수 없거든,
25 너희는 그것을 돈으로 바꿔서, 그 돈을 가지고 주 너희의 하나님이 택하신 곳으로 가서,
26 그 돈으로 마음에 드는 것을 사거라. 소든지 양이든지 포도주든지 독한 술이든지, 어떤 것이든지, 먹고 싶은 것을 사서, 주 너희의 하나님 앞에서 너희와 너희의 온 가족이 함께 먹으면서 즐거워하여라.
27 그러나 성 안에서 너희와 함께 사는 레위 사람은, 유산도 없고 차지할 몫도 없는 사람들이니, 그들을 저버리지 않도록 하여라.
28 너희는 매 삼 년 끝에 그 해에 난 소출의 십일조를 다 모아서 성 안에 저장하여 두었다가,
29 너희가 사는 성 안에, 유산도 없고 차지할 몫도 없는 레위 사람이나 떠돌이나 고아나 과부들이 와서 배불리 먹게 하여라. 그러면 주 너희의 하나님은 너희가 경영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 주실 것이다."
이렇게 십일조는 단순히 소득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 보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허락하신 것이 다시 그 하나님께 바쳐진 것을, 또 다시 받아서 먹으며 즐기는 것입니다.
단순히 바치는 것이 목적이라면 ‘성전이 아무리 멀어도 끝까지 끌고 와야 한다.‘ 그래야 맞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성전이 너무 멀면 그 십일조를 팔아서 너희가 제일 먹고 싶은 것을 사라, 그리고 그 것을 권속들과 함께 먹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십일조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즐기는 데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단순히 십일조를 나에게 주신 소득의 십분의 일을 바치는 것이라고 정의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허락하시는 것이 ‘이 땅의 물질’뿐이라는 이 세상의 시대정신이 낳은 악마적인 발상인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시는 것이 단순히 물질 뿐입니까?
이 십일조가 담고 있는 것을 좀 더 정확하게 이해를 하시려면 최초의 십일조가 드려졌던 창세기로 가 보셔야 합니다.
(창14:14-20)
14 아브람은 자기 조카가 사로잡혀 갔다는 말을 듣고, 집에서 낳아 훈련시킨 사병 삼백열여덟 명을 데리고 단까지 쫓아갔다.
15 그 날 밤에 그는 자기의 사병들을 몇 패로 나누어서 공격하게 하였다. 그는 적들을 쳐부수고, 다마스쿠스 북쪽 호바까지 뒤쫓았다.
16 그는 모든 재물을 되찾고, 그의 조카 롯과 롯의 재산도 되찾았으며, 부녀자들과 다른 사람들까지 되찾았다.
17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동맹을 맺은 왕들을 쳐부수고 돌아온 뒤에, 소돔 왕이 아브람을 맞아서, 사웨 벌판 곧 왕의 벌판으로 나왔다.
18 그 때에 살렘 왕 멜기세덱은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다. 그는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다.
19 그는 아브람에게 복을 빌어 주었다. "천지의 주재, 가장 높으신 하나님, 아브람에게 복을 내려 주십시오.
20 아브람은 들으시오. 그대는, 원수들을 그대의 손에 넘겨 주신 가장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하시오."아브람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에서 열의 하나를 멜기세덱에게 주었다.
최초의 십일조가 등장하는 장면입니다. 소돔 왕과 고모라 왕과 아드마 왕과 스보임 왕과 소알 왕 이렇게 다섯 나라 왕의 연합군이 엘람왕, 고임왕, 시날왕, 엘라살왕 이렇게 네 왕의 연합군과 전쟁을 했습니다. 그 와중에 소돔에 살던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이 집에서 키우던 사병 318명을 데리고 그 네 나라 국가 연합군 수 만 명을 무찌르고 롯을 구해옵니다. 그 전쟁은 상식적으로 어느 모로 보나 아브라함이 이길 수 있었던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그 전쟁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이긴 전쟁이라는 사실을 아브라함도 알았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살렘왕 멜기세덱이라는 사람을 만납니다. 성경은 그 사람을 살렘 왕 즉 ‘샬롬 왕’‘평강의 왕’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합니다. 그가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서 아브라함을 축복합니다. 떡과 포도주, 제사장, 축복 언뜻 떠오르는 분이 있지요? 그 멜기세덱이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그랬더니 아브라함이 그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습니다. 아브라함의 그러한 행위는 ‘이 모든 것은 당신 덕택입니다‘ 라는 고백이었습니다. 그 말은 ’이 전쟁은 당신이 이기게 해 준 것입니다‘라는 고백인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소유의 10분의 1을 멜기세덱에게 바친 것입니다. 그걸 어떻게 아는가? 그건 조금 있다가 시편에서 확인시켜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본문을 보면 그 멜기세덱 왕은 왕이면서 제사장이라고 합니다. 원래 왕은 힘을 가지고 전쟁을 치르고 정치를 하는 사람이고 제사장은 뒤에서 그 왕의 승리를 위해 제사를 지내고 기도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살렘왕 멜기세덱은 왕이면서 제사장입니다.
그 말은 그 살렘 왕 멜기세덱은 제사장의 일, 즉 제사를 지내는 것 자체로 왕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힘으로 전쟁을 하고 다스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제물을 바쳐 제사를 지내는 것 자체로 승리를 이끌어 내고 왕국을 다스리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게 누구입니까? 거기에 대한 답이 시편 110편에 나와 있습니다.
(시110:1-5)(다윗의 시)
1 주께서 내 주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를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 하셨습니다.
2 주께서 임금님의(글자대로는 1절의 '내 주(아도니)'를 가리키는 2인칭 단수 대명사 '당신') 권능의 홀을 시온에서 보내 주시니, 임금님께서는 저 원수들을 통치하십시오.
3 임금님께서 거룩한 산에서(또는 '거룩한 광채로') 군대를 이끌고 전쟁터로 나가시는 날에, 임금님의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고, 아침 동이 틀 때에 새벽 이슬이(히, '당신의 젊음의 이슬이 당신께로……')맺히듯이, 젊은이들이 임금님께로 모여들 것입니다.
4 주께서 맹세하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을 따른 영원한 제사장이다" 하셨으니, 변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5 주께서 임금님의 오른쪽에 계시니, 그분께서 노하시는 심판의 날에, 그분께서 왕들을 다 쳐서 흩으실 것입니다.
보세요. 여기 나오지요? 하나님께서 다윗을 데리고 전쟁을 하십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전쟁의 승리는 주의 우편에 계신 주님,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전쟁이며 그 분이 반드시 열 왕을 쳐서 파하고 승리하신다는 고백을 합니다. 그런데 그분이 어떤 분이신가 하면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영원한 제사장’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전쟁을 당신이 맡아서, 열 왕을 쳐서 파해 버리실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세기의 멜기세덱과 같은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창세기의 멜기세덱은 ‘십자가라는 제사’로 ‘영원한 승리’를 만들어 내시는 왕이요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인물이라는 것이지요.
그 장면을 히브리서 기자가 히브리서 7장에서 인용합니다. 그 구절을 보시면 그 의미가 조금 더 확실해 질 것입니다.
(히7:1-10)
1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이 여러 왕을 무찌르고 돌아올 때에, 그를 만나서 축복해 주었습니다.
2 아브라함은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첫째로, 멜기세덱이란 이름은 정의의 왕이라는 뜻이요, 다음으로, 그는 또한 살렘 왕인데, 그것은 평화의 왕이라는 뜻입니다.
3 그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생애의 시작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과 같아서, 언제까지나 제사장으로 계신 분입니다.
4 그가 얼마나 위대하신가를 생각하여 보십시오. 족장인 아브라함까지도(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아브라함은') 가장 좋은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바쳤습니다.
5 레위 자손 가운데서 제사장 직분을 맡은 사람들은, 자기네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비록 그 백성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태어났지만(그, '허리에서 나왔지만'), 율법을 따라 열의 하나를 받으라는 명이 내려 있습니다.
6 그러나 멜기세덱은 그들의 족보에 들지도 않았는데, 아브라함에게서 열의 하나를 받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그를 축복해 주었습니다.
7 두말 할 것 없이 축복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서 받는 법입니다.
8 한쪽에서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이 십분의 일을 받고, 다른쪽에서는, 살아 계심이 입증되신 분이 그것을 받습니다.
9 그렇게 말하면,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까지도 아브라함을 시켜서, 십분의 일을 바친 셈이 됩니다.
10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났을 때에는, 레위는 아직 그의 조상 아브라함의 몸 속에(그, '허리') 있었으니 말입니다.
여기 보면 멜기세덱, 아브라함, 레위지파, 십일조 지금까지 공부한 모든 내용이 다 들어 있습니다. 먼저 레위 지파와 아브라함의 관계를 보세요.
5절을 보시면 레위의 아들들, 즉 레위 지파 제사장들이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칠 때에 그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허리‘라는 것은 쉬운 말로 ’배‘라는 뜻입니다.
(창35:11)(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예언하시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너는 생육하고 번성할 것이다. 한 민족과, 많은 갈래의 민족이 너에게서 나오고, 너의 자손에게서 왕들이 나올 것이다
이렇게 ‘허리’라는 말은 시간차를 두고 세상에 나오지만 본질이 하나인 것들을 가리킬 때 쓰던 단어입니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 앞에 있을 때에 그 레위를 배에 품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레위 지파가 하는 일은 그 때 멜기세덱 앞에서 아브라함이 했던 그 일과 같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도 레위 지파처럼 제사장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위에 멜기세덱이라는 하나님의 제사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칠 때 레위가 그 안에서 함께 십일조를 바쳤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레위에게 바친 십일조는 누구의 십일조가 포함 된 것입니까? 이스라엘의 십일조가 포함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림을 잘 그려 보세요. 멜기세덱이라는 하나님의 제사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분께 복을 받고 십일조를 드린 제사장 아브라함이 있습니다. 그 아래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던 제사장 레위 지파가 있습니다. 그들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습니다. 다른 말로 복을 받은 자로 서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레위에게 십일조를 바친 이스라엘이 있지요? 그들도 역시 복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십일조를 드린 자들입니다. 그러니까 그 라인에 서 있는 아브라함, 레위, 이스라엘 모두가 멜기세덱으로부터 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 멜기세덱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제사장은 십일조를 받으면 그 것을 역시 하나님께 십일조로 드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형식상으로는 대 제사장인 아론이 받았지만 하나님은 그 것을 ‘내가 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시편에서 우리가 확인한 것처럼 그 멜기세덱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분이었습니다. 이제 그림이 확실해 졌지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복을 흘려보내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과 그의 허리에 있는 레위, 그리고 그 레위가 대표하고 있는 ‘믿음의 후손’인 이스라엘에게 복을 부어 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께 신앙 고백으로 바치는 것이 십일조입니다. 그런데 십일조는 내가 받은 모든 것, 내가 받은 모든 복은 주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라는 신앙고백임과 그 자체가 전체를 대표하는 대속 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드리는 십일조도 레위가 드렸던 십일조와 제사도, 아브라함이 드렸던 십일조도 모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복을 부어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 바쳐지는 대속 물 예수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진짜 참 복을 받게 된 것이고 이제는 십일조가 아니라 진짜 참 복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영생”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재물로 드려진 복된 나”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복으로 주신 새로운 저는 하나님 것입니다’ 이게 오늘날의 십일조 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십일조도, 레위 지파도, 제사장도 다 없어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복이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멜기세덱에서 십일조 까지를 죽 그려보면 거기에 뭐가 흐르고 있는 것입니까? ‘복’이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십일조는 ‘복의 계통도’인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고 있던 십일조를 레위 지파에게 내게 함으로 해서 구원이라는 복이 어떤 모양으로 우리에게 주어질 것인가를 힌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심지어 구약시대 사람들도 자기의 유익을 따라 그 중요한 십일조를 눈속임으로 했습니다. 그래서 사사기에 보면 레위 지파 사람들이 개인 집으로 흩어져서 ‘무당 노릇’을 해 주고 밥벌이를 해야 했던 것입니다. 십일조가 안 들어오니까, 들어 와도 저는 것, 흠 있는 것, 약해 빠진 것 이런 것들만 들어오니까 레위 사람들이 먹고살기가 힘들어 졌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얼마나 통탄 하셨겠습니까?
그래서 말라기에서 구약을 닫으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십일조를 하라고 한 것은 하늘의 복을 부어주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낼 것을 상징하는 그 십일조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으라고 한 것이었는데 너희는 그것조차도 눈속임으로 하는구나, 너희가 정말 그 십일조의 정신을 잘 알고 십일조를 한다면 내가 너희에게 부어줄 복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데 너희는 그 것조차 하지 않는단 말이냐“ 하고 통탄하신 것입니다.
(말3:8-10)
8 사람이 하나님의 것을 훔치면 되겠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나의 것을 훔치고서도 '우리가 주님의 무엇을 훔쳤습니까?' 하고 되묻는구나. 십일조와 헌물이 바로 그것이 아니냐!
9 너희 온 백성이 나의 것을 훔치니, 너희 모두가 저주를 받는다.
10 너희는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놓아, 내 집에 먹을거리가 넉넉하게 하여라. 이렇게 바치는 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서, 너희가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붓지 않나 보아라. 나 만군의 주의 말이다.
이게 바로 그 말인 것입니다. 너희는 그 십일조의 정신을 알지 못하고 형식적으로 소득을 바치는 것으로만 십일조를 오해하고 있기에 저는 것, 흠 있는 것, 쓸모없는 것들을 가져다 바쳐놓고 ‘내 할 일 다 했다.’고 하는데 ‘그거 정말 착각이다‘ ’그거 내가 원하는 십일조
아니다‘’그래서 내가 진정한 십일조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낼 수밖에 없다‘하고 ’아브라함과 다윗의 세계라‘하시면서 ’마태복음‘을 여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3장도 같은 내용입니다.
(마23:23-24)
23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다. 그런 것들도 반드시 했어야 하지만, 이것들도 소홀히 하지 말았어야 했다.
24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삼키는구나!
아직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십일조로, 제물로 드려지기 전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여전히 약속의 땅인 팔레스타인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십일조의 정신을 여전히 잃어버리고 형식적인 십일조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된 것입니까?
24절에 보면 소경된 인도자들이 즉 다른 말로 가짜 목사들이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를 삼키려는 마음에 -하루살이는 살이 없지요.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습니다. 낙타는 살점이 있잖아요. -십일조의 정신이 무엇인지에는 관심도 없고 그저 십일조 해야 복 받는다고 가르쳤기 때문에 사람들이 곡식이나 짐승만 던져놓고 자기 할 일 다 한 것처럼 세상에 나가서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자기 의를 의지하고 죄 속에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날 하고 똑 같지요? 그런 썩어 빠진 정신이 형식적인 십일조를 낳은 것입니다. “십일조 하면 복 받는다” 그런데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의’‘인’(mercy 자비)‘신’(faith 믿음) 이랍니다. 다 뭡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로 주어지는 것들이지요? 너희들은 십일조가 뭔지 정말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직 십일조가 완성되지 않았고 여전히 가나안 땅에 머물고 있으므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히7:27) 그는 다른 대제사장들과는 다릅니다. 다른 제사장들은 날마다, 먼저 자기 죄를 위하여 희생제물을 드리고, 그 다음에 백성을 위하여 희생제물을 드리지만 그는 이렇게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자기를 바치셔서, 단 한 번에 결정적으로 이 일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히10:3-10)
3 그러나 제사에는, 해마다 죄를 회상시키는 효력이 있습니다.
4 황소와 염소의 피가 죄를 없애 줄 수는 없습니다.
5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에,
하나님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입히실 몸을 마련하셨습니다.
6 주님은 번제와 속죄제를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7 그래서 내가 말하였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 두루마리에 나를 두고 기록되어 있는 대로, 나는 주님의 뜻을 행하러 왔습니다.'"
8 위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주님은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를 원하지도 기뻐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것들은 율법을 따라 바칩니다.
9 그 다음에 말씀하시기를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뜻을 행하러 왔습니다"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두 번째 것을 세우시려고, 첫 번째 것을 폐하셨습니다.
10 이 뜻을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을 오직 한 번 바치심으로써, 우리는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율법은 다 완성이 되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완성이 된 율법에 또 다시 묶여 있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갈4:4-5,10-11)
4 그러나 기한이 찼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여인에게서 나게 하시고, 또한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
5 그것은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자녀의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0 여러분이 날과 달과 계절과 해를 지키고 있으니,
11 내가 여러분을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염려됩니다.
여러분이 오늘날에도 그러한 율법에 얽매이는 것은 십자가 앞에서 또 양을 잡는 것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뭔가 부족한 것입니까? 율법에는 여자가 남자 옷 입으면 벌 받는다고 나와 있습니다. 왜 제사는 안 지내세요? 여자가 멘스를 해도 부정한 사람이 되는 것이 율법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지금 하나도 안 지키잖아요.
그런데 왜 유독 십일조만 고집하나요? 목사들의 입장에선 교회의 재정의 최고 효자가 십일조이기 때문이고 신자의 입장에서는 십일조 하면 하나님께서 섭섭지 않게 보답해 주실 것이라는 헛된 기대 때문인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 모든 구약의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헌금이고 뭐고 하나도 안 해도 되는 것인가? 아닙니다. 이제 하나님은 십일조가 아니라 여러분의 생명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영생을 복으로 주셨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영생의 십일조를 드리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자발적으로 여러분의 목숨까지도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순종의 사람이 되기를 요구하십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예수 그리스도라는 제물로, 십일조로 사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여러분의 전부를 원하십니다. ‘너는 내 것이라’
그래서 이제 내가 사는 모든 삶이 하나님의 것이 되는 것이고 내가 가는 모든 곳에 나의 전부가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돈과 시간과 힘을 헛된 곳에 쓸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필요로 할 때는 나의 모든 것을 내 놓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왜? 십자가에서 이 땅의 것과 나는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 때 사도들이 십일조에 대해 한 마디라도 한 적이 있나요?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십일조가 아니라 자신의 전부를 하나님 앞에 내 놓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모든 헌금은 예수 그리스도를 선물로 받은 자들이 자신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과 함께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헌금을 하고 안 하고를 따지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지를 확인하세요.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내가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인지를 먼저 확인하십시오.
제7장 선교
(마28:18-20)
18 예수께서 다가와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3)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다른 고대 사본들은 절 끝에 '아멘'이 있음)
(행1:8)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우리가 새벽 기도 때 요한복음을 공부하면서 예수님께서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까지 혼돈과 공허를 잡으시고 넷째 날부터 여섯 째날 까지 12제자를 부르심으로 그 틀을 어떻게 채우시는가를 창세기와 비교를 하며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요한복음은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어떻게 부르시는가를 보여주시는데 첫 번째가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청소하시는 그림을 보여주시지요. 주님께서 너희는 하나님의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고 예레미야 7장 11절의 말씀을 들어 나무라시는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그림을 통해 구원은 이런 거짓 성전에서 너희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참 성전이신 예수로 말미암아 오는 것임을 예시하십니다. 나중에 요한복음 강해 서를 자세하게 참조하세요. 그리고 유대의 관원인 니고데모를 만나서 구원은 하늘로부터 나야만 하는 것임을 친절히 가르치시고 바로 사마리아 여인에게 가셔서 그처럼 불가능한 여인을 구원하심으로 구원은 너희에게서 이유나 조건을 찾을 수 없는 것임을 말씀하시지요? 그리고 헤롯 안티파스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주심으로 이방인에게도 구원이 일어날 것임을 암시하십니다.
그렇게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으시고 계시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이 지금 예수께서 복음을 전하시는 길을 죽 보셨는데 주님이 어디서 시작하셔서 어디로 가십니까?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예수께서 가시면서 사람들을 구원하고 계시는 것을 볼 수 있지요?
그럼 오늘 두 번째 본문인 사도행전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사도들이 모인 자리에서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가서 120명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에 힘을 씁니다. 예수께서 약속하신 대로 성령께서 강림하시고 이제 제자들이 설교를 하기 시작합니다. 베드로의 한 번 설교에 수천 명씩이 주님께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회중이 그를 돌로 쳐 죽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교회가 박해를 받게 되고 사도들 이외에는 모두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지게 됩니다. 자기들이 원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어떤 힘이 그들을 흩어버리고 계신 것입니다.
(행8:1) 사울은 스데반이 죽임당한 것을 마땅하게 여겼다. 그 날에 예루살렘 교회가 크게 박해받기 시작하여, 사도들 이외에는 모두 유대 지방과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
그렇지요? 흩어진 사람들은 사마리아와 유대를 두루 다니며 그리스도를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던 중에 빌립에게 하나님께서 남쪽으로 내려가라 말씀하십니다.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이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재정을 담당하고 있던 내시를 만나게 하시고 그에게 복음을 설명하게 하십니다. 예루살렘에서 교회를 흩으셔서 사마리아와 온 유대로 가게 하시고 땅 끝의 이방인에게로 빌립을 보내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아니 엄밀히 말해 지금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로 사마리아로 땅 끝으로 누가 가고 계신 것이지요? 성령 하나님께서 복음을 들고 손수 가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서 복음을 전하시면서 가신 길을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가고 계신 것입니다. 이렇게 전도는 하나님이 시작하셔서 하나님이 끝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광스럽게도 하나님께서 거기에 우리를 방법이요 도구로 동참시켜 주시는 것이지요. 좀 더 확실히 말하자면 전도는 우리의 실력으로 우리의 설득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원하고자 하는 자들에게 그의 백성들을 보내셔서 그 일을 증인으로서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선교입니다. 오늘 본문의 지상 대 명령은 “가라”에 초점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의 그 명령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의 조건이 모두 충족된 그것을 성령께서 오셔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퍼져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찾아가셔서 그들을 구원하시는 것을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에스겔서 37장의 그 유명한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골짜기로 에스겔을 데리고 가셔서 거기 뭐가 있냐고 물으시지요? 에스겔의 눈에는 먼지가 풀풀 나는 마른 뼈들만이 즐비했습니다. 해서 에스겔이 하나님께 마른 뼈들이 있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그 뼈들이 살아날 것 같으냐고 물으십니다. 그리고는 그 뼈들에게 너희들이 살아날 것이라고 대언 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마치 로즈 힐 공동묘지에 가서 시체들에게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더러 일어나라네요.’라고 외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에스겔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 증거가 마른 뼈들이 맞춰지면서 달그락 소리가 날 때 에스겔이 고개를 들어 그 것을 보았다고 하지요? 에스겔은 마지못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긴 했지만 믿기 어려워 아예 그 장면을 쳐다볼 생각도 안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마른 뼈들이 다시 살아나 군대가 되었습니다. 구원이란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마른 뼈에게 무슨 전략을 가지고 간다는 말인가요?
마른 뼈는 왁스로 잘 닦아주면 더 살아나기 쉬운가요? 아니면 물에 좀 푹 불려 놓으면 더 잘 살아날까요? 무슨 방법을 써야 마른 뼈가 살아나서 군대가 될 수 있을까요? 우리로서는 아무 방법이 없습니다. 그게 정답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을 붙이시고 생기를 불어넣지 않으시면 우리의 어떤 전략도 통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고전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 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이 세상이 그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지혜 안에서 된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어리석은 선포로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잘 보세요. 전도란 어떤 것이라고요? 미련한 것이랍니다. 왜 전도를 미련한 것이라 할까요? 그 방법으로는 세상이 절대 하나님 앞에 돌아올 수 없는 방법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미련한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 대한민국의 조상도 아니고 얼굴도 생소한 저 팔레스타인이라는 땅의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 그것도 뭐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목수의 아들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음으로 우리의 죄가 사해졌다는 말이 정말 정상적인 이성으로 믿겨지세요? 그게 복음 아닙니까? 그 복음이 이해되어지고 전해지는 데에 우리의 전략과 전술이 보탬이 될까요?
(사6:8-10)
8 그 때에 나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내가 아뢰었다.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
9 그러자 주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가서 이 백성에게 '너희가 듣기는 늘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못한다. 너희가 보기는 늘 보아라. 그러나 알지는 못한다'(칠십인역에는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는 못하고, 너희가 보기는 늘 보아도 알지는 못한다') 하고 일러라.
10 2)너는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여라. 그 귀가 막히고, 그 눈이 감기게 하여라. 그리하여 그들이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또 마음으로 깨달을 수 없게 하여라. 그들이 보고 듣고 깨달았다가는 내게로 돌이켜서 고침을 받게 될까 걱정이다.( 칠십인역에는 '이 백성의 마음은 둔해졌다. 그들은 귀가 막혀 듣지 못하고, 눈은 아예 감아 버렸다. 그들이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거나 마음으로 깨달았다가는 내게로 돌이켜서 고침을 받게 될까 걱정이다')”
여기 보시면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보내시면서 이사야의 말을 아무도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게다가 한 술 더 떠서 오히려 그 말을 듣는 자들의 귀를 막히게 하고 눈을 감기게 하라고 하십니다. 복음은 그렇게 사람들의 실력으로 깨달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가서 무슨 말을 하라고 하는 것입니까? 선교는 너희들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1절에서5절까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고전2:1-5)(표준 새 번역)
1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로 가서 하나님의 비밀을 전할 때에, 훌륭한 말이나 지혜로 하지 않았습니다.
2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밖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습니다.
3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나는 약하였으며, 두려워하였으며, 무척 떨었습니다.
4 나의 말과 설교는 지혜에서 나온 그럴 듯한 말로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 나타낸 증거로 한 것입니다.
5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바탕을 두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자신의 지혜로 하지 않았습니다. 훌륭한 미사여구를 나열하는 현란한 언변으로 사람들을 설득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선교를 하는 데에 있어서 우리에게 우리의 능력을 요구하시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전략과 전술을 세워 제발 선교 좀 해달라고 부탁하시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다만 충성함으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을 하시는지 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선교와 전도에 열심을 부리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선교 안하는 기독교인이 정말 그리스도인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깨달아진 그 복된 소식을 어떻게 가슴에만 담아두고 있습니까? 목숨 걸고 전해야지요.
윌리암 부스가 말한 것처럼 온 세상이 깨어진 유리조각으로 되어 있다 할지라도 무릎으로 기어서라도 그 복 된 소식을 전하고 싶어 하는 자들이 성도 아닙니까? 그러나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선교는 우리의 실력이나 설득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란 그 기초 위에서 행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랑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선교를 하면서 뭐 대단한 고생이나 하는 것처럼 간증하고 다니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시간에 불쌍하고 가련한 영혼들에게 한 마디라도 더 전해 주어야지요. 무슨 전도 왕이니 선교 왕이니, 베테랑 선교사니 이런 우습지도 않은 말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누가 하는 건데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인데 자기들이 뭐라고 그 영광을 통째로 가로챕니까?
(고전1:26-29)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을 때에, 그 처지가 어떠하였는지 생각하여 보십시오. 육신의 기준으로 보아, 지혜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권력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택하셨으며,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비천한 것과 멸시받는 것을 택하셨으니, 곧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없애시려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그것은, 아무도(그, '육신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약한 자들을 들어서 복음을 전하실까요? 생각해 보세요. 만일 여러분이 선교를 하러 가서 여러분의 해박한 지식이나 지위 혹은 여러분의 경건함과 도덕성을 자랑하는 것으로 전도가 되었다면 그 사람들은 여러분을 존경하지 여러분을 보낸 하나님을 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불쌍한 사람들에게 빵을 전달하는 임무를 받은 부자의 종으로 서야지 여러분이 그 앞에서 부자의 역할을 하면 고아원 원장이 여러분에게 아부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하나님은 우리의 능력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라 충성을 요구하시는 분이십니다.
사울에게도 똑같은 말씀을 하셨잖아요? 순종이 제사보다 나은 것이라고.
제가 하고 싶은 말은 하나님의 일을 한답시고 ‘나 아니면 이 일은 못해’ 라는 말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달란트의 비유에서도 배울 수 있듯이 열 달란트 받은 자가 열 달란트를 남기고 다섯 달란트를 받은 자는 다섯 달란트를 남겼다는 것은 자기에게 주어진 은사나 능력이 왜 요거밖에 안 되는가라고 불평하지 말고 그 상태에서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분명 주인은 다섯 달란트 받고 다섯 달란트 남긴 자를 두 달란트 받고 두 달란트 남긴 자보다 더 칭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마태복음 28장을 보면 전도란 믿지 않는 자들에게 가서 무차별 폭격을 해서 잡아오는 것이 아니라 제자를 삼아 가르쳐서 지키게 하는 것이라고 명확하게 말씀 하십니다.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은 사도행전 1장8의 증인이 되라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성경이 증인이 되는 게 무엇인가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요13:34-35)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나의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
(마5:14-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있는 동네는 숨길 수 없다. 또 사람이 등불을 켜서 됫박 아래에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둔다. 그래야 등불이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환히 비친다.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여기를 잘 보시면 인격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제자를 삼는다는 뜻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을 알고 있고 무엇을 어떻게 설명하느냐로 제자를 삼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다른 사람이 되어 그들 앞에 서는 것이 다른 사람을 제자 삼을 수 있는 방법이란 것입니다. 즉 다른 말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성품과 인격을 우리 속에서 향기로 발하게 될 때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주님께 돌아오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선교의 핵심인 것입니다. 제가 무엇을 말하려는 지 이제 조금 감이 잡히세요.
선교는 우리의 힘과 언변과 재주로 복음을 설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프로파겐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억지로 설들을 시키기 위해 견강부회로 흘러서도 안 됩니다. 복음 전파가 억지 경강부회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이 먼저 거룩을 향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조차 하나님 앞에 온전히 항복하지 못하고 여전히 그 분 앞에 순종의 삶을 내어 놓지도 못하면서 입에 침도 안 바르고 순종의 삶이 주는 행복과 기쁨과 그 것으로 가득 찬 천국을 어찌 설명할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나에게서 구원의 근거를 1%도 찾지 않으신 하나님이 앞으로도 열심히 죄 짓고 살아도 또 이끌어 주시지 않겠는가 하고 안심을 하는 무 율법 주의적 사고입니다.
이런 예를 들어 볼게요.
부모가 아들을 파티에 데려가기 위해서 열심히 찾았습니다. 그런데 찾아보니 아이가 진흙탕에서 구르며 놀고 있었습니다. 부모는 그 아이를 잔치 집에 데려가기 위해 잘 씻기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혔습니다. 그런데 이 철없는 아들이 또 진흙탕 속으로 들어가서 열심히 놀았습니다. 아버지는 다시 그 아이를 씻기고 또 새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그 것을 본 아들이 ‘아 우리 아버지는 이렇게 계속 옷을 버리고 내 몸을 더럽혀도 계속해서 새 옷을 갈아 입혀주시는 분이구나’하고 계속해서 진흙탕에 구르고 있다면 그 아이가 정말 정신이 제대로 박힌 아이일까요?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구원이라는 새 옷을 입혀주신 이유는 그 옷을 입고 혼인잔치에 가자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걸 모르고 공짜로 줬으니 또 버리면 또 주겠지 하고 자꾸 진흙탕으로 가는 것은 바보란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정말 은혜가 무엇인지 제대로 깨닫고 있지 못한 자들이지요. 구원을 공짜로 선물로 주신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그런 발상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준 것은 이제 그 생명이 자라고 꽃피우게 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구원의 이유를 명확하게 제시합니다.
(롬6:4-5)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죽으심과 연합하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살리심을 받은 것과 같이, 우리도 새로운 생명 가운데서 살아가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죽음으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또한 분명히, 그의 부활하심과 같은 부활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구원을 주신 것은 이제 여러분들로 하여금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인 것입니다. 새 옷은 더욱더 복되고 좋은 자리로 가자고 입혀 놓은 것입니다. 우리가 새 옷을 입었으면 이제 그 옷에 어울리는 곳으로 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또 다른 오해가 있을 수 있지요?
‘그럼 그 새 옷을 입고 무엇을 해야 하나‘하고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이들이 이제 다 뛰쳐나가서 열심히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예배당을 채워야 한다고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그건 정말 오해입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이제 어린아이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 아이는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나야 합니다. 그런데 열심히 말씀의 젖을 먹고, 기도의 이유식으로, 하늘나라 백성으로 잘 자라나야 할 아기들이 젖병을 물고 전도를 하러 먼저 튀어 나가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이제 갓 태어난 아기 들이 젖병 물고 나가서 ‘예수 믿으세요, 예수 믿으세요.‘ 합니다. 전도는 그런 열심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어진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도대체 저 사람을 변화시킨 하나님이 누구시기에 저 사람이 저렇게 변했는가, 하면서 하나님을 궁금해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출발점을 바로 잡자는 것입니다.
제가 수고하시는 선교사님들의 노고를 폄하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훌륭한 선교사님들 참 많으십니다. 그러나 일부 몰지각한 가짜들이 선교를 합네, 전도를 합네 하면서 엉뚱한 무당 잡교를 퍼뜨리고 있는 것이 너무 안타까워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 다메섹에서 회심을 시킨 바울을 바로 쓰시지 않으셨을까요? 사도 바울은 그로부터 십 수 년 후에 비로소 하나님의 복음을 제대로 전하는 자가 됩니다. 그 기간 동안 바울은 다소에 가서 머뭅니다. 다소가 어디지요? 바울의 고향입니다. 하나님께서 선교의 도구로 쓸 수 있는 자는 자신의 생업과 가족이 있는 그 곳에서 먼저 그리스도인으로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을 때에 왜 사도들을 갈릴리로 가라고 했을까요?
갈릴리는 그들의 생업과 가족이 있는 곳 아닙니까? 사도들이 사도의 역할을 제대로 해 내기 위해서는 가족과 생업이 있는 곳에서 먼저 사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거룩입니다.
우리가 먼저 챙겨야 할 선교의 기본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선교를 하고 전도를 한다는 교회 안에서 교인끼리도 서로 친하지 않습니다. 자기들끼리도 서로 가슴에 묻어둔 얘기를 못합니다. 오히려 믿은 지 얼마 안 되는 사람은 세상 친구들, 동창들 만나 술 한 잔 하면서 속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어찌 자신을 비우고 죽여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원수들을 살려내는 선교를 한다는 사람들이 서로를 경계하며 살고 있다면 이 어찌 제대로 된 교회이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어떻게 증인이 되며 어떻게 제자를 삼아야 하는지가 오해되고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삶을 추구한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났다는 유일한 증거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죽은 자들이 산자들의 나라인 천국을 전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 것입니까?
(엡4:17-19) 그러므로 나는 주님 안에서 간곡히 권면합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이방 사람들이 허망한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과 같이 살아가지 마십시오. 그들은 그들 속에 있는 무지와 그들의 마음의 완고함 때문에 지각이 어두워지고,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습니다. 그들은 수치의 감각을 잃고, 스스로를 방탕에 내맡겨서, 탐욕을 부리면서 모든 더러운 일을 합니다
보세요.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원리로 삶을 살기 위해 분투하지 않는 자들은 아직 감각이 없고 보이지 않아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죽어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허망하다는 것은 과녁이 없는 곳에 대고 화살을 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목표가 없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골프 핸디 줄이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허망한 목표들을 위해 정작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인간이 해야 할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해 내는 삶을 홀대를 당하는 것입니다.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은 시체들이기에 인생이 목표가 없는 것입니다. 허망한 것에만 눈을 두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삶의 목표를 찾았다고 하고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리에서 살아났다고 하는 이들이 여전히 세상의 허망한 것들만을 추구하며 나의 유익을 위해 다른 이들을 가차 없이 밟는 그러한 삶을 살고 있다면 어찌 그들이 산 자들이겠습니까? 그러면서 무슨 선교를 합니까?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을 향한 피나는 추구 없이 오지에 세워 놓은 빵 공장을 통해 복음을 전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자라남은 안중에도 없는 자들이 만들어 놓은 유치원이나 학교를 통해 하나님의 십자가 복음을 전하실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입성할 때 까지 이 땅에서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 길에 선교가 있는 것이고, 그 길에 순교가 있는 것이고 그 길에 구제와 봉사가 있는 것입니다.
(엡4:20-24) 그러나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그렇게 배우지는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예수 안에 있는 진리대로 그분에게서 듣고, 또 예수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으면, 여러분은, 지난날의 생활방식에 얽매여서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마음의 영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을 따라 참된 의로움과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노력해야 합니다. 구원 얻는 믿음은 주님께서 거저 주시지만 그 이후에 우리가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 가야할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전도는 전하는 그 사람이 자신이 전하는 복음에 합당한 수준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전도의 제대로 된 순서는 복음을 얘기하기 전에 ‘저 사람을 보면 뭔가가 있다. 그게 뭘까?’ 하는 물음이 먼저 나와야 합니다. 그랬을 때 ‘그것은 이런 것이다‘라고 얘기하는 것이 제대로 된 전도일 수 있는 것입니다.
(엡4:25-29) 그러므로 여러분은 거짓을 버리고, 각각 자기 이웃과 더불어 참된 말을 하십시오. 그것은 우리가 서로 한 몸의 지체들이기 때문입니다. 화를 내더라도 죄는 짓지 마십시오. 해가 지도록 노여움을 품고 있지 마십시오. 악마에게 틈을 주지 마십시오. 도둑질을 하는 사람은 다시는 도둑질을 하지 말고, 수고를 하여, 제 손으로 떳떳하게 벌이를 하십시오. 그리하여 오히려 궁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 있도록 하십시오. 나쁜 말은 입 밖에 내지 말고, 덕을 세우는 데에 필요한 말이 있으면 적절한 때에 해서, 듣는 사람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신앙의 행위는 종교행위가 아니라 일상생활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가면을 쓰고 종교 행위를 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분에 넘치는 헌금을 할 수 도 있고 얼마든지 천사의 얼굴을 하고 구제행위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행위를 쓰시겠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일상생활이 바로 신앙생활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변화된 일상을 통해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에서도 ‘성도야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라.‘고 말씀하시면서 첫 번째 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라’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이 ‘남편이여, 아비들아, 자식들아, 종들아, 상전들아 너희들은 이렇게 살아라.’입니다. 성령 충만의 삶은 바로 여러분의 직장이나 가정에서 보여 지는 것이란 말입니다.
주님께서 인정하는 신자는 선지자 노릇하고 기적을 일으키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한 자가 아니라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 등의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자라는 것을 절대 잊으시면 안 됩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는 무엇을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을 어떻게 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새사람으로 재창조된 자가 너무 감사해서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한일이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우리 죄인들은 나의 기쁨이나 만족을 위해서도 얼마든지 종교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마태복음에 나오는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 둘 다 집을 지은 사람들입니다. 둘 다 행위가 있었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어디 위에다 지은 것이냐가 그들을 가르는 것입니다. 아무리 전도를 많이 했어도 자기의 의나 만족 기쁨을 위한 자들은 내가 너를 도무지 모른다는 말을 들을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능력 있는 사람들 존경하지 마세요. 기적을 일으키고 많은 일을 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기뻐하는 자들이 아니라 삶이 변한 자들입니다. 그들을 존경하세요.
(골3:5-14) 그러므로 땅에 속한 지체의 일들, 곧 음행과 더러움과 정욕과 악한 욕망과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 숭배입니다. 이런 것들 때문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그, '불순종의 자식들')에게'가 없음) 하나님의 진노가 내립니다. 여러분도 전에 그런 것에 빠져서 살 때에는(또는 '그런 삶을 살 때에는' 또는 '그런 사람들 가운데서 살 때에는'), 그렇게 행동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여러분은 그 모든 것, 곧 분노와 격분과 악의와 훼방과 여러분의 입에서 나오는 부끄러운 말을 버리십시오.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옛 사람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이 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져서,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 거기에는 그리스인도 유대인도, 할례자도 무할례자도, 야만인도 스구디아인도, 종도 자유인도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시요,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거룩하고 사랑받는 사람답게, 동정심과 친절과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듯이 입으십시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용납하여 주고, 서로 용서하여 주십시오. 주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사랑은 온전하게 묶는 띠입니다.
이렇게 신앙은 능력과 실력이 아니라 성품과 인격적인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행위는 지금 하나님을 우리가 돕지 않으면 하나님 일이 안될 줄 알고 있는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에스더서에서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뭐라합니까? ‘이일을 위해 네가 왕비가 된 줄 어찌 아냐? 그러나 네가 안 해도 하나님은 다른 방법으로 이 일을 이루실 것이다. ‘그렇지요? 그 말은 하나님의 일을 우리가 안 한다고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모두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 일에 참여하는 자는 하늘의 새 창조에 동참하며 얻는 행복과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려 하는 것입니다. 동기가 그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 이런 것도 했어요‘라고 명함을 내미는 사람이 아니라 나 같은 것을 그 위대한 일에 참여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 아니어도 어차피 이루실 일에 내가 참여함으로 해서 그 영광에 동참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어디 자랑이 나올 수 있습니까?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일은 어차피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거기에 동참해서 일 한 사람만 이익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하나님이 다 하시고 네가 했다고 칭찬해 주십니다. 그러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일에 동참 시키시는 것입니다. 당신의 주권과 섭리로 모든 것을 다 하실 것이면서 그 일에 우리를 부르셔서 우리를 칭찬해 주시고 싶어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영광에 동참하는 것이 너무 기뻐 일을 하는 것이지 ’나 아니면 하나님 일이 안 된다.‘ 이렇게 접근하시면 큰 오산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일에 겸손함으로 동참함으로 우리는 그 속에서 순종을 배우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며 은혜를 학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로 조금씩 자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특혜입니다. 축복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일에 동참함으로 주님의 마음에 동참하고 주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는 것이니까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땅 끝으로 먼저 뛰려 하지 마세요.
땅 끝은 여러분의 가정이고 여러분의 직장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매일 만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지구는 둥글잖아요. 가고, 가고, 자꾸 가다보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그 원리. 아시지요? 그래서 내가 선 자리가 바로 땅 끝인 것입니다. 그 땅 끝으로 먼저 가세요. 예수를 믿고 난 사람이 가져야 할 본질적 전도자의 모습이 바로 이 모습인 것입니다. 존재론적으로 성품과 인격으로 바뀌어 있어서 걸어 다니는 빛이 먼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그런 선교 한 번 멋지게 해 보자고요.
제8장 안식일과 주일
(출20:8-11)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지켜라.
9 너희는 엿새 동안 모든 일을 힘써 하여라.
10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희 하나님의 안식일이니, 너희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너희와, 너희의 아들이나 딸이나, 너희의 남종이나 여종만이 아니라, 너희 집짐승이나, 너희의 집에 머무르는 나그네라도, 일을 해서는 안 된다.
11 이는, 내가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 주가 안식일을 복 주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다.
오늘은 주일과 안식일의 관계와 개념에 대해 공부를 해 보겠습니다.
여러분, 왜 우리는 일주일의 일곱 날 중에 꼭 일요일에 모여서 예배를 해야 합니까? 직장과 학교가 쉬는 날이라서 그런가요? 왜 우리는 꼭 주일날만 모입니까? 그리고 구약의 안식일이었던 토요일에 예배를 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이단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또 뭡니까?
우리 오늘 거기에 대해 확실하게 공부를 하고 넘어가자고요.
여러분 이스라엘이 많은 계명 중에 가장 민감하게 지키려고 노력했던 계명이 뭡니까? 안식일이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십계명 중에서 가장 길게 설명을 하신 계명은 뭔가요? 역시 안식일입니다. 출애굽기 20장을 잘 생각해 보세요. 안식일에 관한 계명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 거의 목숨을 걸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서 적군이 칼을 들고 좇아오는데 그날이 안식일이면 그 사람들이 뛰어서 도망가지 않았다고 하니까 얼마나 철저하게 그 날을 지켰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한번 볼까요?
(출20:8-11)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지켜라.
9 너희는 엿새 동안 모든 일을 힘써 하여라.
10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희 하나님의 안식일이니, 너희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너희와, 너희의 아들이나 딸이나, 너희의 남종이나 여종만이 아니라, 너희 집짐승이나, 너희의 집에 머무르는 나그네라도, 일을 해서는 안 된다.
11 이는, 내가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 주가 안식일을 복 주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다.
히브리 사람들은 그들의 문학 양식에서 중요한 어떤 것들을 나열할 때 정말 강조하고 싶은 것들은 활자의 양을 많이 할애를 해서 썼다고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유대인들은 십계명 중에서도 안식일에 관한 계명에 아주 특별히 촉각을 세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안식일을 어기는 것에 대해서 대단히 진노하셨음을 유대인들이 읽고 있었던 구약 성경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출31:12-17)
12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13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라. 너희는 안식일을 지켜라. 이것은 너희 대대로 나와 너희 사이에 세워진 표징이 되어, 너희를 거룩하게 구별한 이가 나 주임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14 안식일은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므로, 너희는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 그 날을 더럽히는 사람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그 날에 일을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의 겨레로부터 제거될 것이다.
15 엿새 동안은 일을 하고, 이렛날은 주에게 바친 거룩한 날이므로, 완전히 쉬어야 한다. 안식일에 일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16 이스라엘 자손은 이 안식일을 영원한 언약으로 삼아, 그들 대대로 지켜야 한다.
17 이것은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세워진 영원한 표징이니, 이는, 주가 엿새 동안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이렛날에는 쉬면서 숨을 돌리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단호하게 안식일을 범하는 자는 돌로 쳐서 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일이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여러 가지 율법이 있지만 이렇게 그 율법을 어긴 사람이 처형이 되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그려진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상징하고 있는 어떠한 것이 범해질 때 그렇게 무시무시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임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민15:32-36)
32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있을 때였다. 한 사람이 안식일에 나무를 하다 들켰다.
33 나무하는 이를 본 사람들은, 그를 모세와 아론과 온 회중에게로 데리고 갔다.
34 그에게 어떻게 하여야 한다는 명확한 설명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를 그냥 가두어 두었다.
35 그 때에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그 사람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온 회중은 진 밖에서 그를 돌로 쳐야 한다."
36 그래서 온 회중은, 주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그를 진 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쳐죽였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어기는 것에 대해 엄청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계명을 어기고 하나님 앞에 패역한 일을 할 때마다 “너희가 안식일을 어겼다”라고 율법을 지키지 않은 행위의 대명사로 유독 안식일을 강조해서 그들을 책망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겔20:10-13)
10 그래서 나는 그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서, 광야로 데리고 나갔다.
11 나는 그들에게, 누구나 그대로 실천하면 살 수 있는 율례를 정하여 주고, 내 규례를 알려 주었다.
12 또 나는 그들에게 안식일도 정하여 주어서, 이것이 나와 그들 사이에 표징이 되어, 내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주인 줄 알게 하였다.
13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광야에서 나에게 반역하였다. 누구나 그대로 실천하면 살 수 있는 내 율례를 그들은 지키지 않았고, 내 규례를 배척하였다. 그들은 내 안식일도 크게 더럽혀 놓았다. 그래서 내가 이르기를, 광야에서 그들의 머리 위에 내 진노를 쏟아, 그들을 모두 멸망시키겠다고 하였다.
게다가 이스라엘을 바벨론 포로가 되게 하시는 이유도 그들이 안식일과 안식년을 범한 것이 이유가 되어서 그들이 지키지 않은 안식년을 70번을 한꺼번에 지키게 하신 것입니다.
(대하36:17-21)
17 하나님께서 바빌로니아의 왕을 불러다가, 자신의 백성을 치게 하셨다. 그래서 그 왕은 유다의 젊은이들을 닥치는 대로 칼로 쳐죽였다. 심지어는 성전 안에서도 그러한 살육을 삼가지 않았다. 그 왕은 잔인하였다. 젊은이나 늙은이, 여자나 남자, 병약한 사람이나 건강한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신의 백성을 그 왕의 손에 넘기셨다.
18 바빌로니아 왕은 하나님의 성전 안에 있는 크고 작은 기구와, 주의 성전 안에 있는 보물과, 왕과 신하들이 가지고 있는 보물을 모두 도성 바빌론으로 가져 갔다.
19 그 왕은 또 하나님의 성전을 불사르고, 예루살렘 성벽을 헐고, 궁궐들을 다 불사르고, 값진 그릇들을 다 부수어 버렸다.
20 그는 또 칼에 맞아 죽지 않고 살아 남은 자들은, 바빌로니아로 데리고 가서, 왕과 왕자들의 노예로 삼았다. 그들은 페르시아 제국이 일어서기까지 거기서 노예 생활을 하였다.
21 그리하여 주께서 예레미야를 시켜서 "땅이 칠십 년 동안 황폐하게 되어, 그 동안 누리지 못한 안식을 다 누리게 될 것이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안식일과 안식년과 희년은 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희년은 안식년이 일곱 번 반복되고 난 50년째를 희년이라고 하지요?
그러니까 대 안식년입니다. 이렇게 안식일과 안식년, 그리고 희년은 같은 메시지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말이 나온 김에 그 부분도 조금 설명을 하고 넘어 가겠습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읽었던 출애굽기 20장과 레위기 25장을 비교해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레25:2-28)
2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라.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일러라.
내가 너희에게 주기로 한 그 땅으로 너희가 들어가면, 나 주가 쉴 때에, 땅도 쉬게 하여야 한다.
3 여섯 해 동안은 너희가 너희 밭에 씨를 뿌려라. 여섯 해 동안은 너희가 포도원을 가꾸어 그 소출을 거두어라.
4 그러나 일곱째 해에는 나 주가 쉬므로, 땅도 반드시 쉬게 하여야 한다. 그 해에는, 밭에 씨를 뿌려도 안 되며, 포도원을 가꾸어도 안 된다.
5 거둘 때에, 떨어져 저절로 자란 것들은 거두지 말아야 하며, 너희가 가꾸지 않은 포도나무에서 저절로 열린 포도도 따서는 안 된다. 이것이 땅의 안식년이다.
6 땅을 이렇게 쉬게 해야만, 땅도 너희에게 먹을거리를 내어 줄 것이다. 너뿐만 아니라, 남종과 여종과 품꾼과 너와 함께 사는 나그네에게도, 먹을거리를 줄 것이다.
7 또한 너의 가축도, 너의 땅에서 사는 짐승까지도, 땅에서 나는 모든 것을 먹이로 얻게 될 것이다.
8 안식년을 일곱 번 세어라. 칠 년이 일곱 번이면,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나, 사십구 년이 끝난다.
9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희는 뿔나팔을 크게 불어라. 나팔을 불어, 너희가 사는 온 땅에 울려 퍼지게 하여라.
10 너희는 오십 년이 시작되는 이 해를 거룩한 해로 정하고, 전국의 모든 거민에게 자유를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가 희년으로 누릴 해이다. 이 해는 너희가 유산, 곧 분배받은 땅으로 돌아가는 해이며, 저마다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해이다.
11 오십 년이 시작되는 해는, 너희가 희년으로 지켜야 하는 해이다. 희년에는 씨를 뿌리지 말고, 저절로 자란 것을 거두어서도 안 되며, 너희가 가꾸지 않은 포도나무에서 저절로 열린 포도도 따서는 안 된다.
12 그 해는 희년이다. 너희는 그 한 해를 거룩하게 보내야 한다. 너희는 밭에서 난 것을 먹게 될 것이다.
23 땅을 아주 팔지는 못한다. 땅은 나의 것이다. 너희는 다만 나그네이며, 나에게 와서 사는 임시 거주자일 뿐이다.
24 너희는 유산으로 받은 땅 어디에서나, 땅 무르는 것을 허락하여야 한다.
25 네 친척 가운데 누가 가난하여, 그가 가진 유산으로 받은 땅의 얼마를 팔면, 가까운 친척이 그 판 것을 무를 수 있게 하여야 한다.
26 그것을 무를 친척이 없으면, 형편이 좋아져서 판 것을 되돌려 살 힘이 생길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27 판 땅을 되돌려 살 때에는, 그 땅을 산 사람이 그 땅을 이용한 햇수를 계산하여 거기에 해당하는 값을 빼고, 그 나머지를 산 사람에게 치르면 된다. 그렇게 하고 나면, 땅을 판 그 사람이 자기가 유산으로 받은 그 땅을 다시 차지한다.
28 그러나 그가 그 땅을 되돌려 살 힘이 없을 때에는, 그 땅은 산 사람이 희년이 될 때까지 소유한다. 희년이 되면, 땅은 본래의 임자에게 되돌아간다. 땅을 판 사람은, 그 때에 가서야 유산 곧 분배받은 그 땅을 다시 차지할 수 있다.
출애굽기 20장이 안식일에 관한 말씀이었다면 여기는 안식년과 희년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 칠일 뿐 아니라 7년 째 되는 날도 안식년으로 땅을 쉬게 하라는 것입니다. 땅을 쉬게 하라는 것은 그 땅을 가는 자들의 쉼도 함께 의미하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희년에는 모든 빚이 다 탕감이 되고 생활이 어려워 땅을 판자들은 다 되돌려 받게 되는 해 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토지 매매를 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땅은 하나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생활이 정말 어려워서 땅을 팔았을 때는 중간에 돈이 마련되면 다시 찾아 올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인이 그런 능력이 없을 때에 가까운 친족 중에 한 사람이 돈을 주고 그 땅을 찾아 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 것을 고엘 제도라고 합니다. 그래서 룻기에 나오는 보아스가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땅을 물러 주는 것입니다. 보아스가 공고를 하지요? 누가 나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으면 이 사람의 땅을 무르라. 한 사람이 나섰지요? “당신이 그 기업을 무르겠는가?” 했을 때 그가 거절합니다. 그래서 보아스가 엘리멜렉의 기업을 무르고 룻과 혼인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손으로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빚을 진 사람이 자기가 상환을 능력이 없을 때 누군가 나서서 그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이 이스라엘의 법이었고 누구도 그 빚을 상환할 능력이 없을 때는 하나님께서 희년을 주심으로 모든 빚을 탕감하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자기들끼리는 도저히 갚을 능력이 없는 죄인들을 위해 그 빚을 탕감해 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 보면 주님이 오셔서 “내가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러 왔다” “내가 희년을 선포하러 왔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눅4:16-21)
16 예수께서는, 자기가 자라나신 나사렛에 가셔서, 늘 하시던 대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다. 성경을 읽으려고 일어서서
17 예언자 이사야의 두루마리를 건네 받아 그것을 펴시어, 이런 말씀이 있는 데를 찾으셨다.
18 "주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자유를, 눈먼 사람들에게 다시 보게 함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20 예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서, 시중 드는 사람에게 되돌려 주시고, 앉으셨다. 회당에 모인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에게로 쏠렸다.
21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성경 말씀은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
"그렇지요? 다시 레위기 25장 26절을 잘 보세요. 누군가 대신 토지를 무른다는 것을 표현하면서 거기에 무슨 단어를 씁니까? redeem"구속“이라는 말이지요?
26 그것을 무를 친척이 없으면, 형편이 좋아져서 판 것을 되돌려 살 힘이 생길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희년은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하게 될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모형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제가 너무 일찍 결론으로 비약을 해 버렸는데요. 조금만 인내심을 갖고 잘 들어보세요. 다시 안식일이라는 본래 주제로 돌아가서 천천히 결론으로 가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보셨다시피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고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이 이스라엘이 70년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서 뉘우치고 행한 것이 안식일을 포함한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들이 그렇게 포로로 끌려가게 된 이유가 안식일을 안 지키고, 율법을 안 지켰기 때문이라고 자의적으로 해석을 하고서 그들은 그 이후로 더더욱 목숨을 걸고 율법을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계속해서 안식일을 지켜왔고 지금도 지키는 것입니다.
여러분, “불의 전차“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chariots of fire" "반젤리스”의 영화음악으로 더욱 유명하지요?
그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1924년 파리 올림픽 육상 금메달리스트인 영국의 캐임브리지에 다니는 헤럴드와 에릭이라는 두 수재 청년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공부만 잘할 뿐만 아니라 달리기에도 소질을 발휘합니다. 그래서 이 두 청년은 올림픽에 나가게 됩니다. 그런데 올림픽 100m 달리기 결승전 날이 하필 일요일이었습니다. 에릭은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안식일 날 뛸 수 없다고 하며 그 결승전을 포기합니다.
결국 다른 선수들의 배려로 일요일이 아닌 다른 날에 결승전이 있는 400m에 나가서 금메달을 따는 스토리입니다. 이 영화로 말미암아 기독교인들의 “주일 성수“에 관한 고정관념이 더욱 굳어지게 되었죠? 골든 글로브와 칸 영화제에서 수상을 한 세계적으로 성공한 영화여서 더욱 그 영향이 컸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 안식일이 뭐길 래 하나님은 그렇게 안식일을 범하는 것을 못 견뎌 하시는 것입니까? 그리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조차 지금도 안식일을 지킨다고 호들갑을 떠는 것입니까? 어떤 사람은 주일은 꼭 자기 교회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여행을 갔다가도 주일에는 자기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다시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멀리 유학을 가거나 이사를 가서도 꼭 헌금을 전에 자기가 다니던 교회에 부치죠?
도대체 그 안식일이 무엇이기에 그러는 겁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보면 일부러 그 안식일을 범하시며 일을 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어기신 일 때문에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는 미움을 사게 됩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것도 안식일이고, 소경 된 자의 눈에 진흙을 이겨 발라 그 눈을 뜨게 하신 날도 안식일입니다. 손 마른 자를 고치신 날도 안식일이고 제자들이 이삭을 비벼서 먹은 날도 안식일입니다. 먹은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비빈 게 안식일을 어긴 겁니다. 복음서를 잘 보면 예수님은 일부러 그 안식일에 일을 하고 계신 것 같이 보입니다. 이제 그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살펴보고 왜 우리 주님은 그 안식일에 그러한 일들을 하셨는지 추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왜 이렇게 교리 설명에 심혈을 기울여서 유대인들의 엉터리 열심, 가장 사악한 죄악인 율법주의를 경고했는지를 확실하게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에 안식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창세기 2장2절에서 처음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를 모두 마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는 구절에서 처음으로 ”안식“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창2:1-3)
1 하나님은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
2 하나님은 하시던 일을 엿샛날까지(사마리아 오경과 칠십인역과 시리아어역을 따름. 히, '이렛날까지') 다 마치시고, 이렛날에는 하시던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
3 이렛날에 하나님이 창조하시던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으므로, 하나님은 그 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다.
여기에 안식일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복을 주셨다는 말과 하나님께서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거룩하게 하셨다는 말은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어떤 목적을 위해 따로 구별해 놓으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안식일을 거룩하게 구별하시고 그 날에 복을 주셨다고 하십니다. 이 구절 안에는 아주 중요한 신학적 교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 질문을 여러분의 가슴에 잘 품으시고 계속 가보겠습니다.
이렇게 안식이라는 것이 처음 등장하고 오랜 역사 동안에 안식이라는 것이 등장하지 않다가 출애굽기 20장에 가서야 처음으로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는 계명으로 주어집니다.
(출20:10-11)
10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희 하나님의 안식일이니, 너희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너희와, 너희의 아들이나 딸이나, 너희의 남종이나 여종만이 아니라, 너희 집짐승이나, 너희의 집에 머무르는 나그네라도, 일을 해서는 안 된다.
11 이는, 내가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 주가 안식일을 복 주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다.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시면서 그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근거를 창조기사로 대십니다.“내가 천지만물을 창조하고 칠 일째 쉬었다. 그러므로 너희도 안식일을 지켜 아무 일도 하지 마라”
그리고 딱 40년 후 신명기에서 다시 안식일을 명하시는데 신명기에서는 그들이 애굽 땅에서 구원을 받은 것을 기억하고 안식일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신5:12-15)
12 너희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라. 이것은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한 것이다.
13 너희는 엿새 동안 모든 일을 힘써 하여라.
14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희 하나님의 안식일이니, 너희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너나, 너의 아들이나 딸이나, 너희의 남종이나 여종뿐만 아니라, 너희의 소나 나귀나, 그 밖에 모든 집짐승이나, 너희의 집안에 머무르는 식객이라도, 일을 해서는 안 된다. 너희의 남종이나 여종도 너와 똑같이 쉬게 하여야 한다.
15 너희는 기억하여라. 너희가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을 때에, 주 너희의 하나님이 강한 손과 편 팔로 너희를 거기에서 이끌어 내었으므로,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한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창조를 하시고 일곱 째날 안식을 취하셨다는 것과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건짐을 받게 되는 것, ‘구속, 죄 사함’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금만 더 가보죠.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 복을 주셨습니다. 참 우리의 제한된 이성으로는 이해가 불가한 그런 내용입니다. 안식일에 복을 주셨다니요. 그리고 그 복이 무엇인지는 성경에 잘 설명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 전체를 통해 추론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복을 주셨다는 그 말은 하나님께서 그 안식일에 어떤 복된 씨앗을 심어 놓으셨다는 의미로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그 추론을 제가 사실로 입증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 복된 씨앗은 우리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생기게 된 죄와 수고로움에서 자유롭게 되어 우리가 누리게 될 “영생”이라는 씨앗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안식일에는 앞으로 긴 세월 후에 이 땅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받게 될 ‘구원, 영생’이라는 씨가 그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복을 담아 두셨다”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그 부분을 자세하게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여섯째 날 인간과 육축을 만드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이 물질 세계, 공간 세계, 감각 세계에 복을 주셨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일곱째 날에 복을 주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시간이라는 초월적인 영역에다가 복을 부어 놓으셨다는 말입니다. 그렇죠?
여러분, 시간이 뭡니까? 우리는 시간이 뭔지 잘 몰라요. 우리는 물질과 공간에 대해서는 아주 익숙합니다. 우리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또 내가 그 안에 있기 때문에 아주 익숙합니다. 그런데 시간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시간은 전혀 우리가 통제할 수가 없어요. 공간과 물질은 우리가 마음대로 만들었다 부수었다 할 수 있지만 시간은 전혀 통제가 불가능합니다. 어떻게 측정을 해야 하는지도 잘 모릅니다. 그래서 그냥 뚝뚝 잘라서 우리가 이름을 붙여 놓은 것을 우리는 시간이라고 합니다. 1968년에 국제 도량형 위원회(CGPM)에서 세슘원자의 복사주기에 91억 9천 만 배를 곱해서 1초로 정했습니다. 그래서 전 세계가 그것을 1초라고 부르기로 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그냥 막연히 그 시간이라는 것이 흘러가면 우리 인간이 늙고 병들고 약해져서 결국은 죽게 된다는 것 정도로 시간을 정의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들은 시간을 두려워합니다.
그 시간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물질과 공간 속으로 숨어들게 됩니다.
시간에 의해 두려워진 마음을 공간과 물질로 달래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모으고, 멋진 집을 사고 싶어 합니다. 그 안에 불안한 자신을 숨기기 위함입니다. 자신의 외모를 열심히 아름답게 가꾸어 보기도 하고 남들은 쳐다보지도 못할 값비싼 것들로 자신을 치장하기도 합니다. 최선을 다해 공부를 하고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합니다. 그도 물론 자신이 숨을 공간과 물질을 확보하기 위함입니다. 시간을 두려워하는 이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는 그러한 공간과 물질의 영역에서 공간과 물질만으로 자신의 행복을 찾았다고 하는 사람을 한 사람도 내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인간의 복은 공간과 물질의 영역이 아닌 시간의 영역 안에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인 인간과 일곱째 '날'에 공히 복을 부으셨습니다. 사람과 시간에다가 동일한 하나님의 복을 부으신 것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맞게 지어진 인간, 즉 하나님의 백성은 시간 속에서만 하나님이 주신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날'이라는 시간에 복을 부으시고 그 '날'이라는 시간을 거룩하다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시간 속에 복되고 거룩한 어떠한 것이 담지 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시간의 영역 속에 존재하십니다. 그래서 물질과 공간의 영역 속에서는 그 분이 보이질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이 되어 이 물질과 공간의 영역 속에서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시간의 영역에 대해 고민하고 공부하고 깨닫고 인식한 사람들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알고
소망하는 것에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는 이 공간과 물질의 영역이 아닌 시간의 영역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의 편지인 로마서에서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가다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기와 때'가 바로 '카이로스''호라''시간'입니다.
바울은 시간의 영역을 모르고 물질과 공간의 세계에만 집착하고 있는 자들을 '잠자는 자'라고 부르고 시간의 영역을 깨닫고 시간의 영역에서의 삶을 추구하는 자들을 '깨어있는 자'라고 일컫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제발 이 소멸될 물질과 공간의 영역 속에 갇혀서 엉뚱한 허비를 하지 말고 눈을 들어 시간의 영역을 바라보라'고 간곡히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이 물질과 공간은 시간의 영역에서 배태되어 탄생된 것들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보이는 것들은 보이지 않는 시간이 창조해 놓은 것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 1절에서도 천지의 창조 이전에 '태초에' '레쉬트'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레쉬트'는 '시간이 창조되었을 때에'라는 의미입니다. 즉 시간이라는 것은 어떠한 목적을 위해 보이지 않는 세계에 의해 보이는 것들이 창조되는 것임을 제한된 이성을 갖고 있는 인간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어떠한 것의 모형으로 창조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간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우리가 성경을 통해 알다시피 영원에서 튕겨져 나온 이 물질 세계의 모든 것은 하늘의 것들을 그림자처럼 닮아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 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고 에덴동산도 하나님 나라의 성전을 그림자처럼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간은 하늘의 어떤 것을 원형으로 하고 있는 걸까요?
바로 영원이라는 것을 제한된 물질세계 속에서 그리고 있는 것이 시간인 것입니다.
시간은 그렇게 영원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우리가 시간이라고 부르는 영원 속에 존재하시는 것이고 하나님 나라도 바로 그 영원 속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원에서 물질과 공간이 어떠한 목적과 계획을 지니고 잠시 이 우주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고대 히브리 사람들은 그 시간의 영역을 안식일 속에서 찾으려 했었습니다.
고대 히브리 사람들은 안식일을 감지되지 않는 그 시간의 거룩한 지성소로 여겼습니다.
여러분, 우리말 개역 성경에 ‘거룩’이라고 번역이 된 ‘카다쉬’라는 단어는 원래 자세한 뜻을 알 수 없는 단어입니다. 그 단어는 하나님의 크심과 하나님의 신비함, 하나님의 위대함 등을 가리키는 단어였습니다. 이 땅의 것과 구별되는, 하나님을 포함한 하늘의 것에 쓰인 단어입니다. 잘 생각 하시며 들으세요.
그러니까 역사가 시작되었을 때 유일하게 거룩했던 것은 “안식일이라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거룩하게 하셨고, 거룩한 전을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시간”에 대해서 많은 묵상을 해야 하고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죠. 하나님은 인간들이 물질과 공간, 감각 세계에 목숨을 걸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이라는 시간에 복을 부으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시고 물질과 공간, 감각 세계에서 눈을 돌려 “시간의 세계“를 바라보라고 안식일을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헬라 철학은 이데아와 현실, 공간적 이원론이지만 우리 기독교는 이 세상과 다가오는 세상의 시간적 이원론입니다. 우리가 고대하고 소망하는 것은 그 다가 올 시간, 영적 세계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원하고 있는 영생이 뭡니까? 영생은 하나님과 영원히 화목하게 살게 되는 시간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그렇게 그 안식일이라는 시간에다가 “영생“이라는 씨앗을 심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시간에 복을 주셨다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안식일이라는 시간에다가 복을 부어 주셨다는 것은 그 안식일이 하나님의 참 복인 영생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 그 사실을 입증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그 안식일을 처음에 이스라엘에게만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의 구원을, 영생을 설명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모델로 택해졌기 때문입니다.
(출31:13-17)
13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라. 너희는 안식일을 지켜라. 이것은 너희 대대로 나와 너희 사이에 세워진 표징이 되어, 너희를 거룩하게 구별한 이가 나 주임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14 안식일은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므로, 너희는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 그 날을 더럽히는 사람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그 날에 일을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의 겨레로부터 제거될 것이다.
15 엿새 동안은 일을 하고, 이렛날은 주에게 바친 거룩한 날이므로, 완전히 쉬어야 한다. 안식일에 일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16 이스라엘 자손은 이 안식일을 영원한 언약으로 삼아, 그들 대대로 지켜야 한다.
17 이것은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세워진 영원한 표징이니, 이는, 주가 엿새 동안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이렛날에는 쉬면서 숨을 돌리셨기 때문이다."
여기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안식일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언약의 표징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너희는 나의 백성이다”라는 언약의 표징으로 주신 것이 몇 가지가 있죠?
첫 번째 “할례” 그렇죠? 할례는 “이 사람은 하나님에게 선택 된 이스라엘 백성이다“라는 symbol 이었지요? 언약의 축복의 보증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할례를 행하라 명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아들의 할례를 행하지 않아서 하나님께서 죽이시려고 했던 장면이 성경에 나오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 밖에 있는 사람이라는 증거니까요.
그리고 두 번째가 이 안식일입니다. 이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이 언약 백성의 표징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기 전까지 이 세상에서 7days life cycle을 가진 민족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지금은 생활주기가 전 세계 공통으로 일주일이 되었지만 그 전에는 그렇게 7days life cycle을 가진 민족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바벨론은 “달 신”을 섬겼습니다. 그래서 그 바벨론의 생활주기는 달마다 돌아갔습니다. monthly cycle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집트 같은 나라는 태양신을 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life cycle은 하루, 1day life cycle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시스나 오시리스 같은 계절 신을 섬기던 나라는 한 계절이 그들의 life cycle 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유독 이스라엘만이 7days life cycle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7days life cycle로 살게 되면서, 일주일마다 안식일을 지킴으로써 “세상의 모든 잡신들은 다 가짜고 오직 여호와만이 창조주이시고 , 오직 이스라엘만이 진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것을 누리며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언약의 표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갖고 있는 의미가 뭔지 점점 분명해 지지요?
여러분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이 뭡니까? “너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가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타락한 아담의 후손들 중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택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그들을 구원해 내시고, 그들에게 영원한 천국 생명을 허락하시겠다는 것이 언약의 실체입니다. 바로 안식일이 그 표징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언약의 밖에 있는 자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되는 사람들 이외의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사망이죠?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언약의 표징인 안식일을 범하면 하나님께서 죽이라고 엄명을 내려놓으신 것입니다. 그 언약의 밖에 있는 자들은 이렇게 죽게 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단지 그날, 토요일이 뭔가 범상치 않은 대단한 날이라서가 아니라 그 날이 갖고 있는, 그날이 상징하고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으로 말미암아 얻게 될 영생이요, 구원이기 때문에 그 날을 지키지 않는 자들은 죽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의 설명을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할례를 받지 않거나 안식일을 어기면, 그 언약의 표징을 행하지 않으면, 그 언약밖에 있는 사람으로 간주해서 죽이는 것입니다. 상징이란 말이에요. 여기까지 이해가 가시죠? 왜 안식일을 어기면 죽이는지, 왜 할례를 안 받으면 죽이는지.
그러니까 그 안식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완성될 진짜 참 안식, 영생의 표징이었던 것입니다.
(골2:16-17)
16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고 마시는 일이나 명절이나 초승달 축제나 안식일 문제로, 어떤 사람도 여러분을 심판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17 이런 것은 앞으로 올 것들의 그림자일 뿐이요, 그 실체는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안식일은 장래 일의 그림자라는 것이죠? 그 실체는 (여기서 몸“소마”는 실체)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정확해 졌죠? 그래서 안식일을 범하는 자를 죽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없는 자들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유독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는 것입니다. 그 안식이 뭐라고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 세상의 죄와 수고와 질병과 고통, 갈등, 투쟁, 슬픔 이 모든 것들이 전부 물러간 영생의 상태를 안식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는 것입니다. 진짜 안식이 이런 것이라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영생을 상징하는 안식일에 병자가 있다는 것이 뭡니까? 그 안식일은 불완전한 안식일이죠?
그러니까 그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치심으로 예수께서 그 안식일을 완전하게 하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게 안식이다. 바로 이게 영생이다“
안식일에 일을 한 사람을 죽여 버리신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인간이 왜 일을 하지요?
이제 타락한 인간은 땅과 함께 저주를 받아서 자기가 땀을 흘려야 겨우 먹고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는 일은 이제 먹고살기 위한 노동이 된 것입니다. 원래 인간의 일은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 사역에 동참하는 동반자로서 그 아름답고 위대한 창조를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노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을 하고 인간의 노동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자들의 먹고살기 위한 몸부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안식일은 무엇을 상징한다고 했습니까?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질 영생의 상태, 그렇죠? 거기에서는 누가 우리를 먹여 주십니까? 우리 하나님께서 먹여 주십니다. 그래서 그 영생을 상징하는 안식일에는 그 천국의 삶의 모형으로 일을 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먹이시니까.
광야에서도 안식일에 먹을 것은 미리 그 전날 다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때부터 안식일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계속해서 demonstration해 주신 것입니다.
왜 주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는지 아시겠지요? 왜 주님께서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을 비벼서 먹는 것을 놔두셨는지 아시겠지요? 주님은 안식일이 갖고 있는 진정한 의미를 그들에게 demonstration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너는 왜 그 날을 안 지키느냐?”하고 예수님을 때려죽인 것입니다.
여러분, 3.1절을 지킨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광복절을 지킨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3.1절 날 대문에다가 태극기 달면 그게 3.1절지키는 것입니까?
광복절 행사장에 참석해서 광복절 노래 부르고 오면 광복절 지키는 것입니까?
그 날이 갖고 있는 의미를 잘 되새기고 그 날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오게 된 그 자유를 잘 누리는 것을 “3.1절을 지킨다, 광복절을 지킨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그 날이 무슨 날인지도 모르고, 태극기 하나 꽂아놓고 “난 지켰네.”한다는 것입니다. 그 것을 우리가 율법주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진리에 대해서 복음에 대해서 교리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면서 열심으로 자기의 죄를 덮으려고 하는 것, 이것을 막기 위해 사도 바울이 3장까지에서 교리를 자세하게 설명을 하고 4장의 “그러므로”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로마서에서도 장장 11장까지 교리를 자세하게 설명해 놓고 12장부터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살아라.”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제가 왜 인간이 법을 지키려는 열심을 극악한 죄라고 하는지 지난번에 잠깐 설명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인간이 타락을 하고 하나님 없이 살게 된 후에 인간은 자기 스스로 자신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런데 악이라는 놈이 인간을 어떻게 파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입니다. 전쟁이 일어납니다. 간음과 다툼이 생깁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 없이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법”이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정작 자신은 그"법“을 지키기 싫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 ”법“을 지켜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게 하기 위해 법을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법을 지키는 노력을 함으로 해서 하나님 없이 자신들의 안위를 스스로 챙기는 것이 바로 인간의 법입니다. 스스로 법을 지켜서 내 삶의 안전을 확보하려는 시도지요.
그리고 모든 인간은 타락한 이후에 죄책감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 죄책감이라는 녀석은 엄청난 괴물입니다. 누구도 그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그 죄책감을 상쇠하기 위해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을 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그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시도입니다. 그러한 것들로부터 바로 오늘 제가 지적하고 싶은 ”율법주의“가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고 무조건 내가 내 힘으로 지켜 내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율법주의, 그 율법주의는 가장 사악한 죄악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율법주의에 젖어 신앙생활을 하고 있던 바리새인들에게 “화 있을 진저”라고 저주를 하셨고 율법주의를 다룬 책 갈라디아서에서도 사도 바울은 그 율법주의를 다른 복음이라고 했고 그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욕을 퍼부은 것입니다. 율법주의는 사악한 죄입니다.
그러면 오늘날로 넘어오겠습니다. 이제 그 구약의 안식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 나라가 왔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 안식 후 첫날인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주일날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된 그 하나님 나라를 고대하고 소망하며, 그 나라를 직접 누리기도 합니다. 구약의 안식일이 갖고 있던 의식적인 면은 이제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어 사라졌지만 그 정신과 의미는 그대로 오늘 날 주일에 배어있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구약의 안식일이 그러했듯이 그 날을 무작정 지키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그 날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누리는 것이 정말 그 날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도 또 다른 율법주의가 교회 안에 들어와서 우리가 주일 날 왜 모여서 예배를 하는지 그리고 그 날이 갖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단순히 “난 주일 지켰어” “난 교회 안 빼 먹었어” 라는 열심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정말 그 주일의 의미를 잘 알고 계시고 평소에도 그 안식을 잘 누리실 수 있는 분이라면 여러분 꼭 주일 날 예배드리지 않아도 됩니다. 그 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날에 들어있는 의미가 중요한 것입니다.
여기 일요일은 한국의 월요일입니다. 날짜에 얽매이시면 안 됩니다.
제가 아는 중앙아시아의 어떤 작은 나라에 가신 선교사님은 그 나라의 휴일이 목요일이랍니다.
그래서 그 곳에서는 목요일 날 모여서 예배를 드린 답니다. 그거 안 되나요?
성경에도 분명히 명기되어 있잖아요?
(갈4:9-11)
9 지금은,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알아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 무력하고 천하고 유치한 교훈으로 되돌아가서, 또다시 그것들에게 종노릇 하려고 합니까?
10 여러분이 날과 달과 계절과 해를 지키고 있으니,
11 내가 여러분을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염려됩니다
(골2:16-17)
16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고 마시는 일이나 명절이나 초승달 축제나 안식일 문제로, 어떤 사람도 여러분을 심판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17 이런 것은 앞으로 올 것들의 그림자일 뿐이요, 그 실체는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롬14:5-6)
5 또 어떤 이는 이 날이 저 날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또 어떤 이는 모든 날이 다 같다고 생각합니다. 각각 자기 마음에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6 어떤 날을 더 존중히 여기는 이도 주님을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요, 먹는 이도 주님을 위하여 먹으며, 먹을 때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먹지 않는 이도 주님을 위하여 먹지 않으며, 또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지요? 왜 날짜에 얽매이느냐고 호통을 치지요?
캘빈의 기독교 강요 2권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이 계명의 의식적인 부분이 폐지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예수께서 오심으로 꼭 토요일 날 지켜야 했던 안식일의 의식적인 부분이 폐지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진리이심으로 그가 나타나심으로 모든 그림자들이 뒤로 숨는 것이다. 그리스도야말로 참 된 안식의 성취이시다. 그러므로 안식이란 어느 하루 동안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이 죽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하게 되기까지 우리 삶의 전 과정을 다 포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날짜를 지키는 미신적인 행위를 삼가야 할 것이다.‘
우리는 주일만 지키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전 영역에서 그 진정한 안식의 의미를 배우고 누리며 살아야 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교회가 모이기로 한 어느 날에 함께 모여서 그 하나님을 자랑하고 찬양하고 , 그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즐기는 시간이 예배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일날 부득이한 사정이 있으신 분들은 빠지셔도 됩니다.
여행 가셨다가 비행기 타고 본 교회로 안 오셔도 됩니다.
왜 한국 교회에 “주일 성수” 바람이 불었느냐 하면 목사님들이 신자들의 열심을 독려하기 위해서 겁을 많이 줬다고요. 주일 날 교회 빼먹고 놀러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 이야기, 십일조 떼먹었더니 아이가 불치병이 걸린 이야기, 십일조 다 계산해서 냈더니 그 아이가 나았다는 이야기 등등 뭐 이런 전설의 고향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들로 겁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겁이 나서, 혹은 재수 없을까봐 교회에 나와 주는 것이 “주일 성수”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모이는 이유가, 교회에 나오는 이유가 “영원히 천국에서 함께 살 내 천국 가족들이 보고 싶어서, 그리고 그 천국의 예배를 사모해서 가 아니라, ‘그 날 안 나오면 차에 빵꾸 날까봐, 비즈니스에 지장 있을까봐, 왠지 꺼림칙해서‘ 이런 거라면 여러분 교회 안 나오셔도 됩니다. 집에서 푹 쉬세요.
제가 이렇게 진실을 이야기하면서도 걱정이 되는 것은 이렇게 진실을 이야기하면 몇몇 악당들이 “이제 마음 놓고 교회 빼먹어도 되겠다.“ 하고 마음을 먹게 될까봐 제일 걱정입니다.
그래서 캘빈이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어떤 정해진 날을 택하여 성도가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신비한 떡을 떼며 공적으로 기도하며 일군들을 노동에서 쉬게 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날을 정해 놓지 않으면 어떻게 그런 모임을 가질 수 있겠는가? 혹자는 날을 구별하는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날마다 모이자고 한다. 그렇게 날마다 모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것을 실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일정한 시간을 영적인 지혜를 위해서 정하는 것은 진실로 가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요일로 그 날을 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그 날을 소중하게 생각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꼭 함께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찬을 나누고 함께 기도하고, 쉼을 갖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럼에도 부득이하게 교회를 빠지게 되었을 때 죄책감 같은 것을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게 율법주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잘 알지 못하고 올바른 지식에 근거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입니까?
제9장 삼위일체
(고후13:13)
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사귐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오늘은 삼위일체에 관해 함께 공부를 하겠습니다. 삼위일체는 솔직히 말해 우리 인간의 언어로 온전히 설명을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그래도 우리가 성경이 말하고 있는 만큼은 알아두어야 하겠지요.
먼저 여러분께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몇 분이신가요? 한 분이십니다. 백번 지당한 말씀입니다. 다른 질문을 드리지요.
예수님은 하나님이신가요? 그렇지요? 그럼 지금 예수님은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지요. 그렇다면 그 보좌에는 누가 앉아 계십니까? 성부 하나님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벌써 몇 분이신가요? 두 분이십니다. 보좌에 앉아계신 분과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분.
(행7:55-56)
55 그런데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쳐다보니,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고, 예수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였다.
56 그래서 그는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하나님의 오른쪽에 인자가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맞지요?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십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확인해 둘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밤낮을 무덤 속에 계셨습니다. 그렇지요? 그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럼 그 동안 우주는 누가 다스리셨나요? 하나님은 한분이시라면서요.
이런 질문은 어떠세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의 몸을 입고 내려 오셨습니다. 분명 그 분은 자신을 비우시고 신성을 가지셨지만 자신을 증명하거나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그 신성을 사용하지 않으시기로 하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으로 사시는 동안 하늘에는 누가 계셨습니까?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면 하늘의 왕좌는 공석이었다는 말입니까? 어렵지요?
우리는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알고 있는데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도 하십니다.
(요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다. 그러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셔서,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실 것이다.
보시다시피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구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럼 이미 그 두 분은 다른 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무엇을 구하시는가 하면 또 다른 보혜사, 즉 성령을 너희에게 주도록 구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럼 이 대목에서 확인할 수 있는 하나님만 세 분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지금 아버지 하나님께 구하고 계신 하나님, 그 분이 구하시는 것을 보내시는 하나님, 그리고 보냄을 받는 성령 하나님 벌써 세분이십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하나님은 한분이라고 하는 겁니까? 좀 더 확실한 근거 구절을 대 드리지요.
(요16:26) 그 날이 오면,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오시면 성자 예수님께서 하신 일과 하신 말씀을 모두 생각나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성령 하나님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보내신다고 합니다. 이렇게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전부 다른 분입니다. 한 군데 더 볼까요?
(요16: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면,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
더 이상 설명할 필요 없지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다른 분이라는 쐐기를 박는 구절을 하나 더 찾아 드리지요.
(막1:11) 그리고 하늘로부터 소리가 났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
누가 누구에게 말씀하신 것입니까?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께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혼자 복화술(複話術)을 쓰시며 연극하신 것 아니잖아요?
거기다가 성경은 성령 하나님의 명령이나 성부 하나님의 명령이나 성자 하나님의 명령이 동등한 권위를 갖고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기록하고 있기도 합니다.
(행13:2-4) 그들이 주께 예배를 드리며 금식하고 있을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위해서,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라. 내가 그들에게 맡기려 하는 일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금식하고 기도한 뒤에, 두 사람에게 안수를 하여 떠나 보냈다. 바나바와 사울은, 성령이 가라고 보내시므로, 실루기아로 내려가서, 거기에서 배를 타고 키프로스로 건너갔다.
여기 보시면 바나바와 사울을 보내시는 분이 누구세요?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표현하자면 세분이십니다. 제가 분명 ‘우리가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표현하자면‘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글자 그대로 세 분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것을 삼신 론이라 하는데 그것은 이단이기 때문입니다. 세 분의 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단 사설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는 것입니까? 참으로 어려운 개념입니다. 누가 그 것을 인간의 언어로 완벽하게 설명해 낼 수 있을까요?
그리고 삼위일체라는 단어도 성경에는 나오지 않으니 설상가상입니다.
최근에도 한국 예수교 장로회 통합 측의 이단 상담소장 이었던 한 목사님이 이 삼위일체 교리 때문에 이단으로 몰렸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이 성부하나님 따로 성자 하나님 따로 성령 하나님 따로 각 각 본질을 가진 세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바람에 이단으로 몰렸습니다. 바로 그분이 주장하는 것이 삼신 론인 것입니다.
저는 지금 그 삼신 론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삼신 론은 본질과 인격이 모두 다른 완전히 독립된 각자의 신들을 이야기 하지만 제가 말하는 삼위일체는 본질과 본체가 하나인 다른 위격의 세분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어렵죠?
제가 존경하는 손봉호 교수님은 화란 자유대학에서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으시고 지금은 서울대 사대에서 교수직에 계시지만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신학 석사를 하신 신학자이십니다. 그 박식하신 분이 언젠가 어느 글에서 삼위일체에 관해서는 정말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말씀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종교 개혁가 마틴 루터도 당시 개신교도들이 하나님은 어떻게 세분이시면서 한 분이신가? 라는 질문을 던지자“ 난 모른다.” 라고 일축해 버렸었지요.
솔직히 저도 명확히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 합니다. 그러면 오늘 무슨 설교를 하려고 하는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바까지만 우리가 확인하자는 것입니다. 그것을 명확하게 이해하자는 시도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계를 넘어가지 말아야 하는가를 주의 깊게 살피고 정리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이 이성으로 모두 이해 할 수 있는 분이시면 그런 작은 하나님을 뭐 하러 믿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이성 밖에 계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이 짧은 이성으로 이해 할 수 있는 것만 계시해 놓으신 것이 바로 성경인데 그 것 조차도 우리는 쩔쩔 매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논리적인 이해가 가지 않아도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가 믿겨집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모두 미친 사람들입니다. 예수에 미친 사람들. 하지만 그것은 세상은 모르는 거룩한 미침인 것이지요. 오늘은 바로 그 믿음을 전제로 이 삼위일체를 공부할 것입니다. 믿음이 전제되지 않은 삼위일체 설교는 그냥 헛소리로 밖에 안 들릴 테니까요.
말씀드렸다시피 삼위일체라는 말은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초대교회 때부터 슬금슬금 나오기 시작한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이단의 무리에 대해 반박을 하기 위해 정립된 교리입니다. 교회가 생겨난 후 아리우스-아타나시우스의 논쟁을 비롯하여 수많은 이단들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고 나섰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주장들이었습니다.
그 많은 이단들 중에 단일신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단일신론이라는 것은 2~3세기 사이에 발전한 그리스도교의 한 이단으로, 이것은 그리스도가 독립적인 한 인격적 실체라는 교리를 부인하고 오직 성부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임을 주장함으로써 극단적인 유일신 사상을 대변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간주하지만, 신은 숫자적으로 하나뿐이어야 한다는 데 집착했습니다. 이 단일신론은 2가지 형태로 발전했는데, 하나는 역동적 단일신론(또는 양자론)이고 다른 하나는 양태적 단일신론(또는 사벨리우스주의)입니다.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이단 중에는 양자론 자들도 있습니다.
양자론은 그리스도가 기적적으로 잉태된 단순한 인간이었는데, 다만 그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무한히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로 임명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니까 원래 인간이었다가 하나님께 발탁이 되어서 변화된 모습으로 그 사역을 감당한 사람이 예수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2세기말경 테오도투스가 이 사상을 로마에서 가르치다가 교황 빅토리우스에게 파문당했고 그 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 주장을 지지해 오다가 오늘날 이 사상은 유니테리언파의 신념으로 자리를 잡았지요. 이 주장은 예수님을 피조물로 격하시켜 버린 것입니다. 유니테리언들은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trinity를 부정하고 unity를 주장하는 이들입니다.
세 번째로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이단이 양태론 적 단일신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양태론 적 단일신론은 한 분 하나님이 각 시대마다 마스크를 바꿔 쓰고 나오신다는 것이지요. 구약시대에는 성부 하나님으로, 신약 시대에는 예수님으로, 교회 시대에는 성령님으로 나타나신다는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는 동일한 분의 다른 이름일 뿐이고 한 하나님으로서
"그 분이 세상보다 먼저 서 계신다는 점에서 성부요, 인간으로 나타났다는 점에서 성자로 부르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양태 론에 젖어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설명을 많이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설명하는데 “남자가 아이들한테는 아버지고 여자에게는 남편이고 부모에게는 자식이잖니, 삼위일체는 바로 그런 거야” 이게 바로 양태 론입니다. 유명한 이단입니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자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고 그저 위대한 박애주의자의 한 사람으로 본받을 만한 성인으로만 인정을 하고 있습니다.
1924년에 미국의 북 장로 교단인 PCUSA가 채택한 오번 고백서는 가히 가관입니다.
1293명의 미국 장로교회 목사들이 모여서
(1)성경은 무오하지 않다.
(2)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은 말도 안 되는 헛소리다
(3)예수가 그의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여 죽었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4)예수의 육체적인 부활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5)기적의 역사성도 절대적인 신앙의 대상이 아니며 하나의 설에 지나지 않는다.
이게 바로 미국 북 장로 교단의 오번 고백서입니다. 오늘 날 교회의 현실이 이러합니다. 많은 목사들이 이러한 오번 고백서에 사인을 하고 목회의 현장에서 목회를 했고 지금도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오강남 교수라는 사람이 “예수는 없다”라는 책을 써서 성부 하나님의 아들이신 “하나님이신 예수는 없다”라는 내용의 책을 써서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한국의 유명한 목사님이 그 오강남 교수를 가리켜 신심이 깊고 훌륭한 신학자라고 설교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여러분, 오강남이라는 사람은 지금 적그리스도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그 사람에게도 임하길 바라지만 지금 그는 적그리스도의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이 틀림없습니다. 이건 제 말이 아닙니다. 성경이 명확히 밝히고 있는 바입니다.
(요일2:22-23) 누가 거짓말쟁이입니까?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사람이 곧 적그리스도입니다. 누구든지, 아들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버지를 모시고 있지 않는 사람이요, 아들을 시인하는 사람은 아버지를 모시고 있는 사람입니다.
(요2, 1:7) 속이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오셨음을 고백하지 않습니다. 이런 자야말로 속이는 자요, 적그리스도입니다.
제 말이 아니지요?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전부 적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예수님의 하나님이심을 부인하는 자들, 그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것을 부인하는 자들을 가리켜 적그리스도라고 단호하게 밝힙니다. 그런데 성경을 유일한 하나님의 계시라고 믿고 있다는 기독교 목사가 성경이 이렇게 명확하게 진리를 계시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사람들을 두둔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이 분명합니다.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을 우리는 불신자라고 하지요?
그런 불신자들이 목사 노릇을 하고 있으니, 아니 그것도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목사들 중에 한 사람이라니 분명 말세는 말세인가 봅니다. 그러면서 가난한 자들을 위해, 소외된 자들을 위해 감옥도 가고 일생을 바쳤다는 그 명찰 하나 달고 존경받고 있습니다. 여러분, 잘 확인 하셔야 합니다.
기독교는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런 것은 진정 참 예수를 알고 나면 당연히 우리에게 맺혀지는 열매입니다. 그러나 예수 없이,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선행이나 순결함은 여전히 죄인 것입니다.
죄가 뭡니까? 헬라어로 죄는 ‘하마르티아’입니다. 그 말은 ‘과녘을 벗어나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죄는 ‘열심’으로 위장할 수 없는 것이고 윤리적 행위로 치장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열심과 노력이라 할지라도 과녁을 벗어난 것이면 모두 죄인 것입니다. 이미 해적질을 하기 위해 목적지를 향해 출항하고 있는 배 안에서 아무리 선한 일을 한다 해도 그 모두는 해적들의 죄 된 행위인 것처럼 예수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자랑이나 만족이나 주위의 평판을 의식해서 하는 선한 일은 모두 죄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죄 론에서 자세하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기독교는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 말씀을 믿는 자들을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그저 본받아야 할 훌륭한 위인이라고 한 슈바이처를 기독교의 목표로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슈바이처가 아프리카에서 평생을 바쳤다고 해도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부인했다면 그는 구원이 무엇인지 모르고 간 사람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시면 십자가가 구원일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훌륭한 인간의 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그 사람이 모든 성도의 죄를 다 짊어질 자격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 분은 하나님이셔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모두의 죄를 짊어지고 대속의 죽음을 죽으실 수 있는 것입니다.
분명 성경은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1:18) 일찍이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나, 아버지의 품 속에 계시는 독생자이신 하나님이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하나님이신 독생자께서')그분을 나타내 보이셨다.
(요일5:20)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그 참되신 분을 알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이해력을 주신 것을 압니다. 우리는, 그 참되신 분,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이분이 참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요20:27-28) 그런 다음에,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서 내 손을 만져 보고,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래서 의심을 떨치고 믿음을 가져라" 하고 말씀하셨다. 도마가 예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하고 대답하니
(히1:2) 이 마지막 날에는 아들을 시켜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들을 만물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그로 말미암아 온 세상을 지으셨습니다.
어떠세요? 성경은 이렇게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창조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시라고요?
자, 그러면 ‘본체가 하나다. 본질이 하나이다.’라는 말의 뜻은 무엇일까?
성경은 예수님과 하나님은 하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예수님께서 지금 ‘하나님과 예수님은 원래 하나’라는 뜻으로 이 말씀을 쓰셨다면 “너희가 여태까지 믿었던 그 하나님이 바로 나다” 그래야 맞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와 내가 하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성경이 말하는 “하나”라는 뜻을 의역을 하면 “하나님과 예수님은 한 마음이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성경이 말하는 “하나”라는 뜻은 본질이 똑같다는 의미이지 숫자적으로 하나라는 뜻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 세 아들에게 “뭐 먹을래?”하면 셋이 똑같이 “맥도널드”합니다. 그럼 우리 부부가 “저놈들은 어쩌면 저렇게 똑 같아 늘 하나야”라고 말을 합니다. 거기서 하나라는 의미가 뭡니까? 셋이서 동일한 생각, 한 마음을 가졌다는 뜻이지 그 아이들이 하나인데 손오공처럼 머리카락 뽑아서 여럿이 되었다는 말이 아니란 것입니다.
(빌2:6) 그분은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여기서도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한 본체, 즉 본질, nature를 가지셨다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이 말하는 똑같다는 것은 모든 신의 속성과 성품과 능력, 즉 영광과 거룩과 능력과 존귀와 의가 동등하시다는 것입니다. 성부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똑같으십니다. 그 마음이, 능력이, 영광이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하나의 뜻입니다.
그럼에도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하나님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 성자 하나님께서 성부 하나님께 복종하시고 성령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의 하신 일을 적용하시는 등의 복종 관계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 것을 신학에서는 “경륜 적 삼위 일체” “economic trinity"라 부릅니다. 삼위 하나님은 우열이 있으신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 백성들의 구원”이라는 커다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성자 하나님께서 성부 하나님께 자발적인 복종을 하셨고 성령 하나님께서도 그 구원이라는 목적을 위해 성자하나님과 성부 하나님께 자발적인 복종을 하신 것을 우리가 경륜 적 삼위일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학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유일신(唯一神)이시다는 명제의 “유일(唯一)” 이라는 단어의 뜻은 뭡니까? 우리는 유일신이신 하나님을 믿는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잘 구별하고 계셔야 합니다.
유일신(唯一神)이라는 것은 단 하나의 신이라는 뜻이 아니라 다른 신들은 없다는 뜻의 오직 유(唯) 자를 써서 유일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유일신이라는 것은 숫자적인 개념보다는 구별의 개념이 더 강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신은 없고 하나님만이 신이라는 뜻인 것입니다.
(막12: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요5:44)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요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윗 구절들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신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라는 구별의 의미로 우리는 ‘유일(唯一)’이라는 단어를 끌어다가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삼위일체는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본질이 같으시고 동등하시며 우열이 없으신데 질서 상 각 위에 위치하신 것이라 정의 할 수 있습니다. 성부하나님 홀로 전능하시며, 거룩하시고, 존귀하시며 성자하나님 홀로 전능하시며, 거룩하시고, 존귀하시며, 성령하나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셋이 합쳐야만 온전한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태양의 열과 빛과 그 태양 덩어리가 합쳐져야 태양이라고 하는 것처럼 우리 하나님도 세분이 합쳐져야 비로소 완전한 하나님이 된다고 생각하면 커다란 오산입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모두 온전하고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왜 우리나라에 삼위일체가 오해되어 들어왔는지 아세요?
1648년3월에 공표된 웨스트민트서 신앙고백서가 우리나라에 처음 번역되어 들어올 때 잘 못 번역이 되어 들어왔습니다. 그 부분이 이러합니다.
“In the unity of Godhead there be three persons, of one substance, power and eternity; God the Father, God the Son, and God the Holy Ghost. The Father is of none, neither begotten nor proceeding; the son is eternally begotten of the Father; the Holly Ghost eternally proceeding from the Father and the Son”
여기서 “there be three persons, of one substance”이 오역되어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three persons에서 persons은 구별된 존재입니다. 그러나 본체가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1966년도에 이종성씨가 번역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이렇게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본체는 하나이시나 삼위로 계신다. 아버지로서의 하나님, 아들로서의 하나님, 성령으로서의 하나님이시다”
충분히 오해할만한 번역이지요? 본체가 하나인데 삼위로 계시며 아버지로서, 아들로서, 성령으로서, 즉 한 남자가 아버지도 되었다가 아들도 되었다가 남편도 되었다가 하는 식의 그런 표현 같지 않아요? 이 말을 정확하게 번역하면 ‘삼위가 계신데 본체가 하나이다.’ 라고 해야 맞습니다. 위 어구의 정확한 번역은 이러합니다.
“단일한 신격 안에 본체와 능력과 영원성이 하나인 세 격 위가 있으니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하나님이시다. 성부는 아무에게서도 나오지 않으시고 출생하지도 발출하지도 않으시나 성자는 성부에게서 영원히 발출하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히 발출하신다.”
이렇게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성부 하나님도 하나님이십니다. 성령하나님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고 합니다. 그것은 본질을 가리키는 것이라 했습니다.
성경을 잘 보시면 하나님은 스스로 당신을 가리켜 “나”라고 단수로 쓰시기도 하시고 “우리”라고 복수로 쓰시기도 하십니다.
(사6: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창1:26-27)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이렇게 하나님은 본질상 한분이시면서 위격 상 세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세분이시면서 본질상 하나이십니다. 그렇게만 이해하고 계세요.
그러나 이 삼위일체를 보면서 우리가 넘지 말아야할, 속지 말아야 할 것들은 분명히 구별하셔야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그 분이 이 땅에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이지 인간 중에 특출한 사람이,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이 해탈을 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임명된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두 번째로 성령하나님도 완전한 능력과 존귀와 위엄과 의와 거룩의 하나님이시란 것입니다. 그 성령 하나님을 단순히 우리가 써먹을 수 있는 능력으로만 생각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성령을 하나님이 아닌 능력이나 힘 정도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성령하나님은 온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에 있어서 구약시대에 성부 하나님께서 앞에 서셨고 신약 시대에 우리 예수님께서 서셨고 교회시대에 성령 하나님께서 전면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분명 그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역할이 구분되어 있는 것 같아 보이나 그 세 분 위격의 우열이 있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여, 오소서” 라는 등의 하나님을 향한 명령은 아주 불경한 짓인 것입니다.
세 번째로 현대 신학의 철학적 바탕을 이루고 있는 칸트나 헤겔의 영향을 받아 오강남 교수같이 범신론 (모든 우주, 자연, 세계는 하나로 귀착되며 그 하나는 바로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우주가 바로 하나님이다. 그래서 나무에도 하나님이 있고 바위에도 하나님이 있고 바다에도 하나님이 있다는 식의 주장)에 빠지거나 이신론(신은 인간과 우주를 창조해 놓고 절대 우리 삶과 역사에 간섭 않는다. 예정 작정 섭리 모두 부인한다)같은 것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며, 성자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셨고 성령 하나님은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대화하시며 우리를 세심하게 배려하시고 이끌어 가시는 하나이신 세 위격의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은 유니테리언들의 속임수에 넘어가서도 안 되며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회유에도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어떤 우매한 자들처럼 성령을 그저 하나의 능력으로 취급해 버리는 우를 범해서도 안 됩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동일한 본질을 소유하신 하나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제10장 성령 (1)
(눅3:16-17)
16 그래서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말하였다.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줍니다. 그러나 나보다 더 능력이 있는 분이 오십니다.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 자격조차 없습니다. 그는 여러분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입니다.
17 그는 자기의 타작 마당을 깨끗이 하려고, 손에 키를 들었으니, 알곡은 곳간에 모아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입니다."
한국에 신유집회가 많이 열리는 기도원들이 몇 군데 있습니다. 저도 대학시절 같은 교회 주일 학교 교사이면서 제가 다니던 대학의 사범대학 교수이셨던 어떤 집사님의 부탁을 받고 그런 곳에 찬양을 하러 몇 번 간 적이 있습니다. 엄청난 규모의 기도원에 도착을 해서 먼저 기도원 원장에게 인사를 드리러 가야한다고 해서 그 원장님의 방으로 갔습니다. 마침 몇몇 사람들과 그 곳 기도원 원장이 그날 점심 집회 때 거둔 헌금을 계수하고 있었습니다. 언뜻 눈으로 봐도 어마어마한 액수였습니다. 거기다가 헌금 바구니에 들어있는 반지며 시계, 목걸이 등 값비싼 귀금속들을 이리 저리 보면서 그 곳에 있는 사람들끼리 "너 가져라""내가 갖으마."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헌금과 헌물들을 보니 병을 고치겠다는 병자들과 가족들의 애 타는 염원이 보이는 듯했습니다. 그들의 간절함이 얼마나 컸으면 그렇게 자신의 몸에 있는 귀금속까지 헌금 바구니에 넣었겠습니까?
그 기도원에서 간혹 “암 환자가 낳았다. 버거스씨 병에 걸린 사람이 낳았다” 등등 신유의 역사가 일어났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도 있었습니다. 몇몇은 나와서 간증도 했습니다.
다리를 절룩거리며 나온 어떤 남자가 펄떡 펄떡 뛰면서 그 기도원 원장의 신통력을 입증하는 제스추어를 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제가 보기에 거기에 하나님은 없었습니다. 오로지 그 원장을 통해서 병을 고쳐서 이 땅에서 좀 더 오래 살고 싶어 하는 간절한 병자들은 있었을지언정 하나님이 오늘 부르신다 해도 찬송하며 가겠다는 신앙인들을 보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 곳의 강대상 위에는 커다랗게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라’는 표어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 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성령이여, 성령이여’를 외치고 있었습니다.
저는 대학 시절부터 찬양 사역을 했었기에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는 여러 집회에 참석할 일이 많았습니다. 그렇게 이곳저곳을 다니다보면 가끔 이해 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갑자기 앞에서부터 어떤 이들이 몸을 떨면서 춤을 추기 시작하면 이내 온 회중이 무슨 춤의 신이 임한 것처럼 전체가 춤을 추기 시작하는 그런 모습도 보았고 (그들은 그것을 성무라 하더군요) 회중 저쪽 구석에서 갑자기 배를 쥐고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하면 점점 그 웃음이 퍼져서 온 회중이 다 웃느라고 배꼽이 빠지는 것도 보았습니다. 갑자기 온 회중이 알아듣지 못할 방언으로 찬양을 하는 것도 보았고, 휠체어에 앉아있던 노인이 집회 중간에 벌떡 일어나 예배당 안을 뛰어다니는 그런 것도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 모든 것들을 성령의 사역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성령 세례를 받아야 그런 일에 참여할 수 있다고, 성령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소위 second blessing이라는 것이지요.
신비나 기적이 있는 곳에 항상 성령의 이름이 회자되고 그들이 말하는 성령세례를 받지 않은 자들은 머쓱해서 머리나 긁적이다가 돌아설 수밖에 없는 그런 분위기가 의외로 오늘날 교회에 많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통계에 의하면 지구상의 인구를 60억으로 잡았을 때 16억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랍니다. 그 중에 로만 캐톨릭이 9억이 넘고 성공회가 5천만 명, 오순절 은사 주의자들이 3억3천만 명이며 복음주의 기독교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약3억5천만 명이라 합니다.
그런데 오순절 은사주의자들 말고도 자신들은 복음주의 기독교 안에 들어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과 로만 캐톨릭과 성공회 안에서도 그러한 신비주의나 은사주의자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아니 거의 대부분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신비주의와 은사주의는 기독교를 잠식해 가고 있습니다. 참으로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그런 신비적이고 기적적이며 기복적인 신앙에 빠져 있는 것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발견합니다.
이러한 신비주의 운동을 오순절 운동이라 하는데 이 운동은 20세기 초반부터 서서히 불기 시작한 운동입니다.
그러한 신비주의 운동은 1901년 미국 감리교회 전통에 있던 charles parham으로부터 출발되었습니다. 그가 지니고 있던 second blessing의 신학적 틀 안에서 형성되어 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성도는 구원을 받은 이후에 반드시 second blessing을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들은 두 번째 second blessing을 받아야 성도는 완전 성화 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좀 더 나은, 성숙한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완전 성화도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그게 정말 가능한가요? 우리가 이 땅에서 완전성화가 된다면 천국이 왜 필요합니까? 물론 나중에는 완전성화를 주장했던 요한 웨슬레도 자기가 말한 것이 “자범 죄를 짓지 않는 상태”라고 많이 양보를 했습니다만 그럼에도 여전히 완전성화를 위해 성령세례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오늘날도 위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이 parham목사가 캔사스의 어느 성경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치면서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성령의 은사를 경험함으로 가능한 것이라고 가르쳤고 그가 안수하자 Agnes Ozman이라는 학생에게서 방언이 터졌습니다. 이것이 오순절운동의 출발이었습니다. 당시 parham목사의 이런 운동은 좋은 호응을 얻지 못했고 결국 그는 1906년 LA의 azusa거리로 가서 그의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거기서 폭발적으로 이 오순절 운동에 가속이 붙어서 오늘날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성령세례를 강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성령세례를 받아야만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처럼 인식하고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오순절 파의 영향으로 어떤 교회에서는 구역예배에서 방언을 가르치는 교회도 있습니다. 성령을 받아 방언을 해야만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 LA에도 그런 교회가 많습니다.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은 그 열정은 높이 치하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연습을 해서라도 방언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은 복음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성령 세례의 가장 대표적인 증상으로 내세우는 방언은 은사입니다.
은사가 뭡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은사는 받은 자격이 없는 자에게 자기도 모르게 주어지는 것을 은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구해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물은 주는 사람 마음대로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은사를 연습을 해서 얻어낼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언어도단이지요.
1901년까지 기독교의 역사에서 방언에 대한 보고(報告)는 한 건도 없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1900년간 방언을 닫아버리셨을까요?
오죽하면 어거스틴이 ‘왜 방언이 사라졌을까?‘ 에 대한 책을 쓰려는 시도까지 했을 만큼 방언은 초대 교회 이후로 철저하게 사라졌었습니다.
과연 성경이 말하는 성령세례라는 것이 오순절 파들이 주장하는 그런 것일까요?
기적이 임하고 능력이 임하며 병자가 낫는 그런 것을 성령세례라고 하는 것일까요?
한국에 가면 천마사라는 곳이 있습니다. 유명한 절입니다. 그 곳에서도 기독교의 오순절파들이 행하는 은사집회와 방불한, 신의 이름만 부처님으로 부르는 똑같은 집회가 있습니다. 서울서도 그곳만 가는 관광버스가 생길 정도로 유명한 곳입니다.
중들이 안수하고 방언하고 안찰을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도 암 환자가 낫고 위장병환자가 고침을 받고, 아기를 낳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이를 얻기도 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거기서 일어나는 일은 그들이 하나님 대신 부처를 부르고 있을 뿐 기독교의 신유 기도원이나 여러 은사 집회들에서 일어나는 일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절에서 일어나는 일이므로 악령 세례입니까?
여러분 성령 하나님이 과연 그런 일을 하러 오시는 것일까요? 왜 우리는 성령을 받아야 하는 것이며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성령세례가 무엇인지 오늘 성경을 통해 명확하게 밝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세례요한은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예수님은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행1:5) 요한은 물로 세례를(또는 '침례') 주었으나, 너희는 여러 날이 되지 않아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 하셨습니다.
여러분 세례가 무엇이라 했나요?
세례는 죽어야 할 죄인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죽고 그리스도와 합하여 새 사람으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머리에 물을 뿌려 그가 물에 잠겨 죽은 자라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고 그가 새 사람으로 살아 올라오는 것을 세례라 합니다.
이렇게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세례라는 것은 연합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골로새서를 보면 그 세례의 의미가 잘 나와 있습니다.
(골2:12) 여러분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또한 그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일으키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가 바로 “함께”라는 단어입니다. 세례란 바로 “함께”라는 개념인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세례는 무슨 세례입니까? 오늘 본문은 그 요한의 세례를 “회개의 세례”라 합니다.
(행13:24) 그가 오시기 전에,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포하였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요한의 세례를 회개의 세례라 합니다.
회개의 세례란 세례를 받는 자신들이 죄 사함을 받아야만 하는 불가능한 인간들임을 고백하고 누군가 자신들을 건져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고백을 하는 것이 바로 회개의 세례였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내가 용서 받아야 할 죄인 속에 있는 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역시 연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공생애의 시작을 바로 그 세례를 받으심으로 시작하십니다.
예수님이 무슨 죄가 있으시기에 회개의 세례를 받으시는 걸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죄인인 우리 인간들과 동일시되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우리 죄인들을 품에 안으시고 우리를 대표하여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시기 위해 우리 죄인과 연합되시는 장면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죄가 없으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몸을 입고 죄인과 연합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를 받으심으로 나도 그들과 동일한 위치에 와 있는 것을 인정하시는 것이지요. 그것을 내포적 대신 ‘inclusive representative'라 합니다. 우리 인류를 대표하기 위하여 우리와 동일시되셨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이제 요한의 세례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행2:37-38)
37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찔려서 " 형제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말하였다.
38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의 용서함을 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요한의 세례에 동참하심으로 우리 죄인들과 동일시 되셨다면 이제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그 복된 소식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롬6:3-8)
3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하는 세례를 받은 우리 모두가, 그분의 죽으심과 연합하는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4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죽으심과 연합하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살리심을 받은 것과 같이, 우리도 새로운 생명 가운데서 살아가게 하려는 것입니다.
5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죽음으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또한 분명히, 그의 부활하심과 같은 부활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6 우리는,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서 죽은 것이, 죄의 몸을 멸하여서, 우리가 다시는 죄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임을 압니다.
7 죽은 사람은 이미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었습니다.
8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그와 함께 우리도 또한 살아날 것임을 믿습니다.
세례라는 것은 이렇게 연합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다는 것은 나는 이제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의 그 사심, 즉 부활에 동참하는 자가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의 세례는 왜 물로 주는가?
(벧전3:20-21)
20 그 영들은, 옛적에 노아가 방주를 짓고 있는 동안에, 곧 하나님께서 아직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하지 않던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방주에 들어감으로써 물에서 구원받은 사람은, 겨우 여덟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21 그것은 지금 여러분을 구원하는 7)세례를 미리 보여 준 것입니다. 세례는 육체의 더러움을 씻어 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힘입어 선한 양심을 가지려고, 하나님께 드리는 호소입니다.
노아의 방주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이라 했나요? 새 가족 성경공부 때 말씀드렸지요? 노아의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저주의 물을 방주가 대신 맞고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택하신 피조물들이 살아나는 것, 그게 노아의 방주가 담고 있는 복음입니다. 그래서 방주는 하늘의 모형으로 3층으로 되어 있는 것이라 했잖아요.
성경에서 물이라는 것은 모든 육체를 그 아래로 삼켜버려 사망으로 끌고 가는 것으로 상징이 됩니다. 물은 그렇게 저주와 심판과 죄와 악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을 묘사할 때 ‘다시 바다가 있지 않겠고’라고 묘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저주의 물에서 건짐을 받기 위해 우리가 타야하는 방주, 배는 그 물이 없으면 뜨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그게 무슨 의미인가? 그러니까 물은 사망을 초래하기는 하지만 어떤 것에게는 그것이 힘이기도 하고 생명이기도 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쉽게 말해 이런 것입니다. 우리 자체로서는 물에 빠지면 죽지만 배 속에 들어가 있으면 그 물로 인해서 우리는 오히려 죽어야 할 자들과 구별되어지고 분리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한의 세례는 물 아래 죽어 마땅한 자라는 것을 인정하고 물 위에 뜰 수 있는 어떤 나 아닌 다른 분에 의해 구원을 얻을 것을 소망하는 것이 동시에 내용으로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런 세례의 내용은 고린도 전서에도 나옵니다.
(고전10:1-2)
1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이 사실을 알고 지내기를 바랍니다. 우리 조상들은 모두 구름의 보호 아래에 있었고, 바다 가운데를 지나갔습니다.
2 이렇게 그들은 모두 구름과 바다 속에서 세례를 받아, 모세에게 속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야 하는데 그들에게는 수십 마일 넓이의 넘실거리는 홍해를 건너서 애굽을 나올 능력이 없습니다.
모세는 애굽 군사를 때려죽이고 이미 애굽에서 광야로 나왔다가 다시 들어간 사람입니다.
(이것은 상징이다)그러므로 애굽에서 나올 수 있는 실력이 있는 자는 모세 한 사람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모세가 그들을 자기 품에 안고 애굽을 탈출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모세를 앞 세워 이스라엘을 건져 내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스라엘이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받을 구원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저주로부터 살아날 수 있는 사람은 예수님 한 분뿐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만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율법을 모두 지키실 수 있는 분이고 하나님이 그토록 미워하시는 죄와 아무 상관이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로 인해 다 죽어야 할 이 저주의 바다 같은 세상에서 방주인 예수님 한 분을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이 내리시는 그 무시무시한 저주의 물위로 둥둥 뜨는 배가 있으니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인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예수 안에 들어가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부르신 교회를 모두 예수님 안에 넣으셔서 구원을 하십니다.
그러면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불은 저주받아 죽어야 할 부분들을 모두 태우는 것입니다.
(고전3:10-15)
10 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혜를 따라, 지혜로운 건축가와 같이 터를 닦아 놓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이가 그 위에다가 집을 짓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집을 지을지 각각 신중히 생각해야 합니다.
11 아무도 이미 닦아 놓은 터 곧 예수 그리스도 밖에 또 다른 터를 놓을 수 없습니다.
12 누가 이 터 위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집을 지으면,
13 각 사람의 업적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 날이 그것을 밝히 보여 줄 것입니다. 그 날은 불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불이 각 사람의 업적이 어떤 것인가를 검증하여 줄 것입니다.
14 어떤 사람이 지은 작품이(또는 '세워 놓은 일')그대로 남으면, 그는 삯을 받을 것이요,
15 어떤 사람의 작품이 타 버리면, 그는 손해를 볼 것입니다. 그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지만, 마치 불 속을 거쳐서 살아나오듯 할 것입니다.
불은 이렇게 태워버리는 것, 심판을 상징합니다. 생명이 아닌 것을 심판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모든 탈것들 속에서 건져내어짐을 받는 것이 바로 성령에 속한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물이 쏟아지면 물속에 빠져 죽는, 저주받아 죽는 것들이 불로 타죽게 되는 것들이고 방주로 말미암아 물위에 뜨는 부분이 바로 성령에 속한 것들인 것입니다. 방주로 말미암아 죽어야 할 것이 죽지 않고 뜨는 것처럼 성령 때문에 불에 타야 할 것들이 건져내어짐을 받는 것입니다. 그게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어구가 담고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 얻은 성도들은 모두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자들입니다.
불로 인해 죽어야 할 세상과 함께 죄와 어두움이 모두 죽고 성령에 의해 새롭게 태어난 자들을 우리는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성령이 오십니다. 성령이 그 속에 안 계시면 절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인정할 수 없다고 바울 사도가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나중에 공부하겠지만 옛 언약과 새 언약에 보면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새 영을 부어 너희 마음을 새롭게 창조하여 너희를 구원해 내시겠다고 하시는 구절이 나옵니다. 바로 그 영이 성령이신 것입니다. 우리 죄인들을 새롭게 창조하시기 위해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분, 그 분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고전12:3)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알려드립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예수는 저주를 받아라" 하고 말할 수 없고, 또 성령으로 감동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 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이미 예수를 주라 고백하는 여러분의 안에는 성령이 와 계십니다.
그 성령이 어떤 역할을 한다고 했지요? 우리를 저주의 물위로 뜨게 하시는 역할을 하신다고 했잖아요. 로마서로 가보지요.
(롬8:9-11)
9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여러분은 육신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10 또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여러분의 몸은 죄 때문에 죽은 것이지만, 영은 의 때문에 생명을 얻습니다.
11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고 계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신 자기의 영으로 여러분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
우리 육신이 아무리 이렇게 불가능해 보이고 추악해 보여도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는 한 우리는 절대 저주 아래 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은 예수께서 영광스러운 하늘 보좌로 복귀하셨듯이 반드시 하늘 보좌로 올라가실 분이십니다. 그 분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따라서 당연히 우리도 함께 올라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게 성령을 받은 자들의 고귀한 신분이며 변할 수 없는 운명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그 구원의 보증으로, 내가 반드시 너희들을 내 백성으로 만들어 너희를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인도하고야 말 것이라는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 주신 것입니다.
(고후5:5) 이런 일을 우리에게 마련해 주시고, 그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지요? 성경은 왜 우리가 성령세례를 받아야 하는지를 반복해서 설명해 주십니다.
(롬8:1-2)
1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2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여러분 각자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하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죄와 사망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신다고요? 성령 하나님이, 우리가 뭐가 잘나서가 아니라,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성령이 와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죄와 사망에서 풀려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저주의 물과 심판의 불에 성령은 탈 수 없고 빠지실 수 없는 분이기에 우리는 그 성령 때문에 안전하게 물 위로 뜨게 되는 것이고 불 가운데서 건짐을 받아 해방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성령께서 오순절 날 오시는 것입니다.
오순절이 무엇입니까?
유대인의 절기 중에 중요한 삼대 절기가 뭐라 했지요? 아빕월 14일인 유월절, 그리고 그로부터 50일 째인 오순절, 그리고 초막절(장막절, 수장절)입니다. 유월절은 우리가 아는바 대로 참 제물이신 유월절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된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유월절 다음날부터 무교절이고 유월절 후 안식일 바로 다음날이 첫 이삭 드리는 날입니다.
그날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첫 이삭 드리는 날로부터 50일 째 되는 날이 바로 오순절인데 오순절은 칠칠절이라고도 합니다. 칠 곱하기 칠은 사십구에서 나온 말입니다.
안식일은 7일째입니다. 안식일이 뭐라 했나요?
천지창조는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며 하나님의 그 창조에 우리가 보탤 것은 하나도 없을 만큼 완벽한 창조였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고, 그 천지창조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뿐인 우리 죄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빛을 비춰주시고 질서를 잡아 재창조를 하시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소망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시간을 쓰겠다는 거룩한 고백으로 함께 하는 날이 안식일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그 일을 완벽하게 이루시기 위해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대하며 소망하는 날인 것입니다. 죄에서의 온전한 해방을 기다리는 날이란 말입니다. 그 칠일이 일곱 번 지난 49일후 50일째를 오순절이라 하는데 그것은 레위기의 이스라엘의 율법에 나오는 희년의 개념을 알면 더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한 번 더 복습합니다.
희년이라는 것은 7년마다 오는 안식년이 일곱 번째 오는 50년째를 희년이라 하지요?
그 때 이스라엘은 모든 노예들과 빚진 자들을 자유롭게 놓아주어야 하는 그런 해입니다.
(레25:8-10)
8 안식년을 일곱 번 세어라. 칠 년이 일곱 번이면,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나, 사십구 년이 끝난다.
9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희는 뿔나팔을 크게 불어라. 나팔을 불어, 너희가 사는 온 땅에 울려 퍼지게 하여라.
10 너희는 오십 년이 시작되는 이 해를 거룩한 해로 정하고, 전국의 모든 거민에게 자유를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가 희년으로 누릴 해이다. 이 해는 너희가 유산, 곧 분배받은 땅으로 돌아가는 해이며, 저마다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해이다.
자 이제 머릿속으로 지금까지 설명해 드린 것들을 죽 연결해 보세요. 왜 오순절 날 성령이 오셨는지 아시겠지요?
죄의 종 되었던 자들에게 자유를 선물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이제 완성이 되어서 그 자유가 적용이 되어질 창세전에 이름이 불린 하나님의 교회에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그 교회는 예수님의 사역으로 인해 완성되었고 “너희들은 자유다”라는 의미에서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오순절이 오늘도 계속 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도대체 성경을 어떻게 읽고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뭔가 부족해서 또 다시 서야 한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의 사역이 완성이 안 되었다는 말인가요? 왜 성령 세례를 또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까? 또 다른 오순절이라니요. 그게 무슨 망발입니까?
성령은 이미 그리스도인들 속에 와 계십니다. 성령이 아니 계시고는 우리가 예수님을 주라 시인할 수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두 번째 받아야 할 성령은 도대체 뭡니까?
처음 와 계신 성령보다 더 능력 있는 성령이 또 계시다는 말인가요?
어느 날 우리의 삶에 성령이 오셔서 우리의 눈을 뜨게 해 주시고 죄를 알게 해주시고 우리에게 주어진 의가 무엇인지 알게 해주시며 영원한 하나님의 저주의 심판이 바로 우리의 것이었다는 것도 알게 해주신 그날 여러분은 성령세례를 받은 날인 것입니다.
또 다른 성령 세례는 없습니다. 이제 한 번에 우리에게 선물해주신 그 하나님의 구원, 믿음, 아들의 신분을 하나하나 말씀 안에서 깨달아져 가면서 우리는 우리의 버려야 할 부분들을 불로, 물로 태워버리고 익사시켜 버림으로 우리 안의 그 거룩한 모습만을 찾아가는 것이 바로 신자의 삶인 것입니다.
엉뚱한 성령세례 찾아다니지 마세요. 제발 공부 좀 하세요. 성경을 한 번 만이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을 해 보세요. 어디 그런 엉터리 같은 인간들의 허튼 소리가 발을 디밀게 합니까? 다음 주에는 계속해서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이 땅에서 하시는 일이 뭔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11장 성령 (2) 성령세례
(요16:7-11)
7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당신의 빚은 얼마요?' 하고 물었다. 그 사람이 '밀 백 섬이오' 하고 대답하니, 청지기가 그에게 '자, 이것이 당신의 빚문서요. 받아서, 여든 섬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8 주인은 그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하였다. 그것은 그가 슬기롭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아들들이 자기네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아들보다 더 슬기롭다.
9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한 재물로(그, '맘몬' ) 친구를 사귀어라. 그래서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처소로(그, '장막' ) 맞아들이게 하여라.
10 가장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충실하고, 가장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
11 너희가 불의한 재물에 충실하지 못하다면, 누가 참된 것을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우리가 오해하는 것 중에 마귀는 항상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공격하여 그들을 괴롭힐 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귀는 천사 중에서도 아름답다고 묘사가 될 만큼 커다란 능력을 가진 자입니다. 오죽하면 그가 하나님하고 대결을 해 보겠다고 반란을 다 일으켰겠습니까? 앗수르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단 칼에 전멸시킨 것이 천사 하나였습니다. 그러한 천사들의 장(長)이 마귀입니다. 그 마귀가 수천 년 동안 고민하고 있는 게 바로 어떻게 하면 인간들을 미혹하여 지옥으로 끌고 갈 것인 가입니다. 그런데 마귀가 그렇게 어리석은 방법으로 그리스도인들을 공격할까요?
일본에서처럼 예수님의 사진을 밟게 하는 ‘후미에’를 시켜 말을 듣지 않으면 감옥에 쳐 넣어 버린다든지, 북한에서처럼 예수를 믿는 자들을 수용소에 격리 감금한다든지, 로마에서처럼 사자 밥으로 던져 버린다든지 하는 그런 방법은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더욱 굳게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마귀는 어떤 전략과 전술로 그리스도인들을 공격하겠습니까?
너무 쉽지요. 그냥 예수를 믿게 놔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예배당에 나가서 거짓 예수와 거짓 복음에 광분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열심을 부리게 놔둡니다. 헌금도 하게 하지요. 그러나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 나라의 백성 됨이나 하나님을 향한 순종의 도, 하늘나라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도 같은 것들은 무시하게 하고 그저 자신의 욕심을 채워주는 그런 하나님을 만들어 열심히 믿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엉터리 기독교를 좇아 평생 열심을 낸 사람들은 자기가 예수를 믿는 줄 착각하면서 지옥으로 가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경고를 하신 것입니다.
(마7:21-23)
21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도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였는데 하나님이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고 하십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 지경이 되면 어떡하시겠습니까?
정말 여러분은 제대로 잘 믿고 있다고 확신하십니까?
우리는 얼마든지 열심으로 위장된 신앙생활이 아닌 종교 행위에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각종 이단들이나 이교에서도 그런 열심은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열심히 여러분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이 그러한 마귀의 소행으로 우상을 섬기는 자들이 행하던 것들이 버젓이 교회에 들어와서 섞여 버렸습니다.
이제 기독교는 어떤 신학자가 말한 것처럼 비빔밥이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이 맛도 아니고 저 맛도 아니고 도대체가 미뢰(味蕾)를 혼란시키는 그런 잡교가 된 것 같아요.
엘리야와 겨루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그들의 소원을 바알에게 빌면서 어떤 행위를 했는가 보면 오늘날 교회에 얼마나 많은 이교적인 것이 들어와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왕상18:25~30)
26 그들은 가져 온 소 한 마리를 골라서 준비하여 놓은 뒤에, 아침부터 한낮이 될 때까지 "바알은 응답해 주십시오" 하면서 부르짖었다. 그러나 응답은 커녕,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바알의 예언자들은 제단 주위를 돌면서, 춤을 추었다.
그들은 바알을 경배하며 춤을 춥니다. 신나는 분위기를 만들어 흥을 돋우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어디서 많이 볼 수 있지요? 여러분, 한 때 한국 교회를 강타했던 열린 예배라는 것을 아십니까? 아니 지금도 한국교회를 비롯해서 전 세계 교회의 예배가 어느 쪽으로 흘러가고 있습니까? 열린 예배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문턱을 낮추어 믿지 않는 자들을 예배당으로 모으자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러한 예배에는 드라마와 댄스, 간증, 연주 등이 가미가 됩니다.
사람들이 흥겨워하고 재미있어하고 즐거워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극장이나 나이트클럽에 가서 느낄 수 있는 재미를 예배당에서도 연출을 해 주어 그들을 예배당으로 불러 모으자는 것이지요. 여러분, 그렇게 사람을 모아서 복음을 설명하면 정말 창세전에 택함을 받지 못한 자들도 구원의 문으로 들어 올 수 있습니까?
재미있는 드라마와 함께 예배를 드리면 정말 하나님께서도 놀랄 만큼 전도에 효과가 있을까요?
예배가 뭡니까? 사람을 즐겁게 해 주는 것이 예배입니까?
예배는 구원 얻은 성도들이 모여 하나님을 자랑하고, 찬양하며 그 분께 받은 선물이 너무 감사해서 그 분 앞에 엎드려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천국잔치가 예배입니다. 예배의 주인은 하나님이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열린 예배가 도대체 뭡니까? 그런 것은 다 이교에서 슬며시 들어온 것들입니다.
계속해서 27절을 보세요.
27 한낮이 되니,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면서 말하였다. "더 큰소리로 불러라. 바알은 신이니까, 다른 볼일을 보고 있을지, 아니면 용변을 보고 있을지, 아니면 멀리 여행을 떠났을지, 그것도 아니면 자고 있으므로 깨워야 할지, 모르지 않느냐!"
28 그들은 더 큰소리로 부르짖으면서, 그들의 예배 관습에 따라, 칼과 창으로 피가 흐르도록 자기 몸을 찔렀다.
또 그들은 소리쳐 신을 부른다고 합니다. 주여 삼창이나 통성기도가 생각나지요? 하나님이 귀가 막히셨습니까? 왜들 그렇게 소리를 질러요? 물론 너무나 간절히 하나님을 찾을 때 소리가 크게 나올 수 있습니다. 우리도 너무 기쁘거나 너무 애절한 간구가 있을 때 소리를 지를 때가 있으니까요.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소리를 질러 ‘주여‘를 외치거나 목이 쉬도록 소리쳐 기도를 하는 것은 대체로 두 가지 연유에 기인한 것입니다. 그 한 가지가 여러 사람이 모여 있는 곳에서는 목소리가 커야 거룩한 신앙인처럼 보여 지기 때문입니다. 목소리를 작게 해서 기도를 하면 왠지 정성이 부족해서 그런 것처럼 보여 지는 것이 사실이지요. 또 한 가지는 내가 이렇게 다른 사람과는 비교도 안 되게 목이 터져라 외치는 데도 하나님이 외면하실 수 있겠는가? 하는 이기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목소리가 큰 것을 참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더 큰 복을 받아야 하는데 다른 이가 나보다 더 간절해 보이면 안 되니까요. 아닙니까?
그리고 이교도들의 특징이 자신의 몸을 자해한다는 것입니다.
28절에 보시면 피가 흐를 때가지 창과 칼로 자기 몸을 상하게 하더라는 구절이 있지요? 불교인들이나 힌두교인 들이 구도의 방법으로 가장 흔하게 쓰는 것이 뭡니까? 고행입니다. 자기 몸을 자해하는 것입니다. 소지공양이나 소신공양 같은 것을 보세요. 오체투지는 어떻습니까? 자해를 해서라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겠다는 신념이 그러한 것을 배태한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에 그런 것들이 들어 왔습니다.
금식기도 같은 것을 보세요. 금식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이 이 세상에서 에너지원으로 삼아, 다른 말로 힘을 삼아 사는 곡기(穀氣)를 끊고 ‘하나님 저는 이 땅의 것이 아닌 오직 하나님만을 저의 힘으로 삼아 이 세상을 살겠습니다.‘라는 신앙고백입니다.
금식은 ’내가 이렇게 굶어가면서까지 기도를 하는데 안 들어 줄 거야?‘라는 공갈협박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금식이 어떻게 쓰여 지고 있습니까? 새벽기도나 천일기도, 철야기도 다 좋습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새벽기도나 천일기도, 철야기도를 그렇게 자신을 자해하여 하나님께 무언가를 얻어내려는 공갈협박으로 쓰고 계시다면 여러분은 지금 마귀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29절로 갑니다.
29 한낮이 지나서 저녁 제사를 드릴 시간이 될 때까지, 그들은 (바알 예언자들)미친 듯이 날뛰었다. 그러나 아무런 소리도 없고, 아무런 대답도 없고,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그들이 무얼 합니까?
미친 듯한 예언을 합니다. 여러분, 예언 좋아하시지요?
이게 다 뭡니까? 우리가 예배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잖아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사람들이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다가 참수되어 죽은 자들과 똑같은 짓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것이 좋은 신앙의 표본이라고 알고 있지 않았습니까?
속지 마세요.
우리는 우리의 열심을 가지고 우리의 구원을 이룰 수 있는 것 아니고 지성이면 감천으로 필요한 것 얻어낼 수 있는 자들 아닙니다.
(계13:1-18)
1 나는 바다에서 짐승 하나가 올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짐승은 뿔 열과 머리 일곱을 가졌는데, 그 뿔 하나하나에 왕관을 쓰고 있고, 그 머리 하나하나에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이 붙어 있었습니다.
2 내가 본 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한데, 그 발은 곰의 발과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과 같았습니다. 그 용이 자기 힘과 왕위와 큰 권세를 이 짐승에게 주었습니다.
3 그 머리 가운데서 하나는 치명상을 입은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치명적인 상처가(그, '죽음의 재앙이') 나으니, 온 세상은 놀라서 그 짐승을 따라갔습니다.
4 용이 그 짐승에게 권세를 주니, 사람들은 그 용에게 경배하였습니다. 또 그들은 "누가 이 짐승과 같으랴? 누가 이 짐승과 맞서서 싸울 수 있으랴?" 하고 말하면서, 그 짐승에게 경배하였습니다.
5 그 짐승은, 큰소리를 치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입을 받고, 마흔두 달 동안 활동할 권세를 받았습니다.
6 그 짐승은 입을 열어서 하나님을 모독하였으니, 하나님의 이름과 거처와 하늘에 사는 이들을 모독하였습니다.
7 그 짐승은 성도들과 싸워서 이길 것을 허락받고, 또 모든 종족과 백성과 언어와 민족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았습니다.(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7절 상반절이 없음.)
8 그러므로 땅 위에 사는 사람 가운데서,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때부터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또는 '창세 때부터 죽임을 당한 그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모두 그에게 경배할 것입니다.
9 귀가 있는 사람은 들으십시오.
10 "사로잡혀 가기로 되어 있는 사람이면,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맞아서 죽임을 당하기로 되어 있는 사람이면, 칼에 맞아서 죽임을 당할 것이다." 여기에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필요합니다.
11 나는 또 땅에서 다른 짐승 하나가 올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어린 양처럼 뿔이 둘 있고, 용처럼 말을 하였습니다.
12 이 짐승은 첫째 짐승이 가진 모든 권세를 그 첫째 짐승을 대신하여 행사하였습니다. 이 짐승은, 땅과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치명상에서(그, '죽음의 재앙이') 나음을 받은 그 첫째 짐승에게 절하게 하였습니다.
13 또 그 짐승은 큰 기적들을 행하였는데,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도 하였습니다.
14 그리고 그 첫째 짐승을 대신해서 행하도록 허락받은 그 기적들을 미끼로 해서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을 미혹하였습니다. 땅 위에 사는 사람들에게 칼에 맞아서 상처를 입고서도(또는 '칼의 재앙을 받았다가도') 살아난 그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고 말하였습니다.
15 그리고 둘째 짐승이 능력을 받아서 첫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또는 '영')넣어 주고, 그 짐승의 우상으로 하여금 말을 하게도 하고, 또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죽임을 당하게도 하였습니다.
16 또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이나 할 것 없이, 다 그들의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였습니다.
17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사람, 곧 그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을 나타내는 숫자로 표가 찍힌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팔거나 사거나 할 수 없게 하였습니다.
18 여기에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각이 있는 사람은 그 짐승을 상징하는 숫자를 세어 보십시오. 그 수는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데, 그 수는 육백육십육(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육백십육')입니다.
잘 보세요.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그 짐승이 용에게 권세를 받습니다. 그런데 그 바다짐승이 죽은 것 같았다가 살아납니다. 누구의 흉내를 내고 있습니까?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흉내를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땅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그 땅에서 나온 짐승이 바다에서 나온 짐승을 경배하게 합니다. 그런데 그 땅에서 나온 짐승은 큰 이적을 행한다고 합니다. 심지어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하는 이적들을 행하면서 바다짐승을 경배하게 합니다. 이건 또 누구의 흉내를 내는 것입니까? 성령 하나님을 흉내 내고 있지요? 그런데 성령 하나님을 정확하게 흉내를 내지 못하니까 고작 기적을 동원해서 성령하나님을 흉내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짐승의 표를 받게 하는데 그 수가 666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탄과 그 세력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흉내를 그대로 내고 있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흉내를 그대로 내서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믿는 것이 그렇게 복이나 받고, 신비적인 체험이나 하고, 부자 되고, 잘 먹고 잘 살다가 가는 것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오해하게 만들어서 지옥으로 끌고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탄과 그 무리들을, 믿지 않는 자들을 포함한 그 전체 마귀의 세력들을 우리는 666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건 무슨 통합 ID카드도 아니고 바코드도 아니고, 베리칩도 아니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어두운 세력을 총칭하는 말입니다.
보세요. 우리가 이 성령의 사역에 관해서 잘 못 이해하고 있는 것들이 바로 사탄의 계략이라는 것을 이제 아시겠어요? 성령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기적이나 체험하게 해 주시고 하늘에서 불이나 내리는 그런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건 마귀가 하는 일이라니까요?
왜 여러분에게 기적이 또 필요합니까? 죄와 허물로 죽었던 시체가 살아나서 하나님과 하나님나라를 감지하게 되었는데 그 큰 기적을 체험한 이들이 병이나 고치고 은 이가 금 이로 변하는 그런 유치한 장난 앞에서 합장을 하실 수 있겠냐 말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산다는 것을 우리는 알지 않습니까? 믿음이 뭡니까? 보이지 않는 것을 실체로 받아들이게 된 자들을 믿음이 있는 자, 믿음으로 사는 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는 물질과 공간 속에서 감지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이라는 것을 주셔서 보지 않고도 알 수 있는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기적이나 신비스러운 현상들을 자꾸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뭡니까?
‘난 믿음이 없으니 뭘 좀 보여 주세요’라고 자신의 믿음 없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믿음이 없는 자, 불신자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무슨 기적들을 그렇게 바라세요.
그럼 이제부터 성경이 말씀하는 성령의 사역을 하나하나 짚어드리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로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일은 예수님이 오셔서 완성하시고 가신 창세전에 작정하시고 예정하신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해시키고 깨닫게 해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빛이 세상에 오셨으나 세상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빛을 증거 하기 위해 광야에서 그토록 애절하게 외친 것입니다. 여러분, 빛은 증거하고 설명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보면 됩니다. ‘아 저게 빛이구나.’ 이렇게 우리는 빛을 보기만 하면 그게 빛인 줄 압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빛을 증거 하도록 누군가를 보내셨다는 것은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소경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백성까지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요1:6-11)
6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다. 그 이름은 요한이었다.
7 그 사람은 빛을 증언하러 왔다. 그 증언으로 모든 사람을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8 그 사람 자신은 빛이 아니었다. 그는 그 빛을 증언하러 온 것뿐이다.
9 그 빛이 세상에 오셨으니,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시다.
10 그는 세상에 계셨다.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다.
11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이렇게 모든 인간들이 그 빛이신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몰랐기 때문에 성령께서 오셔서 그 빛이 누구이시며 왜 이 땅에 오셨는지 그리고 그 분이 오신 결과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잘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요14:26) 그러나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고,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
(요15: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내려는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오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 영이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요16:13)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듣는 것만 일러주실 것이요,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정확하지요? 이렇게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하신 일은 예수님이 누구시며 그 분께서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밝히 이해시키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의 죄가 얼마나 엄청난 것이고 우리에게 주어진 의가 어떤 것이며 우리가 받았어야 할 심판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를 우리에게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요16:7-11)
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보혜사('변호해 주시는 분' 또는 '도와주시는 분')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면,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
8 그가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꾸짖어 바로잡아 주실 것이다.
9 나를 믿지 않는 것이 바로 죄라는 것을 말씀해 주실 것이며,
10 내가 아버지께로 돌아가므로 너희가 나를 더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임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11 세상 통치자가 심판을 받았기 때문에 심판 받을 자가 누구인지를 말씀해 주실 것이다.뿐만 아니라 여기를 보시면 성령이 우리에게 오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늘로 완전히 복귀하셨다는 증거이기도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완전한 영광의 복귀를 하셨다는 것은 그 분께서 이 땅에 내려 오셔서 하실 임무를 완전하게 수행해 내시고 올라가셨다는 말이지요? 그 구속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이해가 가게 해주시는 분으로 성령이 오시는 것입니다.
8절에 보면 성령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세상이란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세상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그는 두 가지 의미로 이 세상이란 단어를 씁니다. 한 가지는 예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켜 세상이라고 했고 다른 한 가지는 원래 그 세상 속에 속해 있었으나 그 세상에서 건져내어져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들을 가리켜 세상이라 칭했습니다. 여기서는 후자의 경우입니다. 세상에 속해 있었으나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시지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을 책망하러 오신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절대 성령을 인식하지 못 하니까요.
(요14:17)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므로, 그분을 맞아들일 수가 없다. 그러나 너희는 그분을 안다. 그것은 그분이 너희와 함께 계시고 또 너희 안에(또는 '가운데') 계시기 때문이다.
그렇죠? 그리고 여기서 “책망 하다”(8절)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엘렝코”는 ‘꾸짖다’는 의미와 함께 “깨닫게 하다”의 의미가 있는 단어입니다. 여기서는 ‘깨닫게 하다‘라는 의미가 더 적합한 번역입니다. 그러니까 성령께서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뚫고 들어오셔서 죄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죄로 말미암아 우리는 어떤 지경으로 가야했는지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에게 의를 선물하셔서 우리를 의롭게 만드셨는지 그리고 세상 권세 잡은 자, 사탄과 그 무리는 이미 심판을 받았고 우리도 원래 그 심판의 대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행2:33)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를 높이 올려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히시고, 약속하신 성령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성령을, 여러분이 지금 보고 듣고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 부어 주셨습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심판해서 그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고 죽여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천지 만물의 주관자이신 하님께서 그 예수를 살려내셨고 그 분을 오른 손으로 높이셨습니다. 그 말은 세상의 심판은 오판이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죄 없는 예수님을 잡아 엉뚱하게 심판하여 잡아 죽인 세상은 이제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신 하나님께 어떻게 되겠습니까? 죽었다고 복창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함께 돌을 들어 예수를 찍었던 우리는 왜 건짐을 받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이 은혜입니다.
이렇게 세상은 이미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 종말은 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심판받은 세상에 자꾸 성을 쌓으려고 하면 어떡합니까?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언제 이 땅이 끝이 나며 심판이 일어나며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겁니까?” 예수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셨나요? 말세의 징조로 “처처에 기근이 일어나고 재난이 일어나고 홍수가 일어나며 지진이 일어나며 나라와 나라가 싸우며 민족과 민족이 싸우리라” 그것이 말입니다. 기근, 지진, 전쟁, 홍수는 언제나 있어왔습니다. 그러한 일들은 조선시대 고려시대 삼국시대 고조선 시대에도 있었던 일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말세의 진의가 뭡니까?
“이 땅은 곧 끝나버릴, 재 하나도 남김없이 불 타버릴 그런 곳이다. 그러니 너희는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라.”그게 바로 말세를 사는 자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요 세상을 사는 자세여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나고 기근이 일고 지진이 일어날 때 나의 말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 땅은 이미 심판을 받았고 모두 불타버릴 곳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사는 집에 매일 세 번씩 지진이 일어나고, 풀과 나무가 심기만 하면 말라죽고 이상하게 그 집에만 들어가면 싸움이 일어나고 하면 그 집에서 얼마나 오래 사시겠습니까?
당장 집 팔고 다른 곳으로 이사 갈 것 아닙니까? 하나님은 지구를 그렇게 흔들고 계신 것입니다. ‘나의 백성들아 너희는 저 하늘로 완전히 이사 가게 될 자들이다. 여기에 정주지 말아라.’ 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오셔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즉 구원과 은혜에 대하여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성령이 오셔서 하신 일은 교회를 세우신 일이었습니다.
사도행전2장의 그 유명한 마가의 다락방 사건에서 120명의 제자들이 불의 혀 같은 성령을 받고 방언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적어도 열다섯 개 각기 다른 나라에서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이 각기 자기의 난 곳 언어로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히브리어는 많이 잊었지만 오랜 포로 기간을 거쳐 헬라어와 아람어를 모두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뭔가를 전달하고 싶으셨다면 당연히 제자들의 입에서 헬라어나 아람어로 말이 나오게 하셨겠지요? 그랬으면 거기 있던 사람들이 모두 이해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그들이 태어난 나라의 언어로 그 말이 들리게 하셨을까요?
이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 사건은 창세기의 바벨탑 사건을 회복하시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교만해지고 패역해져서 하나님과 같이 되어보겠다고 바벨탑을 쌓을 때 하나님께서 그 인간들을 저주하셔서 그들의 언어를 갈갈이 찢으셨습니다. 언어가 갈렸다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의 표시입니다. 그런데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성령이 임하신 것은 예수님의 사역이 완성되었다는 증거라 했지요? 그 사역의 완성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탄생하게 된 것이고요. 그 교회는 하나님의 저주가 풀린, 다시 하나가 된 한 무리의 백성이라는 의미로 그들이 각기 난 곳 언어로 들으면서 언어가 소통이 된 것입니다. 이제 언어가 하나가 되어 다 통하더라는 것이지요.
고린도 전서에서도 그 이야기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전12:12-26)
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합니다.
13 우리는 유대 사람이든지, 그리스 사람이든지, 종이든지, 자유인이든지,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서 한 몸이 되었고, 또 모두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14 몸은 한 지체가 아니라, 여러 지체로 되어 있습니다.
15 발이 말하기를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속한 것이 아니다" 한다고 해서 발이 몸에 속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16 또 귀가 말하기를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속한 것이 아니다" 한다고 해서 귀가 몸에 속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17 온몸이 다 눈이라면, 어떻게 듣겠습니까? 또 온몸이 다 귀라면, 냄새는 어떻게 맡겠습니까?
18 그런데 실은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우리 몸에다가 각각 다른 여러 지체를 두셨습니다.
19 전체가 한 지체로 되어 있다고 하면, 몸은 어디에 있습니까?
20 그런데 실은 지체는 여럿이지만, 몸은 하나입니다.
21 그러므로 눈이 손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게 쓸 데가 없다" 할 수가 없고, 머리가 발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게 쓸 데가 없다" 할 수가 없습니다.
22 그뿐만 아니라, 사람이 몸 가운데서 더 약하다고 여기는 지체가 오히려 더 요긴합니다.
23 그리고 몸 가운데서 덜 귀하다고 생각하는 지체들을 더욱 귀한 것으로 입히고, 볼품 없는 지체들을 더욱더 아름답게 꾸며 줍니다.
24 그러나 아름다운 지체들에게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몸을 골고루 짜 맞추셔서 부족한 지체에게 더 큰 존귀함을 주셨습니다.
25 그래서 몸에 분열이 생기지 않게 하시고, 지체들이 서로 같이 걱정하게 하셨습니다.
26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가 같이 고통을 당합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이렇게 성령이 임하시면 교회가 하나가 되고 그들은 서로를 위로하며 걱정하며 사랑하며 때로는 옳지 못한 행실을 사랑으로 꾸짖으며 한 몸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시자 그 곳에 있는 교회들이 각기 다른 나라에서
왔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다 그들의 기도를 이해한 것입니다. 교회는 이제 하나님의 저주에서 풀려난 ‘하나’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교회 안에서 굶는 사람이 있으면 안 됩니다. 교회 안에서 학비가 없어서 학교를 못 다니는 불쌍한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팔이 부러지면 잘라버리지 않고 잘 싸매서 목에다 걸 듯이 우리는 서로를 의지하고 도우며 사랑하며 살아가야 할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성령은 어떤 단순한 능력이 아니라 인격을 가지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 어느 한 분이라도 우리의 구원의 사역에서 빠지면 우리의 구원은 이루어질 수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을 홀대하지 마세요. 아무렇게 나 그 이름을 부르지 마세요. 성령 하나님께 오라 가라 명령하지 마세요. 그건 성령 하나님의 이름을 만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알라딘의 요술램프의 지니처럼 아무 때나 램프를 문지르면 나와서 나의 필요를 채우고, 나에게 깜짝 쇼를 보여주고 돌아가는 그런 저급한 요술쟁이가 아닌 것입니다. 잘 아셨지요?
그럼 다음 주에는 ‘성령 충만’에 대해 함께 공부해 보겠습니다. 성경은 무엇을‘성령 충만’이라 하는가에 대해 자세하게 공부하지요.
얼굴 빨개져 가지고 몸을 벌벌 떨면서 입에 거품 무는 것을 ‘성령 충만’이라 하나요?
확률 50퍼센트도 안 되는 어줍지 않은 예언이나 하는 것을 ‘성령 충만’이라 합니까?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을 ‘성령 충만’이라 합니까?
아니면 방언하는 것을 '성령 충만‘이라 하나요?
다음 시간에 성경만 가지고 밝혀 드리겠습니다.
제12장 성령 (3) 성령충만
(엡5:15-27)
15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조심하여, 지혜롭지 못한 사람처럼 하지 말고, 지혜로운 사람처럼 하십시오.
16 세월을 아끼십시오. 때가 악합니다.
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으십시오.
18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는 방탕이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19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여러분의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찬송하십시오.
20 모든 일에, 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21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십시오.
22 아내이신 여러분, 주님께 순종하는 것같이,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23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심과 같이, 남편은 아내의 머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몸인 교회의 구주이십니다.
24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같이, 아내들도 모든 일에서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25 남편이신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교회를 위하여 자기를 내주신 것같이,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26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교회를 물로 씻고,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여서, 거룩하게 하시려는 것이며,
27 티나, 주름이나, 또 그와 같은 것들이 없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교회를 자기 앞에 내세우시려는 것이며, 교회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까지 성령 세례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그리고 성령의 사역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성령세례란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부르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그 구원 사역이 완성됨으로 성령을 보내셔서 그들의 눈을 뜨게 하시는 것을 성령 세례라 하며 그 눈을 뜬 자들에게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예수에 대하여 구원과 은혜에 대하여 알게 하시는 것이 바로 성령의 사역임을 성경에서 찾아보았습니다.
따라서 성령세례라는 것은 우리가 요구한다고 해서 주어지는 능동적인 것이 아니라 다분히 수동적이며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시중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성령세례를 사모하며 기도한다고 해서 성령이 오시는 것도 아니고 구원받은 자들이 성령세례를 받아야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면서 그 성령 세례를 사모하면 성령이 임하신다는 말도 어처구니없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성령세례를 받으라.”는 요구나 명령이 한군데도 없는 것입니다. 성령세례를 받아야 비로소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말은 성경에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성령 세례를 받은 것이니까요.
(고전12:13) 우리는 유대 사람이든지, 그리스 사람이든지, 종이든지, 자유인이든지,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서 한 몸이 되었고, 또 모두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세례를 받아‘는 헬라어 ’밥티조‘’세례를 받다‘라는 단어의 과거시제입니다. 헬라어의 과거 시제는 한순간에 일어나고 그친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세례는 과거에 우리가 거듭 날 때에 한번 받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후에 성령이 나갔다 들어왔다 하는 것 아니라 계속해서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신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 세례는 하나님의 주권으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단번에 주어지는 선물인 것입니다.
성령은 그렇게 하여 우리를 예수그리스도라는 머리에 몸으로 붙여버리는 구원을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엡4:1-6)
1 그러므로 주님의 일로 갇힌 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불러 주셨으니, 그 불러 주신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2 언제나 겸손함과 온유함을 지니십시오.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면서, 오래 참으십시오.
3 여러분은, 성령이 여러분을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주신 것을, 힘써 지키십시오.
4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한 희망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과 같이,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
5 주님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6 하나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유의(또는 '천지 만물') 아버지이시며,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하여 일하시고, 만유 안에 계십니다.
이렇게 세례는 단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 순간 우리와 예수님을 연합시키시는 성령세례, 그것 한 가지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현재시제입니다. 헬라어의 현재시제는 현재 진행의 뜻이 있다고 했습니다. 반복적이고 계속적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성령 충만은 계속해서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받고 또 받고, 받고 또 받는 것이 ‘성령 충만’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세례는 positional한 것이며 ‘성령 충만’은 experiential, 경험적인 것입니다. 성령 세례를 경험적인 것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성령이 오셔서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는 것, 우리가 의인이 되었다는 것은 경험적인 것이 아니라 사실적인 것입니다. 어느 날 보니까 나의 신분이 그렇게 바뀌어 있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은 계속해서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경험하고 체험해 나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 성경이 말하는 성령 충만은 무엇인가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에서 성령 충만을 받은 사람들이 무엇을 했으며 어떤 경험을 했는지를 살펴보면 성령 충만이 무엇인지 금방 알게 될 것입니다. 몇 군데만 살펴보지요.
(행4:8~12)
8 그 때에 베드로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그들에게 말하였다. "백성의 지도자들과 장로 여러분,
9 우리가 오늘 신문을 받는 것이,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과, 또 그가 누구의 힘으로 낫게 되었느냐 하는 문제 때문이라면,
10 여러분 모두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사람이 성한 몸으로 여러분 앞에 서게 된 것은,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하나님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서 된 것입니다.
11 이 예수는 '너희, 집 짓는 사람들에게는 버림받은 돌이지만,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 입니다.
12 예수 밖에는, 다른 어떤 이에게서도 구원은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을 이름은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들 가운데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는 달리 없습니다."
베드로가 성령 충만해서 무엇을 합니까? 구원에 대해 설명하고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전합니다.
사도행전의 다른 곳으로 가보지요.
(행4: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역시 이곳에서도 성령 충만한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행6:3~4)
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4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일곱 집사들의 자격 조건이 ‘성령 충만‘입니다.
(행7:54~56)
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보았고 그것을 증거 하였습니다.
(행9:17~18)
17 그래서 아나니아가 떠나서, 그 집에 들어가, 사울에게 손을 얹고 "사울 형제, 형제가 오는 도중에 형제에게 나타나신 주 예수께서 나를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형제가 시력을 회복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고 말하니,
18 곧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가고, 그는 시력을 회복하였다. 그리고 그는 일어나서 세례를 받고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세례를 받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행13:8~11)
8 그런데 이름을 엘루마라고 번역해서 부르기도 하는 그 마법사가, 그들에게 훼방을 놓아서, 총독으로 하여금 믿지 못하게 하려고 애를 썼다.
9 그래서 바울이라고도 하는 사울은 성령이 충만해서, 마법사를 노려보고 말하였다.
10 "너, 속임수와 악행으로 가득 찬 악마의 자식아, 모든 정의의 원수야, 너는 주님의 바른길을 굽게 하는 일을 그치지 못하겠느냐?
여기서도 바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당당하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합니다.
(행11:24)
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초대 교회의 지도자였던 바나바도 성령이 충만하여 그의 일을 수행 할 수 있었습니다.
(행13:49-52)
49 이렇게 해서 주의 말씀이 온 지방에 퍼져 나갔다.
50 그러나 유대 사람들은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읍의 지도층 인사들을 선동해서,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였고, 그들을 그 지방에서 내쫓았다.
51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에게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갔다.
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바울과 바나바를 비롯해서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성령이 충만하여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경우를 주목하여 보세요. 개인이나 무리나 할 것 없이 성령이 충만하니 무엇을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합니다.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 있었던 120명의 제자들이 그러했고 산헤드린 앞에서 베드로가 그러했고 바울과 바나바, 스데반 등 모든 제자들이 성령이 충만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의 제일 되고 가장 특징적인 표지는, 성령을 충만히 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고 삶으로 예수를 전한다는 것입니다. 위의 구절에 등장하는 어느 누구도 성령이 충만하여 기적을 경험한다든지, 방언을 했다든지, 자기 체험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오직 예수만을 이야기합니다.
(요16:12-14)
12 아직도,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지금은 감당하지 못한다.
13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듣는 것만 일러주실 것이요,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14 또 그는 나를 영광되게 하실 것이다. 그가 나의 것을 받아서,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은 이렇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알게 하시고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셔서 성령 충만을 받은 자들은 반드시 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삶으로 입으로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자랑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성령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예수로부터 받은 선물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자랑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분, 입으로 삶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딤전6:3-5)
3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가르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건전한 말씀과 경건에 부합되는 교훈을 따르지 않으면,
4 그는 교만해져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요, 병이 들어서 논쟁과 말다툼을 일삼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데서, 시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의심이 생깁니다.
5 그리고 마음이 썩고 진리를 잃어서, 경건을 이득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 사이에 끊임없는 알력이 생깁니다.(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그런 사람들과는 상종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가 더 있음).
바울은 디모데와 디도라는 목회자들에게 편지를 써서 말씀을 바르게 전하라고 목회 서신을 보냈습니다. 디모데서와 디도서지요. 거기에서 바르게 가르치라는 “교훈”이라는 말을 열네 번을 쓰는데 3절의 “다른 교훈”이라고 번역된 말은 헬라어 “헤테로 디다스 칼레오”입니다.
그 뜻은 false doctrine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교리를 모르고 여러분은 절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올바로 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여호와의 증인을 이단이라 하나요? 왜 베뢰아 파를 이단이라 합니까? 왜 문선명씨의 통일교를 이단이라 하나요? 그들도 같은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을 이단이라 합니까? 교리가 다르기 때문에 이단이라 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교리를 알지 못하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어리석은 일인지를 아시겠어요? 체험과 경험으로 믿다보면 언젠가 자기가 믿는 게 하나님인지 부처님인지 알라인지 헛갈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이렇게 처음부터 교리 부분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르게 알아야 바르게 전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갈1:6-8)
6 여러분을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불러 주신 그분에게서, 여러분이 그렇게도 빨리 떠나 다른 복음으로 넘어가는 데는,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7 실제로 다른 복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몇몇 사람이 여러분을 교란시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시키려고 하는 것뿐입니다.
8 그러나 우리들이나, 또는 하늘에서 온 천사일지라도,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한 것과 다른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한다면, 마땅히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교리를 모르고 엉뚱한 복음, 다른 복음을 전하면 하나님께 저주를 받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성경을, 바른 교훈을 공부해야 하겠습니까? 이렇게 올바른 예수를, 올바른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된 자를 우리는 성령이 충만한 자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탄과 대적하여 싸울 때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무엇이라 했나요? 바로 말씀 아닙니까?
(엡6:17) 그리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칼,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십시오.
그렇지요? 성령 충만은 이렇게 올바른 교리의 숙지에서 오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성령 충만함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삶으로 전한다는 것은 오늘 본문 에베소서 5장을 보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게 쓴 편지에서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바로 뒤이어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라,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자녀들아 부모에게 순종하라. 부모들아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마라. 종들아 상전에게 순종하라. 상전들아 종들에게 공갈치지 마라.‘고 성령 충만의 내용을 열거합니다.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이야기하면서 무엇을 제시하고 있습니까? 바로 일상생활입니다.
여러분의 일상생활에서 그리스도인다운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성령 충만을 받은 사람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에베소서의 성령 충만의 내용은 갈라디아서의 성령의 열매로 이어지는 것이지요.
(갈5:22-23)
22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23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금할 법은 없습니다.
이게 바로 성령 충만한 자에게서 나오게 되는 성품들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이러한 영적인 그리스도인의 성품이 나오고 있으신가요?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이러한 용서와 사랑과 인내와 자비가 나오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남을 멸시하고 죽이고 있습니까?
성령이 오셔서 우리의 눈을 뜨게 하셔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연합시키시고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그래서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을 향해 가게 되어있습니다. 예수라는 줄기에 붙어있는 자들은 당연히 열매가 맺히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성경 공부나 설교와 같은 학습이 방법으로 개입되는 것이고 그러한 학습과 훈련 속에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배우고 익히게 되는 것이며 그러한 성도의 모습을 우리는 성령 충만한 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은 예수라는 머리가 지시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머리가 지시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을 무엇이라 하나요? 중풍이 걸렸다고 하지요? 여러분 뇌성마비 장애인을 본적이 있으세요? 밥숟가락을 집어 입으로 넣으라는 머리의 명령을 손이 따라주지 않아 제대로 밥도 못 먹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시키시는 일을 전혀 따라하지 않는 뇌성마비 교인들 그게 오늘날 교회의 모습 아닙니까? 그런데 어디서 성령 충만을 이야기 합니까? 그것을 잘 하는 것이 ‘성령 충만’인데 거룩을 향해 자라가라는 예수님의 요구와 명령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이들이 무슨 성령 충만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까? 그러니까 성도는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시인을 해야 하는데 자신을 구원하신 메시아 그리스도 예수로는 인정해도 예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건 반쪽짜리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아요 그리스도이시지만 우리의 주인 이십니다. 입만 열면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면서 왜 예수님을 종 부리듯이 부리려고만 하시나요?
성경은 그렇게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열매가 맺히지 않는 자들 즉, 성령 충만하지 않은 자들을 가리켜 “성령을 소멸하는 자”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자라”고 이야기합니다.
(살전5:19)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
(엡4:30)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성령 안에서 여러분은 구속의 날을 대비해서 인치심을 받았습니다.
구속의 문제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전적인 주권을 가지고 일하심으로써 당신이 원하시는 자를 택하시고 이끌어 가시지만 그리스도인의 성장의 문제에 있어서는 그와는 대조적으로 상당한 분량을 인간에게 책임과 의무로 지우십니다. 그래서 신자의 마음속에서 혹은 성경을 통해 외치시는 성령의 조명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옛 사람의 습관을 좇아 막 사는 사람을 성령을 소멸하는 자, 성령을 근심케 하는 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요구하시고 명령하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기도와 말씀으로 무장하며 그 위에 우리의 열심을 보태 성령의 조명을 잘 좇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것이 바로 성령 충만한 삶입니다.
분명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가시는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 세례를 받은 자가 성령의 조명에 거부할 수도 있고 협력할 수도 있습니다. 영적으로 깨어있는 자들은 그러한 성령의 조명에 민감하게 반응을 하게 되지만 은혜의 수단인 기도와 말씀과 성례를 소홀히 하는 자는 절대 그러한 이끄심에 민감하게 반응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령 충만’과 전혀 상관없는 자들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령을 소멸한다는 말의 원어의 뜻은 “억누르다” “묶다”의 뜻입니다. 성령을 소멸한다는 것은 성령의 자극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죄에 이끌려 가는 것을 성령을 소멸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무시하고 반대하면 점점 그 양심의 소리에 무감각해지니까요. 그러다보면 결국 영적 귀머거리가 되어 엉터리 같은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 안에 성령이 계시기에 그러한 엉터리 같은 삶 속에서 절대 행복을 느낄 수 없습니다.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반복해서 요구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성령을 근심하게 한다는 것도 성경의 문맥을 보면 거룩한 삶을 살지 않는 것을 성령을 근심하게 한다고 합니다.
(엡4:22-32)
22 여러분은, 지난날의 생활방식에 얽매여서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23 마음의 영을 새롭게 하여,
24 하나님을 따라 참된 의로움과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25 그러므로 여러분은 거짓을 버리고, 각각 자기 이웃과 더불어 참된 말을 하십시오. 그것은 우리가 서로 한 몸의 지체들이기 때문입니다.
26 화를 내더라도 죄는 짓지 마십시오. 해가 지도록 노여움을 품고 있지 마십시오.
27 악마에게 틈을 주지 마십시오.
28 도둑질을 하는 사람은 다시는 도둑질을 하지 말고, 수고를 하여, 제 손으로 떳떳하게 벌이를 하십시오. 그리하여 오히려 궁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 있도록 하십시오.
29 나쁜 말은 입 밖에 내지 말고, 덕을 세우는 데에(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믿음을 세우는데') 필요한 말이 있으면 적절한 때에 해서, 듣는 사람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십시오.
30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성령 안에서 여러분은 구속의 날을 대비해서 인치심을 받았습니다.
31 모든 악독과 격정과 분노와 소란과 욕설은, 모든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32 서로 친절히 하며,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우리를)용서하신 것같이', 서로 용서하십시오.
이런 것들을 하지 않는 사람을 우리는 성령 충만하지 못한 사람, 성령을 근심케 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신자 안에 들어오신 성령 하나님은 강제로 일을 하지 않으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의지를 거스려 가며 억지로 끌고 가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성도의 견인을 잘못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한번 구원받은 자는 성령께서 억지로 끌고 가신다는 게 견인이 아닙니다. 본인은 계속해서 죄를 지으려고 하는데 성령 하나님이 그 사람의 마음을 요술 지팡이로 선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가 잘 못 가고 있는 방향에 대해 조명하시고 각성케 하시고 깨닫게 하시지만 우리가 의지를 발동해서 따라올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억지로 끌고 가면 나중에 심판 때에 하나님께서 할 말이 없으시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발동하여 선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우하시며 인격적인 가족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올바른 길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셋 셀 때까지 안 하면 다섯까지 세시면서 기다리십니다. 그러나 명심하세요. 그렇게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동안 여러분은 괴롭습니다. 성도는 결코 편하게 성령을 소멸하며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생채찍 사람 막대기, 가시와 담으로 여러분을 계속 설득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돌이키셔야 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이렇게 올바른 교리, 말씀으로 무장하여 언제 어디서든 바른 복음을 자랑하며 전하는 자들이며 거룩한 삶을 추구하며 자기의 의지를 발동하여 힘겹지만 성령의 음성을 따라 사는 사람들을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손해가 오더라도 성령하나님의 음성을 좇아 사는 사람들, 성령 충만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삶과 하나님께 졸라서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가 필요한 것을 얻어내려는 오늘날 많은 자칭 기독교인들의 삶과 어떤 게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삶이겠습니까?
예수께서 왜 병을 고쳐주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가서 아무에게도 이야기 하지 말라고 했는지 아세요? 아직 성령이 임하기 전이기에 눈에 보이는 현상만을 본 사람들에 의해 엉터리 복음이 전해질까 봐 그러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이나 고쳐주고 오병이어로 먹을 것이나 만들어 주고 귀신이나 쫓아 주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죄를 대속하러 오신
분이시기에 그들이 나가서 그저 세상의 복이나 주는 예수를 전할까봐 아직 십자가를 지시기 전이고 성령이 임하시기 전이므로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예수님이 우려하시던 그 엉터리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야기하지 않고 병을 고쳐주고 복을 내려주며 귀신이나 쫓아내 주는 것이 성령의 사역이라 전하고들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신본주의입니다. 절대 인본주의가 아닙니다. 나를 위해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내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아무런 이익이나 편의가 오지 않아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감수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해결사 하나님이 되어버렸습니다. 성령은 그런 일 하시러 오신 분 아닙니다. 성령 충만함이 무엇인지 알았으면 이제부터 의지를 발동하여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내십시오.
지난 금요일에 제가 잘 아는 장로님이 우리 교회를 방문하셔서 저에게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누님께서 클래식을 전공하고 계셨는데 어느 날 동생에게 클래식 공연을 보여주고 싶으셔서 좋은 공연이 들어온 날 함께 클래식 공연을 보러 가셨다고 합니다. 공연이 시작되고 거기 모인 대부분의 사람들이 감동적인 공연에 심취해서 음악을 듣고 있는데 공연 시작 10분이 경과한 시점부터 코를 골면서 주무시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보다 못해 누님이 공연이 끝나기도 전에 끌고 나오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장로님께서는 승부 근성이 강하신 분이십니다. 그날로 클래식 음악에 관한 책을 사셔서 그 음악의 작곡가들이 어떤 의도로 그 음악을 작곡했는지 열심히 공부를 하시고 그 음반들을 사서 다시 들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작곡가의 의도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알고 들으니까 너무 재미있더라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의 저작의도를 모르고 성경을 보니 그렇게 힘이 없고 이해를 못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저작 의도를 궁금해 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이라는 설교에서도 다루었고 새 가족 반에서도 두 시간에 걸쳐서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전체가 무엇을 이야기하는 지를 공부하지 않습니까?
성경은 왜 기록 되어있으며 그 내용이 무엇인지 여러분은 이제 아시잖아요?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기들이 어떻게 해서 구원을 받게 되었는가를 알게 하기 위해서 쓰인 책입니다. 우리가 확인했듯이 성경에는 예수에 관해서만 쓰여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이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시며 그 분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무엇인지를 설명해 놓은 것이 성경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우리의 구원에 관해서만 적혀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엉뚱한 것들을 찾아내서 미처 하나님이 상상하지도 못하신 심오한 진리들을 생각해 내고 엉엉 울기도 합니다. 그리고는 은혜 받았다고 합니다. 그건 마치 비발디 사계 중에 봄을 들으면서 가을의 낙엽을 떠올리며 눈물짓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모습을 만일 비발디가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건 비발디에 대한 모욕입니다. 비발디는 봄을 열심히 그려놓았는데 낙엽을 떠올린다는 것은 그에 대한 모욕입니다. 여름을 들으면서 썰매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성경의 저작의도를 완전히 다르게 이해하고 있다면 그건 하나님에 대한 모독인 것입니다. 잘 분별하세요.
여러분이 ‘성령세례’라든가 ‘성령 충만‘이라든가 ’성령의 은사‘등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다면 여러분이 아무리 가슴속에서 사이다가 솟는 짜릿한 경험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제13장 성령 (4) (성령훼방)
(마12:15-32)
15 그러나 예수께서 이 일을 아시고서, 거기에서 떠나셨다. 그런데 많은 무리가 예수를 따랐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16 그리고 자기를 세상에 드러내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하셨다.
17 이것은 예언자 이사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었다.
18 "보아라, 내가 뽑은 나의 종, 내 마음에 드는 사랑하는 자,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것이니, 그는 이방 사람들에게 정의를 선포할 것이다.
19 그는 다투지도 않고, 외치지도 않을 것이다. 거리에서 그의 소리를 들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20 정의가 이길 때까지,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을 것이다.
21 이방 사람들이 그 이름에 희망을 걸 것이다.”
22 그 때에 사람들이, 귀신이 들려서 눈이 멀고 말을 못 하는 사람 하나를 예수께 데리고 왔다. 예수께서 그를 고쳐 주시니, 그가 말을 하고, 보게 되었다.
23 그래서 무리가 모두 당황하여 "이 사람은 다윗의 자손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24 그러나 바리새파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이 사람이 귀신의 두목인 바알세불의 힘을 빌지 않고서는, 귀신을 내쫓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25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지면 망하고, 어느 성이나 가정도 서로 갈라지면 버티지 못한다.
26 사탄이 사탄을 내쫓으면, 스스로 갈라진 것이다. 그러면 나라가 어떻게 서 있겠느냐?
27 내가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내쫓는다면, 너희의 아들들은 (귀신 축출자들을 말함.)누구의 힘으로 귀신을 내쫓는다는 말이냐? 그러므로 그들이야말로 너희의 재판관이 될 것이다.
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영을 힘입어 귀신을 내쫓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왔다.
29 사람이 먼저, 힘센 사람을 묶어 놓지 않고, 어떻게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서 세간을 털어 갈 수 있느냐?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어 갈 것이다.
30 나와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은 나를 반대하는 사람이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않는 사람은 헤치는 사람이다.
3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무슨 죄를 짓든지, 무슨 신성 모독적인 말을 하든지, 그들은 용서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다.
32 또 누구든지 인자를 거역하여 말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거역하여 말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도 오는 세상에서도,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성령 하나님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성령 세례’에 대해서, ‘성령 충만’에 대해서 그리고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 그리고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본문의 내용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듯이 ‘성령 훼방’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성령의 하시는 일을 훼방하는 것은 절대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지옥 간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을 가지고 교인들 협박하는 목사들이 종종 있더라고요.
제가 어렸을 적에는 유명한 부흥사들이 많았습니다. 그 분들이 인도하는 부흥회라는 것이 참 많았습니다. 그 부흥회에서 종종 듣던 레퍼토리가 “목사가 하는 일 방해하면 성령이 하시는 일을 방해하는 것이다, 그 죄는 절대 용서 못 받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니 목사가 하는 일은 이해가 가지 않더라도 꼭 순종해야 한다고 엄포를 놓으시곤 했지요.
아마 그런 설교들을 듣고 자란 사람들이 저 말고도 많이 있기에 그렇게들 목사가 하는 말이라면 껌뻑 죽는 것 같습니다.
특히 출석교인이 기천명이 넘는 교회 목사는 가히 황제 대접을 받습니다.
비서가 있는 것은 물론이요, 중형 승용차에 기사까지 딸려 있고, 경호원을 데리고 다니는 목사가 나오는 웃지 못 할 일들이 왕왕 보이기도 합니다. 도대체 목사가 무엇이 무서워서 경호원까지 데리고 다니는지 모르겠지만 대형교회 목사들은 그렇게 호사를 누리며 삽니다.
정말 목사의 말을 어기는 것이 성령 훼방 죄에 걸리는 것일까요?
여러분 성령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성령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찾아오셔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깨닫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은혜에 대하여, 구원에 대하여 이해시키시는 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된 구원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적용시키시는 분이 바로 성령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몇 사람의 특별한 사람에게만 오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강림하십니다. 그리고 소수의 선택된 목사들을 통해서만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 안에 거하십니다. 절대 목사가 하는 일을 방해하는 것이 성령훼방이 아닙니다.
얼마나 겁들을 먹고 있는지 목사가 라스베가스에 가서 교회 헌금으로 수 억 원씩 도박을 하고 와도 여전히 건재합니다. 교회의 재정을 위해 교회 돈으로 도박을 했다지요? 아홉시 뉴스에까지 보도가 되었는데도 그 교회 교인들이 여전히 수만 명에 육박합니다.
여러분은 이 강단에서 목사가 성경대로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바로 끌어내려야 합니다. 그게 여러분도 살고 목사도 살 길입니다.
공동체가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이 아니라 일단 목사에 대해 경외감을 갖고 두려워하기 시작하면 목사 하나가 잘 못 가면 전체가 잘 못 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어떻게 기독교가 예수 믿으면 복이나 받고 병이나 낫고 하는 저급한 종교가 되어버렸는가 말입니다. 사람들이 목사를 존경하게 만들려면 목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청중이 원하는 것을 들어줘야 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간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남의 부러움을 받으면서 잘 먹고 잘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들이 마치 자기 말만 잘 들으면 하나님께 말 잘해서 그런 것 줄 수 있다고 공갈을 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운 좋게 몇 차례만 들어맞으면 그 목사는 뜨는 것이지요. 그렇게 인기 있는 목사가 되면 사람들이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죄인들의 속성입니다.
(마12:15)
15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사람이 많이 좇는지라 예수께서 저희 병을 다 고치시고
보세요. 예수님께서 질병을 고치시고 오병이어로, 칠병이어로 먹여주고 했을 때는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주님을 좇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러한 인기를 위해 오신 분이 아니기에 오히려 거기를 떠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떻게 해서든지 인기를 끌고 싶어 하니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LA에 요즘 신종 사기단이 등장했답니다. 일정한 사례를 하면 교회를 부흥시켜주는 이인조 사기단이 있다고 합니다. 그 사람들은 교회의 담임 목사와 일정한 액수의 거래를 한 후 그 교회 교인인척 교회에 출석을 하면서 그 담임 목사가 자기의 불치병을 고쳐 주었다는 둥, 어려운 사업을 목사의 안수기도로 회복했다는 둥 소문을 퍼뜨려 주는 것입니다. 그들의 그러한 전략은 거의 백발백중 적중한답니다. 그 교회는 짧은 시간에 크게 부흥을 하게 된답니다. 실제로 그렇게 해서 자기 교회가 커졌다고 자랑을 하는 노 목사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이건 코미디도 아니고 정말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자기의 필요를 채워주는 곳으로 모이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모인 자들이 예수님을 못 박은 것을 잊지 마세요.
제가 지난주에 왜 오늘 본문 16절에서 주님께서 자기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라고 엄하게 경계하셨다고 했지요? 엉터리 복음이 전해질까 봐서 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많은 이적과 기사를 행하셨습니다. 병자들이 낫고 앉은뱅이가 일어났으며 장님이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귀신이 쫓겨 나갔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누구이시며 천국은 어떤 곳인지를 설명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본 것이 아니라 그 분이 일으키신 기적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 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난과 죽음이 있기도 전에 병이나 낫고 오병이어로 먹을 것이나 만들어 주고 하는 것으로 기독교를 잘 못 전할 까봐 예수님은 절대 나가서 나에 대해 언급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가 겪으신 그 핍박과 고난 그리고 죽음 그리고 부활에 동참하는 것인데 엉뚱하게 기적과 이생의 복만을 전할까봐 예수께서 말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는 예수님이 말하지 말라고 한 것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 된 것이 오로지 병고치고 귀신 쫓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성령하나님을 무슨 능력이나 행하게 해주고 신비를 체험케 해주는 분으로 저급하게 취급하고 마치 자기가 성령을 쏟아 부어 줄 수 있는 것처럼 “성령 받아라.” 하는 자들은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오시면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는 예수님의 행적을 보면 잘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마12:18-19) “보아라, 내가 뽑은 나의 종, 내 마음에 드는 사랑하는 자,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것이니, 그는 이방 사람들에게 정의를 선포할 것이다 . 그는 다투지도 않고, 외치지도 않을 것이다. 거리에서 그의 소리를 들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보세요. 성부 하나님께서 성령 하나님을 성자 하나님께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성령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안에 내주하시게 되면 예수님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시고, 즉 복음을 전하시고 다투지도 않으시고 들레지도 아니하실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야단스럽게 떠들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받으신 주님의 사역은 자기를 감추시는 겸손한 사역이었다는 것이지요. 성령이 이끄시는 사역은 그렇게 야단스럽게 인기나 끌면서 사람이나 모으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하신 것은 하나님 나라의 선포였지 절대 자신을 드러내어 자랑하는 사역이 아니었습니다.
(마12: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영을 힘입어 귀신을 내쫓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왔다.
이 구절에서 ‘임하였다’라고 번역이 된 ‘에프따센’은 “오다”라는 의미의 ‘프따노’라는 단어의 과거시제 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왔다는 것입니다. 과거 시제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적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시는 기적과 표적은 바로 하나님 나라가 왔음을 설명하시기 위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예수님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왜요? 그들이 기대했던 그리고 유대인들이 지금도 기대하는 메시야는 그들을 정치적으로 해방시켜 주고 이 땅에서 왕 노릇하게 만들어 주는 메시아를 원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기적의 현장에서는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광분했지만 자기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않자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린 것입니다.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이 땅에서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고 전하면 교인들이 교회를 외면하고 목사를 외면하고 떠납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에 와서 원하는 것이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원했던 것과 똑같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고난과 수난과 십자가의 예수는 이미 오늘날 교회에서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복이나 주는 예수를 우리는 바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예수를 믿고 있습니까?
오죽하면 한국의 문화부 장관을 역임하신 어떤 분이 신문에 “내가 예수를 믿지 않는 이유” 라는 글을 통해서 2000년 전 예수는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당하시고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셨다고 하는데 오늘날에는 어떤 교회에서도 그 고난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내가 지금 그 손바닥에서 고난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교회를 만난다면 난 당장 예수를 믿겠다.“라고 글을 쓰셨겠습니까?
얼마나 교회라는 집단이 자기들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사람을 모아 세력을 불리는 데에만 급급하게 보였으면 불신자들이 이런 치욕적인 말을 함부로 신문지상에 내 뱉는가 말입니다.
전에도 언급했지만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들로 상징되는 사람들이 자식이 많고 재물이 많고 건강하게 표현이 된 것은 아직 예수님으로 완성되는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과 풍요로움을 가장 인간이 이해하기 쉬운 방법으로 설명을 하신 것이지 그것이 구원의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벌써 오시고 성경이 완성되었음에도 아직도 구약 시대에 사는 사람들이 교회에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나라고 뭐고 다 필요 없으니까 이 땅에서나 잘 먹고 잘 살게 해 달라고 소리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 사람을 우리가 성도라 합니까?
주님께서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라는 세례 요한의 물음에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마11:2-6)
2 그런데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을 감옥에서 듣고, 자기 제자들을(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두 제자들을') 보내어, 그들을 시켜서
3 예수께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어 보게 하였다.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5 눈먼 사람이 보고,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 환자가(나병을 포함한 여러 가지 악성 피부병을 말함)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6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또는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예수님께서 이사야서에 예언된, 메시아가 오시면 일어날 일을 기록한 것을 들어 내가 바로 그 메시아라고 대답을 하십니다. 이 구절은 이사야서 35장에 명확히 기록된 구절의 인용입니다.
(사35:4-6)
4 두려워하는 사람을 격려하여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의 하나님께서 복수하러 오신다. 하나님께서 보복하러 오신다. 너희를 구원하여 주신다" 하고 말하여라.
5 그 때에 눈먼 사람의 눈이 밝아지고, 귀먹은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다.
6 그 때에 다리를 절던 사람이 사슴처럼 뛰고, 말을 못하던 혀가 노래를 부를 것이다.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 시냇물이 흐를 것이다.
이렇게 예수께서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고 하신 것은 예수님이 참 메시아이심을 설명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절대로 당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으로 그들을 놀라게 해서 하나님을 믿게 만들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기적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은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옥에 간 부자가 거지 나사로를 품에 안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제발 저 나사로를 세상으로 다시 보내어 내세가 있다는 것을 자기 형제에게 알리게 해달라고 부탁을 하자 아브라함이 단호하게 말하지요? 모세와 선지자 즉 성경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자들은 죽은 자가 살아나서 정말 지옥이 있더라 하고 말해도 절대 안 믿는다고요. 왜 그 수많은 기적을 경험하며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서자마자 하나님을 원망했겠습니까? 기적은 사람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성경이 증거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다릅니다. 완전히 다릅니다.
(마11: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렇게 아뢰었다. "하늘과 땅의 주재자이신 아버지, 이 일을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 어린 아이들에게는 드러내 주셨으니, 13)감사합니다(또는 '찬양합니다').
여기서 어린아이들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네피오이스’라는 말은 작은 자들, 남들이 업신여기는 불쌍한 자들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나라는 그런 작은 자들, 어린 아이 같은 자들에게 나타내어진다는 말입니다. 스스로 지혜 있다하고 잘난 사람들을 위한 것이 기독교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요즘은 어떻게 교회가 지향하는 것이 “예수 믿고 잘난 사람 되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목사도 베스트셀러 하나쯤은 내야 인기 목사가 되어 교인도 많아지고 여기저기 강연도 다니고 하게 됩니다. 오죽하면 목사가 중들한테도 박수를 받고 싶어 하겠습니까? 최근에 어떤 유명한 목사님이 동국 대학교에서 많은 불교인들을 모아 놓고 강연을 한 후 기립 박수를 받았다지요? 세상 사람들이, 타 종교인들이 목사의 어떤 면을 존경하여 박수를 보내겠습니까? 세상적인 면들밖에 더 보겠습니까?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뿐이라는 진리를 설파한 목사가 과연 중들에게 박수를 받을 수 있을까요? 그 반대의 이야기를 했겠지요. 목사는 하나님께만 칭찬 받으면 됩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인기 없이 돌아가셨는데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종들이 어떻게 예수님보다 더 인기를 얻으려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잘못 가도 한참 잘못 가고 있습니다. 오늘 날의 교회들이 열심을 부리고 대단한 업적을 많이 남기고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라 성급하게 판단하지 마십시오.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을 목숨 걸고 사랑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게다가 27절에 보면 그들도 귀신을 쫓아내고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모두 훌륭한 종교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가짜였습니다. 참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못 알아보고 죽여 버리지 않았습니까? 기독교를 세상적인 것으로 포장해 버리는 것,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성령님의 사역을 단순히 세상적인 것을 얻어내는 것으로 설명을 해 버리는 것은 모두 가짜입니다. 같은 모양을 하고 있고 같은 소리를 낸다고 해서 모두 진짜가 아니란 것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주님은 그 분 자체가 완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시는 일 즉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일하시는 분이시지 어떤 능력을 행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소원을 성취해 주는 요술램프가 아니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성령 하나님은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란 것을 이야기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성령을 훼방 한다”에서 훼방한다는 말 ‘블라스페미아’는 하나님에게 대해서만 쓸 수 있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참람한 행동을 하는 것을 ‘블라스페미아’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과 성령 하나님에 대해 그 단어를 쓰심으로 예수님과 성령 하나님은 모두 하나님이심을, 즉 삼위 일체 교리를 그 단어 하나로 설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성령하나님은 너희들에게 그런 능력이나 힘을 주러 오신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러 오신 하나님이시란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한일이 뭐라 했습니까? 이렇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여러 번 반복하는데 이제는 척척 나와야지요. 성령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은 예수께서 이루어 놓으신 구원이 어떤 것인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해시키시고 깨닫게 하시는 일, 즉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 구원을 적용시키시는 일을 하신 것이라 했지요?
그럼 그 일을 훼방한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혹자가 이야기하는 목사의 말을 거역하는 것이 성령훼방이겠습니까? 아님 어떤 사람들이 이야기 하는 것처럼 세례 받고 그 이후에 짓는 죄가 성령 훼방 죄인가요? 어떤 사람들은 그래서 세례 늦게 받는다고 하더라고요. 하긴 어거스틴도 그랬으니까 할 말이 없습니다.
아니면 순 복음 쪽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사도행전의 성령의 역사를 부인하는 것을 성령 훼방 죄라 할까요? 그럼 우리 교회는 목사를 비롯해서 모든 교인이 모두 성령 훼방 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큰 일 났지요?
잘 들으세요. 성령 훼방 죄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늘 문맥을 잘 보세요.
예수께서 지금 바리새인들에게 말씀을 하시던 끝에 성령 훼방 죄를 언급하십니다.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 계셨나요?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천국을 전하러 오셨는데 바리새인들은 세상적인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그 예수로 말미암은 하나님나라를 거부한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그들에게 성령 훼방 죄에 대한 언급을 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성령 훼방 죄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로 말미암아 선물해 주신 그 구원을 세상적인 것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성령 훼방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부자 되게 해주고 기적적인 것이나 체험케 해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더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부자도 예수 안 믿는 사람 중에 더 많고 신비적인 체험도 다른 종교에 더 많습니다. 힌두교나 밀교 같은 곳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기적과 신비들이 많습니다. 절벽에서 공중 부양을 하며 설교를 하는 힌두교 교사들도 많습니다. 그럼 정말 하나님께로 부터만 올 수 있는 선물은 무엇이겠습니까? 영원한 생명, 하나님 나라, 천국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의 화려한 열매에 관심 없으십니다. 아무리 훌륭한 수천 만 불짜리 예배당을 지어놓는다 해도 마지막 날에 모두 불타 없어질 것들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처럼 이 땅의 것들 중에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와, 참 멋지게 지었네, 이것 천국에 가져가자” 하실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참 성전을 지어야 합니다. 참 성전은 우리자신, 즉 하나님의 백성 자신입니다. 우리가 바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그 하나님의 백성 말고는 아무 것도 천국에 못 가지고 들어갑니다. 그런 불타버릴 것을 추구하는 것이 기독교가 아니라 기독교는 뭔가 더 크고 깊은 것입니다.
제가 아는 권사님 중에 올해로 아흔이 되신 조앤 정 권사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이 한번은 ‘내가 지금 이 나이에 무슨 기도할 것 같은가?’하고 저에게 물으셨습니다.
저는 속으로 ‘더 건강하게 오래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겠지’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말씀 하시기를 당신이 지금 하나님께 드리는 유일한 기도는 ‘하나님 내가 지금 하나님 잘 믿고 있는 것인지, 아님 잘 못 믿고 있는 것인지 잘 분별해서 예수님 잘 믿고 천국가게 해 주십시오’라는 기도 밖에 할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이 아흔이 되어 이제 죽음이 눈앞에 오니 정말 걱정이 되는 것은 ‘내가 정말 예수를 잘 믿고 있는가?’밖에 없더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올바로 믿고, 올바로 분별하여 천국 가야합니다.
여러분도 내가 바로 믿고 있는지 잘 못 믿고 있는지 매일 매일 확인하고 자신을 추스려서 하나님의 나라에 적합한 사람이 되는 것에 일로 매진 하셔야 합니다.
세상 것에 너무 눈 두지 마십시오. 잘못하면 여러분 성령 훼방 죄를 짓게 될지 모릅니다.
그 사람은 영원한 지옥에 가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예수를 잘 믿으세요.
제14장 기적
(마12:38-39)
38.그 때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 가운데 몇 사람이 예수께 대답하여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에게서 표적을(12:38, 39의 '표적'은 예수의 신성을 보여주기 위한 상징으로서의 기적) 보았으면 합니다.”
39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요구하지만, 이 세대는 예언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아무 표적도 받지 못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체험의 종교라고 합니다. 어떤 면에서 맞는 소리입니다.
그러나 그 체험은 신비적인 것이나 기적적인 것의 체험이나 자기의 소원이 척척 이루어졌던 것에 대한 체험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을 자라게 하는 기독교의 체험은 환난과 고난을 겪으면서 "이런 환난과 고난과 고통 속에서도 어떻게 내 마음이 이렇게 평안한가? 어떻게 나에게 여전히 소망이 있는가?"에 대한 체험입니다.
(빌4:12-13)
12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13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집에다가 표구해서 걸어놓는 구절입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감옥에서 쓴 빌립보서에 들어 있는 것이라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셔서 내가 감옥 같은 고난과 배고픔과 비천도 이겨낼 수 있는 자가 되었다는 것이지, 자기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다 이룰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체험은 바로 그런 체험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신앙생활은 기분이나 느낌으로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정확한 교리의 이해가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오직 들음에서만 말미암는 것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듣고 읽고 배워서 그것이 이해가 되면 그 이해가 가슴으로 내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조선소에 가보신 적 있으십니까? 조선소에 가면 배를 만드는 철판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습니다. 그 철판을 보고 또 그 철판으로 만들어지는 엄청난 크기의 배를 보면 그 배가 물에 뜬다는 것을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느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물리 시간에 부력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물속의 물체는 그것이 밀어낸 물의 양만큼 가벼워집니다. p=p0-pgh 이 아르키메데스의 원리에 대입해 보면 그 엄청난 크기의 배가 뜬다는 것을 확실하게 계산으로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인류가 느낌으로 그들의 인생을 경륜해 왔다면 비행기나 배나 자동차 같은 것은 결코 생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느낌이나 기분으로 하는 신앙은 절대 진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정확한 진리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앙을 신비적인 체험이나 기복적이며 주술적으로 이해를 하고 정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이 한결 같이 주장하는 것이 “예수님도 기적을 일으켰고 사도들도 기적을 일으켰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기적을 통해 일을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길 원하시기 때문에 믿음만 있으면, 그리고 하나님께 헌신하면 하나님은 병도 물리쳐 주시고 물질도 풍성하게 채워 주신다.“ 그래서 사람들을 쓰러뜨리고 병을 낫게 해 주고 심지어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분명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그 전지전능하신 능력의 하나님께서 오늘도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음을 우리는 부인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시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전에도 살펴 본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복은 우리의 개념과는 아주 다른 복입니다. 이 땅의 것이 아닌 하늘의 것으로 즐거워하는 복입니다. 그리고 기적은 절대 인간을 변화시킬 수 없음도 지난주에 함께 공부해 보았습니다. 그러면 성경에 기록되어있는 기적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는 것일까? 여러분이 그 기적의 의미들을 잘 파악하고 계시면 그 엉터리 같은 신비주의나 기복 주의에 빠지지 않으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사도들이 행한 기적의 내용과 의미에 대해서는 전에 설명을 해드렸으니까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기적의 의미에 대해서 공부를 해 보지요.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은 예수님의 신적 기원과 예수님의 하실 일과 예수 님 자신을 설명하는 sign이라는 것입니다.
(요5:36) 그러나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성하라고 내려 주신 일들, 곧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바로 이 일들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증언하여 준다.
먼저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이적들을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들 중에 딱 일곱 개가 등장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행하셨던 그 많은 일들을 간추려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요한 음을 기록했습니다. 어떤 목적입니까?
(요20:30-31)
30 예수께서는 이 책에 기록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적도(예수의 신성을 보여주기 위한 상징으로서의 기적) 제자들 앞에서 행하셨다. 31 그런데 여기에 이것이나마 기록한 목적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행하신 이적들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게 하기 위해 행하신 것이지 우리의 문제 해결을 위해서 이적을 일으켜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당면한 문제 해결을 위해서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신 것이라면 왜 일일이 찾아다니시면서 병을 고쳐 주시겠습니까? 한번에 “병 걸린 사람들 다 나아라.” 그러면 전부 나을 텐데요.
우리는 그런 체험이 없어도 언제든지 예수님의 이름과 그 분의 하신 일로 인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차근차근 한번 보지요. 요한복음에 가장 처음 나오는 기적이 뭡니까?
가나의 혼인 잔치입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이지요? 거기에 대해서는 여러 번 설교를 했습니다. 비어있던 여섯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시고 그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사건은 위선적인 행위만 풍성했던 유대인들의 모습을 보여줌과 동시에 잔치가 진짜 잔치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적이라고 했지요? 항아리는 유대인들이 정결 예식을 행할 때 몸을 닦는 물을 담는 항아리입니다. 그것이 비어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형식적인 정결 예식을 행하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 이적 뒤에 예수님께서 그 이적의 본질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2:11) 예수께서 이 첫 번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서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래서 그의 제자들은 그를 믿었다.
예수님께서 이적을 행하시고 그것이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 말은 그 이적은 단순히 세상의 잔치를 흥겹게 해 주시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부족한 포도주를 채우시는 데에 목적이 있으셨던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참 기쁨과 풍성이 오게 될 것을 sign으로 주신 것입니다.
두 번째 이적은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질병을 치유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게 될 천국에는 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오게 된 그 질병이 없어지게 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참 천국이신 예수님께서 오셨더니 그 질병이 물러가 버리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왜 질병이 생긴 것입니까?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공급되어야 할 “바라크”“생명력, 복”이 차단 되었기 때문에 병이라는 것이 생기는 것입니다. 질병은 궁극적인 죽음의 맛보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력이 꽉 차있지 않은 증거, 이미 뿌리가 뽑혀버린 나무라는 증거, 점점 죽어 가는 증거로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질 그 천국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되어 영원한 하나님의 복“바라크”가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오시자 질병이 물러가는 것입니다.
세 번째 이적은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는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 중에 하나가 병자를 고치시는 것이라면 왜 그 베데스다 못 가의 수많은 병자 중 38년 된 병자 하나만 고치셨겠습니까? 그 이적은 우리 죄인들의 영적 상태를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그런 불능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 일어설 수조차 없습니다. 우리가 소경이요, 절름발이요, 혈기 마른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그들을 일으켜 세우시는 복음의 시놉시스 인 것입니다.
네 번째 기적이 오병 이어의 기적입니다. 그 내용만 가지고 네다섯 번은 설교한 것 같습니다. 이 기적은 예수님께서 참 생명의 떡이시며, 그 떡으로만 우리는 영원히 굶주리지 않고 살 수 있다는 복음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 인간의 영혼의 굶주림을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굳이 오병 이어를 가져오라 하셨을까요? 그냥 “모두 배 불러라”하면 배가 부르게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 왜 그 물고기 두 토막(옵사리온)과 떡 다섯 개라는 아이의 도시락을 필요로 하셨습니까? 거기 있는 사람들 아이들과 여자들을 합쳐서 2만 명이 넘는 그 사람들을 먹이기 위해서는 적어도 200데나리온(노동자의 1년 치 임금)도 모자란다고 빌립이 계산을 했습니다. 거기에 이 오병이어는 도저히 불가능함을 상징하는 소품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도저히 이루어 질 수 없는 하나님 나라 , 오직 우리 주님의 은혜로만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가시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기적이 물위를 걸으신 이적입니다. 그런데 이 기적은 네 번째 오병 이어의 기적과 연결이 되는 기적입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오병이어의 기적 바로 다음에 이렇게 나옵니다.
(막6:45) 예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태워, 자기보다 먼저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그 동안에 무리를 헤쳐 보내셨다.
예수님께서 오병 이어의 기적 현장에서 즉시 제자들을 배를 태워 벳새다로 보내십니다.
날은 이미 저물었고 밤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십여 리를 간 상태입니다. 그런데 반대편에서 역풍이 불었습니다. “바람이 거스리므로“ “아네모스 에난티오스”역풍, 반대편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역풍이 부니까 제자들이 괴로워했다고 성경은 설명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것을 보시고(에이도) 그들에게 오셨다고 하십니다. 한 밤중에 등불도 없는 바다 한 가운데에서 역풍에 표류하는 배를 예수님께서 보셨다고 하십니다. 십여 리면 4km가 넘는 거리인데 한 밤중에 어떻게 보셨을까요?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어깨에 힘이 들어간 제자들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시기 위해서 황급히 바다로 내 모신 것입니다. 당시 한 부락의 인구가 평균 3,000명 정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였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몇 개 부락이 동시에 모인 것으로 아주 혼잡했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그들에게 나누어주는 빵과 물고기가 어떻게 해서 생긴 것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직접 그 빵과 물고기를 떼어서 나누어주던 그 제자들은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어깨에 힘이 들어갔을 것입니다. 첫째로 예수께서는 그 제자들의 어깨에 들어간 힘을 빼시기 위해 바다로 내 몬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지 절대 너희들의 힘과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바다 위의 폭풍 속에서 제자들에게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이 떠나자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시고 지켜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지켜보고 계셨던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배로 벳새다로 떠나실 때 그들과 함께 떠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역풍을 만나자 주님은 그들에게로 걸어오셨습니다. 여기서는 우리 주님의 신적 능력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폭풍의 바다를 건너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도착하는 데는 너희들의 힘이 보태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나의 능력으로만, 나의 은혜로만 되는 것이라는 것을 주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것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마치 노아의 방주처럼 모두가 빠져 죽어야 할 폭풍 위를 주님께서 밟으시는 것입니다. 그 풍랑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2만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빵을 떼어주던 손으로 열심히 노를 젓던 제자들은 그 때 주님의 능력과 그 능력을 의지해야만 살아날 수 있다는 복음의 메시지를 배우게 된 것이지요.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인생을 살아내는 동안 수많은 내적 외적 역풍을 만나게 됩니다.
수많은 문제들에 노출됩니다. 사업이 망하고 자식이 속을 썩이고 병이 들고, 우리 인생은 끊임없는 외풍에 시달립니다. 그리고 자기 안에서 끓어오르는 죄로 인한 역풍도 늘 우리를 괴롭힙니다. 모난 성격, 불안, 우울, 근심, 염려, 욕심.. 계속해서 우리를 거스리는 외풍과 내 풍에 우리는 시달립니다. 그 때에 우리 주님은 우리의 사정을 다 아시고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 빠져 나올 수 없는 그 어두움과 고통의 세상에서 주님께서, 오직 주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건져 내신다는 것입니다.
(시139:15-16)
15 은밀한 곳에서 나를 지으셨고, 땅 속 같은 곳에서 나를 조립하셨으니 내 뼈 하나하나도, 주님 앞에서는 숨길 수 없습니다.
16 나의 형질이 갖추어지기도 전부터, 주께서는 나를 보고 계셨으며, 나에게 정하여진 날들이 아직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주의 책에 다 기록되었습니다
(사41: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의 하나님이니, 떨지 말아라. 내가 너를 강하게 하겠다. 내가 너를 도와주고, 내 승리의 오른팔로 너를 붙들어 주겠다.
(사43:2) 네가 물 가운데로 건너갈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하고, 네가 강을 건널 때에도 물이 너를 침몰시키지 못할 것이다. 네가 불 속을 걸어가도, 그을리지 않을 것이며, 불꽃이 너를 태우지 못할 것이다.
여러분이 지금 어떤 상황 속에 던져져 있다 할지라도 우리 주님은 지금 여러분과 함께 계시고 여러분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 풍랑 속에 함께 계십니다.
함께 있기만 하면 뭘 해요? 능력이 있어야지요? 그래서 주님은 물 위를 걸어오시는 것입니다.
피조 세계에 제한 된 인간은 자연 법칙을 거스릴 수 없습니다. 자연을 창조하시고 법칙을 만드시고 그 법칙으로 운영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자연 법칙을 만드시고 그 법칙에 스스로 매이십니다. 그것을 “공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때때로 그 자연 법칙을 유보하십니다. 수10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기브온 민족하고 전쟁을 합니다. 이기고 있었는데 해가 지려고 합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분부를 따라 태양을 멈추게 명령합니다. 그랬더니 정말 태양이 멈춥니다.
또 히스기야 왕의 이야기에서도 하나님께서 해시계의 그림자를 뒤로 10도 물러가게 만들어 주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자연의 법칙을 초월하신 적이 여러 번 있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질량 불변의 법칙을 초월하신 것이고 물위를 걸으신 것은 만류인력을 초월하신 것입니다. 즉 우리와 함께 계신 그 예수님께서 바로 피조 세계를 초월해 계신 분, 자연법칙을 극복할 능력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주 재미있는 구절이 나옵니다.
(막6:48)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들이 노를 젓느라고 몹시 애쓰는 것을 보셨다. 바람이 거슬러서 불어왔기 때문이다.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를 걸어서 그들에게로 가시다가, 그들을 지나쳐 가려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오셔서 그냥 지나가려 하십니다. 성경이 왜 그런 표현을 쓸까요?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표현을 쓰는 곳이 몇 군데 나옵니다. 그 표현은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을 때 쓰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 하나님의 속성이 드러나는 것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십자가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까? 십자가에는 죄를 가까이 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이 나타났습니다. 죄는 그렇게 저주하여 죽여 버리실 수밖에 없으신 하나님의 거룩입니다.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실 수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나타났습니다. 창세기부터 약속해 오신 하나님의 언약이 신실하게 이루어지는 장면이었습니다.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사랑하심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이 그대로 투영된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지나가신다는 표현은 바로 그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는 표현입니다.
(출34:6) 주께서 모세의 앞으로 지나가시면서 선포하셨다. "주, 나 주는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노하기를 더디하고,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풍성한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 모세 앞으로 지나가시면서 그 분의 속성을 말씀하십니다. 그 분이 지나실 때는 그 하나님의 속성이 뚝뚝 떨어지는 것입니다.
(왕상19:11) 주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곧 나 주가 지나갈 것이니, 너는 나가서, 산 위에, 주 앞에 서 있어라." 크고 강한 바람이 주 앞에서 산을 쪼개고, 바위를 부수었으나, 그 바람 속에 주께서 계시지 않았다.
왜 역풍이 부는 풍랑의 현장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지 아십니까? 우리의 인생의 고난과 환난, 그리고 죄로 인한 고통은 정말 우리가 견디기 힘든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현장에서 하나님을 체감할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버린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내 곁에 계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계시는 구나.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잘 못을 저질렀을 때 우리를 향한 징계의 채찍을 맞으며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역풍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느끼고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구체적으로 묘사된 대표적인 곳이 어디입니까?
(사6:1-3)
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나는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뵈었는데, 그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 차 있었다.
2 그분 위로는 스랍들이 서 있었는데, 스랍들은 저마다 날개를 여섯 가지고 있었다.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발을 가리고, 나머지 둘로는 날고 있었다.
3 그리고 그들은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화답하였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의 영광이 가득하시다.
웃시야 왕이 죽고 유대가 영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위기 상황을 맞고 있을 때입니다.
(겔1:26-28)
26 또 그들의 머리 위에 있는 창공 모양의 덮개 위에는, 청옥처럼 보이는 보석으로 만든 보좌 형상을 한 것이 있었고, 그 보좌 형상 위에는, 사람의 모습과 비슷한 형상이 있었다.
27 또 나는 그의 허리처럼 보이는 그 위쪽에서 금붙이의 광채와 같은 것이 불꽃처럼 안팎으로 그를 둘러싼 것을 보았는데, 그의 허리처럼 보이는 그 아래쪽에서도, 나는 불꽃과 같은 모양을 보았다. 이렇게 그는 광채로 둘러싸여 있었다.
28 그를 둘러싼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 속에 나타나는 무지개 같이 보였는데, 그것은 주의 영광이 나타난 모양과 같았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그 때에 말씀하시는 이의 음성을 내가 들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모조리 끌려가고 처참하게 황폐하게 된 상황에서 바벨론 그발 강가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이렇게 우리의 인생의 역풍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20C 위대한 설교자 중의 한 사람인 “랄프 카이퍼”가 아주 눈이 나빴다고 합니다. 설교자가 눈이 나쁘다는 것은 아주 치명적입니다. 공부할 때도 힘들고 설교 원고를 볼 때도 아주 힘이 듭니다. 랄프 카이퍼는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제가 다른 이유로 그런 것도 아니고 설교를 하는데 불편해서 그러니 눈을 좀 고쳐 주세요.“
십 수 년을 기도했는데도 눈은 계속 더 나빠졌습니다. 어느 날 요한복음 14장을 묵상하는데 하나님께서 이런 마음을 주셨답니다. 카이퍼야, 너는 네가 눈이 온전히 치료되는 것과 하나님의 영광이 네 삶 속에서 드러나는 것 중 어느 것을 택하겠느냐? 카이퍼는 두 말할 나위 없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 좋지요’ 하고 마음속에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내 마음속에 “내가 너의 삶을 통해 내 영광을 드러내려고 하는데 너는 왜 그것을 막으려 하느냐” 하는 하나님의 책망이 떠오르더랍니다. 그래서 카이퍼는 그 다음부터 자기 눈을 고쳐달라고 한 번도 기도하지 않았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처지나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십니다. 우리는 은연중에 진화론에 많이 물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적자생존, 뛰어난 자가 살아남고 존경 받는다“ 이런 진화론적인 삶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가난하고 못생기고 안 되고 못 난 사람은 교회 안에서도 실패자로 낙인을 찍어 버립니다. 우리는 창조 을 진리로 믿고 있는 자들입니다. 창조론은 이 땅의 모든 창조물은 하나님께서 목적을 가지고 지으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대로 부자인 사람은 부자대로 예쁜 사람은 예쁜 대로 못난 사람은 못 난대로, 마른 사람은 마른대로 뚱뚱한 사람은 뚱뚱한 대로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안에서 창조 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자체를 인정하고 귀하게 여겨 줄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섯 번째 기적이 소경으로 난 자가 보게 되는 이적입니다.
9장에 보면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나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소경이 왜 소경이 된 것이냐고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부모의 죄도 아니고 그 사람의 죄도 아니고 단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소경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 분이 지금 지나가고 계신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소경을 찾아가십니다. 그리고는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 소경의 눈에 바르십니다. 그리고는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십니다. 이 이야기도 영적 소경인 죄인들에게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자신이 저주 받은 흙에 이겨지셔서 그 저주받은 흙이 되어버린 죄인과 연합되어 그 예수 님 자신이 실로암 못에 씻겨 짐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는 복음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전부 그 진흙과 실로암 못이 효험이 있는 것을 생각들을 합니다. 왜 그렇게 많은 신유 은사 자들이 인기인들이 되어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전화 예약까지 하고 가야 겨우 만날 수 있고 아니면 전화로 치료해 주고 헌금은 온라인으로 받기도 한다고 합니다.
설사 신유의 은사를 받아서 병을 고쳤다고 해도 자기는 우리 주님의 능력의 통로 역할을 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왜 신유 은사 자들이 그렇게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닙니까? 복음이 뭔지 정확히 이해도 못한 사람들입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 이적이 죽은 나사로가 살아난 사건입니다. 거기서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사로가 죽은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요11:3-4) 3 그 누이들이 사람을 예수께로 보내서 "주님, 보십시오, 주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이 앓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4 예수께서 들으시고 말씀하셨다.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병이다. 이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사건 역시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와 허물로 죽어있던 죄인들이 죽음을 이기고 승리를 하게 되는 최종적인 정리를 해 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기적은 이것으로 끝입니다. 각 기적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기원과 그 분의 하실 일과 십자가와 복음이 상징 적으로 설명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기적을 몇 가지 보겠습니다.
(마8:1-4)
1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많은 무리가 그를 따라갔다.
2 나병 환자 한 사람이 예수께 다가와 절하면서 "주님, 하고자 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해주실 수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고 "그렇게 해주마. 깨끗하게 되어라" 하고 말씀하시니, 곧 그의 나병이 나았다.
4 예수께서 그에게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드려서, 사람들에게 증거로 삼도록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를 고치시는 장면입니다. 3절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문둥병자에게 “내가 원 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누구의 역할을 하고 계신 것입니까?
(레14:2-9)
2 "다음은 악성 피부병에 걸린 환자를 정하게 하는 날에 지켜야 할 규례이다. 사람들이 악성 피부병에 걸린 환자를 제사장에게로 데려가면,
3 제사장은 진 바깥으로 나가서, 그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 환자의 악성 피부병이 나았으면,
4 제사장은 사람들을 시켜서, 그 환자를 정하게 하는 데 쓸, 살아 있는 정한 새 두 마리와 백향목 가지와 홍색 털실 한 뭉치와 우슬초 한 포기를 가져 오게 한다.
5 그리고 제사장은 사람들을 시켜서, 그 두 마리 새 가운데서 한 마리를 잡아서, 생수가 담긴 오지그릇에 담게 한다.
6 그렇게 한 다음에, 제사장은 백향목 가지와 홍색 털실 한 뭉치와 우슬초 한 포기와 그리고 그 살아 있는 나머지 새를 가져다가, 생수가 섞인 죽은 새의 피에 찍어서,
7 악성 피부병에 걸렸다가 정하게 된 그 사람에게 일곱 번 뿌린다. 그런 다음에, 제사장은 그에게 '정하다'고 선언하고, 살아 있는 새는 들판으로 날려보낸다.
8 정하다는 선언을 받은 그 사람은 옷을 빨고, 털을 모두 밀고, 물로 목욕을 하면, 정하게 된다. 그리고 진으로 돌아온 뒤에, 그는 이레 동안 장막 바깥에서 살아야 한다.
9 이레째 되는 날에, 그는 다시 털을 모두 밀어야 한다. 머리카락과 수염과 눈썹까지, 털을 다 밀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옷을 빨고 물로 목욕을 하면, 그는 정하게 된다.
레위기 율법에 문둥병이 정결케 되기 위해서는 제사장에게 살아있는 새 두 마리를 가지고 가서 한 마리를 죽여서 그 피를 다른 새의 날개에 묻히고 그 새를 날려 버리는 의식을 합니다. 죄가 죽고 그 죽은 자의 생명을 산새에게 묻혀 자유롭게 날려 보내는 것이 레위기의 의식입니다. 복음이지요? 옛 몸이 죽고 새 몸이 되어 자유롭게 날아가게 되는 복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제사장으로서 문둥병자로 대표되는 저주받은 죄인의 죄를 사하여 주시는 장면입니다.
(마8:5-13)
5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셨을 때에, 한 백부장이 다가와서, 그에게 간청하여
6 말하기를 "주님, 내 종이 중풍으로 집에 누워서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7 예수께서 "내가 가서 고쳐 주마" 하고 말씀하셨다.
8 백부장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주님, 나는 주님을 내 집에 모셔 들일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말씀만 해주십시오. 그러면 내 종이 나을 것입니다.
9 나도 상관을 모시는 사람이고, 내 밑에도 병사들이 있어서, 내가 이 사람더러 가라고 하면 가고, 저 사람더러 오라고 하면 옵니다. 또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고 하면 합니다."
10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놀랍게 여기셔서,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지금까지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서는 아무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11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과 서에서 와서,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잔치 자리에 앉을 것이다(그, '기대어 누울 것이다'. 유대인들이 식사할 때 가지는 자세).
12 그러나 이 나라의 아들들은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서,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13 그리고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일이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각에 그 종이 나았다.
백부장의 하인의 병을 낫게 하시는 것을 잘 보면 이 장면에서는 예수님께서 율법과 은혜를 설명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서 네 하인을 고쳐 주리라 하시니까 백부장이 뭐라고 합니까? “내가 감당치 못 하겠습니다“ 합니다. 마치 베드로가 ”주여, 내가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나를 떠나소서.“ 한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는 자기도 부하가 있어서 오라 하면 오고 가라하면 가며 하라하면 한다고 자기에게도 그렇게 해 달라고 합니다.
잘 보시면 백부장은 하인의 병을 낫게 하겠다는 목적보다 예수께서 어떻게 하시든 그것에 따르겠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병을 낫게 해 주시지 않으면 그대로 만족할 것이고 낫게 해주시면 감사하며 만족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그 백부장을 칭찬하시면서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2 그러나 이 나라의 아들들은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서,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와서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믿음을 가진 자들이 와서 천국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율법과 혈통의 선민의식을 가진 이스라엘의 믿음을 꾸짖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신 이적은 은혜로 얻는 구원과 행위를 의지한 외식을 날카롭게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마가복음의 기적을 몇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막8:22-26)
22 그리고 그들은 벳새다로 갔다. 사람들이 눈먼 사람 하나를 예수께 데려와서, 손을 대어 주시기를 간청하였다.
23 예수께서 눈먼 사람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 두 눈에 침을 뱉고, 그에게 손을 얹으시고서 "무엇이 보이느냐?" 하고 물으셨다.
24 그 사람이 쳐다보고서 말하기를 "사람들이 보입니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다니는 것 같습니다" 하였다.
25 그 때에예수께서는 다시 그 사람의 두 눈에 손을 얹으셨다. 그런 다음에, 그가 뚫어지듯이 바라보더니, 시력을 회복하여 모든 것을 똑똑히 보게 되었다.
26 예수께서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시며 말씀하시기를 "마을로 들어가지 말아라(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마을 안에 있는 어느 누구에게도 말을 하지 말아라'가 첨가되어 있음) " 하셨다.
예수님께서 칠(七)병(餠) 이어로 4000명을 먹이시자 바리새인들이 또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한탄하십니다.
(막8:11-12) 11 바리새파 사람들이 나와서는, 예수에게 시비를 걸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예수를 시험하느라고 그에게 하늘로부터 내리는 표적을 요구하였다.
12 예수께서는 마음 속으로 깊이 탄식하시고서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아무 표적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한탄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셔서 제자들 더러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그 말씀은 조금 전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또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하신 것을 경계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누룩이라는 것은 해로운 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민속 메시야, 그러니까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힘 있는 메시야가 와서 다시 화려한 다윗 왕국을 재건 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진짜 메시아라면 그에 걸 맞는 힘의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 한 것입니다. 그들이 요구하는 그런 표적은 예수께서 보여 주시지 않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그런 잘 못된 메시야 관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누룩 이야기를 하시니까 자기들이 빵을 한 개밖에 안 가져 와서 나무라시는가 보다 하고 자기들끼리 수군 거렸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면서 그 소경을 고쳐 주시는 사건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오병이어나 칠(七)병(餠) 이어로 많은 군중들을 먹이신 것은 바리새인들이나 제자들의 생각처럼 이제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실 메시아 왕국의 전주곡이 아니라 참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만 영적 굶주림이 해결 될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해 주시려 했던 것인데 제자들이 여전히 이 땅의 떡으로 다투는 것을 보시고 그들에게, 아니 우리 교회에게 교훈을 주시는 것입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시는데 역시 침을 뱉어서 그 눈에 바르시고 (그 죄인과 연합 되셔서) 그 눈을 고쳐 주십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그 소경이 잘 보지 못합니다. 사람을 보고도 나무 같은 것이 걸어간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두 번째 안수해서 또 치료해 주십니다. 그제 서야 잘 보이게 된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렇게 우매하고 더딘 제자들의 영적 진보에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기다려 주신다는 것을 메시지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그들을 환하게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보는 것처럼 진리 앞에 세우실 것을 천명하시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마가복음 5장의 거라사 광인의 이야기가 나오지요? 그 이야기는 단순히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는 기적을 행하신 것을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거라사 광인의 이야기도 역시 demon possession귀신들의 소유였던 죄인들을 예수께서 건져내셔서 제자를 삼으시는 복음에 대한 진술입니다.
(막5:1-8)
1 그들은 바다 건너편 거라사(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겔게사' 또는 '가다라' 또는 '가자라') 사람들의 지역으로 갔다.
2 예수께서 배에서 내리시니, 곧 악한(그,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 하나가 무덤 사이에서 나와서, 예수와 만났다.
3 그는 무덤 사이에서 사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묶어 둘 수 없었다.
4 여러 번 쇠고랑과 쇠사슬로 묶어 두었으나, 그는 쇠사슬도 끊고 쇠고랑도 부수었다. 아무도 그를 휘어잡을 수 없었다.
5 그는 밤낮 무덤 사이나 산 속에서 살면서, 소리를 질러 대고, 돌로 제 몸에 상처를 내곤 하였다.
6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엎드려서
7 큰소리로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제발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하고 외쳤다.
8 그것은 예수께서 이미 그에게 "악한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거라" 하고 명하셨기 때문이다.
그 귀신 들린 사람에 대한 묘사를 잘 보시면 첫째로 그 사람은 옷을 벗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게 죄인들의 공통점입니다.
죄인들은 부끄러운 죄를 지으면서도 그게 부끄러운 것인지 모릅니다. 심지어 그런 것을 자랑삼아 이야기합니다. 교도소에 가보면 모여 앉아서 자랑하는 게 얼마나 많은 돈을 사기 쳤나? 얼마나 많은 여자를 울렸나? 얼마나 비싼 물건을 도둑질했나? 내가 얼마나 잔인하게 사람을 때렸었나? 이런 것들을 자랑삼아 이야기합니다. 그게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 귀신들린 사람은 무덤 가운데 삽니다. 무덤에는 죽은 사람밖에 없습니다. 무덤에서는 사람 썩는 냄새밖에 나지 않습니다. 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 자기들의 의만 드러내는 썩어 가는 시체들 틈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그 귀신들린 사람은 힘이 있습니다. 쇠사슬을 끊어내는 힘이 있습니다. 아무도 그를 제어하지 못합니다. 죄인들은 힘이 있습니다. 돈, 권력, 명예, 지식 이런 것을 자기만을 위한 힘으로 씁니다. 그런데 그 힘은 자신을 파괴해 가는 힘입니다.
5절에 보시면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게 하고 있더라.’ 는 구절이 있지요?
인류의 문명이 결국은 인간을 아주 가치 없고 값싼 존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인간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키운 힘은 결국 자신을 파멸시키고야 마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 이외에 자신이 힘이라고 여기고 있고 자신의 존재의 안전과 행복을 맡기고 있는 모든 것은 다 마귀의 속임수 인 것입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우상을 섬기는 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섬겨야 할 자들이 우상에게 자기 존재의 안전과 행복을 맡겨 버리는 것, 그것을 우상을 섬긴다고 하고 그런 자들을 무덤 사이에 사는 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65:1-5)
1 "나는 응답할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아직도 내게 요청하지 않았다. 누구든지 나를 찾으면, 언제든지 만나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다. 내 이름을 부르지도 않던 나라에게, 나는 '나 여기 있다. 나 여기 있다' 하고 말하였다.
2 제멋대로 가며, 악한 길로 가는 반역하는 저 백성을 맞이하려고 내가 종일 팔을 벌리고 있었다.
3 이 백성은 동산에서 우상에게 제사하며, 벽돌 제단 위에 분향하여, 내 앞에서 늘 나를 분노하게 만드는 백성이다.
4 그들은 밤마다 무덤 사이로 다니면서, 죽은 자의 영들에게 물어 본다. 돼지고기를 먹으며, 이방 제삿상에 올랐던 고기 국물을 마신다.
5 그러면서도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멀찍이 서 있어라, 우리는 거룩하니, 너희가 우리에게 닿아서는 안 된다. 가까이 오지 말아라' 하고 말하는 백성이다. 이런 자들을 내가 참지 못한다. 그들을 향한 나의 분노는 꺼지지 않는 불처럼 타오른다.
이렇게 우상을 섬기는 자들을 가리켜 무덤 사이에 사는 자들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리고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자기 몸을 상하게 합니다. 어디서 봤지요?
갈멜 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자해를 하면서 바알의 대답을 기다립니다.
그러니까 귀신들린 자는 바로 세상의 가치인 우상 속에서 그 것이 진짜 가치인 줄 착각하고 살아가는 모든 죄인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demon possession 된 자에게 예수께서 오십니다. 예수가 오셔서 그 귀신들을 돼지 떼에다 몰아 넣으셔서 바다에 넣어 몰살을 시키십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장면이지요? 홍해에서 애굽이 모두 빠져 몰살당하는 장면입니다.
왜 이스라엘만 구원하시면 되지 애굽을 다 몰살시키십니까? 애굽은 당시 세계 최강의 나라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고 매력 있는 것의 상징입니다. 충분히 인간들이 자신의 힘이라고 여길 수 있는 것들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을 바다에 넣어 몰살시키시는 것입니다. 왜 하필 돼지인지 아세요? 유대인들에게 있어 가장 부정한 짐승이 돼지였습니다. 그래서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돼지피로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했던 것입니다. 그 돼지 같은 우상들, 세상의 가치들을 모조리 바다에 몰살시키시는 것입니다. 이 이적은 우리의 구원은 그렇게 거짓 가치들로부터 벗어나서 참 가치를 찾게 되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사건인 것입니다.
(사41:21-24)
21 주께서 말씀하신다. "민족의 신들아, 소송을 제기하여 보아라." "너희는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여 보아라."
22 이리 와서, 장차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우리에게 말하여 보아라. 지난날에 있었던 일들이 어떤 것이었는지, 말하여 보아라. 그러면 우리가 그것들을 살펴 그 결과를 알아보겠다. 아니면, 앞으로 올 일들을 우리에게 말하여 보아라.
23 장차 올 일들을 말하여 보아라. 그러면 우리가, 너희들이 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복을 내리든 화를 내리든, 좀 하여 보아라. 그러면, 우리가 모두 놀라며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24 참으로 너희는 아무것도 아니며, 너희가 하는 일도 헛것이니, 너희를 섬겨 예배하는 자도 혐오스러울 뿐이다.
우리가 가치라고 여기고 있는, 힘이라고 여기고 있는 우상은 전부 신기루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오셔서 그 모든 우상들을 일거에 몰살시키시고 우리를 참 진리 앞에 서게 하시는 것이 바로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건짐을 받은 자들이 바로 “제자“라는 것입니다.
(막5:18-20)
18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예수와 함께 있게 해 달라고 애원하였다.
19 그러나 예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집으로 가서, 가족에게, 주께서 너에게 큰 은혜를 베푸셔서 너를 불쌍히 여기신 일을 이야기하여라."
20 그는 떠나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일을 가볼리에 전파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다 놀랐다.
주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거나 병을 낫게 하신 후에 한번도 “나가서 너에게 일어난 일을 자랑하라“고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이 사람에게만 가서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셨는지 고하라고 하십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이 이방인 데가볼리에서 전도를 합니다. 20절의 ”전파하니“라는 말”케릿소“는 ”설교하다, 전도하다”라는 뜻입니다.
전에는 누구에게 그러한 일을 맡기셨지요?
(막3:14)
예수께서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고 이름하셨다.] 이것은, 예수께서 그들을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그들을 내보내어서 말씀을 전파하게 하시며 제자들에게 맡기셨던 그 일을 이 거라사 광인에게도 맡기시는 것입니다.
(고후4:5)
5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선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따르므로, 우리를 여러분의 종으로 내세웁니다.
같은 단어입니다. 그는 최초로 이방에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의 모형으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이 갖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빛에 어둠이 물러가듯이 마귀의 세력은 쫓겨 가고 그 세력에서 건짐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마12: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영을 힘입어 귀신을 내쫓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왔다.
그리고 같은 마가복음 5장에 열두 해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막5:25-34)
25 그런데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앓아 온 여자가 있었다.
26 여러 의사에게 보이면서, 고생도 많이 하고, 재산도 다 없앴으나, 아무 효력이 없었고, 상태는 더 악화되었다.
27 이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서, 뒤에서 무리 가운데로 끼어 들어와서는, 예수의 옷에 손을 대었다.
28 (그 여자는 "내가 그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나을 터인데!" 하고 생각 했던 것이다.)
29 그런 다음에 곧 출혈의 근원이 마르니, 그 여자는 몸이 나은 것을 느꼈다.
30 예수께서는 곧 자기에게서 능력이 나간 것을 몸으로 느끼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아서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31 제자들이 예수께 "무리가 선생님을 에워싸고 떠밀고 있는데, 누가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십니까?" 하고 반문하였다.
32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렇게 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셨다.
33 그 여자는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므로, 두려워하여 떨면서, 예수께로 나아와 엎드려서 사실대로 다 말하였다.
34 그러자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안심하고 가거라. 그리고 이 병에서 벗어나서 건강하여라."
혈루증이라는 것은 정상적인 생리현상이 아닌 지속적인 자궁 출혈(disfunctional uterine bleeding)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시 철분이 함유된 비타민도 없었을 것이고 먹는 것도 부실한 시대에 12년 동안 하혈을 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여자는 거의 시체나 다름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은 많은 의원을 찾아다녔지만 그 병은 더 중하여 졌습니다.
26 여러 의사에게 보이면서, 고생도 많이 하고, 재산도 다 없앴으나, 아무 효력이 없었고, 상태는 더 악화되었다.
돈도 다 써버렸습니다. 당시에는 그 혈루증에 좋다는 약으로, 타조의 알을 갈아서 베옷에 넣고 다니면 된다거나 흰 암나귀의 똥 안에 들어있는 보리알을 지니고 다니면 낫는다거나 하는 민간 처방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타조나 흰 암 나귀는 구하기가 너무 어려운 것이어서 돈이 많이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 모든 것을 다 해 보았지만 허사였고 병은 더 중하게 되었다고 기록한 것은 가장 최악의 상태라는 것을 마가가 강조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레위기 율법에 보면 혈루증을 앓는 여인들은 부정한 여인으로 취급을 받았습니다.
(레15:6-8)
6 고름을 흘리는 남자가 앉았던 자리에 앉는 사람들도, 그 옷을 빨아야 하고, 물로 목욕을 하여야 한다. 그래도 그는 저녁때까지 부정하다.
7 고름을 흘리는 남자의 몸에 닿는 사람들도, 모두 그 옷을 빨고 물로 목욕을 하여야 한다. 그래도 그는 저녁때까지 부정하다.
8 고름을 흘리는 남자가 뱉은 침이 깨끗한 사람에게 튀면, 침 묻은 그 사람은 옷을 빨고 물로 목욕을 하여야 한다. 그래도 그는 저녁때까지 부정하다.
이렇게 혈루증을 앓는 여자는 문둥병자처럼 마을에서 함께 살수도 없었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도 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사력을 다해서 엉금엉금 기어서 예수님의 겉옷 가를 만졌습니다. 병행구절인 마태복음으로 가보겠습니다.
(마9:20) 그런데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뒤에서 예수께로 다가와서, 예수의 옷술에 손을 대었다
겉옷 가가 어디냐면 겉 옷 맨 아래의 옷 술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 성인 남자들이 입던 겉옷은 그 옷 맨 아래에 술을 달았습니다. 그 옷 술은 율법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옷 술을 보면서 율법을 다시 상기하고 묵상하고 하기 위하여 옷 술을 달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에 의해 정 죄를 받아야 하는 한 부정한 여인이 그 율법을 잡은 것입니다. 그 여인은 그 율법에 의하면 정 죄를 받아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여인에게 믿음이 있었습니다.
(막5:34) 그러자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안심하고 가거라. 그리고 이 병에서 벗어나서 건강하여라."
어떤 믿음이었습니까? 자신은 부정하여 죽을 수밖에 없지만 예수님의 거룩을 의지하여 살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그 여인은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30절을 보시면
(막5:30) 예수께서는 곧 자기에게서 능력이 나간 것을 몸으로 느끼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아서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 여인이 예수님의 옷 가를 만지자 예수님에게서 능력이 나갔다고 기록을 합니다.
예수님은 능력을 100정도 충전하고 다니시면서 병을 고치실 때마다 능력이 조금 씩 조금씩 나가는 그런 능력을 갖고 계신 분입니까? 여기서 말하는 “능력“”뒤나미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 “메시아로서의 권세”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죽어야 할 부정한 자가 죽고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로 새 사람으로 살아나는 부활을 설명하는 것이 바로 이 열두 해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그 여인은 그 영광의 주님의 권세를 그 자리에서 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여인의 혈루증이 나았는데도 그 여인은 그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 앞에서 벌벌 떱니다.
(막5:32-33)
32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렇게 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셨다.
33 그 여자는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므로, 두려워하여 떨면서, 예수께로 나아와 엎드려서 사실대로 다 말하였다.
왜 병이 나았는데 기쁘게 펄펄 뛰지 않고 두려워 떱니까?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물 한 가득 고기를 잡았을 때 기뻐서 펄펄 뛰지 못하고 “주여 나를 떠나소서.”라고 이야기 한 장면하고 똑 같지요? 아까 백부장이 “주여, 내가 감당치 못 하겠나이다”하고 말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죄인들은 그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게 되면 경외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인들에게 주어질 새 생명, 구원의 이야기를 혈루증 여인을 통해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혈루증증 여인을 만나실 때 어디로 급히 가고 계시던 중이었습니다. 바로 회당 장 야이로의 딸이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급히 가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과 이야기하는 도중에 그만 그 야이로의 딸이 죽고 말았습니다.
(막5:34-35)
34 그러자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안심하고 가거라. 그리고 이 병에서 벗어나서 건강하여라."
35 예수께서 말씀을 계속하고 계시는데,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따님이 죽었습니다. 이제 선생님을 더 괴롭혀서 무엇하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이미 병이 나은 혈루증 앓던 여인에게 굳이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 지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조급해하는 야이로에게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36절에서 한 번 더 야이로에게 믿음을 강조 하십니다.
(막5:36) 예수께서 이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서, 회당장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자, 이 이야기는 어떤 메시지를 주는 것일까요?
야이로가 어떻게 예수 을 알았습니까? 어떻게 그 분이 죽어 가는 자기 딸을 살리실 것을 믿고 그 분을 모시고 가는 것입니까? 야이로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소문이 믿겨졌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먼저 들음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역경을 통해서 살아있는 믿음으로 자라납니다. 야이로는 믿고 자기 집으로 가는 길에 믿음의 시련을 만나게 됩니다. 그 바쁜 와중에 혈루증 앓는 여인이 나타나서 예수님의 갈 길을 지체하게 만들었습니다. 바로 그 시간에 야이로의 딸이 죽습니다. 야이로는 허탈했을 것입니다. 이제 다 끝났구나. 나는 이제 절망이구나.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아니, 믿는 것도 어느 정도 실낱같은 것이라도 남아있어야 믿는 것이지 이제 딸이 숨이 끊어졌는데 뭘 믿으라는 것입니까?” 왜 이런 생각이 안 들었을까요? 생각해 보세요.12살 먹은 딸이 이제 곧 시집도 가야하고 손자도 보여주고 할 그런 딸이 죽을병이 들어서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찾아간 예수라는 사람이 오는 길에 지체하는 바람에 자기 딸이 죽었습니다. 야이로는 이제 완전한 절망 속으로 빠져들어 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주님은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나사로의 누이들에게도 일부러 늦게 가시고는 “너희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하고 말씀하셨지요? 왜 주님은 그런 절망 속으로 몰아넣으시고 거기서 믿음을 요구하실까요?
우리의 믿음은 자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자라고 자라서 죽음을 이기는 믿음으로 자라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뭉개서 없애버리신 그 사망을 이기는 믿음을 우리가 우리 안에 실력으로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 죽음을, 사망을 이기는 믿음은 역경을 통해서 자라나는 것입니다.
도저히 절망적인 상황인데 하나님이 개입하시니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그렇게 자라나는 것입니다. 세상 모두가 너희를 버려도 하나님은 안 버리신다는 믿음이 바로 그러한 역경 속에서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왜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주마고 약속하시고 그가 100세가 될 때까지 기다리십니까? 도저히 가망이 없는 상태까지 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위해서입니다. 왜 한나의 태를 그렇게 오랫동안 닫으셨다가 여시는 지 아십니까? 한나의 믿음을 위해서입니다. 야이로에게도 절망 속에서 그러한 믿음이 요구됩니다. 야이로는 절망 속에서도 끝까지 주님을 모시고 자기 집으로 갑니다. 그 믿음이 딸을 살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소녀에게 가셔서 “달리다 굼“ ”소녀야 일어나라“ 하고 아람어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소녀가 살아났습니다.
그렇게 역경을 통해 자라난 믿음이 사망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메시지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야이로의 딸과 혈루증 앓던 여인의 이야기에서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하나님 앞에서는 빈부귀천이 없다는 것입니다. 누가 더 소중하고 누가 덜 소중하고의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둘 다 믿음으로 치유가 된 것입니다. 그 믿음에는 유지인 회당장의 것이나 저 부정하고 가난한 혈루증 여인의 것이나 차이가 없다는 것을 이 두 이야기를 통해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의 귀신을 쫓아주신 사건과 귀먹고 말이 어눌한 자를 고치시는 사건입니다.
(막7:24-30)
24 예수께서 거기에서 일어나셔서, 두로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에 들어가셨는데, 아무도 그것을 모르기를 바라셨으나,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25 악한 귀신 들린 딸을 둔 여자가 곧바로 예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의 발 앞에 엎드렸다.
26 그 여자는 그리스 사람으로서, 수로보니게 출생인데,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내쫓아 주시기를 예수께 간청하였다.
27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이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아이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28 그러나 그 여자가 예수께 말하기를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개들도 아이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하였다.
29 그래서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돌아가거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
30 그 여자가 집에 돌아가서 보니, 아이는 침대에 누워 있고, 귀신은 이미 나가고 없었다.
먼저 24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자신을 숨기시려고 하시는 대목이 나옵니다. 왜 이런 표현이 나왔을까요? 지금 마가는 예수께서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사45:14-15)
14 주께서 말씀하신다. "이집트가 수고하여 얻은 재물과 에티오피아가 장사하여 얻은 이익이 너에게로 넘어오고, 키 큰 스바 사람들이 너에게로 건너와서 네 밑으로 들어와 너를 따를 것이며, 사슬에 매여 와서 네 앞에 엎드리고, 너에게 기도하는 것처럼 이르기를 '과연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 그 밖에 다른 이가 없습니다. 다른 신은 없습니다' 할 것이다."
15 구세주, 이스라엘의 하나님, 진실로 주께서는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15절에 하나님은 숨어서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하나님이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왜 하나님은 숨어서 이스라엘을 지키십니까? 죄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면 즉사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막으로 그들과 함께 계시기로 하셨습니다. 성막 안에 숨어 계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 수로보니게 여인이 알아본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병행구절에 보면, 그 여인이 예수님을 가리켜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부릅니다. 그리고는 자기 딸에게 들린 귀신을 쫓아 달라고 간청합니다.
예수님께서 아주 매몰차게 “자녀의 떡을 취해서 개에게 주는 것이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전에도 설명해 드렸지만 구속사의 진행상 유대인에게 먼저 구원이 있다는 것이지 유대인과 이방인을 차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구속사를 진행시키시면서 유대인을 먼저 택하셔서 그들을 데리고 교회를 설명하시고 그들의 실패로 전체 인간의 실패를 보여주시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 없이 교회가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 구속사입니다. 그렇지만 구약 시대에는 어찌 되었든 이스라엘 민족 안으로 들어와야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므로 예수께서 이스라엘을 자녀라고 하시고 이방인을 개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랬더니 이 여인이 ”맞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습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이야기의 뜻은 ”예수 님, 그래도 당신은 모압의 룻과 여리고의 라합과 아람의 나아만을 건지시지 않으셨습니까? 나에게도 그 떡 부스러기를 허락하소서.”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떡이 뭡니까?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당신으로 말미암아 주어질 그 복을 우리에게도 달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 여인의 말대로 귀신을 쫓아 주십니다. 숨어 계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안에 그 여인을 숨기시는 것입니다.
(시27:5-6)
5 재난의 날이 오면, 주의 초막 속에 나를 숨겨 주시고, 주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감추시며, 반석 위에 나를 올려서 높여 주실 것이니,
6 그 때에 나는 나를 에워싼 저 원수들을 내려다보면서, 머리를 높이 치켜들겠다. 그의 장막에서 환성을 올리며 제물을 바치고, 악기를 가지고 주님을 찬양하겠다.
우리의 구원은 그렇게 숨어 계신 주님 안으로 우리를 숨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 안에서 안전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안에 숨겨진 자로서 당연히 예수의 수난의 삶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의 기적이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는지 아시겠지요?
(막7:31-37) 31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서, 데가볼리 지역 가운데를 지나, 갈릴리 바다에 오셨다.
32 그런데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손을 얹어 주시기를 간청하였다.
33 예수께서 그를 무리로부터 따로 데려가서, 손가락을 그의 귀에 넣고, 침을 뱉어서,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34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보시고서 탄식하시고,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에바다" 하셨다. (그것은 '열리라'는 뜻이다.)
35 그러자 곧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똑바로 하였다.
36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명하셨으나, 말리면 말릴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퍼뜨렸다.
37 사람들이 몹시 놀라서 말하기를 "그가 하시는 일은 모두 훌륭하다. 듣지 못하는 사람도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하신다" 하였다
타락한 죄인들은 하나님의 빛을 보지 못하는 영적 소경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해 낼 수 있는 영적 청각을 상실한 자들입니다. 아무리 논리 정연하게 정리를 해서 복음을 설명해도 사람들은 못 알아듣습니다. 그걸 알아듣는 사람은 옆에서 가슴을 칩니다. “왜 그걸 못 알아들어?“ 그런데 못 알아듣습니다.
(슥7:11-13)
11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으나, 사람들은 듣지를 않고, 등을 돌려 거역하였다. 귀를 막고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12 사람들은 마음이 차돌처럼 굳어져서, 만군의 주께서, 이전 예언자들에게 당신의 영을 부어 전하게 하신 율법과 말씀을 듣지 않았다. 그래서 만군의 주께서 크게 노하셨다.
13 주께서 부르셨으나, 그들은 듣지 않았다. "그렇다. 이제는 그들이 부르짖어도, 내가 결코 듣지 않겠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렘6:10) 제가 말하고 경고한들 누가 제 말을 듣겠습니까? 그들은 귀가 막혀 주의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주께서 하신 말씀을 전하면 그들은 저를 비웃기만 합니다. 말씀 듣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행7: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 당신들은 언제나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당신네 조상들이 한 그대로 당신들도 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죄인들은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사랑하고 세워주고 살리는 말을 하지 못합니다. 깎아 내리고 험담하고 욕하고 하는 데만 혀가 빠릅니다. 죄인들은 하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말이 어눌합니다.
(잠18:21)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으니, 혀를 잘 쓰는 사람은 그 열매를 먹는다.
제발 남 욕하지 마세요. 험담하지 마세요. 좋은 말을 하도록 노력하세요. 세워주고 높여주고 사랑해 주는 말들을 하세요. 여러분은 여러분의 그 혀의 열매를 먹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그를 따로 데리고 한적한 곳으로 가십니다. 주님께서 그의 외로움과 고적함과 소외됨에 동참하시는 것입니다. 'incarnation'입니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그의 귀에 넣으시고 손에 침을 뱉어 그의 혀에 갖다 대십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바로 그 귀머거리 말이 어눌한 자와 연합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이 그의 저주받은 질병을 가져오시고 예수님의 그 거룩을 그에게 덮어 씌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그 분 안에 숨겨지는 것이며 그 분과 연합되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가 듣고 말을 합니다.
이 사건은 그러한 영적 귀머거리 말이 어눌한 자인 죄인들 속으로 incarnation 하셔서 그들과의 연합을 통해서 죄인들의 저주를 예수께서 가져오시고 예수님의 거룩을 그의 백성들에게 선물하시는 복음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질고를 다 아시고 체휼하셨습니다.
(사53:3)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고, 그가 멸시를 받으니, 우리도 덩달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히4:15)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범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처럼 소경이 되시고 우리처럼 귀머거리가 되시고 우리처럼 어눌한 자가 되시고 우리처럼 문둥병자가 되셔서 죽으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가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그가 아픔이 되셔서 우리가 나은 것이고 그가 귀머거리가 되심으로 우리의 귀가 뚫리는 것입니다. 그가 벙어리가 되시면서 우리에게 온전한 혀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의 죄가 되셔서 죽으신 것입니다.
(고후5:21) 하나님께서는 죄를 모르신 분에게, 우리 대신에 죄를 씌우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우리가 외쳐야 할 그 비명을 우리 주님께서 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나음을 입고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것을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사35:6-10)
6 그 때에 다리를 절던 사람이 사슴처럼 뛰고, 말을 못하던 혀가 노래를 부를 것이다.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 시냇물이 흐를 것이다.
7 뜨겁게 타오르던 땅은 연못이 되고, 메마른 땅은 물이 쏟아져 나오는 샘이 될 것이다. 승냥이 떼가 뒹굴며 살던 곳에는, 풀 대신에 갈대와 왕골이 날 것이다.
8 거기에는 큰길이 생길 것이니, 그것을 '거룩한 길'이라고 부를 것이다. 깨끗하지 못한 자는 그리로 다닐 수 없다. 그 길은 오직 그리로 다닐 수 있는 사람들의 것이다. 악한 사람은 그 길로 다닐 수 없고, 어리석은 사람은 그 길에서 서성거리지도 못할 것이다.
9 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도 그리로 지나다니지 않을 것이다. 그 길에는 그런 짐승들은 없을 것이다. 오직 구원받은 사람만이 그 길을 따라 고향으로 갈 것이다.
10 주께 속량받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들이 기뻐 노래하며 시온에 이를 것이다. 기쁨이 그들에게 영원히 머물고, 즐거움과 기쁨이 넘칠 것이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질 것이다.
여러분들이 살펴보셨듯이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든 기적은 예수께서 바로 이 천국, 하나님 나라이시며 그 하나님 나라를 우리에게 선물하시기 위해 오신 분이시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성경이 완성이 되었고 그 기적들이 모두 기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이렇게 밝히 계시가 되었습니다. 이제 부정한 것과 부정하지 않은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깨끗해 졌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부정하고 저주받은 자의 상징으로 나타났던 병든 자, 문둥이, 소경, 귀머거리, 말 어눌한 자,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시면서 부정한자, 저주받은 자들을 정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 이상 기적으로 신유로 설명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물론 자녀가 병들어 기도할 때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사랑하심이 그 병을 치유하실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초대교회 때처럼 하나의 은사로서 존재할 필요는 없어진 것입니다. 여러분은 제발 그러한 신비주의 좇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놓치지 마시고 그 기적들이 설명하려고 했던 예수를 더 열심히 명확하게 공부하십시오.
간단하게 정리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성경을 근거로 올바른 신앙 위에 서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기분이나 감정, 경험 같은 것에 흔들리게 되고 마귀는 거짓 기분, 거짓 감정, 거짓 체험으로 우리를 미혹할 것입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기분이나 감정으로 하는 사람들이 신비주의에 쉽게 빠지게 됩니다.
병 고침을 받거나, 귀신을 쫓아내거나, 은 이빨이 금이빨이 되는 그런 신비한 경험들에 심취하게 되어 그리스도인들이 정작 추구해야 할 것을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건 마귀의 장난입니다.
우리가 장시간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질병을 고치신 것은 죄로 말미암아 들어 온 사망의 증상들인 질병과 귀신들림 같은 것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다 몰아내시고 사망을 죽여 버리실 것이라는 하나의 표적이었던 것입니다. 성경에 정확하게 나옵니다.
(사53:4)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메시아에 관한 예언이지요? 여기서 질고‘호리’가 질병입니다. 예수께서 사망의 증상인 질병을 다 짊어지고 죽으실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그 예언이 마태복음에서 성취됩니다.
(마8:16-17)
16 날이 저물었을 때에, 사람들이 귀신 들린 사람을 많이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 예수께서는 말씀으로 귀신을 내쫓으시고, 또 병자를 모두 고쳐 주셨다.
17 이것은 예언자 이사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었다. "그는 몸소 우리의 병약함을 떠맡으시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셨다.
즉 예수께서 일으키신 기적들은 모두 구원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행했던 기적들도 역시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지금도 살아 계셔서 그 분의 사역을 계속하고 계심을 증거 하는 계시의 차원이었지 사도들에게 임한 어떤 능력을 보여준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바울 같은 사람은 사랑하는 디모데의 위장병도 못 고칩니다. 성경이 완성이 되면서 그러한 기적들이 무엇을 의미한다는 것이 백일하에 밝혀졌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의 기적이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짊어져야 할 질병과 죽음, 귀신들림 같은 사망의 증상들을 모두 예수께서 짊어지시고 우리는 그러한 사망에서 자유로워지는 구속의 메시지가 그 기적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귀신이 쫓겨 가고 질병이 치유되는 현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물러가게 되는 사망의 세력을 그림으로 보여주는 현장인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그러한 질병의 치유나 축귀, 기적 같은 것을 보면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사망으로부터의 자유, 즉 구원의 기쁨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질병과 귀신들림, 죽음 같은 것들은 사실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세상 사람들을 총칭하는 개념들입니다. 우리가 귀신들림 하면 벌벌 떨면서 입에는 거품을 물고 예수님을 욕하고 하는 것들을 떠올립니다. 그건 정신이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귀신들림의 정확한 정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이 세상의 풍속과 원리를 좇아 복음과 반대되는 삶을 살고 있는 모든 세상 사람들을 귀신 들렸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질병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암에 걸리고 불치병에 걸리는 것을 질병이라고 정의하지만 성경 적 관점의 질병은 ‘예수를 알지 못하는 영적 불구자, 영적 감염자들을 질병을 가진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날 교회에서 ‘귀신이 나갔다. 질병이 치유되었다.‘ 라는 것은 단순히 암이 낫고 정신병이 치유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알지 못하던 사람이 예수를 알게 되는 사건을 ’질병치유, 축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귀신을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노라고 광고하고 다니는 사람들은 뭡니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눈에 보이는 감정과 기분을 자극해서 진짜 은혜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귀신 들린 자들’인 것입니다.
그들이 귀신 들린 자들입니다. 다시 한 번 표적에 있어 중요한 구절인 마태복음 12장 39절을 보겠습니다.
(마12:39)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요구하지만, 이 세대는 예언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아무 표적도 받지 못할 것이다
보세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눈에 보이는 표적을 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사단에게 붙들려 있는 귀신들린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보이시는 모든 표적은 요나의 표적,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살아나신 것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진짜 복이 뭡니까? 영생입니다. 우리가 병 고침을 받는다고 해서 다시 병에 안 걸리나요? 정신이상자가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고 해서 영원히 삽니까?
오히려 우리가 병에 걸렸을 때 ‘우리는 영원한 존재가 아니며 결국 육신은 썩어질 유한한 것이구나, 그러니까 우리가 진정 소망해야 하는 곳은 저 하늘나라구나‘라는 것을 느끼고 배웠다면 그게 복인 것입니다. 거기에 진정한 영적 기쁨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침으로 우리가 마땅히 영적으로 얻어 누려야 할 기쁨을 육 적 기쁨으로 바꾸어 버린다면 그게 어찌 귀신들린 자가 아니겠습니까?
마귀는 항상 복음에 의한 영적 기쁨이 아닌 육 적 기쁨을 세상에 쏟아 부음으로써 영적 기쁨을 맛보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기적 같은 것 좇지 마세요. 뭘 또 보고 싶으세요? 여러분은 보지 않아도 실체로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이 있지 않습니까?
그 믿음을 공고히 하십시오.
제15장 신비주의와 기복주의
(막7:1-23)
1 바리새파 사람들과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 몇 사람이 예수께로 몰려왔다.
2 그들은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 몇 사람이 부정한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빵을 먹는 것을 보았다.
3 -바리새파 사람과 모든 유대 사람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켜, 규례대로 손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았으며,
4 1)또 시장에서 돌아오면, 정결하게 하지 않고서는 먹지 않았다(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또 시장에서 돌아오면, 정결하지 않게 하고서는 먹지 않았다'가 없음). 그 밖에도 그들이 전해받아 지키는 규례가 많이 있었는데, 그것은 곧,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대를(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침대'가 없음)
씻는 일이다.-
5 그래서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왜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이 전하여 준 관습을 따르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6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이사야가 너희 같은 위선자들을 두고 적절히 예언하였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은 입술로는 나를 공경해도,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7 그들은 사람의 훈계를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예배한다.'
8 너희는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관습을 지키고 있다."
9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의 관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
10 모세가 말하기를 '네 아버지와 네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하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하였다.
11 그러나 너희는 말한다. 누구든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게서 받으실 것이 고르반(곧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되었습니다' 하고 말만 하면 그만이라고 말한다.
12 그러면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그 이상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하게 한다.
13 너희는 너희가 물려받은 관습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헛되게 하며, 또 이와 같은 일을 많이 한다."
14 예수께서 다시 무리를 가까이 부르시고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15 무엇이든지 사람 밖에서 몸 속으로 들어가는 것으로서 그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16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 사람을 더럽힌다.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절 끝에 '들을 귀가 있는 사람들은 들어라'가 첨가되어 있음)
17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셨을 때에, 제자들이 그 비유를 두고 물었다.
18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도 아직 깨닫지 못하느냐? 밖에서 사람의 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19 밖에서 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지, 사람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뱃속으로 들어가서 뒤로 나가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이런 말씀으로 모든 음식은 깨끗하다고 하셨다.
20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21 나쁜 생각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데, 곧 음행과 도둑질과 살인과
22 간음과 탐욕과 악의와 사기와 방탕과 악한 시선과 모독과 교만과 어리석음이다.
23 이런 악한 것이 모두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힌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서 저 북쪽 끝에 있는 갈릴리 지방까지 원정을 왔습니다. 무엇 때문에 왔을까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러 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제자 중 몇 명이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장로들의 유전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다가 귀환을 한 뒤 자기들에게 그러한 환난이 닥친 것이 율법을 잘 지키지 않아서 그렇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더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율법을 더 잘 지켜내기 위해 그 율법을 해석하여 더 많은 조항으로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미쉬나”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더욱 세분하여 쪼갠 것을 우리가 탈무드라고 합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에게 모세 오경만큼의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장로들의 유전인데, 그 장로들의 유전에 어떤 것이 있었느냐 하면 제사장들이 성전에 제사를 지내러 들어 갈 때에 반드시 손을 씻고 들어가야 한다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일반인들에게도 확산이 되어서 일반인들도 음식을 먹을 때 반드시 손을 씻어야 한다는 것이 장로들의 유전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밥을 먹으니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어찌하여 저들은 부정하게도 손도 씻지 않고 밥을 먹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너희들을 부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나오는 것이 너희를 더럽게 하는 것이라고 인간의 죄 성을 지적하십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밖에서 들어가는 음식물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처해진 상황이라든지 우리의 여건, 우리의 경험, 체험, 노력 같은 외부의 모든 것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너희 신앙의 내용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많은 분들이 신앙의 내용을 자기의 체험이나 경험이나 노력 등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큰 경험을 했느냐? 내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을 했느냐? 로 신앙의 경중을 가늠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기적적인 체험을 하고 당면했던 문제가 해결이 되고 우리가 드렸던 기도가 응답이 되고 하는 것은 신앙에 도움을 줄 수 있는 한 방법이 되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 것 자체가 신앙의 내용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용이 되어버리면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내가 얼마나 많은 기도의 응답을 받았는가? 내가 얼마나 많은 체험을 했는가? 내가 얼마나 노력을 하고 있는가?”로만 따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내 기도의 응답이 더 큰 것이냐, 당신의 기도 응답이 더 큰 것이냐를 가지고 경쟁을 하게 되고, 내가 겪은 체험이 더 큰 것이냐, 당신이 겪은 체험이 더 큰 것이냐를 가지고 우열을 가르게 됩니다. 그래서 간증 같은 것들도 점점 더 자극적이 되어져 가고, 아주 파렴치하고 지저분한 과거를 가진 사람들이 오히려 더 많은 은혜를 받은 사람들처럼 취급이 되어져서 어떻게 하면 자기 과거를 더욱 더 자극 적으로 꾸밀까 고민하는 사람까지도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겨우 무좀 나은 것 가지고 “발이 썩어 들어가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기도의 응답으로 고쳐 주셨다”라든지 겨우 동네 양아치 노릇 좀 한 것 가지고 “자기가 과거에 조폭 두목이었었다.” 라든지 그런 터무니없는 거짓말들을 하게 됩니다. 신앙의 내용은 그러한 밖의 것으로 정의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자기가 가진 체험이나 경험이나 노력으로 신앙을 정의하고 있는 사람들은 진짜 기적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병 이어의 기적 이후에 더 자극적인 기적을 원하며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너희가 표적을 본 것이 아니라 떡 먹고 배불러서 날 찾아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그러한 외적인 체험이나 경험으로 신앙을 정리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은 많은 기적을 체험했다고 우길지 모르나 구원이라는 진정한 기적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이런 이야기를 들으시면서 “맞아, 예수 믿는 사람들은 광신자가 되어서는 안 돼, 예수를 믿으려면 곱게 믿어야지 무슨 기적이나 쫓아다니고, 체험이나 하려고 하고 그러면 안 되지” 그러면서 “주님, 저는 저런 자들처럼 엉터리 신앙을 갖지 않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면 누가 되는 것입니까? 바리새인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 두 종류의 사람들이 전혀 반대의 사람들 같지만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그 둘은 똑같이 자기가 소유한 것으로 신앙을 정리하는 사람들입니다. 한쪽은 내가 얼마나 큰 경험과 체험을 했는가? 이지만 다른 쪽은 내가 얼마나 바르게 신앙생활하고 있는가, 내가 얼마나 인격적이고 교양이 있는가라는 자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착한 행실을 했는가? 우리가 얼마나 열심을 냈는가? 우리가 얼마나 큰 체험을 했는가?“ 그런 것으로 우리의 신앙을 정의하는 것은 구원이 무엇인가를 정말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러한 체험과 종교행위의 목록들은 우리의 목표지점이 아닙니다. 그것이 우리를 선하게 할 수도 없고 구원할 수도 없으며 우리를 더럽게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 너희를 더럽게 할 수 없느니라.“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믿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무엇을 신앙해야 하는 것입니까?
(렘17:9)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아주 썩은 것은 사람의 마음이니, 누가 그 속을 알 수 있습니까?
이러했던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서 완전히 뜯어내고 새 마음을 창조해 내셨습니다.
(겔36:25-28) 25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맑은 물을 뿌려서 너희를 정결하게 하며, 너희의 온갖 더러움과 너희가 우상들을 섬긴 모든 더러움을 깨끗하게 씻어 주며,
26 너희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고 너희 속에 새로운 영을 넣어 주며, 너희 몸에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살갗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며,
27 너희 속에 내 영을 두어, 너희가 나의 모든 율례대로 행동하게 하겠다. 그러면 너희가 내 모든 규례를 지키고 실천할 것이다.
28 그 때에는 내가 너희 조상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살아서,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완전히 새로운 마음으로 창조하셔서 우리를 바꿔 놓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셔서 하늘을 맛보게 하시고 그 성령이 우리에게 율례를 행하게 만드시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 일이 가능하게 만든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며 그 분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과 부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새 마음을 우리에게 창조해 주셨다고 하는데 그 새 마음이 무슨 마음입니까?
이제 착한 일만 할 수 있게 만드는 그런 마음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아직 안착하잖아요?
그 새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고전2:9-16) 9 그러나 성경에 기록한 바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에 떠오르지 않은 것들을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마련해 주셨다" 함과 같습니다.
10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이런 일들을 우리에게 계시하셨습니다. 성령은 모든 것을 살피시니, 곧 하나님의 깊은 경륜까지도 살피십니다.
11 사람 속에 있는 사람의 영이 아니고서야, 누가 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하나님의 생각을 깨닫지 못합니다.
12 우리는 세상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들을 깨달아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13 우리가 이 선물들을 말하되, 사람의 지혜에서 배운 말로 하지 않고, 성령이 가르쳐 주시는 말로 합니다. 곧 신령한 것으로 신령한 것을 설명합니다(또는 '신령한 것을 신령한 사람들에게 설명합니다' 또는 '신령한 것은 신령한 언어로 설명합니다')
14 자연에 속한(또는 '신령하지 아니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에 속한 일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이런 일들이 어리석은 일이요, 그런 사람은 이런 일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이런 일들이 영적으로만 분별되기 때문입니다.
15신령한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서도 판단을 받지 않습니다.
16"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습니까? 누가 그분을 가르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그 새 마음이 어떤 마음입니까?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의 마음까지 알아서 그 예수님을 기뻐하고 설명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체험이나 경험이나 노력이나 선행이나 열심으로 시작되는 것도 아니고 자라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셔서 성령께서 그 새 마음을 가지고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렘17:1) 1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 판과 그들의 단 뿔에 새겨졌거늘
(표준 새 번역)
"유다의 죄는 그들의 마음 판에 철필로 기록되어 있고, 금강석 촉으로 새겨져 있다. 그들의 제단 뿔 위에도 그 죄가 새겨져 있다.
이런 마음을 새 마음으로 바꿔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 그 예수님의 마음에 맞는 삶을 향해 그들의 인생 전체의 방향을 바꾸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왜 기적이 필요하며 왜 자극적인 체험이 필요합니까? 그 새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 안 믿어지니까 자꾸 기적을 보려 하고 신비한 체험을 하려하고 하는 것입니다.
비근한 예로 왜 사람들이 방언을 하고 싶어 합니까?
그냥 교리 적인 지식만 가지고는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뭔가 화끈한 체험이 있으면 신앙이 한 단계 더 높아 질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다 하는데 나만 못하고 있다는 자괴감 같은 것이 방언을 하고 싶다는 욕구를 부채질합니다. 그래서 예전에 삼각산 기도원 같은 곳에서는 방언을 연습하고 가르치는 방이 따로 있었을 정도입니다. 저 아래쪽에 있는 어떤 큰 교회에서는 구역 예배 때 방언을 못하는 사람을 따로 갈라서 “할렐루야”를 가지고 방언을 연습시키고 한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뭔가 신앙적인 우월감을 방언으로 뽐내고 싶어 합니다.
우리가 앞에서 배웠듯이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고 그 은혜를 가슴으로 깨달은 사람들은 절대 누구에게 자기 신앙이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성경지식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어떤 자리에서 구원을 받았는지 아는 자가 어떻게 남의 부족함을 지적하고 정죄를 합니까? 신자라는 사람들이 나는 남보다 조금이라도 낫다는 우월감을 가질 수 있습니까? 아무리 자기가 외적으로 가진 게 많다 하더라도, 성경도 많이 공부했고 성경도 많이 읽었고 교회도 오래 다녔고 봉사도 남보다 더 많이 했고 헌금생활도 열심히 했다고 해서 그것이 남보다 내가 조금 나은 근거가 된다면 그건 은혜라는 단어의 의미도 제대로 못 파악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남들과 비교해서 꿀리지 않으려고 방언을 하고 싶어 한다면 그 분은 아직 멀어도 한 참 먼 분입니다.
칼빈이 방언했다는 소리 들어보셨습니까? 루터가 방언을 했나요? 어거스틴이 방언을 했습니까?
방언을 안 해도 예수 잘 믿고 천국 간다고요. 지금 방언이 있다 없다 에 대해서는 제가 논하지 않겠습니다. 솔직히 모르겠어요.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지 않는 것을 제가 저의 주관으로 우길 수는 없으니까요. 다른 종교에도 다 방언이 있고 종교적인 특별히 종교적인 열심이 있는 사람들에게서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그것을 극단 적인 세대주의 자들처럼 “마귀가 주는 것이라는 둥”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도 고3 때부터 방언을 했었고 지금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저에게 방언은 매력 없는 울림에 불과합니다. 저희 집사람은 생전 배워 보지도 않은 중국말로도 방언을 합니다. 그게 도대체 뭘까요?
그러나 그 효용성에서는 제가 꼭 여러분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방언을 비롯한 은사들의 목적이 뭐였습니까?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고전14:12) 이와 같이 여러분도 성령의 은사를 갈구하는 사람들이니, 여러분은 교회에 덕을 세우도록, 그 은사를 더욱 풍성하게 받기를 힘쓰십시오.
고린도 교회에 은사가 참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은사가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그 은사로 우 열반으로 갈렸습니다. 은사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특별한 은사를 가진 자와 조금 부실한 은사를 가진 자 특별한 은사와 부실한 은사가 어디 있겠습니까만 그들이 생각하기에 예언이나 방언이나 신유의 은사 같은 것은 조금 세 보이잖아요? 그래서 그런 구분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은사 때문에 오히려 교회에 분란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 전서 12장부터 은사에 대해 설명하면서 12장과 14장 사이에 사랑 장이라고 불리는 고린도 전서 13장을 끼워 넣은 것입니다. “아무리 대단한 은사라 할지라도 사랑을 근거로 하지 않으면 모두 헛것이다.“ 라는 것이죠. 아무리 천사의 말을 한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즉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들이 하는 것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만일 방언을 하는 것이 다른 사람을 주눅 들게 하거나 그 방언을 하는 사람 자신이 그 것으로 교만해 진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은사가 아니겠지요? 제가 한번 여쭤 볼게요. 이제 막 방언을 시작하신 분이 여기 계신 걸로 아는데 그런 분들 말고, 그런 분들은 지금 한창 신기하고 재미있고 자랑하고 싶으실 때이니까 조금 더 즐기시고, 그런 분들 말고 저나 저희 집사람처럼 10년 20년 방언을 해 오신 분들에게 여쭤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 여러분의 신앙에 어떤 유익을 주던가요?
‘방언으로 기도를 하면 오래 기도할 수 있다.’ 그게 유익입니까? ‘방언으로 기도하면 그것은 영적 언어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더 잘 알아들으신다.’그게 정말 맞아요? 그럼, 사람 말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이 조금 덜 쳐주시는 기도입니까? ‘방언으로 기도하면 기도하다가 할 말이 생각 안 나면 방언으로 얼버무릴 수 있다.’ 그게 유익입니까? 어떤 유익이 있으세요. 제가 다 해본 겁니다. 제 경우에는 남들한테 자랑 할 게 있다는 것 외에 아무런 유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안 합니다.
방언이라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워낙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여러분이 잘 아시는 고린도전서 14장으로 가서 좀 더 설명을 해드리고 넘어가겠습니다. 그동안 방언 못 해서 주눅 들어 계시던 분들 오늘 기 좀 펴세요.
(고전14:1-9) 1 사랑을 추구하십시오. 신령한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특히 예언하기를 열망하십시오.
2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은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아무도 그것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는 성령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입니다.
3 그러나 예언하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인데, 덕을 세우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을 합니다.
4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은 자기에게만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사람은 교회에 덕을 세웁니다.
5 나는 여러분 모두가 방언으로 말할 수 있기를 바라지마는, 그보다도 예언할 수 있기를 더 바랍니다. 누가 방언을 통역하여 교회에 덕을 세우게 해주지 못하면,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보다, 예언하는 사람이 더 훌륭합니다.
6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로 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교훈이나, 이런 것으로 말하지 않으면, 여러분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7 피리나 거문고 같이 생명이 없는 악기도, 음색이 각각 다른 소리를 내지 않으면, 피리를 부는 것인지, 수금을 타는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8 또 나팔이 분명하지 않은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겠습니까?
9 이와 같이 여러분도 방언을 사용하여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면, 그것이 무슨 말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결국 여러분은 허공에다 대고 말하는 셈이 될 것입니다
여기에 보시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게 ‘너희는 예언하기를 힘써라’하고 권면을 합니다.
그가 말하는 예언은 우리가 배웠다시피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에 관한 계시를 말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때는 아직 계시가 완성되기 이전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임했습니다. 그들은 그 것을 예언과 방언으로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통해 하나님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래서 방언에는 반드시 통역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 때의 방언은 모든 방언이 그랬던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통역이 된 방언은 곧 예언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아무 방언이나 예언이 모두 다 채택이 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통역이 없는 방언은 제재를 받았고 예언도 교회의 분변을 통해 걸러졌습니다.
(고전14:27-30) 27 누가 방언으로 말할 때에는, 둘 또는 많아야 셋이서 말하되 차례로 말하고, 한 사람은 통역을 하십시오.
28 통역할 사람이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에게와 하나님께 말하십시오.
29 예언하는 사람은 둘이나 셋이서 말하고, 다른 이들은 그것을 분별하십시오.
30 그러나 앉아 있는 다른 사람에게 계시가 내리거든, 먼저 말하던 사람은 잠잠하십시오.
여기까지만 정리를 해 보자고요. 하나님은 아직 계시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의 초대 교회에 예언과 방언으로 계시를 주셨습니다. 예언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었던 계시였고 방언은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계시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반드시 방언에는 통역을 붙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통역 없는 방언보다는 예언을 하라‘고 권고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방언이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은 아니었고 예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방언과 예언은 반드시 교회에서 걸러져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그냥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예언만 주시면 되지 방언을 함께 주셔서 통역을 붙이게 하셨을까요? 구약 성경에서 방언이라는 것은 항상 ‘너희는 심판 받을 존재다’라는 것을 보일 때 등장했던 것입니다.
(사28:1-3,11-12) 1 술 취한 자, 에브라임의 교만한 면류관인 너 사마리아야, 너에게 재앙이 닥칠 것이다. 술에 빠진 주정꾼의 도성, 기름진 평야의 높은 언덕에, 화려한 왕관처럼 우뚝 솟은 사마리아야, 시들어 가는 꽃 같은 너에게 재앙이 닥칠 것이다.
2 주께서 강하고 힘 있는 이를 보내신다. 그가 마치 쏟아지는 우박처럼, 파괴하는 광풍처럼, 거센 물결을 일으키는 폭풍우처럼, 너를 잡아 땅에 쓰러뜨리실 것이다.
3 술 취한 자, 에브라임의 교만한 면류관인 너 사마리아야, 네가 짓밟힐 것이다.
11 그러므로 주께서는 알아듣지 못할 말씨와 다른 나라 말로 이 백성을 가르치실 것이다.
12 주께서 전에 백성에게 말씀하셨다. "이 곳은 평안히 쉴 곳이다. 고달픈 사람들은 편히 쉬어라. 이 곳은 평안히 쉴 곳이다." 그러나 그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이 구절은 이사야가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들어 에브라임을 심판하실 것임을 예언하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할 때 앗수르를 들어서 이스라엘을 치셨습니다. 그 이스라엘을 치러 들어 온 앗수르 군사가 한 말이 바로 방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원래 ‘방언‘은 심판을 그릴 때 등장했던 단어였습니다.
그 내용을 바울이 인용 해다가 고린도서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고전14:21-22) 21 율법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사람의 혀와 외국 사람의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공격하게 할지라도), 그들은 나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하셨습니다.
22 그러므로 방언은 신자들에게 주는 표적이 아니라, 불신자들에게 주는 표적이고, 예언은 불신자들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22절 보시면 방언은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라고 나오지요? 이게 무슨 말이겠습니까?
방언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심판을 받게 될 자 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자들아, 너희들은 진노의 심판에 던져지게 될 것이다’라는 표적으로 주시는 것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반면에 예언은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에 대한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고요.
(창11:6-9) 6 주께서 말씀하셨다. "보아라, 만일 사람들이 같은 말을 쓰는 한 백성으로서, 이렇게 이런 일을 하기 시작하였으니, 이제 그들은,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이 거기에서 하는 말을 뒤섞어서,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8 주께서 거기에서 그들을 온 땅으로 흩으셨다. 그래서 그들은 도시 세우는 일을 그만두었다.
9 주께서 거기에서 온 세상의 말을 뒤섞으셨다고 하여, 사람들은 그 곳의 이름을 바벨('바빌론'을 가리킴. '뒤섞다'라는 뜻을 지닌 발랄과 바빌론을 뜻하는 바벨의 발음이 비슷함) 이라고 한다. 주께서 거기에서 사람들을 온 땅에 흩으셨다.
여기도 나오지요? 언어가 혼잡하게 되어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은 곧 심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방언이라는 것이 담고 있는 의미는 ‘나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자들아, 너희는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이게 방언이 담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그 방언을 알아듣고 계시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이 바로 초대 교회 때 방언을 주신 이유인 것입니다. 그래서 ‘방언이 교회에 유익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역이 있어야 한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방언은 자기에게는 덕이 될지언정 교회에는 전혀 유익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고린도 전서 14장 4절입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그래서 바울은 계속해서 방언보다는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강조하고 또 강조합니다.
(고전14:14-15) 14 내가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은 기도하지만, 나의 이성은 아무런 열매를 얻지 못합니다.
15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나는 영으로 기도하고, 또 이성으로도 기도하겠습니다. 나는 영으로 찬미하고, 또 이성으로도 찬미하겠습니다
잘 보시면 ‘방언은 영이 기도하는 것이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 구절 때문에 방언을 못하는 사람들이 기가 많이 죽었었지요? 그러나 이 구절이 담고 있는 내용의 초점은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이 구절은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과 방언으로 찬양을 하는 것은 전 인격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전인격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난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기도하고 찬양하겠다는, 다른 말로 전인격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양하겠다는 바울의 강력한 의지가 담긴 구절입니다.
14절에 보시면 ‘영’이라고 번역이 된 ‘프뉴마’ 앞에 ‘나의’ 헬라어로는 ‘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영’‘프뉴마’가 사람에게 쓰이게 되면 그 단어는 ‘영’이라는 뜻보다는 ‘원초적인 능력’이라는 단어로 쓰입니다.
그리고 마음이라고 번역이 된 ‘누스’라는 단어는 ‘정신 혹은 내적인 성향, 도덕적 상태’를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이 14절 15절의 정확한 내용은 ‘내가 방언으로 기도하면 그 기도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특별한 능력으로 기도하는 것이긴 하지만 나의 전인격을 사용하여 기도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방언이 아닌 내가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는 말로 기도하고 찬양함으로 전인격으로 기도하고 찬양할 것이다’입니다.
이렇게 초대 교회에 주어진 방언은 분명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은사였지만 어떤 제한적 목적을 위해 주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모두가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었던 예언은 교회 전체에게 유익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를 끌고 갑니다.
(고전14:19) 그러나 나는, 교회에서 방언으로 만 마디 말을 하는 것보다도,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내 이성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을 원합니다
다섯과 일만을 대조하고 있지요? 여기서도 방언과 예언이 극명하게 대조가 되고 있습니다.
알아듣지 못하는 일만 마디 방언보다 이해하고 깨달은 다섯 마디 예언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사람들이 그 풍성한 방언의 은사가 자기들에게 왜 주어졌는지는 생각지 않고 단지 방언을 하는 것을 자랑만 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 것을 심지어 ‘악’이라고 부릅니다.
(고전14:20) 형제자매 여러분, 생각하는 데는 아이가 되지 마십시오. 악에는 아이가 되고, 생각하는 데는 어른이 되십시오.
바울은 은사를 자랑하는 그러한 이기심과 자랑을 이렇게 악으로 규정짓습니다. 그리고는 그러한 은사를 추구하느라 정작 하나님을 아는 지혜의 성숙을 놓치고 있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예언을 통한 영적 성숙을 재차 강조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은사가 주어졌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자기의 몸 된 교회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시고 지금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스리고 계시다는 증거로 은사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구에게 은사가 임했다는 것은 ‘성도는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받은 은사를 자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가당치 않은 일이냐는 것입니다.
성경은 어떤 특별한 은사를 소유한 사람을 ‘신앙이 좋은 사람 혹은 성숙한 신앙인’이라고 부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유독 오늘날에는 무슨 신유은사나 방언, 예언 이런 것을 하는 사람들이 훌륭한 신앙인으로 둔갑을 해 버렸습니다.
(고전3:1)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영에 속한 사람에게 말하듯이 여러분에게 할 수 없어서, 육에 속한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에게 말하듯이 하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렇게 은사가 풍성했던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어린아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은사는 오히려 어린 신앙인들에게 힘내서 교회의 자라남에 기여하라고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지 결코 자랑의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까 계시를 받는다고 하는 자들이나 방언이나 예언을 자랑하고 있는 사람들은 믿음의 방패가 담고 있는 내용과는 정 반대의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왜 제가 믿음의 방패를 설명하면서 ‘예언과 계시’를 끌고 들어왔는지 아시겠지요?
분명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예언의 계시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지만 오늘날 만연하고 있는 그러한 예언과 계시는 믿음과는 정 반대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려드리기 위해 그렇게 한 것입니다. 믿음의 방패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준비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성경의 계시와 예언은 심판과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것이지 절대 사람의 길흉화복이나 미래를 점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언은 죄를 드러내고 하나님을 경배하게 하는 힘이 있다고 결론을 맺는 것입니다.
(고전14:23-25) 23 온 교회가 한 자리에 모여서 방언으로 말하면, 초신자나 불신자가 들어와서 듣고, 여러분을 미쳤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24 그러나 모두가 예언을 하면, 불신자나 초신자가 들어와서 듣고, 모든 사람에게서 질책을 받고 모든 사람에게서 심판을 받아서,
25 그 마음 속에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엎드려서 하나님께 경배하면서 "참으로 하나님께서 여러분 가운데 계십니다" 하고 선언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계시, 예언은 죄인들을 책망하고 숨은 것을 드러나게 하고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히4:12-13)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양날칼보다도 날카로워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 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향을 가려 냅니다.
13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고, 모든 것이 그의 눈 앞에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앞에 모든 것을 드러내 놓아야 합니다.
그렇게 그 하나님의 말씀을 방언으로 듣던 자들이 어느 날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깨닫게 되어 주님께 돌아오는 것을 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슥8:22-23) 22 수많은 민족과 강대국이, 나 만군의 주에게 기도하여 주의 은혜를 구하려고, 예루살렘으로 올 것이다.
23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그 때가 되면, 말이 다른 이방 사람 열 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붙잡고 '우리가 너와 함께 가겠다.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신다는 말을 들었다' 하고 말할 것이다."
우리 성도들은 바로 이 예언을 입으로 삶으로 전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우리의 예언 (prediction)이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으로 들리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심판을 받을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예언, 방언‘이러한 것들을 무슨 이상한 소리하는 것이나 앞일을 점치는 것 정도로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여러분이 만일 방언을 하신다면 그 방언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방언으로 들리는 자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으시면서 어떻게 나에게는 그 방언이 이렇게 이해가 되어지게 되었는가를 감사하시면 되는 것이고, 방언을 하지 못하는 분들도 누군가가 방언을 하거든 ’나는 어떻게 저러한 방언으로 들려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게 되었는가?’ 감사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인 예언을 통해 믿음을 더욱 공고히 다지셔서 어떠한 마귀의 화전에도 쓰러지지 않는 용사가 되셔야 합니다.
성경은 마지막 때가 되어갈수록 하나님의 말씀이 방언이 되어갈 것임을 확실하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암8:11-14) 11 그 날이 온다. 나 주 하나님이 하는 말이다. 내가 이 땅에 기근을 보내겠다. 사람들이 배고파 하겠지만, 그것은 밥이 없어서 겪는 배고픔이 아니다. 사람들이 목말라 하겠지만, 그것은 물이 없어서 겪는 목마름이 아니다. 주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서, 사람들이 굶주리고 목말라 할 것이다.
12 그 때에는 사람들이 주의 말씀을 찾으려고 이 바다에서 저 바다로 헤매고, 북쪽에서 동쪽으로 떠돌아다녀도, 그 말씀을 찾지 못할 것이다.
13 그 날에는 아름다운 처녀들과 젊은 총각들이 목이 말라서 지쳐 쓰러질 것이다.
14 사마리아의 부끄러운 우상을 의지하고 맹세하는 자들, '단아, 너의 신이 살아 있다', '브엘세바야, 너의 신이 살아 있다' 하고 맹세하는 자들은 쓰러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 말씀이 어디에 붙어있는 말씀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아모스를 통해 수많은 재앙들을 선포하셨습니다. 불을 보내어 궁궐들을 사르리라고 하시고 적이 침략할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비가 내리지 않아 마실 물을 구하려 비틀거리며 찾고, 풍재와 깜부기와 팟종이로 곡식들과 과일들을 다 먹게 하시고, 전염병과 칼의 죽임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재앙들은 돌아오라는 경고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언하는 선지자로 하여금 예언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자기들은 제사장이 있고 단과 벧엘에 제단이 있고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와 악기로 노래하는 것과 월삭과 안식일을 지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샤 같은 제사장이
나라와 왕과 백성들을 위하여 축복하고 있으니 자기들은 마음 든든하다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 있는 북 이스라엘에 황 충과 불과 다림줄과 여름실과의 환상을 통하여 그 심판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황충과 불의 심판은 아모스가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찌 서리이까?‘ 하면서 중보를 하자 그 심판을 거두십니다. 그러나 다림줄의 환상과 여름실과의 환상과 9장에서 마지막 환상인 기둥머리를 치시는 것에서는 더 이상의 돌이킴이 없습니다. 심판이 그대로 시행될 뿐입니다. 이것은 갈수록 재앙이 그 강도가 세어지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재앙의 끝, 다른 말로 가장 심각하고 무시무시한 재앙이 무엇인지 아세요? 그게 지금 읽은 아모스 8장 11절 이하인 것입니다.
한 날이 이를 것인데, 그 한 날은 심판의 날을 의미합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말씀을 거두어 버리셔서 말씀의 기갈을 일으키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게 인류의 가장 큰 재앙입니다.
(겔7:1-6,26-27) 1 주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2 "너 사람아, 이스라엘에게 전하여라. 나 주 하나님이 이스라엘 땅을 두고 말한다. '끝이 왔다. 이 땅의 사방 구석구석에 끝이 왔다.
3 이스라엘아, 이제는 너희에게 끝이 왔다. 나는 이제 너희에게 내 분노를 쏟고, 너희 행실에 따라 너희를 심판하며, 너희의 역겨운 일들을 너희에게 보응하겠다.
4 내가 너희를 아끼지도 않고, 불쌍히 여기지도 않겠다. 오히려 나는 너희의 모든 행실에 따라 너희를 벌하여, 역겨운 일들이 바로 너희의 한가운데서 벌어지게 하겠다. 그 때에야 비로소 내가 주인 줄 너희가 알게 될 것이다.'"
5 주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1)재앙이다. 너희가 들어보지 못한 재앙이다. 이미 다가왔다. 6 끝이 왔다. 너희를 덮치려고 일어났다. 이미 다가왔다.
26 재앙에 재앙이 겹치고, 불길한 기별이 꼬리를 물 것이다. 그 때에는 사람들이 예언자에게 묵시를 구하여도 얻지 못할 것이며, 제사장에게는 가르쳐 줄 율법이 없어질 것이고, 장로들에게서는 지혜가 사라질 것이다.
27 왕은 통곡하고, 지도자들은 절망에 빠지고, 이 땅의 백성은 무서워서 벌벌 떨 것이다. 내가 그들의 행실대로 그들에게 갚아 주고, 그들이 심판받아야 하는 그대로 그들을 심판하겠다. 그 때에야 그들이 비로소 내가 주인 줄 알게 될 것이다."
이게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왜 사람들이 굶어죽습니까? 먹을 것이 모자라서 굶는 건가요?
왜 사람들이 전쟁을 하지요? 모두다 그들의 죄와 탐욕 때문입니다.
왜 인간들이 그들의 죄와 탐욕에서 벗어나지 못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못 알아듣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한 방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이렇게 서로에게 총을 들이대고 멸망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 받을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구한다할지라도 자기들 취향에 맞는 하나님 말씀만 구합니다. 아모스 8장 14절 보세요.
(암8:14) 사마리아의 부끄러운 우상을 의지하고 맹세하는 자들, '단아, 너의 신이 살아 있다', '브엘세바야, 너의 신이 살아 있다' 하고 맹세하는 자들은 쓰러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스라엘이 사마리아로 단으로 브엘세바로 말씀을 구하러 다녔지만 그 곳에서 그들이 섬긴 것은 금 송아지였습니다. 이렇게 심판을 받을 자들은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든든한 우상을 붙들고 안심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왜 예언을 비롯한 엉뚱한 기적과 신비를 좇는 것이 믿음의 방패를 갖는 것과 상극인지 아시겠지요?
(딤후4:1-4) 1 나는 하나님 앞과,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분의 나타나심과 그분의 나라를 두고 엄숙히 명령합니다.
2 그대는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하게 힘쓰십시오. 끝까지 참고 가르치면서, 책망하고 경계하고 권하십시오.
3 때가 이르면, 사람들이 건전한 교훈을 받으려 하지 않고,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들으려고, 자기네 욕심에 맞추어 스승을 끌어들일 것입니다.
4 그들은 진리를 듣지 않고, 허탄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 이야기할 것 없이 우리를 한 번 보자고요. 우리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고 그 말씀을 따라 이 세상의 우상들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만을 좇아 살고 있나요?
혹시 여러분도 하나님의 말씀이 여전히 방언으로 들리는 그 심판 받을 사람들과 방불하게 살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여러분도 혹시 그 대 재앙에 노출되어 계시지는 않으세요?
그래서 여러분에게 믿음의 방패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더 궁금해 하시고 알려고 노력하시고 신앙생활에 더 진지해지셔야 합니다.
그렇게 말씀에 열심을 낼 때에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새로 넣어 주신 그 새 마음을 하나하나 까서 보여 주십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점점 더 밝게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알게 해 주십니다. 그런데 그 방법은 기적이나 신비적인 체험이 아니라 이런 방법입니다.
(욥7:11-20) 11 그러나 나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습니다. 분하고 괴로워서, 말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습니다.
12 내가 바다 괴물이라도 됩니까? 내가 깊은 곳에 사는 괴물이라도 됩니까? 어찌하여 주께서는 나를 감시하십니까?
13 잠자리에라도 들면 편해지겠지, 깊이 잠이라도 들면 고통이 덜하겠지 하고 생각합니다만,
14 주께서는 악몽으로 나를 놀라게 하시고, 무서운 환상으로 저를 떨게 하십니다.
15 차라리 숨이라도 막혀 버리면 좋겠습니다. 뼈만 앙상하게 살아 있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16 나는 이제 사는 것이 지겹습니다. 영원히 살 것도 아닌데, 제발, 나를 혼자 있게 내버려 두십시오. 내 나날이 허무할 따름입니다.
17 사람이 무엇이라고, 주께서 그를 대단하게 여기십니까? 어찌하여 사람에게 마음을 두십니까?
18 어찌하여 아침마다 그를 찾아오셔서 순간순간 그를 시험하십니까?
19 언제까지 내게서 눈을 떼지 않으시렵니까? 침 꼴깍 삼키는 동안만이라도, 나를 좀 내버려 두실 수 없습니까?
20 사람을 살피시는 주님, 내가 죄를 지었다고 하여 주께서 무슨 해라도 입으십니까? 어찌하여 나를 주의 과녁으로 삼으십니까? 어찌하여 나를 주의 짐으로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침 삼키는 동안에도 우리에게 눈을 떼지 않으시고 우리의 새 마음을 싸고 있는 옛 성품, 죄의 경향, 사륵스, 집착과 중독, 통제성향, 자기 방어 이런 것들을 깨 나가시는 것입니다.
평생을 하나님 없이 하나님과 반대 방향으로 가게끔 훈련되고 익숙해진 근육들을 다 풀어 버리시고 그 반대 방향으로 끌고 가시기 위해 침 삼키는 동안만큼이라도 우리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십니다. 그 세심한 하나님의 배려가 우리에게는 고통으로 느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통과하지 않고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점점 더 밝게 볼 수가 없습니다.
욥이 그 과정을 통과한 후에 “전에는 귀로만 들었던 하나님을 이제 눈으로 뵙습니다.”한 것처럼 우리 교회는 모두 다 그러한 과정을 통과해서 하나님의 마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왜 신비와 기적이 필요합니까?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우리를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울러 외부적인 것들이 우리를 거룩하게 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셔서 하나님이 성숙시키시고 하나님이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난하거나 부자거나 잘생겼거나 못 생겼거나 똑똑하거나 멍청하거나 많은 신비한 체험을 했거나 못 했거나 그런 것에 연연하지 마세요.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여러분이 예수님을 더 알게 되고 예수님의 마음을 더 알게 되셨다면 그게 바로 진짜 기적인 것입니다.
지난번에 우리가 함께 공부한 것처럼 천국은 이 땅에 겨자씨로 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보잘 것 없는 분으로 오셔서 하릴없이 죽어 버리신 것처럼 그렇게 겨자 씨의 모습으로 와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도 그 겨자씨의 삶을 살다가 가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진 체험으로 멋지게 남들 앞에서 자기의 존재를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라 겨자씨처럼 보잘 것 없게 보여 져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진 은사나 재능으로 남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겨자씨처럼 숨겨져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 신비적인 체험이나 비상한 은사로 자신을 증명해 보이시려고 하십니까? 우리는 예수님처럼 숨겨진 겨자씨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왜 사사기의 사사들이 그렇게 하나같이 모자란 사람들로 세워졌습니까? 그게 바로 하나님의 저주를 막아 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모자라 보이지만 성령이 임하시자 백전백승입니다. 그게 우리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나는 감추어지고 하나님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눅13:18-19) 18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은가? 내가 그것을 무엇에다가 비길까? 19 그것은 마치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이 말씀은 에스겔서 17장의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겔17:1-10) 1 주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2 "사람아,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수수께끼를 내고, 비유를 들어 말하여라.
3 너는 그들에게 말하여라.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큰 독수리 한 마리가 레바논으로 갔다. 큰 날개, 긴 깃, 알록달록한 깃털을 가진 그 독수리는 백향목 끝에 돋은 순을 땄다.
4 독수리는 그 연한 햇순을 잘라서, 상인들의 땅으로 물고 가서, 상인들의 성읍에 놓아 두었다.
5 그리고 그 땅에서 난 씨앗을 가져다가, 옥토에 심었다. 시냇가에다가 버드나무를 심듯, 물이 많은 시냇가에 그 씨앗을 심었다.
6 그 씨앗은 싹이 나고, 낮게 퍼지며 자라서, 무성한 포도나무가 되었다. 그 가지들은 독수리에게로 뻗어 올라갔고, 그 뿌리는 땅에 박고 있었다. 그 씨가 포도나무가 되어, 가지를 내뻗고, 덩굴손을 뻗쳤다.
7 다른 큰 독수리 한 마리가 나타났다. 날개가 크고 깃이 많은 독수리다. 그런데 보아라, 이 포도나무가 뿌리를 그 독수리에게로 뻗고, 가지도 그 독수리에게로 뻗는 것이 아닌가! 이 포도나무는 새로 나타난 그 독수리를 보고 옥토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물을 대달라고 하였다.
8 그 포도나무를 옥토, 곧 물이 많은 곳에 심은 것은, 가지를 뻗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포도나무가 되도록 한 것인데, 이 모양이 되고 말았다.'
9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전하여라.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그 포도나무가 무성해질 수 있겠느냐? 그 뿌리가 뽑히지 않겠느냐? 그 열매가 떨어지거나, 그 새싹이 말라 죽지 않겠느냐? 그 뿌리를 뽑아 버리는 데는, 큰 힘이나 많은 군대를 동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10 그러므로 그것을 심어 놓았지만 무성해질 수가 있겠느냐? 동쪽 열풍이 불어 오면 곧 마르지 않겠느냐? 자라던 그 밭에서 말라 버리지 않겠느냐?'"
이 에스겔서 17장의 내용은 바벨론과 유대와 애굽의 이야기입니다.
독수리 두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 중 한 독수리가 포도 씨를 옥토에 심어 그 포도나무가 잘 자랐습니다. 그런데 이 포도나무가 다른 독수리에게 붙어서 물을 달라 하고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씨를 심은 독수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뿌리를 뽑고 말라죽게 만들어 버리지 않겠느냐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유대가 하나님 앞에서 계속 범죄 하자 바벨론을 시켜서 유대를 치게 하셨습니다. 바벨론은 유대의 20대 왕인 여호야긴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그 때 정치인들이나 학자 같은 유대의 지식인들을 함께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그 때 잡혀 간 것입니다. 그리고 바벨론은 자기들 마음에 드는 시드기야 라는 왕을 세우고 조약을 맺었습니다. 유대는 바벨론에게 충성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시드기야가 몰래 애굽에 원조를 구했습니다. 함께 바벨론을 치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남 유대가 바벨론에게 공격을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범죄 하는 남 유대를 깨우시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시드기야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자기 힘과 자기 지혜로 그 난국을 이겨내서 하나님 앞에 떳떳이 서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죄를 회개하는 대신에 자기 힘으로 무언가를 해서 하나님을 감동시키려고 하는 시드기야와 유대를 멸망시켜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BC586년에 바벨론은 남 유대를 멸망시켰고 성전까지 파괴시켜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겔17:22-24) 22 "주 하나님이 말한다. 내가 백향목 끝에 돋은 가지를 꺾어다가 심겠다. 내가 그 나무의 맨 꼭대기에 돋은 어린 가지들 가운데서 연한 가지를 하나 꺾어다가, 내가 직접 높이 우뚝 솟은 산 위에 심겠다.
23 이스라엘의 높은 산 위에 내가 그 가지를 심어 놓으면, 거기에서 가지가 뻗어 나오고, 열매를 맺으며,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이다. 그 때에는 온갖 새들이 그 나무에 깃들이고, 온갖 날짐승들이 그 가지 끝에서 보금자리를 만들 것이다.
24 그 때에야 들의 모든 나무가, 나 주가, 높은 나무는 낮추고 낮은 나무는 높이고 푸른 나무는 시들게 하고 마른 나무는 무성하게 하는 줄을, 알게 될 것이다. 나 주가 말하였으니, 내가 그대로 이루겠다."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기들의 힘과 지혜로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백향 목의 모습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높은 백향 목 꼭대기의 가지를 꺾어 아래에다 심은 모습으로 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꺾여서 심기운 연한 가지가 누구입니까?
(사53:2) 그는 주 앞에서, 마치 연한 순과 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싹과 같이 자라서, 그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고, 훌륭한 풍채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바로 그런 모습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왜 그런 초라한 모습으로 오셨습니까?
만약 예수님께서 영광과 권세와 능력으로 오시면 세상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만일 예수님께서 영광과 권세와 능력으로 오셨다면 우리는 거기서 끝입니다.
(마24:29-31) 29 "그 환난의 날들이 지난 뒤에, 곧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고,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
30 그 때에 인자가 올 징조가 하늘에서 나타날 터인데, 그 때에는 땅에 있는 모든 민족이 가슴을 치며, 인자가 큰 권능과 영광으로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31 그리고 그는 자기 천사들을 큰 나팔 소리와 함께 보낼 것인데, 그들은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선택된 사람들을 모을 것이다."
주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런 초라한 모습으로 꺾어진 연한 가지의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연한 가지의 정체는 온갖 새들이 깃들 수 있는 엄청난 백향 목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영광과 능력과 권세를 비우시고 초라한 목수의 아들로 오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아직도 구원받아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영광과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오시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들이 구원받기 전에는 그런 모습으로 오실 수 없는 것입니다. 죄인들은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서면 모두 죽습니다. 예수님은 그 모습을 감추시고 겨자씨처럼 연한 가지처럼 오늘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부르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 예수의 품안에 숨겨져 있는 분들이 바로 여러분과 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가진 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담대함과 당당함으로 나아가려는 시드기야 같은 삶을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뭔가 커다란 체험을 해서 “이 정도면 되나요?”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열심을 부려 성경을 공부하고 열심을 부려 선행을 행한 것을 자랑으로 하나님 앞에 내어놓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도 봐라, 예수 믿으면 이렇게 이 땅에서 떵떵거리면서 살게 되는 거야”라고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겨자씨로 연한 순으로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중에 주님과 함께 세상을 심판할 자들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너무나 확실하게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나중에 그렇게 될 자들이 아니라 이미 그런 신분을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제대로 살아내고 있지 못한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정죄하면서 자기만 군계일학이요 청산의 낙락장송인 것처럼 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을 우리를 증명하는 데 쓰는 시드기야 같은 자들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권세와 힘으로 연약한 자들을 일으키고 그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데 쓰는 바보 같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신비적인 체험이나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얻게 되는 부와 명예를 가지고 교회와 세상에 자랑을 하는 삶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하나님 앞에 자랑거리로 가지고 나가는 그런 삶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나는 어떤 인간이며 하나님은 왜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죽이실 수밖에 없었는지를 시험을 통해서 때로는 환난과 고난을 통해서 점점 알아가게 되는 것이 바로 신자의 인생인 것입니다.
우리는 겨자씨입니다. 우리는 꺾여 심기운 연한 나무 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 40일을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그 광야 40일은 예수님의 공생애 전체를 요약하는 날들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을 하나님의 교회들의 인생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셨지요? 40일 내내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어떤 시험이었나요?
그 시험을 잘 이해하고 있으면 우리 인생이 어떤 목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인지 잘 알게 되겠지요.
(눅4:1-13) 1 예수께서 성령이 충만해서, 요단 강에서 돌아오셨다. 그리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셔서,
2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그 동안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아서, 그 기간이 다하였을 때에는 시장하셨다.
3 악마가 예수께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말해 보아라."
4 예수께서 악마에게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1)'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다' 하였다."
5 그러자 악마는 예수를 높은 데로 이끌고 가서, 순식간에 세계 모든 나라를 그에게 보여 주었다.
6 그런 다음에, 악마는 그에게 말하였다. "내가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주겠다. 이것은 내게 넘어온 것이니, 내가 주고 싶은 사람에게 줄 것이니,
7 내 앞에 엎드려서 절을 하면, 이 모든 것을 갖게 될 것이다."
8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하였다."
9 또 다시 악마는 예수를 예루살렘으로 이끌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그에게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
10 성경에 기록하기를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자기 천사들에게 명해서, 너를 지키게 하실 것이다.
11 그들이 손으로 너를 떠받쳐서, 너의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할 것이다' 하였다."
12 예수께서 악마에게 말씀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라' 하였다."
13 악마는 모든 시험을 다 한 뒤에, 잠시 동안 예수에게서 떠나갔다
2절에 “그 기간이 다하였을 때 “라는 말이 있지요? 그 말은 하나님께서 날 수까지 지정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날 동안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1절에 보시면 ”성령에 이끌려서“시험을 당했다고 나오지요? 사탄이 시험하지만 성령이 이끌고 가셔서 시험을 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자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시험은 전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시험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고 우리에게 닥치는 시험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모든 시험은 하나님께서 이유가 있기 때문에 허락을 하신 것이라는 말이지요? 40일을 굶주리시고 처음 받으신 시험이 어떤 시험입니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시험합니다. “돌이 떡이 되게 하라”는 시험은 우리 신자들은 우리의 힘과 노력과 재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허락되어지는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것을 믿고 삶으로 시인하며 살아야 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시험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는 답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돌로 떡을 만드실 능력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40일
제16장 구약과 신약
(고후3:1-9)
1 우리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우리가 스스로를 치켜 올리는 말을 늘어놓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우리가 어떤 사람들처럼, 여러분에게 보일 추천장이나, 여러분에게서 받을 추천장이 필요한 사람들입니까?
2 여러분들이야말로 우리를 천거하여 주는 추천장입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에 적혀 있습니다(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여러분들의'). 모든 사람이 그것을 알고 있으며, 읽고 있습니다.
3 여러분은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편지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작성하는데 봉사하였습니다. 이것은 먹물로 쓴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요, 돌판에 쓴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쓴 것입니다.
4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확신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런 말을 합니다.
5 우리는,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우리에게서 나왔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격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6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언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이 새 언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라, 영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지만,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
7 돌판에다가 문자로 새긴 율법을 선포할 때에도, 빛이 났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은, 비록 곧 사라질 광채이기는 하지만,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그 광채 때문에,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습니다. 죽음에 이르게 하는 직분에도 이러한 영광이 따랐는데,
8 하물며 성령의 직분에는, 더욱더 영광이 넘치지 않겠습니까?
9 정죄를 선고하는 직분에도 영광이 있었으니, 의의 직분은 더욱더 영광이 넘칠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옛 언약과 새 언약에 관해 공부를 하겠습니다. 구약(舊約)과 신약(新約)은 도대체 무엇인가? 조금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정신 차리고 잘 들어주세요.
성경은 구약과 신약이라는 이름이 말해 주듯이 전체가 하나님의 약속, 즉 언약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언약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구속사를 경륜해 가시면서 인간들을 대하시는 방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에 언약이라는 말이 이백 아흔 두 번이 나오고 약속이라는 말도 예순 여섯 번이나 나옵니다. 그렇게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구약은 39권이고 신약은 27권입니다. 그 많은 분량의 구약은 무엇을 기록하고 있으며 신약은 또 무엇을 기록하고 있으며 그 둘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 걸까요?
제가 자주 구약은 영화의 화면이고 신약은 영화 자막이라고 말씀드렸는데 그 연관성은 어떤 것일까요?
구약과 신약은 서로 떨어 뜨려놓고는 절대 이해 할 수 없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 구약과 신약은 전체가 다 일관성을 가지고 어떤 단일 주제를 다루고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무엇일까요? 잘 공부해 보자고요.
먼저 성경이 말하는 옛 언약이 무엇인가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렘11:1-4) 1 이것은 주께서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이다.
2 "이 언약의 말을 듣고,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선포하여라.
3 그들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 '이 언약의 말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4 이 언약은, 쇠를 녹이는 용광로와 같은 이집트 땅에서 너희 조상을 데리고 나올 때에, 내가 그들에게 지키라고 명한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나에게 순종하고, 내가 명하는 모든 것을 실천하면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서,
이것이 구약 전체에 흐르는 옛 언약입니다. ‘내 목소리를 듣고 나의 명한 모든 명령을 좇아 행하면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이렇게 율법 아래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이 바로 옛 언약인 것입니다.
그럼 새 언약은 무엇일까요?
(히8:7-13) 7 그 첫 번째 언약에 결함이 없었다면, 두 번째 언약이 생길 여지가 없었을 것입니다.
8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나무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주께서 말씀하신다. '보아라, 날이 이를 것이다. 그 때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을 것이다.'
9 또 주께서 말씀하신다. '이 새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붙들어서,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 조상들과 맺은 언약과는 다른 것이다. 그들이 내 언약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나도 그들을 돌보지 않았다.'
10 또 주께서 말씀하신다. '그 날 뒤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나는 내 율법을 그들의 생각 속에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다가 새겨 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11 그리고 그들은 각기 자기 이웃에게 서로 가르치려고, 주님을 알라고 말하는 일이 없을 것이니, 작은 사람으로부터 큰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 나를 알 것이기 때문이다.
12 나는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더 이상 그들의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
13 하나님께서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첫 번째 언약을 낡은 것으로 만드셨습니다. 낡고 오래 된 것은 곧 사라집니다.
7절을 잘 보시면 옛 언약이 흠이 있는 언약이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하신 언약이 흠이 있다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실수하셨다는 말입니까?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옛 언약은 그 언약 홀로 완성품이 아니라 어디로 향하고 있는 언약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옛 언약이 흠이 있어 새 언약을 세우셨는데 그 새 언약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남편이 되어서 손을 잡고 끌고 나왔는데도 이스라엘이 그 옛 언약 하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계속 불순종하였기에 이제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뚫고 들어가셔서 하나님의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심비에 직접 기록을 해놓으시겠다는 것이 새 언약입니다. 그러니까 옛 언약은 새 언약으로 결론되어지지 않으면 그 자체로는 흠 있는 언약일 수밖에 없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옛 언약, 구약은 율법이요, 새 언약, 신약은 은혜인 것입니다.
이것을 기본으로 깔고 오늘의 본문을 열어보겠습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고린도 교회에 침투한 거짓 사도들을 염두에 두고 고린도 후서 3장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 거짓 사도가 잘못된 것을 밝히기 위한 공격 방법으로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비교하면서 공격을 전개해 나갑니다.
사도 바울은 거짓 사도들을 옛 언약의 대표로, 자기 자신을 새 언약의 대표로 올려놓고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고 있지요?
그러면 “거짓 사도와 옛 언약, 참 사도인 바울과 새 언약” 해서 옛 언약이 거짓이라는 Logic이 성립하게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미 잠간 언급해 드린 것처럼 그 옛 언약도 하나님께서 하신 것인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이 거짓일 수가 있는가 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언약이 거짓이 될 수 있습니까?
조금 과격한 언어를 사용하여 결론부터 말하자면 “새 언약이 없는 옛 언약은 거짓이다”입니다. 옛 언약은 새 언약으로 결론지어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그 옛 언약 홀로 존재 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구약의 그 많은 율법과 제사제도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예수를 설명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었던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구약을 주실 때 새 언약을 염두에 두시고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구약에만 머물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유대교는 불완전할 뿐 아니라 거짓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토요일이면 검은 정장차림으로 할리우드 거리를 활보하는 그 많은 유대인들이 저는 참 측은 합니다. 옛 언약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너희들이 나를 청종하고 내 말을 지키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도 계속해서 죄를 지었고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다가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와서도 계속해서 죄를 지었습니다. 구약의 제사제도와 율법이 그들을 구원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구약은 그렇게 하나님의 요구 조건에 대한 인간의 무능함을 지적하기 위한, 은혜의 필연으로 향하는 사다리였던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제도와 율법은 예수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그림자였고 예수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갈3:24) 그래서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에게 개인 교사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게 하시려고 한 것입니다
제사제도는 죄 없는 제물이 죄인 대신 죽임을 당하고 죄인의 죄가 용서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그림자로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히10:1-5) 1 율법은 장차 나타날 좋은 것들의 그림자일 뿐이요, 실체가 아니므로, 해마다 계속해서 드리는 똑같은 희생제사로써는 하나님께로 나오는 사람들을 완전하게 할 수 없습니다.
2 그렇지 않다고 하면, 제사드리는 사람들이 한 번 깨끗해진 다음에는, 그들은 더 이상 죄의식을 가지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제사 드리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겠습니까?
3 그러나 제사에는, 해마다 죄를 회상시키는 효력이 있습니다.
4 황소와 염소의 피가 죄를 없애 줄 수는 없습니다.
5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에, 하나님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입히실 몸을 마련하셨습니다.
명확하지요? 이렇게 하나님은 새 언약을 위해 구약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에게 주어질 그 은혜를 설명해주시고 이해시켜 주시기 위해 구약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로 결론이 지어지지 않는 구약은 사막의 신기루 같은 것입니다. 시원한 생수를 약속하지만 그 곳에는 끊임없는 모래바람과 뜨거운 햇빛만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을 보세요. 그들의 삶에 오아시스가 있었나요?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인간은 어떤 존재이며 그들은 어떤 처지로 몰락할 수밖에 없는 자들인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바로 구약의 이스라엘 아닙니까?
그럼에도 구약에만 머물러 있는 유대인들은 여전히 그네들의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교인들이 쓰는 구약 성경의 순서는 우리의 구약의 순서와 좀 다릅니다. arrangement이 좀 다르게 되어있습니다. 유대인들의 구약은 역대 하에서 끝이 납니다. 역대하가 어떻게 끝나지요?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70년 만에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에 의해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돌아와 성전을 짓는 내용으로 끝이 납니다. 그들은 이제 메시아가 와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사무엘하의 다윗의 언약이 이 땅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구약은 어디서 끝이 납니까? 말라기에서 끝이 납니다. 말라기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가나안에 돌아와서도 끝까지 옛날 버릇 못 버리고 범죄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제사들 드릴 때도 성의 없는 제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십일조를 하면서도 제일 쓸모없는 것들을 가지고 와서 유세를 떨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봐라, 너희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되지? 너희는 내게 저는 것 흠 있는 것 엉터리 같은 것 가져다가 바치고는 제사지냈다. 십일조 했다 하는데 너희 총독에게 그런 거 가져다 줘봐라. 사람도 안 받을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조롱하느냐? 너희는 나의 요구 조건을 절대 충족시킬 수 없는 자들이다. 그래서 이제 내가 한다.”하시고 구약을 닫으십니다. 그게 말라기입니다. 인간의 완전한 실패로 구약은 끝이 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없는 구약은 거짓이라 하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유대교만을 전하는 자들은 모두 거짓사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가 반드시 오셔야만 한다는 것을 구구절절이 피력하고 있는 책인 것입니다.
(계3:9) 보아라, 내가 사탄의 무리에 속한 자들을 네 손에 맡기겠다. 그들은 스스로 유대 사람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자들이다. 보아라, 내가 그들이 와서, 네 앞에 꿇어 엎드리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였다는 것을 알게 하겠다.
보세요. 성경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구약의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들을 가리켜 “사탄의 회”라고 까지 하십니다. 그만큼 우리 기독교에서는 모든 것이 예수로 결론이 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에 침투해서 예수를 부인하고 옛 언약의 우월성을 주장하던 자들을 가리켜 거짓 사도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새 언약은 옛 언약의 성취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옛 언약과 새 언약의 관계는 처음 창조와 새 창조와의 관계를 살펴보면 이해가 더 쉽습니다. 하나님께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 속에 있던 무질서 속에 빛을 창조하시면서 창세기의 창조는 시작됩니다. 그리고 둘째 날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누시고 셋째 날 물과 뭍을 나누시며 넷째 날부터 여섯째 날 까지 열심히 그 셋째 날 까지 만들어 놓으신 그 틀에다가 풍성하게 채우십니다. 그리고 완성된 창조를 일곱째 날 안식하시면서 즐기시는 것이 창세기의 창조입니다. 그 창조는 하나님께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인 우리 죄인들의 마음에 예수라는 빛을 보내셔서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실 것인가를 힌트해 주시는 사건입니다. 성경을 보시면 예수 그리스도를 빛이라고 묘사를 하지요?
(고후4:6) "어둠 속에서 빛이 비쳐라" 하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 속을 비추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분명하지요? 창세기의 첫째 날 빛이 있으라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빛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는 것이었음을 바울이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과 2장의 이야기가 바로 그 창조를 이야기하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익히 살펴 보았다. 첫째 날 빛이 오시고 그 이튿날 세례를 받으시고 그 이튿날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와 함께 묵었습니다. 정확하게 창세기의 셋째 날까지의 창조가 예수님의 사역 속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빛이신 예수가 오셔서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이 갈리는 것으로 상징이 되는 세례를 받으시고, 물이 물러가고 뭍이 드러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상징으로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이신 주님이 함께 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넷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제자들을 불러 모으십니다. 셋째 날까지의 천국의 틀에 당신의 백성들을 채우시는 상징입니다. 그리고 일곱째 날에 천국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상징하는 가나 혼인잔치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첫 창조와 요한복음 1장2장의 사건들은 바로 예수께서 그 새 언약을 어떻게 이루어 내실지 미리 힌트해 주는 것입니다.
조금 더 쉽게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창세기의 창조는 새 창조를 상징하는 창조이기에 그 자체로는 불완전한 면을 보여 줍니다. 빛이 창조되었는데 빛과 함께 어둠이 공존합니다. 그렇지요? 그 것은 하나님은 반드시 그 어두움을 몰아내시고 빛으로 가득 찬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실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날에도 역시 궁창과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이 하늘로 향하는 길을 막고 있습니다. 궁창과 궁창 위의 물은 후에 성막의 물두멍으로 또 휘장으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을 마치 놋을 망치로 쳐서 만드는 물두멍처럼 만드셨다는 표현과 커튼처럼 치셨다는 표현들이 구약에 여러 번 나오지요? 그것은 바로 휘장이신 예수의 몸이 하늘로부터 아래로 찢겨져 궁창과 궁창 위의 물이 물러가고 죄인들이 하늘로 들어가는 길이 열릴 것임을 담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궁창 아래의 물은 바다가 되는 것이고요. 셋째 날도 마찬가지죠? 물과 뭍이 공존합니다. 성경에서 물은 저주의 물, 심판의 물, 죄악의 물을 가리킨다했습니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묘사할 때 ‘다시 바다가 있지 않겠고’라 묘사한다 했지요? 성경은 그 모든 악의 물이 물러가고 다시는 바다가 있지 않은 뭍이 반드시 완성 될 것이라는 것을 셋째 날의 창조에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창세기의 창조는 그 속에 하나님의 언약을 담지하고 있는 새 창조의 그림자들인 것입니다.
이렇게 그 어둠이 어떻게 물러가며, 그 물이 어떻게 말라버리며, 그 궁창이 어떻게 뚫리게 되는지, 다시 말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다시 무질서인 카오스의 상태로 떨어져 버린 그 벌거벗은 아담이 어떻게 의의 세마포를 입은 천국 백성이 되어 가는가를 옛 언약과 새 언약을 통해서 설명을 해 주시는 것이 바로 성경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거스틴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able to sin에서 not able to sin으로 바뀌게 되는지를 설명해 주시는 것이 성경인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인격적인 존재들은 모두 그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천사들도 probation을 거쳐서 그 시험을 통과한 자들은 영화의 삶으로 가는 것이며 통과하지 못한 자들은 저주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에 있는 천사들은 probation을 통과한 존재들이라 이제 not able to sin의 상태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혹시 나중에 천사들이 도 반란을 일으키면 어떻게 하나’하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한 자들이기에 거기에는 이제 반란이 없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는 원리인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지는 알려고 하지 말자고요. 하나님께서 그 이상 우리에게 계시하지 않으시니까요. 천국에 가면 알 수 있겠지요. 마찬가지로 인간들도 그 하나님의 probation을 통과하면 바로 천국의 삶을 not able to sin의 상태로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기에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사랑하심으로 예수를 보내셔서 그 probation을 통과하게 하시고 그들을 건져내신 것입니다. 제 말을 잘 이해하셔야 해요. 저는 지금 하나님이 계획도 없이 막무가내로 일을 진행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을 할지 안 할지도 모르시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인간의 처분을 기다리는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여러분이 이해하시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 이러한 방법을 택한 것 뿐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이미 십자가를 창세전에 준비해 놓으시고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고 선악과의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인 십자가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기로 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십자가의 원리, 즉 나를 비워 원수의 유익을 구하는 삶의 원리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여러분이 저와 공부해 나가시면서 점점 클리어하게 정리하실 수 있을 거예요. 오늘은 이 정도까지만 하자고요.
그러므로 첫 창조는 새 창조의 준비 단계일 뿐입니다. 첫 창조는 임시적이며 낡아지고 부서질 것으로 만들어집니다. 그렇죠? 태양도 빛을 잃을 것이고 달도 기울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어떨 때 이런 생각 안 드세요? ‘하나님이 이런 것은 요렇게 만드셨으면 더 좋았을 텐데’ 이런 생각 드시지요? 왜 그런지 아세요? 왜 하나님이 조금 아쉽게 이 세상을 이렇게 놔두실까요? 여기가 우리의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은 첫 창조 속에서 우리에게 경험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첫 창조는 임시적이며 잠정적인 우리의 주거지일 뿐입니다. 영광과 영화의 새 창조 때까지 인간에게 주어진 임시 주거지입니다. 그러나 새 창조는 영원한 것으로, 불멸의 것으로, 썩어지지 아니할 것으로 지어지게 되는 영적인 것입니다.
창세기의 첫 창조는 이렇게 새 창조의 모형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구원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함이라는 것이지요.
(히9:23)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조물은 이런 의식으로 깨끗해져야 할 필요가 있지만, 하늘에 있는 것들은 이보다 나은 희생제사로 깨끗해져야 합니다
제사나 율법 그리고 이 창조물들은 모두 새 창조의 모형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첫 창조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히8:13) 하나님께서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첫 번째 언약을 낡은 것으로 만드셨습니다. 낡고 오래 된 것은 곧 사라집니다.
영적인 새 창조를 목적으로 하나님은 이 우주를 창조 하셨습니다. 여기는 이제 곧 낡아지고 부서지고 불에 타버릴 우리의 임시 주거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디에다 관심을 두고 살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목적은 이 옛 언약에 속한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새 언약의 성취로 우리에게 주어질 저 하늘나라에서의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율법을 상징하는 모세를 가리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직분, 정죄의 직분(유죄를 선포하는 직분)이라고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율법 아래 있는 거짓 사도들을 공격하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새 언약인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신의 직분을 의의 직분이라 하지요?
그러나 오해는 하지 마세요. 구약인 율법이 아주 몹쓸 것이라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율법은 선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인격을 알게 해 주시는 좋은 것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지킬 능력이 없는 자라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율법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얼마만큼 불가능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십계명 돌 판으로 상징되는 율법의 모세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직분이라 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반복합니다. 구약은 예수그리스도로 결론지어지지 않으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며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과 성령의 강림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우리에게 소망은 없다는 것입니다.
구약을 잘 보시면 십계명 돌 판은 생명 없는 인간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렘17:1) "유다의 죄는 그들의 마음 판에 철필로 기록되어 있고, 금강석 촉으로 새겨져 있다. 그들의 제단 뿔 위에도 그 죄가 새겨져 있다.
얼마나 그 죄인들의 마음이 단단하면 금강석 끝 철필로 그 죄가 마음 판에 새겨져 있다고 성경이 죄인들을 묘사하겠습니까? 성경은 십계명 돌 판과 죄인인 인간의 마음을 이렇게 대조합니다. 그 돌판 같은 단단한 마음을 가진 죄인들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꿔 버리시는 것이 새 언약인 것입니다.
(겔36:26-28) 26 너희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고 너희 속에 새로운 영을 넣어 주며, 너희 몸에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살갗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며,
27 너희 속에 내 영을 두어, 너희가 나의 모든 율례대로 행동하게 하겠다. 그러면 너희가 내 모든 규례를 지키고 실천할 것이다.
28 그 때에는 내가 너희 조상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살아서,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성경은 그것을 이러한 대조로 확인시켜 주고 있기도 합니다.
(출32:26-28) 26 모세는 진 어귀에 서서 "누구든지 주의 편에 설 사람은 나에게로 나아오너라" 하고 외쳤다. 그러자 레위의 자손이 모두 그에게로 모였다.
27 그가 또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이 이르시기를 '너희는 각기 허리에 칼을 차고, 진의 이 문에서 저 문을 오가며, 저마다 자기의 친척과 친구와 이웃을 닥치는 대로 찔러 죽여라' 하신다."
28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니, 바로 그 날, 백성 가운데서 어림잡아 삼천 명쯤 죽었다.
모세가 돌비에 새긴 십계명을 가지고 내려왔습니다. 유대인들의 전승에 의하면 모세가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받은 때를 그들이 애굽을 탈출한 유월절부터 계산해 보면 정확히 50일 후라고 합니다. 유월절 이후 오십일이면 무슨 날입니까? 오순절쯤이지요? 오순절에 그 율법이 산 아래의 죄에 닿으니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요? 삼천 명이 죽습니다. 그렇지요?
그러나 신약에서 오순절 날 새 언약의 성취로 그 새 영이 내려오십니다. 그 새 영이 똑같은 죄인들에게 부어지니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베드로의 설교에서 삼천 명이 회개하고 돌아오지요? 성경은 정확하게 이렇게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구약은 삼천 명이 죽는 것으로 새 언약은 삼천 명이 영생을 얻게 되는 것으로 비교를 합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렇게 판이하게 양상이 바뀐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하나님의 은혜가 가입되자 죽음이 삶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게 바로 복음이며 그게 바로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유일한 내용인 것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어야 할 죄인들이 그들이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음에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꿔버리시는 것, 그래서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살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 버리시는 것을 우리는 새 언약이라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창조부터 시작해서 계시록으로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은 예수를 설명하기 위한 예수의 그림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로 결론지어지지 않는 구약은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며 그 율법을 전하는 자들을 우리는 거짓 선지자들이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어떻게 구원하실 것인지를 성경에다 기록해 놓으신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새 언약 아래에서 아무 공로 없이 구원을 얻으신 성도 여러분 조금 있으면 낡아 없어질 구약적인 이 땅의 것들에서 눈을 들어 영원히 변치 않는 영적인 것을 바라는 새 언약의 백성다운 삶을 사십시오.
제17장 은혜
(엡1:1-2)
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나 바울은, 에베소에 사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신도들에게 이 글을 씁니다.
2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내리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은혜!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단어입니다. 은혜의 의미를 한 문장으로 정리를 하면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무상으로 주어지는 것’을 은혜라 합니다. 평강은 그 은혜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므로 우리가 평강을 누리기 위해서는 은혜의 의미를 잘 정리하고 있어야 합니다.
먼저 우리에게 왜 은혜가 필요한가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왜 우리에게 은혜가 필요한가?
왜 여러분에게 은혜가 필요합니까? 바로 죄 때문입니다. 죄가 인간에게 들어오기 전에는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온 이후에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은혜가 된 것입니다. 물론 죄를 짓기 이전에 인간에게 필요한 사랑도 은혜를 근거로 한 사랑이지요. 그렇지만 지금 우리가 논하려고 하는 은혜는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에게 부어지게 된 복음의 다른 명칭으로서의 은혜를 공부하려고 하는 것이므로 굳이 이렇게 분류를 해서 설명을 드리는 것입니다. 잘 유념해 두세요.
그렇게 우리에게 은혜가 필요하게 된 이유는 이러합니다.
죄를 지은 인간은 저주와 심판에 놓이게 됩니다. 그런데 인간 스스로 그 저주와 심판에서 놓여 날 길이 없습니다. 그것은 신앙의 연륜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더욱 더 오롯이 드러나는 것이지요? 도대체 우리 힘으로는 그 죄에 대한 욕구와 소원을 멈추거나 다스릴 수 가 없음을 저는 점점 더 절감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 평강을 누리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그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혹자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보내셔서 그 예수를 믿으면 구원하고 예수를 믿지 않으면 구원하지 않으시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를 알아 볼 능력도, 요구도 준비도 하지 않은 자들이었습니다. 아예 죽어있던 자들이었습니다.
성경이 그 것을 명확하게 증언합니다.
(엡2:1) 여러분도 전에는 범죄와 죄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죽었던 자들입니다. 시체가 무슨 말을 알아듣습니까? 시체가 사리 분별을 하나요? 어떤 요구를 할 수 있습니까? 노력은요? 그렇게 우리는 완전히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 시체들에게는 은혜가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십자가에 매다신 것입니다. 은혜는 그렇게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요1:17) 율법은 모세에게서 받았고,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겨났다.
정확하지요? 율법으로 따지자면 우리는 모두 심판을 받아 죽어야 할 자들인데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를 입고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을 세 번이나 쓰고 있는 것입니다. 편지를 쓰는 사도도 예수로 말미암아 된 자요, 편지를 받는 성도들도 예수로 말미암아 성도 된 자요, 그들에게 주어진 은혜도 예수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기독교에서 그 예수가 빠지면 그건 기독교 아닙니다.
요한복음으로 가서 그 은혜가 어떤 것인지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요3:17-19) 17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로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9 심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빛이 세상에 들어왔지만, 사람들이, 자기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에베소서 강해가 끝나면 요한복음 강해를 할 것입니다. 그 때 더욱 자세하게 다루겠습니다만 이 부분은 여러분이 꼭 숙지해 두셔야 할 부분이니 잘 들어주세요.
하나님은 죄인들과 하나님과의 화목을 위해서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빛이 세상에 왔는데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요1:1-5) 1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2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3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으니, 그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4 그의 안에서(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그의 안에 생명이 있었다. 그 생명은 사람의 빛이었다') 생겨난 것은 생명이었으니, 그 생명은 모든 사람의 빛이었다.
5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
(요1:10-11) 10 그는 세상에 계셨다.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다.
11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빛이 왔으나 세상은 그 빛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자기 백성은 당시의 이스라엘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포함한 하나님께서 구속하기로 한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창세전에 불림을 받았다는 그 하나님의 백성들이 전체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완전히 죽어있던 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은혜가 필연적으로 필요했다는 것이지요. 이해가 가시지요?
그럼 구원 역사적 측면에서 이 은혜를 살펴보겠습니다. 저는 어렸을 적에 ‘하나님은 왜 하고 많은 민족들 중에 이스라엘을 택하셨는가?’하는 질문을 종종 하곤 했습니다. ‘왜 한국은 아닌가? 왜 이스라엘을 택하셨나? 아담이 한국 사람이었으면 뱀이 유혹했을 때 뱀을 홀랑 잡아 먹어버릴 지도 모르기 때문에 더 이상 이야기의 전개가 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러셨는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추축도 해 보곤 했지요? 여러분은 아세요? 왜 하필 이스라엘입니까?
나중에 성경을 보니까 하나님께서 대답을 해 주십니다.
(신7:6-7) 6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요, 주 너희의 하나님이, 땅 위의 많은 백성 가운데서 선택하셔서, 당신의 보배로 삼으신 백성이기 때문이다.
7 주께서 너희를 사랑하시고 택하신 것은, 너희가 다른 민족들보다 수가 더 많아서가 아니다. 오히려 너희는 모든 민족 가운데서 수가 가장 적은 민족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이유를 대시는데 이스라엘이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잘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아주 보잘 것 없는 것들을 어떻게 당신의 능력을 입혀, 당신의 백성으로 만들어 내시는지를 알리시기 위해 가장 적은 민족 이스라엘을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특별함을 증거 하시기 위함이 아닌, 당신의 능력의 크심을 증명하시기 위해 이스라엘을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다른 부분을 더 볼까요?
(신9:4-5) 4 주 너희의 하나님이 그들을 너희 앞에서 내쫓으신 다음에, 행여 '내가 착하기 때문에 주께서 나를 이끌어들여 이 땅을 차지하게 하셨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주께서 이 민족을 너희 앞에서 내쫓은 것은, 그들이 악하기 때문이다.
5 너희가 마음이 착하고 바르기 때문에 너희가 들어가서 그들의 땅을 차지하도록 하신 것이 아니라, 여기에 있는 이 민족들이 악하기 때문에 주 너희의 하나님이 그들을 너희 앞에서 내쫓으신 것이다. 이렇게 하여, 주께서는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그 말씀을 이루신 것이다.
보시다시피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택하신 것은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유대인이 똑똑하고 잘나서가 아닙니다. 의로워서도 아닙니다.
은혜라는 것은 그렇게 아무 자격이 없고, 준비도 없고, 요구도 없었던 자들에게 값없이 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하나님은 전체 교회에게 공지하고 계신 것입니다.
공짜!!!! 그래서 하나님은 고지론 자들이 부르짖는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잘난 사람들을 그렇게 많이 만들지 않으십니다.
(고전1:26-29)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을 때에, 그 처지가 어떠하였는지 생각하여 보십시오. 육신의 기준으로 보아, 지혜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권력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27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택하셨으며,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을 택하셨습니다.
28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비천한 것과 멸시받는 것을 택하셨으니, 곧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없애시려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29 그것은, 아무도(그, '육신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한번 주위를 둘러보세요. 도대체 우리는 믿지 않는 다른 이들과 뭐가 달라서 여기서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가장 속기 쉬운 것이 목사에 관한 편견입니다.
여러분들은 목사들은 뭔가 남달라서 하나님께서 들어서 쓰시는 줄 아시지요?
정말 그렇습니까? 한국의 큰 교회들 보면 그 교회의 목사님들의 학력이 참으로 대단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세상 적으로 인정받는 잘 난 목사들의 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모일까요? ‘저 분은 뭔가 남 다른 데가 있다’는 것을 애써 찾고 싶은 인간들의 욕구가 그렇게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목사를 비롯한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증거 하는 자로 서는 것이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하나님을 돕는 자들이 아닌 것입니다. 어떤 분께서 ‘하나님 제 덕 좀 보세요.’라는 책을 쓰셨던데 그건 어불성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덕을 보시다니요? 우리는 죽는 날까지 하나님의 은혜로만 사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세상에게 그 것을 보여주고 가는 것이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약하고, 여전히 추악한데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 개입하셔서 끝까지 목적지로 끌고 가시는구나.‘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저도 가끔 제가 어떤 사람인지 여러분 앞에 한번 까서 보여주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제가 얼마나 불가능하고 추한 인간인지 보여주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러다가도 금방 ‘내가 이런 사람인 것을 알면 사람들이 이 교회에 한 사람이라도 남아 있을까?’아며 몸서리를 칩니다. 하나님의 뜻을 좇아 그 분께 목숨을 바치겠다고 나선 목사인 저도 그 정도입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항복하고 그 분의 은혜만을 구하는 자로 서야 하는 것이고 당연히 그렇게 지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저와 함께 신앙생활 하던 사람들 중에 정말 신실하고 착하고 똑똑한 사람 많았습니다.
세상 적인 생각으로 그런 분들이 목사님이 되셔야 옳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매일 술이나 먹고, 하나님이 안 계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노자(老子) 장자(長子)나 읽던 저를 목사로 부르시냔 말입니다. 그래서 그걸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자격을 가지고 목사를 뽑았다면 어떻게 저 같은 사람이 목사로 뽑혔겠습니까?
그런 것을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저 자신을 이렇게 난도질하는 제 심정을 잘 좀 헤아리셔서 졸지 마시고 잘 들어주세요.
그러면 이 에베소서를 쓴 사도 바울은 어떻습니까? 사도 바울은 인간적인 면에서 볼 때 사도로서 적합한 자였나요? 사도 바울은 기독교인들을 가장 많이 핍박하고 스데반을 때려죽인 사람입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그가 옷을 맡아 가지고 있었지요? 그건 ‘이 모든 일에 대해서 내가 책임진다.’는 책임 맡은 자의 행위였습니다. 그러고도 아무런 뉘우침 없이 또 기독교인들 잡아 죽이려고 분기탱천하여 가다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사도 바울을 택했을까요? 차라리 죽으면서도 천사의 얼굴을 하고 있었던, 성령 충만한 스데반을 살려서 쓰셨으면 더 좋았잖아요. 그걸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사도바울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전15:10)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 나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사도들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수고하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한 것이 아니라, 내가 늘 입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많은 수고를 했습니다. 본인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수고를 하고 사도가 된 모든 것을 은혜로 돌리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과장하고 겸손한 척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마음에도 없는 것을 겸손을 가장하기 위해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수고와 노력이 정말 자기가 한 것이 아닌 것을 안 사람인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우리 성도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끌려 간다는 것이 명확해 집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한 발짝도 진보할 수 없음을 뼈저리게 실감을 하지요.
혹 여러분 중에서도 자기가 뭔가 남들과 달라서 예수 믿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빨리 그 생각 버리십시오. 우리의 행동과 노력은 단 1%도 그 은혜에 보탤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하나님께서 열심히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데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그 은혜를 계속해서 저버립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끝까지 쫓아가시면서 은혜를 베푸십니다.
(사1:24-26) 24 그러므로 주, 곧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전능하신 분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나의 대적들에게 나의 분노를 쏟겠다. 내가 나의 원수들에게 보복하여 한을 풀겠다.
25 이제 다시 내가 너를 때려서라도 잿물로 찌꺼기를 깨끗이 씻어 내듯 너를 씻고, 너에게서 모든 불순물을 없애겠다.
26 옛날처럼 내가 사사들을 너에게 다시 세우고, 처음에 한 것처럼 슬기로운 지도자들을 너에게 보내 주겠다. 그런 다음에야 너를 '의의 성읍', '신실한 성읍'이라고 부르겠다."
(렘31:31-33) 31 "그 때가 오면,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유다 가문과 새 언약을 세우겠다. 나 주의 말이다.
32 이것은 내가 그들의 조상의 손을 붙잡고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오던 때에 세운 언약과는 다른 것이다. 내가 그들의 남편이(히브리어 바알은 '주' 또는 '남편') 되었어도, 그들은 나의 언약을 깨뜨려 버렸다. 나 주의 말이다.
33 그러나 그 시절이 지난 뒤에,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언약을 세울 것이니, 나는 나의 율법을 그들의 가슴 속에 넣어 주며, 그들의 마음 판에 새겨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우리가 받은 은혜는 그렇게 하나님께서 시작하셔서 하나님이 마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은혜입니다.
에베소서 2장과 로마서로 가서 확실하게 요약을 하고 확인도장을 찍고 가겠습니다.
(엡2:1-6) 1 여러분도 전에는 범죄와 죄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2 그 때에 여러분은 범죄와 죄 가운데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살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을 따라 살았습니다.
3 우리도 전에는 그들 가운데서 모두 육신의 정욕대로 살고, 육신과 마음이 바라는 대로 행하여,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날 때로부터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
4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가 넘치는 분이셔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5 범죄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려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6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하늘에 함께 앉게 하셨습니다.
(롬5:8-10) 8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으로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9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되었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으리라는 것은 더욱 확실합니다.
10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로 있을 때에도 그분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하나님과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에 와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으리라는 것은 더욱 확실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뭔가 하나님을 위해 하려고 노력할 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여전히 죄인이었고 하나님의 원수였을 때 우리를 위해 예수가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죽어있던 자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그 죽음에서 벗어나려 하지도 않았고 세상 죄 속에서 몸을 굴리며 살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를 살려주셨습니다. 영어 성경으로 보면 4절의 시작이 but로 시작합니다. 헬라어로는 ‘데’ 접속사 ‘그러나’로 시작한다.
우리는 그렇게 모두 시체였습니다. 시체는 말을 못 알아듣습니다. 혹자는 구원을 당신은 지금 죽을병에 걸려있습니다. 그 병은 약을 먹어야 낫습니다. 자 하나님의 은혜로 약이 만들어졌습니다. 약이 여기 있습니다. 당신이 입만 벌려 받아먹으면 당신은 살 수 있습니다. 라고 구원을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그건 복음이 아닙니다. 시체는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은혜를 주시는 분 쪽에서 먼저 살려내어 복음을 들을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이란 전적으로 베푸는 쪽에서 시작해서 베푸는 쪽에서 끝을 내는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얼마나 은혜를 오해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마치겠습니다.
에베소서 2장 2절을 보면 그렇게 죽어있던 자들을 불순종의 아들들이라 일컫습니다. 불순종의 아들들이란 하나님을 비롯해서 자기 이외의 어떤 존재에게도 순종할 수 없는 자, 자기가 왕인 자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왕의 자리에게 쫓아내고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 했던 아담의 후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이들을, 아니 하나님까지도 자기의 목적을 이루어 주기 위한 엑스트라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렇게 인간은 모두 자기를 위해서만 삽니다. 자기를 위해 이웃을 밟습니다. 심지어 부모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한다고 하지요? 자식은 부모가 자기를 나타내는 최고의 자기표현입니다. 따라서 엄밀히 따지면 부모의 자식사랑도 결국에는 자기를 위함인 것입니다. 자기가 이루지 못한 것을 자식을 통해서 이루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종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가진 것 이외의 것을 가진 신에게 주문을 외우거나 뭘 갖다 바쳐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받아내는 것이 인간이 만들어낸 종교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도 그리로 흐르고 있습니다.
그런 인간들을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여전히 불순종의 자식들로 살아가던 자들을 뒤집어서 예수를 알아보게끔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삶에 자기가 아닌 진짜 왕이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된 자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를 기꺼이 받기를 원하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을 은혜 받은 자, 그리스도인, 순종의 사람들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와 연결해서 정리를 하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믿음을 심으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평강, 평화 , 화목입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자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막12: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이것이 바로 은혜를 주시는 목적인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자기가 여전히 주인이고, 신이며, 폭군인 그런 사람으로 계속 살라고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을 전심을 다해 목숨을 다해 사랑하라고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고후5:14-17)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휘어잡습니다. 우리가 확신하기로는,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으니, 모든 사람이 죽은 셈입니다.
15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이제부터는 자기들 스스로를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대신하여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그를 위하여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16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는 아무도 육신의 잣대로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육신의 잣대로 그리스도를 알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보편 구원론 자들이 15절의 ‘모든’ 이라는 말을 걸고 ‘봐라,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고 모든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주일 설교 때 자세하게 다루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택하신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신해서 죽으신 것이지 모든 죄인들을 위해 죽으신 것은 아닙니다. 제가 주일 설교 때는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여러 근거 구절을 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은 그 정도로만 알고 계세요. 하나님은 죽어야 할 모든 인간 중에 어떤 한 무리를 택하시고 그들에게만 은혜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버리신 것입니다. 새 창조가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재창조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 주심은 이제는 우리가 불순종의 아들들로 살지 않고 예수를 위해 살게 하려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게 은혜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은혜 받으러 왔다고 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내가 당신께 이 정도 성의를 보일 테니 내가 원하는 것 주쇼. 치성 드릴 테니 우리 아들 대학 붙여 주쇼!’ 이거 아닙니까? 그래서 그 요구가 들어지면 은혜 받았다고 외치지요. 여전히 똑같이 불순종의 아들들이 행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여전히 그 사람의 왕은 자기 배요, 자기 자신인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욕심에 순종하는, 불순종의 자녀인 것입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완전히 다시 태어난 자들입니다. 그 은혜를 아는 자들은 절대 그렇게만 살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제 삶 속에서 저의 소원이 이루어지지 말게 하시고 하나님의 소원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이것이 바로 은혜를 받은 자들의 고백인 것입니다.
그 은혜는 모두에게 동일한 완성품으로 주어집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그 은혜가 편파적으로 우리에게 임하겠습니까? 그 은혜가 어떤 사람에게는 더 풍족하게, 어떤 사람에게는 조금 부족하게 주어지겠습니까?
병으로 고통당하며, 감옥에 끌려가 고생하고, 걸핏하면 매를 맞던 바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그렇게 고생하던 바울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풍족하게, 완성품으로 주어졌다고 말씀하십니다.
(고후12:9) 그러나 주께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에서 완전하게 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려고,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바울과 같은 고백을 해야 할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다 할지라도 지금 여러분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만족하게 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는 오늘도 풍성하게 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궁극적으로 의도한 것이 ‘내 백성을 내 백성답게 만드셔서 영원한 천국에서 함께 사시는 것’이므로 여러분은 지금 그 충만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하나님의 백성답게 지어져 가고 계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상황에 따라 많아졌다, 줄어들었다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내게 족하다는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우리는 그 은혜로 주어진 영원한 생명으로 만족하며 살아야 할 자들이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한 것 같이 살지 마세요. 무슨 일을 당하건, 어떠한 일이 있건, 기뻐하는 삶을 산 신앙의 선배들의 삶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받았고, 우리의 하루하루도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이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있다하더라도 불쌍하지 않습니다. 너무 매몰찬가요?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가 족한 것을 알기에 여러분이 안쓰럽기는 하지만 불쌍하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어 훌륭한 걸작으로 만들어지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 분들이 왜 불쌍합니까? 위대한 새 창조에 동참하고 있는 여러분은 오히려 자랑스러운 분들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고도 여러분이 위로가 되지 않는다면,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여러분은 어쩌면 잘 못 믿고 있는 사람들일지 모릅니다. 다시 한 번 본문을 볼까요?
(엡1:1-2) 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나 바울은, 1)에베소에 사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신도들에게 이 글을 씁니다.
2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내리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시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럼 우리는 예수님의 친형제입니다.
그런데 예수 앞에 ‘주’‘큐리오스’라는 말이 붙어있다. 헬라어 큐리오스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취급해 주신다는 것입니까? 우리를 하나님과 동등하게 취급해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게 말이 됩니까?
흙으로 지어져 언제 쓸어버려도 불평할 수 없는 피조물들을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과 동등하게 공동 상속자로 취급해 주시며, 당신께서 누리시는 영원한 안식과 기쁨과 거룩을 우리에게 함께 누리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게 은혜입니다. 사이비들이 말하는 어줍지 않은 값싼 은혜에 놀아나지 마세요.
거기에 어떤 은혜가 더 보태져야 행복하시겠어요. 무엇을 더 요구할 수 있단 말입니까?
자기가 누구였는지, 어떤 처지에 있던 사람이었는지,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그 은혜가 무엇인지 정말 아는 자들이라면 자기의 처지나 환경에 좌지우지 되지 않고 늘 평강하며 평안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어 이상 잃을 것이 없었던 시체였으니까요. 그런데 무엇이 그리 아까우며, 무엇을 그렇게 이루고 싶어 하며, 무엇을 그렇게 갖고 싶어 하십니까? 그 평안과 그 은혜를 누리십시오.
제18장 믿음
(롬1:17)
17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나 있으며,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한 것과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공부할 부분은 믿음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친숙한 단어가 바로 이 믿음일 것입니다. 이 믿음만 가지면 우리는 못할 것이 없다는 교육을 어려서부터 받아왔지요? 원하던 일이 안 이루어지거나 잘 못되거나 하면 “믿음이 없어서 그래”라는 말을 많이 들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믿음을 강하게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 보기도 합니다. 믿음을 달라고 금식기도를 하기도 하고, 백일 작정 철야를 하기도 하며 천일 새벽기도를 하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심지어 삼각산 기도원에 올라가면 흔들바위가 있는데 정말 믿음이 좋은 사람이 올라가서 기도하면 그 바위가 굴러 떨어진다는 전설까지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분량을 한 번 시험해 보고 싶어서 밤에 몰래 올라가서 그 바위가 정말 떨어지나 안 떨어지나 열심히 기도해 본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바위가 꼼짝도 안하기에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가보다 하고 담당 전도사님께 상의를 했더니 기도를 하면서 “믿습니다.”를 계속 반복해서 외치면 어느 순간 믿음이 생긴다고 가르쳐 주시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에게 믿음은 분량으로 잴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고 마치 믿음은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고 갈고 닦아서 좋은 것으로 만들어 가질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왜 그런 오류가 있는가하면 우리는 “믿음”이라는 말을 “믿다”의 명사형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국어사전의 “믿다”라는 말은 “받들고 따르다”라는 뜻으로 다분히 내가 행해야 하는 행위로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을 내가 행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해서 믿음이 생긴다면 믿음은 성경이 말하는 선물이 아니고 은혜도 아니며 당연히 받아야 할 대가인 것이지요.
과연 성경은 무엇을 믿음이라고 하며 그 믿음은 우리에게 어떻게 오게 되는가에 관해 함께 공부해 보지요.
오늘 본문인 로마서1장17절을 보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이야기 할 때 그 근원이 어디인지를 자주 간과(看過)하는데, 믿음의 근원은 “하나님의 의”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아버지가 자식에 대해 끝까지 아버지의 노릇을 해주심”을 신학적 용어로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의(義)를 그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개념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의(義)는 관계를 맺고 사는 어떠한 존재가 그 관계가 요구하는 의무와 책임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을 ‘의(義)’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義)는 하나님께서 관계를 맺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하실 일을 성실하게 해 주시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아버지로서의 역할입니다.
그렇게 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와 뜻이 우리를 믿음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좀 더 들어보세요.
우리가 알고 있는 복음(福音)이라는 것이 뭡니까? 여러분을 복음을 어떻게 정의 하고 계세요? Good news, 무엇이 좋은 소식입니까? 로또 맞은 것? 아들이 좋은 대학 붙은 것? 우리나라가 월드컵 4강에 들어 간 것? 그런 것들은 다분히 상대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겨서 기뻐할 때 진 쪽은 복된 소식이 아닌 슬픈 소식에 눈물을 흘리겠지요? 그렇다면 영원토록 변치 않는 좋은 소식, Good news는 무엇일까요? 영원토록 변치 않을 뿐 아니라 절대성을 지닌 참 복음은 “죄와 허물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주시고 그 아들은 우리 하나님 백성들을 위해서 기꺼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으셨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살려내셨고 그 삼위의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우리에게 전가되어서 우리가 용서를 받고 나음을 입게 된 것”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성경전체는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믿는 자들을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것이고요.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 복음이 진짜 복음(福音)이 되기 위해서는, 진짜 Good news가 되기 위해서는 그 소식이 자기와 관계가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강원도 삼척의 이 씨 아저씨의 아들이 서울대학엘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이 씨 아저씨가 뛸 듯이 기뻐하는데 그 소식을 함께 들은 정 씨 아저씨는 아무런 감동이 없는 것처럼 복음은 반드시 나와 관계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복음이 진짜 복음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보편적이고 일반적으로 던져지는 복음이 정말 나와 관련한 진짜 좋은 소식이 되기 위해 우리에게는 믿음이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믿음은 어떻게 가질 수 있는 것인가가 우리가 오늘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오늘 성경은 믿음이란 방법이 우리를 믿음이란 결과로 이끌어간다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다소 이해하기 힘든 논리입니다. 그리고 그 말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말과 같은 말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면 앞의 믿음은 무엇이고 뒤의 믿음은 무엇입니까?
먼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말을 풀어 보겠습니다. 그 구절을 보면 마치 믿음이 두 종류가 있는 듯 한 뉘앙스를 풍깁니다. 그렇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그렇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그렇게 두 가지 관점으로 나누어서 이해할 수 있고 해석할 수 있으면 바라보는 관점을 달리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믿음에서 출발해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의미를 공부하는 데는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의 생애를 살펴보는 것만큼 유익한 것이 없습니다. 믿음을 대표하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삶을 간단하게나마 짚어 보면서 그 구절의 진의를 풀어보지요. 먼저 히브리서의 한 곳을 찾아보겠습니다.
(히11:8-9)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차 분깃으로 받을 땅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하였지만, 떠난 것입니다.
9 믿음으로 그는, 마치 타국에서와 같이 약속의 땅에서 거류하며, 같은 약속을 함께 물려받을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서 살았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 순종하여 고향을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부러워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이 나에게도 있었으면 합니다. 그러나 잘 보세요. 정말 그는 처음 부르심을 받았을 때 믿음으로 떠났나요? 창세기로 가보지요.
(창11:31~32) 31 데라는, 아들 아브람과, 하란에게서 난 손자 롯과, 아들 아브람의 아내인 며느리 사래를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오려고 바빌로니아의 우르를 떠나서, 하란에 이르렀다. 그는 거기에다가 자리를 잡고 살았다.
32 데라는 이백오 년을 살다가, 하란에서 죽었다.
여기 보시면 아브라함이 일가족을 이끌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온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아버지인 데라가 아브라함과 그 식솔들을 이끌고 갈대아 우르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스데반의 설교를 보면 분명 아브라함의 고향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은 데라가 아닌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그 곳을 떠나라고 명령을 하셨습니다.
(행7:2~3) 2 스데반이 말하였다. "부형 여러분, 내 말을 들어 보십시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거주하기 전에, 아직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를
3 '너는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서, 어디든지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거라' 하셨습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아닌 데라가 여행의 주도권을 쥐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숨은 이야기가 있는 것일까요?
그 질문은 잠시 간직해 두시고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우리가 또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을 찾아보겠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대단한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났을 것이라고 미루어 추측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우상을 만들어 팔던, 우상 섬기던 아버지 밑에서 자란 사람이며 그도 역시 하나님이 아닌 우상의 덕으로 잘 먹고 잘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수24:1~2) 1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이게 하였다. 그가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그 우두머리들과 재판관들과 공직자들을 불러내니, 그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섰다.
2 그 때에 여호수아가 온 백성에게 말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소.
'옛날에, 아브라함과 나홀의 아비 데라를 비롯한 너희 조상은 유프라테스 강 건너에 살면서 다른 신들을 섬겼다.
잘 보세요. 언뜻 보면 다른 신들을 섬긴 조상이 데라 만을 지칭하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분명 그 앞에 ‘너희 조상들’이라는 말이 나오지요? 복수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신들을 섬긴 사람들은 데라 한 사람만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나홀과 데라를 모두 지칭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아브라함은 우상을 섬기던, 심지어 우상을 만들어 팔던 집안의 자식이었으며 본인도 집안의 내력을 좇아 우상을 섬기던 사람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왜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을 택할 때 집안내력이 이렇게 형편없는 사람을 택했을까요? 그와 동시대 사람인 욥을 택했으면 더 좋았을 것 같지 않으세요? 그는 하나님도 인정하는 의로운 사람이었으니까요.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바로 그런 불가능에서 출발하는 것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이러한 성경의 스토리를 엮어 이해하기 쉽게 각색을 한 번 해 보자고요. 어느 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우상을 섬기고 있던 아브라함에게 어떤 분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무조건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갈대아 지방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로서 이미 지금부터 4,000년 전에 수세식 화장실이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를 떠나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에게 거기보다 편하고 안전한 곳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꺼림칙한 일은 불운을 가져온다는 생각에 젖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오직 ‘복’을 위해 정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받을 ‘복’에 흠이나 티가 있으면 액운을 부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전전긍긍했을 것입니다. 그런 아브라함이 우상을 만들어 팔던 아버지 데라에게 그 이야기를 했을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신의 정체에 대해 모호함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우상이라는 것은 인간들이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 놓은 것이기 때문에 그 정체가 모호한 것은 당연하지요. 그런데 우상을 섬기던 아브라함에게 어떤 신이 나타나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그러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던 자들에게 이런 솔깃한 이야기는 없었을 것입니다. 어떤 신이 자기 말만 들으면 복을 부어준다는데 그걸 마다할 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혹시 그 말을 안 들었다가 나중에 험한 꼴이라도 당하면 자신들만 손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당시 가족의 통솔권을 쥐고 있던 아버지 데라가 자기 명령권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모아서 길을 떠난 것입니다. 왜요? 복 받으러 떠난 것입니다. 보세요. 갈대아 우르라는 세상에서 나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향하는 길은 이렇게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에 의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약속의 땅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약속의 땅을 선물로 주시는 분이 누구신지 전혀 알지도 못하고 요구도 할 수 없었을 때에 하늘로부터 땅으로 부어지는 것이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구원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당시는 자기가 살던 곳 이외의 다른 곳으로 가면 전혀 법적인 혜택을 받지 못하던 시기였습니다. 누가 때려 죽여도 말 못하는 자들이 바로 이방인이요 나그네였습니다.
그런 이방인의 삶을 살려니까 데라가 겁이 났겠지요? 그래서 데라는 갈대아 문명권 아래인 하란에서 머물다 죽습니다. 본토를 차마 떠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땅까지 못 간 것이지요. 그렇게 데라가 죽자 하나님께서 그 하란에서 아브라함에게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창12:1~6) 1 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3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4 아브람은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길을 떠났다. 롯도 그와 함께 길을 떠났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나이는 일흔다섯이었다.
5 아브람은,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재산과 거기에서 얻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길을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이르렀다.
6 아브람은 그 땅을 지나서, 세겜 땅, 곧 모레의 상수리나무가 있는 곳에 이르렀다. 그 때에 그 땅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우리가 보았듯이 스데반의 설교에서는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12장에서는 하란에서 나타나십니다. 그러니까 지금 창세기 12장의 하나님의 등장은 두 번째 등장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르에서 약속하신 것을 그대로 반복하십니다. 이렇게 75세까지 하란에 머물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끈질기고 고집스러운 권유로 드디어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나안에 들어가자마자 그 땅에 기근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곧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아마 아브라함은 그 꿈속에 나타났던 영감에게 속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복을 준다고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복은커녕 기근이 뭐냐고 투덜댔겠지요. 그러니까 뒤도 안 돌아보고 애굽으로 내려 간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애굽으로 가라 하지 않으셨거든요.
(창12:10~13) 10 그 땅에 기근이 들었다. 그 기근이 너무 심해서, 아브람은 이집트에서 얼마 동안 몸붙여서 살려고, 그리로 내려갔다.
11 이집트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는 아내 사래에게 말하였다. "여보, 나는 당신이 얼마나 아리따운 여인인가를 잘 알고 있소.
12 이집트 사람들이 당신을 보고서, 당신이 나의 아내라는 것을 알면, 나는 죽이고, 당신은 살릴 것이오.
13 그러니까 당신은 나의 누이라고 하시오. 그렇게 하여야, 내가 당신 덕분에 대접을 잘 받고, 또 당신 덕분에 이 목숨도 부지할 수 있을 거요."
믿음의 조상이라는 사람이 기근으로 그렇게 달랑 애굽으로 도망간 것도 가관인데 거기에 가서 자기 아내 때문에 자신의 신변에 위험이 닥칠 것 같으니까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 다른 남자의 품으로 보냅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그토록 닮고 싶어 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그걸 믿음이라고 하나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잘못을 한 아브라함은 놔두시고 애굽 왕 바로를 혼내주심으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당시 세계 패권을 쥐고 있던 애굽 왕 바로보다 훨씬 강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왜 아브라함을 혼내지 않으셨을까요? 그 때는 아직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징계를 감당할 만한 사람으로 성장하기 전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 후에도 아브라함은 그랄 왕에게 또 다시 사라를 팔아먹습니다.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이삭이 사라의 뱃속에 들어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오직 자신의 안전만을 위해 사라를 팔아먹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그의 인생여정 속에서 계속해서 실패하고 실수하며 가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하시고 가르치시며 가나안으로, 모리아 산으로 끌고 가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의 계획과 목적대로 이루시고야 마실 것이라는 것을 계속해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으로 던지시며 그 길을 가십니다. 계속해서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고 세상이 너로 인해 복을 받을 것이며 그렇게 복을 받은 너의 후손이 저 바다의 모래처럼 많고 저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약속을 하십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그 약속은 아브라함의 사람됨이나 인격이나 능력이나 노력을 근거로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 홀로 지켜내시는 약속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하신 후 제물을 쪼개 놓으라고 하신 후에 그 쪼개놓은 제물 사이를 홀로 지나가시지요?
(창15:12-18) 12 해가 질 무렵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가운데, 깊은 어둠과 공포가 그를 짓눌렀다.
13 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똑똑히 알고 있거라. 너의 자손이 다른 나라에서 나그네살이를 하다가, 마침내 종이 되어서, 사백 년 동안 괴로움을 받을 것이다.
14 그러나 너의 자손을 종살이하게 한 그 나라를, 내가 반드시 벌할 것이며, 그 다음에, 너의 자손이 재물을 많이 가지고 나올 것이다.
15 그러나 너는 오래오래 살다가, 고이 잠들어 묻힐 것이다.
16 너의 자손은, 사 대째가 되어서야 이 땅으로 돌아올 것이다. 아모리 사람들의 죄가 아직 벌을 받을 만큼 이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17 해가 지고, 어둠이 짙게 깔리니, 연기 나는 화덕과 타오르는 횃불이 갑자기 나타나서, 쪼개 놓은 희생제물 사이로 지나갔다.
18 바로 그 날, 주께서 아브람과 언약을 세우시고 말씀하셨다. "내가 이 땅을, 이집트 강에서 큰 강 유프라테스에 이르기까지를 너의 자손에게 준다
이 장면은 당시 히브리 사람들의 언약 관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당시 히브리 사람들은 두 사람이 언약을 할 때에 언약 당사자인 두 사람이 동시에 손을 잡고 그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감으로 해서, 둘 중 하나가 이 언약을 어기면 어기는 자가 이 쪼갠 고기처럼 쪼개질 것이라는 것을 약속하는 의식을 행했습니다. 히브리 관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홀로 그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너희 인간은 이 언약을 지킬 수 있는 자들이 아니므로 홀로 지켜 가시겠다는 당신의 의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인간의 역사는 모두 하나님의 언약과 반대 방향으로 달리는 역사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말라기에서 ‘너희의 힘으로는 나의 언약을 지켜낼 수 없다는 것을 알겠지?‘라고 구약의 문을 닫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홀로 쪼개진 고기 사이를 지나신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죄인들인 그의 백성들이 약속을 지켜낼 수 없었기에 쪼개지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게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을 지켜내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쪼개지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이 완성이 된 것입니다. 그 결과 탄생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탄생하게 된 것이지요. 그게 바로 여러분과 저, 교회인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은 계속 언약을 어겼으며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계속해서 아브라함의 인생을 좇아가 보지요. 하나님께서 그렇게까지 언약을 하셨음에도 아브라함은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보세요. 이게 믿음의 조상의 알량한 믿음입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 얼마나 참으셔야 합니까? 여러분 아브라함의 인생을 짚어 가시면서 아브라함 속에 있는 믿음의 후예인 여러분의 모습을 보셔야 합니다. 우리가 그런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없었다면 이미 지옥 불에 던져지고도 남을 만한 자들이 바로 우리인 것입니다.
그렇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이스마엘을 낳은 뒤 그로부터 13년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십니다. 그 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구십 구세였습니다. 그 동안 아브라함이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갈대아 우르에서 나타난 그 분 하나 믿고 가나안까지 왔는데 그 분이 십 삼년 동안 한 번도 안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힘이 들고 외롭고 두려웠겠습니까? 그런데 십 삼년 뒤에 그 분이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 너는 내 앞에서 완전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 속에 하나님의 섭섭함과 노여움이 잘 나타나있지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인데 왜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네 마음대로 하느냐는 질책이 그 속에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혼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구십 구세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랬더니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습니다. 금방 하나님께서 당신은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니 너는 나를 신뢰하고 좇으라고 말씀하셨는데도 아브라함은 그분을 신뢰하지 못하고 비웃었던 것입니다.
(창17:17-18) 17 아브라함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웃으면서 혼잣말을 하였다. "나이 백 살 된 남자가 아들을 낳는다고? 또 아흔 살이나 되는 사라가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18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아뢰었다. "이스마엘이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으면서 살기를 바랍니다.”
히브리서에 믿음의 조상의 대열에 번듯하게 올라있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도 하나님의 언약을 받고 웃습니다.
(창18:10-15) 10 그 때에 주께서 말씀하셨다. "다음 해 이맘때에, 내가 반드시 너를 다시 찾아오겠다. 그 때에 너의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사라는, 아브라함이 등지고 서 있는 장막 어귀에서 이 말을 들었다.
11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미 나이가 많은 노인들이고, 사라는 월경마저 그쳐서, 아이를 낳을 나이가 지난 사람이다.
12 그러므로 사라는 "나는 기력이 다 쇠진하였고, 나의 남편도 늙었는데, 어찌 나에게 그런 즐거운 일이 있으랴!" 하고, 속으로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13 그 때에 주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사라가 웃으면서 '이 늙은 나이에 내가 어찌 아들을 낳으랴?' 하느냐?
14 나 주가 할 수 없는 일이 있느냐? 다음 해 이맘때에, 내가 다시 너를 찾아오겠다. 그 때에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15 사라는 두려워서 거짓말을 하였다. "저는 웃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너는 웃었다."
그렇지요?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사라가 믿음으로 이삭을 낳았다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 자체가 모순을 갖고 있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우리가 믿음이란 단어를 잘 못 정의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 부분은 결론 부분에서 자세하게 정리를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보세요. 우리가 아브라함의 일생을 살펴보았듯이 그렇게 어느 한 가지 제대로 한 적 없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징계와 교훈과 훈련을 거친 후 백세에 낳은 자식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리는 실력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창22:16-18) 16 말하였다. "주의 말씀이다. 내가 친히 맹세한다. 네가 이렇게까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아끼지 않았으니,
17 내가 반드시 너에게 큰 복을 주며, 너의 자손이 크게 불어나서,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아지게 하겠다. 너의 자손은 원수의 성을 차지할 것이다.
18 네가 나에게 복종하였으니, 세상 모든 민족이 네 자손의 덕을 입어서, 복을 받게 될 것이다."
잘 보시면 하나님께서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바친 아브라함을 칭찬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은 이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반복해서 주신 언약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백세에 낳은 이삭을 하나님께 아낌없이 믿음으로 바친 아브라함에게 마치 상으로 주시는 것처럼 이야기 하십니다.
(창12:1-3) 1 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3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창15:5) 주께서 아브람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가서 말씀하셨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그리고는, 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자손이 저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
그렇지요? 이미 이렇게 아브라함에게 주어졌던 언약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떤 결론이 나옵니까? 하나님은 이미 이 복을 아브라함에게 주기로 작정하시고 당신께서 직접 아브라함을 그 복을 받을 만한 자로 만들어 내신 것이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순종해서 그 복이 주어진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창세기22장에서 이삭을 드릴 수 있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되는데 아브라함이 한 일이 뭐가 있습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서 끌고 가시지 않았나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개입하시고 간섭하셔서 만들어 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말씀의 해석의 키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죄와 허물로 죽어있던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완성시켜 내시는 출발점에서부터 마지막 도착점까지 전부를 믿는 것을 믿음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하나님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에게서 먼저 배태되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잘 이해하세요.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믿음이 우리에게 먼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믿음 말입니다.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과 섭리와 계획과 언약 이 모든 것들을 믿음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우리의 삶에 뚫고 들어와 우리를 징계하시기도 하고 달래시기도 하고 설득하시기도 하면서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믿음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믿음이 우리를 덮쳐올 때에 우리는 그 인생의 질곡을 겪으면서 ‘아 하나님은 정말 전지전능하신 유일하신 분이시구나. 우리는 그 분을 의지할 때만 참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구나. 어서 항복하자’라고 그 분 앞에 두 팔을 들어 올리는 것을 우리의 믿음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믿음이 우리를 뚫고 들어오는 것을 객관적 믿음이라 하는 것이고 우리가 그 하나님의 믿음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을 참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믿게 되는 것을 주관적 믿음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기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해가 가시지요? 그래서 그 믿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릴 때에 어떤 믿음의 소유자였습니까?
(히11:18-19) 18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삭에게서 너의 자손이라 불릴 자손이 태어날 것이다" 하셨습니다.
19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되살리실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비유하건대,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되받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음 가운데서도 반드시 다시 살리실 것을 믿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던 갈대아 우르의 형편없는 겁쟁이가 하나님의 이끄심과 인도하심과 가르침과 징계와 교훈으로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도 다시 살리시는 분”이라는 믿음으로 백세에 낳은 자식의 가슴에 칼을 꽃을 수 있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는 것을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는 말로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들어내신 믿음을 소유한 첫 번째 모델이라는 의미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 하는 것이지 그가 뭔가 대단해서 믿음의 조상이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여러분 중에는 자신의 유익을 위해 아내를 두 번이나 팔아먹는 파렴치한은 없잖아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을 본받을 생각 마시고 그 나약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어 내신 하나님을 신뢰하시란 말입니다.
히브리서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알지도 못했을 때부터 “믿음으로 아브라함은”이란 말을 쓰는 이유가 바로 그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에게서 출발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롬4:1-2) 1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2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게 되었더라면, 그에게는 자랑할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정확하지요? 믿음은 이렇게 하나님의 전적인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믿음에서 우리의 믿음이 배태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아직은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그 객관적인 믿음이 어느 날 나에게 이해되어지고 인식되어지며 믿어지게 되는 주관적 믿음으로 나타나는 것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말의 진의인 것입다.
그래서 히브리서11장에는 모세와 기드온과 입다와 삼손과 바락의 이름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말의 내용은 알았습니다.
이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말과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 는 말을 병행구로 같은 의미의 어구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 는 말씀은 마틴 루터를 비롯한 종교 개혁자들의 개혁이념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서신 서에도 세 번이나 나오는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하는 구절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말을 구약의 어딘 가에서 인용을 한 것인데 그 구절을 밝혀보면 오늘 구절의 의미가 보다 선명해 질 것입니다.
(합2:4) 마음이 한껏 부푼 교만한 자를 보아라. 그는 정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사도바울이 이 하박국의 내용을 인용했을 때는 하박국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 말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럼 하박국의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인지 알면 우리가 사도바울의 로마서 내용을 밝혀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박국은 BC600년에서610년 사이에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BC 600-610년 사이면 북 이스라엘이 멸망하고(BC722) 남 유대가 바벨론에게 멸망하기(BC586) 바로 전의 시대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패역할 대로 패역한 시기였습니다. 하박국서를 잘 읽어보시면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기고 부도덕한 짓들을 자행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선지자인 하박국이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저렇게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자들은 잘 살고 하나님을 잘 섬기겠다고 하는 자들은 이렇게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어떻게 일을 그렇게 하십니까? 하고 하박국이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묵묵부답입니다. 그랬더니 하박국이 내가 이렇게 부르짖는데 왜 주님이 듣지 않으시냐고 소리를 지릅니다.
(합1:2~4)(표준 새 번역)
2 살려 달라고 부르짖어도 듣지 않으시고, "폭력이다!" 하고 외쳐도 구해 주지 않으시니, 주님, 언제까지 그러실 겁니까?
3 어찌하여 나로 불의를 보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악을 그대로 보기만 하십니까? 약탈과 폭력이 제 앞에서 벌어지고, 다툼과 시비가 그칠 사이가 없습니다.
4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합니다. 악인이 의인을 협박하니, 공의가 왜곡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5절부터 대답을 하시는데 “그래 내가 갈대아 인들을 들어서 너희 이스라엘을 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합1:5~8)
5 "너희는 민족들을 눈 여겨 보아라. 놀라고 질겁할 일이 벌어질 것이다. 너희가 살아 있는
6 이제 내가 바빌로니아 사람을 일으키겠다. 그들은 사납고 성급한 민족이어서, 천하를 주름 잡고 돌아다니며, 남들이 사는 곳을 제 것처럼 차지할 것이다.
7 그들은 두렵고 무서운 백성이다. 자기들이 하는 것만이 정의라고 생각하고, 자기들의 권위만을 내세우는 자들이다.
하박국이 깜짝 놀랍니다. 갈대아 인은 바벨론 사람들입니다. 당시 앗수르와 비교해서 형편없는 약소국이었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잔인한 자들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악함을 치시는데 더 악한 자들을 들어서 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갈대아는 이스라엘의 소유를 빼앗아다가 잘 먹고 잘살기까지 합니다. 그러니까 하박국이 ”왜 악인이 의인을 삼키는 데 가만히 계시냐“고 또 따집니다.
(합1:12~16)
13 주께서는 눈이 맑으시므로, 악을 보시고 참지 못하시며, 패역을 보고 그냥 계시지 못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배신자들을 보고만 계십니까? 악한 민족이 착한 백성을 삼키어도, 조용히만 계십니까?
14 주께서 백성들을 바다의 고기처럼 만드시고 다스리는 자가 없는 바다 피조물처럼 만드시니,
15 악한 대적이 낚시로 백성을 모두 낚아 올리며, 그물로 백성을 사로잡아 올리며, 좽이로 끌어 모으고는, 좋아서 날뜁니다.
16 그러므로 그는 그 그물 덕분에 넉넉하게 살게 되고 기름진 것을 먹게 되었다고 하면서, 그물에다가 고사를 지내고, 좽이에다가 향을 살라 바칩니다.
하박국은 지금 자신은 의로우며 이스라엘은 선민이라는 전제하에서 하나님께 따지고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갈대아의 야만인들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치시느냐고 따지는 것이지요. 그리고 2장으로 넘어가서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들어보겠다고 기다립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하박국에게 말씀을 하시는데 “하박국아 너는 너와 이스라엘이 선민이고 율법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라고 스스로 의인인 줄 알고 있나본데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나 이스라엘이나 바벨론이나 똑같은 자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믿음을 선물로 주신 자들만이 의인이며 그들만이 살아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자들을 교훈하고 가르치기 위해 들어 쓰고 있는 악인들은 정한 때가 되면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명확하게 밝히십니다.
(합2:2~4) 2 주께서 나에게 대답하셨다.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라. 판에 똑똑히 새겨서, 누구든지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여라.
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되어야 이루어진다. 끝이 곧 온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공연한 말이 아니니, 비록 더디더라도 그 때를 기다려라. 반드시 오고야 만다. 늦어지지 않을 것이다.
4 마음이 한껏 부푼 교만한 자를 보아라. 그는 정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그리고 갈대아 사람들이 어떻게 저주를 받을지 다섯 가지로 설명을 해 주십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대답을 해주시자 하박국은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얻었습니다.
“아, 그런 것이 군요, 하나님. 우리는 뭐가 잘나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선물해 주시는 믿음으로 살아난 자들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수준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오히려 악인들을 들어서 우리를 훈련하시고 양육하시는 것이 군요, 하나님 수년 내에 우리를 부흥케 하시고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라고 합니다.
(합3:2) 2 주님, 내가 주의 명성을 듣습니다. 주님, 주께서 하신 일을 보고 놀랍니다. 주의 일을 우리 시대에도 새롭게 하여 주십시오(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우리 시대에도 알려 주십시오. 진노하시더라도, 잊지 마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부흥”이라는 말은 성경 전체에서 여기 한번 나오는데 “깨끗하게 교정하다”“악을 제거하다”의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것처럼 사람이 많아지고 재산이 늘어나는 것을 부흥이라 하지 않습니다. 하박국은 지금 “하나님 우리 이스라엘이 부자가 되고 사람이 늘어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박국은 “하나님 그런 것이라면 바벨론을 들어서라도 빨리 우리의 악을 제거해 주십시오, 그러나 우리가 벌을 받고 있을 때라도 장차 임할 구원을 준비하게 하소서” 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개념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잘 분별하고 기억하세요.
하박국은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 홍해를 가르고 해를 멈추게 하시고 하신 역사적 객관적 사실들을 떠올리며 하나님은 반드시 그 일을 이루실 것을 하박국은 확인합니다. 그게 하박국서입니다.
하박국서의 마지막을 보면 하나님의 계시로 자기에게 떨어졌어야 할 그 저주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 알자 하박국은 창자가 흔들리고 입술이 떨리며 뼈가 썩고 몸이 떨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바벨론에게 떨어질 그 무시무시한 저주가 자기에게 떨어질 것이었는데 자기는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 의인이 되어있음에 하박국은 기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로 그 위대한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나보다 죄인들이 더 잘 살고 나의 무화과나무에는 열매가 없고 나의 포도원에는 포도가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도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어도 나는 내게 믿음을 선물하셔서 나에게 이루신 그 구원만으로도 난 기뻐 할 수 있다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합3:16~18) 16 그 소리를 듣고 나의 창자가 뒤틀린다. 그 소리에 나의 입술이 떨린다. 나의 뼈가 속에서부터 썩어 들어간다. 나의 다리가 후들거린다. 그러나 나는, 우리를 침략한 백성이 재난당할 날을 참고 기다리겠다.
17 무화과나무에 과일이 없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을지라도, 올리브 나무에서 딸 것이 없고 밭에서 거두어들일 것이 없을지라도,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주 안에서 즐거워하련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련다.
이렇게 믿음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셔서 하나님께서 마치시는 것이며 하나님의 선물이고 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고”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엡2:8-9) 8 여러분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9 구원이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님은, 아무도 그것을 자랑할 수 없게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믿음은 우리에게서 먼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물이며 은혜의 소산입니다. 그렇게 믿음은 하나님에게서 먼저 나온 것이기에 절대 실패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객관적 믿음인 하나님의 선물은 우리에게 반드시 주관적 믿음을 이끌어 내시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들을 죽이시면서까지 우리를 건져내신 그 분이 실패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빌1:6) 여러분 가운데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분이,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확신합니다.
걱정하지세요. 조바심 내지 마세요. 왜 나는 지금까지 이 모양이냐고 좌절하지도 마세요. 분명 하나님은 우리를 완성하실 것이고 우리 대적들은 모두 저주의 지옥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문이 닫히고 다시는 열리지 않을 그 곳으로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잘 참으시고 인내하세요. 믿음은 반드시 믿음에 이르게 하며 의인은 믿음으로 반드시 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19장 캘빈주의 오대 강령으로 본 하나님의 사랑
(요3:14-16)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과 같이, 인자도(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하늘에 있는 인자도') 들려야 한다.
15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해석자에 따라 15절에서 인용을 끝내기도 함)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
‘금준미주는 천인 혈이요, 옥반가효는 만성 고라, 촉루 낙 시 민 루 낙이요, 가성고처에 원성 고라‘
가렴주구를 일삼던 변 사또의 생일잔치에 어사또 이몽룡이 남루한 옷을 입고 들어가 써 내려간 시입니다. 춘향전을 보면 이몽룡이 이 시를 일필휘지로 잔치 상에 던졌을 때 이 시의 의미를 알아들었던 사람들은 모두 슬슬 도망을 가서 살았지만 무슨 소린지 관심도 안 두고 못 알아들었던 사람들은 모두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던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암행어사가 불시에 출두하듯이 그렇게 예수님께서 곧 오실 것입니다. 변 사또의 잔치 상에 떨어졌던 경고의 메시지처럼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계속해서 경고의 계시를 내리고 계십니다. 그러데 그 경고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잘못 알아듣고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처참한 지경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을 50독 100독을 하고 심지어 성경을 외우는 사람도 있는데 그 진의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읽고 있는 것은 모르는 것만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정말 성경이 무슨 주제로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지 제대로 잘 알고 계신가요?
우리가 오늘 공부할 본문인 요한복음 3장16절만큼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성경구절은 없을 것입니다. 일전에 크리스마스에 즈음하여 어떤 절에 갔더니 절 입구에 이 말씀이 붙어있었습니다. 중들도 이 말씀은 알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 구절은 그만큼 잘 알려져 있고 우리에게 힘이 되기도 하는 성경구절입니다.
시카고의 무디 교회에 초청되었던 영국의 젊은 복음전도자 무어 하우스가 요한복음 3장16절 한 절만 가지고 두 달을 설교를 한 일화가 있을 정도로 이 구절에는 깊고 심오한 복음이 담겨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 대한 바른 이해가 조금 아쉽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 캘빈주의 오대 강령 중 하나인 하나님의 무조건 적인 선택(unconditional election)과 제한적 속죄(limited atonement)에 초점을 두고 공부 할 것입니다. 오늘 공부할 내용을 잘 이해하신다면 나머지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도 쉽게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먼저 16절에 나오는 “세상”이라는 단어를 이해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이 “세상”이라는 말의 이해가 교파 간에 이견이 많습니다.
칼 라너 같은 보편 구원론(universalism)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 는 말씀을 가지고 “거봐라, 하나님은 어차피 모든 인간을 다 구원하실 것이다.” 라고 주장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자기가 창조한 인간이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당하는 것을 그냥 보고만 계실 리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하나님의 속성상 불가능한 것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두 번째로 알매니안 주의자들은 “하나님은 전 인류를 위해 일단 아들을 죽이시고 그것을 믿어주는 자들을 기특히 여겨 구원을 해 주시는 것이라고“주장을 합니다. 따라서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의 ”세상“은 보편 구원론 자들의 그 말처럼 전체 세상을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미 모든 인간에게는 선행적 은총, 즉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는 인간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사담이지만 만일 그렇다면 정말 저는 자신 없습니다.
그럼 과연 그 “세상”이 과연 보편 구원론 자들과 알매니언 주의자들이 말하는 전 인류를 말하는 것일까요?
신약 성경에 “세상”이라는 말이 185회나 나옵니다. 그 중에 105번이 요한의 글에 나옵니다.
요한은 이 말을 두 가지 의미로 쓰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로 쓰고 있는지 살펴보고 오늘 본문의 “세상”은 그 중 어디에 속하는지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요한이 쓴 세상이라는 단어의 원어는 헬라어로 “코스모스”입니다. 이 말은 원래 잘 꾸며진 “장식”이라는 뜻입니다. 그 단어는 다시 말하면 요모조모로 잘 꾸몄거나 잘 조화되어서 아름답거나 우아한 사물을 가리키는 단어였습니다. 여기서 "cosmetic"이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그러한 이 코스모스라는 단어는 시간 속에서 우주를 묘사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맞는 말이지요. 우주는 하나님께서 정확하게 질서를 잡아 놓으시고 조화 있게 만들어 놓으신 아름다운 곳이니까요. 예전에 대학1년 때 하나님께서 안 계시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서 동양철학을 공부하고 UFO에 심취해서 UFO사진을 찍으러 다니곤 했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하나님이 안 계시다는 것을 증명해 보고 싶었으니까요. 아니 저에게는 성경의 하나님만 없으면 되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그랬습니다. 그 혈기 왕성한 대학 시절에 하지 말라는 것은 왜 그리 많고 하라는 것은 또 왜 그리 많은지 정말 너무 불편해서 하나님이 안 계시다는 것을 증명하고 마음 편히 놀고 싶어서 UFO를 연구하기 위해 우주를 공부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주를 알면 알수록 누군가가 만들어 놓지 않으면 이렇게 질서정연하고 변함없이 그 거대한 우주가 매년 매달 매일 매시 매초를 정해진 길을 따라 움직일 수 없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주를 공부하면 할수록 정말 “아름답고 거대하다”는 말로 밖에는 표현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질서를 잡으시고 운행하고 계시는 이 우주에서 우리 인간에게 가장 의미 있는 곳이 당연히 지구이고 그 지구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세상” “코스모스”라는 단어가 적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세상”의 의미는 대부분 하나님과 관계없이 이 땅을 살아가는 전 인류를 “세상”이라 표현했습니다. 제가 알매니언 주의를 지지하는 이들이나 보편 구원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손을 들어주는 것 같지요? 끝까지 들어보세요. 헬라어에 능통했던 히브리 사람들에게 세상이라는 말은 그렇게 그리스도에 대적하는 인류를 지칭할 때 쓰였고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과 대조하여 사용되었습니다.
“세상”이라는 말이 그렇게 아담 이후로 태어난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인류를 지칭하는 것이면, 16절의 말씀대로 하면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이 됩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아담을 포함한 전 인류인 “세상”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구속사를 그렇게 보는 보편 구원론 자들은 그렇게 어차피 모든 인간은 천국에 가게 될 것이라는 아주 낙관적인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와는 조금 다르지만 알매니언 주의자들은 이미 우리에게는 믿을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예수님은 모두를 위해 죽으셨으므로 우리가 의지를 발동해서 믿기만 하면 우리는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먼저 보편 구원론 자들의 의견에 대한 반박을 해보겠습니다.
정말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모든 인류를 사랑하셔서 그 아들 독생자를 보내셨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 독생자가 전 인류의 죄 값을 모두 치러 놓았는데 지옥 가는 사람은 뭡니까? 지옥은 그냥 인간들에게 겁을 주기 위해 만들어 낸 거짓 개념인가요?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 지옥에 가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마23:13,15) 13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닫기 때문이다. 너희는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5)(14절 없음)(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14. 이 위선자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과부의 집을 삼켜 버리고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한다. 그러므로 무서운 심판을 받을 것이다'가 첨가되어 있음). 15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개종자 하나를 만들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하나가 생기면, 그를 너희보다 배나 더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눅13:28-29) 28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는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는 바깥으로 쫓겨난 것을 너희가 보게 될 때에, 거기에서 슬피 울면서 이를 갈 것이다.
29 사람들이 동과 서에서, 또 남과 북에서 와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잔치 자리에 앉을 것이다.
그렇지요? 이렇게 성경은 지옥의 존재에 대해 분명한 기술을 하고 있습니다. 보편 구원론 자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자기 독생자인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죽이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죄의 값이 다 치러지고 그들은 놓임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럼 지옥 가는 사람 하나도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지옥 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마치 내가 가게에 외상값이 있었는데 우리 아버지가 다 갚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가게 주인이 또 다시 나에게 외상값을 요구하는 것과 방불한 것입니다. 그렇게 가게 주인이 아버지에게도 받고 나에게도 그 외상값을 요구한다면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이듯이 하나님이 아들을 통해 갚으신 죄 값을 어떤 사람들에게는 또 다시 지옥의 형벌로 갚을 것을 요구한다면 하나님은 나쁜 가게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일을 하시겠습니까?
그러니까 보편 구원론 자들은 지옥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신데 무슨 지옥 같은 것을 만들어 놓고 사람들을 괴롭히시겠느냐는 것이지요. 그러면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는 어떻게 채워질 수 있는 건가요? 그들의 주장은 하나는 알고 둘은 생각지 않는 짧은 소견인 것입니다.
두 번째로 알매니안 주의자들에 대한 반박을 해보겠습니다.
서두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알매니안 주의자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분명 “세상”을 위해 아들을 보내서 죽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 놓고 인간이 스스로 그 예수의 죽음이 자기의 죄를 대속 했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수준으로 잘 살아내면 구원을 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지옥에 넣어 버리신다고 믿고 있는 것이 알매니언 주의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열심을 냅니다. 착하게 살려고 열심을 내고 탈락하지 않으려고 전도도 최선을 다해서 합니다. 그렇다면 만일 하나님께서 아들을 죽여서 죄를 사해 놓았는데 인간들이 하나도 안 믿어주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괜히 죽으신 것이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그렇게 계획 없이 인간의 선택과 의지에 좌지우지하시며 일을 하시겠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인간 구원의 주도권은 하나님이 아닌 인간들 자신에게 있는 것이 됩니다. 그게 무슨 은혜입니까? 정당한 대가이지요. 구원은 선물이라면서요?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전 인류를 위해 오셔서 죽으신 것도 아니고 일단 전 인류를 위해 죽어 주셨다가 아무도 안 믿어주면 그냥 없던 걸로 해 버리는 허탈한 일을 하시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분명 어떤 택해진 한 무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요17:6) 나는, 아버지께서 세상에서 택하셔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냈습니다. 그들은 본래 아버지의 사람들인데, 아버지께서 그들을 내게 주셨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중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사람들을 위해 오신 분이라고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십니다. 전체 세상이 아닙니다. 다른 곳을 한 군데 더 볼까요?
(요17:9) 나는 그들을 위하여 빕니다. 내가 세상을 위하여 비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사람들을 위하여 빕니다. 그들은 모두 아버지의 사람들입니다.
어떠세요? 예수님은 지금 세상을 위함이 아닌 아버지께서 당신께 주신 자들만을 위해 간구를 하고 계십니다.
(요17:14-16) 14 나는 그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는데, 세상은 그들을 미워하였습니다. 그것은, 내가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은 것과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15 내가 아버지께 비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에게서 (또는 '악에서') 그들을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과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보시다시피 지금 예수님의 관심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자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어떤 한 무리에게만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만을 위해서 오셨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요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더라면, 세상이 너희를 자기 사람이라고 하여 사랑했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고,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가려 뽑았으므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
하나님께서 전 인류인 “세상”을 위해 오셨다면 왜 제자들보고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고 하시겠습니까? 분명 하나님은 세상에서 건짐을 받은 어떤 무리만을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럼 오늘 본문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에서의 세상은 무엇일까요?
말씀 드린 대로 요한복음에서는 이 “세상”이라는 말이 두 가지 의미로 쓰입니다.
요한은 “세상”이라는 단어를 처음에 언급한 것처럼 죄를 짓고 타락하여 영원히 영벌에 처해질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그리스도의 반대 세력들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죄로 인해 영원히 죽어야 할 자들 중, 즉 세상 중에서 건져내어짐을 받은 무리를 향해서도 “세상”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오늘 본문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에서의 세상이 바로 그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구절에서의 강조점은 하나님께서 세상과 같은 자들을 사랑하셨다는 데에 있는 것이지 누구를 사랑하셨는지에 대한 사랑의 대상에 대해 초점이 있는 구절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래 세상이었으나 지금은 그 세상 중에서 건짐을 받은 바로 그 ‘세상’ 즉 교회를 사랑하셨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전에 성령의 사역에서 살펴 본 것처럼 성령이 오시면 그 분이 세상을 책망하신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다시 볼까요?
(요16:8) 그가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꾸짖어 바로잡아 (책망하다. 깨닫게 하시리라) 주실 것이다.
여기서 ‘책망하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엘렝코”는 여기서는 깨닫게 하다는 뜻으로 번역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시라는 것을 다 아시지요? 만일 성경에 쓰인 세상이라는 단어가 모두다 전체 세상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이 구절은 말도 안 되는 구절이 되는 것입니다. 죄인들은 절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이해할 수도 없고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모든 세상 사람들에게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깨닫게 하러 오셨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아닙니다. 여기서도 세상은 죄악 된 세상에서 건져내어짐을 받은 사람들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요1:29) 이튿날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여기도 보세요. 주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는 죄로 인해 죽어야 할 세상 중에서 건짐을 받은 소수의 구원 받은 세상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를 전 인류를 위해 보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 죄에서 건져내어짐을 받아 천국에 들어가게 될 창세전에 택해진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알매니안 주의나 보편 구원론 자들의 오류에 빠지셔서 어떻게 살아도 모든 사람이 다 천국에 가게 될 것이라는 허탄한 기대나, 구원에는 나의 의지와 선택이 상당 부분 적용이 된다는 이단 사설에 속으시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총체적으로 타락을 한 인간들 중에서 (전적타락)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들의 공로나 신분이나 노력이나 자격에 의해서가 아닌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의해 창세전에 선택하시고 (무조건적인 선택) 그렇게 선택된 자들만을 위해 십자가를 지심으로 (제한적 속죄) 그들이 구원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요구하지도 않았을 때에 그들에게 구원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불가항력적 은혜) 그렇게 은혜를 입은 자들은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구원의 완성지점까지 반드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견인) 여기까지는 이해가 가시지요? 여러분은 칼빈주의 오대 강령을 다 공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처럼 사랑하사”에서 그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그 사랑의 크기를 알려면 “누가” 우리를 사랑했는가를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과연 어떤 분이 죄로 말미암아 모두 파멸 당할 세상에서 우리를 건져내셔서 얼마나 큰 사랑으로 사랑하셨는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이신가요? 태초에 말씀 한마디로 천지를 창조해 내신 우리의 이성밖에 계신 크신 분이십니다. 그 천지를 창조하신 권능의 하나님께서 멸망당할 자들 중에서 어떤 한 무리를 택해서 사랑하셨습니다. 얼마나 사랑하셨다고요? “이처럼”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16절의 이처럼은 무엇을 받는 것입니까? 도대체 얼마나 큰사랑이기에 “이처럼” 사랑하셨다고 하셨는가요? 먼저 본문 14절과 15절을 함께 읽고 1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요3:14-15)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과 같이, 인자도(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하늘에 있는 인자도') 들려야 한다. 15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해석자에 따라 15절에서 인용을 끝내기도 함)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
그러니까 14절과 15절의 내용이 바로 ‘이처럼’의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이처럼‘이라는 단어가 담지하고 있는 내용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예수님이 들려야 한다.”입니다.
그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사건을 자세히 알아야 하겠지요? 그 내용이 어디에 나옵니까? 우리가 그 사건이 무엇인지를 잘 살펴보면 오늘 본문의 “이처럼 사랑하셨다”의 내용을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민수기로 가보겠습니다.
(민21:4-9) 4 그들은 에돔 땅을 돌아서 가려고, 호르 산에서부터 홍해 길을 따라 나아갔다. 길을 걷는 동안에 백성들은 마음이 몹시 조급하였다.
5 그래서 백성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였다. "어찌하여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왔느냐? 이 광야에서 우리를 죽이려고 하느냐? 먹을 것도 없다. 마실 것도 없다. 이 보잘것없는 음식은 이제 진저리가 난다."
6 그러자 주께서 백성들에게 불뱀을 보내셨다. 그것들이 사람을 무니, 이스라엘 백성이 많이 죽었다.
7 백성이 모세에게 와서 간구하였다. "주님과 어른을 원망함으로써 우리가 죄를 지었습니다. 이 뱀이 우리에게서 물러가게 해 달라고 주께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모세가 백성들을 살려 달라고 기도하였다.
8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불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사람은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 것이다."
9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로 뱀을 만들어서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에, 물린 사람은 구리로 만든 그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모세에게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한 두 번이 아닌 지속적인 불평입니다. 왜 애굽에서 잘 살고 있는데 끌고 나와서 이렇게 고생시키느냐고 모세를 몰아세웁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진노의 불 뱀을 보내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불 뱀에게 물려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놋으로 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 장대에 달린 놋 뱀을 쳐다보는 자는 살아날 것이라는 약속과 함께 하나님은 유일한 처방을 내려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 장대에 달린 놋 뱀을 쉽게 쳐다보았을까요?
아닐걸요? 당시에는 불 뱀에게 물리면 술이나 고약 등을 사용해서 치료를 했었습니다. 아마 이스라엘은 놋 뱀을 쳐다보는 대신에 그러한 자신들의 처방을 더 신뢰했을 것이고 그런 것들을 준비하느라 놋 뱀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뱀은 죄, 죄인, 죄의 원흉인 사탄, 심판, 저주 등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이미 모세로부터 창세기를 배웠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제일 싫어하는 짐승이 무엇이었을까요? 당연히 에덴동산의 뱀이지요. 게다가 그것을 놋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놋은 심판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놋 뱀은 그 자체가 저주 받은 자의 심판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장대에 달라고 하시고는 그것을 쳐다보는 자만이 살아난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금방 떠오르는 것이 있지요? 골고다에서 저주받은 자가 되셔서, 우리의 죄가 되셔서 장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받은 뱀이 되신 예수를 믿는 것만이 우리가 구원에 이르게 되는 길이라는 것을 하나님은 그 장대의 놋 뱀을 통해 미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신21:23) 그러나 너희는 그 주검을 나무에 매달아 둔 채로 밤을 지내지 말고, 그 날로 묻어라. 나무에 달린 사람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에게 유산으로 준 땅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고후5:21) 하나님께서는 죄를 모르신 분에게, 우리 대신에 죄를 씌우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입니다
이스라엘, 즉 교회가 그 저주받은 장대위의 뱀을 쳐다보면 산다고 하는 것은 믿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뱀을 놋으로 만들어서 장대에 달아서 그것을 쳐다본다고 뱀독이 없어지겠습니까? 그 놋 뱀에서 갑자기 레이저 광선이 나와서 쳐다보는 사람마다 뱀에 물린 자리에 광선이 쬐어져서 독이 다 없어지고 그러겠습니까? 이 놋 뱀의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지게 될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자세히 설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즉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어떤 한 무리의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모두 짊어지시고 저주받은 뱀, 심판 받은 뱀 즉 저주와 심판을 받은 죄인이 되셔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그들의 죄를 모두 도말해 버리시고 그들에게 영생을 허락하시는 구원의 이야기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구원은 우리의 행위가 보태져서 오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은혜로만, 믿음으로만 우리에게 허락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 바로 놋 뱀의 사건입니다.
구원은 그렇게 우리의 행위는 단 1%도 보탤 수 없는 완전한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그게 ‘이처럼’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의 주도하에 당신의 아들을 저주의 장대에 매다시는 당신의 방법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우리에게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쏟아 부으신 것입니다. 그게 ‘이처럼 사랑하사’입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들이 뱀에게 물리고 고약이라든가 술등을 사용해서 독을 빼내려는 시도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방법으로 살아난 사람을 단 한 사람도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죄라는 것은 그만큼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인간적인 처방이 있을 수 없는 불 뱀의 독 같은 것이 바로 우리의 죄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해독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 뱀독, 즉 죄를 해결해 주겠다고 인간적인 처방을 제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헌금을 많이 해라. 선행을 해라. 업적을 쌓아라. 금식해라. 기도해라‘ 그러면 그 죄가 상쇄되고 소멸될 수 있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길은 죽음의 길입니다. 그 동안에도 독은 점점 그 사람의 몸에 퍼져 나가고 결국엔 영적 죽음을 맞이할 뿐입니다.
둘째로 그들은 뱀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 이제 불 뱀에게 물리지 않을 수 있게 앞으로는 원망도 말고 불평도 말고 조심하자” 라고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설사 그렇게 뉘우쳤다고 하더라도 이미 그들은 불 뱀에 물려 있는 상태입니다. 독은 퍼져가고 있습니다.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죽어가고 있는 자가 앞으로 자기의 행위를 올바로 갖겠다고 아무리 결단을 해도 그것이 그 목숨을 건져 낼 수 있는 방법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전3:15) 지금 있는 것 이미 있던 것이고, 앞으로 있을 것도 이미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신 일을 되풀이하신다(또는 '과거를 다시 불러 오신다' 또는 '지나간 것을 다시 찾으신다').
아무리 앞으로 자신의 삶을 개선하여 잘 살겠다고 다짐해도 이미 지어 놓은 죄는 어쩔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장사를 하고 있는데 몇 달 동안 외상값을 갚지 않은 손님이 와서 “지난 외상은 다 잊고 , 이제부터는 내가 꼬박 꼬박 물건 값을 다 낼 테니 다시 거래합시다.” 하면 그냥 거래를 하는 바보가 있겠습니까? 지난 외상값을 갚아야 거래는 기분 좋게 다시 시작되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일시적인 도덕적인 개선이 우리를 불 뱀의 독에서 구해내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은 불 뱀에 물린 자들더러 그 불 뱀과 싸워서 불 뱀을 없애 버리라고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회를 개선하고 정의를 구현하여 그리스도의 푸른 계절을 오게 해야 한다고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환경이 개선되고 사회정의가 구현되면 죄는 없어지고 지상천국이 올 수 있을 거라 착각들을 합니다. 그렇게 기독교인들의 사회참여를 독려하는 여러 단체들이 있습니다. 그 분들이 참 좋은 일도 많이 하지만 자칫 이런 잘못된 신념을 성도들에게 심어줄 수도 있는 위험도 함께 갖고 있습니다.
불 뱀에 물린 자들은 사회정의를 외치며 촛불 들고 광화문에 나가서 시위를 하는 순간에도 그들의 몸에는 뱀독이 서서히 퍼져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회정의는 우리 성도들이 구원의 복된 소식을 잘 이해하고 그렇게 구원을 얻은 자들에게 요구되는 삶을 잘 살아내게 될 때 그들의 삶을 통해 자연스럽게 향기로 퍼져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기독교인들의 무조건 적인 사회 불 참여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분명 약자를 위해 가난한 이들을 위해 우리의 것을 희생해서 도와주고 섬겨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잘 못된 길을 가고 있는 위정자나 지도자들에게 올바른 권고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마치 그런 것을 하면 우리가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식의 접근은 안 된다는 것이지요. 슈바이처나 간디의 삶을 본받아 우리가 도덕적 윤리적 삶을 잘 살아내면 세상이 우리를 본받을 것이라는 착각은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이 빠진 사회참여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는 당찬 기대는 빨리 접으라는 것이지요. 이 세상은 복음으로만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 세상은 복음을 복된 소식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므로 결국 불타 없어지는 운명으로 치닫게 될 것이라 말씀하셨지 그리스도인들의 열심으로 세상이 지상 천국으로 화하게 될 것이라고는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놋 뱀 조각을 지니거나, 놋 뱀을 단 장대를 지니고 있으면 불 뱀의 독이 없어진다고 말씀하신 적도 없습니다. 전 세계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나무 파편이라고 팔린 것들을 합쳐 보면 커다란 성당 다섯 개는 지을 만한 분량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몸에 지니면 재수가 좋고, 자신에게만 좀 더 나은 은혜가 올 것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경을 자동차의 뒤 유리 밑에다 두고 다니면 사고가 안 날 것이라는 착각을 하기도 합니다. 십자가 목걸이하고 다니면 왠지 거룩해 지는 느낌을 받는 사람도 있다고 하지요? 그건 부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고 가지고 다니는 십자가는 부적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오늘 날에는 십자가와 성경을 무슨 부적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니까요? 드라큐라 영화를 너무 많이 봐서 그래요. 여러분 드라큐라가 십자가를 무서워 할 것 같으세요? 사도행전에서도 확인했듯이 예수의 이름을 댄다고 해서 귀신들이 전부 도망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믿고 그 분이 우리에게 행하신 은혜의 십자가를 정확히 이해한 자에게만 예수의 이름과 십자가는 위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에게는 귀신들이 범접을 할 수 없습니다. 그도 그런 것이 그 사람 안에는 성령 하나님이 계신데 어떻게 귀신이 마귀가 범접을 합니까? 그런데 예수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복음이 뭔지도 모르는 자들이 그저 성경만 들고 다니고 십자가 목걸이나 하고 다닌다고 해서 그가 마귀의 세력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될 것이라는 생각은 어서 집어치우세요. 우리는 거기에 담긴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로 하나님은 놋 뱀에다가 기도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기도원에 가거나 부흥회 같은데 가면 꼭 나중에 기도하는 시간에 앞으로 뛰어나와서 십자가 붙들고 기도하는 사람들 있습니다. 그러면 왠지 기도가 잘 들어질 것 같아서 그런 거 같습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만 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놋 뱀을 보고 병이 나은 것을 신기하게 여겨 히스기야 왕 때까지 그 놋 뱀에게 분향했다고 합니다.
(왕하18:4) 그는 산당을 헐어 버렸고, 돌기둥들을 부수었으며, 아세라 목상을 찍어 버렸다. 그는 또한 모세가 만든 구리 뱀도 산산조각으로 깨뜨려 버렸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 때까지도 1)느후스단이라고('느후스단'은 히브리어 '구리(느호솃)'와 '뱀(나하쉬)'의 발음과 비슷함)부르는 그 구리 뱀에게 분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그런 걸까요? 놋 뱀에 신통한 능력이 있다고 착각을 한 것입니다. 그 뒤에서 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무시한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구원은 우리의 행위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열거했던 오늘날 잘 못 가고 있는 여러 가지 모양의 종교행위는 마치 질병을 앓고 있을 때 그 질병의 근원과 그 질병의 증상을 헷갈려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폐렴이 걸리면 열이 나고 기침이 너며 몸이 쑤십니다. 그런데 그 증상만을 해결하기 위해 해열제를 먹고 기침 멎는 약과 진통제만을 복용한다면 그것이 그 때 잠간 몸을 편하게는 해줄 수 있지만 그 증상은 약 기운이 떨어지면 다시 재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근본적인 치료가 되어지지 않으면 그런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회정화 운동을 하고 촛불시위를 하고 고행을 하고 행위를 개선하겠다고 결단하고 하는 것은 그 죄의 증상만을 일시적으로 다스릴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 근본적인 죄가 해결되지 않으면 인류는 여전히 그 어둠 속에서 헤맬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방법은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 죄를 해결했다는 것을 믿는 믿음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 아니 그 하나님의 원수였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베푸신 도저히 우리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사랑의 선물인 그 십자가를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롬5:8,10) 8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으로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10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로 있을 때에도 그분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하나님과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에 와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으리라는 것은 더욱 확실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죽는 것은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혹 정의를 위해 의인들을 위해 죽는 것도 우리는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대학에 재학 중일 때만 해도 학교의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압제당하고 가난에 시달리는 민중의 행복을 위해 할복을 하고 분신을 하고 투신을 한 선배와 친구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우리도 명분만 분명하면 그 정도는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수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도저히 우리의 이성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사랑인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받은 자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뭔가 다른 사람들과 달라서, 우리가 뭔가 다른 사람들보다 열심이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똑같이 불 뱀에 물려 죽어가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인지는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셔서 이렇게 감당할 수 없는, 맹렬하고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토록 큰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해 주신 것입니다.
전적인 타락을 한 우리를 무조건적인 선택으로, 단지 우리 성도들만을 위해서 그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선택된 우리를 반드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내시고야 마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 복된 소식을 제대로 이해하고 깨달은 사람은 세상의 빛으로 소금으로 향기로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게 진짜 사회참여의 시작이어야 하는 것이고 사회정화의 첫 걸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진짜 힘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우리 성도들을 그렇게 사랑하셨습니다. 이제 우리 그 사랑에 반응하여 하나님의 뜻인 거룩을 향한 발걸음을 힘차게 내딛어 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제20장 성찬이란 무엇인가?
(요6:1-15)
1 그 뒤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그, '티베리우스의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니,
2 큰 무리가 예수를 따랐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가 병자들을 고치신 2)표적들을(예수의 신성을 보여주기 위한 상징으로서의 기적(그리스어 세메이온)) 보았기 때문이다.
3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서, 제자들과 함께 앉으셨다.
4 마침 유대 사람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 때였다.
5 예수께서 눈을 들어서,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모여드는 것을 보시고 "우리가 어디에서 빵을 사다가,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고 빌립에게 말씀하셨다.
6 예수께서는 빌립을 시험해 보시고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자기가 하실 일을 잘 알고 계셨던 것이다.
7 빌립이 예수께 대답하였다. "이 사람들에게 모두 조금씩이라도 먹게 하려면, 빵 이백 데나리온(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 어치를 가지고서도 충분하지 못합니다."
8 제자 가운데 하나이며 시몬 베드로의 동생인 안드레가, 예수께 말하였다.
9 "여기 한 아이가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0 예수께서 "사람들을 앉혀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 곳에는 잔디가 많았다. 사람들이 앉았는데, 그 수가 오천 명쯤 되었다.
11 예수께서 빵을 들어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앉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리고 물고기도 그와 같이 해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12 그들이 배불리 먹은 뒤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남은 부스러기를 다 모으고, 조금도 버리지 말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13 그래서 보리빵 다섯 개에서, 먹고 남은 부스러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14 사람들은 예수께서 하신 표적을 보고 "이분은 참으로 세상에 오시기로 된 그 예언자다" 하고 말하였다.
15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와서, 억지로 자기를 모셔다가 왕으로 삼으려고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저는 매일 새벽 새벽기도를 위해 집을 나서기 전에 우리 아이들의 방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이불을 차내 버린 녀석이 있으면 이불을 잘 덮어주고 그 자는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한 녀석씩 뽀뽀를 해주고 집을 나섭니다. 그냥 보고만 있어도 너무 좋아서, 너무 기뻐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지난주 어떤 모임에서 스바냐를 함께 읽던 도중에 3장의 내용을 읽는데 정말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아, 하나님께서도 나를 그렇게 예뻐하시는구나.’ 하고 하마터면 눈물이 쏟아질 뻔했습니다. 여러분도 너무 잘 아시는 구절이지요? 한 번 함께 읽어 볼까요?
(습3:17-20)(표준 새 번역)
17 주 너의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신다. 구원을 베푸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너를 보고서 기뻐하고 반기시고, 너를 사랑으로 새롭게 해주시고 너를 보고서 노래하며 기뻐하실 것이다.
18 축제 때에 즐거워하듯 하실 것이다." "내가 너에게서 두려움과 슬픔을 없애고, 네가 다시는 모욕을 받지 않게 하겠다.
19 때가 되면, 너를 억누르는 자들을 내가 모두 벌하겠다. 없어진 이들을 찾아오고, 흩어진 이들을 불러 모으겠다. 흩어져서 사는 그 모든 땅에서, 부끄러움을 겪던 나의 백성이 칭송과 영예를 받게 하겠다.
20 그 때가 되면, 내가 너희를 모으겠다. 그 때에 내가 너희를 고향으로 인도하겠다. 사로잡혀 갔던 이들을 너희가 보는 앞에서 데려오고, 이 땅의 모든 민족 가운데서, 너희가 영예와 칭송을 받게 하겠다. 나 주가 말한다."
어떠세요?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인 우리가 너무나 좋으셔서 우리의 이름만 부르시는 것으로도 그토록 감격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성찬에 관해서 함께 공부해 볼 텐데 바로 이 성찬에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듬뿍 담겨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매달 성찬식을 거행하고 있고 오늘 설교를 마친 후에도 성찬을 들 텐데 여러분은 정말 그 성찬의 의미를 잘 알고 드시는 것인지 오늘 확인해 보세요.
여러분 신학에서 은혜의 수단(means of grace)으로 어떤 것이 있다고 했지요? 말씀, 기도, 성례입니다. 그렇지요? 그 은혜의 수단인 성례 안에 세례와 성찬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성찬과 세례도 말씀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찬과 세례는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복음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성찬은 복음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이기에 우리는 그 성찬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맛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여러분이 오해를 하시면 안 되는 것이 로만 카톨릭에서처럼 미사 중에 사제가 빵과 포도주를 들고 축성기도를 하면 그 빵과 포도주가 실제적이며 문자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초자연적으로 바뀐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가 성찬을 중요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카톨릭 교리문답서 제 2편에 보면 ‘트리엔트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카톨릭 신앙을 요약하여 선포한다. 우리는 구세주 그리스도께서 빵의 형상으로 내어주시는 것은 참으로 당신의 몸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교회는 항상 이러한 확신을 지녀왔으며 공의회는 이를 다시금 선포하는 바이다. 포도주의 실체 전체가 그리스도의 피의 실체로 변화한다. 카톨릭 교회는 이러한 변화를 적절하고도 정확하게 실체변화라고 불러왔다.’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역시 2편 1333항에 보면 ‘성찬례 거행의 중심인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령 청원기도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 된다’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럼 사제가 축성기도를 한 다음 떡을 받았다가 땅에 떨어뜨렸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예수님의 살을 떨어뜨렸으니 큰일 나는 것 아닌가요? 포도주를 마시다가 사래가 들려서 기침이 나서 포도주를 뱉었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피를 뱉어 버렸으니 그럼 큰일 나는 것 아닙니까? 생각해 보자고요. 그 빵은 어느 시점에 예수님의 살로 변하는 거예요? 입에 넣었을 때인가요? 그럼 살 씹는 맛이 나야 하지 않나요? 포도주를 입에 넣었을 때 예수님의 피 냄새가 나야 하는데 그렇지는 않지 않습니까? 우리가 무슨 식인종도 아니고 예수님의 진짜 살을 씹어 먹는 다는 게 언뜻 생각해도 그것은 억지 같아 보입니다.
그러면 왜 성찬은 그렇게 중요하게 취급되는가? 말씀드린 대로 성찬은 바로 골고다 십자가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새 생명이 주어진 것을 기념하는 것, 즉 가슴 벅찬 복음을 확인하는 의식이기에 이렇게 중요하게 취급하는 것입니다.
(고전11:23-25) 23 내가 여러분에게 전해 준 것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빵을 드시어서
24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7)위하는(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위하여 깨어진') 내 몸이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25 식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시고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 너희가 마실 때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눅22:19) 예수께서는 또 빵을 들어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떼어서 그들에게 주시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너희를 위해서 주는(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너희를 위해서 주는'이 없음) 내 몸이다. 너희는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이렇게 성찬은 갈보리에서 하나님의 교회에 부어진 그 선물을 기억하라는 것이지 성찬을 먹을 때마다 예수님의 피와 살이 우리 안에 차곡차곡 쌓여서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는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성찬을 먹고 마시면서 예수께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셔서 우리를 구원해 내신 그 사건을 다시금 떠올리며 그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우리의 신분을 확인하고 감사하며 감격하는 시간이 바로 성찬식을 거행하는 시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은 성찬식에 참여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런 감동이나 감격이 없기 때문에 괜히 잊었던 술 생각이나 나고 밥 생각이나 나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울러 성찬식은 천국에서의 어린양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과 교회가 한 상에서 만찬을 나누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기에 우리 교회에게 소중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따라주시고 천국에서의 만찬을 이야기하십니다.
(마26:28-29) 28 이것은 많은 사람에게 죄를 사하여 주려고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새 언약의') 피다. 2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제부터 내가 나의 아버지의 나라에서 너희와 함께 새것을 마실 그 날까지, 나는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절대로 마시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성찬식을 통해서 아~나는 반드시 그 천국에서 예수님과 한상에서 만찬을 들겠구나 하는 것을 확인하며 확신하며 지금 예수님과 함께 천국 만찬을 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오병이어의 사건을 통해서 성찬의 참 의미를 확실히 공부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5천명을 먹이시는 사건이 나옵니다. 이 오병이어의 사건을 가리켜 “하나님께 작은 것이라도 정성껏 바치면 말도 못하게 큰 축복이 온다.” 라던가 “하나님은 영적인 것뿐만 아니라 이렇게 육적인 양식도 우리에게 공급해 주시는 분이시다” 라고 이 말씀을 푸는 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육적인 부분을 채우십니다. 그러나 이 오병이어의 사건은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오병이어의 사건은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질 그 풍성한 하늘나라의 풍요를 설명하는 사건인 것입니다. 오병이어라는 소품은 그것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아주 보잘 것 없고 작은 것의 상징일 뿐입니다. 그래서 구원이라는 것은 너희들이 무엇을 보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도저히 불가능한 것을 예수께서 자기의 살과 피를 찢으심으로 우리에게 그 천국의 풍요를 선물해 주시는 것임을 설명해 주시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오병이어의 사건을 시작할 때 4절에서 유월절을 먼저 등장시키는 것입니다.
(요6:4) 마침 유대 사람의 명절인 유월절이(출 12:13, 21-28을 볼 것) 가까운 때였다.
유월절에는 어떤 일이 있었지요? 어린양의 살과 피가 구원받을 자들을 위해 쏟아진 날입니다. 애굽의 장자들과 함께 죽어야 할 이스라엘의 장자들이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살아나게 되는 날이 유월절입니다. 그래서 오병이어의 사건에서 예수께서 떡을 나누어주실 때도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행하셨던 유월절 마지막 성찬식 때 하셨던 그 모양 그대로 나누어주시는 것입니다. 11절을 보겠습니다.
(요6:11) 예수께서 빵을 들어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앉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리고 물고기도 그와 같이 해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같은 내용인 마태복음 14장19절에도 이렇게 기술이 되어있습니다.
(마14:19) 그리고 예수께서는 무리를 풀밭에 앉게 하시고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드시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 기도를 드리신 뒤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이를 무리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면 최후의 만찬 때는 어떻게 떡을 떼어 주셨는지 볼까요?
(마26:26) 그들이 먹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서 축복하신 다음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고 말씀하셨다. "받아서 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
꼭 같은 모습으로 떡을 가지시고 축사하시고 나누어주시지요? 이렇게 오병이어의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풍성한 복이 성도들에게 내려지게 되는 참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 주제로 하고 있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직접 그 오병이어의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설명을 해 주시지요? 오병이어의 기적 다음날 가버나움에서 예수님을 따라왔던 무리들에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6:26-27) 26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아온 것은 표적을(예수의 신성을 보여주기 위한 상징으로서의 기적(그리스어 세메이온)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다. 27 너희는 썩을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지 말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양식을 위해 일하여라. 그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줄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자를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요6:32-35) 32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부터 너희에게 빵을 내려 주신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부터 참된 빵을 너희에게 내려 주시는 분은 나의 아버지시다.
33 하나님의 빵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인데, 그것은 세상에 생명을 준다."
34 그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그 빵을 늘 우리에게 주십시오."
3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내게로 오는 사람은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요, 나를 믿는 사람은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이제 분명해 졌지요?
오병이어의 사건은 바로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시기 위한 상징 적인 사건이었던 것이지 결코 이 땅에서 우리가 필요한 양식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이나, 작은 것을 바치면 크게 불려 주시는 하나님을 설명하기 위함이 아니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직접 설명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럼 이 오병이어의 사건이 가리키는 것이 성만찬이라면 오늘 본문을 보며 우리는 어떤 자세로 성찬을 대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1절을 보세요.
(요6:1) 1 그 뒤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그, '티베리우스의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니,
성경이 주님께서 굳이 바다 건너편으로 가셔서 그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바다는 무엇을 상징한다고 했습니까? 어둠, 심판, 죄, 죄 된 세상을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에서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다시 바다가 없겠고” 라는 말을 쓴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그 바다를 건너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왜 갈릴리 바다를 굳이 디베랴 바다라고 표기를 해 놓았을까를 연구해 보면 왜 오병이어의 사건이 바다 건너편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지를 좀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디베랴 바다는 당시 로마 황제인 티베리우스의 이름을 따서 만든 갈릴리 바다의 다른 이름입니다. 즉 세상 권세 잡은 자의 상징으로 갈리리 바다를 디베랴(티베리우스)바다라 부른 것입니다. 이 데베랴 호수라는 말이 여기와 요한복음21장에 두 번 쓰입니다. 성경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도 고기 잡으러 갈릴리 바다로 갔을 때, 즉 세상으로 다시 돌아갔을 때에도 그 곳을 디베랴 바다라고 표기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군중을 먹이시기 전에 디베랴 바다를 건너서 산으로 올라가셔서 그 군중을 먹이시는 것은 성찬을 먹을 자격이 있는, 구원받은 자들은 세상을 건너, 세상과는 상관없이 된 자들이 성찬을 먹는 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디베랴 바다를 건너서 산에 오르셔서 제자들과 함께 그 곳에 앉으셨습니다. 성경에서 산은 무엇을 상징하지요? 시내 산, 호렙 산, 시온 산, 모리아 산 등등 산은 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으로 쓰여 집니다. 그 영광의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께서 베푸시는 것이 바로 성찬인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성찬은 세상을 건너 영광스러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하늘나라의 시민이 된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엄청난 특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찬입니다.
그리고 본문 10절에 보면 그 곳에 잔디가 많았다고 기술이 되어 있습니다. 같은 내용인 마가복음 6장 39절을 보시지요.
(막6:39)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명하여, 모두들 떼를 지어 푸른 풀밭에 앉게 하셨다.
왜 굳이 그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곳을 성경이 잔디와 풀이라는 단어를 동원하여 묘사를 할까요? 잔디와 풀하면 생각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목자와 양이지요.
예수님께서 자신을 표현하실 때 “나는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시편78편 52절에 보면 그 출애굽 광야의 생활을 이렇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시78:52) 그는 백성을 양 떼처럼 인도하시고, 가축 떼처럼 광야에서 이끄셨다.
그러니까 이 오병이어의 사건은 유월절이 지나고 거기서 건짐을 받은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자기의 살과 피인 만나를 먹여 가며 그 양떼들을 목자로서 이끌고 가시는 모습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병이어의 사건은 성도의 구원의 방법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기술하고 있을 뿐 아니라 구원의 현재성까지도 함께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참 떡을 먹고 구원을 얻은 자들을 주님은 그냥 내 팽개쳐 두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해서 목자로서 자신의 살과 피를 먹여가며 양육하신다는 구원의 현재성을 오병이어의 기적은 담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은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즉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구원을 받고 난 후에도 하나님은 절대 타자로 저 하늘에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역시 그분의 살과 피를 먹여 가며 우리를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이끌어 가고 계시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바로 성찬인 것입니다. 우리는 성찬을 통해 그 선한 목자가 이끄는 길은 어떤 길이라도 부족함이 없는 길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우리의 신앙을 공고히 다지는 것입니다.
(계7:17) 보좌 한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시 23:2; 사 49:10), 생명의 샘물로 그들을 인도하실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실 것입니다."
17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시23:1-5)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렇게 성찬에 참여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양임을 아는 자들이며 거기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같은 곳이라 할지라도 그 목자와 함께 있으면 부족함 없이 만족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성찬은 그렇게 복음을 설명할 뿐 아니라 우리 신자들의 이 땅에서의 삶의 모습이 어떠해야 함도 보여주는 것이며 그러한 성도의 삶을 복음으로 잘 견뎌내겠다는 성도의 다짐과 고백이 함께 하는 천국의 잔치인 것입니다. 여러분 성찬 상위의 것들을 한 번 떠 올려 보세요. 작은 잔과 시금털털한 포도주와 맛없는 떡입니다. 누룩도 들지 않은 정말 맛없는 떡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이 잔치 상 위의 것들에 만족하십니까? 아니면 여기에 갈비나 탕수육 복 매운탕 이런 것들이 없는 것이 아쉬우세요?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면 여러분은 어떤 것을 택하시겠습니까? 복음과 아무 상관없는 진수성찬을 택하시겠어요? 복음을 아는 자들이 힘의 원리로 움직이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십자가의 원리로 살기 위해 세상의 진미를 마다하고 먹고 마셔야 하는 예수의 피와 살을 택하시겠습니까? 그 둘 중에 후자를 택한 사람들이 나의 선택이 잘 된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시간이 바로 성찬의 시간인 것입니다. 그렇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그 복음으로만 만족하며 살아가는 자들을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예수의 살과 피만으로 넉넉히 이 땅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만나는 광야에서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만나는 사람들의 눈에 보기에는 그렇게 흡족치 못한 것입니다. ‘what is this? nothing!’그게 만나입니다. 우리 성도가 이 세상에서 힘으로 삼고 취해야 할 것들은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생존할 수 있을 만큼만 주님께 구하면 되는 것입니다. 왜? 우리의 목적지는 이 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훈련하고 학습하고 양육 받아 잘 성숙하여 하나님 나라로 가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 복음을 아는 자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잘 것 없이 보이는 만나뿐이라도 창피해 하거나 부족해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목숨처럼 여기는 자기의 소유를 비워 다른 이들을 도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 땅에 눈을 두고 사는 사람들은 성찬 상 위의 포도주와 누룩 없는 떡이 아주 못 마땅합니다. 뭐 좀 다른 것 좀 달라는 것이지요. 부추와 마늘과 고기 좀 달라는 것입니다. 내가 따라가 줄 테니까 내가 원하는 풍성한 식탁을 좀 차려 달라는 것이지요. 광야의 이스라엘이 그런 불평을 하지 않았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성찬을 먹으면서 비록 이 세상 시각으로는 부족하고 작고 모자라는 것 같지만 이 성찬 상은 천국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가 함께 나눌 천국 만찬을 약속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난 지금 부족함 없이 만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와는 반대로 교회에 와서 기적이나 바라고 병이나 낫기를 바라며, 자기의 소원 성취나 바라는 자들, 부추와 마늘과 고기만을 찾는 사람들을 성경이 “예수님을 잡아 왕을 삼으려는 자”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 15절을 보세요.
(요6:15)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와서, 억지로 자기를 모셔다가 왕으로 삼으려고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예수님을 억지로 왕을 삼으려는 자들은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까? 자기들에게 먹을 것을 충분히 대 줄 수 있는 사람을 원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은 그런 것을 해주러 온 게 아니라고 하니까 어떻게 했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렸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아 예수를 죽여 버린 자들과 그 분을 세상 것이나 주는 왕으로 삼으려는 자와 똑같은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자들을 피해 산으로 도망가셨습니다. 그런 자들은 예수님과 아무 상관없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제가 가끔 교회 안에서 여전히 예수님을 못 박아 죽이는 자들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전히 예배당 안에서 예수를 세상 것이나 공급해 주는 세상 왕으로 삼으려 하는 자들은 예수가 지금 다시 오신다면 당장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자들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디베랴 호수라는 배경에서 제자들에게 행하신 일을 보세요. 디베랴 바닷가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떡과 고기를 구워 그들에게 주시지요? 오병이어의 현장과 동일한 장면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무엇을 부탁하십니까?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고 부탁하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는 것이 배 터지게 고기와 떡을 먹여 주라는 이야기인가요? 예수님은 지금 그 참 생명의 떡인 예수를 그 백성들에게 전하라고 부탁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그 성찬을 먹는 자들인 제자들에게 부탁을 하십니다. 지금까지는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다녔지만 이제부터는 성령이 너를 이끄시는 대로 너는 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요21:18)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를 띠고 네가 가고 싶은 곳을 다녔으나, 네가 늙어서는 남들이 너의 팔을 벌릴 것이고, 너를 묶어서 네가 바라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것이다."
이렇게 성찬을 먹는 자들은 두 팔을 벌리는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살아내야 하는 것이 바로 성찬을 드는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입니다. 즉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내야 하는 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인 것이지요. 그리고 이 땅에서는 비록 남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는 듯한 삶을 산다 해도, 아니 푸른 초장을 거니는 듯한 풍성한 삶을 산다 해도, 어느 상황에서도 내게 부족함이 없는 만족한 삶이라는 것을 확고하게 가슴속에 품고 사는 사람이며 지금은 이렇게 보이지 않지만 저 천국에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찬을 반드시 먹게 될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아울러 성찬을 받아먹는 사람들은 모두 평등함 속에서 다른 이들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 속에서 보여 지는 계급과 위치와 재산과 지식 정도는 다 다를 지라도 성도는 한 상에서 동일한 음식을 먹는 동일한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찬을 먹는 사람들은 빈부의 격차나 지위의 고하로 상대방을 평가하는 자들이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 성찬 안에는 교회 론과 구원론과 신론과 인간론이 모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찬을 눈에 보이는 복음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성찬이 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아시겠지요?
제21장 외식이란 무엇인가?
(막7:6-9)
6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이사야가 너희 같은 위선자들을 두고 적절히 예언하였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은 입술로는 나를 공경해도,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사 29:13(칠십인역)).
7 그들은 사람의 훈계를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예배한다.'
8 너희는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관습을 지키고 있다."
9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의 관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
오늘은 본문 말씀에 나오는 외식에 대해 공부를 해 보겠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성경을 한군데만 더 찾아보고 본론으로 들어가지요.
(요18:3-5)
3 유다는 로마 군인 한 떼와, 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보낸 성전 경비병들을 데리고 그리로 갔다. 그들은 등불과 횃불과 무기를 들고 있었다.
4 예수께서는 자기에게 닥쳐올 일을 모두 아시고, 앞으로 나서서 "너희는 누구를 찾느냐?" 하고 그들에게 물으셨다.
5 그들이 "나사렛 사람 예수요" 하고 대답하니, 예수께서 "내가 그 사람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를 넘겨 준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서 있었다.
유다가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로부터 군대와 하속들을 제공받아 예수님을 파는 장면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유대인들 중에서도 아주 대단한 민족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와 희랍의 문명에 영향을 받아 퇴색되어져 가는 그들의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일어났던 사람들이고 그들은 자신들을 로마에게서 구해내 줄 메시아를 기다렸으며 하나님을 사랑하되 목숨을 걸고 사랑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제일 크게 욕을 먹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왜 주님은 그렇게 열심을 부리는 바리새인들을 독사의 새끼라 욕을 하셨으며 왜 그렇게 열심히 종교생활을 하고 메시아를 기다려 왔던 그들은 진짜 메시아가 오셨는데 못 박아 죽여 버렸을까요?
우리는 이 바리새인들에 대해 공부해 보면서 그 바리새인들과 함께 예수님을 죽이는데 동조했던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바리새인 하면 먼저 생각나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외식”입니다. 그렇죠? 우리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이야기입니다. ‘바리새인, 외식‘ 외식이 뭔가요? 밖에 나가서 밥 사먹는 게 외식입니까? 우리는 외식하면 “겉과 속이 다른 것”을 외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외식은 그것보다 더 깊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만일 겉과 속이 다른 것을 외식이라 한다면, 집에서 더 자고 싶은데 참고 학교에 가는 것도 겉과 속이 다른 것이므로 외식입니다. 그렇지요? 오늘 하루는 집에서 쉬고 싶은데 어쩔 수 없이 나가서 일을 하는 것도 외식이지요? 우리는 그런 것을 외식이라 하지 않고 “성실하다”라고 합니다.
속으로는 미워 죽겠는데 꾹 참고 미소로 친구를 대하는 것을 우리는 외식이라 하지 않고 “인내”라고 합니다. 마음속에 욕정이 불일 듯 일어나는 데,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참아내는 것을 우리는 외식이라 하지 않고 “경건의 연습”이라 합니다. 이렇게 외식은 단순히 겉과 속이 다른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고 있는 외식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외식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얼마나 미워하셨는지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고 본인의 입으로 천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리의 친구가 되셨고, 간음한 여자를 용서하셨으며 강도에게 구원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예수께서 참지 못하시고 분노를 발하셨던 자들이 바로 외식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모든 죄를 다 용서하실 수 있는 분이 유독 이 외식에 대해서만은 불같은 노여움을 퍼 부으셨습니다. 게다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치욕스럽게 생각하는 독사의 새끼라는 욕까지 그들에게 퍼 부으셨습니다.
(마23:33)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심판을 피하겠느냐?
이스라엘 민족에게 뱀이란 동물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설명 안 해도 아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향해 바로 그 저주의 욕인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라는 잔인한 욕을 하시는 것입니다. 도대체 외식하는 것이 무엇이기에 예수님은 이렇게 화를 내셨을까요? 성경에서 차근차근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눅11:42-44) 42 바리새파 사람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너희는 박하와 운향과 온갖 채소의 십일조는 바치면서, 정의와 하나님께 바치는 사랑은 소홀히 한다! 그런 것들도 소홀히 함이 없이 하고, 이것들도 반드시 해야 한다.
43 바리새파 사람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너희는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한다!
44 너희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너희는 드러나지 않게 만든 무덤과 같아서,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그것이 무덤인지를 알지 못한다!"
예수께서 바리새인들 더러 평토장한 무덤(무덤 같지 않게 평평하게 포장한 무덤) 같아서 사람들은 모르지만 너희들은 썩은 시체 냄새와 썩은 물이 넘쳐 나는 무덤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겉으로는 경건한 종교행위를 잘 하고 신앙적인 명령들을 잘 지키는 것 같은데 본심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43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뭡니까? “화 있을 진저 너희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그들은 사람 앞에 박수 받기 위하여 종교 행위를 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칭찬 받기 위하여 종교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더라는 말입니다. 제가 전에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했느냐” 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인가”가 중요하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어떤 악당들은 아주 자유롭게 술집을 드나들며 부어라 마셔라 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말씀을 드린 것은 눈에 보이는 선한 행위가 꼭 구원의 표지는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린 것이지 아무렇게나 살아도 천국 갈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린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은 선한 행위를 하면서도 속으로는 자기의 자랑을 위해 충분히 할 수 있는 사람들이기에 무엇을 하느냐 보다 어떤 신분으로 바뀌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를 하시면 되겠어요. 죄라는 것을 형태나 모양이 아니라 경향으로 이해를 해 보세요. 죄는 하나님의 자리에 자기가 앉아 사람들에게 칭찬도 받고 스스로 자존심도 지키고 하려는 경향입니다. 그게 죄의 시작이고 죄의 본질 아닙니까?
선해 보이는 종교행위도 그러한 죄의 경향에서 출발한 것이면 외식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시지요? 성경은 그런 것을 ‘자기 의’라 합니다. 그 것은 겉으로는 선해 보여도 지옥으로 가는 급행열차 티켓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을 마태복음 6장에 더 확실하게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마6:1-2, 5-6)
1 "너희는, 남에게 보이려고 의로운 일을 사람들 앞에서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무엇을 구별하고 있습니까? 사람에게 받는 칭찬과 하나님께 받는 칭찬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하는 종교행위 중 가장 대표적인 것 세 가지를 예로 듭니다.
구제, 기도, 금식 이 세 가지 종교행위를 들어 사람에게 보이는 종교행위와 하나님께 보이는 종교행위로 나눕니다. 그러면서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종교행위를 “외식”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2절을 계속 보세요.
2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네 앞에서 나팔을 불지 말아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네 상을 이미 다 받았다.
누구를 도와 줄 때에 사람들에게 칭찬 받기 위해서 떠벌리면서 도와주는 것을 외식하는 자라 한다. 우리가 불쌍한 사람을 보면 도와주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분명 마음속에서 울리는 “불쌍한 자를 돕는 것이 좋은 일이다”라는 음성을 따라 구제를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겉과 속이 같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에게 보여 칭찬을 받기 위한 의도로 구제가 행해졌다면 그것이 바로 외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행위는 하나님께 상을 받을 수 없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5절과 6절을 보시면
5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하지 말아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네 상을 이미 다 받았다.
6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서, 은밀하게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심지어 우리는 기도를 할 때도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기도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 알던 어떤 장로님은 장로가 되어서 지금까지 새벽기도를 한 번도 안 빠지고 나가셨다고 자랑을 하시곤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왜 한 번도 안 빠지셨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장로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장로가 새벽기도 안 나온다고 욕할까봐 한 번도 못 빠지겠더라고 대답을 하셨습니다. 참 불쌍했습니다. 그건 율법에 대해 죽은 자기를 또 다른 율법으로 묶어놓은 경우입니다. 그 분이 그렇게 힘들어 하는 새벽기도에 얼마나 이를 갈면서 나오셨겠습니까? 좀 자유로워지세요. 꼭 그런 사람들이 가끔 목사가 새벽기도 못나온 날이면 목사가 새벽기도 빼 먹는다고 욕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다른 사람에게 칭찬 받기 위해서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행하는 것이 외식입니다. 주님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애들아 그런 기도 필요 없으니까 제발 외식은 하지 말거라’
그리고 교회마다 이마에 “난 기도에 은사가 있는 사람”이라고 써 붙이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지요? 자기의 기도를 받아야 일도 잘 풀리고, 자기의 기도를 받아야 가정도 평안하고, 자기의 기도를 받아야 병도 낫는다는 그런 사람들 있습니다.
여러분 기도가 뭡니까? 우리가 다음 시간부터 기도에 관해 공부를 하겠습니다만 아주 협의(狹義)의 의미에서 기도란 ‘내가 할 수 없는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도저히 가망이 없는 것입니다’라는 하나님께 드리는 간청인 것입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면 뭐 하러 기도를 하겠습니까? 열심히 노력하면 되지.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을 설득해서 응답을 받아 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은 목적도 계획도 없는 우유부단한 할아버지에 불과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자기의 기도는 무슨 응답 보장 기도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아직 유아기적 신앙에서도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 아니면 가짜임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기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다음 주부터 공부할 내용 중에 맛보기로 조금만 짚어 보고 넘어가겠습니다.
마가복음 9장에 보면 벙어리 귀신이 들린 아이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 세 명을 데리고 변화 산에 올라갔다 내려오셨지요? 그런데 아래에서는 벙어리 귀신들린 소년의 부모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아들의 귀신을 쫓아달라고 아들을 데리고 와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아무리 귀신을 쫓아내려고 했지만 귀신이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기도와 금식 외에는 이런 류(類)가 나가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시고 귀신을 쫓아 주십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혹자는 “봐라, 기도만 하면 귀신을 쫓아낼 수 있다”고 주장하며 귀신 쫓는데 열을 올리곤 합니다.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려고 했을 때 정말 기도를 한 번도 안 했겠습니까? 제자들이 무엇을 실수 한 것일까요? 주님은 지금 어떤 기도와 금식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게 진짜 기도이고 진짜 금식일거 아닙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이 안 계실 때 자기들을 예수님 다음 계급 정도로 은근히 자랑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자기들이 귀신을 쫓아내는 행위로 인해 사람들 앞에 인정을 받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귀신을 쫓아 내달라는 그들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 것입니다. 기도는 ‘나는 무익한 종이며 하나님만이 만유의 왕이십니다.‘라는 고백이 전제가 되지 않으면 다 허공에 날리는 꽹과리 소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나를 자랑하겠다는 시도는 그야말로 언어도단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자신을 자랑하고 싶어 하던 제자들에게 “기도와 금식”이외에는 이런 류가 나가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 저는 절대 못하는 것이니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옵소서 하고 겸손하게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고 자기들을 나타내기 위한 것은 기도도 아니란 것입니다. 기도를 한 사람들에게 기도를 하라고 하는 것은 그들이 한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는 말이잖아요. 그런데도 오늘 날 자기가 기도해줘서 응답 받았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은 기도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혹 창세기의 이 구절 때문에 오해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창세기 49장 22절 이하를 보면 야곱이 임종 시에 요셉에게 하는 축복의 내용이 있습니다.
축복이라는 것이 뭔가 복을 비는 기도입니다.
(창49:22-26) 22 요셉은 들망아지(또는 '요셉은 열매가 많은 덩굴, 샘 곁에 있는 열매가 많은 덩굴, 그 가지가 담을 넘는다.' 히브리어 본문이 불확실함), 샘 곁에 있는 들망아지, 언덕 위에 있는 들나귀다.
23 사수들이 잔인하게 활을 쏘며 달려들어도, 사수들이 적개심을 품고서 그를 과녁으로 삼아도,
24 요셉의 활은 그보다 튼튼하고, 그의 팔에는 힘이 넘친다. 야곱이 섬기는 '전능하신 분'의 능력이 그와 함께 하시고, 목자이신 이스라엘의 반석께서 그와 함께 계시고,
25 너의 조상의 하나님이 너를 도우시고, 전능하신 분께서 너에게 복을 베푸시기 때문이다. 위로 하늘에서 내리는 복과, 아래로 깊은 샘에서 솟아오르는 복과, 젖가슴에서 흐르는 복과, 태에서 잉태되는 복을 베푸실 것이다.
26 너의 아버지가 받은 복은 태고적 산맥이 받은 복보다 더 크며, 영원한 언덕이 받은 풍성함보다도 더 크다. 이 모든 복이 요셉에게로 돌아가며, 형제들 가운데서 으뜸이 된 사람에게 돌아갈 것이다.
이렇게 야곱이 요셉의 복을 비는 데, 하나님을 부르는데 “너의 하나님” 혹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이라 하지 않고 “야곱의 하나님” “네 아비의 하나님” 이라합니다. 여기서 네 아비란 야곱 자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26절을 보면 네 아비의 축복이, 네 아비의 기도가 내 부여 조 (내 조상들)의 기도 보다 낫다고 합니다.
야곱이 누구입니까?
아브라함과 이삭에 비하면 형편없는 잔꾀의 사나이가 야곱입니다.
그런데 그 야곱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같은 신앙의 승리자들의 기도 보다 자기의 기도가 더 낫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근거로 야곱이 이 같은 이야기를 하는지 아세요?
야곱의 인생은 그야말로 속이고 속는 사기 인생이었습니다. 야곱은 누구보다 그런 자기를 잘 아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고, 분명 자기가 은혜를 얻어 구원을 얻은 것을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이니까요. 야곱은 지금 자기 생각에 자기 같은 걸 그 죄에서 꺼내 주시고 자기 같은 인간을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이면 그 분이야말로 정말 엄청난 분이신 것을 아는 것입니다.
자기가 경험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더 잘 알고 있기에 그렇게 자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기도가 부여 조의 기도보다 낫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용한 의사가 있었습니다. 한사람은 그 의사에게 가서 티눈을 고쳤고, 한사람은 가서 불치병인 백혈병을 고쳤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 용한 의사의 진가를 더 잘 경험한 사람입니까? 중병을 고친 사람이지요? 비유를 하자면 야곱은 티눈 정도를 고친 다른 부여 조에 비해 백혈병을 고친 사람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이 뵈었던 하나님보다 야곱이 경험했던 하나님은 훨씬 더 은혜와 긍휼과 자비와 능력과 기다려 주심에 있어서 더 많은 경험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항복에 있어서 야곱은 남달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말끝마다 야곱의 하나님, 내 하나님이라 하는 것이고, 내 기도가 우리 아버지 이삭의 기도보다 우리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기도보다 더 낫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난 우리 아버지 이삭보다 우리 할아버지 아브라함보다 훨씬 못나고 추한 인간이었기에 그들이 경험한 하나님보다 더 깊이 은혜를 경험할 수 있었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이 창세기의 구절은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지 누구의 기도가 더 잘 먹히고 누구의 기도가 약발이 덜하고 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자기가 어떤 처지에서 건짐을 받은 사람인지를 알고 그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지 아는 사람이 기도를 하면서 남에게 “난 기도하는 사람이다”라고 자랑을 하고 “내 기도 받아야 응답이 잘 된다”고 어떻게 이야기 할 수 있겠습니까?
기도라는 것은 내가 얼마나 불가능한 인간이며 하나님만이 내 인생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고백하고, 그보다 먼저 내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서 기도를 드릴 수 있게 된 신분이라는 자기의 위치를 확인하는 감격적인 지성소에서의 대면인 것인데 그걸 마치 자기만의 특권인양 자랑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에서 세 번째로 언급하는 종교행위가 바로 금식입니다. 16절을 보시면 나와 있습니다.
(마6:16) "너희는 금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슬픈 기색을 나타내지 말아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남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보기 싫게 한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가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어떤 사람들은 금식을 하면서도 자랑을 한다는 것입니다. 가끔 금식 기도원에 가보면 어떤 사람이 자랑삼아 “난 3일 굶었어.”하고 자랑을 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비웃는 듯 “겨우? 난 일주일 굶었어.”합니다. 그러면 피골이 상접한 어떤 사람이 담요를 걷고 일어서면서 “가소롭군, 난 40일” 이렇게 자랑을 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금식이 뭡니까?
밥을 굶어서 하나님을 협박하여 응답을 받아내는 것이 금식인가요? 그것은 우리가 전에도 살펴 본 것처럼 “자해(自害)”라고 하는 것입니다. 금식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우리의 힘으로 삼고 있는 “먹을 것”을 끊는 것입니다. 먹을 것을 끊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제 나의 이 문제는 나의 손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도우심 만을 구합니다.“라는 것이 금식입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면 밥 많이 먹고 힘내서 이루어 내야지 왜 밥을 굶습니까?
그리고 설사 그 일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어서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난 지금까지 이 땅에서의 나의 양식으로 여겨왔던 그런 것에 눈 두지 않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것만을 나의 양식으로 삼겠다.”는 고백이 금식인 것입니다.
아울러 금식은 “하나님 앞에서의 못난 자신, 범죄 한 자신을 슬퍼하며 애통해 하며 하나님 앞에 나와 회개하는 것이 금식입니다. 회개는 언제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셔서 우리 눈을 뜨게 해 주시고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생겼을 때 자신의 죄가 보이게 되고 그 때 할 수 있는 것이 회개입니다.
즉 금식은 하나님을 알게 된 자가 ”난 하나님을 내 최고의 기쁨으로 삼습니다. 나는 먹는 즐거움을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과 바꿀 수 없습니다.“라는 적극적인 신앙고백을 담아 하는 행위가 바로 금식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금식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게 되는 것, 그것이 금식의 참된 의미인 것입니다.
(사58:4-7) 4 너희가 다투고 싸우면서, 금식을 하는구나. 이렇게 못된 주먹질이나 하려고 금식을 하느냐? 너희의 목소리를 저 높은 곳에 들리게 할 생각이 있다면, 오늘과 같은 이런 금식을 해서는 안 된다.
5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겠느냐? 이것이 어찌 사람이 통회하며 괴로워하는 날이 되겠느냐?" 머리를 갈대처럼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깔고 앉는다고 해서 어찌 이것을 금식이라고 하겠으며, 주께서 너희를 기쁘게 반기실 날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6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들을 놓아 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냐?"
7 또한 굶주린 사람에게 너의 양식을 나누어 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 너의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금식의 의미를 알고 성경이 말하는 금식을 제대로 하는 사람은 바로 이런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진정한 금식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이 땅의 것들을 힘으로 삼아 사는 삶을 포기한 사람이므로 자신의 것을 비워 약하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고 섬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금식을 하면서 “난 일주일 금식했는데, 넌 한 끼도 못 굶냐? 믿음 없는 자 같으니라구.” 이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이 아니라 사람에게 자랑하기 위한 금식이므로 그것은 외식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어라고 종교행위를 해놓고 외식을 한 자가 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랑하고 싶어서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힘을 내어 종교 행위를 하는 자들, 그들을 가리켜 성경은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의 자랑을 위해 열심히 일한 사람들이 ‘내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기적을 일으키고 병자를 고쳤는데 왜 주님 날 모른다 하십니까?‘하고 주님께 따지는 자들입니다. 그 때 주님께서 뭐라 하신다고요? ’이 외식한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어디로? 지옥으로. 오늘 본문의 언어로 바꾸면 ’이 독사의 새끼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는 욕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그 외식을 예수께서 마태복음 23장에 이렇게 정리해 주십니다.
(마23:1-7) 1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2 말씀하셨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다.
3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르지 말아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4 그들은 지기 힘든 무거운 짐을 묶어서 남의 어깨에 지우지만, 자기들은 그 짐을 나르는 데, 손가락도 꼼짝하려고 하지 않는다.
5 그들이 하는 행실은 모두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그들은 경문(성경구절이 들어 있는 곽으로서 이마나 팔에 달고 다님) 곽을 크게 만들어서 차고 다니고, 옷술을 길게 늘어뜨린다.
6 그리고 잔치에서는 윗자리에,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즐기고,
7 장터에서 인사받기와, 사람들이 자기들을 선생이라고 불러 주기를 즐긴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보고 말만하고 행치 아니했다고 하십니다. 정말 그런가요?
바리새인들은 목숨 걸고 율법을 지켰던 사람들입니다. 행치 않았다니요?
그 것은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고 남에게 보이기 위한 종교행위와 율법 준수는 행치 않은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성도는 ‘무엇을 행 했는가’가 아닌 ‘어떤 사람인가’가 중요한 것이라 한 것입니다. 외식하는 자들도 얼마든지 번지르르한 종교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들이 좋아하는 것이 뭡니까?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들이 랍비라 불러주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도에서 행한 것은 모두 외식입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왕이 되고 싶어 하는 죄인들이 자기를 증명하고 자랑하여 스스로 자신의 왕 됨을 나타내려하는 자리에서 내려와 하나님께 항복하고 순종하며 겸손하게 그 분의 뜻을 좇는 것만이 진정한 행복의 길이란 것을 확실하게 깨달은 자들이 천국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원리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자랑하던 자들이 이제 하나님만을 자랑하는 자로 바뀌게 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자신의 자랑을 위해 하는 행위는 그 것이 아무리 경건하고 신실해 보여도 모두다 외식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외식을 하는 자들은 자기의 자랑을 위해서 남을 희생시킵니다. 자기들의 깨끗함을 자랑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죄를 지적하는 나쁜 일을 저지릅니다. 자기를 높이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남의 잘못이 많이 드러나야 자기가 높아질 것 아닙니까? 남의 불행을 고명으로 얹어 먹어야 자기의 행복이 더 고소하죠? 남의 죄를 들춰내서 지적해서 고명으로 얹어야 자기의 의가 더욱 맛있어 보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이 이렇게 경고하신 것입니다.
(마7:1-5) 1 "너희가 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심판하지 말아라.
2 너희가 남을 심판하는 그 심판으로 하나님께서 너희를 심판하실 것이요, 너희가 되질하여 주는 그 되로 너희에게 되어서 주실 것이다.
3 어찌하여 너는남의(그, '네 형제')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남에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줄테니 가만히 있거라' 하고 말할 수 있겠느냐?
5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그 때에 눈이 잘
보여서, 남의 눈에서 티를 빼 줄 수 있을 것이다
외식하는 자들의 특징이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자신을 높이기 위해 남을 잡아 죽이는 것입니다. ‘난 새벽 기도해, 난 헌금 많이 해, 난 선교 갔다 왔어, 난 성경 많이 읽어 그런데 넌 왜 안 해?’이러한 질책들은 다분히 외식의 냄새가 짙어요. 그렇게 외식을 일삼으며 남을 질책하는 자들은 어느 목사님의 말씀처럼 지렁이 앉혀놓고 손톱에 메니큐어 칠하면서 “넌 왜 손톱 없어?” 그런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그 때 바리새인들이 들고일어났던 것을 기억하시지요? 그 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안식일에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물어보십니다. 그리고 손 마른 자를 안식일에 고치십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의논하더라고 성경이 기술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무엇입니까?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죄에서 건져내시기 위해, 생명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법칙입니다. 율법은 하늘의 삶의 원리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율법을 지켜봄으로써 우리의 불가능함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게끔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율법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 율법을 무엇으로 생각하고 있나요? 자기들 생색내기 용으로 율법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손 마른 자가 예수님에 의해 건짐을 받았을 때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려 한 것입니다. 자기들이 생색이 안 나고 예수님이 드러나는 것이 못내 기분 나쁜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그런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제가 미국에 와서 처음에 전도사로 일했던 교회에서 어떤 여자 전도사님이 전자피아노를 교회에 기증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목사님에게도 말씀드리지 말고 비밀로 해달라고 해서 진짜 비밀로 했습니다. 그 다음부터 이 아줌마가 저를 얼마나 미워하던지, 결국 며칠 안 돼서 자기가 다 말하고 다니더군요. 아직 하나님께 항복하지 못한 인간들은 생색이 안 나면 못 참는 것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의 하속들이 유다와 함께 횃불을 들고 예수님을 잡으러 왔습니다.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빛을 잡으러 오는데 횃불이 등장합니다. 성경이 왜 그런 그림을 그릴까요? 예수님을 잡아 죽인 자들은 결국 자기들이 든 횃불이 생색이 안 나기 때문에 주님을 잡아 죽였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저 태양 때문에 내 횃불이 빛이 안나‘그게 바로 바리새인들의 예수님 살해 동기라는 것이지요.
‘저 횃불만 없으면 내 횃불이 훨씬 밝아 보일 텐데’ 여러분도 혹시 이런 자기 자랑에 젖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으세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들을 보면 질투가 나세요? 아니면 벤치마킹을 해서 배우고 싶다는 의욕이 일어나십니까? 여러분이 만일 전자라면 여러분도 빛이신 예수님이 여러분의 빛을 바래게 하면 가차 없이 예수님을 살해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이렇게 하나님께 감사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닌 사람들에게 잘 보여서 존경을 받기 위해서 하는 모든 종교행위는 다 “외식”인 것입니다.
내 생색을 내기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도둑질하는 것, 그것을 성경은 외식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된다고요?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여러분은 지금 외식을 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을 하십니까?
제22장 기도
(요16:22-24)
22 이와 같이, 지금 너희는 슬픔에 싸여 있지만, 내가 다시 너희를 볼 때에는 너희의 마음이 기쁠 것이요, 그 기쁨을 너희에게서 빼앗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23 그 날에는 너희가 내게 아무것도 묻지(또는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주실 것이다(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24 지금까지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 이름으로 구하지 않았다. 구하여라. 그러면 받을 것이다. 이것은 너희에게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기독교 서점의 베스트셀러 목록을 보면 기도에 관한 제목이 아주 많은 것을 보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보좌를 흔드는 기도’ ‘강청 기도의 능력’ ‘응답받는 기도’ ‘영으로 하는 기도’ 등등의 제목들이 하나님의 보좌를 흔들어서라도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고자 하는 구매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우리는 정말 기도로 하나님의 보좌를 흔들 수 있을까요?
여러분께 한 번 여쭤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영원 속에서 계획하신 것은 이미 완성된 것이 맞습니까?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고 다 아시는 분이 어떤 것을 계획하시고 목적하셨다면 그 것은 이미 완성이 된 것이지요? 그래서 묵시 세계에서의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완성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라는 말씀의 의미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늘에서는 이미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다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것이 가시적으로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것이 바로 역사의 장인 것이고요. 그런데 인간이 자신의 요구를 하나님께 졸라서 그러한 하나님의 계획을 바꾸어 버릴 수 있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그 분은 이미 전지전능하신 분이 아니죠. 인간의 요구에 조변석개하는 하나님이 무슨 전지전능하신 신입니까?
기도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받아내기 위해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생각으로 소나무 뿌리 몇 개 뽑으면 하나님이 그 정성을 보아서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시는 그런 류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도로 하나님의 보좌를 흔들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면 기도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 오늘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허락하시는 수단이 세 가지가 있다고 했지요?
은혜의 수단 세 가지가 뭡니까? 그것이 바로 말씀과 기도와 성례입니다. 그만큼 기도는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 중요한 것입니다. 그 세 가지를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유일한 세 가지 은혜의 수단 중의 하나인 기도가 엉뚱하게 사용되고 있다면 큰일이 아니겠습니까?
아기가 갓 태어나도 그 아기에게는 팔 다리가 있습니다. 아기는 뜨거운 젖을 먹으면 혓바늘도 돋고 잘 안 닦아주면 부스럼도 생깁니다. 헌데 우리 인간이 생활을 하는데 도움이 되라고 주신 팔 다리가 아직 자라지 못한 아기에게는 도리어 해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기는 멋모르고 난로를 만져서 데기도 하고 웅덩이를 향해 돌진을 하기도 합니다. 유익을 줘야 할 팔 다리가 오히려 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유익이 되라고 주신 기도가 만일 오용이 된다면 그 것은 오히려 신앙생활에 해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라는 것을 거시적(巨視的)으로 정의를 내려 보면,
기도는 성도의 죽었던 영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나서 이제 성도가 세상을 등지고 하나님계신 천성을 향해 돌아서는 순간 마귀는 그 살아난 영을 공격하기 시작하는데 그리스도인이 나그네로 이방인으로 이 세상에서 그 마귀의 공격에 대처하며 이 땅을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기도인 것입니다.
기도는 세상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살아가야 하는 성도의 신앙생활에 유익이 되는 것이지 성도의 이 세상에서의 소원성취 도구가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기도는 지성소 안에서의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지성소에는 일 년에 한 번 대 제사장이 제물의 피를 가지고 조심스럽게 들어가 이스라엘의 속죄를 구하는 속죄일에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 것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예를 다 갖추지 못하고 제물이 흠이 있는 것이면 그 대 제사장은 그 안에서 즉사(卽死)하였던 무시무시한 곳입니다. 하나님은 죄나 흠과 티와는 절대 공존 하실 수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우리 죄인들의 죄가 말갛게 씻겨 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흠한 자가 되어 언제든지 지성소를 드나들 수 있는 복된 자들이 된 것입니다. 아니 아예 하나님께서 우리 속으로 들어와 버리셨습니다. 우리가 지성소가 된 것입니다. 그렇게 내 안에 계신 하나님과 수시로 대화를 나누며 나의 삶의 방향을 조명해 주시기를 구하며 서럽고 힘들 때 위로를 구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헌데 마귀는 이 기도를 왜곡시킴으로써 신자들이 오로지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 필요를 구하며 세상의 권세와 영광을 구하는 데만 쓰게 합니다.
마귀는 그러한 기도에 응답할 능력도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눅4:6) 그런 다음에, 악마는 그에게 말하였다. "내가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주겠다. 이것은 내게 넘어온 것이니, 내가 주고 싶은 사람에게 줄 것이니,
마귀가 세상의 권세와 영광을 주님께 줄 수 있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마귀는 때때로 그러한 세상의 권세와 영광을 구하는 기도에 응답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들이 기도라는 강력한 영적 전쟁의 무기를 고작 그런 부질없는 것을 구하는 데만 쓰는 것으로 오해하게 만들고 하나님은 알라딘의 요술램프의 지니처럼 완전히 인간의 종이 되어 그들의 요구할 때마다 어떻게 하든 들어주어야 하는 해결사로 전락을 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말씀드렸다시피 기도는 우리가 필요한 것을 얻어내는 방법으로 쓰여 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6:24-34) 24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중히 여기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또는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고,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26 공중의 새를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 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않으냐?
27 너희 가운데서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제 수명을 한 순간인들 늘일 수 있느냐?
28 어찌하여 너희는 옷 걱정을 하느냐? 들의 백합꽃이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하나만큼 차려 입지 못하였다.
30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들을 입히시지 않겠느냐?
31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32 이 모든 것은 이방 사람들이 구하는 것이요,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33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다.”
분명 하나님께서는 너희의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믿지 않는 자들이 구하는 것이니 너희의 구할 바는 오직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 하시지요? 그러면 너희의 필요한 것은 알아서 더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내일은 먹을 것 입을 것으로 걱정을 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 내일 일은 내일이 맡아서 하게 하라는 말인 것입니다. 두 번째 ‘내일’은 부사가 아니라 ‘주어’로 쓰인 단어입니다. 즉 내일 일은 내일을 주관하고 계신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니 너는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럼 그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골1:9-12) 9 그러므로 우리가 여러분의 소식을 들은 그 날부터, 우리도 여러분을 위하여 쉬지 않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을 채워 주시기를 빕니다.
10 여러분이 주님께 합당하게 살아감으로써, 모든 일에서 그를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서 열매를 맺고, 하나님을 점점 더 알고,
11 하나님의 영광의 권능에서 오는 모든 능력으로 강하게 되어서, 기쁨으로 끝까지 참고 견디기를 바랍니다.
12 그래서 빛 가운데 있는 성도들이 받을 상속의 몫을 차지할 자격을 여러분에게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우리에게') 주신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기도가 바로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바울이 골로새 교회를 위해 기도를 하는데 골로새 교회의 세상 적 필요가 아닌 그들의 성숙을 위해서만 기도하고 있지요?
성도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잘 자라날 수 있도록 지혜와 총명을 주시기를 구하고 주님의 뜻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구하며 이 세상에서 성도로서 살아가는 데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해 주십사 기도합니다.
그렇다고 지금 제가 성도는 이 땅에서의 자기의 필요를 하나님께 전혀 구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은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당연히 우리 자녀들은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 아버지께 구해야지요. 어린아이처럼 겸손하게 그 분의 도움을 구하며 살아야지요. 기도는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전제에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인 내가 아버지에게 부탁하고 요구할 수 있는 자리에 있다는 특권에서부터 기도는 출발하는 것입니다. 자녀가 아버지에게 부탁 못할 것이 어디 있습니까? 거기에 무슨 형식이 필요하며 거기에 무슨 특별한 시간이 필요합니까? 수시로 아이가 아버지에게 조르듯 우리는 아버지와 대화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니 그게 정상적인 기도 생활입니다.
제가 지금 드리려고 하는 말씀은 기도를 그렇게 무언가를 얻어내는 도구로만 생각하고 있는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깨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해하지 마시고 잘 정리하고 구별하시면서 들어 주세요.
실연을 당했을 때 “아버지 그 사람 참 야속하지요?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내가 자기를 얼마나 사랑했는데 이렇게 날 헌신짝 버리듯 버릴 수가 있어요?”하고 아버지 앞에서 울 수 있습니다. 그렇게 가슴 아픈 일이 자신에게 닥쳤을 때 자기 아들 독생자 보다 더 사랑하시는 그 자녀에게 아버지가 왜 그런 일을 허락하셨는지 여쭤 보세요.
사업이 힘들어 지셨어요? 그럼 그 때 “아버지 왜 내 사업이 이렇게 어려워 졌지요? 많이 힘듭니다. 왜 제 비즈니스가 이렇게 된 것이죠?”하고 아버지의 의중을 물어 보세요. 그렇게 기도하면서 그 일들을 통해서 아버지께서 나에게 가르치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가는 것이 기도인 것입니다. 무조건 ‘이거 해결해 주지 않으면 나 밥 굶을 거예요‘라는 식의 자해 공갈 단 수준의 기도는 지양하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골로새서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 가는 기도인 것입니다.(9절)
하나님의 뜻은 상관없이 무조건 소리소리 지르면서 먹을 거 입을 거 안 주면 굶어 죽고 말겠다고 금식하며 하나님 협박하는 그런 기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천지를 주관하시는 아버지께서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만드신 것 아니겠습니까? 아버지는 자녀가 필요한 것을 자녀보다 더 잘 아시는 분입니다. 분명히 그러셨잖아요? 내가 이미 다 안다고 그러니까 그런 것으로 기도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 그 분이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시지 않으실 때에는 무슨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 의중을 알아가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이며 거기에 필요한 것이 기도 생활인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녀가 요구한 것을 자녀에게 주었을 때 그 것이 자녀에게 해가 될 것인지 득이 될 것인지도 너무 잘 아십니다. 아버지는 자녀가 원한다고 무조건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 자녀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가시는데 불필요한 것은 절대 주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당신의 자녀들이 이 땅에서 자기의 모든 소원을 만사형통으로 이루며 불타버릴 땅에다가 뿌리를 박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아버지는 자녀가 진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도록 나그네로 사는 그 세상에서 자꾸 정을 떼게 만드시는 분이시지 이 땅이 너무 좋아서 아버지 집에도 관심을 두지 않도록 그렇게 만드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구하는 것을 한 번 잘 생각해 보세요. 대부분이 우리의 정욕과 탐욕에서 나온 요구 사항들 아닙니까? 아버지께서 우리의 정욕으로 말미암은 것들을 왜 다 들어 주시겠습니까?
(약4:2-3) 2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하면 살인을 하고, 탐내어도 가지지 못하면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얻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요,
3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것은 자기가 쾌락을 누리는 데다가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차피 하나님이 다 하실 걸 왜 기도하라 하시는가?‘이런 질문이 안 드세요?
(겔36:32-37) 32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너희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너희가 알아야 한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의 행실을 부끄러워하고, 수치스러운 줄 알아라!
33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서 그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 주는 날에는, 너희의 성읍에도 사람이 살게 하며, 폐허 위에도 집을 짓게 하겠다.
34 이전에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황폐한 땅을 보며 지나다녔으나, 이제는 그 곳이 묵어 있지 않고, 오히려 잘 경작된 밭이 될 것이다.
35 그래서 사람들이 말하기를, 황폐하던 바로 그 땅이 이제는 에덴 동산처럼 되었고 무너져서 폐허와 황무지가 되었던 성읍마다 성벽이 쌓여 올라가서 사람 사는 땅이 되었다고 할 것이다.
36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의 사면에 남아 있는 여러 나라들이, 바로 나 주가 무너진 것을 다시 세우며, 황폐한 땅에 다시 나무를 심는 줄을 깨달아 알 것이다. 나 주가 말하였으니, 내가 이룰 것이다!
37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이제 나는 다시 한 번 이스라엘 족속을 시켜서 내게 도움을 간청하게 하겠고, 그들의 인구 수를 양 떼처럼 불어나게 하겠다.
아주 중요한 구절입니다. 잘 보세요. 하나님은 당신께서 계획하신 하나님의 일을 하십니다. 그 일은 우리의 요구로 절대 바뀌어 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수단으로 인간의 기도를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실까요?
위의 본문은 이스라엘이 타락을 해서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게 만드셨음에도 이스라엘이 회개하지 않을 때 그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축복을 하시는 장면입니다. 도저히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곳에서 축복을 하시겠다고 하시며 내가 다 할 것이지만 너희는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희들의 힘으로는 이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생기는데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이루어 주실 수 있다는 것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하고 그 간구로 인해 나중에 ”아, 하나님께서 다 하셨구나.“ 라는 것을 이스라엘로 하여금 알게 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에게 기도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 안 하면 안 들어주시나요? 네, 안 들어주십니다. 이해가 안 가세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데 우리 성도의 기도를 통해 일을 하시기로 하셨으며 성도가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작정과 계획이 실패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실패할 수 없으신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러면 어떤 결론이 나오지요?
하나님은 반드시 성도로 하여금 기도를 하게 만드신다는 결론이 나오지요?
그래서 성경에 그렇게 수많은 구절에서 기도의 중요성을 반복하여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것들에만 관심을 두고 사느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일을 도외시할 때 하나님은 성도를 반드시 징계하십니다. 성경에서 그 ‘파이데이아’라는 단어를 ‘징계’라고 번역을 해서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하면 반드시 우리를 혼내신다는 것으로 잘 못 이해를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징계는 discipleship training, 즉 하나님 자녀들의 자녀 됨을 만들기 위한 교육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징계로 말미암아 기도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여러분이 이해하시기 쉽게 초등학교 육 학년 수준으로 논리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조금 유치한 논리 같아 보이시더라도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지만 잘 이해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에게 기도를 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시지만 나중에는 그 공로를 하나님의 백성에게 돌려주십니다. 성도는 그렇게 자신의 기도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 가는 것을 보며 참 된 하늘의 행복과 기쁨을 맛보게 되고 그러한 일들이 반복 되면서 성도는 자발적으로 기도의 깊은 자리를 점차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십니다. 그러나 그 일들이 이루어 진 것이 성도가 묘 자리를 잘 써서 그렇게 되었는지 사주팔자가 좋아서 그렇게 되었는지 하나님께서 도와 주셨는지 구분하게 하기 위해 기도라는 것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지 기도 좀 했다고 ‘하나님 나 잘했지요?’라고 하나님께 뻐길 수 있는 내용이 아닌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게 되고 우리를 다시 돌아보게 되며 나의 아버지께서 주시지 않는 것에 대해 포기할 수 있게 되며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성숙되어 가는 것입니다.
절대로 우리가 기도의 응답이라고 말하는 그런 것, 우리가 필요한 것을 얻어내는 것만이 축복이 아닌 것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었는가가 올바른 기도생활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어야지 그가 얼마나 많은 기도의 응답을 받았는가가 올바른 기도의 척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가 하는 기도의 응답이 안 들어지는 것이 더 정상일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구원을 받았음에도 여전히 이 육신을 입고 있기에 우리가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자신은 기도의 은사가 있다는 둥, 내가 기도하면 하나님의 보좌도 흔들려서 병도 낫고 사업도 잘 된다는 둥의 너스레들은 그야말로 쓰레기 같은 호언일 뿐입니다.
(시106:14-15) 14 그들은 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내었고 사막에서는 하나님을 시험하기까지 하였다.
15 그래서 주께서는 그들이 요구한 것을 주셨지만, 그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다.
잘 보세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엉뚱한 것들을 많이 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구하는 것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시편 기자가 뭐라 합니까? 그렇게 그들이 원하는 것을 받은 것이 그들의 영혼을 파리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요구한 것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의 영적 성숙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필요한 것을 요구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일이 내 삶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는 기도,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말씀드렸다시피 기도는 하나님과 내가 이제 대화를 할 수 있는 관계가 되었다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성도의 삶에서 내가 요구한 것이 이루어지고 안 이루어지고는 사실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 앞에 서면 모두 돌격을 받아 죽어야만 하는 죄인에서 이제 그 분의 자녀가 되어 직접 대면하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관계가 되었다는 것이 기도의 초점인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하기 위해 눈을 감는 순간 어떻게 내가 하나님을 대면하여 이렇게 대화를 할 수 있게 된 것인가에 감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시작할 때 아버지하고 부르지 않습니까? 그것은 이 기도는 허공에 날리는 기도가 아니라 기도를 들으시는 대상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실존하는 분이 나의 말을 들으신다는 사실이 전제된 것이 기도입니다. 본문 23절을 다시 보세요.
(요16:23-24) 23 그 날에는 너희가 내게 아무것도 묻지(또는 '요구하지') 않을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주실 것이다(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24 지금까지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 이름으로 구하지 않았다. 구하여라. 그러면 받을 것이다. 이것은 너희에게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너희의 눈이 뜨이게 되면 너희는 그 날에 아무 것도 구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하시지요? 그 말씀은 지금까지 너희가 세상에서 너희의 자랑을 위해 구했던 세상의 힘, 그러한 세상의 것들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구하지 않게 될 것이라면서 또 무언가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그 것은 구하지 말 것과 구해야 할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구하지 말 것은 세상살이에 필요한 세상의 힘,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을 자랑하기 위해 구하는 것들이었다면, 구하라고 하시는 것은 이제 예수로 말미암아 보게 된 새로운 세상에서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삶, 거룩한 삶에로의 전진과 성숙, 그리고 그로인한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관한 것들을 구하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이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라는 것입니다.
예수가 근거가 된 기도는 절대 이 세상의 필요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할 때 예수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예수님이라면 아버지께 어떤 기도를 하셨을까’를 생각해 보고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 본 것처럼 우리 주님과 성경의 기자들인 사도들이 어떤 기도를 했습니까? 모두가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대한 기도였고 그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이루는 성도의 인내와 거룩한 삶으로의 성숙을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막11:23-24) 23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벌떡 일어나서 바다에 빠져라' 하고 말하고, 마음에 의심하지 않고 말한 대로 될 것을 믿으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24 그러므로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면서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미 그것을 받은 줄로 믿어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25 너희가 서서 기도할 때에, 어떤 사람과 서로 등진 일이 있으면, 용서하여라. 그래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실 것이다."
잘 보시면 성경에서는 겨자씨만한 믿음만 우리에게 있어도 산을 들어 바다로 던질 수 있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산이 들려서 바다로 던져진 사건은 없었습니다. 그럼 지금까지 겨자씨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말인가요? 여기서 말하는 이 산은 성전이 있는 산을 말하는 것입니다. 옛 성전은 구약의 율법을 상징한다고 했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성전을 청소하시며 이 성전을 헐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참 성전인 예수가 아니면 이 율법을 상징하는, 너희들의 형식적인 열심과 노력으로 상징되는 성전으로는 절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그렇게 그 옛 성전을 청소하는 대목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옛 성전을 파괴하시는 장면인 것입니다. 그 산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로 말미암아 그 율법은 바다에 던져진 것입니다. 옛 것은 이제 끝이 난 것이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제 율법의 산, 형식의 산이 없어지고, 그 산이 바다에 던져지고 하나님과 우리를 가리던 것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바로 이 이야기입니다.
(사40:4-5) 4 모든 계곡은 메우고, 산과 언덕은 깎아 내리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하고, 험한 곳은 평지로 만들어라.
5 주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니, 모든 사람이 그것을 함께 볼 것이다. 이것은 주께서 친히 약속하신 것이다."
바로 이 일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게 새 언약이 이루어지면 우리가 구하는 것을 모두 우리에게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내 이름으로 구하라 내가 모두 들어주리라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럼 주님께서 우리에게 구하라고 하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말씀은 우리가 그 전까지는 꿈도 못 꾸던 것들을 우리가 구하게 되고 그것은 모두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구원을 얻은 자들은 바로 이런 것을 구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갈5:22-26) 22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23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금할 법은 없습니다.
24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은 정욕과 욕망과 함께 자기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25 우리가 성령으로 삶을 얻었으니, 우리는 성령이 인도해 주심을 따라 살아갑시다.
26 우리는 허영에 들뜨거나, 서로 노엽게 하거나, 질투하거나 하지 않도록 합시다.
어떻게 우리가 이런 것을 구하게 될까요?
이제 죄에 대한 자각이 생기고 회개가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려는 욕구가 생기게 되며 하나님께 그러한 성령의 열매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기도는 하나님께서 완벽하게 이루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뭐든지 구하면 다 주겠다는 것은 이런 의미입니다.
그 예수의 십자가와 보혈을 근거로 새 생명을 얻은 자들이 그 영원한 하늘 백성으로서의 수준으로 가기 위한 그런 거룩한 구함에는 모든 것으로 응답을 하시겠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 믿음의 성도들은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내가 노력해서 구원을 얻어 보겠다고 하는 율법의 산을 바다에 던져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하는 기도를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고 하나님은 이미 그 산을 바다에 던져 버리셨음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산은 우리의 기도로 바다에 던져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도 보세요. 하나님이 창세전에 그 율법의 산을 바다에 던져 버리시기로 작정하신 것이지만 우리의 기도를 통해 그 산을 던지시겠다고 하시지 않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기도를 하세요? 여전히 여러분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하나님께 기적을 요구하고 계신가요? 그런 사람들이 왜 저 산은 저 자리에 아직도 저렇게 건재한가? 왜 이 역사 속에서 산이 들려 바다에 던져진 사건이 한 건도 없는가? 궁금해 하는 것입니다. 그런 기적은 성도에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산이 들려 바다에 들어가는 일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날의 기도는 전부 그러한 기적만을 요구하는 기도가 되어버리지 않았나요?
우리가 믿음이 있는 자들이라면 이미 그 율법의 산, 형식의 산, 죄악의 산이 바다에 던져졌음을 인식해야 하는 것이고 그러한 현실이 우리의 삶 속에서도 가시적으로 일어나게 되기를 기도하는 자들이 바로 성도인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병에 걸리신 분들이 계신가요? 기도하세요. 그러나 무조건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 제게 이 병을 허락하신 이유가 뭡니까? 내가 이제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수준까지 오게 된 것입니까? 그래서 저를 부르시는 건가요? 아님 제가 건강을 가지고 너무 저 자신의 쾌락만을 위해 살아서 입니까? 아님 아픈 저를 통해 또 다른 어떤 영혼을 구원코자 하심입니까? 그 이유가 어떤 것이든 선한 하나님께서 허락하셨으니 선한 결과를 이룰 것은 뻔한 것이고 그래서 저는 그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까지 가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힘이 듭니다. 저도 아파보니까 그 때는 정말 그 고통이 너무나 커서 다른 것 생각 하나도 안 나더라고요. 그러나 성도는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합니다. 우리는 지어져 가야 합니다. 큰 그릇으로 성숙되어져 가야 합니다. 그러한 신앙생활을 통해서 인내의 열매가 맺히고 절제의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에 죽도록 미워하는 분이 있으세요? 그 때 ”하나님 저 인간만 없으면 저 신앙생활 잘 할 수 있어요. 저 인간 좀 치워주세요”하시기 전에 “하나님 왜 그리스도인인 저에게 이런 미움이 있습니까? 저 사람으로 하여금 제게 가르치시려 함이 분명 있겠지요? 그렇다면 저 사람도 하나님께 들려 쓰임을 받는 사람채찍 인생 막대기이군요. 그것을 알았으니 저 이가 나를 괴롭힐 때마다 저이를 미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의중을 헤아리겠습니다.”까지 가세요. 거기서 사랑의 열매, 용서의 열매가 맺혀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기도의 내용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으로 결론이 나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 참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 우리에게 기도를 은혜의 수단으로 주셨습니다. 그러한 올바른 기도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인 성령의 열매를, 진짜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받으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음 주부터 몇 주간은 주기도문을 함께 공부하면서 기도의 진의에 대해 더 깊이 공부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23장 주기도문 (1)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눅11:1-4)
1 예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는데, 기도를 마치셨을 때에, 제자들 가운데 하나가 말하였다.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준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그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2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말하여라. '아버지(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오며, 나라가(다른 고대 사본들 가운데 극히 일부에는 '성령이 임하여 우리를 깨끗하게 하여 주시오며' ) 임하게 하시오며,(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시옵소서'가 첨가되어 있음.).
3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또는 '내일 양식')을 주시옵고,
4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또는 '빠뜨리지' ) 하지 마시옵소서. ( 다른 고대 사본들은 끝에 '우리를 악에서(또는 '악한 자에게서') 구하시옵소서'가 첨가되어 있음).
(마6:9-13)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오며,
10 나라가 임하게 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시옵소서.
11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또는 '일용할 양식' 또는 '내일 먹을 양식')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또는 '빚진 사람의 빚을 삭쳐 준 것 같이')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또는 '빚을 삭쳐 주시옵고') 용서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또는 '시험에 빠뜨리지 마시고' 또는 '시련의 때로 이끌지 마시고'), 악에서(또는 '악한 자')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이옵나이다. 아멘.]](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괄호 안의 본문이 없음)’
'나의 품속에 가지고 있는 나의 가장 깊은 소원이 내가 누구인가를 정의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지금 무엇을 추구하고 있으며 무엇을 가장 소원하고 있는가?‘로 그 사람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가슴 속 깊은 곳의 소원이 나를 정의하고 나의 기도가 그 소원을 표현하는 것이라 한다면 내가 지금 무슨 기도를 하고 있는가가 바로 내가 누구인가를 정의 할 수 있는 척도가 될 수 있는 것이라 할 수 있겠지요? 여러분은 지금 어떤 기도를 하고 계십니까?
이렇게 우리의 가슴 깊은 곳의 소원이 우리의 기도로 나타나고 그 기도가 우리가 누구인가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이야말로 주님 안에서 우리가 누구인가를 가장 잘 나타내 주는 것이겠지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셨다는 것은 우리 성도는 바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그 기도의 내용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을 소원으로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이며 그러한 소원을 가지고 사는 이들로서의 ’나‘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정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기도문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 주기도문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문으로 하나님의 계시이며 하나님의 깊은 소망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주기도문을 통해 하나님의 가장 깊은 소원을 발견하고 또 그 기도를 우리의 기도로 만듦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깊은 소원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바라시는 것을 우리에게 소원하게 만드셔서 우리를 당신의 계획대로 만들어 내실 것임을 우리는 주기도문 속에서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누가복음11장 1절을 보겠습니다.
(눅11:1) 예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는데, 기도를 마치셨을 때에, 제자들 가운데 하나가 말하였다.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준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그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런 요구를 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제자들은 유대인이었고 유대인들은 기도를 열심히 하고 있었던 사람들이고 그들은 기도가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건 다시 말해서 제자들이 기도를 할 줄 몰라서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구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들이 줄줄이 꿰고 있던 시편의 내용들이 모두 기도문 아닙니까? 더욱이 예수님 당시 유대에는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을 유명한 기도문들이 이미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기도문들을 수시로 암송했습니다. 그 가운데는 ‘카디쉬’라는 좀 짧은 형태의 기도문도 있었고, 18번 축복기도라 불리는 ‘세모네 에스레’ 라는 기도문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카디쉬와 같은 기도문들을 매일 두 세 번씩 낭송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렇게 기도를 많이 알고 있었고 많이 하고 있었고 시편기도를 줄줄 외며 따라서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한 것은 상당히 놀라운 일인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한 데는 이런 배경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메시아가 곧 와서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리라는 기대가 유대인들 간에 팽배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메시아가 와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도록 하려면 그에 앞서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새롭게 헌신하고 순종하는 일들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부흥운동이 유대인들 안에서 많이 일어났고 단체들도 많이 생겼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바리새운동도 그 중 하나이고 사해 주변 쿰란 에 모여 살던 에센파도 그 중 하나였으며 세례요한도 회개와 심판의 부흥운동을 주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의 슬로건으로 기도문을 만들어서 암송을 했었습니다. 그들은 각자 자신들의 신학적인 이해와 이상과 소망 등을 담아 표현하는 특별한 기도문을 작성했습니다. 요한도 자신의 신학과 종말론적 소망 등을 담아 기도문을 만들었고 제자들에게 가르쳐서 날마다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했었다는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한 것은 기도의 방법이나 기도의 정의를 물은 것이 아니라 ‘스승님 이제 우리도 하나의 부흥운동을 이끌어 가는 무리가 되었으니 우리의 슬로건은 뭡니까’하고 물은 것입니다.
쉬운 말로 ‘당신이 추구하는바가 뭔지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으로 채택한 마태복음 6장의 주기도문은 산상수훈의 일부입니다. 마태복음을 1장부터 잘 읽어보면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족보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의 생애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태어나시자마자 애굽으로 쫓겨 가셨다가 다시 애굽에서 나오시는 장면이 나오고 3장에서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고 3장 후반부터 4장에서는 예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산 위에 오르셔서 산상수훈을 하십니다.
눈치 빠른 분들은 이미 아셨겠지만 이렇게 예수님의 생애의 전개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동일하게 전개되어 집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는 일부러 예수님이 애굽에서 나오신 지 30년이 넘은 후의 사건인 세례를 주님이 애굽에서 나오신 사건 바로 뒤에 붙여서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스라엘의 역사 중에 오늘 우리가 공부할 본문이 들어 있는 산상수훈은 어느 지점이겠습니까? 잘 생각해 보세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건너고 광야의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살 때에 지켜야 할 율법들을 받은 것처럼 예수님께서 새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열두 제자를 데리고 산에 올라가셔서 그들에게 천국 백성이 지켜야 할 율법들을 산상수훈을 통해 우리에게 들려주시고 계시는 장면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약의 산상 수훈은 구약의 시내 산인 것입니다.
구약의 출애굽은 어떻게 끝이 납니까?
(신27:9-26) 9 모세와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포하였다. "이스라엘아, 우리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라. 오늘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10 그러므로 너희는 주 너희의 하나님께 순종하고, 오늘 우리가 너희에게 명한 그의 명령과 규례를 지켜라."
11 그 때에 모세가 백성에게 명령하였다.
12 "너희가 요단 강을 건넌 뒤에, 백성에게 축복을 선포하려고 그리심 산에 설 지파들은,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요셉과 베냐민 지파이다.
13 그리고 저주를 선포하려고 에발 산에 설 지파들은, 르우벤과 갓과 아셀과 스불론과 단과 납달리 지파이다.
14 그리고 레위 사람들은 큰소리로 온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다음과 같이 외쳐라.
15 '대장장이를 시켜서, 주께서 역겨워하시는 우상을 새기거나 부어 만들어서, 그것을 은밀한 곳에 숨겨 놓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하면, 모든 백성은 '아멘' 하고 응답하여라.
16 '아버지와 어머니를 업신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하면, 모든 백성은 '아멘' 하여라.
17 '이웃의 땅 경계석을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하면, 모든 백성은 '아멘' 하여라.
18 '눈이 먼 사람에게 길을 잘못 인도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하면, 모든 백성은 '아멘' 하여라.
19 '외국 사람과 고아와 과부의 재판을 공정하게 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하면, 모든 백성은 '아멘' 하여라.
20 '아버지의 아내와 동침하는 것은 그 아버지의 침상을 모독하는 것이니, 그런 자는 저주를 받는다' 하면, 모든 백성은 '아멘' 하여라.
21 '짐승과 교접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하면, 모든 백성은 '아멘' 하여라.
22 '자매, 곧 아버지의 딸이나 어머니의 딸과 동침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하면, 모든 백성은 '아멘' 하여라.
23 '장모와 동침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하면, 모든 백성은 '아멘' 하여라.
24 '이웃을 암살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하면, 모든 백성은 '아멘' 하여라.
25 '뇌물을 받고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하면, 모든 백성은 '아멘' 하여라.
26 '이 율법 가운데 하나라도 실행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하면, 모든 백성은 '아멘' 하여라."
이곳은 구약의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언약을 맺으시는 클라이맥스 부분입니다.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넌 후 가나안에 들어가면 에발산과 그리심 산에 서서 레위인 들이 열두 가지 언약을 이야기하면 아멘, 아멘 해야 하는 데 모두 이러저러한 것을 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 아멘, 저주를 받을 것이라. 아멘’으로 끝이 납니다. 그런데 산상수훈에서 천국 백성과 하나님이 맺으시는 언약은 어떻게 시작하나요? ‘복이 있나니, 복이 있나니’로 시작합니다.
율법 아래 있었던 구약의 이스라엘은 죄 가운데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기 때문에 ‘죄 지으면 저주 받는다’로 끝이 나지만 이제 신약에서 새로운 이스라엘, 천국 백성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으로 주어지는 복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약의 언약에서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노래를 하나 적어서 가르쳐서 부르게 하라고 하시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신31:19) 이제 이 노래를 적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르쳐 부르게 하여라. 이 노래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내가 무엇을 가르쳤는지를 증거할 것이다.
그렇지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에게 가르쳐 부르게 하라는 노래는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불순종했는지를 증거 하게 하기 위해 부르라는 노래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매일 노래를 외워 불렀는데 그 노래는 자기 자신들의 불순종을 증거 하는 노래였습니다.
다시 신약으로 돌아옵니다. 신약에서 구약의 모세의 노래와 대조적으로 예수께서 동일하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외워 부르라는 기도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주기도문인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의 대조 점과 연속성을 잘 아시겠지요? 그렇게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 얼마나 죄악 된 민족인가를 외워서 불러야 했고, 신약에서는 영적인 출애굽을 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신들을 저주의 자리에서 복된 자리로 불러주신 하나님께 불러야 할 노래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주기도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기도문은 바로 성도의 신분과 정체성,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와 성도가 이 땅에서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가 모두 들어 있는 아주 중요한 기독교의 핵심 교리들의 보고인 것입니다.
주기도문에는 일곱 가지의 기도제목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고 그 뒤에 일곱 가지의 기도 제목이 붙는데 그 첫 번째가
1)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2)나라이 임하옵시며
3)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4)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5)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6)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7)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입니다.
일곱이란 숫자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안식의 수요 완전수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완전한 기도를 가르치셨다는 것으로 풀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주기도문만 제대로 공부하면 우리가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가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이지요.
주기도문의 일곱 개 기도 제목 중 세 개는 하나님 당신에 대한 기도이고 네 개는 우리에 대한 기도입니다. 주기도문은 그렇게 세 개의 thou petition 과 네 개의 we petition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제일먼저 나오는 말이 헬라어 ‘파테르’입니다. 우리말로 ‘아빠’라는 말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요아킴 예레미야스에 따르면 예수 님 전후의 유대 어떤 문헌에도 하나님을 향해 ‘파테르, 아빠‘라고 기록된 곳은 없다고 합니다. 물론 구약의 여러 곳에 하나님을 아버지 혹은 어머니로 표현한 곳은 여러 곳이 있습니다. 몇 군데만 찾아볼까요?
(사49:15) "어머니가 어찌 제 젖먹이를 잊겠으며, 제 태에서 낳은 아들을 어찌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비록 어머니가 자식을 잊는다 하여도, 나는 절대로 너를 잊지 않겠다.
여기서는 하나님을 어머니와 같다는 표현을 씁니다.
(출4:22-23) 22 너는 바로에게 말하여라. '나 주가 이렇게 말한다. 이스라엘은 나의 맏아들이다.
23 내가 너에게 나의 아들을 놓아 보내어 나를 예배하게 하라고 하였건만, 너는 그를 놓아 보내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너의 맏아들을 죽게 하겠다.'"
여기서도 하나님이 부모처럼 묘사가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아들이라고 표현을 하십니다. 그리고 성경이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아버지라고 표현한 곳도 여러 곳 있습니다.
(사64:8) 그러나 주님, 주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님은 우리를 빚으신 분이십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이 손수 지으신 피조물입니다.
그렇지요? 그러나 이곳에서는 아버지의 의미가 부모와 자식 관계에 있어서의 아버지로서가 아니라 창조자, 구원자의 뜻으로 쓰인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 주님의 입에서 ‘아바’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헬라어의 아바라는 말은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부르던 우리말의 아빠와 같은 말입니다. 그 단어는 본질적으로 본체 적으로 하나인 친아버지와 자식 사이에서만 쓰이던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아버지라는 말을 창조주요 구원자로서의 표현으로는 썼지만 이렇게 ‘아바’ 라는 말은 예수님이 처음으로, 그리고 혼자서만 쓰시던 말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독생자 아들로서 그와 본체 적으로 본질적으로 하나이시기 때문에 쓰실 수 있는 단어였던 것입니다. 정말 아빠니까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하라고 하실 때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라고 부르라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그 독생자 되심에 동참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엄청난 선포입니다.
우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의 친아들, 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거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의 성립이 전제가 되지 않고는 기도가 시작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이 ‘아빠’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서 피조물의 필요에 의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 창세전에 이미 성부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의 대화에서 시작된 것이 기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습관적으로 반복해서 밤이 맞도록 기도하시고 하신 것은 인간의 몸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 나약함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창세전부터 그 아버지 하나님과 나누셨던 대화를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에게 있어서 기도라는 것은 예수님을 떠나서 설명되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구약에 기도에 관해 설명되어진 부분이 있나요? 잘 생각해 보세요. 어떻게 기도하라고 기도의 방법이 제시된 곳이 있습니까? 없지요? 그 것은, 기도는 영원부터 기도하셨던 예수께서 오셔서 기도를 가르쳐 주시기 전에는 우리 인간은 기도가 뭔지 알 수도 없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의 부자관계 부녀관계가 먼저 전제가 되지 않으면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행위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애틋한 사랑의 관계가 먼저 확인되지 않으면 기도는 출발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겟세마네에서, 십자가에서 왜 그렇게 힘들어 하셨는지 아세요? 40일 금식을 하시고도 끄떡도 없으시던 그 기개는 다 어디 가고 그렇게 힘겨워 하신 것일까요? 주님은 그 사랑하는, 뗄 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의 아버지와 아들이 그 십자가에서 등을 돌려야만 했기에 그토록 힘겨워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등을 돌리시고 저주를 하셔야만 하는 죄, 그 분은 우리의 죄가 되셔서 그렇게 하나님과 처음으로 떨어지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그 사랑을 아십니까? 그 사랑의 아버지가 바로 우리 아버지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신 기도를 하기 위해 눈을 감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는 순간 그 놀라운 축복과 우리의 신분에 대한 확인으로 온 몸에 전율을 느껴야만 하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난 아버지의 아들이다. 난 아버지의 딸이다. 우리 아버지는 예수를 사랑하신 그 동일한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고 계시다.’라는 복 된 현실을 감지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엄청난 하늘의 기도와 우리의 필요를 소리 질러 외쳐대는 저급한 이 세상 사람들의 기도와 어떻게 바꿀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주님께서 아버지는 아버지인데 내 아버지라 하지 않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라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도라는 것은 우리 개인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언약공동체인 교회의 소망이 담겨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성도의 기도는 개인적인 것을 지양하고 공동체적인 것을 지향하는 쪽으로 바뀌어 가야 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기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아버지와 딸의 관계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으로 가서 조금 더 자세한 기도의 내용을 공부해 보겠습니다.
(눅11:5-13) 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에게 친구가 있다고 하자. 그가 밤중에 그 친구에게 찾아가서, 그에게 말하기를 '여보게, 내게 빵 세 개를 꾸어 주게.
6 내 친구가 여행 중에 내게 왔는데, 그에게 내놓을 것이 없어서 그러네!' 할 때에,
7 그 사람이 안에서 대답하기를 '나를 괴롭히지 말게. 문은 이미 닫혔고, 아이들과 나는 잠자리에 누웠네. 내가 지금 일어나서, 자네의 청을 들어줄 수 없네' 하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의 친구라는 이유로서는, 그가 일어나서 청을 들어주지 않을지라도, 귀찮게 졸라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 사람이 필요로 하는 만큼 줄 것이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구하여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아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려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10 구하는 사람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사람마다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11 너희 가운데 아버지가 되어 가지고 아들이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으며,
12 달걀을 달라고 하는데 전갈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다른 고대 사본은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하늘에서부터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여러분이 이 이야기를 읽으시면서 하나님께 열심히 강청(强請)하면 하나님도 귀찮아서 들어주실 수밖에 없다는 식의 설교를 들으신 적이 있다면 얼른 그 이야기는 지워 버리세요. 이 이야기는 절대 그런 것에 초점을 두고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유대인들 사회에서 친구관계라는 것은 우리의 그 것과는 사뭇 다른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친구 사이라는 것은 새벽 두시고 세시고 간에 친구가 요청하면 뭣이든 네 것 내 것 없이 나누어주는 것이 유대인의 친구 관계입니다. 이 이야기는 그러한 유대인들의 관습을 전제하고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밤에 어떤 사람이 친구의 집에 가서 문을 두드립니다. 그리고는 “내 친구가 여행 중에 왔는데 먹을 것이 없어서 그러니 떡 세 덩이만 빌리자”고 하지요? 그랬더니 집 주인이 “밤이 너무 늦었다”고 하면서 친구의 청을 거절합니다. 이 이야기의 초점은 유대인들의 친구 관계를 감안할 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반어법적으로 떠 올리게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늦은 밤이라도 친구가 요청하면 당연히 일어나서 줘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다 한결같을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절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혹 친구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친구의 청을 거절 하는 일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너희와 나는 부자지간인데 너희의 자녀로서의 요구를 내가 왜 듣지 않겠느냐? 당연히 듣는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이 이야기의 중심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 부자지간이 확인된 사람은 무엇이든지 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면 찾을 것이요 두드리면 열리리라는 것입니다. 무얼 구하라고요? 영적인 것들 말입니다. 우리가 구해야 할 것들의 내용에 관해서는 차차 설명해 드릴 것입니다. 오늘은 기도가 어디에서 출발해야 하는 지에 관해서만 잘 숙지해 두세요. 어디서 출발해야 한다고요?
하나님과 내가 부자지간, 부녀 지간이 되었다는 것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를 시작하면서 ‘아빠’하고 그 분을 먼저 부르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을 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어구가 담고 있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아셨지요?
제24장 주기도문 (2)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6:9-13)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오며,
10 나라가 임하게 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시옵소서.
11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또는 '일용할 양식' 또는 '내일 먹을 양식')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또는 '빚진 사람의 빚을 삭쳐 준 것 같이')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또는 '빚을 삭쳐 주시옵고') 용서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또는 '시험에 빠뜨리지 마시고' 또는 '시련의 때로 이끌지 마시고'), 악에서(또는 '악한 자')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이옵나이다. 아멘.]](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괄호 안의 본문이 없음)’
저는 목회를 하기 전에 십 수 년 간 찬양 사역을 하면서 미국에서만 백 군데가 넘는 교회에 초청을 받아서 집회를 했습니다. 저 멀리 플로리다, 오하이오, 엘파소, 알라바마 거의 모든 주를 다닌 것 같습니다. 짧게는 하루 집회에서부터 길게는 일주일 집회를 인도하며 설교를 열 한편을 하고 찬양 콘서트를 삼일 저녁을 한 적도 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교회를 다니다 보니 인상적인 교회들이 참 많았습니다. 집회 시작 날부터 교회 마당에서 권사님들이 치마 걷어 부치시고 우리 옛날 시골 잔치 집처럼 무쇠 솥뚜껑을 걸어 놓고 전을 부치고 부꾸미를 부치고 하는 정겨운 교회가 있는가 하면 집회가 끝나고 새벽 두 시까지 성경에 대해 이야기하자고 열심을 내던 교인들도 있었고 집회 중간에 전기가 나가서 몇 백 명 앉혀놓고 통기타 하나로 집회를 마쳐야 했던 곳도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동화에서나 나오는 곳처럼 푸른 언덕위에 그림처럼 서있던 아름다운 교회도 있었고 텍사스 A&M처럼 유학생들만 모여서 자체 예배당을 건축해 낸 교회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제 기억에는 아주 인상 깊은 교회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이 깊었던 교회는 뉴욕의 한 작은 개척교회였는데 그 교회는 강단에 서면 마주 보이는 맞은편 벽에 커다랗고 선명하게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뵙고자 하나이다.” 설교를 하는 사람이 보게 되는 강대상 맞은 편 벽에는 이렇게 요한복음 12장21절의 말씀이 적혀 있었습니다.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뵙고자 하나이다.” 저에게는 그 말씀이 마치 그 자리에 앉아있는 성도들 모두가 강대상 앞에 서있는 설교자인 저를 향하여 던지는 부탁의 말씀 같이 들렸습니다. 설교 내내 그 눈앞에 보이는 말씀이 가슴을 찔렀습니다. ‘난 지금 이들이 그토록 뵙고 싶어 하는 그 예수를 전하고 있는가? 아니면 내 이야기를, 내 자랑을, 내 무용담을 겸손이라는 분을 발라서 이들에게 자랑하고 있는가?’ 그런데 당시 저의 설교는 간증이 반 이상이었습니다. 찬양 사역자가 성경을 강해하는 것은 좀 안 어울리잖아요? 그래서 대부분의 찬양 사역자들은 찬양 부흥회를 하더라도 거의 간증 수준의 설교를 하는 것이 다반사였습니다. 저도 가만히 제가 하고 있는 설교 아닌 설교를 곱씹어 보니 예수의 이야기는 하나도 없고 순 자기 이야기만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화려한 치장을 하고 예수님이 빠진 권고로 착하게 살자, 선하게 살자 하고 있는데 그 앞에 앉아 있는 분들이 거의 다 울고 계셨습니다. 아마도 미국에 와서 고생한 이야기며 하나님으로부터 기적적으로 기도 응답을 받은 이야기들이 감동이 되었었나 봅니다.
저는 그 집회가 끝난 후 극심한 자괴감에 시달렸습니다. 그 밤을 거의 꼬박 새웠습니다. 거기서 한 가지 하나님 앞에 다짐한 것이 있었습니다. 이제 다시는 내 이야기, 세상 이야기, 재미난 예화의 나열로 범벅이 된 그런 비빔밥 같은 설교는 다시는 안 하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본문을 잡든 예수 그리스도로 결론을 내어야 설교다운 설교라는 것을 저는 그 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후 저는 설교를 하기 위해 어떤 곳에 서더라도 그 벽에 걸린 말씀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앉아있는 회중들에게 마음으로 대답하고 올라갑니다. “예 오늘도 여러분이 뵙고 싶어 하는 예수만을 이야기하겠습니다. 내 이야기 하지 않겠습니다. 노자의 도덕경을 읽어도 알 수 있는 그런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티비 교양 프로에서도 들을 수 있는 그런 세상 이야기 하지 않겠습니다. 예수만을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항상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오늘도 예수만이 전해지게 하옵소서. 지루해도 할 수 없고 따분해 한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예수의 이야기만 전하게 하시고 그 예수만 전해지게 하옵소서.” 그래서 저의 모든 설교가 예수 그리스도로 결론이 나는 것입니다. 제가 성경을 깊이 공부해 보니 정말 그 이야기밖에 할 이야기가 없어요. 인간적인 권고나 추궁이 절대 사람을 바꿀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전했더니 그 예수가 청중의 마음속으로 뚫고 들어가 그들을 바꾸어 버리는 것을 저는 무수히 경험을 했습니다.
제가 설교를 하기 위해 우리 교회 강단에 올라올 때도 마음속으로 항상 그 외침을 듣습니다.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뵙고자 하나이다. 김용옥 교수의 강연 같은 학술 세미나 말고, 윤리강연 말고 예수를 뵙고자 하나이다.“ 저는 여러분의 얼굴을 보면서 이런 외침을 듣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공부하고 있는 주기도문을 통해서도 예수를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주기도문 첫 번째 시간으로 주기도문의 배경과 주기도문의 처음 시작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는 대목을 함께 공부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파테르”라는 단어를 쓰게 하심으로 본질적으로 본체적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의 수준으로 취급해 주신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기도는 반드시 그 회복된 하나님과 그 분의 자녀들의 관계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도 배웠지요?
오늘은 주기도문의 일곱 개 기도제목 중 세 가지의 thou petition의 첫 번째 것을 공부해 보겠습니다.
그게 뭡니까?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상관없이 이미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어떤 것에 의해서도 그 거룩이 침해를 받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라고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우리의 정성과 노력으로 그 분의 거룩한 이름에 무엇을 더 보탤 수 있는 것입니까? 비슷한 경우가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아니 그 내용은 지금 우리가 공부할 부분이 아니니까 차치하고라도 우리의 어떤 노력이, 우리의 가진 것 중 어떤 것이 그 분의 영광에 도움이 될까요? 생각해 보신 적 있으세요? 하나님은 이미 영광스러운 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분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고 하고 그 분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잘 들어 보세요. 제가 여러분이 이해하시기 쉽게 예를 들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여기 우물이 있다고 해 보지요. 그렇다면 그 시원하게 샘솟는 마르지 않는 우물을 가장 위하는 길이 뭡니까?
다른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가 그 우물에 부으면서 ‘우물아, 우물아 참 좋지? 내가 네게 물을 보태주고 있잖아’그러면 그 우물이 기뻐할까요? 그렇게 하면 그 우물에게 영광이 돌아갑니까? 그 우물은 이미 물을 충분히 가지고 있고 더 이상 시원하고 더 이상 맑을 수 없는 물인데 다른 것을 가져다 부어 주면서 “참 좋지?” 하는 게 그 우물을 위하는 것이냐는 말입니다. 아니면 우물가를 금으로 치장을 해 주면 그게 우물을 진정 위하는 일이겠습니까?
정말 그 우물을 위하는 길은 그 우물물을 맛있게 마시고 “야 참 시원하다”하고 진심어린 칭찬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우물을 자랑하는 것이 그 우물에게 가장 크게 영광을 돌리는 길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원한다는 것은 그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고 그분의 크심과 높으심과 그 분의 거룩하심을 인정하며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일에 감격하여 그 것을 즐기고 누리며 다른 이에게 그 생명수의 진가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지금 설명한 내용은 다분히 철학적인 설명입니다. 그래도 이해하시기는 쉽지 않습니까?
그럼 이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해달라는 기도가 구원 역사적 측면에서는 이 부분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는지 성경을 통해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한 가지 팁을 드리겠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게 해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에는 이미 하나님의 이름이 더러워 졌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이 더러워 질 수 있나요?
하나님은 초월자이십니다. 그 분은 영원부터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이름이 더러워 질 수 있나요? 본질적인 하나님의 이름이 더러워 질 수는 없습니다. 그 분의 이름은 이 세상 어떤 것으로도 본질적인 면에서 더럽혀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과 언약을 맺으시고 관계를 맺으시면서 이 세상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힘을 당했다는 측면에서 볼 때 하나님의 이름은 더러워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죠? 그리고 지금도 더럽힘을 당하고 계시지요. 에스겔서로 가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겔36:16-23) 16 주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17 "사람아, 이스라엘 족속이 자기들의 땅에 살 때에 그 행위로 그 땅을 더럽혔다. 내가 보기에 그 소행이 월경 중에 있는 여자의 부정함과 같았다.
18 그들이 죄 없는 사람들의 피를 흘려 그 땅을 더럽혔으며, 온갖 우상을 섬겨 그 땅을 더럽혔으므로, 그들에게 내 분노를 쏟아 부었다.
19 내가 그들을 그 행위대로 심판하여 그들을 여러 나라들 속으로 쫓아 보내며, 여러 나라에 흩어지게 하였다.
20 그들은 여러 나라에 흩어져서, 가는 곳마다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혔다. 그래서, 이방 사람들은 그들을 보고 '주의 백성이지만 주의 땅에서 쫓겨난 자들'이라고 하였다.
21 나는, 이스라엘 족속이 여러 나라에 흩어져서, 가는 곳마다 더럽혀 놓았지만, 내 거룩한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을 그대로 둘 수 없다.
22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하여라. '나 주 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하려고 하는 까닭은 너희들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너희가 여러 나라에 흩어져서, 가는 곳마다 더럽혀 놓은 내 거룩한 이름을 회복시키려고 해서다.
23 너희가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면서 내 이름을 더럽혀 놓았으므로, 거기에서 더럽혀진 내 큰 이름을 내가 다시 거룩하게 하겠다. 이방 사람들이 지켜 보는 앞에서, 너희에게 내가 내 거룩함을 밝히 드러 내면, 그 때에야 비로소 그들도, 내가 주인 줄 알 것이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내 백성이라고 하셨던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계속해서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너희들이 내 말을 잘 듣고 지키면 너희가 이곳에서 복을 받고 잘 살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너희들을 이 약속의 땅에서 쫓아내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계속 범죄하고 패역한 일을 저지르자 하나님께서 그들을 가나안에서 쫓아내 버리십니다. 그랬더니 그 열국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욕하고 우습게 여겼습니다. 이방 나라들이 “오죽 하나님이 못 났으면 자기 백성 하나 간수 못하고 이렇게 열국에 흩어서 고통을 받게 하는가?”하고 하나님을 모욕했다는 것입니다. 당시는 사람들이 인간사를 신들의 전쟁에 의한 것이라 여겼던 때입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승승장구하면 하나님이 하늘에서 승리를 하고 계신 것이고 가나안 사람들이 이기면 바알이 센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패배한 뒤 포로로 잡혀가고 여기저기 흩어지게 되자 이방 사람들이 그 하나님을 업신여기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자기 백성 하나 지키지 못하는 하나님, 못난 하나님, 약골 하나님” 그렇게 이스라엘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힘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겔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더럽혀진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하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이 에스겔서를 읽으면서 오늘날도 우리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자들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하고 계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조금 씁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겠다고 하시는가 볼까요?
(겔36:24-28) 24 내가 너희를 이방 민족들 가운데서 데리고 나아오며, 그 여러 나라에서 너희를 모아다가, 너희의 나라로 데리고 들어가겠다.
25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맑은 물을 뿌려서 너희를 정결하게 하며, 너희의 온갖 더러움과 너희가 우상들을 섬긴 모든 더러움을 깨끗하게 씻어 주며,
26 너희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고 너희 속에 새로운 영을 넣어 주며, 너희 몸에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살갗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며,
27 너희 속에 내 영을 두어, 너희가 나의 모든 율례대로 행동하게 하겠다. 그러면 너희가 내 모든 규례를 지키고 실천할 것이다.
28 그 때에는 내가 너희 조상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살아서,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이 자기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겠다고 하시나요?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을 구원하심으로, 열국에 흩어져 있는 자기의 백성을 취하여 내고 모아서 그들을 정결케 한 후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데리고 가나안으로 들어가시는 것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스스로 정결케 될 수 없다는 것을 아심으로 하나님께서 직접 물로 씻어 정결케 하시고 그 마음에 새 마음을 주시고 새 영을 주셔서 완전히 새 사람으로 만드셔서 더 이상 하나님의 말을 안 듣고는 못 배기는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서 가나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심으로 당신의 백성으로 만들고 그 백성들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으로 더렵혀진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바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그 거듭남을 우리에게 거저 주심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그 거듭남.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영원한 구원으로 인도하심으로 말미암아 열국으로 하여금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며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라는 고백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구원과 뗄 레야 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오늘 살펴보고 있는 “하나님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기를 소원 합니다.‘라는 기도는 “하나님 그 에스겔에게 약속하셨던 그 하나님 백성의 구원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도가 이미 응답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우리는 구원을 얻은 자라는 증거니까요? 그렇지요?
그렇다면 그 기도는 어떻게 해서 이루어졌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 구원이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 하는 것은 바로 그 기도의 응답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확인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옛 사람을 입고 있는 우리의 구원이 반드시 완성이 될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며 하나님께 겸손히 그 구원의 완성을 간구 드리는 것입니다. 이해가 가시지요?
지난주에 제가 이런 농담을 들었습니다. 어떤 분이 하나님은 지금 지옥을 보수 공사 하고 계시는 중이라고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왜 그런가 하니 한국의 찜질방이 지옥불이 무색해 질 정도로 너무 뜨거워져서 더 온도를 높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참을 웃다가 정말 오늘날 사람들이 지옥을 믿기는 믿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정말 그 지옥이 믿겨지는 하시나요? 영원히 죽지도 않고 죽을 수도 없는 곳에서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신음해야 하는 그 곳이 실존한다는 것을 정말 믿으세요? 아님 그냥 농담에나 등장하는 그런 곳으로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정말 그 지옥에 갈 뻔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시나요?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거기서 빠져 나오게 되었는지를 정말 아십니까? 어떻게 된 게 사람들에게 지옥이라는 것이 농담거리로 밖에 안 여겨지는 것 같아요.
여러분 우리는 오직 그 예수의 은혜로 인해서 지옥에서 건져냄을 받은 것을 잊지 마세요.
여러분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우리가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영적인 관점에서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구원 얻은 자답게 지어져 가고 있고 완성되어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기를 기도하면서 우리의 삶 속에서 구원 얻은 자다운 삶이 나오게 되기를 열망해야 하는 것이며
그러한 기도를 하는 자답게 우리의 손과 발을 움직여 신자다운 삶을 경주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크게 한 번 외칩시다. ‘하나님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옵소서.
제25장 주기도문 (3) 나라의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6:9-13)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오며,
10 나라가 임하게 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시옵소서.
11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또는 '일용할 양식' 또는 '내일 먹을 양식')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또는 '빚진 사람의 빚을 삭쳐 준 것 같이')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또는 '빚을 삭쳐 주시옵고') 용서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또는 '시험에 빠뜨리지 마시고' 또는 '시련의 때로 이끌지 마시고'), 악에서(또는 '악한 자')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이옵나이다. 아멘.]](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괄호 안의 본문이 없음)’
지난주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에 관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으로만 말미암는 다는 것을 우리는 함께 확인했습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영적으로 완성이 된 그 구원이 우리의 삶 속에서도 완성되어지고 성숙되어지도록 기도를 함으로써 우리의 구원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반드시 완성이 될 것이라는 것을 확인 하는 것이고 그러한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분투 속에서 경주할 수 있는 것이라 했지요?
이번 주에는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의 부분 나머지 thou petition에 관해 공부를 하겠습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같은 맥락에서 추적을 해볼 수 있는 것이기에 오늘 함께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말은 ‘나라가 임하게 하시오며’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는 ‘thy kingdom come’에서 확인 할 수 있듯이 Kingdom, 왕국입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하나님 나라는 민주주의 공화국이 아니라
왕이 다스리는 왕국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 나라는 왕이신 하나님이 다스리고 백성들이 그 통치에 순종하는 나라인 것입니다. 따라서 왕국인 하나님 나라는 왕이신 그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할 마음이 없는 자들은 못 들어 가는 곳입니다.
여러분 혹시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읽어 본 적이 있으세요? 난중일기라는 책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쓴 일기를 모아 놓은 책입니다. 거기에 여러분이 잘 아시는 이런 시가 있습니다. ‘한산 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통영에 가면 아직 이순신 장군이 그 시를 읊던 제승당 자리가 있습니다. 달이 휘영청 밝은 밤에 남해 앞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수루에서 깊은 시름을 하고 있는 이순신을 생각해 보세요. 그 적막한 바다를 가로 질러 한줄기 피리 소리가 그 달밤에 들립니다. 거기서 이순신은 애가 끊어지는 느낌을 받았다는 시입니다. 그 장군의 애를 끊게 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알려진 바대로 그 고통스러운 한 밤의 고민은 전쟁으로 인한 근심이었겠습니까? 난중일기를 잘 보면 이순신 장군은 전쟁을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솟구쳐 오르는 인생에 대한 질문을 잊을 수 있는 분주함을 제공한 전쟁을 이순신은 즐겼습니다. 난중일기를 앞뒤로 잘 읽어보면 한산 섬에서 그의 애를 끊게 한 것은 “도대체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답답함의 소산이었습니다.
조선 최고의 천재라는 매월당 김시습도 이런 시를 썼습니다. ‘미친 듯이 옛 사람에게 물어본다. 나는 도대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왜 아무도 나에게 대답하지 않는가?’
그렇게 자신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이며 왜 이렇게 나의 선택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인생을 살다가 가야 하는지, 도대체 이 인생 속에서 인간은 무엇을 추구하다가 가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처절하게 하다가 간 우리 조상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를 보면서 혈기 왕성하고 의심 많은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하곤 하지요?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가 조금 일찍 전해졌으면 그들도 곧 진리를 깨닫고 천국에 갔을 텐데, 그렇게 예수가 전해지기 전에 죽은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만약 그들이 지옥에 갔다면 그것은 unfair한 일이다” 어떠세요? 여러분은 그런 질문을 한 번씩 안 해 보셨나요?
그러면 조금 일찍 예수가 전해 졌다면 정말 그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은 예수를 믿을 수도 있었던 사람들을 한 사람이라도 놓치실 수 있는 분이신가요? 하나님은 창세전에 구원 받을 당신의 백성들을 이미 정해 놓으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예수가 조금 일찍 전해졌으면 이순신도 강증산도 김시습도 예수를 믿을 가능성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까? 루소 같은 사람은 진리를 찾아 헤매며 성경을 일 백 독(讀)을 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아닌가라는 책을 썼을 뿐입니다. 그에게 예수가 전해졌고 그 예수에 관한 완벽한 정보가 담겨 있는 성경을 백 번을 읽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왜 예수를 믿을 수 없는지에 관해 책을 썼던 것입니다. 피뢰침을 발명한 벤자민 프랭클린은 당시 그 유명한 황금의 입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던 조지 휫필드의 친구였습니다. 조지 휫필드는 당시 전 세계의 영적 대 각성 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의 설교를 듣고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대 설교자가 그토록 자주 찾아와 개인적으로 복음을 설명했는데도 그는 결국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누가 스스로 예수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택하셔서 이름을 부른 이들 외에는 절대 예수를 알 수도 없고 예수를 이해 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자꾸 지옥에 가는 사람들을 두고, 그들은 지옥에 안 가도 될 뻔한 사람들인데 우리가 게을러서 복음을 안전했기 때문에 그들이 복음을 못 들어서 지옥에 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그들은 지옥에 가고 싶어서 가는 것입니다. 제 대답이 좀 의외인가요? 지옥에 가고 싶어서 지옥엘 가다니요?
여러분 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통치가 싫어서 나도 하나님처럼 되어서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지고 싶다는 데서 출발한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그러한 자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죽이시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기쁨으로 삼는 이들로 새롭게 살려내시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면 인간은 모두 자기 마음대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고 싶어 합니다. 차라리 지옥에 가서 고통을 당할지언정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해야 하고 , 무조건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해야 하는 하나님의 나라에는 절대 가기 싫어하는 것이 죄인들의 속성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자기가 원해서 지옥에 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그 통치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는 곳입니다. 민중이 주인이 되고 민주주의가 통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 홀로 통치하시고 거기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우러져 사는 곳이 천국입니다. 천국은 그저 우리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곳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천국을 공간적이며 물질적인 곳으로 바라보시면 안 됩니다.
천국은 이 지긋지긋한 죄 덩어리인 우리의 육체가 지금처럼 죄에 대한 욕구를 토해내는 그런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기쁘게 받아들이고 그렇게 살며 거기서 최상의 행복을 얻는 그런 곳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곳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는 것은 그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 가운데 임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성경을 읽으시면서 그 성경의 주제가 무엇으로 생각하시며 읽으십니까?
책에는 반드시 주제가 있을 것 아닙니까? 저는 여러분이 이해하시기 쉽게 성경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또 다른 주제를 대라면 어떤 것들을 대시겠습니까?
하나님 나라, 언약(言約), 사랑, 구속사(救贖史), 하나님의 주권(主權), 은혜 등 여러 가지로 성경의 주제를 표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 거시적으로 다른 모든 것들을 품어 안을 수 있는 주제를 대라면 ‘하나님 나라’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그 주제로 삼고 있는 책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의 완성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에 저는 주제를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을 드린 것이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완성하시는 길에 당신의 백성을 구원해 가시는 역사를 구속사(救贖史)라 하는 것이기에 그렇게 주제를 댈 수 있는 것이고, 그렇게 완성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과 그 분의 백성, 백성들 상호 간의 사랑이 풍성한 곳이며 이 땅에서도 그러한 수직적, 수평적 사랑을 추구하며 사는 것이 그 나라 백성다운 삶이라는 의미에서 성경의 주제를 사랑이라고 할 수 도 있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당신의 언약을 따라 이루어 가신다는 의미에서 성경의 주제를 언약(言約)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고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시작되고 완성이 된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성경의 주제라고 말할 수 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 나라라는 대 주제 안에 부제들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의 주제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국가의 삼요소가 뭡니까? 국민, 주권, 영토입니다. 거기서 제일 중요한 것이 뭐지요?
주권입니다. 왜냐? 여러분 어떤 나라가 다른 나라에게 나라를 빼앗기면 무엇을 잃었다고 표현을 합니까? 그 나라의 주권을 잃었다고 하지요? 우리나라가 일제에서 광복을 맞았을 때 일제히 신문들이 조선이 주권을 찾았다고 보도를 했습니다. 이렇게 국가의 삼 요소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주권입니다. 그렇다면 주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누구에게 통치권이 있느냐가 주권입니다. 민주주의 공화국은 주권이 국민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국민의 대표들인 국회의원들이 나라를 이끕니다. 그러나 왕국의 주권은 왕에게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라는 왕이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의 주권은 하나님께만 있는 것이지요.
주권에는 입법, 사법, 행정의 삼 요소가 있어요. 법을 세우고 그 법으로 나라를 다스리며 그 법을 어겼을 때 재판을 해서 상벌을 가하는 그런 것이 주권 속에 모두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 하나님 나라라는 것입니다. 이해가 가세요? 인간은 원래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할 때에 가장 행복하도록 지어진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 하나님의 은혜의 장중을 떠나서 스스로 자기들 인생의 통치자가 되어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고자 한 데서 인간이 겪는 모든 고통과 슬픔과 아픔들이 배태된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 받은 우리 성도들은 그 하나님 나라에서의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서도 즐겁게 받아들여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왕국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에 의해 건설된 나라를 말합니다. 우리 인간과 하나님이 협조해서 만든 나라가 아닌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나라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나라 백성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될 수 없고 하나님께로 난 자들만이 그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요1:12-13) 12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13 그들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욕망으로 나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났다.
마태복음에 보면 처음에 족보가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 14대요 다윗에서 바벨론 유수까지 14대요, 바벨론 유수에서 예수님까지 14대라고 적혀있습니다. 성경이 일부러 그렇게 14라는 숫자로 족보를 나누고 있음을 우리는 금방 알 수 있습니다. 14는 7이 두 개인 숫자이지요? 그렇게 따지면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서 예수님까지 7이 여섯 개인 족보가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 족보의 마지막이십니다. 여섯 번째 세대의 마지막이시며 일곱 번째 세대의 시작으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완전한 안식의 숫자 7이 채워지기 위해서는 마지막 세대가 와야 하는데 그 세대는 예수님을 시작으로 성령으로 난 자들이 그 세대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그 족보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 하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 자들은 예수님의 아래로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곳은 “아노덴” 위로부터 난 자들, 거듭난 자들로 이루어진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즐겁게 받아들이며 순종하는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 하나님 나라인 것입니다. 인간의 자연적인 생식에 의해 만들어지는 나라가 아닌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지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는 우리가 발전시켜서 만들 수 있는 곳이 아니고 하늘로부터 임해야 하는 나라인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거듭난 자들로서 그렇게 하늘로부터 임한 그 하늘나라의 백성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을 나그네로, 이방인으로 살아가도록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늘나라에 속한 하늘나라 사람들이 소원하는 것이 어떤 것이어야 하겠습니까?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 속한 속된 것에만 목을 매고 있다면 그 같은 코미디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 나라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 땅의 것들을 얼마나 누리고 있는 가로 우리의 진가를 나타낼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인가는 우리가 얼마나 성공적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느냐로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평가 기준은 그렇게 우리의 학식이나 재산이나 지위로 평가 되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고지 꼭대기로 올라가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므로 얼마나 예수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고 있는 가로 평가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속한 왕국이 이 세상에 있으면 우리의 진가는 이 세상 것들로 나타나는 게 맞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속한 왕국은 하늘에 있는 하늘나라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열매는 하늘나라의 것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이제 얼마 있다가 다 내려놓고 부수고 올라가야 할 이 땅의 나의 업적과 나의 재물에만 관심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아직 하늘나라가 무엇인지도 자기가 하나님 왕국의 백성인지 조차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왕국의 백성으로서 그 하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해야 하는 자들입니다. 어서 어서 하나님의 구속사가 마무리 되어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오기를 바라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이 땅에서의 자기의 소원성취나 만사형통의 기적이나 바라는 것으로 기독교를 정의하고 있다면 이런 웃지 못 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그 나라가 이미 임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게 오늘 설교의 핵심 포인트입니다.
(막1:15)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여기에서 ‘가까이 왔다’라고 번역이 된"엥기조"는 마태복음에도 동일하게 쓰인 단어입니다.
(마26:46) 일어나서 가자. 보아라, 나를 넘겨 줄 자가 가까이 왔다."
여기서도 ‘가까이 왔다’라고 번역이 되어 있지요? 예수님은 지금 당신을 팔 유다가 이미 와있다는 의미에서 ‘엥기조’라는 단어를 쓰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이 땅에 와 있다는 의미로 ‘가까이 왔다’는 표현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나라가 어디에 어떻게 와 있다는 말입니까?
(눅17:20-21) 20 바리새파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물으니,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21 또 '보아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말할 수도 없다. 보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또는 '안에' ) 있다.”
그 나라가 어디 있다고요? 우리 안에 있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재창조 되었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기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었고 그 하나님의 통치가 있고 하나님의 백성이 있는 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그 나라가 있다는 말은 그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잘 아시겠지요?
제가 주기도문을 헬라어로 읽다가 문득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주기도문 안에 쓰인 동사가 전부 과거 시제라는 것입니다. 헬라어에는 aorist, 부정과거 시제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부정과거는 과거의 1회적인 specific하고 demanding한 사건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정과거가 imperative, 명령형으로 쓰이면 과거의 의미와 현재의 의미와 종말론적 의미인 eschatological meaning을 함께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옵시며” 라고 기도하는 것에는 그 나라는 이미 임했으며 임하고 있고 반드시 임할 것이란 뜻이 모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왕국을 이해 할 때도 역시 already, not yet의 교리로 이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나라는 이미 우리에게 임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약속하시고 계획하신 것을 실패하실 수 없는 분이시기에 우리는 믿음으로 그 나라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 나라는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날 완전하게 이루어 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면서 우리의 신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맞다. 우리는 그 나라 백성이다. 그리고 그 나라는 이미 임했으며 반드시 올 것이다.”라는 것을 주기도문 속에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하늘나라를 살아야 하는, 하늘의 원리로 살아야 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에게는 환난과 고난이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왜 환난과 고난이 옵니까? 이 세상의 원리는 오른 뺨을 한 대 맞으면 그 모욕감이 없어질 때까지 상대방을 패주는 게 이 땅의 원리입니다. 이 땅의 삶의 원리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힘 이외에는 이 땅에서 누가 우수한지 가려낼 수 없기 때문에 힘으로 상대를 제압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늘의 원리는 오른 뺨을 맞으면 왼뺨을 돌려 대주는 십자가의 원리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십자가의 원리로 힘의 원리가 지배하는 이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충돌이 생기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그렇게 살라고 하셨기에 그 분의 통치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영적인 면으로 세상은 육적인 면으로 다른 차원, 다른 원리로 살아야 하는 자들이기에 우리는 세상과 부딪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성경은 성도의 고난, 환난, 고통이라 표현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모든 소망이 이 세상에서의 체면에 있으면 어떻게 뺨을 맞고 가만히 있을 수 있습니까? 그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가서 두들겨 패 줘야 합니다. 자기가 겁쟁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줘야 하는 것이 이 세상의 삶의 이치입니다. 힘의 원리로 사는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인정을 받아야 만족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모든 소망이 저 하늘나라에 있다면 “그 까짓 체면쯤 조금 구겨져도 괜찮다”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저 천국의 것으로 만족을 할 수 있는 자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에 동참한 자는 환난과 인내에도 동참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술, 담배, 도박, 마약을 왜 한다고 생각하세요? 한마디로 심심해서 입니다. 그 마음속에 뻥 뚫려 있는 공허를 메울 수 없기 때문에 무언가에 몰두하는 것입니다. 그 심심함을 잊기 위해서. 그러나 예수의 은혜와 천국의 소망으로 그 마음이 가득 채워져 있는 사람에게는 술 담배 도박이 필요 없습니다. 은혜에 취하면 술에 취한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희열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은혜에 취해서 왜 도박하는 자리에서 시간을 죽이겠습니까? 술보다 도박보다 더 좋은 것이 있는데 왜 그런 것으로 시간을 죽이겠습니까? 마약 중독자가 유일하게 마약의 유혹을 잊을 수 있을 때가 도박을 할 때라 지요? 인간은 세상의 힘을 대표하는 돈 앞에서는 다른 모든 것들을 잊게 된다는 반증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힘인 하나님을 우리 안에 소유한 자들입니다. 그 사랑과 은혜에 취해 보세요. 다른 것이 우습게 보이게 되지요. 그처럼 하늘의 소망으로 사는 자들은 이 땅의 체면 따위와는 별 상관없이 살 수 있게 됩니다. 하늘의 것을 소유한 자로서 대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제 대학 동기나 후배들 중에 일찍 사시나 행시에 합격해서 검사, 판사, 변호사가 된 친구들이 있습니다. 이제는 국회의원들도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반면에 저는 작은 이민 교회 목사입니다. 제가 대학 시절에 얼마나 큰 야망을 갖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다른 친구들이 저만큼은 뭘 해도 한 자리 할 사람으로 다들 생각했으니까요. 만일 그 때의 가치 기준이 여전히 저를 다스리고 있다면 저는 지금 배 아파서 절대 잠 편히 못 잡니다. 대학 시절 저보다 못했던 친구들이 저보다 더 큰 힘을 누리고 그 힘으로 행세하고 있는 꼴을 어떻게 봅니까? 그러나 지금의 저는 절대 그 친구들 앞에서 기 안 죽습니다. 부럽지도 않습니다. 왜요? 저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살다보니 요즘에는 그런 높은 자리에 있는 친구들이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오히려 저에게 고민을 상담해 옵니다. 여러분도 그런 당당함으로 사십시오.
(계1:9) 예수 안에서 여러분의 형제요 예수 안에서 환난과 그 나라와 인내에 여러분과 더불어 참여한 사람인 나 요한은
여기보세요. 예수의 나라, 예수의 환난, 예수의 참음은 equation입니다.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나라에 동참한 자는 이 땅에서 환난에 처하게 되고 그 딜레마를 해결하는 길이 참음이라는 것입니다. 인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는 사도 요한의 고백을 함께 하는 자들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지금 환난을 당하지만 너희는 그 하나님 나라를 믿음으로 보았으므로 참아라.’ 여러분 그러나 그 나라는, 그 때는 반드시 옵니다. 속히 올 것입니다. 세상 모든 민족과 방언과 나라가 아니 사탄까지도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인정하게 되는 날은 반드시 옵니다. 그러니 조금 만 참으십시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옵소서.’라는 기도를 하며 그 나라의 도래를 확인하고 확신하고 힘을 얻는 것입니다.
바로 그와 맥락을 같이해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라고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과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함께 사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 나라의 완성입니다. 하나님의 그 뜻은 이미 살펴 본 것처럼 이미 이루어져 있고 이루어 질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그 뜻은 어차피 하나님께서 이루실 텐데 우리가 그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뭔가요?
CS Lewis 는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한 종류는 하나님에게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한 종류의 사람은 하나님이 “너희의 뜻이 이루어질 지어다.”라고 방치해 두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무서운 말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가장 잔인하게 저주하시는 방법이 뭔지 아세요? 자기를 마음대로 살게 놔두는 것입니다.
(롬1: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마음의 욕정대로 하도록 더러움에 그대로 내버려 두시니, 서로의 몸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롬1:28-32) 28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기를 싫어하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해서는 안 될 일들을 하게, 타락한 마음 자리에 내버려 두셨습니다.
29 사람들은 온갖 불의와 악행과 탐욕과 악의로 가득 차 있으며, 시기와 살의와 분쟁과 사기와 적의로 가득 차 있으며, 수군거리는 자요,
30 중상하는 자요, 4)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요, 불손한 자요, 오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꾸미는 모략꾼이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신의가 없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입니다.
32 그들은, 이와 같은 일을 하는 자들은 죽어야 마땅하다는 하나님의 공정한 법도를 알면서도, 자기들만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일을 저지르는 사람을 두둔하기까지 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키우면서 간혹 어느 순간 그 자식을 포기 할 때가 있습니다. 아침에 학교 안가고 매일 오락실이나 가고 놀러나 다니는 자식을 처음에는 야단도 치고 매를 대기도 하다가, 하다하다 정 안되면 나중에 나오는 소리가 “네 마음대로 해, 네 인생이지 내 인생이냐”입니다. 이렇게 되면 정말 큰일 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제가 설교 때마다 소리 지른다고 뒤에서 소곤대지 마세요. 어떤 분들은 제가 너무 과격하게 닦달을 한다고 불만이세요. 언젠가 제 목소리가 매력적인 저음으로 깔리면서 농담이나 하고 유머나 들먹이며 “인생이 다 그런 거지요 뭐, 착하게 잘 먹고 잘살다 가세요, 그리고 목사 월급이나 밀리지 말고 잘 주세요.” 그러면 교회는 끝장 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잘 못 살고 있는 성도들을 보며 어떻게 소리를 안 지르나? 저는 소리 안 지르고 조용조용 설교하는 사람은 다 가짜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들이 잘 못 가고 있는 것을 보면서 애가 타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께서“그래 네 맘대로 살아, 네가 원하는 것 다 이루면서 살아” 그렇게 놔두시면 죄인이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죄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결국 죄만 짓다가 모두 죽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므로 우리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Thy will be done(Your will be done)‘이지 ’My will be done'이 아닌 것입니다. 그 좋은 본보기를 주님이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에 어떤 기도를 하셨습니까? “나는 이 잔이 내게로 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뜻은 무엇이었나요? “그 잔을 내게서 멀리하옵소서.”였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었나요? “너의 뜻을 접고 나의 뜻인 십자가를 지고 죽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살려내라, 나의 왕국을 이루어 내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순종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삶이 우리의 삶이 되어 우리는 그러한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삶을 좇아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원하는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과감히 포기할 수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의 삶에 연연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는 십자가라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는 기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면 이 세상에서의 부귀와 영화, 생명까지도 내려놓고 기쁘게 그 뜻에 따르겠다고 나서는 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하늘의 것을 영위하고 누리는 데 있지 이 세상의 것들을 붙들고 애걸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죽음은 우리 믿음의 승리의 시간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하나님 한 분만 붙들기 위해 이 땅의 모든 것을 놓는 최종적 순간인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가족, 내가 사랑했던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하나님을 잡기 위해 모두 놓는 것을 신자의 죽음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성도의 죽음을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그렇게 매일 매일 세상에 대해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결국에 우리의 목숨을 놓아야 할 때 아쉬움 없이 기쁘게 떠날 준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시116:15)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여러분 정말 천국을 사모하세요? 정말 그 곳에 가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이곳이 더 좋으세요? 이곳에서 누리던 많은 것들을 다 놓고 기쁘게 갈 수 있을 만큼 그 하나님 나라를 아십니까?
하나님 나라는 이미 임했고 반드시 임할 것이며 하나님의 뜻도 이미 이루어져 있고 반드시 이루어 질 것입니다. 우리는 환난과 궁핍 속에서도 그 나라를, 그 뜻을 믿음으로 기다리며 세상의 공격을 넉넉히 이기며 사는 자들이고 죽음까지도 불사하며 하나님의 뜻을 좇아야 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제26장 주기도문 (4)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마6:9-13)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오며,
10 나라가 임하게 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시옵소서.
11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또는 '일용할 양식' 또는 '내일 먹을 양식')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또는 '빚진 사람의 빚을 삭쳐 준 것 같이')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또는 '빚을 삭쳐 주시옵고') 용서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또는 '시험에 빠뜨리지 마시고' 또는 '시련의 때로 이끌지 마시고'), 악에서(또는 '악한 자')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이옵나이다. 아멘.]](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괄호 안의 본문이 없음)’
인류의 역사상 가장 큰 실험은 아마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 일 것입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모든 사람들이 능력껏 일하고 모든 사람들이 필요껏 쓰는 프롤레타리아 유토피아를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그러나 유토피아는커녕 70-80년 동안 실험한 끝에 공산주의가 남긴 것은 대 재앙 뿐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반증하는가 하면 인간들이 자기들이 스스로 왕이 되겠다고 하나님을 떠난 뒤 자신들을 스스로 보호하고 자신들의 힘을 쌓기 위해 만들어 놓은 그 어떤 것으로도 스스로의 안녕과 행복을 확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해 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바래야 하는 자들이며 이 땅의 유토피아가 아닌 하나님 나라를 구해야 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살펴 볼 기도는 어찌 보면 이 땅의 것을 구하라는 기도처럼 보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만일 이 기도가 우리가 이해하는 이 땅에서의 우리가 필요한 양식을 구하는 것이라면 성경은 자체 내에서 심각한 모순을 갖게 됩니다. 같은 장의 25절을 보면 분명 그런 것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고 명확히 나와 있거든요.
(마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또는 무엇을 마실까(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무엇을 마실까'가 없음) 걱정하지 말고,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그렇지요? 그렇다면 성경이 각기 모순된 요구를 한 장에서 이야기 할 리는 없고 우리가 놓치고 있는 어떤 심오한 뜻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 심오한 뜻을 한번 밝혀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성경을 잘 보시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의 “일용할 양식”이라는 단어 옆에 풋 노트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혹 내일의 양식” 이라는 말이 적혀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일용할”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에피우지온” 이라는 단어가 여러 가지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에피우지온”이라는 단어는 헬라의 어떤 문헌에도 쓰인바가 없는 아주 생소한 단어입니다. 성경에서도 딱 여기서 한번 쓰였습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도 이 단어에 대해 세 가지의 견해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가 “에피우지온”이라는 단어를 “에피”와 “우지아”의 합성어로 보고 “삶에 필요한” 이라는 뜻으로 풀이를 합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친숙한 해석이지요?
두 번째가 “그날을 위한, 당일을 위한” 이라는 뜻으로 풀이를 합니다.
세 번째가 “오는 날에 필요한” 혹은“다음날에 필요한”으로 해석을 하는 견해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세 번째 해석을 지지합니다. 그리고 제가 존경하는 개혁주의 신학자들도 거의 세 번째 견해에 의견일치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아람어를 쓰셨습니다. 아람어는 바벨론의 언어인데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70년간 있으면서 그들의 일상 언어가 아람어가 되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히브리어는 유대인들의 학자들이나 쓸 정도로 일반인들에게는 거의 잊혀 진 언어였습니다. 그런데 아람어 주기도문에는 “오늘 우리에게 내일의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로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한다는 것이 개혁주의 신학의 기본이라는 것은 다 아실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해설이 아무리 그럴 듯 하다해도 성경이 전하고자 하는 의도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로 흐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세대주의자들이 해석을 할 때에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로 가는 사람이 도중에 강도를 만난다. 예루살렘은 천국을 말하는 것이고 사마리아는 세상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강도는 사탄이고 선한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포도주와 기름을 부어 치료를 한다. 포도주는 예수님의 보혈을 의미하고 기름은 성령을 의미한다. 여관으로 데리고 가는데 그 여관이 교회이고 그 여관 주인에게 동전 두 개를 준다. 그것을 신약과 구약이라 하고 다시 오겠다고 약속을 하고 간다. 그 것은 예수님이 재림을 하실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떠세요? 어찌 보면 딱 맞아떨어지는 해석 같지 않으세요? 그러나 그 비유는 율법사가 예수님께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이 율법사에게 하신 대답으로 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그 율법사에게 율법에 뭐라 기록되었느냐고 물으시자 그 율법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다고 정확하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가서 그렇게 행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율법사가 누가 내 이웃입니까 라고 묻지요? 그 때에 주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론을 ‘누가 네 이웃인가 잘 정리하고 있어라. 네 입맛에 맞는 이웃 고르려 하지 말고 네가 다른 사람들의 이웃으로 살라’고 내려 주신 것입니다. 이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담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잘 못하면 성경을 우리가 원하는 쪽으로 임의로 해석하게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성경을 성경이 아닌 자기의 상식을 동원해서 푸는 것은 위험한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하는데 왜 제가 세 번째 해석인 ‘내일의 양식’을 지지하는가 하면 구약에서 내일의 양식을 오늘 주신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가 언제이지요? 광야에서 만나를 주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6일 째 되는 날에 안식일인 다음날 것까지 주셨습니다. 왜 여섯째 날에 다음날 것까지 주셨습니까? 안식일에는 그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하기 때문에 일곱째 날에는 일을 하지 않고 여섯째 날에 일곱째 날 것까지 거두고 안식일에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해 놓으신 온전한 창조를 기념하며 즐기고 종말에 이루어질 참 안식을 고대하라고 여섯 째날 다음날 것까지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여섯째 날 내일의 양식까지 주심으로 그 안식의 날은 반드시 온다는 것을 확신하게 하신 것입니다. 안식의 날인 내일이 오지 않을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굳이 내일의 양식까지 오늘 주실 필요가 없잖아요? 내가 벌써 내일의 양식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여섯째 날 일곱째 날의 양식을 소유함으로 일곱째 날인 안식일을 여섯째 날에 미리 누리면서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구속사 적인 측면에서 주기도문에서 쓰인 “내일의 양식”이라는 것에 대해 조금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쓰셨던 아람어 주기도문을 보면 거기 ‘마헬’이라는 아람어 단어가 나오는데 그 단어가 ‘내일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아람어의 “마헬”이라는 단어는 그냥 24시간 후의 내일이라는 뜻이 아니라 오늘과는 다른 날, 즉 다가올 시대의 내일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오늘 우리에게 내일의 양식, 오는 날의 양식을 주옵소서” 라고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는 지금 바로 다가올 영원한 안식의 나라, 천국이 임하게 될 바로 전인 종말을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며 이 땅에서 그 천국을 맛보면서 사는 자들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울러 그 안식의 나라, 하나님 나라는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가올 내일, 즉 하늘나라를 살게 될 하늘나라의 백성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저 하늘의 것으로 먹고 마시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 나라를 통치하시는 왕이 주시는 것으로 만족하며 그 나라를 준비하며 사는 자들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그 하늘의 양식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오늘 “내일의 양식을 우리에게 주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하는 그 하늘의 양식이 무엇인가요? 요한복음에 정확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요6:27-35) 27 너희는 썩을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지 말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양식을 위해 일하여라. 그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줄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자를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28 그들이 예수께 물었다.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됩니까?"
29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다."
30 그들은 다시 물었다. "우리에게 무슨 표적을(예수의 신성을 보여주기 위한 상징으로서의 기적(그리스어 세메이온) ) 행하셔서, 우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선생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31 '그가 하늘로부터 빵을 내려서, 그들에게 먹게 하셨다(출 16:4, 5; 시 78:24)' 한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32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부터 너희에게 빵을 내려 주신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부터 참된 빵을 너희에게 내려 주시는 분은 나의 아버지시다.
33 하나님의 빵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인데, 그것은 세상에 생명을 준다."
34 그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그 빵을 늘 우리에게 주십시오."
3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내게로 오는 사람은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요, 나를 믿는 사람은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보시다시피 그 양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바라야 하는 그 내일의 양식인 예수는 어떤 예수입니까? 하늘 왕의 신분으로, 하지만 이 땅의 왕이 아니기 때문에 이 땅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핍박을 받으시고 그러나 지금은 하늘의 영원한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 그 예수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하늘의 양식인 예수를 바라며 예수를 원하며 “나도 그렇게 살겠습니다. 나도 그 하늘의 백성이기 때문에 하늘의 왕이 살다 가신 그 길을 나도 따라가겠습니다.”하는 신앙고백이 바로 ‘우리에게 내일의 양식인 예수를 주옵소서.’라는 기도문이 담고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어떤 자들이 그런 신앙고백을 할 수 있습니까? 그 하늘의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을 아는 자들만이 그러한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후4:17-18) 17 우리가 지금 겪는 일시적인 가벼운 고난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원하고 크나큰 영광을 우리에게 이룩해 줍니다.
18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당하는 고난이 그렇게 쉬운 것입니까? 아닙니다. 때로는 눈물도 안 나올 만큼 힘이 들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을 만큼 괴롭기도 합니다. 그러나 누구보다 더 고난을 당했던 사도 바울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내가 당할 만큼 당해 보았다. 그러나 내가 하늘의 영광을 알기에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 하늘의 영광과 이 땅의 고난은 비교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조금만 참아라. 그리고 그 달려갈 길을 계속 달려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이곳은 잠간이면 지나갈 것이지만 보이지 않는 저 천국은 영원한 곳임을 아는 자들, 그들이 “오늘날 나에게 내일의 양식을 주옵소서. 그 예수를 좇아 살게 하옵소서. 하나님 그렇게 살겠습니다.” 하고 기도하고 서약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오늘을 살지만 다가 올 내일, 즉 천국을 아울러 사는 자들이기에, 그 나라는 우리에게 임했기에, 그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져 있기에 내일의 양식인, 하늘의 떡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며 그 삶을 좇으며 살겠노라고 고백하며 서약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독교이지 어떤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삼박자 축복을 바라는 것이 기독교가 아닌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의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는 구절은 예수를 믿는 사람은 그의 영혼이 잘 된 것처럼 병도 안 걸리고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리게 된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바울이 이야기 하는 범사에 잘된다는 어구에 들어있는 ‘범사’라는 단어는 바울이 잘 쓰는 단어입니다. 한 군데만 볼까요?
(살전5:16-18) 16 항상 기뻐하십시오.
17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18 모든 일에(범사에 감사하라)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잘 보세요. 바울이 교회에게 ‘범사’에 감사하라 합니다. 여기서 범사는 ‘모든 일’을 뜻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어떻게 우리가 모든 일에 다 감사할 수 있어요? 바울이 말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예수그리스도 안에서의 범사란, 하나님께서 그 예수를 통해서 구원을 이루시고 그 백성들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이 땅에서 세밀하게 그 삶에 간섭하셔서 그들을 자식답게 만드시는 그 모든 일들을 범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범사가 잘되는 길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져 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쳐 가시고자 하시는 대로 우리가 만들어져 가는 길인 것입니다.
그래서 범사에 잘된다는 것은 우리를 패서라도 자식답게 만드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삶에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것을 범사가 잘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감옥에 가있던 요셉을 가리켜 그의 삶이 형통하였더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저의가 동일하게 나타나는 말인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된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영혼이 잘된 것처럼, 전에는 자기 마음대로 살던 죄인들이 이제 하나님의 통치 속으로 들어와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된 것처럼, 그 신자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이 범사에 잘되기를 간구한다는 어구의 진의입니다. 그렇게 너의 범사가 그 영혼의 잘됨같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들어가게 되기를 원한다는 기도 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는 것은 너무나 힘이 들겠지요? 내 욕심과 내 야망을 접고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 어찌 쉬울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거기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강건함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비는 것입니다. 확실히 아시겠어요? 그 구절은 절대 이 땅에서도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겠다는 하나님 약속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늘의 양식인 예수 그리스도로 살게 하옵소서.’하고 기도 할 수 있는 자들은 이 땅의 것에 눈을 두고 사는 자들이 아니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바라며 사는 자들이기에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수 없는 이유가 뭡니까? 죄인들은 자기 스스로 자기의 양식을 구하며 살아야 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다 경쟁 상대입니다. 하다못해 옆집 애가 자기 집 애 보다 공부를 조금 잘 해도 배 아파서 못 견디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를 알고 영원한 나라를 아는 자들은 굳이 이 땅에서 이 땅의 것으로 누구와 경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 사랑을 근거로 자기에게 오른 뺨을 때린 사람을 왼뺨을 돌려대며 용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왼뺨을 돌려 대면서 이렇게 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여기서 ‘우리의 죄’는 복수로 쓰였습니다. 그렇게 “죄들” 이라고 복수를 쓴 것은 구체적인 죄의 행위들을 모두 사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치 우리가 하나님의 모범이 되는 것처럼 기술이 되어있습니다. 그렇지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을 보고 우리의 죄를 사해 달라는 말처럼 들립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는 완료형입니다.
셈족의 언어를 가장 잘 연구해서 파악하고 있다는 요아킴 예레미야스에 따르면 여기서 쓰인 헬라어의 “아페카멘”을 아람어로 번역을 해서 읽어보면 아람어의 완료형은 시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동시적인 것의 완료형으로 보아야 한다고 합니다. 왜 학자들이 아리송한 어구나 구절들을 아람어로 번역을 해보는지 아세요?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이 당시에 쓰시던 언어가 아람어였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아람어로 말씀하신 것을 헬라어로 옮겨 놓은 것이니 다시 아람어로 옮겨서 연구를 해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 부분을 아람어로 다시 번역을 해 보면 “하나님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와 동시에 우리도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을 용서하겠나이다.”의 뜻이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죄 용서를 구하면서 내가 누구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게 무슨 뜻이 되는가? “하나님 내가 아무개를 용서하고 있지 못하는 그 죄만 빼놓고 딴 죄만 용서해 주옵소서.”의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그러나 저 놈만은 내가 용서 못 합니다. 그러니까 그 죄는 좀 눈감아 주세요“ 이렇게 말이 안 되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을 통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수 있는 자들은 자신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 한 자들만 이 그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기도문 바로 다음절인 마태복음 6장 14절과 15절을 보세요.
(마6:14-15) 14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해 주면,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해 주실 것이다.
15 그러나 너희가 남을 용서해 주지 않으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지 않으실 것이다."
무섭죠? 이와 동일한 내용이 마태복음 18장35절에 또 나옵니다.
(마18:35) 35 너희가 각각 진심으로 11)형제나 자매를 용서하여 주지 않으면, 내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이 말씀은 어떤 비유의 결론으로 하신 말씀인데 그 비유가 우리가 잘 아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 백 데나리온 빚진 자의 비유입니다. 그 내용은 이러합니다. 왕에게 일만 달란트를 빚진 자가 갚을 능력이 없어서 왕이 탕감을 해 주고 놓아주었습니다. 당시 갈릴리와 베레아 주민 전체가 로마 정부에 내는 1년 치 세금이 이백 달란트였습니다. 그러니 일만 달란트라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액수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금액은 절대 값을 수 없는 금액이란 것을 상징적으로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엄청난 빚을 탕감 받은 자가 나가다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났는데 갑자기 멱살을 잡고 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왕이 그 일만 달란트 탕감을 받았던 자를 다시 잡아다가 “내가 너에게 그 큰 금액을 탕감해 주었는데 너는 겨우 백 데나리온에 사람을 옥에 넣었느냐” 하시며 그 갚을 수 없는 금액인 일만 달란트를 다 갚을 때까지 옥에 넣어 버렸습니다. 그 말은 영원한 지옥에 던져 버렸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가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하시지 않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큰일 났지요? 우리는 그게 잘 안 되잖아요?
어떠세요? 이 중에도 “딴 기도들은 그런 대로 수긍하겠는데 그 기도는 아무래도 아직 못하겠다. 난 그렇게 마음이 넓은 사람이 아니다“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계실 것입니다.
아닙니다. 자기에게 죄 지은 자들을 용서하지 못한 자들은 주기도문을 하나님께 올릴 수 없는 자이며 주기도문은 하나의 완성된 기도문이므로 어느 것은 하고 어느 것은 안하고 할 수 없는 기도문입니다. 그렇다면 기도는 해야 하고 기도를 할 수 있는 자격은 안 되는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여기서 또 union christ그리스도와의 연합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삶이 우리의 삶이 되었고 우리의 삶이 예수의 삶으로 전가 된 것을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겟세마네에서의 예수님의 기도에도 동참한 자들이 되었고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었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을 한 자들입니다. 성도는 그 모든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입니다. 그럼 예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용서하실 때 우리는 어디 있었나요? 그 안에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 함이니이다.” 하실 때 우리는 어디 있었습니까? 그 예수 안에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여전히 이 꼴이지만 예수로 말미암아 용서를 한 자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자격이 생긴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용서 해 주옵소서. 우리도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겠나이다.”라고 기도하면서 다시 한 번 우리의 신분을 확인하며 감격하는 것이다. 어떻게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는 자가 되었는지 그리고 하나님께 당당하게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는 자들이 되었는지 다시 곱씹으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감사 속에서 진정한 용서가 조금씩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렇게 용서한 자가 되었고, 용서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예수께 감사하며 그 분의 삶을 좇아 이 땅에서 실제로 이웃을 용서해 가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빠삐용이라고 하는 영화 맨 마지막 장면에 보면 악마의 섬에서 스티브 맥퀸이 탈출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납니다. 스티브 맥퀸이 절벽 아래로 떨어지면서 더스틴 호프만에게 같이 탈출할 것을 권면하지요? 그러나 그는 거절합니다. 무서웠던 것이지요. 스티브 맥퀸이 절벽에서 뛰어 내려 정말 운 좋게 조수를 잘 타서 탈출에 성공을 합니다. 그리고 절벽 위에 있는 더스틴 호프만을 쳐다보면서 승리의 손짓을 합니다. 그것을 본 더스틴 호프만이 이런 대사를 합니다. "그대가 아무리 이 섬으로부터 탈출을 해도 그대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았다면 그대는 여전히 감옥 속에 있는 것이야!" 뒤집어 말하면 ‘ 나는 아무리 이 악마의 섬에 있다고 하더라도 나로부터 자유하면 나는 자유인이다.’ 이런 뜻입니다.
그 영화에서는 스티브 맥퀸이 왜 탈출하려고 했는지 이유를 밝혀주지 않습니다. 그 이야기는 실화입니다. 스티브 맥퀸이 열연을 했던 실제 그 주인공의 실명은 앙리 샤리에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1930년도 3월 24일 새벽에 술집에서 술을 마시던 중에 느닷없이 살인범의 누명을 쓰고 체포되었습니다. 그리고 신문에 그 사건이 대서특필이 됩니다. 앙리 사리에르를 체포한 젊은 검사는 하루아침에 프랑스의 유명한 검사로 칭송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수사였습니다. 젊은 검사도 나중에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알려지면 자기 명예에 금이 가게 될 것을 두려워 한 그 검사는 다른 불량배들을 동원해서 거짓 증인들을 세웁니다. 그리고 정말 앙리 샤리에르를 살인범이 되도록 꾸면 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1931년 법정에서 한사람도 죽인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살인죄의 누명을 쓰고 종신형의 선고를 받습니다.
그래서 억울한 앙리 샤리에르는 그 이후에 기회만 있으면 탈출을 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유는 한 가지였습니다. 그 검사와 거짓증언을 한 사람들을 죽이고 복수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마침내 1944년도에 영화에서 본 것처럼 아홉 번째의 탈출을 시도함으로 느는 그 악마의 섬으로부터 탈출에 성공합니다. 그리고 남미의 아르헨티나 등을 전전하며 돈을 많이 모읍니다. 그리고 1967년도 그가 만61세가 되던 해 프랑스 법상 그 애매한 공소시효가 만료되기를 기다렸다가 그는 남미로부터 파리 행 비행기를 탑니다. 단 한 가지 자신을 그토록 모함을 한 자들을 찾아내어 죽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파리에 도착한 앙리 샤리에르는 팔일 동안 밤새 생각하고 또 생각하던 끝에 마음으로부터 그들을 용서합니다. 그리고 그가 ‘빠피용’의 후편 격인 ‘방꼬’라고 하는 자기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밝힙니다. "나는 하나님께 기도했다. 내가 복수를 포기한 대가로 다시는 이런 비극이 생기지 않도록 해달라고 나 자신에게 속삭였다. 너는 이겼다. 친구여! 너는 자유롭고 사랑 받는 미래의 주인공으로 여기 있다. 이 일에 관계된 모든 사람 중에 네가 가장 자유롭고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그 30년 동안 자기 증오심의 노예가 되어 살던 앙리 샤리에르가 용서를 선포하고 자기로부터 자유 하는 순간 그는 정말 자유 한 삶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 시간 이후로 앙리 샤리에르는 참 자유를 만끽하는 한 사람, 인간을 사랑하는 자유의 인간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문자 그대로 그는 빠삐용이 된 것입니다. 빠삐용이라는 단어는 나비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그는 원수들을 용서함으로 나비가 되어 자기를 얽어매는 증오와 복수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비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용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위대한 용서를 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완전하게 자유로워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그 예수의 용서를 따라 용서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용서를 청원하는 동시에 용서를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주기도문의 기도는 청원인 동시에 서약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면서 “난 그 나라 통치에 순종하겠습니다.”하고 서약하는 것이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면서“나도 내게 죄 지은 자들을 용서하며 살겠습니다.”하고 서약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발 한발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천국 백성의 수준을 향하여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용서받은 자로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렘31:31-34) 31 "그 때가 오면,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유다 가문과 새 언약을 세우겠다. 나 주의 말이다.
32 이것은 내가 그들의 조상의 손을 붙잡고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오던 때에 세운 언약과는 다른 것이다. 내가 그들의 남편이(히브리어 바알은 '주' 또는 '남편') 되었어도, 그들은 나의 언약을 깨뜨려 버렸다. 나 주의 말이다.
33 그러나 그 시절이 지난 뒤에,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언약을 세울 것이니, 나는 나의 율법을 그들의 가슴 속에 넣어 주며, 그들의 마음 판에 새겨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34 그 때에는 이웃이나 동포끼리 서로 '너는 주를 알아라' 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작은 사람으로부터 큰 사람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모두 나를 알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겠다. 나 주의 말이다.
우리는 주기도문의 기도를 하나님 앞에 올릴 때마다 이렇게 새 언약을 세워주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새 언약을 우리 가운데 이루시고 그 말씀대로 우리를 완전하게 용서하셨음에 감격하며 그렇게 신실하게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속히 우리를 그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을 거듭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말을 살아가는, "내일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의 양식이 아닌 하늘의 양식, 예수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자들이며, 이 땅의 것으로 살지 않고 하늘이 주시는 양식으로 사는 자들이 됨으로 아담에게 내린 저주가 풀린 자들이며
그 것으로 만족하며 사는 자들이기에 이웃을 시기하지 않고 질투하지 않고 경쟁하지 않으며 참으로 용서할 수 있는 자들이 되어 하나님께 당당히 "나도 이렇게 용서하는 자가 되었으니 내 죄도 확실히 용서가 된 것을 난 확신합니다." 하고 기도 할 수 있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고 기도하면서 우리의 신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내일의 양식인 예수가 이렇게 내 안에 있으므로 그 하나님 나라는 속히 반드시 올 것이란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 나라는 속히 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주신 그 내일의 양식을 확실하게 소유하고 있으십니까? 그것으로 만족하며, 그것이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란 것을 알기에 사소한 것으로 남을 정죄하지 않고 용서하며 살고 계십니까?
인간들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스스로 유지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농사를 짓고 땀을 흘려 그 땀의 열매인 양식으로 살게 된 것입니다. 거기서 나온 것들이 바로 현대 문명들입니다. 과학, 철학, 교육, 종교, 물질주의, 실용주의, 성공주의, 고지론 등등 그러나 예수로 말미암아 그 저주에서 풀려난 자들은 하나님께서 하늘의 양식으로 그들을 먹이십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며 하나님만을 추구하며 소망하며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제27장 주기도문 (5)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마6:9-13)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오며,
10 나라가 임하게 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시옵소서.
11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또는 '일용할 양식' 또는 '내일 먹을 양식')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또는 '빚진 사람의 빚을 삭쳐 준 것 같이')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또는 '빚을 삭쳐 주시옵고') 용서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또는 '시험에 빠뜨리지 마시고' 또는 '시련의 때로 이끌지 마시고'), 악에서(또는 '악한 자')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이옵나이다. 아멘.]](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괄호 안의 본문이 없음)’
오늘은 주기도문의 마지막 청원인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에 관해 공부를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이 ‘시험’이라는 말을 먼저 잘 정의하고 계셔야 오늘의 설교가 이해가 쉬우실 것입니다.
여기서 ‘시험’이라는 말로 번역이 된 헬라어 “페이라조”는 “유혹” “시험” 두 의미를 모두 갖고 있는 단어입니다. 한글 개역성경을 비롯한 여러 성경에는 “시험”이라는 단어가 “사탄의 유혹”과 “하나님의 시험” 이 두 가지가 구별 없이 그냥“시험”이라고 쓰여서 혼동(混同)이 될 때가 간혹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러한 모순을 성경에서 발견하신 것이 있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셨고 이스라엘을 시험하셨습니다.
(창22:1)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뒤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그를 부르셨다.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시니, 아브라함은 "예,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신8:2-3) 2 너희가 광야를 지나온 사십 년 동안,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를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기억하여라. 그렇게 오랫동안 너희를 광야에 머물게 하신 것은, 너희를 단련시키고 시험하셔서,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너희의 마음 속을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3 주께서 너희를 낮추시고 굶기시다가, 너희도 알지 못하고 너희의 조상도 알지 못하는 만나를 먹이셨는데, 이것은, 사람이 먹는 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시려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의 믿음을 확인하시고 우리의 믿음을 교육하시기 위해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그런데 반대로 야고보서에서는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지 않으신다고 하십니다.
(약1:13-15) 13 시험을 당할 때에, 아무도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당하고 있다" 하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않으시고, 또 스스로 아무도 시험하지도 않으십니다.
14 사람이 시험을 당하는 것은 각각 자기의 욕심에 이끌려서, 꾐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15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
그렇지요? 구약에 사용된 히브리어 “나싸” 나 헬라어“ 페이라조” 모두 사탄의 유혹과 하나님의 시험에 혼용되기 때문에 이런 혼동이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에서의 “하나님은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신다”는 구절의 “시험”은 우리를 넘어뜨려 지옥으로 끌고 가려는 사탄의 유혹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신앙생활 잘 하던 사람이 갑자기 전에 하던 악한 습관이나 죄에 빠지게 되면 “저 사람 시험 들었어.” 하는데 거기서의 “시험”이 바로 이 사탄의 유혹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인간이 죄를 지어 하나님을 등지고 지옥으로 향하게끔 유혹하시지 않는다는 것이 하나님은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신다는 어구가 담고 있는 뜻입니다.
반면에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물이 없고 먹을 것이 없는 곳으로 데리고 가셔서 물도 주고 먹을 것도 주고 하시면서 그들의 삶에 간섭을 하시면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 앞서서 끌고 가시는 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시험이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그 시험은 사랑을 근거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시험은 우리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끊임없이 시험하셔서 결국에는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드릴 수 있는 자로 만들어 내신 그 시험은 우리에게는 축복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시험하신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기도해야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라는 기도의 시험은 어느 쪽이겠습니까? 당연히 사탄의 세력에서의 보호하심을 요구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악에서 구하옵소서.”의 내용은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지켜 주옵소서.‘ 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해석을 더욱 더 확실하게 뒷받침해주는 증거가 바로 뒤에 나옵니다. 그 뒤에 바로 붙어 있는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의 “악”이라는 말 “투 포네로우”는 남성 속격으로 “사탄”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 있는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라는 기도는 정확하게 “사탄의 시험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시옵소서.”라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죄에 빠진 아담 적 실존을 갖고 있는 모든 인간들은 사탄의 세력 하에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통치가 싫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가 되어있는 자들입니다. 그 중에 어떤 무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허락하셔서 하나님의 편이 되게 하셨는데 나머지들은 모두 그 죄악 속에 내버려두셨습니다. 사탄과 죄인들은 한 덩어리가 되어서 하나님께서 가만 놔두면 하나님을 향해 칼을 뽑아들게 되어있는 자들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라는 기도는 우리를 그 사탄의 세력에서 구원해 달라는 기도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불나방의 근육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불로 향하게 되듯이 그렇게 죄를 지향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든지 그 사탄의 편으로 달음박질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존재들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간섭을 하지 않으시고 가만 놔두시면 어떻게 되는지 상상을 해 보셨나요?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다는 말을 기억하세요? 분명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보내기 전인 출애굽기 4장에서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셔서 이스라엘을 못 놓아주게 하신다음 마지막에 “이스라엘은 내 맏아들인데 네가 놓아주지 않았으니 내가 너의 맏아들을 죽이겠다.”고 바로에게 행할 일을 미리 계획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럼 애굽의 맏아들들을 죽이기로 이미 계획이 세워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전에 아홉 가지 재앙이 내립니다. 한 가지 재앙이 내릴 때 마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셔서 그 바로가 이스라엘을 놓아주지 아니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럼 하나님이 착한 사람 데려다가 계속 마음을 강퍅하게 하셔서 못 놓아주게 하신 다음 결국 그들의 맏아들을 죽이시기 위해 계획을 세우시는 것이라는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다는 것은 우리가 여러 번 반복해서 공부한 로마서 1장의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그 마음의 정욕대로 내버려 두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common grace를 거두시고 악인들의 정욕대로 내어버려 두시는 것을 성경은 하나님께서 악인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다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바로처럼 하나님께서 악인들의 삶에 간섭하지 않으시고, 악함을 막지 않으시고 놔두면 죄인은 끝까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리에 선다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강이 피로 변했습니다. 개구리가 온 천지를 덮었습니다. 이가 날려서 살수가 없었습니다. 파리가 온통 마을을 덮습니다. 수역이, 독종이, 우박이, 메뚜기가 흑암이 그들을 쳐도 바로는 계속 해서 하나님과 맞서서 싸웁니다. 그게 죄인들의 속성입니다. 왜요? 자신이 왕이어야 하는데 왕이라는 자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를 죽이고 싶은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버린 죄인들의 모습입니다.
결국 맏이들이 다 죽었는데도 또 따라옵니다. 하나님의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그들을 막아섰습니다. 이스라엘 쪽에는 불기둥이 환하게 비추고 애굽 쪽에는 흑암이 덮입니다. 그런데도 바로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눈앞에서 홍해가 갈라집니다. 두려운 광경입니다. 자기가 쫓고 있는 적들의 하나님이 엄청난 기적을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눈앞에서 바다가 갈라졌는데도 바로와 애굽 군대들은 거기를 따라 들어갑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상태를 그대로 방치해 두시면 죄인들은 이렇게 끝까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리에까지 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결국 다 죽는 것입니다. 죄라는 것이 그렇게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서 건짐을 받은 건지 이해가 가십니까?
그렇게 하나님께서 사탄과 그 무리들을 완전하게 강퍅하게 버려두심으로 최후에 어떤 결과가 일어나게 됩니까? 에스겔서 38장에서 그 비참한 죄인들의 최후가 나오는데 함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곡과 마곡의 전쟁입니다.
(겔38:1-6, 15~18) 1 주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2 "사람아, 너는 마곡 땅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로스와 메섹과 두발의 왕 곡을 규탄하여 예언하여라.
3 너는 전하여라.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너 로스와 메섹과 두발의 왕 곡아, 내가 너를 대적한다.
4 내가 너를 돌려 세우고, 갈고리로 네 아가미를 꿰고 너와 네 모든 군대, 곧 군마와 기마병과, 곧 완전무장을 한 군대, 큰 방패와 작은 방패를 들고 칼을 잡은 대 병력을, 내가 끌어내겠다.
5 방패와 투구로 무장을 한 페르시아와 에티오피아와 리비아를 끌어내고,
6 고멜과 그의 전군과, 북쪽 끝에 있는 도갈마 족속과 그의 전군과, 수많은 백성을 너와 함께 끌어내겠다.
15 그 때가 되면, 너는 네 나라 북쪽 끝에서 원정길에 나설 것이다. 그 때에 너는 대군을 이끌고 떠날 것이다. 놀라운 규모를 지닌 기마대와 많은 보병을 이끌고 정복길에 오를 것이다.
16 마치 구름이 땅을 덮는 것같이,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칠 것이다. 곡아,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때가 되면 내가 너를 끌어들여서, 내 땅을 치게 하겠다. 뭇 민족은, 내가 내 거룩함을 밝히 나타내려고 너를 이렇게 부리고 있는 것을 보고 나서야, 내가 누구인지를 알 것이다.
17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곡아, 내가 옛날에 내 종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을 시켜서 말하여 둔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너다. 예언자들이 여러 해 동안 예언하기를, 내가 너를 끌어들여서, 이스라엘을 치게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18 "곡이 이스라엘 땅을 쳐들어오는 그 날에는, 내가 분노와 격분과 울화를 참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 때에 일어나는 곡과 마곡의 전쟁입니다. 나중에 계시록을 공부할 때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요한 계시록에서는 그 전쟁을 인용하여 아마겟돈 전쟁으로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 아마겟돈 전쟁은 지금 우리가 치르고 있는 영적 전쟁의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은 사회법이나 양심 등으로 죄인들의 죄 성이 극에 달하는 것을 막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속사가 역사 속에서 진행되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의 죄 성을 막지 않고 놔두었을 때 살인 등의 극한 적인 범죄나 전쟁 등으로 인류가 조기에 멸망해 버리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러 가지 일반은총으로 인간들이 극한의 상황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막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하나님께서 완전히 그들을 풀어서 내버려두시는 날이 오게 됩니다. 계시록에서는 그 때를 사탄이 무저갱에서 풀리는 때라고 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요한 계시록의 무저갱이라는 말을 너무 장소적 개념으로만 알고 있어서 오해를 하기 쉬운데 사탄이 무저갱에 갇혀 있다는 말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더 이상 성도들을 참소하지 못하고 이 땅에 내려와서 성도들을 핍박하며 쫓아다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 어딘가에 꽁꽁 묶여 있다는 말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사탄이 더 이상 하나님 택한 백성들의 영원한 생명에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상태를 사탄이 무저갱에 갇혀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히2:14) 이 자녀들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이기에, 그도 역시 피와 살을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그가 죽음을 겪으시고서, 죽음의 세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멸하시고,
(골2:15) 그리고 모든 통치자들과 권력자들의 무장을 해제시키셔서(또는 '통치자들과 권력자들에게서 지위를 빼앗으시고', having disarmed the powers and authorities), 그들을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에 포로로 내세우심으로써,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삼으셨습니다
(유1:6) 또 자기네가 통치하는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자기들의 거처를 떠난 천사들을, 그 큰 날의 심판에 붙이시려고, 영원한 사슬로 매어서 어둠에 가두어 두셨습니다.
이렇게 사탄이 우리의 영원한 생명에 영향을 끼칠 수 없는 그 상태를 무저갱에 갇혀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종말 때가 되면 그 사탄이 총력을 기울여 성도들을 핍박하도록 하나님이 놔두실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 11장에 보면 그 때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죽는 모습으로 보여 질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계11:7-10) 7 그러나 그들이(두증인) 증언을 마칠 때에, 아비소스('밑바닥이 없는 깊은 곳'을 일컫는 그리스어)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싸워서 이기고, 그들을 죽일 것입니다.
8 그리고 그들의 시체는 그 큰 도시의 넓은 거리에 내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 도시는 영적으로 소돔 또는 이집트라고도 하는데, 곧 그들의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곳입니다.
9 여러 백성과 종족과 언어와 민족에 속한 사람들이 사흘 반 동안 그 두 예언자의 시체를 볼 것이며, 그 시체가 무덤에 안장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10 그리고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이 그 시체를 놓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서로 선물을 보낼 것입니다. 그것은 이 두 예언자가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을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보시면 교회를 상징하는 두 증인이 죽습니다. 큰 성길 다른 말로 세상을 상징하는 바벨론 성에서 죽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렇게 이 세상에서 죽고 지는 모습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핍박 끝에 죽으셨듯이, 그러나 그 삶이 진정한 승리의 삶이었던 것처럼 교회 공동체도 동일한 예수의 삶을 살게 되는데 교회는 열심히 전도하고 팽창해서 그리스도의 푸른 계절을 이 땅에 이루는 공동체가 아니라 점점 세상의 핍박 속에 죽임을 당하는 공동체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가 삼일 만에 부활하셨듯이 교회도 그 죽음 뒤에 황홀하고 영광스러운 부활을 할 것이라는 것이 이 땅에서의 교회의 모습이며 여러분과 저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 전쟁이 아마겟돈 전쟁입니다. 그러나 그 전쟁은 마지막 날 어느 때에 한 번 있는 전쟁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의 삶 속에 크고 작은 전쟁으로 그 아마겟돈 전쟁은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정말 엄청난 영적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 전쟁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전쟁의 정도는 여러분이 신앙인으로 성숙되어짐에 따라 점점 깊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떤 생활을 기대하고 계신가요? “점점 나아질 거야. 언젠가는 폼 한번 잡아볼 날 있을 거야” 이렇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의 참 교회는 순교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이며 매일 매일 나의 옛 사람을 죽이는 순교의 삶을 살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무시무시한 영적 전쟁의 현장을 성도라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들 인식하지 못 하고 있는 걸까요?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제대로 살고 있지 않으니까 그들의 삶에 전쟁이 없는 것입니다. 어차피 사탄의 편처럼 살고 있는데 그들의 삶에 무슨 거룩한 전쟁이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전쟁은 무슨 전쟁이야? 지금 전쟁이 있긴 있어”하고 안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제대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심각한 영적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북한에 있는 기독교인들, 회교권 나라에 있는 기독교인들만 영적 전쟁하고 있는 것 아닙니다. 여러분 교회는 한 몸입니다. 어디선가 그런 핍박 속에 던져져 있는 교회가 있다는 것은 우리도 동일한 핍박과 처절한 전쟁을 치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런 핍박받는 교회의 모습을 우리에게 직접 보여주시는지 아세요? 우리의 영적 전쟁 상태가 바로 그렇게 무시무시하고 심각한 것이라는 것을 좀 깨달아 알라고 그런 핍박받는 우리 형제자매들을 우리 눈에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무시무시한 영적 전쟁을 치르고 있는 중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 교회에게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에 대해 충분히 공부했고 지금도 공부하고 있기에 간단히 말씀드리면 영적 전쟁에서의 기도는 전쟁터에서 쓰는 워키토키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마치 ‘엄마 아빠 용돈 주세요.‘ 하는 인터 콤으로만 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도는 전쟁터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는 사람들이 유일한 생명줄로 가지고 있는 워키토키입니다. “하나님 지금 실탄이 떨어져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지금 적의 포탄 공세가 너무 심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기도는 바로 그런 영적 전쟁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통화하는 워키토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긴박한 전쟁터에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라고 기도하면서 “하나님 저는 어떻게 저 멸망 받을 무리에 속하지 않게 된 것입니까” 하며 일단 감사하게 되는 것이며 지금이 그 마지막 아마겟돈으로 향하는 그 길인 것을 재확인하고 우리가 그들의 편으로 혹여 달려가지 않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때로 이렇게 세상 앞에 맥없이 당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박과 온역과 불과 유황으로 그들을 다 죽여 버리신다는 그 승리의 약속을 이루실 것을 확신하며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무엇을 근거로 우리는 확신하며 기뻐할 수 있는가?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아무 기도나 하고 예수님 이름만 갖다 붙이면 무조건 다 들어주는 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라는 것은 그 예수님의 수준으로 예수님의 뜻을 분별하여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드려지면 품질보증 “농심 신라면” “가방은 프라다” “화장품은 코리아나”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 기도라면 내가 마음 놓고 들어줄 수 있는 기도이다.” 라고 하나님께서 큐 마크를 찍으시는 기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를 말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기도를 얼마나 신중히 해야 하는 지 아시겠지요?
어떤 목사님께서 일전에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유명한 분이시기 때문에 그 분이 사시는 동네에서는 다들 그 분이 목사님이신 줄을 알고 존경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 녀석이 그 동네 구멍가게에 가서 ‘아저씨 우리 아버지 누구인지 아시지요? 우리 아버지 이름으로 소주 한 병만 주세요.’한다면 그게 말이 되겠느냐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의 기도를 잘 보면 거의 그런 수준 아닙니까? 유치해서 들어주지 못할 정도의 그런 기도들이 얼마나 많이 있어요. “하나님, 예수님의 이름을 걸고 기도합니다. 복권 당첨되게 해 주세요” “하나님, 예수님의 이름을 걸고 기도합니다. 이 땅에서 폼 한번 잡게 해 주세요”
아닙니다. 정말 예수님을 아는 자들은 그 예수님의 수준에 맞는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가 그런 것이라면 예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기도는 예수님의 소원이라는 것이지요? 그렇잖아요?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 주기도문을 한다는 것은 이 기도문이 우리의 염원과 소원이기도 한 것이지만 예수님의 소원이기도 하다는 말이잖아요?
그럼 하나님이신 그 분이 소원하시는 것이 안 들어 질 것이 있겠습니까? 다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럼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악에서 구해 주옵소서.’하는 기도는 이루어졌나요? 그럼요, 영적으로 이미 그 기도는 이루어 졌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전쟁에서 안전한 것입니까? 네 안전합니다.
광야에서 예수께서 시험을 받으시고 완전한 승리를 하시어 천사들의 시중을 받으셨습니다. 아담은 시험에 실패하여 천사들에게 쫓겨났지만 예수님은 시험을 이기시고 천사들의 시중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광야에 짐승들이 와서 예수님과 함께 지냅니다. 광야에 웬 짐승인가요? 그 것은 예수께서 시험을 이기심으로 광야가 짐승이 사는 에덴으로 회복되는 것을 힌트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에덴으로 돌아가자는 말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예수 잘 믿으면 에덴을 회복해서 거기에 가서 살게 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태초에 지어진 것처럼 벌거벗고요. 그러면 거기는 또 시험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누디스트들이 그 에덴을 근거로 자신들의 입장을 변호하고 나서곤 하지요? 태초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지어진 대로 우리 벗고 살자고요. 정말 하나님이 에덴에서 벗겨놓고 사는 것을 목적으로 하셨겠습니까?
하나님은 벌거벗은 아담과 하와가 계시록의 의의 세마포를 입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어떻게 만들어져 가는가를 보여주시기 위해 우주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애초의 목적은 요한 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이었습니다. able to sin이었던 자들이 타락하여 not able no to sin의 죄인들이 되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해 죄를 안 지을 수 없는 자들이 able not to sin의 상태로 된 것이고 그들이 결국에는 not able to sin의 새 사람으로 되어져 가는 구속사를 역사 속에서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에덴에는 선악과가 있지만 예수로 말미암아 그 시험이 완성되었으므로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선악과가 없는 것입니다. 선악과가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으십니까?
그렇게 예수께서 시험을 이기실 때 우리가 그 속에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 우리가 그 예수 안에서 시험을 모두 이긴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 시험에서 우리를 건지실 것인데 왜 우리가 기도해야 하나요?
역시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실존은 어떻습니까? 매일 같이 시험에 지고 있습니다. 매일 매일 그 사탄의 세력에 굴복하고 있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우리도 그 아마겟돈 전쟁의 하나님의 적군으로 서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거기서 또 already”, not yet의 복된 교리를 찾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실존입니다. 마치 우리는 사탄의 편인 것처럼 매일 매일 실패하고 실수하며 삽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 질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은 그렇게 약속이 되어있고 확실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이 땅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시험에 실패하면서 난 이렇게 사탄의 편에서야 마땅한 자인데 어떻게 나에게 그런 은혜가 임 했는가 감격하십시오. 난 여전히 이런 꼴인데 하나님께서 예수의 삶을 나에게 전가 시키셔서 “너는 백점이다.”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에 감동하십시오. 우리는 그렇게 그 은혜를 아는 만큼 감사로 들어가게 되고 그 감사로 우리에게 오는 시험에서 가끔 한번 가끔 두 번 이겨 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로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를 열심히 공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각을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제는 칼로 총으로 위협해서 우리를 공격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이성을 동원해서 공격해 들어옵니다.
제 친구 중에 공학 박사가 있습니다. 공학 박사인 그 친구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들고 이런 질문을 해 온 적이 있습니다. ‘질량이 있는 물체는 빛의 속도로 날아갈 수 없다. 예수님은 2000년 전에 승천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육체를 갖고 계셨다. 질량이 있다는 것이다.
그 천국은 삼층 천, 그러니까 저 우주 너머에 있다고 들었다. 가까운 안드로메다 성운까지 200만 광년이다. 광년이라는 것은 빛의 속도 1초에 30만 킬로미터로 달려서 1년을 가야하는 거리이다. 예수님은 지금 빛의 속도로 가고 계셔도 안드로메다 성운까지도 못 가셨을 것이다.
그런데도 너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 것을 믿느냐? 예수께서 하나님이심을 믿느냐?‘ 어떠세요? 여러분은 뭐라 대답하시겠어요? 제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주의 질서와 법칙도 아울러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런 분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따라서만 달려야하겠니?‘ 여러분, 인간들의 수준이 고작 이정도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하나님을 부정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 죄인들의 속성입니다.
사람들은 과학이 인류를 부요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과학과 문명은 하나님을 떠난 가인의 후예들이 자신들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기 위해 만들고 발전시켜 온 것입니다. 예전에는 번개가 치면 하나님 앞에 벌벌 떨면서 자기의 죄라도 뉘우치는 순진함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피뢰침 만들어서 꽃아 놓고 하나님을 조롱합니다. 홍수가 나서 논밭이 잠기면 하나님 앞에 겸허해 지고 겸손해 지던 사람들이 둑을 만들고 물길을 마음대로 바꿔가며 우리 스스로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고 하나님을 불필요한 존재로 만들어 버리고 있습니다. 과학이 정말 인류를 부요케 한다고 생각하세요? 아닙니다. 과학은 우리를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학으로 하나님을 제한 할 수 없습니다. 과학으로 하나님을 밝혀 보겠다고 하는 것도 언어도단입니다. 그 분은 우리의 이성의 한계 너머에 계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계속해서 그렇게 우리의 이성을 자극해서 인간을 유혹합니다.
그 어줍지 않은 이성은 종교 다원주의를 만들고 자기의 이해 범위 안에서 하나님을 제한합니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는 이미 세계 2차 대전 때 다 무너져 버렸음에도 사탄은 여전히 그 이성을 또 자극합니다. 마르쿠젠이나 송두율의 스승인 하버마스 같은 사람이 또 변증법적 이성이니 뭐니 해서 다시 들고 나왔습니다. 그랬더니 현대의 지성들이 또 인간의 이성에 기대를 합니다. 정말 우리는 우리 이성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 것일까요?
기원전 5세기 사람인 피타고라스의 정리도 아직 이해 못하는 이 이성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겠다는 것입니까? 사탄은 끊임없이 이렇게 우리를 시험합니다.
그렇게 과학과 문명과 이성과 우리 옛 사람이 젖어 있던 죄 성을 자극하여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할 때에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주기도문을 다 배우셨습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제 실생활에 적용하셔야지요. 운전을 하다가 어떤 사람이 싹 끼어들었을 때 사탄으로부터 “가서 복수해”라는 유혹을 받게 되면 즉시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해 주옵소서,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가 내 삶에 임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저는 복수하고 싶지만 내 뜻대로 마옵시고 하나님의 뜻이 내 삶에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내가 내 이웃을 용서하고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저 사람에게 복수하고픈 마음을 심고 있는 악한 세력에서 저를 구해 주옵소서."하고 기도하십시오. 손해를 보셨습니까? 누군가 억지를 부려 여러분을 괴롭히고 있어요? 그 때에 지금까지 배웠던 주님 가르쳐 주신 기도를 열심히 하나님께 올려 보내십시오.
우리는 오직 그 기도의 응답인 예수로 말미암지 않고는 우리는 아마겟돈 전쟁의 사탄의 편에서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자들이라는 것을 매일매일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내 삶에 예수의 도움이나타 나서 예수의 성품으로 변화되어질 수 있기를 매일 매일 기도하세요.
주기도문은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이며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소망하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몇 주간에 걸쳐 주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에 관해 살펴보았습니다. 일명 주기도문! 우리가 살펴 본 바에 따르면 주기도문의 내용은 모두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이며 그 주기도문의 중심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확신하며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무엇을 소원하고 있는가에 따라, 그가 무슨 기도를 하고 있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신분과 ID, 정체성이 결정된다는 것을 주기도문 첫 시간에 살펴보았었지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이런 기도를 해야 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심으로 우리는 우리의 신분이 얼마나 엄청난 것이며 대단한 것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기도문을 배우면서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땅의 것들에 매여 사는 자들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바라며 살아가야 하는 자들임을 자각하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에 굴복하지 말고 거기에 무릎 꿇지 말고 씩씩하고 당당하게 달려갈 길을 달려가야 한다는 확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는 누구에게나 이해되어지고 열려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러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기도를 하게 된 우리는 얼마나 축복 받은 사람들입니까?
이렇게 주기도문 안에 모든 기도의 해답이 들어있습니다. 그 청원과 서약 안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을 소망하며 살아야 할지 모두 들어있습니다. 그 안에서 여러분의 기도가 행해져야 합니다. 예수의 소원인 기도, 그리고 예수가 다 이루어 놓으신 그 기도 그것이 주기도문입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예수님 고맙습니다.”입니다. 그것 말고는 없습니다.
매일 매일 기도할 때마다 주기도문을 떠올리며 우리의 기도할 바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확인하시고 천국 백성으로서의 그 신분을 확인하며 감격하십시오.
다함께 주기도문의 참 뜻을 되새기며 주기도문으로 기도를 함으로써 오늘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제28장 그리스도인들의 결혼관
(마19:3-11)
3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께 다가와서, 그를 시험하려고 물었다. "무엇이든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너희는, 창조주께서 처음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5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남자는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되어야 한다'(창 2:24(칠십인역)) 하신 것을 아직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6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 놓아서는 안 된다."
7 그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 주고 아내를 버리라고 명령하였습니까?"
8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에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해 준 것이지, 본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음행한 까닭이 아닌데도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에게 장가 드는 사람은, 간음하는 것이다."
10 제자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남편과 아내 사이가 그렇다면, 차라리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11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누구나 다 이 말을 받아들이지는 못한다. 다만 타고난 사람들만이 받아들인다.
최근 한 여론 조사 기관에 의하면 한국 서울 강남의 주부의 75%가 남편과 당장 이혼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가 사는 LA의 실정도 한 기독교 신문에 난 기사를 인용하면 기독교를 믿는 가정의 40%가 이혼을 했고 심각하게 이혼을 고려하고 있는 사람들을 합하면 그 수는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고 합니다. 지나가는 사람 두 명 중 한명은 이혼을 했다는 것인데 그 비율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하니 문제입니다.
한국의 어떤 신학교에서 그 학교를 졸업한 목사님 천 명을 대상으로 무기명 설문 조사를 했는데 “만일 다시 결혼을 할 수 있다면 지금의 아내와 결혼을 하겠는가?”라는 질문에 90%가 NO에 표시를 했다고 하지요? 어떤 사람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 옆에다가 괄호 치고 “골볐냐?”라고 적어 놓은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는 노년층 이혼이 요즘 붐을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 한평생 자식들 때문에 체면 때문에 꾹 참고 살다가 이제 마지막 가는 마당까지 그렇게 손해보고 참으면서 살수는 없다는 할머니들의 반란인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은 한국에서도 중년과 노년층의 이혼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표면적으로 나타난 이혼을 꿈꾸는 사람들과 이혼을 한 사람들의 수치보다 더 많은 이들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결혼생활을 그야말로 “살아내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서 세원 씨가 진행하는 오락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시골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나오셔서 이런 저런 게임을 하는 그런 프로였습니다. 거기서 제일 인상 깊게 보았던 코너가 바로 스피드 퀴즈 시간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앉아서 한사람의 뒤에 놓인 단어 카드를 보고 맞은편에 있는 사람한테 설명을 해서 맞추는 게임입니다.
어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스피드 퀴즈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할머니의 뒤에 단어가 놓이고 할아버지가 그 단어를 보고 할머니에게 설명해서 맞추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여러 단어가 넘어가고 “천생연분”이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할아버지는 이 단어만큼은 자신 있게 맞출 수 있다는 표정이셨습니다. 평소에 할머니가 할아버지가 해달라는 것은 무엇이든 해 주셨고 할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시든 방해하지 않고 잘 따라주고 늘 몸종처럼 곁에 붙어서 수발을 들어 주셨기 때문에 자기들의 관계를 떠올리게 해 주면 금방 그 답이 나올 줄 알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할아버지가 “당신과 나 사이” 그렇게 짧게 말을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할머니 입에서는 천생연분(天生緣分)이 아니라 ‘웬수’라는 단어가 튀어 나왔습니다.
할아버지는 다시 “아니, 네 자로 당신과 나와의 사이를 뭐라 하냐고?”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랬더니 할머니 왈(曰) “아~평생 웬수”그러셨습니다. 그야말로 장안의 화제가 되었었던 장면이었습니다. 이렇게 어느 한쪽에서 복수의 칼을 갈며 참고 살아주고 어느 한쪽에서는 그것도 모르고 그야말로 권세와 행복을 혼자 누리고 사는 것을 우리는 “사랑” 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할머니들은 평생을 절치부심(切齒腐心) 와신상담(臥薪嘗膽) 하다가 할아버지들이 늙어서 노인이 되어 힘이 없어지면 그 때부터 할아버지들은 할머니들한테 구박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요즘처럼 급기야 노년층 이혼까지 가게 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결혼생활이라는 것이 어려우며 점점 더 어려워질까요? 연애할 때에는 하늘의 별도 따다 줄 것 같던 사람들이 왜 결혼만 하면 그렇게 견원지간처럼 변하게 되는 것일까요?
왜 부부는 가장 가까운 관계이면서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관계보다 더 많이 싸우게 되는 걸까요? 그 이유는 사람들이 결혼이 담고 있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생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부부라는 관계는 가시적이고 표면적인 면 외에 다른 영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성경이 결혼이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면서 그렇게 사람들이 결혼 생활에 많이 실패하고 있는 이유를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처음 이야기하신 후 계속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이야기하시는 중간에 나오는 장면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 이혼의 문제는 단순히 사람들이 결혼했다가 이혼하는 것이 맞느냐 틀리느냐를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본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은 지금 구약의 어떤 부분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계신가요? 얼른 생각나시는 책이 있으세요? 바로 신명기 24장의 말씀입니다.
(신24:1-4) 1 "남녀가 결혼을 하고 난 다음에, 남편이 아내에게서 수치스러운 일을 발견하여 아내와 같이 살 마음이 없을 때에는, 아내에게 이혼증서를 써주고, 그 여자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수 있다.
2 그 여자가, 그의 집을 떠나가서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는데,
3 그 둘째 남편도 그 여자를 싫어하여 이혼증서를 써주고 그 여자를 자기 집에서 내보냈거나, 그 여자와 결혼한 둘째 남편이 죽었을 경우에는,
4 그 여자는 이미 몸을 더럽혔으므로, 그를 내보낸 첫 번째 남편은 그를 다시 아내로 맞아들일 수 없다. 이런 일은 주 앞에서 역겨운 일이다. 너희는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에게 유산으로 주신 땅을 죄로 물들게 해서는 안 된다."
바리새인들이 바로 모세 율법의 이 부분을 가지고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혼을 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의 여부보다 예수님을 어떻게 하면 곤경에 빠트리느냐에 더 관심을 두었습니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은 헤롯왕이 본처를 버리고 동생의 아내였던 헤로디아와 결혼을 했고 그를 비난하던 세례요한의 목을 친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어떤 대답을 하신다 해도 예수님을 곤경에 빠트릴 수가 있었습니다. 이혼을 해서는 안 된다고 주님께서 대답을 하시면 헤롯의 노여움을 사게 되는 것이고 이혼을 해도 된다고 말씀을 하시면 이스라엘의 랍비로서 이혼을 조장한다는 공격을 받을 판입니다.
지금 주님께 질문을 하는 바리새인들은 당시 둘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스라엘의 지혜의 두 축으로 힐렐 파와 샴마이 학파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힐렐은 샴마이의 제자였지만 좀 더 개방적인 사람이었고 힐렐과 샴마이 학파의 두 축을 집대성한 철학의 칸트같은 인물이 바로 사도 바울의 스승인 가말리엘이었습니다.
따라서 좀 더 개방적인 힐렐 학파는 신명기24장 1절의 이혼이 가능한 수치 되는 일을 여러 가지로 해석을 했었습니다.
그들은 아내가 남편에게 수치 되는 일을 하여 남편이 아내에게 이혼 증서를 써 줄 수 있는 경우를 이렇게까지 해석을 했습니다.
아내가 요리를 못하면 남편에게 이혼을 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웃집 여자보다 아내가 예쁘지 않은 것도 이혼의 사유가 되었고 남편 앞에서 시댁 욕을 하는 것도 이혼의 사유가 되었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잔소리를 하거나 바가지를 긁어도 그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었으며 그 일로 여자들은 이혼을 당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튼 힐렐 학파는 그렇게 신명기 24장1절을 해석해서 두세 명의 증인만 있으면 어느 자리에서든 아내에게 이혼증서를 써주고 이혼을 한 후 새 장가를 들었습니다.
반대로 보수적인 샴마이 학파는 수치스러운 일은 오직 간음죄라고만 해석을 했습니다. 여자가 간음을 하다 들키면 남자가 이혼을 할 수 있었고 나머지는 그 어떤 경우에라도 이혼을 용납하지 않았었습니다. 힐렐 학파는 예수님께 이 이혼에 대한 질문을 함으로써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이혼에 대한 자유에 확인 도장을 받고 싶었고 샴마이 학파는 우리는 이렇게 엄격하게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자신들의 의를 자랑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악한 의도를 가지고 주님께 질문을 하고 있는 타락한 죄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설명하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신24:4) 그 여자는 이미 몸을 더럽혔으므로, 그를 내보낸 첫 번째 남편은 그를 다시 아내로 맞아들일 수 없다. 이런 일은 주 앞에서 역겨운 일이다. 너희는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에게 유산으로 주신 땅을 죄로 물들게 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 보면 성경이 이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마지막에 그 이혼이라는 것은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범죄케 하는 것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이 어떤 땅입니까? 가나안입니다. 가나안은 어디를 상징하는가요? 바로 하나님 나라를 상징합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말하는 결혼과 이혼에 관한 이야기는 단순히 남자와 여자가 만났다가 헤어지는 것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잘 보시면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창세기의 창조의 이야기를 가지고 대답을 풀어 가십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룬 것이므로 절대 나누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언뜻 보면 예수님께서 샴마이 학파의 손을 들어주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근본적으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창세기 1장으로 가서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부분을 읽어보지요.
(창1:26-27) 26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그가,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 사는 온갖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히, '아담')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전에도 한번 살펴보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 하시고 자기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즉 복수이시면서 단수이신 하나님, 절대로 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함께 하시는 삼위 하나님께서 그 본질을 그대로 불어넣어 무엇을 만드셨는데 그것이 바로 남자와 여자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부는 이 땅에서 둘이 만나 행복하게 잘 먹고 잘살라고 만들어 놓으신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형상, 하늘나라의 본질, 사랑으로 똘똘 뭉쳐 여럿이 모여 있어도 하나인 하나님 나라,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하나의 유기체인 그 하늘나라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 우리 인간들에게 허락하신 것이란 것입니다.
(엡5:22-32)
22 아내이신 여러분, 주님께 순종하는 것같이,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23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심과 같이, 남편은 아내의 머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몸인 교회의 구주이십니다.
24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같이, 아내들도 모든 일에서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25 남편이신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교회를 위하여 자기를 내주신 것같이,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26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교회를 물로 씻고,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여서, 거룩하게 하시려는 것이며,
27 티나, 주름이나, 또 그와 같은 것들이 없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교회를 자기 앞에 내세우시려는 것이며, 교회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를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여야 합니다.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29 아무도 자기의 육신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기르시고 돌보시는 것처럼, 사람은 자기의 육신을 가꾸고 보살핍니다.
30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입니다.
31 2)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서, 자기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창 2:24).
32 이 비밀은 큽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
자 조금 더 들어보세요. 결혼이란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더욱 더 확실하게 설명해 놓은 곳이 바로 에베소서 5장입니다.
남편들아 아내들아 서로 사랑하고 순종하라고 이야기 해놓고 이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바로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한 것이라고 정확하게 그 결혼의 의미를 밝히고 있습니다.
이렇게 가정이라는 것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교회가 한 몸이 되어 영원히 살게 될 그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배우며 완성해 나가는 공동체인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기를 주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같이 목숨을 바쳐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는 주님께서 하나님께 목숨을 바쳐 순종하신 것처럼 남편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게 정말 말 그대로 될 때 이 땅에는 천국 같은 가정이 생기게 되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죄의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타락한 본성이 남아 있기 때문에 언제나 성공적으로 그 결혼생활을 하나님 나라처럼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목숨을 바쳐 사랑을 하고 섬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실패가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의 장으로 이끌어 간다는 사실이 우리를 위로해 줍니다. 우리는 그렇게 실패할 때마다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그 하나 됨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는 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게 되는 은혜의 장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가정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가정을 점차 작은 하늘나라로 만들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이 빠진 부부생활, 가정생활은 언제나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니 겉으로는 행복해 보인다 할지라도 상대편 누군가가 희생을 하고 있는 것이지 그 것이 정말 바람직한 행복한 가정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가정생활을 통해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절대 그 사랑과 순종은 이루어질 수 없음을 절실히 깨달아야 하는 것이며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하나 됨을 위해 죽으실 수밖에 없었다는 십자가의 현실을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아담으로부터 모두가 죄에 빠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 때부터 죄인으로 났으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고 그 분과 함께 동행을 했던 자들에서 그 분으로부터 쫓겨 난 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모든 인간들의 실존은 하나님과 이혼을 당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절대 가정을 하나님의 형상처럼 끈끈한 사랑으로 만들어 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절대 가정을 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 만들어 낼 수 없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되는 것이 바로 결혼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결혼은, 가정은 절대 자기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자기의 짐을 누군가와 함께 나누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결혼을 통해서 우리의 거룩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혹자는 결혼을 통해 자기가 지고 있는 짐을 상대방에게 넘겨주려는 의도에서 결혼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 배우자가 자기 존재의 확장에 불과하기 때문에 배우자의 외양이나 학식이나 재산 등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반드시 배우자들에게 실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상대방을 이용해서 나의 욕심을 채우려는 자들은 그들의 욕심이 끝이 없기 때문에 절대 만족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자신의 욕심을 다 채워주지 못하는 상대방이 못마땅하게 여겨지는 것이고 결국 이혼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서로의 가슴을 찢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상대방이 뭔가 부족하고 상대방이 나를 괴롭히는 것을 성격차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손길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결혼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라고 했으니까 모든 상황이나 사건들을 영적으로 생각해 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하면 사람 막대기 인생 채찍을 동원하신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의 거룩을 훈련하시기 위해 서로의 배우자를 막대기로 들어서 쓰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일이 있을 때에 성격차이라는 이유를 들어 갈라지려고 생각만 하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나의 어떤 모난 부분을 둥글게 만드시려고 하시는가를 먼저 생각하시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정은 자기가 만족한 결과를 만들어 내지 못하면 함부로 깨버리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시금석으로 삼아 그 돌맹이가 나를 긁으면 내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하며 점차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수준으로 자라가게 되는 것이 바로 결혼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천국에서는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이 없다고 하셨지요? 왜 천국에는 부부가 없겠습니까? 왜 그렇게 좋은 것이라면 천국에 그 좋은 것이 없겠습니까? 천국에는 부부관계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땅에 그러한 관계를 만들어 놓으시고 우리를 그 관계 속으로 집어 넣으셨을 때는 무언가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지 않겠습니까? 단지 우리가 혼자 살면 외로워서 둘이 붙어서 재미나게 살라고 그런 관계를 허락하시지는 않았을 것 아닙니까?
결혼은 천국에 있는 유일한 부부관계인 신랑인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와 신부인 교회의 관계를 배우고 추구하는 훈련의 장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남자들도 결혼을 자신들의 필요를 채우고 자신들의 짐을 대신 지고 가 줄 사람을 얻는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마저도 본문 10절에서 “그렇게 우리 맘대로 하지 못할 것이면 차라리 혼자 사는데 낫습니다.” 하고 말할 정도입니다.
일견 맞습니다. 정말 우리가 원하는 대로 자기의 필요만을 상대방에게 요구하는 것이 결혼 생활이라면 우리는 혼자 사는 것이 백번 낫습니다. 오죽하면 성경도 독신을 은사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바울도 결혼 안 할 수 있으면 안 하는 게 좋다고 합니다. 혼자 살면서도 정욕을 참아낼 수 있거든 혼자 살라고 합니다.
(고전7:7-9) 7 나는 모든 사람이 다 나와 같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사람은 제각기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사가 있어서,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합니다.
8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과 과부들에게 말합니다. 나처럼 그냥 지내는 것이 그들에게 좋습니다.
9 그러나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십시오. 욕정에 불타는 것보다는 결혼하는 편이 낫습니다.
독신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결혼이라는 과정을 통과하지 않고서도 거룩을 배울 수 있는 선물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결혼 생활이라는 것은 힘이 드는 것이고 책임을 동반한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에게는 죄 성이 남아 있어, 타락한 본성이 남아 있어 힘이 든 것입니다. 죄의 영향이 어떻게 가정에 영향을 미치는지 아세요? 성경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죄를 짓고 하나님께서 여자를 저주하셨지요?
(창3:16) 여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할 것이니, 너는 고통을 겪으며 자식을 낳을 것이다. 네가 남편을 지배하려고 해도 남편이 너를 다스릴 것이다."
남편은 여자를 다스리려고 하고 여자는 남편을 사모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게 뭐가 저주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 것을 저주라 하십니다. 여기서 사모한다는 말의 원래 뜻은 “장악하다”라는 뜻입니다. 여자는 남자를 장악하여 좌지우지하려 하고 남자는 여자를 다스리려 하게끔 죄가 인간을 만들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는 매일 싸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 모든 동화의 끝이 공주와 왕자의 결혼으로 끝이 나는지 아세요? 신데렐라. 백설 공주 다 왕자와 결혼 하는 것으로 끝나지요? 결혼 후의 그림까지 그려 놓으면 그 동화는 동화가 아니라 참혹한 비극으로 끝날 것이 뻔하기 때문에 모든 아름다운 동화는 결혼식 장면을 끝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죄인들에게는 예수가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은혜를 깨닫고 우리가 이토록 추한 인간임에도 우리를 위해 목숨을 끊어가며 생명을 선물해 주신 그 사랑을 깨닫고
남편은 아내를 목숨 걸고 사랑해 보는 것입니다. 안되고 실패하면 다시 또 일어나서 사랑해 보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고 그 분은 목숨을 걸고 사랑을 하셨으므로 우리는 그 사랑에도 연합하여 사랑을 하는 자로 변해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자는 목숨을 바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신 예수의 순종에 연합하여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실패하면 또 일어나서 자기 안의 그 예수를 확인하며 순종하는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목숨을 걸고 사랑하는 남편으로, 목숨을 걸고 순종을 하는 아내로 지어져 가면서 천국을 조금 맛볼 수 있는 것이 가정이고 결혼인 것입니다.
사랑하지 못하고 순종할 수 없을 때 그런데 예수는 어떻게 이런 인간들을 사랑했고 목숨을 바쳐 순종을 했는가를 생각하며 깨달아 지거든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그렇게 그 은혜를 알아 가면 알아 갈수록 우리는 변하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면서 계속 예수께로 가까이 가게 되는 가정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가정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알지 못하면 진정한 결혼의 의미를 모르고 의미를 모르고 하는 결혼생활은 불행하기 마련입니다. 아니면 어느 한쪽이 포기를 하고 겉으로는 평화롭지만 가슴속에 비수를 품고 살게 되는 슬픈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 개그맨 김제동씨가 어느 방송에서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김제동씨에게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는 어머님이 나이가 아버님 보다 많으신 연상 연하 커플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 평생을 그 연하의 남편을 황제 모시듯 하셨다고 합니다. 밥상을 엎고 투정을 부리고 해도 그저 “예 예” 하면서 사시는 것이 너무 불쌍해서 어느 날 물었다지요? 도대체 어머님은 아버님을 얼마나 사랑하시기에 그처럼 수모를 겪고도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사시냐고? 그랬더니 어머니 왈 “사랑은 무슨 사랑, 쟤 너무 어려서 그렇게 안 해주면 삐져”라고 하시더랍니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잔인한 희생입니다. 그건 바람직한 결혼이 아니라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불행하게 사는 비극의 단면인 것입니다.
여러분, 행복한 결혼 생활을 원하세요? 예수를 아십시오. 예수를 배우십시오. 그리고 복음을 더 깊이 이해하십시오. 그리고 정말 행복한 결혼 생활을 원한다면 상대방의 배경을 보지 말고 상대방의 신앙을 먼저 살피십시오. 결혼은 상대방을 이용해 내 짐을 그 상대방의 어깨에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위해 나를 희생하는 복음의 논리가 그대로 적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에는 십자가 진 사람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남편도 아내도 자기를 비워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십자가의 삶을 훈련해야 그 가정은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혹 결혼을 다른 사람들의 부러운 평가를 받기 위해 남들이 부러워하는 상대방의 배경을 보고하게 되면 여러분은 그 즉시 불행해 집니다. 그 사람의 매력이라고 여겼던 그 부와 외모와 명예가 어느 날 사라졌을 때 여러분은 절대 그 사람하고 살 수 없습니다. 다른 것은 다 벗겨 버리고 상대방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바로 서있는가를 먼저 보셔야 합니다.
가정의 목표는 돈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고 잘생긴 외모도 아닙니다.
펄벅의 대지에 나오는 주인공 왕룽을 보세요. 가난하게 부인 오란과 열심히 일하며 살 때는 그 오란의 쟁기를 든 큰 손이 너무 예쁘고 고마웠습니다. 그가 피란을 가서 어떻게 부자가 되고 나서 당장 그 오란의 큰 손이 너무 보기 싫어졌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래서 롄화라는 손이 작고 얼굴만 예쁜 첩을 맞아들이지 않습니까? 결혼 생활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돈도 아니고 남편의 명예도 아니고 진실한 두 사람의 신앙인이 어떻게 이 땅의 것이 없이도 하늘나라를 경험하며 살아갈 수 있느냐를 함께 고민하며 노력하며 살아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자를 탄생시키실 때 어떻게 하십니까? 아담을 잠들게 하시고 옆구리를 통해 갈비뼈를 하나 꺼내셔서 여자를 만드십니다. 성경에서 잠잔다는 것은 무엇을 metaphor한다고 했지요? 죽음입니다. 여자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남자가 죽고 옆구리에서 피와 물을 쏟고 갈비뼈를 꺼내 줘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렇게 죽으시고 교회가 탄생했듯이 한 가정이 바람직한 그리스도 안의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죽음을 방불 하는 남자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을 창조 때부터 이미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어서 아담이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었다고 기록을 합니다. 아담이 부모가 어디 있었나요? 하나님께서 최초의 결혼을 이렇게 묘사하신 것을 기억하세요. 아담과 하와의 결혼은 하나님 아버지를 떠나 죄인인 하나님의 백성과 연합하여 한 몸이 되어 그들의 삶을 자기에게 전가시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자신의 삶을 그들에게 전가시키셔서 살려내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를 설명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가 없었던 아담의 결혼에 남자가 부모를 떠나 여자와 하나가 된다는 예수님과 교회간의 복음의 메시지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결혼을 통해서, 가정을 통해서 그 사랑과 희생과 순종의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구현해 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미 이혼한 분들은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혼하신 분들은 절대 주눅들 필요 없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우리는 모두 하나님과 이혼한 자들입니다. 예수가 없이는 절대 가정에서 하나님 나라를 구현해 낼 수 없는 죄의 옛 몸을 갖고 있는 자들, 스스로는 어쩔 수 없는 자들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니 이제 예수만을 의지하여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새로운 가정을 꾸리게 되면 그 때는 이 성경의 원리를 적용하여 끝까지 참아 주고 순종하며 목숨 걸고 사랑해 보면 되는 것입니다.
아슬아슬하게 겨우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 이제 복음을 알고 그 고귀한 결혼의 의미를 알았으면 그렇게 살아내십시오. 우리의 가정을 보고 하나님 나라를 보는 자들이 있게 만드십시다. 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그 예수의 은혜에 너무 감사해서, 예수님 원하시는 게 뭔지 잘 알고 있으므로 그 예수님 원하시는 것을 우리도 해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땅에서는 이혼한 자로, 혹은 이혼은 안 했지만 마지못해 사는 자로 이렇게 서 있지만 지금 복음을 아는 여러분은 하늘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헤어지지 않는 결혼을 한 자들이라는 것 잊지 마시고 그 신분에 맞게 이 땅에서도 가정에서 그런 모습 보이면서 살아내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이혼을 계획하고 있는 분들에게 이 말씀을 읽어드리고 끝을 내겠습니다.
(고전7:10-16) 10 결혼한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이것은 나의 말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입니다. 아내는 남편과 헤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11 -만일 헤어졌거든, 재혼하지 말고 그냥 지내든지, 그렇지 않으면 남편과 화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남편도 아내와 이혼하지 말아야 합니다.
12 그 밖의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이것은 나의 말이요, 주님의 말씀은 아닙니다. 어떤 1)신도(그, '형제')에게 믿지 않는 아내가 있는데, 그 여자가 남편과 같이 살기를 원하면, 그 여자와 이혼하지 말아야 합니다.
13 또 어떤 아내에게 믿지 않는 남편이 있는데, 그가 아내와 같이 살기를 원하면, 그 남자와 이혼하지 말아야 합니다.
14 믿지 않는 남편은 그의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해지고, 믿지 않는 아내는 그의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해졌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자녀도 깨끗하지 못할 것인데, 이제 그들은 거룩합니다.
15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 쪽에서 헤어지려고 하면, 헤어지게 하십시오. 이런 경우에는, 형제나 자매가 얽매일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평화롭게 살게 하려고 부르셨습니다.
16 아내 된 이여, 그대가 그대의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압니까? 남편 된 이여, 그대가 그대의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압니까?
그리스도인은 다른 문제로, 성격차이, 경제문제 그런 것으로 절대 이혼 할 수 없습니다. 이혼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신앙의 문제, 하나님을 섬기는 문제로 남편이나 아내가 방해가 되고 그들이 먼저 이혼을 요구하거든 이혼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여운을 남깁니다. ‘혹시 네가 네 남편이나 네 아내를 구원하게 하기 위해 거기에 보내진 사람인지 어떻게 아느냐?’ 예수님을 믿는 다고 하면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명령에 순종하기로 결심한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가까운 이웃인 아내를, 남편을 나 몰라라 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 사랑하십시다. 그것은 권면이 아니라 우리의 책임이며 하나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제29장 그리스도인의 고난 (1) 고통 없는 지옥
(빌1:29)
29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를 위해서 고난도 받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여러분이 받는 특권입니다.
유명한 독일의 신학자이신 헬무트 틸리케 목사님이 미국을 두루 여행하며 설교를 하신 후 미국에 대해 느낀 점을 이야기 해달라는 질문에 “그들은 고난에 대해 부적합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비단 미국의 문제만이 아니라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세상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까지도 고난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고난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 한 번 재고해 봐야겠지요?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일단 예수를 믿게 되면 하나님의 도움으로 모든 고난과 역경은 다 사라지고 행복과 평화가 내 삶에 올 것이라는 착각들을 합니다. 그것만큼 위험한 발상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신이 존재한다면 우리 삶의 고난은 당연히 신께서 막아주셔야 한다고 우깁니다. 실제로 버트란트 러셀이나 볼테르 같은 anti-christian들은 인간들이 겪는 전쟁과 기아, 범죄, 질병을 막아주지 않는 신은 믿을 필요가 없다고 기독교를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이 세상에 고통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고난을 즐겨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시험이 닥쳤을 때 쾌감을 느끼는 사람은 더더욱 없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고난과 고통을 즐거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마조키스트 류의 정신병자일 것입니다. 누구나 고통 없는, 고난 없는, 시험 없는 삶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어느 곳에 그 고통을 느낄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바로 한센 병(나병, 문둥병 이라고도 한다)환자들입니다.
한센 병의 특징은 인간의 몸에 있는 통점들이 무뎌진다는 것입니다.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신경들이 감염이 되어 가면서 전혀 통증을 느낄 수 없게 되는 것이 한센 병입니다.
우리 몸은 알게 모르게 통증에 의해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눈을 오래 부릅뜨고 있으면 눈이 시려서 눈물을 흘리게 되거나 눈을 깜빡이게 됩니다. 고통이 눈의 시력을 보호해 주는 것입니다. 손이 난로 가까이에 가면 뜨겁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난로에 데지 않게 손을 얼른 불러들입니다. 역시 고통이 우리를 보호해 주는 것입니다.
뼈가 어긋나면 통증 때문에 우리는 팔을 묶어 목에 맵니다. 우리는 고통 때문에 더 이상 뼈가 어긋나지 않게 조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통은 때로 우리를 더 큰 피해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한센 병 환자들은 고통을 모르기에 시력을 잃기 일쑤입니다. 그들은 빗자루를 들고 청소를 하면서 빗자루를 쥔 손에 너무 힘을 주어서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도 알지 못합니다. 너무 뜨거운 물에 손을 담가도 뜨거움을 모르기에 그냥 그 물로 세수를 하다가 화상을 입기도 합니다. 고통이 없기에 일어나는 돌이킬 수 없는 더 큰 고통들입니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마취제 없이 수술을 할 수 있고, 핀으로 손가락을 찔러 피를 내는 묘기를 친구들 앞에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은 그만큼 위험합니다. 고통이 없는 삶이 생명을 위협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의 유일한 소원은 고통을 느껴야 할 때 고통을 느끼고 싶다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소멸되어져 가는 고통의 상실을 막기 위해서 치료를 합니다. 참 아이러니합니다.
고통은 이렇게 우리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럼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 일어나는 고난과 고통과 시험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사랑으로 사랑하십니다.
자기의 아들을 우리의 목숨 값으로 지불을 하셨습니다. 그 말은 좀 과장을 한다면 우리를 그 아들보다 더 사랑하신다는 말입니다. 왜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시는지, 도대체 우리가 뭘 했다고 우리를 위해 그러한 희생을 감수하시는지 우리는 천국에 올라가기 전에는 도저히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사랑을 입었고 사망에서 건져졌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왜 우리의 삶에 다가오는 고통과 고난을 막아주시지 않으실까요?
그 분은 분명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는 약속을 하셨고 우리의 삶에 분명 간섭하고 계시고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신데 그토록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 왜 우리가 고통당할 때, 우리가 시험 당할 때 그냥 두고 보시는 것입니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엘리 위젤이라는 유태인 청년이 쓴 "The Night"라는 소설에서처럼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그들의 삶에 닥친 고통을 차마 끝까지 견뎌내지 못하고 “하나님 지금까지 내가 믿었던 나의 하나님은 죽었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살아있다면 어떻게 지금 아무 일도 안하며 이러한 일들을 바라보고만 있겠습니까?”라고 외치며 하나님을 떠나가고 있는데도 왜 하나님은 그 고통들을 방치하고 계시는 것처럼 보일까요?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삶에 고난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두 말할 것도 없이 많은 고난이 여러분의 삶에 산재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때마다 막아주시던가요? 아닐 때가 더 많지요?
그렇다면 무언가 이유가 있어서 그 고통이 우리를 괴롭히는 것을 그냥 두고 보시는 것이라는 생각이 안 드세요? 오늘 그 그리스도인들의 고난에 관해 잘 정리를 해 보겠습니다.
그러면 먼저 우리가 당하는 고통의 이유에 대해 고민해 보겠습니다.
그 문제를 이해하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필립 얀시는 그의 책 ‘내가 고통당할 때 하나님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라는 책에서 우리는 절대 그 이유를 확실하게 다 밝혀 낼 수 없다고 결론을 짓습니다. CS Lewis도 그의 책 ‘고통의 문제, The Problem of Pain’에서 하나님은 다만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고통을 허락하시는 것일 것이라고 원론적인 결론만을 내리고 맙니다.
우리는 우리의 상식이나 추측 말고 성경으로 돌아가 그 고통의 문제를 살펴보려 합니다.
성경에서는 우리가 시험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며 고통을 겪는 이유를 세 가지로 설명을 합니다.
먼저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과 등을 지고 이제 세상과 원수인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로 한 자들이므로 당연히 세상이, 사탄이 우리를 공격할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고난이 닥칠 것을 이야기 합니다.
(마5:10-12)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터무니없는 말'이 없음)온갖 비난을 받으면, 너희에게 복이 있다.
12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너희보다 먼저 온 예언자들도 이와 같이 박해를 받았다."
(마24:9)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줄 것이며, 너희를 죽일 것이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벧전5:9-10) 9 믿음에 굳게 서서, 악마를(그, '훼방자') 대적하십시오. 여러분이 아는 대로, 세상에 있는 여러분의 형제자매들도 다 같은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10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그분의 영원한 영광으로 불러들이신 분께서, 잠시동안 고난을 받은 여러분을 친히 온전하게 하시고, 굳게 세워 주시고, 강하게 하시고, 기초를 튼튼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요16:33) 내가 이렇게 말한 것은, 너희로 하여금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시련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히11:35-38) 35 여자들은, 죽었다가 부활한 가족을 다시 만났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더 좋은 부활의 삶을 얻고자 하여, 구태여 놓여 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을 받기도 하고, 채찍으로 맞기도 하고, 심지어는 결박을 당하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기까지 하면서, 시련을 겪었습니다.
37 또 그들은 돌로 맞기도 하고, 톱으로 켜이기도 하고, 칼에 맞아(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시험을 당하고'가 첨가되어 있음)죽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궁핍을 당하며, 고난을 겪으며, 학대를 받으면서,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떠돌았습니다. 38 세상은 이런 사람들을 받아들일 만한 곳이 못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을 헤매며 다녔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의 편에 서게 됨으로써 세상으로부터 배척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인들에게 닥치는 고통에는 우리의 범죄 함으로 우리에게 오는 하나님의 징계라는 것이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것은 징벌(懲罰)이 아닌 징계(懲戒)이며 그 징계는 잘못한 것에 대한 벌이라는 개념보다는 사랑의 회초리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이 인생에 던져 넣으신 유일한 목적은 우리에게 거룩의 옷을 입히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지요? 우리를 자식답게 만들어서 천국에 넣고 싶으셔서 이 인생을 당신의 백성들에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 땅은 그러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세워진 잠정적이며 임시적인 가건물에 불과한 곳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온통 하나님의 백성들의 거룩에만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그 거룩을 향해 가는 길에 우리가 순종하지 못할 때 하나님은 가차 없이 우리를 징계하셔서 우리가 가야할 길을 명확하게 조명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징계가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으로 고통으로 올 수 있습니다.
(히12:5-11) 5 또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향하여 자녀에게 말하듯이 하신 이 권면을 잊었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주의 훈련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그에게 꾸지람을 들을 때에 낙심하지 말아라.
6 주께서는 사랑하시는 사람을 훈련하시고, 자녀로 받아들이시는 자마다 채찍질하신다."
7 주께서 여러분을 훈련하시거든 그것을 견디어 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자녀에게 대하듯이 여러분에게 대하십니다. 부모가 훈련하지 않는 자녀가 무슨 자녀이겠습니까?
8 모든 자녀가 받는 훈련을 여러분이 받지 않는다고 하면, 여러분은 사생아이지, 참 자녀가 아닙니다.
9 우리가 육신의 부모도 우리를 훈련하는 분으로 모시고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영들의 아버지께 복종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더욱더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10 육신의 부모는 잠시 동안 자기들의 생각대로 우리를 훈련하였지만, 영들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유익이 되도록 훈련하십니다.
11 모든 훈련은 그 당시에는 즐거움이 아니라 괴로움으로 생각되지만, 나중에는 이것으로 연단받은 사람들에게 의로움이 깃든 평화로운 열매를 맺게 합니다.
세 번째로 우리에게 고난과 고통과 시험이 오는 이유는 우리의 잘 잘못을 떠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강한 백성으로 연단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고통스런 시험을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하나님의 시험은 우리의 믿음을 순화시키는 데 기여를 하는 것이지 절대 우리를 괴롭히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벧전1:5-7) 5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마지막 때에 나타나기로 되어 있는 구원을 얻게 하시려고,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그분의 능력으로 여러분을 보호하고 계십니다.
6 그러므로 지금 잠시동안 여러분이 여러 가지 시련을 겪으면서 어쩔 수 없이 슬픔에 빠져 있더라도, 이것을(또는 '이것으로') 기뻐하십시오.
7 여러분의 믿음이 연단을 받아서 순수하게 되면, 불로 연단하여도 마침내는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더 귀한 것이 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이 칭찬과 영광과 명예를 차지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고난의 정확한 이유가 나오지요? 우리 성도들을 정금 같은 순전하고 순결한 백성으로 연단하시기 위해 성도들에게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의 시험은 우리를 성숙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약1:2-4) 2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질 때에, 그것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생각하십시오. 3 여러분은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낳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4 여러분은 인내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완전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십시오.
(롬5:3-4) 3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 가운데서도 자랑을 합니다(또는 '자랑합시다'). 우리가, 환난은 인내를 낳고.
4 인내는 품격을 낳고, 품격은 희망을 낳는 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하나님의 시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 보일 기회로 쓰시기도 하십니다.
(요9:1-3) 1 예수께서 가시다가, 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2 제자들이 예수께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하고 물었다.
3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그에게서 드러나게 하시려는 것이다.
역시 성도의 연단을 위함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시험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만 향하게 해 줍니다.
(고후7:8-11) 8 내가 그 편지로 여러분을 슬프게 했더라도, 나는 그것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 편지가 잠시나마 여러분을 슬프게 했다는 것을 알고서, 내가 곧 후회하기는 했지만,
9 지금은 오히려 기뻐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슬픔을 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슬픔을 당함으로써 회개를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슬퍼했으니, 결국 여러분은 우리 때문에 손해본 것이 없습니다.
10 하나님의 뜻에 맞는 슬픔은, 회개하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슬픔은 죽음을 가져 옵니다.
11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에 맞는 슬픔으로, 얼마나 많은 변화가 여러분에게 일어났습니까? 여러분이 나타낸 그 열성, 그 변호, 그 의분, 그 두려워하는 마음, 그 그리워하는 마음, 그 열정, 그 징계하는 정신을 보십시오. 여러분은 그 모든 일에 잘못이 없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시험이 닥쳐오면 오히려 기뻐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벧전4:12-13) 12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을 시험하려고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13 오히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 여러분이 기뻐 뛰면서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닥치는 시험과 환란과 고통과 고난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확인만 되었다면 그것은 모두 우리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그게 사탄의 공격이든 우리의 잘못으로 인한 징계이든 하나님의 연단의 방법이든 모든 고난은 그리스도인들의 성숙에 기여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 모든 병이 다 나아야 하며, 모든 병은 다 귀신이니까 그 귀신만 쫓아내면 병에서 놓여난다고 하면서 감기귀신, 치질귀신, 종기 귀신 쫓아내고 하는 것은 한마디로 사기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러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내는 도구가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잊으시면 안 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명제를 한번 풀어보겠습니다. “고통과 고난과 시험의 원인은 하나님이다”
맞습니까? 어때요?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고난은 전부 하나님이 주시는 것 맞아요?
아닙니다.
우리에게 오는 고통과 고난은 모두 우리의 죄의 결과인 것입니다. 오해하지는 마세요.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이 전부 죄를 지어서 그렇다는 말이 아닙니다. 타락한 인류의 죄라는 것이 고난이라는 것을 만들어 낸 것이지 하나님이 고난의 조성 자가 아니시라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고난은 인간의 죄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질병, 전쟁, 살인, 약탈, 방화, 강간 모두다 인간의 죄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그 어느 것 하나, 하나님이 창조해 내신 것은 없습니다. 나의 죄이든 다른 이의 죄이든 하여튼 인간의 죄가 인간의 고통을 배태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단지 그러한 우리의 죄의 결과들을 우리의 선을 완성시키는데 이용하실 뿐인 것입니다.
(약1:14-15) 14 사람이 시험을 당하는 것은 각각 자기의 욕심에 이끌려서, 꾐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15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
그렇지요? 여러분 여러분이 사시는 이 LA에서 밤에 아무 거리나 활보하며 걸어 다닐 수 있나요? 공항에서 비행기 한번 타는데 왜 이렇게 힘들어졌습니까?
왜 집집마다 방범창이다, 쇠창살이다, 방범 알람이다 이런 것이 설치되어야 합니까?
왜 오늘도 지구 곳곳에서 신무기는 개발되어야 하며, 곳곳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는 것일까요?
왜 경제는 일어났다 주저 앉았다를 반복하여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며 왜 질병들은 점점 더 고약해 지고 있습니까? 그 모든 원인은 죄인인 우리에게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의 욕심이 강도와 살인을 낳고 우리의 나태함과 식탐이 비만과 성인병을 만드는 것이고, 우리의 이기심이 불안과 불편함을 만든 것입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은 이런 세상을 만드셨냐고 질문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우리가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왜 신은 지금 이 상황을 연출해 내는가?”라고 외치며 하나님을 향해 등을 돌렸던 수많은 유대인들은 우리 인간의 죄가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지를 간과한 것입니다. 자기들은 피해자이고 하나님이 가해자인 것처럼 하나님을 향해 삿대질을 해 댄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피해자입니까? 진정한 피해자는 하나님이십니다. 가해자는 타락한 인간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서 몰아낸 것도 인간이고 그러한 인간들을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린 자들도 인간들입니다. 도대체 누가 피해자란 말입니까?
고통과 고난과 시험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고통이 없는 한센 병 환자들이 그로 인해 더 큰 낭패를 당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 성도의 삶에는 반드시 죄악 된 세상이 토해내는 고통의 사건들이 감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반드시 죄가 만들어 내는 더러운 배설물들이 폭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에게 고통으로 경험되어 지는 것입니다.
고통과 고난과 시험이 없는 불완전한 인간들의 세상을 한 번 상상해 보세요.
거기에 가난한 자들을 위한 긍휼의 마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거기에 고통당하는 자들을 위한 자비가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거기에 우리가 감내해야 할 인내가 필요할까요? 서로를 위한 격려나 위로가 필요할까요?
너그러움, 친절, 온유, 용기, 순종 등등 우리의 삶 속에서 맺어야 하는 성령의 열매들이 아무런 고통이 없는, 고난이 없는 세상에서 성도들에게 학습되고 경험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한 곳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인격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배워야 할 덕목을 어디서 배울 수 있겠습니까?
우리 인생의 목적을 절대 잊지 마세요. 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절대 잊지 마세요.
우리는 이 땅에 하나님의 자녀로 지어져 가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지, 이곳에서의 무사태평, 행복, 번영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고난에 대해서 반응하는 것이 좀 달라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조건 “왜 나에게 이런 일을 허락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은 분명 모든 것을 합력시켜 선을 이루시는 분이시니까, 내가 지금은 이해할 수 없어도 나에게 유익이 되는 일일거야”라고 감사로 돌아서야 하는 것이 실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아닐까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분명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고통을 감지하고 있고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괴로움에서 멈춰 서 있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고통을 느끼지 못해 난로에 손을 익혀 버리고, 고통을 느끼지 못해 시력을 상실하고 고통을 느끼지 못해 엄지손가락이 떨어져 나가도록 삽질을 하고 고통을 느끼지 못해 발가락이 썩어 떨어져 나가는 데도 아무런 대처를 할 수 없는 영적 한센 병을 막기 위해서 우리에게 고난과 고통과 시험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고통까지도 감사하라는 것이지요.
1963년 미국 장대높이뛰기 세계 챔피언이었던 브라이언 스턴버그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올림픽을 앞두고 어느 날 트램플린에서 훈련을 하다가 잘 못 떨어져서 목뼈가 부러졌습니다. 그는 전신 마비 환자가 되었고 모든 사람들은 그 절망에 빠진 젊은이를 잊어갔습니다. 그러나 그가 전신마비 환자가 되고 3개월이 지난 후 브라이언 스턴버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고 그의 삶을 더 이상 저주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한 번 비교해 보세요? 예수를 알지 못하지만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되어서 세계적인 스타가 되어 어딜 가든 사람들이 알아주는 사람과 전신 마비 환자가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 사람과 누가 더 축복을 받은 사람인가요? 만일 제가 브라이언 스턴버그의 삶에 일어난 그 사고는 하나님의 선물이었다고 말한다면 너무 잔인한가요? 아닙니다. 우리 조금만 더 영적으로 세상의 사건들을 바라봅시다. 내 사지를 잃어 예수님을 얻고 영생을 얻었다면 그 보다 더 큰 축복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물질주의, 성공주의, 패권주의에 젖어 있기에 그러한 영적 안목을 수시로 놓치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미래에 대한 소망이 있다. 성경은 나에게 영화롭게 될 우리의 몸에 대해서 말해 주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에 그것은 항상 아련하고 낯선 개념이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내가 완전히 나을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완전한 사람이 될 기회를 빼앗긴 것이 아니다. 나는 지금 사십년 쯤 지연된 삶을 살고 있을 뿐이다. 영화롭게 되는 그 날, 그날이 어떤 날인지 나는 그 의미를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기다린다.
그날, 나는 나의 두발로 서서 예수님과 함께 춤을 추고 있을 것이다“이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신앙고백입니까?
도스토예프스키는 28살에 진보적인 단체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사형을 언도받고 수용소로 끌려갑니다. 8개월 만에 사형이 집행됩니다. 사형대에 묶인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마지막 유언을 하는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아무 말 없이 하늘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러시아 정교회의 첨탑에 올려진 십자가가 눈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묘한 감정이 그에게 올라왔고 그 순간 황제의 특사가 소설처럼 등장해서 그는 사형을 면하고 시베리아 유배 길에 오르게 됩니다. 시베리아로 끌려가는 도중 그는 죽음의 순간에 자신의 눈에 들어왔던 십자가를 궁금해 하게 되었고 성경을 한권 얻어서 유배지에서 그 성경을 열심히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유배지에서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고 그 신앙을 바탕으로 “죄와 벌” “까라마조프의 형제들”같은 걸작을 썼던 것입니다. 두 작품의 주제는 모두 죄와 인간과 하나님에 관한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게 분명하게 성경은 거짓이라는 것을 증명해 낸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의 참말보다 그가 거짓이라고 증명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겠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그의 고난은 하나님의 크신 선물이었던 것입니다. 어디를 바라보고 있느냐에 따라 우리는 고난에 대한 반응을 달리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이야기 하지만 이 인생은 너무나 짧은 것입니다. 이제 곧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저 세계로 우리는 던져질 것입니다. “지옥과 천국” 그 사실을 항상 기억하십시오.
다음시간에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당할 시험만을 주시고 피할 길도 주신다고 하시는데
그럼 피할 길도 있다는 말인가? 어떻게 하면 그 고난을 피해 갈 수 있는가에 대해서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제30장 그리스도인의 고난 (2) 피할 길은 있는가?
(고전10:12-14)
12 그러므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13 사람이 흔히 겪는 시련 말고는, 여러분에게 덮친 시련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시련을 겪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시련과 함께 벗어날 길도 마련하여 주셔서, 여러분이 그 시련을 견디어 낼 수 있게 하십니다.
14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여러분, 우상 숭배를 멀리하십시오.
유사 이래로 종교가 타락하면 네 가지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먼저 성직자가 많아지고
두 번째로 종교 기관이 많아지며
세 번째로 종교가 기복이 되고
네 번째로 그 종교집단이 이해 집단화한다는 것입니다.
성직자와 종교 기관이 많아지게 되면 자연적으로 그들을 먹여 살리고 운영해야 할 돈이 필요하게 되고 그 돈을 갖다 바칠 사람들을 모아서 꼭 붙들어 두려면 청중들이 듣기 거북해 하는 말은 하면 안 됩니다. 청중을 붙들어 두려면 청중들이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복” 이야기로 그들의 비위를 맞춰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집단은 각자의 욕심과 배를 채우기 위해 모인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당연히 전체가 이해집단화 해버리는 것입니다.
자기의 종교를 강요하기 위해 상대방의 목에 칼을 들이대었던 십자군 전쟁이라든지 한 손에 코란을 들고 한 손에 칼을 든 회교도들의 과격한 포교 활동, 국가 문화재인 불상의 코를 잘라버리는 유치한 행동들이 모두 이해집단화 되어버린 종교의 타락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현재 미국 서부에만 목회를 안 하고 노는 목사님들이 이천 오백 명쯤 되고 캐나다와 미국 서부에만 삼천 명이 넘는 목회 지를 못 찾은 목사님들이 있다고 합니다. 웬만한 교회에서는 저마다 신학교를 운영하고 있고 검증되어지지 않은 목사들이 쏟아지고 있는 시대.
현재 한국의 신학생들의 숫자를 다 합치면 전 세계 신학생들의 숫자를 다 합친 것보다 많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정말 우리나라는 말세에 즈음하여 하나님께 크게 쓰임을 받고 있는 것일까요?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가는 화란의 어떤 신학자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세 가지밖에 모른다. 첫째가 하나님, 둘째가 자기 자신, 셋째가 돈이다’
정말 잘 보지 않았습니까?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처럼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어디 있습니까? 주일 예배, 수요 예배, 금요 예배, 매일 있는 새벽 예배, 구역예배, 수련회, 부흥회 그야말로 다른 나라 사람들이 보면 예수에 미친 사람들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는 이유를 다른 나라 신학자가 ‘자기의 욕심을 채우고 세상의 힘을 얻기 위한 방편’이라고 혹평을 하고 간 것입니다.
비단 우리나라 기독교인들 뿐 아니라 기독교는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직후부터 그렇게 변질되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스땅달의 적과 흑이라는 소설을 보셨습니까? 적(赤)은 추기경의 붉은 제복을 말하는 것이며 흑(黑)은 범관의 법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시 유럽의 젊은이들은 자기의 꿈을 이루기 위해 추기경의 붉은 제복을 택할 것인가? 법관의 법복을 택할 것인가를 고민했다는 것입니다. 성직자가 되어도 충분히 축재하며 권력을 휘두르며 잘 살 수 있었기 때문에 유럽의 젊은이들은 성직자가 될까 법관이 될까를 놓고 고민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종교의 타락은 그 종교를 이기적이고 이해타산 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본질은 하나님을 이용해서 내가 얼마나 부귀영화를 누리며 사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영화롭게 하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이 본질이 흔들리니까 예수를 믿고 나의 생활이 윤택해지지 않고 오히려 고난이 닥치면
사람들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심지어 “진짜 하나님이 있긴 있는 거야?”하고 하나님을 부인하기 까지 합니다.
(롬16:17-18) 17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이 배운 교훈을 거슬러서, 분열을 일으키며, 올무를 놓는 사람들을 경계하고, 멀리하십시오. 18 이런 사람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배를 섬기는 것이며, 그럴 듯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사람들의 마음을 속이는 것입니다.
(고전6:13) "음식은 배를 위한 것이고, 배는 음식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것도 저것도 다 없애 버리실 것입니다. 몸은 음행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있는 것이며, 주님은 몸을 위하여 계십니다
보세요. 타락한 죄인들은 자신들의 배를 위해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입니다. 정작 신은 자신들의 배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우리의 먹을 것을 위해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오직 주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핵심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늘 실망하며 괴로워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고난이, 고통이, 시험이 필연 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본질을 하나님은 이 땅에서의 나의 삶을 도와주는 분으로 몰고 가면 지금 여기 있는 여러분의 삶은 도저히 설명이 안 됩니다. 왜 예수를 믿는데 병이 걸리고 사업이 어려워지고 가정이 흔들리는 사람들이 있는가 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은 칼을 주러 이 땅에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부부가 부모와 자식이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예수님 때문에 갈라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만 관심이 있으십니다. 자기 백성의 거룩의 길에 방해가 되는 것은 가차 없이 쳐버리실 것이기 때문에 가족 간에도 불화가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고난입니다. 그것보다 견디기 힘든 고난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땅에서의 행복을 깨서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한 자로 만들어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구제와 선행을 명령하시는 것도 그런 기독교의 본질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착하게 살아야 천국 간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는 정말 그 본질을 알고 있느냐” 하고 묻고 계신 것입니다.
(롬14:15-17) 15 여러분 각자가 음식 문제로 형제자매의 마음을 상하게 하면, 그것은 이미 사랑을 따라 살지 않는 것입니다. 음식 문제로 그 사람을 망하게 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16 그러므로 여러분이 좋다고 여기는 일이 도리어 비방거리가 되지 않게 하십시오
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
보시다시피 하나님의 나라, 신자의 신자 됨의 본질은 물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남을 도와주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뭡니까? 인색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인색하게 되지요? 나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가치가 물질이기 때문입니다. 인색을 뛰어 넘어 남을 도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나라와 신자의 본질을 제대로 깨달은 사람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형제와 자매를 돕는데서 오는 의와 평강과 희락을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구제와 선행은 바로 그러한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이지 그 자체가 구원의 근거가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기독교의 본질이 우리의 육신을 편안하고 안락하게, 남의 부러움을 사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처지나 상황이 왜 그렇게 이 공동체 안에서 크게 부각 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가치관이나 세계관이 반드시 바뀌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 우리의 삶은 꼭 행복해 져야 하고 , 그렇지 못하면 뭔가 신앙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여깁니다. 참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열심 있는 교인의 아이가 대학에 떨어졌을 때 금방 어떤 공격이 날아가느냐 하면 “교회에서는 그렇게 열심히 믿는데 왜 아이가 대학에 떨어져, 그 사람 가정이 하나님 앞에서 아직 뭔가 해결되지 못한 것이 있는 거야”라고 공격을 합니다.
신앙생활 잘하는 장로님이 비즈니스가 어렵게 되면 “ 저 장로님이 뭔가 하나님께 잘못 한 게 있나봐”라고 수근 거립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이혼을 한 사람들은 괜히 주눅이 들어서 다닙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는데 왜 이혼을 해“ 이렇게 이야기들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고난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은 뭔가 평범한 데서 떨어져 나온 사람처럼 여기게 공동체가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바울도 그런 억울한 평가를 자주 받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세운 교회에서 계속 가짜라고 쫓겨났습니다. 걸핏하면 매 맞고 걸핏하면 감옥에 가고 걸핏하면 굶기 일쑤였습니다. 그럼 바울은 신앙이 뭔가 잘못 된 사람이었다는 말입니까?
(빌1:14-21) 14 주님 안에 있는 형제자매 가운데서 많은 사람이, 내가 갇혀 있음으로 말미암아 더 확신을 얻어, 말씀을(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하나님의 말씀') 겁 없이 더욱 담대하게 전하게 되었습니다.
15 그리스도를 전파하면서도, 어떤 사람들은 시기하거나 다투는 마음으로 하고, 어떤 사람들은 좋은 뜻으로 합니다.
16 좋은 뜻으로 하는 사람들은, 내가, 복음을 변호하기 위해 세우심을 받은 줄을 알고,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지만,
17 시기하거나 다투는 마음으로 하는 사람들은, 나의 감옥 생활에 괴로움을 더하게 하려는 생각을 품고, 다투는 마음으로 순수하지 못한 동기에서 그리스도를 전파합니다.
18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참으로 하든지 거짓으로 하든지, 무슨 방법으로 하든지 그리스도가 전파되고 있으니, 나는 그 일로 기뻐합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앞으로도 기뻐할 것입니다.
19 나는, 여러분이 기도해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도와주셔서, 내가 풀려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20 내가 간절히 기대하며 바라는 것은, 내가 어떤 일에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전과 같이 지금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나의 몸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시는 것입니다.
21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사도 바울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갇히자 “거봐, 저 사람이 진짜라면 어떻게 저렇게 가두어 놓겠어, 우리가 진짜야”하며 그를 미워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사람들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아마 바울도 왜 하나님께서 자기를 걸핏하면 옥에 가두게 하시고 가난에 시달리게 하시고 병에 시달리게 하시는지 의문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할 본질이 아님을 알았고 그런 상황에서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존귀하게 되시는 것”이 신자의 본질임을 강조하고 설파하였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고 약한 자, 힘없는 자가 되고 고통과 고난을 받는 자가 되는 것이 내가 예수를 잘 믿고 있는가, 아닌가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고전9:19-23) 19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20 유대 사람들에게는, 내가 유대 사람을 얻으려고, 유대 사람과 같이 되었습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않으면서도,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얻으려고,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과 같이 되었습니다.
21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율법 안에서 사는 사람이지만,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들을 얻으려고,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과 같이 되었습니다.
22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내가 약한 사람들을 얻으려고, 약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모든 모양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 가운데서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는 것입니다.
23 나는 복음을 전하려고 이 모든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복음이 주는 복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스스로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처럼 행동하기도 하고 작은 자, 약한 자가 되기도 하고 믿음이 약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나, 경건의 모양이나, 형식적인 외양에 신경 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의 삶은 이 땅에 살지만 이 땅과는 아무 상관없이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자의 본분이며 본질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주어지는, 내가 원하지 않는 환경이나 처지, 고통, 고난, 시험은 나의 신자 됨의 근거나 판단 기준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이므로 그 상황에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가 존귀케 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진짜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이지요.
진짜 영원한 곳을 알고 있고 소망하는 사람들은 이 땅의 부귀영화나 고통이나 고난 환란에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영원한 행복의 나라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생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욥기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의인 욥에게 고난을 허락하시고는 욥의 질문에 뭐라고 대답을 해 주시지요?
“네가 무엇 무엇을 잘못했기 때문에 너에게 이런 저런 고난이 있는 것이다” 이런 설명을 하십니까? 단박에 물어보시는 것이 ‘네가 내가 이 땅의 기초를 놓을 때 어디 있었느냐?
바다가 넘칠 때 그것을 막고 경계를 놓은 게 누구냐? 광명과 흑암의 처소가 어딘 줄 아느냐?
네가 우박 창고를 가 보았느냐? 누가 비를 내리게 하느냐? 누가 번개를 치게 하느냐?‘등의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고난 속에 던져진 욥에게 그의 무지함과 작음을 가르치시고 하나님의 크심을 보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이해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우리에게 설명하여 이해시키는 것은 제가 우리 강아지에게 뉴턴의 만유인력을 설명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해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연히 우발적으로 일을 하시지 않으십니다. 모든 것은 작정과 예정과 섭리 안에서 계획되어지고 목표 지점을 향해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가 천국에 가서 섰을 때 우리가 지나온 인생을 비디오처럼 보게 될 날이 있다면
우리 인생의 한 점 한 점이 우리를 그 천국에 서게 하기 위한 꼭 필요한 길이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것이 감사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우리가 다 이해 할 수 없지만 우리 성도의 삶에 반드시 고난과 고통과 시험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주신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면 그 피할 길은 무엇일까요?
먼저 고린도 전서10장 전체의 내용이 어떤 내용인지를 살피고 그 안에서의 본문의 내용을 이해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의 오늘 본문 이전까지의 내용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서 우상을 섬기다가 하나님께 죽고, 간음을 하다가 죽고, 하나님을 시험하다가 불 뱀에 물려 죽고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죽은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전10:11-14) 11 이런 일들이 그들에게 일어난 것은, 본보기가 되게 하려는 것이며, 그것들이 기록된 것은,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경고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12 그러므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13 사람이 흔히 겪는 시련 말고는, 여러분에게 덮친 시련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시련을 겪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시련과 함께 벗어날 길도 마련하여 주셔서, 여러분이 그 시련을 견디어 낼 수 있게 하십니다.
14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여러분, 우상 숭배를 멀리하십시오.
그리고 11절에 그런 일이 지금 우리에게 거울이 되고 경계가 되게 기록이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럼 그러한 일이 오늘날도 일어난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러니까 경고의 메시지를 주는 것 아닙니까? 그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동일한 시험이 그리고 고난이 닥친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이 하나님은 사람이 감당할 시험만 주신다는 어구입니다. 여기서 감당할 시험이라는 것은 헬라어로 ‘안뜨로 피노스’입니다. 그 것은 누구나 흔히 겪는 시험이라는 뜻이라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겪는 시험만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고난과 시험이 오면 왜 나만 이렇게 힘든 일을 겪어야만 하는가 하고 힘들어들 합니다. 아닙니다. 자기가 겪는 시험이 제일 고통스러워 보이지만 누구나 그만큼의 고통은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나오는 감당할 시험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위폽페로’ ‘to bear’라는 말입니다. 이 단어가 바로 우리가 견딜 수 있는 시험만 주신다는 단어입니다. 거기까지 정리를 해보자면 우리가 겪는 고난이나 시험은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다 겪어야 하는 것인데 그것은 우리가 견뎌 낼 수 없는 것들이 아니라 견뎌 낼 수 있는 시험들이라는 뜻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거듭나서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성화의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갓 젖병을 뗀 사람에게는 그가 견뎌낼 수 있는 시험이 유치원을 졸업한 이에게는 초등학교 입학시험만큼의 시험이, 초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에게는 중학교 입학시험만큼의 시험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에게는 대학교 입학시험만큼의 시험만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치원 졸업생에게 감당하기 힘든 대학 입시를 치르게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자기에게 온 시험이 다른 이들보다 더 큰 것 같이 보이는 사람은 그 수준에 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오히려 자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삶 속에 계속해서 우리의 성화를 위한 고난과 시험이 있으리라는 것을 10절이 힌트 해 줍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겨우 하나를 견뎌 내고, ‘이제 나는 어떤 시험이 와도 걱정 없어’ 그렇게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던 자들이 죽고 남은 자들 중 거기서 간음한 자들이 나온 것을 잊지 마세요. 간음한 자들이 모두 죽고 거기서 하나님을 시험한 자들이 나온 것도 잊지 마세요. 우리의 삶 속에는 끊임없는 완성을 향한 시험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순간순간마다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피할 길을 주신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그 피할 길을 주신다는 말씀이 어디 사이에 들어가 있는가 보세요.
그 앞에는 자기들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우상을 섬기고 간음을 하고 하나님을 시험하여 하나님의 분노를 격발케 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피할 길을 주신다는 말씀이 있고 그 다음 구절이 역시 “우상을 섬기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서두에 살펴 본 것처럼 기독교의 본질은 우리를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고 나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게 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기독교는 그렇게 인본주의가 아니라 신본주의인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10장의 네 가지 사건이 모두 그 인본주의, 나를 위하는 것에서 비롯된 사건입니다.
우상을 섬긴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상을 섬긴다는 것은 나의 필요를 얻기 위해 어떤 나보다 강한 대상에게 대가를 주고 부탁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우상은 필요한 것을 주고 대가를 받되 다른 요구는 하지 않는 것이지요. 반면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어떤가요? 하나님은 우상처럼 대가를 바라지는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뭔가를 계속 요구하십니다. 다름 아닌 거룩한 삶을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우상에게 자기들이 뭔가를 요구하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하나님이 그 백성들에게 뭔가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은 하나님의 뜻에 자발적으로 순종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순종하는 자로 만드시기 위해 자꾸 시험을 보시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예수님도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다고 하시겠습니까?
(히5:8) 그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복종을 배우셨습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의 요구와 계획, 우리의 욕심과 계획 사이에서 싸우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요구와 계획을 무시하고 우리의 욕심을 따라 행동할 때 우리는 우상을 섬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단지 그 우상의 이름을 하나님이라 부르는 것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 우리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우리가 도모하는 것에 하나님의 분노가 격발케 됩니다.
성경이 성도들에게 피할 길을 주신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 하나님의 분노로부터의 피할 길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거기서의 피할 길은 고난을 피할 수 있는 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은 성도의 성숙에 꼭 필요한 것인데 하나님이 그 성숙의 길을 피하는 길을 주신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10장의 네 가지 실패의 사건 중에서 하나님을 원망하여 죽음을 당한 사건이 민수기에 나와 있습니다. 민수기 13장을 보면서 성경이 말하는 시험의 피할 길이 뭔지 구체적으로 살펴드리겠습니다.
민수기 13장14장에서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을 포함한 열두명의 가나안 정탐기가 나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나머지 열 명은 가나안에 대한 엉뚱한 거짓 소문을 퍼뜨리고 “우리는 절대 가나안을 정복할 수 없다”는 보고를 했습니다. 그들은 아낙 자손들이고 거기는 네피림이 있어 우리가 그들 앞에 서면 우리는 메뚜기 같이 보였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 그 땅에 들어 갈 수 없다고 보고를 했습니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여호와가 우리에게 약속하셨으므로 그 분의 뜻에 순종하자고 이스라엘에게 고했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행하셨듯이 여호와가 함께 하시면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바로 여호수아와 갈렙의 이야기가 피할 길인 것입니다. 잘 들으세요.
(민14:8-9) 8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그 땅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9 다만 여러분은 주를 거역하지만 마십시오. 여러분은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우리의 밥입니다. 그들의 방어력은 사라졌습니다. 주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바로 이것이 피할 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험을 주실 때 반드시 그 것을 이길 수 있는 길도 함께 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길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나머지 정탐꾼들은 여호와의 재앙을 받아 모두 죽었습니다. 그리고 스무 살이 넘은 이스라엘은 모두 광야에서 죽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여호와의 뜻에 순종하지 않은 자들의 말로입니다. 거기서 건짐을 받은 자들, 즉 피할 길로 가게 된 자들이 누구입니까? 여호수아와 갈렙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로 한 자들입니다.
누가 봐도 승산 없는 전쟁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곧, 승리임을 안자들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하고 시험을 당할 때 절대 승산 없을 것 같고, 다른 이들이 볼 때 나를 지지리도 복도 없는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지 않고 그 뜻을 따르는 것이 꼭 멋진 승리의 모습으로 비쳐 지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애굽의 열 가지 재앙과 홍해를 건넌 것과 만나와 메추라기로 우리를 먹이신 것과 반석의 물로 마시우게 하신 것과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우리를 인도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억하며 이 시험도 반드시 하나님께서 우리의 유익을 위해 주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 분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바로 피할 길인 것입니다. 그것은 갈멜산의 엘리야의 승리처럼 멋지게 보이지만은 않습니다.
스데반의 순교처럼 처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할 것이 있습니다. 갈멜산의 승리와 스데반이 죽음, 어떤 것이 진정 승리의 모습인가요? 둘 다입니다. 우리의 삶에 스데반의 죽음 같은 순종이 요구 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보기에 분명 패배처럼 보이는 그 죽음이 엄청난 승리의 모습이었던 것을 우리는 알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또한 패배처럼 보이는 승리 아닌가요?
다른 사람들에게 승리의 모습을 보이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지 마십시오. 그들에게 패배의 모습으로 비쳐질 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이 진정한 승리의 사람인 것입니다.
피할 길을 “우리가 감수해야 할 고난과 고통과 시험으로부터 도망 갈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런 길은 없습니다.
우리는 거룩을 향해 가야 하기에 반드시 지나야 할 문턱이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의 욕심과 우리의 계획을 앞세워 하나님의 뜻을 모른 척하는 우를 범하지 맙시다. 그것이 바로 우상 숭배인 것입니다.
우리는 스데반의 죽음처럼 죽어 가는 모습을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그 분이 요구하시는 거룩으로 한발 한발 가까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제31장 그리스도인의 고난 (3) 상처와 가계에 흐르는 저주?
(롬8:1-2)
1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2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여러분 각자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하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난 두 주에 걸쳐서 왜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고난이 필요하며 하나님은 왜 막아주시지 않는가? 그리고 피할 길이 정말 있는 것인가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결론은 고난과 고통과 시험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유익한 것이며 그 모든 것이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순종하는 자로, 거룩한 자로 만들어 가시기 위함임을 알았습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를 믿으면 만사형통이요 모든 질병이 치유되어야 하는 그런 가르침은 성경이 말하는 바와는 너무 다른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기독교는 절대 이 땅에서의 풍요로운 삶을 위한 수단과 방법으로 쓰여 지는 요술 방망이가 아닌 것입니다.
(고전4:7~16) 7 누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별다르게 보아 줍니까? 여러분 각자가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모두가 받은 것인데, 왜 받지 않은 것처럼 자랑합니까?
8 여러분은 벌써 배가 불렀습니다. 여러분은 벌써 부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를 제쳐 놓고 왕이라도 된 듯이 다스리려 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진정 왕처럼 다스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여러분과 함께 왕처럼 다스리면 좋겠습니다.
9 그러나 우리는 세계와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하나님께서 사도들인 우리를 마치 사형수처럼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로 내놓으신 것 같습니다.
10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지만,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약하나, 여러분은 강합니다. 우리는 천대를 받고 있으나, 여러분은 영광을 누리고 있습니다.
11 우리는 오늘 바로 이 시각까지도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얻어맞고, 정처없이 떠돌아다닙니다.
12 우리는 우리의 손으로 일을 하면서, 고된 노동을 합니다. 우리는 욕을 먹으면 도리어 축복하여 주고, 박해를 받으면 참고,
13 비방을 받으면 좋은 말로 응답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쓰레기처럼 되고, 이제까지 만민의 찌꺼기처럼 되었습니다.
14 내가 이런 말을 쓰는 것은, 여러분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사랑하는 자녀들과 같이 훈계하려는 것입니다.
15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 만 명의 스승이 있을지 몰라도, 아버지는 여럿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 여러분을 낳았습니다.
16 그러므로 내가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은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위 구절을 말씀처럼 많은 사람들이 배부르며 부요 하며 왕 노릇하기위해 예수를 믿는 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말합니다. 예수 믿는 자들은 마치 하나님께서 죽이려고 미말에 두신 자들처럼 여김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방법은 썩어지는 밀알로 살아가는 것이지 세상에서 성공을 이루어 내어“봐라 예수 믿으니까 이렇게 잘 살게 되고 성공하게 되지, 그러니까 예수 믿어!” 이렇게 자신을 증명하여 하나님을 증거 하는 그런 일은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증명해서 전도를 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탄에게 받은 시험이 뭡니까? “너 하나님의 아들이잖아, 멋있게 돌로 떡을 만들어 봐” “네 신성을 한번 보여 봐”입니다. 자기가 능력이 많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맞다 면 예수님은 당연히 그렇게 하셨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안 하십니다. “너 하나님의 아들이잖아 멋지게 성전에서 뛰어 내려 봐, 그럼 천사들이 수종들 거 아냐” 예수님은 안 하셨습니다. 그 대신에 어떤 것을 보여주십니까? 십자가를 지고 죽어 버리십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가 가신 길이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야할 길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영원한 약속과 영광은 내세적인 것이지 현세에 받을 것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여호와 하나님을 삶으로 나타내야 하는 선지자요 제사장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죽어 가는 영혼들의 구원 사역에 우리를 그렇게 부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인생을 통해 우리의 거룩을 이루어 가면서 아울러 그 길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도구로도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최초로 그 구원의 도구로 살다 가신 예수, 먼저 그 제사장의 삶, 선지자의 삶을 살다 가신 그 예수가 사신 그 삶을 우리도 동일하게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겠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가 가신 그 길을 그대로 가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에게 그러한 예수의 고난이 없다면 여러분이 복음과 아무 관계없이 살아가고 있거나 가짜임이 분명한 것입니다.
우리가 입 다물어 버리면, 그리고 세상에게 “난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처럼 살게” 하고 꼭꼭 숨어 버리면 고난이 있을 턱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올바른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인생관이나 가치관 세계관이 세상 사람들하고는 달라야 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이 결코 우리의 신앙을 대변하지 않음을 우리는 익히 성경을 통해 배워서 알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행복한 삶을 살게 되고 예수를 잘 못 믿는 사람들은 뭔가 고난과 고통과 시험에 처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고 예수님도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음을 우리는 성경에서 확인했습니다.
하나님은 고집스럽게 하나님의 백성들만을 사랑하십니다.
이 역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역사와 우주의 경륜을 하나님의 백성들의 천국 입성을 향해 끌고 가십니다. 전 세계가 아니 이 우주가 전부 그리스도인들의 장성한 분량으로의 성장을 위해 움직이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왜 망했습니까? 의인 열 명이 없어서 망했습니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의 왕의 실정이나 정치가들의 부패 등에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그 곳에 하나님의 백성, 의인 열 명이 있느냐 없느냐가 하나님에게는 중요하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만 바라보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세상을 경륜해 가십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는 침 삼킬 여유도 안 주시고 불꽃같은 눈으로 지켜보시며 그들의 거룩을 챙기시는 것입니다. 거기에 고난이 아주 유용한 도구로 쓰인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고통과 고난과 시험이 우리에게 오히려 유익인 것이라면 여러분이 그러한 고통과 고난과 시험을 통해 받았다고 하는 “상처”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내적 치유”다 뭐다 해서 많이 들 관심들을 가지는데 저는 정말 거기에 대해서 할 말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psychologically 우리의 상한 감정을 다스리고 다독거리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마치 그런 상처는 우리의 삶에 전혀 불필요한 것이었는데 지인들의 학대나 무관심으로, 또 내가 예기치 않았던 사건 등으로 나의 삶에 덤으로 얹혀 진 짐으로 생각하는 것은 커다란 오산인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 우연적이고 우발적인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관계하시는 성도의 삶에 우연(偶然)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의 구원은 언제 계획 된 것입니까? 창세전에 계획된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천국에 이르는 길까지 누구의 손에 붙들려서 가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하나님 백성의 거룩에 해가 되는 것은 당연히 막으시겠지요? 그리고 그 거룩을 만들어 가시는 데 필요한 것은 허락하실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 삶의 모든 것은 여러분의 선을 만들어 가시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 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을 해 나가시는 분이신지 아는 사람이면 여러분이 상처로 괴로워해야 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감사해야 할 일들이 바로 여러분이 갖고 있는 상처의 정체인 것입니다.
인간은 대부분 과거와 미래 속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If only""만일 과거에 그 일만 없었다면” “만일 미래에 그런 일이 일어나면”하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CS Lewis가 쓴 ‘스쿠르 테이프의 편지’라는 책에서 고참 마귀 스크루 테이프가 웜우드에게 인간들을 현재에 눈을 두지 못하게 과거와 미래로 붙들어 두라고 충고를 하겠습니까?
요한복음 11장에 죽은 나사로의 동생들인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을 청했을 때 일을 기억해 보세요.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와병 소식을 들으시고도 이틀을 더 유하시고 일부러 나흘 뒤에 가셨습니다. 그랬더니 마리아와 마르다가 예수님께 원망 섞인 말을 합니다.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다면, 우리 오빠가 죽지 않았을 텐데” If only" 바로 그게 인간들에게는 상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시선을 과거에서 현재로 돌리십니다.
“네가 믿기만 하면 지금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그게 상처에 대한 해결책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정확한 복음을 알게 되면 상처는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으로 화하게 될 것이란 말입니다.
나사로가 죽은 것은 분명 고통이요 고난이며 시험입니다. 거기에다 믿었던 예수님이 늑장을 부리셔서 나사로가 죽었다는 서운함과 미움이 상처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오시자 어떤 일이 일어났나요?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고통과 고난과 시험은 예수님 안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 너무 가난해서 못 먹고 못 입고 자란 어떤 흑인 소년이 수차례 감옥에 드나들었습니다.
사회의 어느 곳에서도 그를 받아주지 않았고 스스로 자격지심에 어떤 자리에도 나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예수를 만났고 그는 그렇게 어리석고 못된 자신의 과거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격했으며 그의 과거와 현재를 주관하신 하나님을 자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그의 어린 시절 가난과 학대와 투옥은 그가 예수를 믿게 되자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데 쓰임을 받는 것이 되었던 것입니다.
요셉을 보세요. 요셉만큼 상처가 많은 자가 어디 있습니까? 요셉은 어린 나이에 가족들에게 팔려서 애굽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에게조차 따돌림을 받은 듯한 느낌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기 위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거절했음에도 하나님은 요셉을 감옥에 넣으셨기 때문입니다. 감옥에서 그는 떡 맡은 관원장과 술 맡은 관원장의 꿈 해몽을 해주고 술 맡은 관원 장으로부터 나가게 되면 자신을 구해 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또 배신을 당합니다. 술 맡은 관원 장이 석방되어 나가서는 요셉을 까맣게 잊어버린 것입니다.
요셉이 언제 “형들이 나를 팔지만 않았으면” “보디발의 아내가 나를 이렇게 감옥에 넣지만 않았으면 ” “술 맡은 관원장이 나를 잊지 않고 꺼내 주기만 했으면” 한 적이 있었나요?
그는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했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었습니다. 그런 요셉의 삶을 형통 하다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국어사전의 만사형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하나님의 위대한 종으로 삼으시기 위해 그를 감옥에도 넣으시고 섭섭한 일을 당하게도 하시고 가족들로 부터도 버림을 받게 하시는 그 모든 일이 ‘만사형통’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만사형통 정말 원하세요? 아니죠? 여러분이 원하시는 만사형통은 내가 원하는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아닙니다. 성경의 만사형통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나의 성도됨을 만들어 내시기 위해 나의 전 생애의 모든 사건들과 상황들을 주관해 가시는 하나님의 그 배려와 손길을 전부 만사형통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만일 그 때 그런 일만 없었으면’하고 자꾸 과거에 집착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과거에 대한 집착은 정말 용기 없는 행동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그런 과거와 그 고통에 집착함으로써 우리 내면의 어떤 필요들이 충족되나요? 대개 책임전가, 변명, 현재의 실패에 대한 그럴듯한 이유 이런 것들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과거의 상처에 집착함으로 자신을 합리화하는 아주 나약하고 비겁한 짓입니다.
“내 성격이 이렇게 난폭한 것은 과거에 아버지한테 많이 맞아서 그래”
“내가 이렇게 도둑질을 하게 된 것은 과거에 내가 너무 못 먹고 자라서 그래”
“내가 바람을 피운 것은 우리 부모의 무절제한 생활 때문에 그래”
“내가 이렇게 늘 우울한 것은 행복하지 못한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이야” 이런 핑계거리를 찾는 것이 과연 올바른 치료방법이 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착가하지 마세요. 그 모든 것들은 다 죄 속에서 태어난 우리 죄인들의 죄 성 때문이지 과거의 어떤 상황과 처지와 사건 때문만은 아닌 것입니다. 왜 다른 사람에게, 다른 사건들에 자신의 죄 성에서 기인한 더러운 것들을 뒤집어씌우려고 하세요?
사람들은 그렇게 과거에 집착함으로 은근히 거기에서 자기 도피를 하며 현실 도피에 필요한 근거를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고의적으로 과거의 상처에서 빠져 나오려 하지 않기도 합니다.
psychology 심리학에서 어떻게 그 상처를 다루는지 아세요? 요즘 유행하고 있는 내적치유 집회 같은 곳에 한 번씩 가본 분들은 아시지요? 먼저 그들은 분노나 열등감, 우울함, 거절감 등이 있는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서 첫 번째로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게 합니다. “나는 분노를 일으키는 사람이다”
“나는 늘 우울하다” “난 늘 거절 감에 시달린다.”왜냐하면 사람들 중에는 자신을 행복하고 강한 사람으로 위장하기 위해 그러한 증상들을 감추곤 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나를 그렇게 만든 과거의 어떤 사건이나 사람을 찾는 것입니다. 과거에 분노를 일으키게 할 만한 사건이 있었는가? 나를 열등감에 젖게 할 만한 환경이 있었는가? 나를 우울하게 만들 만한 인물이 있었는가?
그리고는 세 번째로 지금 나의 것처럼 되어 있는 그러한 증상들은 과거의 그런 인물, 그런 사건 때문이었다는 것을 주지시키고 그 과거의 인물과 사건들에 책임전가를 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는 거기서 빠져나오는 것이지요. 참 비겁한 방법입니다. 정말 그렇게 해서 자신의 상처로 인한 증상들이 해결될까요?
그런 류의 방법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누구인가? 귀신 론을 가르치고 있는 어떤 이단들입니다 .
그들은 모든 병이나 어려움 들이 다 귀신의 탓이라고 돌리지요? 그래서 감기 귀신, 치질 귀신, 섭섭 귀신 모두 귀신 탓으로 돌려 버립니다. 아닙니다. 그러한 것들은 모두 우리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닥친 것이지 귀신들이 우리에게 없던 것을 억지로 만들어다가 던져 놓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책임 전가로 그런 상처들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결이 가능할까요?
당연히 예수, 복음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원래 우리가 그런 인간임을 인정해야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자신이 자기 삶의 왕이 되어 사는 인간들의 삶은 그렇게 우울하고, 불행하고, 파괴적이며, 슬픈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건 어느 누구의 책임이랄 것도 없이 모두 다 아담 안에 있는 우리 자신의 죄 때문인 것입니다. 과거의 상처 때문에 과거의 어떤 인물 때문이 아니라 원래 우리는 그런 악한 존재임을 인정해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울러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는 것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른 이들과 나를 구별시켜 주셔서 이렇게 구원해 주셨음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서 날더러 자녀라 칭해 주시고 자녀다운 삶에 대해서 알려 주셨으므로, 그리고 그렇게 살 수 있는 능력도 이제 공급해 주셨으므로 난 더 이상 분노를 일으킬 수 없으며, 난 더 이상 우울하지 않으며 난 더 이상 거절 감 같은 것 느끼지 않는 사람이 되어 가야함을 확인하는 길밖에 없는 것입니다. 누군가 나를 목숨 걸어 사랑해 주는 이가 있다는 확인 이외에 우리가 상처라는 것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만이 우리를 우리의 상처에서 건져낼 수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 예수님보다 고난과 고통과 배신과 거절을 당하신 분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그 분은 모든 것을 다 극복하시고 오직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셨습니다. 그 분이 우리의 거절 감이 되시고, 우리의 눈물이 되시고, 우리의 불행이 되시고, 우리의 배신 감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몽땅 태워 버리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떠난 자로서의 거절 감, 배신 감, 슬픔, 눈물, 분노 등에서 해방된 사람들인 것입니다. 바로 그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여러분은 과거에 살고 계시면 안 됩니다. 아울러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를 불안 속에서 추측하지도 마십시오. 사람들의 걱정의 90%가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에 관한 것이라지요? 왜 그런 바보 같은 삶을 사십니까? 현재를 사십시오. 현재의 나가 어떤 존재이며 나는 어떠한 분의 손에 붙들려 있는 것이며 그 분의 손에 붙들려 있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생각하십시오. 오늘 하루를 그냥 성도로서 열심히 사시면 됩니다. 왜 과거와 미래에 집착하십니까? 여러분은 예수를 치료자로 삼아 그 분에게 달려가 고침을 받으시면 되는 것입니다.
결혼한 사람들이 간혹 이런 고민들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저 남자하고 결혼을 안 하고 아무개랑 결혼했다면 지금 떵떵거리며 행복하게 사모님 대접받으며 잘 살았을 텐데”
“내가 저 여자랑 결혼 안하고 그 때 그 여자랑 결혼했더라면 지금 말 잘 듣는 아내와 행복하게 하고 싶은 것 다하며 살았을 텐데” 뭐 이런 꿈들을 꾸지요? 여러분 꿈꾸지 마세요. 그건 그야말로 꿈입니다. 여러분이 성도가 맞다 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자녀로 만드시기 위해 가장 적합한 짝을 주셨다는 것을 인정하셔야지요? 여러분 사랑에 대해 무지갯빛 환상을 품지 마세요? 아무리 못 난 사람도 삼 개월이면 정이 드는 것이고 아무리 훌륭하고 예뻐 보이는 사람도 삼 개월이면 싫증이 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전부 남의 떡이 커 보이니까 그런 배부른 꿈을 꾸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부러워하시는 그 사람들도 주님을 모르면 똑같이 불만 속에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훌륭한 의사이셨습니다. 어느 날 정신과 닥터인 친구를 방문하기 위해 정신 병원을 찾았다고 합니다. 마침 친구가 어떤 환자를 상담하고 있었습니다. 그 환자는 심한 우울증 환자였습니다. 목사님이 친구 분에게 왜 저 사람은 저렇게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는가를 물으셨답니다. 그 친구 분 왈(曰) 정말 사랑하는 여자가 결혼식 며칠을 앞두고 도망을 가서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해 버려서 그 충격으로 저렇게 되었다고 하시더랍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옆 병실에 같은 증상의 남자가 입원을 해 있었다지요. 그래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께서 저 남자는 왜 저렇게 되었느냐고 물으셨답니다. 그랬더니 그 친구 분이 말씀하시기를 ”바로 저 남자가 옆 방 남자가 사랑하던 여자와 도망쳐서 결혼한 남자라네, 그런데 그 여자가 하도 바가지를 긁고 못 살게 굴어서 저렇게 심한 우울증이 걸린 것이라네.“하시더랍니다. 참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다.
떠나버린 여자를 못 잊어서 우울증에 걸린 사람 옆방에 그 떠나간 여자에게 괴롭힘을 받아 우울증에 걸린 남자가 들어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고침을 받기 전에는 늘 나의 유익을 위해 상대방의 희생을 강요하는 흡혈귀 같은 삶을 살게 되어 있는 자들입니다. 막연한 기대나 후회로 자신의 상처를 키우지 마세요.
‘과거에 그 일만 없었더라면, 과거에 그 일만 성공했더라면‘이렇게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장미 빛 꿈들을 가지고 오히려 자신을 더 괴롭히는 사람들 이 곳에 계시다면 어서 꿈 깨십시오. 오히려 과거에 그 일이 없었더라면 여러분은 더 험한 지경이 되었을지도 모르고 과거에 그 일이 이루어졌더라면 여러분은 허랑방탕한 사람이 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만일 예수님께서 여기 계셨다면”이라고 원망하는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너희가 믿으면”이라는 대 전환의 방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만이 우리를 그 과거의 상처로부터 자유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역사상 가장 어두운 금요일을 취하셔서 가장 밝은 부활의 날인 주일로 바꾸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이 그 어두운 과거의 상처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릴 적 부모로부터 학대를 당한 사람들이 공통점이 자신의 가치를 아주 낮게 취급하여 자의식을 저하시킨다는 심리학의 보고가 있습니다. 이곳에 혹시 그런 사람들 계십니까? 여러분의 진짜 부모이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 부르시며 사랑해 주신다는 것을 여러분 아십니까? 그걸 모른다면 여러분은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자기 독생자를 주고 바꾸실 정도로 우리를 가치 있게 취급해 주셨습니다. 그 사실을 믿으세요? 그럼 그 상실된 자존감에서 지금 즉시 일어나셔야지요? 우리 진짜 부모님은 우리를 목숨 바쳐 사랑하신다니까요?
혹시 커다란 배신을 당해 씻지 못할 상처를 받은 사람이 있으십니까? 그래서 도저히 그를 용서 하실 수 없어 분노와 배신감에 아파하시는 분 계세요? 그러면 자기를 돌로 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인간들을 향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신 예수를 생각하십시오. 우리는 그 분 안에서 구원을 받은 자들이며 이미 그 분 안에서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한 자가 되어 있는 자들입니다. 그 예수님보다 더 큰 배신을 당한 사람 있습니까? 우리는 그러한 분노와 배신감 속에서 용서와 사랑과 인내를 배워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에서 사용되는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를 가르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러한 상황들을 허락하셨고 그 본보기로 하늘의 왕이신 예수의 삶, 용서의 삶, 사랑의 삶을 보여주시지 않았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상처로 간직하고 괴로워 할 것이 아니라 거기서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라 용서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니 우리는 이미 예수 안에서 용서 한 자가 되어 있기에 우리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모두다 예수 안에서 풀려야 합니다. 예수 안에서 자유하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예수를 공부하셔야 하고 예수를 배우셔야 하고 예수를 추구하셔야 합니다. 복음을 이해하는 것. 그것만이 상처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내적 치유나 심리학 치료를 받아보신 분들은 MBTI라는 것을 아시지요? Kartherine briggs 와 Isabel briggs Myers 가 칼융의 심리 유형론을 근거로 보다 쉽고 일상생활에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고안한 자기 보고식 성격 유형 지표를 말합니다. 이 MBTI에 근거해서 누구는 J의 성향이 강하다. 누구는 P의 성향이 강하다. 누구는 II 내성적이다. 누구는 E 외향적이다. 이런 것으로 상대방을 이해함으로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고 하여 치료에 앞서 행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그러한 자기 파악이나 성격에 관한 지식이 여러분의 분노를 다스려 주던가요? 정말 그 지식이 여러분의 상처를 경감시켜주던가요? 그렇게 타인과 심리적 선호의 차이가 있음을 아는 것이 상대를 이해하게 되고 여러분의 상처가 치유가 되던가요? ‘그는 원래 어지르기 좋아하고 욱하는 성질이 있고 내성적이라 나에게 그렇게 대했구나?’ 그걸 아는 것으로 정말 여러분의 상처가 치유되던가요? 아님 남편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데 ‘저 사람은 INFP라 저런 거야, 그러니까 내가 이해해야지’ 이게 되던가요?
교회에서 어떻게 세상 심리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심리학을 이용해서 인간의 상처를 치유한다고 돌아다니면서 세미나를 하고 다닙니까? 그건 정신과 의사들이나 심리학 상담하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고 목사는 예수로 말미암은 완전한 회복만을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정신과 의사들은 뭐 먹고살라고 목사가 거기까지 손을 댑니까? 그리고 목사들이 그렇게 시간이 많습니까? 그러니까 어떻게 해서든 사람들한테 유식한 거 티내고 싶고, 사람들이 이 땅에서 해결하고 얻고 싶은 것들 해결해 줍네 하면서 사람들 비위 맞춰주고 하면서 분명히 그런 얄팍한 방법으로는 치유되지 않을 것을 잘 알면서도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불쌍한 사람들을 농락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내적치유 한다고 돌아다니는 사람들 중에 온전히 치유된 사람을 못 본 것 같아요. 자기들에게도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그런 방법으로 인간의 상처를 치유한다고요? 천만의 말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복음만이 인간의 모든 상처를 치유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독하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는 무언가 부족하다는 망발도 하지 마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치유되는 것이 있고 내적 치유로, 심리학으로 치유해야 할 것이 따로 있다고 우기지도 마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의 모든 저주와 상처들이 모두 해결이 된 것입니다. 그걸 배우세요.
우리가 받은 고통이나 고난 그로 말미암아 생긴 상처 이 모든 것은 인간의 타락 즉 죄로 말미암은 것 입니다. 죄를 해결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아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로 만들어져 가는 방법밖에는 우리가 치유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열심히 성경 읽고 배우고 기도하고 찬양하며 시선을 내세로 돌려 천국의 소망을 바라보는 만큼 이 땅에서의 힘들었던 것이 희석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바보 같은 논리가 한국 교계를 강타한 적이 있는데 그것이 소위 “가계에 흐르는 저주”라는 이야기입니다. 조상의 죄가 후손들에게 유전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입니까? 참 너무나 어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곳 LA에서도 어떤 큰 교회 목사님이, 그 것도 장로교 목사라는 사람이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주제로 세미나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전부 미쳐 버린 것 같아요. 거기에 목사들이 수백 명씩 앉아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오늘 날 기독교의 현실이, 목사들의 수준이 그 정도입니다.
메릴린 히키라는 이 무당 같은 여자가 쓴 무식한 책이 한국 교계를 강타했었습니다.
미국 풀러 신학교에서는 한국의 가계에 흐르는 저주의 권위자 이윤호씨의 스승인 크래프트 교수라는 사람이 강의를 하면 그 강의실이 한국 목사들로 넘쳐난다고 합니다.
설교자들이 설교를 준비할 때 그 설교할 구절을 헬라어나 히브리어 원어로 먼저 찾아서 읽어보고 거기에 쓰인 단어들의 시제나 격 같은 것을 연구하고 또 그 단어들의 용례를 성경 전체에서 찾아보고 그 구절을 그 책에서 어떤 부분에 있으며 성경 전체에서는 어떤 부분을 차지하는지를 찾아내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고자 했던 말씀의 진의를 밝히는 것을 exegesis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과는 상관없이 자기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 성경 구절들을 끌어다 쓰는 것을 우리는 eisgesis라고 하지요.
많은 분들이 exegesis를 잘해서 제대로 잘 가르치고 계시지만 간혹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전하기 위해 엉뚱한 성경 구절들을 끌어다가 설교를 만들어 내는 경우를 왕왕 봅니다.
메릴린 히키가 쓴 이 “가계에 흐르는 저주”라든가 자타가 공인하는 치유의 대가 이 모 목사님의 책 같은 것들을 보면 대부분 후자의 경우들입니다. 성경은 많이 들 읽은 것 같은데 다른 뜻으로 알고들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 성경구절을 끌어다 쓰고 있기는 한데 전체 문맥에서 이해한 구절이 아니라 그 몇 문장만 떼어서 그럴듯하게 맞추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즐겨 쓰는 구절이 출애굽기 20장의 제 2계명 뒤에 붙은 말씀입니다.
(출20:5-6) 5 너희는 그것들에게 절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 나, 주 너희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그 죄값으로, 본인뿐만 아니라 삼사 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린다.
6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수천 대 자손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
이것을 글자 그대로 해석해서 아비의 죄가 삼사 대까지 자식들에게 내려가게 되고 아비가 하나님께 순종한 자들은 천대까지 복을 받는다고 가르친다는 것은 정말 유치원 수준도 안 되는 성경 해석입니다. 정말 예수를 믿었는데도 우리 조상의 저주는 후손들의 피를 타고 계속되어 내려오는 것일까요? 그래서 그 조상의 저주를 끊어 버리지 않으면 예수를 믿고도 계속해서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 정말 기독교에서 말하는 것입니까? 그건 무당들이 즐겨 쓰는 상술입니다. 무당들이 고액의 굿을 주선하기 위해 자기를 찾아온 사람들을 겁주기 위해 하는 말을 예배당에서 하고 있으면 어쩌자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렇게 값어치 없는 것인가요?
가계에 흐르는 저주는 예수님의 십자가로도 못 끊어 버리는 것입니까?
그럼 호세아서는 찢어버려야 합니다.
로루하마라 한 그곳에서, 로암미라 한 그곳에서, 내가 다시는 너희에게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리라, 이제 너희는 더 이상 나의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너희는 나의 사랑하는 백성이 될 것이라는 그 말씀은 없애 버려야지요. 조상의 저주가 후손에게도 계속 타고 내려온다면, 그래서 그 저주를 끊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이 약속은 헛된 약속 아닙니까? 이렇게 그들의 주장이 옳은 것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너희의 모든 죄가 사해지고 나의 사랑하는 자녀가 될 것이라는 호세아서는 찢어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렘31:27-30) 27 "그 때가 오면,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뿌리겠다. 나 주의 말이다.
28 내가 전에 그들을 뽑아내고 부수고 무너뜨리고 멸망시키고 재앙에 빠뜨리려고, 감시를 늦추지 않았으나, 이제는 내가 그들을 세우고 심으려고, 감시를 늦추지 않겠다. 나 주의 말이다.
29 그 때가 오면, 사람들이 더 이상 '아버지가 신포도를 먹었기 때문에, 자식들의 이가 시게 되었다'는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30 오직 각자가 자기의 죄악 때문에 죽을 것이다. 신포도를 먹는 그 사람의 이만 실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기 신 포도를 먹었다고 자녀의 이가 시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요. 여러분의 조상에게 내린 저주가 여러분을 동일하게 붙들고 있다는 생각은 버리십시오.
하나님께서 천대까지 복을 내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1000이라는 숫자를 써서 그 은혜의 풍성함이 얼마나 크신 것인지를 표현 한 것입니다. 당시 고대 사람들에게 가장 큰 수하면 얼른 떠 오른 것이 1,000이었으니까요? 우리가 어렸을 적에 제일 큰돈은 백 만 원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같은 식으로 당시 고대인들은 1,000이라는 숫자를 가장 크고 풍성한 것을 가리킬 때 주로 썼으니까요. 그리고 하나님의 저주가 3,4대까지 흐른 다는 것은 1,000이라고 표현된 하나님 은혜의 풍성함이 하나님이 내리시는 저주보다 얼마나 더 큰 것인지를 나타내는 문학적 표현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다윗이 그런 큰 죄를 지었는데 어떻게 그 후손에서 솔로몬이 나오고 예수님이 나옵니까? 저주는 3,4대까지 흐른다면서요?
그리고 예수를 잘 믿는 가정에서 태어난 후손들은 정말 천 때까지 다 복을 받아서 예수를 믿게 되던가요? 아니잖아요? 여러분 주변에 진짜 천대나 계속해서 복 받은 가정이 있으세요?
예수를 안 믿고 평생 죄만 짓다가 죽은 부모 밑에서 자란 사람들은 정말 예수 믿을 자격도 주어지지 않는 것입니까? 아니 예수를 믿었다 할지라도 그 부모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저주를 끊어내지 않으면 뭔가 모자란 그리스도인으로 치시는 것입니까?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입니까? 도둑 집안에서 도둑이 많이 나오는 것은 보고 배운 게 그것밖에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부부관계가 원만치 못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때로 부모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보고 자란 것이 그래서 그런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가계에 흐르는 저주로 책임 전가 시키지 마세요.
그네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질병이 가계에 흐르는 저주 때문이라면 병을 앓다간 수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분노해서 무덤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가계에 흐르는 저주 때문이라고 제발 핑계대지 마십시오. 우리가 저지르는 죄는 모두 우리의 죄입니다. 예수를 믿고도 계속되어지는 질병과 어려움을 맞닥뜨리면서 더 이상 눈물과 아픔과 상처가 없는 천국을 더욱 소망하게 되는 것이지 예수님의 십자가가 뭔가 부족하기에 아직 남겨 놓은 저주가 아니란 것입니다.
치유나 가계에 흐르는 저주나 이런 것들을 이야기하면서 가장 치사한 것이 책임 전가입니다. 자기가 감당해 내야 할 것을 왜 다른 사람과 조상과 다른 사건과 상황으로 책임을 돌려버립니까? 그것도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죄의 본질에서 나온 것입니다.
만일 이 중에 누군가가 지옥에 간다면 그 사람은 가계에 흐르는 저주, 조상의 죄 때문에 지옥 가는 게 아니라 자기 죄 때문에 가는 것입니다.
정리를 하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고난과 고통과 시험이 필연 적이며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피할 길을 함께 주십니다. 피할 길이란 그 문제에서 도망갈 수 있는 길이 아닌, 그 시험에 낙방하여 하나님의 분노를 격발케 하지 않을 수 있는 순종의 길이 피할 길이라 했습니다. 그 피할 길로 피해 승리를 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스데반의 마지막 모습처럼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패배의 모습으로 비쳐 질 수도 있다는 것도 꼭 기억하세요.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순교를 각오하고 순종하는 길이 피할 길이므로 우리는 우리 주변에 있는 어려움을 당하는 형제자매들의 상황이나 겉모습만을 보고 그 사람의 신앙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했지요?
그리고 우리의 삶에 닥쳐온 고난과 고통과 시험은 반드시 우리의 거룩의 완성에 필요한 것이므로 그것을 상처다 저주다 하여 괴로워하고 주저앉아 있으면 안 되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의 교훈으로 삼아 성숙의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은 하나님이 나의 생에 보내주신 사람막대기 인생 채찍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 모든 과거의 어려움들을 내 삶에서는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것들로 싸잡아 원망하지 말고 꼭 필요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십시오.
가계에 흐르는 저주 같은 것은 없습니다. 무식한 무당들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마세요. 타락한 인간들에게 쏟아진 저주는 하나님의 위대한 때가 찬 경륜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다 해결되었고 여러분은 이제 자유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때로 고난이, 고통이 찾아 올 때 그 것을 거룩을 향한 성숙의 계기로, 화(禍)를 복(福)으로 선용할 수 있는 진짜 실력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성경 구절 몇 구절을 찾아서 함께 읽고 그리스도인의 고난의 이야기는 오늘로 마치겠습니다.
(롬8:1-2) 1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2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여러분 각자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하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골2:13-15) 13 또 여러분은 범죄와 육신의 무할례로 죽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14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불리한 조문들이 들어 있는 빚문서를 지워 버리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박아, 우리 가운데서 없애 버리셨습니다.
15 그리고 모든 통치자들과 권력자들의 무장을 해제시키셔서(또는 '통치자들과 권력자들에게서 지위를 빼앗으시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에 포로로 내세우심으로써,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삼으셨습니다
(고후5: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고후5:19) 곧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과를 따지지 않으시고, 화해의 말씀을 우리에게 맡겨 주심으로써,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와 화해하게 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제32장 죽음으로 나타나는 성도의 삶
(고후4:10-12)
10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11 우리는 살아 있으나, 예수를 위하여 늘 몸을 죽음에 내맡깁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의 죽을 몸에 나타나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12 그래서 우리에게서는 죽음이 힘을 떨치고, 여러분에게서는 생명이 힘을 떨칩니다.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성탄절은 언제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부활절은 정확하게 닛산월 유월절 다음 첫 안식일 다음날입니다. 안식 후 첫날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오늘이 바로 유대인들의 달력으로 닛산월 유월절 안식일 다음 날입니다. 성탄절도 마찬가지이지만 부활절도 어떤 특정한 한 날만을 정해서 유난을 떠는 것은 자칫 형식주의로 흐를 수 있어 제가 별로 유난을 떨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성도들에게는 1년365일이 부활절이 되어야겠지요. 그러나 잘 잊어버리는 우리 현대인들에게 일 년에 한번이라도 부활의 참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이 된다면 아주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부활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정리를 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가져다주는 것임이 확실합니다.
지난주에 우리 새 가족 환영 팀 팀장이신 강 성화 집사님 아버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 기도하던 암으로 투병중이시던 황재희 집사님도 돌아가셨습니다. 지난 목요일에는 저와 아주 친했던 대학 동기가 과로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서울대학 안에서도 아주 뛰어난 천재 소리를 들었던, 모든 것을 다 가졌던 친구였는데 그렇게 황망히 가고 나니까 제가 참 서운했습니다. 예수를 안 믿고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난주 내내 죽음에 대해서 참 많이 생각을 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죽습니다. 인간은 죽는 즉시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어져 살게 됩니다. 어떤 영혼도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을 피해서 구천을 떠돌 수는 없습니다. 구천을 떠도는 원귀 이야기, 장화홍련이야기 같은 것은 다 허구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죽는 즉시 하나님의 백성들은 천사가 수종을 들어 하나님 나라로 모시고 올라가고 죄인들은 지옥으로, 멸망의 불길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몇 년 전에 죽은 귀신을 본다든가 가위를 눌린다든가 하는 것은 지금 사탄에게 속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참 안타까운 것은 살아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반드시 죽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죽음에 대한 생각을 회피하는가? 인간은 죽음을 나쁜 것이고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형벌이고 악한 것이며 공포를 느끼게 하는 무서운 것이라고 무의식중에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오늘은 심리학을 많이 인용하여 설교를 할 것입니다. 어떤 분은 평소에 기독교 안에 들어온 심리학에 대해 과잉 거부감을 보이던 우리 목사가 왜 갑자기 심리학 이야기를 하는가하고 의아해 하실 분도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해는 마세요. 제가 평소에 심리학이나 철학을 몰매를 친 것은 성경을 심리학이나 철학으로 풀려고 하는 어떤 분들의 몰지각한 행동을 비난한 것이지, 심리학이나 철학 자체가 나쁜 것이라고 말씀드린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학문은 다분히 하나님의 일반 은총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학문들은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오해하지 마시고 열심히 공부하세요.
심리학이 이야기하는 바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의식과 무의식이 있습니다. 의식은 무의식이라는 빙산의 한 조각이라고 말할 정도로 인간이 인식할 수 없는 무의식은 큽니다. 사실 인간은 그 무의식에 의해 더 많이 지배를 받습니다. 그런데 이 무의식은 사실(실제행동)과 소원(wish)의 식별을 못합니다.
그래서 마음에 음흉한 생각을 품으면 그 사람의 무의식은 이미 간음을 한 것만큼의 죄책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저 사람이 죽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면 이미 무의식은 그 사람을 죽인 것만큼의 죄책감을 무의식 속에 저장합니다. 히브리인들이 참 대단한 것이 심리학이나 의학이 오늘날처럼 발달하지 않았을 그 옛날부터 그들은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따로 떨어뜨려서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지요? 그래서 예수께서 오셔서”마음에 음흉한 생각만 품어도 너는 이미 간음한 것이다“라고 하신 의미가 그들의 이러한 사고 때문이라고 우리는 배웠습니다.
아기 때는 무의식이 자아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래서 아기 때는 엄마 아빠가 자기가 원하는 무엇인가를 안 해주면 아기는 엄마 아빠를 미워하게 됩니다. 아이가 자라서 철이 들면
왜 부모가 자기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지 이해를 하게 되지만 아기는 그 이해력이 없기 때문에 무조건 미워하는 마음이 먼저 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 미워하는 마음은 죽이는 것과 같은 맥락의 죄책감을 그 무의식 속에 저장합니다. 그러다 어떤 이유로든 부모가 죽으면 자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무의식 속에 죄책감으로 새겨집니다.
철이 들고 커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다른 이들을 변함없이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타락한 인간에게 자기 이외의 모든 인간은 미움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자기 주위에서 부모나 일가친지의 죽음을 보면 모든 인간이 무의식 속에서 죄책을 갖게 된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사람을 가장 미워했던 사람이 제일 괴로워하게 됩니다. 그것은 무의식 속에서 그 사람의 죽음에 대한 대가를 반드시 살면서 자기가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대한 책임 모면을 위해 무의식은 그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기를 간절히 소원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집트에서는 미이라를 만들어서 시체를 썩지 않게 보존했던 것이고 인디언들도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이 평소에 쓰던 것들을 부장품으로 함께 묻었던 것입니다. 얼마 전에도 황금 미이라가 거의 300구 가량 발견되었지요?
아울러 그 죽음에 자기의 책임이 있다고 무의식이 움직이기 때문에 인간들은 죽음 앞에서 자기에게 스스로 형벌을 가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베옷을 입고 머리에 새끼줄을 두릅니다. 재를 뒤집어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검은 옷을 입고 여자들은 베일을 씁니다. 베일은 수치를 가리는 것입니다. 때로는 물과 음식을 먹지 않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자기에게 처벌 (punishment)을 가하는 행위입니다. 이 죽음에 대한 업보를 내가 받을 텐데 미리 이렇게 내게 처벌을 가해서 그 업보를 모면하려는 의도가 그 많은 장례 예식에 숨어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좀 지나면 이제 인간은 분노하게 됩니다. 슬픔과 죄책감을 넘어서 이제 자기를 그렇게 괴롭게 만든 그 죽음에 분노하게 됩니다. 그 분노는 그 죽은 자를 악하게 인식하게 되고 그 죽은 자는 살아있는 자에게 악한 영향을 끼치는 자로 인식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생각이 거의 동시 다발로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 속에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죽은 사람을 보면 무섭습니다. 시체를 보면 공포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우리 죄 때문입니다. 그 인간의 죄 성이 죽음을 두려워하게 하고 망자를 무서워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똑같은 사람인데 왜 여러분은 영혼이 떠난 시체는 무서워하지요? 여러분은 왜 그 고깃덩어리를 두려워해요? 영혼이 떠난 육체는 그야말로 고깃덩어리에 불과합니다.
제가 군에 있을 때 저희 내무반에서 제 바로 밑의 상병 일병이 술을 마시다가 싸움이 붙어서 상병이 일병을 대검으로 목을 찔러 죽였습니다. 군대에서는 하극상은 큰 죄이지만 상급자가 하급자를 때리거나 죽인 것은 사실 크게 취급하지 않아요. 그 때 그 죽은 친구 부모들 성화로 부검을 하게 되었습니다. 국립과학 수사연구소에 시체 부검을 위해 그 부모님들과 부대에서 참관인으로 저와 본부 대장님이 갔었습니다. 마스크를 하나씩 줍니다. 복도에 부검을 대기하고 있는 시체들이 정육점 고깃덩어리처럼 즐비하게 놓여 있습니다. 부검의들이 4명이 들어와서 아무렇지도 않게 그 시체의 배를 배꼽 아래까지 가릅니다. 그리고 양쪽으로 그 살을 쫙 벌려놓고 내장을 하나하나 꺼내서 저울에 답니다. 그리고 머리껍질을 벗기고 전기 톱으로 해골을 쪼갭니다. 그리고 뇌를 꺼내서 저울에 답니다. 그야말로 고깃덩어리에 불과합니다. 전혀 저항능력이 없어요. 그런데 왜 인간은 무기력한 고깃덩어리인 그 죽은 자들을 두려워하지요?
바로 이런 심리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그 사자에 대한 슬픔이 분노가 되고 “악한 자”라로 여기게 되고 그 부정하고 악한 존재는 나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두렵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디언들은 죽은 사람의 장례식에 부족 남자들이 줄을 서서 하늘에 대고 화살을 쏩니다. 그들은 장례 때 영혼이 하늘에서 내려다본다고 생각하고 그 악한 영혼을 죽이는 의식을 하는 것입니다 군대에서 누가 죽으면 일렬로 서서 하늘에 대고 조총을 쏘는 것도 이러한 인디언의 의식에서 나온 것입니다.
죽음은 이렇게 모든 인간의 인식체계 안에 두렵고 악하고 부정하며 형벌로 각인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죽음은 형벌의 의미로 많이 쓰여 지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을 하셨고 그로 말미암아 창세기 5장 죽음의 장에 아담과 셋과 에노스, 므두셀라 등 많은 이들이 죽었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간과 고라도 그들의 범죄로 죽임을 당했고 이스라엘도 여호수아와 갈렙을 빼고 광야에서 죄의 대가로 죽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죄의 결과로 죽습니다. 그래서 죽음이라는 것은 성경에서도 어떤 형벌이라든지 타락하고 죄에 빠진 인간이 궁극적으로 맞이하게 될 운명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신약에 보면 어떠한 구별된 무리에게는 그 죽음의 의미가 조금 달라집니다.
(계14:13) 나는 또 하늘에서 들려 오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기록하여라. 이제부터 주님 안에서 죽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그러자 성령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그들은 수고를 그치고 쉬게 될 것이다. 그들의 업적이 언제나 그들 뒤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형벌과 업보로만 알았는데 여기서는 복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16:25)
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게다가 바울은 죽는 것을 자랑거리로 삼습니다.
(고전15:31)
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어떤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두렵고 무섭고 악한 것이 아니라 자랑스럽고 좋은 것이 되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죽음은 복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고후4:10-12)(표준새번역)
10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11 우리는 살아 있으나, 예수를 위하여 늘 몸을 죽음에 내맡깁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의 죽을 몸에 나타나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12 그래서 우리에게서는 죽음이 힘을 떨치고, 여러분에게서는 생명이 힘을 떨칩니다.
우리가 죽는 것이 어떤 유익이 있다는 것입니다.
(시116:15)
15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죽음이 복되고 귀한 것인가?
엘리자베쓰 퀴블러 로스라는 의사가 수십 년간 죽음 일보 직전의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그들의 체험을 종합해서 쓴 dying and death라는 책을 보면 임사 체험자들(near death experience)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거의 죽음에 가까이 갔다가 살아난 사람들이나 죽음 직전의 사람들이 그들의 인격과 사고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가에 대한 연구 결과입니다.
보통 임사체험 하면 유체이탈이나 천국에 갔다 왔다는 엉뚱한 체험 같은 것을 이야기합니다만 그런 것은 많은 부분 환상이나 뇌의 측 두 엽에서 일어난 환각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일본의 다치바나 다카시같은 작가가 전 세계의 뇌 생리학자와 심리학자 정신과 의사들의 임상 노트를 종합 취재해서 기록해 놓은 “임사 체험”같은 책들이 그러한 종류의 책들입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책들을 읽어보면 우리가 죽음을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데에 많은 도움을 주는 것도 사실입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그러한 류의 임사체험이 아니라, 죽음이 선고되고 죽음까지 도달하는 시간까지 그 과정에서 인간의 심리와 인격이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대한 연구결과입니다. 이 단계는 거의 모든 뇌 생리학자나 의사들이나 심리학자들이 공통적으로 동의하는 결과입니다.
첫 번째로 인간이 죽음의 선고를 받게 되면 거의 모든 사람이 그 것을 “부인”(denial) 합니다.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없어, 오진일거야” 그래서 거의 모든 말기 암 환자들이 한 병원에 진득하니 있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기 저기 계속 진단을 받으러 다닙니다.
두 번째로 그 죽음에 대한 선고가 확실해 지면 인간은 분노하게 됩니다. (anger stage)로 이동합니다. “왜 하필 나야? 나보다 저 사람이 더 못 된 것 같은데 왜 나만 이렇게 죽어야 하나?” 하는 분노의 단계에 이릅니다.
그 다음 세 번째로 거래(deal stage)단계로 갑니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내가 너무 다른 사람들 돌보지 않고 혼자 잘 먹고 잘 살려고 했기 때문에 그럴 거야” 하고 선행을 하기도 하고 “기도를 열심히 하면 낫게 해 줄 거야” 하고 신유은사 집회 같은데 좇아 다니면서 기도를 열심히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더욱더 친절하고 다정하게 대 해주면 천지신명이 나를 좋게 봐줘서 병을 낫게 해줄 것이라 생각하고 거래를 하는 단계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 거래에 실패를 하고 나면 사람은 극심한 우울증과 자포자기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 단계가 acceptance stage 수용 단계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단계입니다. 이제 그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지금까지 살며 짊어지고 왔던 인생의 무거운 짐들을 다 내려놓고 용서할 것 용서하고 사랑 못한 사람 사랑해 주고 하면서 죽음을 준비합니다. 그래서 죽음을 받아들이게 되면 그 사람의 인격이 아주 급격하게 큰 폭으로 성숙해 지는 것을 경험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final stage가 되면 급격한 인격의 성숙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마지막 단계까지 가서 아주 아름답게 죽음을 맞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고 합니다. 이 final stage에 가서 아름다운 성숙의 죽음을 맞는 사람들은 대부분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더라는 것입니다.
죽음은 이렇게 한 인간이 살아생전에 못 다 이룬 인격의 성숙을 이루는 “클라이맥스”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은 귀하고 아름다운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에서 인생을 살아내야 하는 유일한 목적이 무엇이라고 했지요?
거룩입니다. 바로 성숙한 삶을 배우기 위해 이 땅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숙의 클라이맥스가 죽음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죽음은 귀한 것입니다. 물론 죽음을 통과한다고 해서 우리 인간의 성숙이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죽음을 통과한 후에 하나님의 손에 의해 완전한 성숙이 마무리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장성한 분량의 성숙이 죽음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세상을 떠나신 황재희 집사님이 하늘나라 가시기까지 곁에서 지켜보았습니다. 정확하게 이 과정을 지나가시더라고요. 처음에는 받아들이지 않으십니다. 같이 암 걸렸던 다른 사람들은 지금 건강하게 사는데 왜 나만 이렇게 전이가 되어서 죽어야 하는가? 하고 분노하셨습니다. 그러다가 미국의 신유 은사를 받았다는 어떤 목사에게 전화를 걸어서 전화 기도도 받고 하시면서 “deal"을 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돌아가시기 5일 전에 집으로 찾아갔을 때는 정말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저렇게 죽음에 대해 삶에 대해 초연해 질 수 있는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제가 의아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동안 기대하고 의지했던 자기 자아는 완전히 부서지고 오직 절대자의 도움만 바라시면서 편안하게 죽음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그 아픈 사람에게 사기를 쳤던 어떤 아줌마를 용서하시면서 오죽 힘들면 그랬겠느냐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남아있는 사람들 걱정을 합니다. 그들이 꼭 구원을 받게 되기를 소원하셨습니다. 죽음 직전에 그 분은 아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좇아가는 그 많은 소원들과 기대들과 비전들과 꿈들과 분노와 이기심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라는 것을 아신 것입니다. 죽음을 받아들인 한 사람의 인격과 사고가 그렇게 급격하게 변하게 된다는 것을 저는 실감을 했습니다.
(엡4:13)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공동번역)
마침내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 있어서 하나가 되어 성숙한 인간으로서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침내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완전히 성숙한 자가 되기 위해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거룩한 자, 순종하는 자라고도 이야기합니다. 죽음은 그 성숙의 과정의 클라이맥스 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스캇팩 박사는 인간은 인생 속에서도 똑같이 무수히 많은 이 죽음의 단계들을 통과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삶에 닥쳐오는 작은 아픔들, 고난들, 핍박들, 그리고 자신의 죄와 악을 통해 인간은 작은 죽음을 경험하고 조금 전에 말씀드린 다섯 단계를 거쳐 성숙하게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성도의 성숙을 위해 그의 죄를 자꾸 들춰내십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자기의 죄를 남에게 떠벌리고 다닙니다.
처음에는 완강히 부인을 합니다. “아냐, 난 절대 그런 사람이 아냐, 그리고 절대 그 사람이 그랬을 리가 없어” 그런데 알아보니까 진짜입니다. 그러면 이내 “아니, 나만 그러냐?”하며 분노의 단계로 넘어갑니다. 분노를 하다가 이제 세 번째로 “거래 단계”로 넘어갑니다. “내가 평소에 그 사람한테 잘못해줘서 그런 걸 거야” 그러면서 잘 대해 줍니다. 그런데 계속 욕을 하고 다닙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극심한 우울증과 자포자기에 시달립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받아들입니다. “맞아, 내가 이런 면이 참 잘못 되었지, 고치자” 그렇게 자신을 성찰하고 반성을 하며 성숙의 단계로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물론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남에게 지적을 받고 하는 것이 힘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성숙을 위해서 우리의 죄를 자꾸 들추어내는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가 자신에 대해 절망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죄나 악까지도 선용하셔서 우리를 성숙하게 만들어 가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놓치면 안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은 부부싸움을 여러분의 성숙에 선용할 수 있습니다. 부부야 말고 상대방의 잘 못된 점이나 죄를 정확하게 집어 낼 수 있는 관계입니다. 아내나 남편이 상대방의 잘 못을 지적하면 우리는 먼저 분노하게 됩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부인의 과정과 분노의 과정과 거래의 과정과 실망과 자포자기의 과정과 수용의 과정을 거쳐서 조금씩 성숙되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 좋은 사람하고 결혼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유익이 아닙니다.
개리토마스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죄는 무서운 것이지만 죄에서 나오는 겸손은 선하다. 하나님께서 이 때문에 죄를 허용하셨다. 교만한 마음으로 우리의 허물을 돌아보면 비통하고 걱정스럽고 씁쓸한 일이지만 회개하고 겸손하게 되면 하나님께 돌아오는 영혼은 침착하고 평화롭고 확신에 차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헌신된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선과 악이 함께 있도록 허락하신다. 그들 속에 남아있는 그러한 불완전함은 그들로 하여금 겸손하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객관적으로 보게 하며 자신의 약점을 깨닫게 해서 하나님께 더욱 열심히 달려가게 한다.’
이렇게 성령 하나님의 인도 아래 있는 자들은 자신의 죄를 통해서도 한 단계 높은 성숙의 단계로 올라가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우리 자신의 죄까지도 우리에게 유익입니다. 이 역설이 여러분에게 꼭 이해가 가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죄는 아니지만 우리 인간이 도저히 핸들 할 수 없는 고통의 문제들이 있지요? 그러한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성숙을 만들어 가십니다.
우리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다든지 병에 걸린다든지 사업이 망한다든지, 여러 가지 내 힘으로는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그런 어려움이 닥칠 때 우리는 그 상황에서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무기력감의 많은 부분은 인간의 교만 때문에 나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자기 삶의 상황을 스스로 조정하겠다고 하고 그러한 힘이 있다고 착각을 하고 삽니다. 그게 아담의 최초의 죄 아닙니까?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아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겠다고 결정하고 그리고 자신에게 그러한 힘이 있다고 믿는 것, 그것이 죄의 definition 아닙니까?
하나님은 인간의 그러한 교만을 깨시기 위해 인간 스스로 핸들 할 수 없는 일들을 그들의 인생에 자꾸 던지십니다. 그래서 그 상황을 통과하면서 작은 죽음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그 작은 죽음을 통과하면서 인간의 한계를 느끼고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군에 있을 때 팀 스피릿 훈련에 나갔다가 제가 탄 차하고 미군 탱크가 정면충돌을 했었습니다. 그 때 충격으로 차 밖으로 튕겨져 나갔습니다. 얼굴로 땅에 떨어졌는데 그 뒤로 6개월을 눈을 못 떴습니다. 그 때 사고로 이 멋진 눈이 이렇게 찌그러졌습니다만 멀쩡한 사람이 앞을 못 보게 되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두려웠는지 모릅니다. 처음에는 완강히 부인했습니다. “아닐 거야, 내일이면 보일거야” 그런데 한 달이 가도 두 달이 가도 안 보입니다. 수술은 계속 실패입니다.
점자를 가르치고 안마를 가르치는 사람이 와서 재활교육을 한다고 했을 때 침대를 다 엎어버렸습니다. 분노가 불일 듯 일어났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죽자 사자 매달렸습니다.
deal을 한 것이죠. “하나님 저 눈만 보이게 해 주시면 제 전 인생을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그런데도 안 보입니다. 정말 극심한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그리고는 5개월쯤이 지나니까 그 현실이 받아들여졌습니다. 눈이 안 보이니까 그 때까지 제가 가지고 있던 꿈들이나 소원들이 하나도 소용없고 부질없다는 것이 몸으로 체감되었습니다. 그 때 참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나중에 사단장님께서 서울대학 병원으로 옮겨 주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눈을 떴는데 정말 그 전처럼 막 살지 못 하겠더라고요. 하나님께서는 제 삶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인생의 교훈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 일은 제 인생의 방향을 많이 바꾸어 주었습니다. 아마 그 때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저는 그 작은 죽음을 통과하지 못하고 좌절감과 자괴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작은 죽음들을 통해 성숙한 자로 지어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기적인 자아를 깨기 위해서 자기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는 일들을 책임으로 의무로 어깨에 얹어 주시기도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 것이 성숙의 최고봉입니다. 그래서 우리 삶에 때로는 우리 문제가 아닌 타인의 문제로 내가 아프게 하시고 고민하게 하십니다. 그러한 과정을 통과한 사람들은 그 삶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물씬 풍깁니다. 예를 들어 저는 오지에 있는 이름도 모르는 부족들의 언어를 배워서 그들의 성경을 번역해 주는 사역을 하시는 위클리프 선교회 소속 선교사님들을 만나면 절로 고개가 숙여 집니다. 동남아나 중앙아시아, 몽골의 어떤 이름 모를 부족, 아마존의 원주민촌 이런 곳에 들어가셔서 그들의 언어를 처음부터 배워서 그들이 읽을 수 있는 성경을 10년, 20년에 걸쳐서 만드시는 분들입니다.
굳이 그 일을 안 해도 자기 먹고살기에는 아무 걱정 없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다른 이들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사심 없이 바치는 분들을 만나 보면 정말 그 몸에서 알 수 없는 예수의 향기가 전해집니다. 바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이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굳이 십자가를 지고 죽지 않으셔도 되는 분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향해 돌을 드는 원수들의 죄를 짊어지고 “내가 다 책임지겠다.“고 분연히 나서신 것이 십자가입니다. 때로 우리 성도들에게 남의 문제로 고민하고 걱정하고 책임을 지는 일이 생겼을 때 우리는”아, 하나님께서 이제 나를 이렇게 까지 인정해 주시는 구나“ 하고 감사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힘이 들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일들을 통해 더욱더 예수를 알고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며 성숙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성도들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작은 죽음들입니다. 신앙인들은 그러한 작은 죽음들을 통해 점점 성숙한 인격으로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약1:2-6) 2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질 때에, 그것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생각하십시오.
3 여러분은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낳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4 여러분은 인내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완전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십시오.
5 여러분 가운데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아낌 없이 주시고 나무라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그러면 받을 것입니다.
6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믿고 구하십시오. 의심하는 사람은 마치, 바람에 밀려서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이러한 작은 죽음들은 우리를 성숙케 하는 하나님의 따뜻한 배려인 것입니다.
그런데 작은 죽음들이 한으로 남지 않고 성숙으로 가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하지요?
지혜가 뭡니까? 어떤 지혜지요?
(잠8:11-30) 11 참으로 지혜는 진주보다 좋으며, 네가 갖고 싶어하는 그 어떤 것도 이것과 비교할 수 없다.
12 나 지혜는 명철로 주소를 삼으며, 지식과 분별력을 가지고 있다.
13 주님을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다. 나는 교만과 오만, 악한 행실과 거짓된 입을 미워한다.
14 내게는 지략과 건전한 지혜가 있으며, 명철과 능력이 있다.
15 내 도움으로 왕들이 통치하며, 고관들도 올바른 법령을 내린다.
16 내 도움으로 지도자들이 바르게 다스리고, 고관들 곧 공의로 재판하는 자들도 올바른 판결을 내린다.
17 나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여 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사람을 만나 준다.
18 부귀와 영화도 내게 있으며, 든든한 재물과 정의도 내게 있다.
19 내가 맺어 주는 열매는 금이나 순금보다 좋고, 내가 거두어 주는 소출은 순은보다 좋다.
20 나는 의로운 길을 걸으며, 공의로운 길 한가운데를 걷는다.
21 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재물을 주어서, 그의 금고가 가득 차게 하여 줄 것이다.
22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던 그 태초에, 주께서 모든 것을 지으시기 전에, 이미 주께서는 나를 데리고 계셨다(히, '카나니'. 아퀼라역과 심마쿠스역에는 '나를 소유하고 계셨다'. 칠십인역과 시리아어역과 타르굼에는 '나를 낳으셨다'. '나를 창조하셨다').
23 영원 전, 아득한 그 옛날, 땅도 생기기 전에, 나는 이미 세움을(또는 '형성되다' 또는 '만들어지다') 받았다.
24 아직 깊은 바다가 생기기도 전에, 물이 가득한 샘이 생기기도 전에, 나는 이미 태어났다.
25 아직 산의 기초가 생기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나는 이미 태어났다.
26 주께서 아직 땅도 들도 만들지 않으시고, 세상의 첫 흙덩이도 만들지 않으신 때이다.
27 주께서 하늘을 제자리에 두시며, 깊은 바다 둘레에 경계선을 그으실 때에도, 내가 거기에 있었다.
28 주께서 구름 떠도는 궁창을 저 위 높이 달아매시고, 깊은 샘물을 솟구치게 하셨을 때에,
29 바다의 경계를 정하시고, 물이 그분의 명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시고, 땅의 기초를 세우셨을 때에,
30 나는 그분 곁에서 창조의 명공이 되어, 날마다 그분을 즐겁게 하여 드리고, 나 또한 그분 앞에서 늘 기뻐하였다.
지혜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아셔야 합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시며 어떤 일을 하셨으며 어떻게 살아가셨는가가 여러분의 작은 죽음들을 성숙으로 승화시켜낼 수 있는 것입니다.
(히5:8-9) 8 그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복종을 배우셨습니다.
9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 자기에게 복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비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셔서 가난하게 자라시고 모욕을 받으시고 배반을 당하시고 수난을 당하시고 하는 작은 죽음들을 수없이 겪으시면서 나중에 죽음을 통과하시는 것으로 순종함을 배우셔서 온전하게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우리 성도들의 삶의 모범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한 작은 죽음들을 경험하시고 결국에는 죽으심으로 성숙을 완성하셨고 다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 성도들도 인생동안 우리에게 닥치는 작은 죽음들을 통과하면서 성숙을 배우고 결국에는 육체의 죽음을 통해 성숙의 단계의 클라이맥스에 도달하고 결국에는 예수님과 같은 새 몸으로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에 작은 죽음들을 계속해서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많은 경험 중에 가장 강렬하고 가장 최종적인 것이 바로 인간의 육체적인 죽음입니다. 그 죽음이 의식에서 수용이 되면 그 이기적인 자아가 급속하게 붕괴되는 것입니다. 죽게 된 마당에 무엇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복된 momentum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죽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어야 합니다. 죽음이 칙칙하고 음울하고 불쾌하고 무섭고 어둡고 두렵게만 느껴지는 것은 사탄의 속임수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내 모든 존재가 파괴되고 모든 의미가 상실되는 그런 것으로만 인식이 되어 있다면 여러분은 아직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하고 외칠 준비가 안 되신 분들입니다.
그것은 사탄의 속임수입니다. 여러분, 왜 죽음이 두려우세요? 왜 시체가 무섭습니까? 왜 가위를 눌리시죠? 그것은 사탄의 속임수입니다. 여러분 속지 마세요. 다음 주 수요일에 제가 귀신 론을 다루면서 자세히 설명해 드리겠지만 우리는 마귀의 세력을 너무 과소평가해서도 안 되지만 너무 과대평가 할 필요도 없습니다. 구천을 떠도는 귀신은 없습니다. 다 사탄의 속임 수입니다. 여러분이 거듭나신 분이 맞다 면 여러분 안에는 성령 하나님이 계십니다. 거기에 귀신이 범접을 한고구요? 그런 터무니없는 속임수에 속지 마세요.
여러분은 죽음과 친해지셔야 합니다. 그리고 늘 여러분의 죽음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내게도 곧 그 죽음이 도적처럼 닥칠 것이라는 것을 항상 인식하세요. 그럴 때 여러분은 참 인생의 의미를 찾게 될 것입니다. 그 죽음이 결국 나의 성숙을 완성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 죽음 뒤의 삶이 나의 오늘을 이끌어갈 것입니다. 죽음은 성도들의 삶의 모든 의미가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지점입니다. 그 죽음의 자리에서 거꾸로 여러분의 인생을 바라보세요. 그러면 여러분의 인생의 의미가 살아나실 것입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여러분의 죽음의 자리에서 거꾸로 바라보십시오.
그 죽음의 자리에서 나의 인생을 거꾸로 내려다 볼 때 어떤 것이 바른 삶이고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야 할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을 통해 죽음을 알아가야 하고 죽음을 통해 인생의 의미를 깨달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주변에 하나님께서 죽음을 자꾸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찰스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롤에 보면 그 인색한 스크루우지 영감이 갑자기 착해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계기가 있습니다. 그는 꿈속에서 자기가 죽은 후를 봅니다. 너무 구두쇠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도 슬퍼하지 않는 것을 보고 꿈에서 깨어난 뒤 사람이 바뀝니다. 그렇게 자기의 죽음을 자꾸 바라보게 되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 성도의 죽음은 그렇게 암울하고 비참하고 무서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 아셨습니다.
이제 여러분도 사도 바울처럼 매일 매일 죽으십시오. 매일 매일 우리의 이 이기적인 자아의 붕괴를 소원하세요. 오히려 아무 일이 없을 때 불안해 하셔야 합니다. 오히려 내 삶이 너무 편안하거든 여러분의 영적 상태를 다시 한 번 점검을 하십시오.
이러한 작은 죽음들이 성숙에 필요한 것인 줄 아는 사람은 그러한 어려움이 닥쳐 올 때 담담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아직 신앙의 철이 덜 든 사람은 그런 작은 죽음들을 무서워하고 싫어합니다.
마치 아이가 주사를 싫어하듯이 그렇게 싫어합니다. 사실은 자기에게 유익한 것인데 무조건 그 순간의 아픔을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일부러 주사 맞으러 갑니다.
어른은 안 아픈가요? 어른도 아픕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필요하기에 수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숙한 사람은 잘 참습니다. 성숙하지 못한 아이들에게 계속 아픈 주사를 놓으면 그 아이는 한이 맺힙니다. 그러나 성숙한 어른들은 오히려 간호사의 노고에 감사를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신앙 안에서 성숙한 사람들은 고난을 당할 때 아프지만 아픈 것으로 끝나지 않고 소망으로 시선을 돌립니다. 아픈 주사를 한 대 한 대 맞으면서 완치의 소망을 갖는 환자처럼 성숙한 신앙인들은 고난에 대해 그렇게 반응을 합니다. 힘들지만 소망을 갖습니다.
그리고는 이런 고백을 하겠지요.
(시39:5-7) 5 주께서 나에게 한 뼘 길이밖에 안 되는 날을 주셨으니, 내 일생이 주님 앞에서는 없는 것이나 같습니다. 진실로 모든 것은 헛되고, 살아 있는 사람일지라도 한낱 입김에 지나지 않으니, (셀라)
6 걸어다닌다고는 하지만, 그 한평생이 실로 한오라기 그림자일 뿐, 재산을 늘리는 일조차도 다 허사이니, 장차 그것을 거두어들일 사람이 누구일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7 그러므로 주님,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내 희망은 오직 주님뿐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택해서 읽었던 본문의 말씀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고후4:10-12) 10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11 우리는 살아 있으나, 예수를 위하여 늘 몸을 죽음에 내맡깁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의 죽을 몸에 나타나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12 그래서 우리에게서는 죽음이 힘을 떨치고, 여러분에게서는 생명이 힘을 떨칩니다.
매일 매일 죽으세요.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우리 예수께서 그 죽음을 이기고 부활을 하셨듯이 여러분은 매일 매일 부활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 부활은 어떨 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인격의 성숙으로 나타나겠지만 그 작은 부활들이 궁극의 부활로 달려가는 길이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힘을 내십시오.
제33장 교회 (1) 교회란 무엇인가?
(마16:13-19)
13 예수께서 빌립보의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서,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
14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예레미야나 예언자들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1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또는 '메시아'. 그리스도는 그리스어이고 메시아는 히브리어임. 둘 다 '기름부음 받은 사람'을 뜻함)십니다. 17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시몬 바요나야, 너는 복이 있다. 너에게 이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시다.
18 나도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그, '페트로스')다. 나는 이 반석(그, '페트라')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 죽음의 세력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9 내가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우리는 이번 주부터 여러 주에 걸쳐서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해 공부를 할 것입니다.
교회의 정의와 유래와 임무와 책임과 본질에 대해 자세히 공부를 하겠습니다.
아마 지금까지 우리가 공부한 교리들의 총 정리쯤 될 것 같습니다.
많은 분들이 작금의 한국 교회를 많이들 걱정합니다. 교회의 세습 문제라든지 지나친 기복 화라든지 하는 한국 교회의 문제점은 이 ‘교회론’이 제대로 정립이 되어 있지 않아서 발생되는 것들입니다. 여러분은 부디 이 ‘교회론‘을 잘 정립하셔서 오늘 날 여러분이 교회로 이 땅을 살아가야 하는 이유와 목적을 잘 정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교회라고 하면 흔히 이 건물을 떠올리곤 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빨간 벽돌로 세워진 붉은 네온 십자가가 첨탑에 걸린 건물을 교회라고들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건물을 성전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래서 각 교회마다 “성전 건축”을 위한 헌금을 하기도 하고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은 이렇게 허름한데 너희들이 사는 곳은 그렇게 화려해서야 되겠는가?” 하면서 헌금을 강요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제가 어렸을 적에는 이 강대 상위에는 신발을 신고 올라오지도 못했습니다. 이곳은 거룩한 곳이기 때문에 모세가,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서 신을 벗었듯이 신을 벗고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 예배가 끝난 후나 평일 날 저녁에 교회에서 풍금을 치면서 자주 당시 유행하던 양희은 노래, 박인희 노래 같은 것을 불렀었습니다. 교회에는 저의 팬들이 많았습니다. 제가 노래만 하면 중학생들까지 동그랗게 모여서 함께 듣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의사가 된 동급생 중에 참으로 열심히 교회 생활하는 모범생이 있었습니다. 제가 노래를 하면 유독 그 친구만 저 구석에서 귀를 막고 큰 소리로 기도를 했습니다. 신성한 성전에서 유행가를 부르는 저 마귀를 어서 쫓아내 달라는 그런 기도였겠지요? 여러분 ‘연가’같은 노래는 가사를 잘 보면 복음성가 못지않은 심오한 뜻이 담겨 있습니다. “비바람이 치던 바다 잔잔해져 오면 오늘 그대 오시려나 저 바다 건너서.. 그대만을 기다리리 내 사랑 영원히 기다리리” 저는 이 연가를 부르면서 오직 주님만을 기다리는 저의 신앙고백을 확인 하곤 했습니다. 정말 믿으시는 분들 있을까 걱정입니다만.
그런데 어떤 장로님이 오시더니 소리를 버럭 지르시면서 거룩한 성전에서 세상 노래를 부른다고 혼을 내셨습니다. 그리고는 성전 문 밖에 나가서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어린 나이에도 참 이해가 안 갔습니다. 저 문 안과 밖이 그렇게 다른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문 밖에서 불렀습니다. 그랬더니 아무 말도 안하셨습니다. 성전에서는 안 되고 성전 밖에서는 괜찮다는 것이지요. 밖에서 한참 유행가를 부르고 있는데 저 멀리서 귀를 막고 열심히 기도를 하던 그 친구도 따라 나와서 귀를 쫑긋 세우고 노래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지요. 왜 아까는 안 듣고 지금은 그렇게 좋아하냐고 물었더니 자기네 할머니한테 하나님이 계시는 교회에서 그런 세상 것들을 가까이 하면 안 된다고 배웠다고 했습니다.
꼭 그런 애들이 평소엔 기도 안 하다가 남들이 있을 때는 구멍가게에서 바나나 우유 하나 받아들고 10분씩 기도하는 애들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에클레시아’라는 이름이 말해 주듯이 세상으로부터 건져내어진 “거룩한 무리, 하나님의 백성, 성도” 바로 여러분을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교회가 모여 예배를 드리는 장소는 그저 예배당이라고 하는 것이지 성전이라 부르면 안 됩니다. 성전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계신 전이라는 뜻인데 지금 하나님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구약의 이스라엘에서처럼 성전에 계신가요? 바로 우리 안에 들어오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성전은 어디입니까? 바로 여러분이 성전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전. 즉, 하나님이 계신 곳, 성전, 교회는 바로 여러분 자신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지 순례라는 말은 얼토당토한 말인 것입니다. 성지는 하나님이 계신 거룩한 곳이라는 뜻인데 지금 성지가 어디 있습니까? 성지는 이스라엘이나 터어키 이런 곳이 아니라 여러분이 바로 성지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지 순례 가고 싶으시면 옆에 있는 예수 믿는 아내나 남편의 손을 살짝 잡으세요. 그게 진짜 성지순례입니다.
사도 바울이 “교회들에게” 쓴 편지들을 우리가 서신서 라고 하는데 그 서신서의 인사말들을 보면 우리가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갈1:1-3) 1 사람들이 세워 준 것도 아니요, 사람이 맡겨 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맡겨 주시고, 또 그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맡겨 주심으로써, 사도가 된 나 바울은,
2 나와 함께 있는 모든 믿음의 식구와(그, '모든 형제들') 더불어 갈라디아에 있는 여러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
3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빌1:1) 1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나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살고 있는 성도들과 감독들과 집사들 모두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엡1: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나 바울은, 에베소에 사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신도들에게 이 글을 씁니다.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들에게 빌립보에 있는 성도들에게,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성도들을 가리켜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교회들을 가리켜 성전이라고 하는 것이고요.
(고전6:19) 여러분의 몸은 성령의 전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아서 여러분 안에 모시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스스로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고전3:16) 여러분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성전이요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 가운데 계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이렇게 바로 성도들이 교회이며 성전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성전이 되었습니까? 하나님은 죄와 함께 거하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은 우리에게서 죄가 모두 도말 되어 버렸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는 성전이 되었나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이지요.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성전이라 하셨습니다.
(요2:19-21)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 하였다.
20 그러자 유대 사람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짓는 데 마흔여섯 해나 걸렸는데, 이것을 사흘 만에 세우겠습니까?"
21 그러나 예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자기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그렇지요? 주님은 자신을 가리켜 성전이라 하셨습니다. 이 말은 구약의 성전이 담고 있던 내용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었다는 설명인 것입니다. 그 앞 장으로 가 볼까요?
(요1:48-51) 48 나다나엘이 예수께 물었다.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49 나다나엘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선생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50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내가 너를 보았다고 해서 믿느냐? 이것보다 더 큰 일을 네가 볼 것이다."
51 예수께서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여기도 보시면 주님께서 당신을 ‘베델’ ‘성전’이라 하십니다. 야곱이 에서를 피해 도망가다가 돌베개를 베고 잠이 들었었습니다. 그런데 하늘 문이 열리고 사다리가 땅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때 야곱이 이곳이 하나님 계신 하나님의 전이라 하여 그 곳 이름을 베델이라 짓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당신을 그 베델의 주인공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진정한 베델, 참 성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안에 연합되어진 자들입니다.
그 참 성전이신 예수님 안에서 구원을 받은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는 성전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교회, 성전은 건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 성도들을 가리키는 말인 것입니다. 당연한 것이 성경은 교회를 가리켜 예수님이 피 값을 주고 사신 것이라 하지 않습니까? 만일 이 건물이 교회라면 예수님이 피로 이 건물을 사신 것이란 말입니까?
(행20:28) 여러분은 자기 스스로를 잘 살피십시오. 또 여러분은 양 떼를 잘 보살피십시오. 성령이 여러분을 양 떼 가운데서 감독으로 세우셔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피로 사신 교회를 돌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그 교회를 어디다 세우신다고 하시나요? 다시 본문을 보세요.
(마16:18-19) 18 나도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나는 이 반석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 죽음의 세력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9 내가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이 대답하기를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례 요한, 엘리야, 더러는 예레미야나 선지자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랬더니 성질 급한 베드로가 냉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칭찬하시지요.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너에게 그 고백을 하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이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 그리고 천국의 열쇠도 주겠다. 그 천국의 열쇠를 가진 자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고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구절이 캐톨릭이 교황권의 근거로 삼는 구절입니다. 로만 카톨릭에서는 하나님은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셨고 그 베드로는 음부의 권세도 그를 이기지 못하며 천국의 열쇠까지 가진 자로 봅니다. 그리고 그들은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받듭니다. 따라서 그 교황 권을 전수 받은 지금의 교황도 역시 천국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교황을 교황 성하라고 부릅니다. 폐하도 아니고 각하도 아니고 전하도 아니고 “성하”라고 합니다. 존칭 중에 극존칭이지요. 그런데도 교황은 자신이 사인(sign)하는 모든 문서에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의 종의 종이라고 사인을 합니다. 하나님의 종의 종이 65억 원어치 보석이 박힌 모자를 쓰고 다니나요?
이 구절을 헬라어 원어로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의 주장은 얼토당토아니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이름은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헬라어로는 ‘페트로스‘ 남성 주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라고 말씀하신 “이 반석”은 여성 명사입니다. 이 반석이 베드로를 받는 것이라면 명사의 “성”이 같아야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페트로스’ 남성명사이고 반석은 ‘페트라‘ 여성명사입니다.
그럼 이 반석은 다른 것을 받는 것이란 말이지요? 그게 뭘까요? 이 반석은 베드로와 베드로가 한 고백을 모두 받는 말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고백을 한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잘 이해하세요. 주님께서는 단순히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올바른 신앙 고백을 한 베드로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비단 베드로만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성경적 고백을 하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 위에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 말씀은 교회는 하나님의 선택으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할 수 있게 만든 사람들”이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리고 그들에게 천국의 열쇠가 주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천국의 열쇠에 대한 이해도 잘 정리를 하고 계셔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교회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하늘나라와 격리되어 있는 자들이 아니라 이 땅에서도 천국 백성으로 살게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뜻이 교회인 성도들의 삶 속에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고 교회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인다고 하는 것입니다.
만일 카톨릭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이 반석이 베드로 한 사람을 말씀하는 것이면 바로 밑의 23절에 예수님이 베드로더러 사탄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시겠습니까?
(마16:22-23) 22 이에 베드로가 예수를 꼭 붙들고 "주님, 안 됩니다. 절대로 이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하면서, 예수께 항의하였다.
23 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셨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많은 고난을 받고 죽으실 것을 이야기하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꾸짖습니다. 22절에 ‘간하여’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에피티마오’는 ‘책망하다, 꾸짖다’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폭풍을 꾸짖으실 때 쓰셨던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자신의 앞날을 창창하게 책임져 주어야 할 스승이 죽겠다고 하니까 화가 나서 주님을 꾸짖은 것입니다. 그랬더니 조금 전에 베드로의 고백을 듣고 칭찬하시던 예수님께서 그 베드로더러 사탄이라고 야단을 치셨습니다. 그리고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너는 나의 걸림돌이다.” 라는 말입니다. 그럼 언제든지 이렇게 사탄의 도구가 되어 예수님께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사람 위에 교회를 세우고 그에게 천국 열쇠를 주시겠다는 말씀이 되지 않습니까?
베드로가 어떨 때 “복이 있도다.”라는 칭찬을 들었고 어떨 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소리를 들었는지를 잘 보세요. 베드로가 왜 사탄이라는 소리를 들었지요?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헤아리지 않고 인간적인 생각으로 예수님을 섬긴다고 했을 때 그는 “사탄아”라는 소리를 들었고 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헤아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는 위대한 고백을 했을 때는 예수께 칭찬 받는 반석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지금 참 복음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며 바로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이시다”라는 그 참 복음을 알고 고백하는 자들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바로 그들에게 천국의 열쇠도 주신 것입니다.
그들이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그들이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는 것입니다.
그 구절이 어디에서도 쓰이는 지 보세요.
(마18:15-18) 15 " 신도가(그, '네 형제')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있는 자리에서 그에게 충고하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신도를 얻은 것이다.
16 그러나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그가 하는 모든 말을, 두세 증인의 입을 빌어서 확정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17 그러나, 그 신도가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여라.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18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이 구절은 교회의 치리에 관한 구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범죄 한 자가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말씀하시고 바로 이어서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이 말씀은 베드로 한사람에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교황에게 주어진 열쇠가 아닌 것입니다.
바로 교회에게 주어진 권한인 것입니다.
그럼 교회에게 주어진 이 권한은 무엇을 뜻하는가에 관해서 조금 더 부연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그 말은 여러분이 교회라고 해서 아무나 저주해 버리면 그가 하늘에서도 매이고 아무나 받아들여 주면 그가 하늘에서도 풀린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여기 “매면 매일 것이다”라는 단어와 “풀면 풀릴 것이다”라는 단어의 시제가 미래 완료입니다. 헬라어에서 미래 완료 시제라는 것은 여러 가지의 뜻이 있는데 여기서는 “확실성의 완료”로 쓰인 것입니다. 그것은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매면 확실하게 매이고 우리가 풀면 확실하게 풀리는 엄청난 권세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비슷한 구절을 한군데만 더 찾아보겠습니다.
(요20:21-23) 21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하셨다.
22 이렇게 말씀하신 뒤에, 그들에게로 숨을 내뿜으시고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해 주면 사해질 것이요, 사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 열 한 사도와 글로바와 그의 아내와 다른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신 말씀입니다. 카톨릭은 이 구절을 들어서 전승되어진 사도직을 이어받은 성직자들이 죄를 사할 권세가 있다고 믿고 “고해성사” “종부성사”같은 것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현장에는 사도들만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엠마오 마을로 가던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글로바와 다른 제자가 예수님을 만나고 놀라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거기 열한 사도와 그와 함께 한 많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만났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그들에게 “샬롬”이라고 축복을 하시고 그 무리들에게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눅24:33)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서,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보니, 열한 제자와 또 그들과 함께 있던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즉 이 말씀도 사도들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라 교회에게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그들에게 너희가 죄를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고 너희가 죄를 그대로 두면 그대로일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쓰인 동사는 현재완료 시제입니다. 헬라어에서 현재완료시제는 이미 이루어진 것을 의미한다고 했지요? 그러니까 이 말씀의 정확한 번역은 “너희들이
죄를 사하면 그 죄는 이미 사하여졌던 것이고, 너희들이 그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그 죄는 이미 사해지지 않았던 것이다“입니다.
잘 이해하세요.
그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창세전에 이미 구원을 받을 자들이 예정이 되어있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교회의 구원 사역에 동참 시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 것이고 우리가 복음을 전했을 때 상대방이 복음을 받아들였다면 그는 창세전에 이미 용서받기로 정해져 있던 자였지만 외양상으로는 우리가 그들의 죄를 사해주는 모습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말을 듣지 않으면 그는 이미 창세전에 택함에서 제외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가 택함을 받은 자인지 누가 유기당한자인지 모르지요? 그러니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열심히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의 이야기도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교회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확실하게 풀린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복음을 알지 못하던 자들이 복음을 듣고 교회의 일원이 될 때 그들이 진짜 교회인가 아닌가를 판단하여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 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가 받아들인 자들은 이미 하나님께서 받아들이기로 한 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늘나라의 삶을 이 땅에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 교회에게 그런 권한을 주셨나요?
어느 날 어떤 사람이 꿈에 계시를 받고 “난 오늘부터 목사야” 하면 목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그의 배경과 자질과 여러 가지를 판단하여 시험해보고 목사라 인정하는 것처럼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도 어느 날 갑자기 “난 오늘부터 그리스도인이야”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그가 정말 성경에 맞는 신앙을 가지고 있으며 바른 복음을 알고 있는가를 알아보고 정말 그렇다 생각될 때에 “저 사람은 그리스도인이야, 우리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자” 해야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멤버는 신중하게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그저 머리수를 채우기 위해 아무나 다 교회의 멤버로 받아들이지요? 그러니까 나중에 교회의 멤버를 받아들일 때도 신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가 소유하고 있다는 천국의 열쇠는 이미 교인들의 머릿속에서 희미하게 지워져 버린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교회의 역할이 얼마나 어렵고 책임이 무거운 것인지 아세요?
어떤 사람을 풀려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앙이 옳은 것인지 판정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맨 가짜들이 가짜들을 교회라고 자꾸 받아들이니까
가짜들의 천국이 되는 것 아닙니까? 우리 참 교회들에게는 천국의 열쇠가 주어져 있습니다.
그 천국의 열쇠는 예수님께서 소유하신 열쇠이기도 합니다.
(계3:7) "빌라델비아 교회의 천사에게 이렇게 써 보내어라. '거룩하신 분, 참되신 분, 다윗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 분, 여시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시면 열 사람이 없는 그분이 말씀하신다.
우리에게 예수님의 그 열쇠를 똑같이 부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신중하고 진지하게 그 앞에 서야하겠습니까? 따라서 거기에는 엄청난 책임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문으로 신앙생활을 한다고요? 공부하셔야지요. 더 진지해 지셔야지요. 어떻게 배우지도 않고 ‘무조건 믿어‘로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말들인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아울러서 교회는 예수님의 교회입니다. 본문 18절을 다시 보세요.
(마16:18) 나도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그, '페트로스' Peter)다. 나는 이 반석(그, '페트라' rock)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 죽음의 세력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누구의 교회입니까? 담임 목사의 교회입니까? 장로들의 교회입니까?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교회입니다. 그럼에도 오늘 날 자신이 개척하여 키운 교회라고 그 교회에서 황제 대접을 받는 목사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건 교회를 세우신 예수님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고전3: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보세요.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곧 말씀입니다. 교회는 말씀 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무엇을 설명하는 것인지, 성도들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것인지도 모르고 ‘나는 교회입네’하는 것은 정말 웃긴 코미디인 것입니다.
(엡2:20) 여러분은 사도와 예언자의 터 위에 세워진 건물이요, 그리스도 예수 스스로가 그 모퉁잇돌이십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무엇을 한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 하고 기록한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교회는 말씀 위에, 말씀으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천지가 하나님 말씀으로 창조되었습니다. 말씀(로고스)이 오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해내셨습니다. 교회는 그렇게 저 태양이, 저 바다가 말씀으로 존재하게 되었듯이 하나님 말씀으로 지어지는 것입니다.
“돈 많은 사람 몇이 있어야 교회가 운영된다, 일군이 어느 정도 있어야 교회는 움직인다.” 다 헛소리 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그러한 힘의 원리로 운영되는 교회들의 행태를 비꼬시면서 ‘벤츠 타고 오는 사람은 월척이고 티코 타고 오는 사람은 피라미냐?’고 일갈하신 것을 어느 책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교회는 부자들이 운영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능력 있는 경영인들이 움직이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주인이시고 예수님이 이끌어 가시는 곳입니다.
우리가 보았듯이 예수께서 직접 ‘내 교회’라 하시지 않습니까?
정리를 하겠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되어져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에서 용서를 받고 구별되어 건져진 자들로 주 예수만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메시아, 그리스도이신 것을 고백하고 그 분은 참 하나님이신 성부 하나님의 아들 성자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고백하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말하며 그들에게는 천국의 열쇠가 주어져 있는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믿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을 교회의 멤버로 받아들이느냐 안 받아들이느냐의 권세까지 부여받은 자들입니다. 교회는 그렇게 커다란 책임과 진지함을 지녀야 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 예수님이 갖고 계신 엄청난 천국의 열쇠를 받은 자로서 그 천국의 열쇠를 남용하지 않기 위해서는 열심히 하나님에 대해 알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의무인 것입니다. 영생을 가진 자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를 모른다는 것이 말이 되됩니까?
(요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은 영생하는 자들, 하나님의 백성들, 교회들에게 나타나는 증거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교회가 맞습니까?
제34장 교회 (2) 교회의 치리
(마18:15-20)
15."신도(그,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있는 자리에서 그에게 충고하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신도를 얻은 것이다.
16. 그러나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그가 하는 모든 말을, 두세 증인의 입을 빌어서 확정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17. 그러나, 그 신도가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여라.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18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19 내가 진정으로 거듭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슨 일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자리에는, 내가 그들과 함께 있다."
저는 우리 아이들에게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칩니다. 인격은 형편없는 공부만 잘하는, 자기가 잘되기 위해서 남을 밟고 올라서는 이기적인 세상의 흉기가 되기보다는 조금 모자란다고 생각될지 몰라도 다른 이들에게 해가 되지 않고 우리 아이들이 가는 곳에 따뜻함이 전해지는 그런 사람다운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 사는 사람이 되어주기를 바래서입니다.
그런데 우리 큰 녀석이 지난주에 학교에서 상장을 받았습니다. 전교생이 모여 있는 곳에서 단 위에 올라가서 상장을 받았습니다. 제가 만사 제쳐놓고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아이의 학교로 내려갔습니다. “아이가 상장하나 받는 걸 가지고 뭘 그렇게 호들갑을 떠느냐”고 하실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에게는 아주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아이가 지금까지 개근상 이외에 처음 받는 상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차를 타고 아이의 학교로 내려가면서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착하고 건강하게만 자라라고 했더니 공부까지 잘 하고 난리야” 제가 흥분을 했다는 증거입니다.
제가 지금 우리 아이 자랑을 하고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 아들이기 때문이죠. 다른 아이들은 벌써 여러 개씩 받았을 상장 하나 받았는데 이렇게 자랑을 하고 싶어 못 견디겠어요?
왜 그렇다고요? 제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런 예화를 서두에 끌어내는 지 아시겠어요?
바로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는 신기하기 그지없습니다. 아이가 어느 날 “어버버” 해도 부모는 금방 나가서 남들에게 우리 아이가 ‘아빠‘ 했다고 자랑을 합니다. 아이가 두 발로 일어선 것도 부모에게는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심지어 아이가 숟가락을 처음 든 날도 부모에게는 의미가 있습니다. 아이가 화장실에 처음 간 날도 부모에게는 잊지 못할 날이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 혈육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어딜 가도 자랑하고픈 사랑하는 아이가 예전에 저를 실망시킨 적이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산수 숙제를 내 주었는데 이 녀석이 숙제가 하기 싫어서 학교에다 두고 와버렸습니다. 그리고 산수 숙제는 없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얼마 뒤에 성적표가 왔고 거기에 Missing homework란에 체크가 되어있었습니다.
이내 거짓말 한 것이 들통이 났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이에게 그가 한 잘못에 대해 정확하게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아빠가 너더러 공부 잘해야 한다고는 가르치지 않았다. 그렇지만 학생으로서 자기 신분에 맞는 책임은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다. 네가 성적이 떨어지는 것은 아빠가 용서할 수 있지만 네가 네 신분에 맞는 책임을 성실하게 수행하지 않은 것과 부모를 속인 것에 대해서는 용서할 수 없다” 그리고는 회초리로 체벌을 가했습니다.
우리 둘째 아이는 뭔가 잘못을 해서 매를 맞을 때 살짝만 건드려도 난리가 납니다. “으악” 하고 비명을 지르고 아빠 바지를 붙들고 온갖 엄살을 부리는데 큰 녀석은 끝까지 맞고 제 방에 들어가서 동생들 안 보게 혼자 웁니다. 그것을 보는 부모가 얼마나 가슴이 찢어지겠습니까?
그렇지만 아이에게 교훈을 하고 체벌을 가하는 것은 정말 그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가 바르게 자라 주기를 바라기 때문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아는 참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기 위함입니다.
제가 알지 못하는 저기 구파발의 이 씨 아저씨네 아이가 거짓말 한 것은 저하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 사랑하는 아들이 내 혈육이 잘못하고 있는 것은 그대로 지나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근거로 한 체벌을 교회에서는 “치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도 반드시 그 “치리”가 있어야 합니다.
오죽하면 교회의 3요소 중에 “치리”가 들어있겠습니까? 교회의 삼요소가 뭐예요? “말씀, 성례, 치리”입니다.
그만큼 교회에서의 “치리”는 중요한 것입니다.
혹 이 말씀을 들으시면서 “아니 교회에서도 간섭을 받아야 하나? 교회가 여기 하나 뿐이야? 요즘 한인 타운에 두 집 걸러 한집이 교회인데 교회가 내 삶에 간섭을 하겠다고?“ 이런 생각이 드실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것은 이 시대에 교회가 너무 잘 못 오해되어져 있고 교회가 너무 폄하되고 있으며 그 교회의 중요성이 무시되고 있는 증거입니다.
하도 교회들이 “손님은 왕이다”라는 세상 경영 논리를 받아들여 “아무렇게나 해도 좋으니 머리수나 좀 채워 주세요, 그리고 교회 운영에 보탬이 되어 주세요.” 라고 사람 모으기에 급급하여 아무나 교회라고 인정해 주었기 때문에 교회가 그렇게 우스워졌습니다.
왜 교회에 성경적 치리가 있어야 하며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가에 대해서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세주이시며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참된 신앙고백을 하는 자들을 가리켜 “교회”라 한다 했습니다.
그들은 천국의 열쇠를 쥐고 있고 이 땅에서 매고 푸는 권세까지도 소유한 자들입니다.
그 권세를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아는 지식이 있어야 하며 열심과 진지함도 요구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조건이 이스라엘 민족으로 태어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셨고 그 이스라엘을 가리켜 하나님의 백성이라 칭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에 간섭을 하시며 그들을 가나안까지 끌고 가셨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아직까지 자기들만이 선민이라는 의식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른 민족과 구별되게 선택하셔서 선민으로 삼고 그들의 역사에 간섭하시고 그들의 생활 습관과 모든 문제에 율법을 요구하시고 결례를 요구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교회들에게 장차 “그들이 어떻게 선택받고 어떻게 인도함을 받고 어떤 것들을 요구받을 것인가 하는 것의 상징이고 그림자”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을 택하셔서 구원을 설명해 나가셨던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는 울타리를 분명케 하시기 위한 상징으로 한 민족을 선택하셨던 것입니다.
결코 그들이 뭔가 다른 이들보다 특별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구약 자체가 힌트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것은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즉 민족적 구별(Nationalism)을 넘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자들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구약을 통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들어서 설명을 하고 계시지만 이스라엘이라고 다 이스라엘이 아니란 것을 창세기부터 일관성 있게 힌트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9장으로 가보겠습니다.
(롬9:6-8) 6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폐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에게서 태어난 사람이라고 해서 다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고,
7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해서 다 그의 자녀가 아닙니다. 다만 "이삭에게서 태어난 사람만을 너의 자손이라고 부르겠다" 하셨습니다.
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자녀가 참 자손으로 여겨 주심을 받습니다.
이스라엘의 시조는 아브라함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으로 하나님의 백성임을 증명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바리새인과의 논쟁에서도 예수님께서 너희들은 “마귀의 후손이다. 그래서 나를 믿지 못하고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시자 바리새인들이 발끈해서 되받아칩니다.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으니 우리의 조상은 아브라함이요 우리의 아버지는 하나님이다“ 이렇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태어난 것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우기는 유일한 근거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읽었던 로마서의 말씀처럼 아브라함의 자녀가 모두 이스라엘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녀를 주시기 전에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하십니다. 네 자손이 저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다의 모래와 같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자기 방법대로 이스마엘을 낳아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을 내 쫓고 이삭을 허락하십니다. 그리고는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진짜 이스라엘이다. 진짜 교회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삭을 주시기 전에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하십니다.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지금으로 따지면 단순히 포경수술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생식기를 끊어버린다는 상징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인간의 종족보존 능력, 즉 생물학적인 실력과 방법으로 이어지는 대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자녀라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녀 중에 이스마엘은 버려지고 이삭만 택해졌고 이삭의 자녀 중에 에서는 버려졌고 야곱만 택해졌던 것처럼 이스라엘 안에서도 하나님께 택해지는 하나님의 라인이 있음을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묶는 울타리를 설명하셨지만 그 것이 단순히 민족(nationalism)만을 근거로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구약 내에서 증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에 와서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약을 완전히 이해하고 그 구약의 이스라엘이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를 나타내는 것임을 깨닫고 교회들에게 그 진리를 이렇게 설파합니다.
(롬10:11-13) 11 성경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합니다.
12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꼭 같이 주님이 되어 주시고,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한 은혜를 내려 주십니다.
13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여기서 제일 중요한 단어가 바로“누구든지”입니다. 이제 구약에서 상징으로 설명되던 것들이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해서 완성이 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라는 nationalism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골3:9-11) 9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옛 사람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 버리고,
10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이 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져서,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
11 거기에는 그리스인도 유대인도, 할례자도 무할례자도, 야만인도 스구디아인도, 종도 자유인도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시요,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요1:12-13)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이렇게 영적 이스라엘 “교회”는 민족과 학식과 인간의 의지를 뛰어 넘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어떤 한 무리를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신자나 성도나 믿는 자들이란 말도 있는데 굳이 “교회”라는 집단적 의미의 단어를 써야 하는 것일까요? 그 사실을 아시면 왜 그 교회에 치리가 있어야 하는지 이해하게 되실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 교회를 부르셨습니까? 뭐에 쓸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까?
뭔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셔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까? 에베소서로 가보지요.
(엡1:3-10)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버지께 찬양을 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온갖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4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창세 전에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그, '그분 안에서') 택하여 주셨습니다.
5 그리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예정하셔서,
6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찬미하게 하셨습니다.
7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따라서, 그분의 피로 구속 곧 죄의 용서를 받게 되었습니다.
8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지혜와 총명을 넘치게 주셔서,
9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세우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하나님의 신비한 뜻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10 하나님의 경륜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통일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 계획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들이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혼돈과 무질서가 되어버린 우주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재통일, 조화로움으로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입니다.
거기서 제일 중요한 대상이며 주인공이 바로 인간이며 그 통일된 새 하늘과 새 땅에 참여하게 되는 자들을 교회라고 합니다. 교회가 그 곳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4절 말씀처럼 거룩하고 흠이 없게 만들어져서 들어가야 하는데 그들을 거룩하고 흠이 없게 만드는 방법으로 그 교회라는 무리를 예수님과 한 몸으로 묶어버리신 것입니다.
(엡1:21-23) 21 모든 정권과 권세와 능력과 주권 위에, 그리고 이 세상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 불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습니다.
22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에 굴복시키시고, 그분을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습니다.
23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함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인 ‘재통일’ ‘애나케 팔라이오’의 가장 중요한 대상이자 주인공인 우리 교회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만드시는 방법으로 예수님을 머리로 하고 우리를 그 머리에 붙여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과 피와 핏줄이 함께 통하는 한 몸이 된 것입니다.
그러한 연합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예수님의 형상으로 변화시켜 가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다 성도다 하는 소속과 신분의 차원의 차원을 넘어 예수님과 한 몸이 되어버린 하나의 유기체로서 “교회”라는 집단적 의미의 이름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피를 나눈 한 형제이며 자매인 것입니다. 한영과 한 피가 흐르고 있는 유기체인 것입니다. 내 팔이 시험 답안을 잘 못 써서 시험을 망치면 내 팔이 민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민망합니다. 내 다리가 공을 잘 못 차서 골대에 축구화만 들어가고 공은 다른 데로 굴러가면 내 다리가 창피한 것이 아니라 내가 창피합니다. 발가락에 종기가 나면 발가락만 아픈 게 아니라 내가 아픕니다. 우리 교회는 그렇게 육신 적인 피를 나눈 가족의 차원을 넘어서 한 몸으로서 존재해야 하는 자들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얼마나 끔찍이 사랑하며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얼마나 남들에게 자기를 자랑하고 싶으십니까? 그것처럼 우리는 교회의 일원이자 교회 자신인 서로에 대해 그런 관심과 사랑과 자랑스러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의 몸이 범죄 하여 잘 못된 길로 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지적하고 교훈하고 훈계하여 바른 길로 이끄는 것이 바로 교회의 치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뭔데 남의 사생활에 간섭해”라는 말은 교회가 뭔지 모르는 무지의 소치인 것입니다.
교회는 참 가족입니다. 이제 하늘에서 영원히 함께 살게 될 한 가족입니다.
(마12:49-50) 49 그리고 제자들을 손으로 가리키며 "보아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이다.
50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참 가족은 하늘에 계신 한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들, 즉 교회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의 가족관은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요한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그 말씀은 단순히 ‘요한아 우리 어머니를 부탁한다.‘는 말씀이 아니라 이제 십자가로 말미암아 새로운 가족이 탄생되게 되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 사랑해야 할 가족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18장에 나타난 형제의 잘 못을 고쳐주는 것이 바로 그 사랑하는 가족에 대한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어 하나님 앞에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레19:17) 너는 친척을 미워하는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 이웃이 잘못을 하면, 너는 반드시 그를 타일러야 한다. 그래야만 너는 그 잘못 때문에 질 책임을 벗을 수 있다.
이 말은 형제가 죄를 지었을 때 가만히 보고 있어 그 죄에 참여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형제의 죄를 보고도 가만히 있는 것은 자기도 그 죄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라는 엄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미워하는 마음이 아닌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죄를 책선하라는 것입니다.
그냥 내버려두는 것은 무관심입니다.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무조건 용서하는 것은 기독교의 정신이 아닙니다.
(눅17: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다른 제자가(그, '네 형제가' )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 주어라.
죄를 엄히 책선하여 회개하거든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독교 정신입니다. 여기서 경계하라는 말은 rebuke라는 뜻입니다. 헬라어로는 “에피티마오”인데 이 말은 “엄히 책망하다”라는 뜻입니다.
(갈6:1) 교우(그, '형제들')여러분, 어떤 사람이 어떤 죄에 빠진 일이 드러나면, 성령의 지도를 받아 사는 여러분은(또는 '신령한 사람인 여러분은') 온유한 마음으로 그런 사람을 바로잡아 주고, 자기 스스로를 살펴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라는 어구에서 ‘바로 잡고’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는 “카탈티조”라는 단어 입니다. 이 말의 정확한 번역은 “완전히 수리하다.”라는 뜻입니다. 형제가 죄를 짓거든 충고하고, 조언하고, 책망하여 완전하게 잘 못을 돌이키게 하라는 말인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반드시 치리를 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야말로 진짜 가족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형제가 죄를 지으면 가서 형제를 훈계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두 세 사람이 함께 가서 권고하라고 하십니다. 증인이 될 만한 사람을 한 두 사람 데리고 가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신명기 19장15절에 “어떤 잘못이나 어떤 범죄라도, 한 사람의 증언만으로는 판정할 수 없다. 두세 사람의 증언이 있어야만 그 일을 확정할 수 있다”
라는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회개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래도 듣지 않고 회개치 않으면 교회에게 알리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교회가 재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 사람의 죄를 재판해서 정말 성경과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이면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출교 하라는 것입니다. 무섭죠? 그렇지만 그것이 성경 적인 것입니다.
교회가 저 사람은 교회가 아니다 라고 매면 하늘에서 매인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교회에 알리라고 하는 것이 교회 광고 시간에 알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교회라 함은 장로교 헌법에서는 “당회”를 가리킵니다.
당회는 그 교회를 대표하는 목사와 장로들이 교회를 대변하는 기관입니다. 그들이 매거나 푸는 재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이제 당회가 생기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당 회원들을 선출하게 될 텐데 정말 신중하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당 회원은 돈 좀 있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요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을 바로 알고 교회가 나가야 할 방향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당 회원이 되어 교회를 대표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 것인지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자신의 권위를 입증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곳이 당 회가 아닌 것입니다.
나라의 백성을 대표하는 국회의원들을 잘 못 뽑아서 낭패를 보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저는 예전에 정당에서 일을 할 때 가끔 한국의 국회의사당에 갈 일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보는 행태들은 가히 가관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이 만일 교회의 장로들을 잘 못 선출하면 그런 꼴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알아주지 않으니까 어떻게 교회에서라도 권세를 누려볼까 하는 사람들은 절대 뽑아서는 안 됩니다. 이민 교회가 힘이 든다는 것이 이유가 있습니다. 오죽하면 목사님들 사이에 이런 농담이 있겠어요? 전생에 죄를 많이 지은 사람들이 목사가 되는 것이고 그 중에서도 더 심한 죄를 지은 사람이 이민교회 목사가 되는 것이며 그 중에서도 가장 극악한 죄를 지은 자들이 LA한인 타운에서 목사를 하는 사람들이라고요.
그만큼 이민교회 목회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한국서는 학벌이나 경력으로 자기의 사회적 지위가 정해집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대음대 수석 졸업자가 웨이트리스를 하기도 하고 서울대 법대를 나온 사람이 청소를 하기도 하며, 한국서 유명했던 연예인이 건물 경비를 하기도합니다. 이렇게 이민 사회에서는 한국에서의 학벌이나 경력 같은 것으로 자기를 나타낼 수가 없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과거에 자기 집에 금송아지가 있었다는 것이 이곳에서는 전혀 자랑거리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라도 와서 자기를 나타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렇게 다툼과 문제가 많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런 사람이 장로 되면 교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세력 다툼의 싸움터 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장로의 자격은 디도서에 정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딛1:5-9) 5 내가 그대를 크레타에 남겨 둔 것은, 남은 일들을 정리하게 하고, 내가 명령한 대로 성읍마다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입니다.
6 장로는 흠잡을 데가 없어야 하며, 한 아내의 남편이라야 하며, 그 자녀가 신자라야 하며, 방탕하다는 비난이나 순종하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지 않아야 합니다.
7 사실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흠잡을 데가 없으며, 자기 고집대로 하지 않으며, 쉽게 성내지 않으며, 술을 즐기지 않으며, 폭행을 하지 않으며, 부정한 이득을 탐하지 않아야 합니다.
8 오히려 그는 손님을 잘 대접하며, 선행을 좋아하며, 신중하며, 의로우며, 경건하며, 자제력이 있으며,
9 신실한 말씀의 가르침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이는, 그가 건전한 교훈으로 권면하고, 반대자들을 책망할 수 있게 하려 함입니다.
이렇게 교회를 대표하는 장로들은 교회를 교훈으로 권면하고 반대자들을 책망할 수 있는 그런 실력자들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목사가 가르치는 장로라는 것은 아시지요? 그러니까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교회에게 치리해야할 사안이 생겼을 때 장로들로 구성된 교회가 성경을 근거하여 판단을 하고 그 죄의 경중에 따라 교회가 그에게 판결을 내립니다. 치리는 그렇게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사안이 경미한 경우에는 훈계(서면이나 말로 가볍게 충고하는 것)에서 끝냅니다. 그리고 그 보다 조금 중한 경우는 징계(좀 더 강한 충고나 경고)를 합니다. 그보다 더 중한 것이라 판단되었을 때에는 suspension을 줍니다. 교회의 멤버로서 누릴 혜택을 잠정적인 기간 동안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일정한 기간 동안 성례에 참여시키지 않습니다. 혹 이중에 ‘그게 징계야? 성찬 안 먹으면 되지 뭐’ 그런 사람 분들이 계실 지도 모릅니다. 그런 분들은 성례에 참여한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위의 징계가 deposition입니다. 직분을 박탈당하는 것입니다. 장로, 집사, 목사의 직분을 박탈당합니다. 그리고 가장 무서운 것이 바로 출교입니다. 그는 이제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 19절20절에서 두 세 사람이 합심하여 구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저희의 구하는 바를 이루시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두 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예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딴 교회 가면 되지 뭐” 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니요, 성경의 말씀처럼 참 교회들이 매면 하늘에서 매이는 것입니다. 이 땅의 어떤 유형적인 교회에서만 매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들의 결정에 예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권세를 받은 자들이 바로 교회입니다.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진지해 져야 하겠습니까? 예수 믿는 것은 장난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에 관한 문제입니다. 한번 해 보았다가 아니면 다시 할 수 있는 게임이 아닙니다. 그렇게 한 번 가면 거기서 끝나는 단판 승부입니다.
그러면 어떤 죄를 교회가 치리 할 수 있습니까?
성경 적인 교리가 아닌 것들을 가지고 사람들을 혼란케 하는 사람들은 치리의 대상입니다.
예를 들어 “어제 내가 예언을 받았는데 당신 올 해 몸조심하래” 이런 사람은 우리 교회에서 치리의 대상입니다. 이런 말하고 다니면서 마치 자기가 기도해야 그 액운이 나가게 된다는 식으로 자기의 종교심을 자랑하려는 사람 치리의 대상입니다. 이렇게 잘 못 된 교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치리의 대상입니다.
(딛1:9-14) 9 신실한 말씀의 가르침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이는, 그가 건전한 교훈으로 권면하고, 반대자들을 책망할 수 있게 하려 함입니다.
10 복종하지 않으며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사람이 많이 있는데, 특히 할례받은 사람 가운데 많이 있습니다.
11 그들의 입을 막아야 합니다. 그들은 부정한 이득을 얻으려고, 가르쳐서는 안 되는 것을 가르치면서, 가정들을 온통 뒤엎습니다.
12 크레타 사람 가운데서, 그들의 예언자라는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크레타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거짓말쟁이요, 악한 짐승이요, 먹는 것 밖에 모르는 게으름뱅이다" 하였습니다.
13 이 증언은 참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엄중히 책망하여, 그들의 믿음을 건전하게 하고,
14 유대 사람의 허탄한 이야기나,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성경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했을 때, 교회에 오는 사람 중에 사기 치러, 장사하러 나오는 사람들 있잖아요? 그렇게 교회들에게 계속해서 피해를 입히고 다니는 사람을 교회가 그냥 놔둘 수 없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연합과 하나 됨, 통일을 방해하는 자들, 이간질하고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들 있지요? 그럴 때 치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치리를 하실 때 이것만은 명심해 주십시오. 우리가 누구의 죄를 지적하여 징계를 내릴 수 있는 자들입니까? 우리는 모두 치리의 대상자들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마 모두 출교 감일 것입니다. 그러나 2000년 전에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품에 안고 우리의 모든 죄를 뒤집어쓰시고 출교를 당해 주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 분이 출교를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이렇게 교회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출교 하시고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면서 영원히 이를 갈며 지옥 불에서 고통당해야 하는 우리들을 예수 안에서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우리의 삶에 간섭을 하십니다.
교회의 치리는 “하나님은 우리를 그냥 버려두시지 않고 우리의 삶에 간섭하셔서 우리가 버려야 할 것, 고쳐야 할 것들을 다루고 계시며 해결하고 계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냥 버려두지 않으시고 간섭하셔서 천국에 데리고 가십니다. 그 사실을 교회의 치리를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한 몸입니다. 네가 나고 내가 너인 한 몸입니다. 예수가 그렇게 살다 가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하는 자들입니다. 예수와 피가 통하는 자들입니다.
서로를 향해 사랑으로 격려하고 위로하고 잘 못 된 것들은 서로 바로 잡아주며 서로에게 시금석이 되어 주는 그런 참 교회를 만들어 보시지 않겠습니까?
제35장 교회 (3)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
(요18:36)
36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내 나라가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내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유토피아를 꿈꿉니다. 아무 걱정 없고 서로 서로 사랑하며 모든 것이 풍부한 그런 유토피아를 꿈꿉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 400년 전에 이미 플라톤은 그의 저서인 'The Republic'에서 함께 일하고 함께 나누는 유토피아를 그리고 있습니다.
아마 공산주의의 뿌리가 거기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공산주의는 유토피아를 꿈꿨습니다.
전 세계 노동자 계급의 해방과 공산주의 사회 건설을 천명한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 이후 공산주의가 마치 프롤레타리아를 해방하여 지상 낙원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기세로 공산주의는 세계의 젊은 피를 끓게 했습니다. 그러나 지난 백 여 년 간의 공산주의 운동은 사실상 실패한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공산주의라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참 훌륭한 사상입니다. 모든 인간이 계급의 차별이 없이 함께 일하고 함께 나누는 그야말로 지상 낙원을 꿈꾸는 이론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이 누구인지를 몰랐습니다. 인간은 자기의 소유가 아닌 것에 자기 것처럼 열심을 내는 법이 없습니다. 생산성은 당연히 줄어듭니다. 똑같이 나누는 가운데서도 남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가지고 싶은 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는 지상낙원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인간은 얼마나 불가능한가를 보여주었을 뿐입니다.
얼마 전 한국에서 활동하는 복음성가 가수가 전화를 했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 아주 친하게 지내던 선배인데 내년에 미국에서 대규모 기금 모금 콘서트를 기획하기 위해 LA에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절더러 좀 도와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유인 즉 한국에다가 평화의 집이라는 것을 건립하려고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평화의 집을 지어 놓고 그 곳에서 콘서트도 하고 미술 전람회도 하고 하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평화를 전하고 서로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가르쳐 밝은 사회 좋은 세상을 만들어 보려고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인간은 바르게 가르치고 옳게 계도를 하면 서로 사랑하며 이해해 주며 자기가 손해를 보더라도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존재들일까요?
교회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지 사회운동을 하는 단체가 아닙니다.
분명 교회는 구제를 해야 합니다. 선행 해야죠.
그러나 그 구제나 선행은 복음전파를 위한 것이어야 하고 아울러 그런 행위들은 교회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교회가 구제나 선행이나 계도를 하면서 이 세상을 밝게 변화시켜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 보겠다는 것은 성경과는 많이 어긋난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것들이 교회 자신을 위한 것이냐?
구제나 선행은 자기의 소중한 것을 내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물질, 시간, 노동력 등등..
엄밀히 말하면 자기 것을 희생해서 남을 살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것을 가지고 남을 위해 희생하면서 예수님을 조금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가치 있다고 여기고 목숨 걸고 긁어모으는 것들을 우리는 오히려 나누면서 “하나님 저는 이 땅의 가치라는 것에 눈 두고 살지 않습니다.”라는 고백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 세상의 가치들을 버리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구제와 선행과 계도를 하면서 “왜 나에게는 진심 어린 긍휼이 나오지 않을까” 하면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절대 악한 세상은 인간의 선행과 구제와 교육과 계도를 통해 밝아질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문제는 가난도 아니고 질병도 아니고 전쟁도 아닙니다. 죄입니다.
what is our problem? 바로 죄란 말입니다. 그 죄가 해결되지 않으면 인간은 아무리 환경이 좋아진다 해도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을 향해 그 죄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지 그들의 환경을 바꿔주어 여기서 잘 먹고 잘살게 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세상에서 건져내어 하나님 나라로 옮기는 것이지 여기 이 땅에 장막을 짓는 것 아닙니다.
14세기 이후 유럽을 강타한 르네상스(문예부흥)를 아십니까?
18세기에 와서 꽃을 피웠지요. 세상 사람들을 교육하고 교훈하며 잘 가르치면 세상은 점점 살기 좋은 곳으로 변할 것이라는 기대를 했었습니다. 그러나 연이은 세계 대전을 치르면서 세계의 지성은 , 그것이 불가능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교육을 해도 인간은 나아지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죽여 건빵을 만들어 먹고 이를 뽑아 단추를 만들고 하루에 천 명씩 꼬박꼬박 죽이고 집에 가서 슈만과 바하를 듣더란 것입니다.
그러면서 포스트모던 사회로 세상이 바뀌어 가면서 뉴에이지 운동이 세계를 휩쓸게 되었습니다. ‘범아일여(梵我一如)‘’우주와 나는 하나다‘라는 범신론을 바탕으로 한 뉴에이지 운동은 인류의 공통된 유익을 위해 모든 인종, 종교, 정부가 하나가 되어 통합되는 새 시대를 꿈꾸는 운동입니다. 말이 뉴에이지이지 사실 뉴에이지는 불교나 힌두교 그리고 동양철학의 복사판인 것입니다. 그들의 역사관은 순환적 역사관입니다. 역사는 순환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윤회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커다란 신의 한 부분이며 물질이나 현상도 파도가 잠시 형태를 가지다가 다시 바다로 돌아가는 것과 같은 그런 것이라 주장합니다. 여러분 혹시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라는 영화를 보셨나요?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어떻게 끝이 납니까? 사람이 죽어 자연으로 돌아가는 ‘범아일여’로 끝이 나는 것입니다. 뼈 가루가 산과 강과 바다에 뿌려지면서 산 자가 자연으로 회귀하는 것으로 그 영화는 끝을 맺습니다. 세 시간 반 동안 감독은 바로 그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존 레논 이라는 비틀즈 멤버가 Imagine이라는 노래까지 만들어 부르면서 뉴에이지를 전도했지요?
Imagine there's no heaven...
No hell below us, Imagine there's no country, Imagine no possesions,
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live as one
그의 노래를 전 세계가 애창을 했습니다. 저도 열린 음악회에 나가서 이 노래를 부른 적 있습니다만. 우리가 손에 손을 잡고 선을 행하며 용서를 행하며 나누어주고 사랑을 만들어 가면 세상은 정말 살기 좋은 곳이 되며 하나가 될까요?
여러분이 보시다시피 세상은 점점 더 악해지고 더러워지고 있으며 사람들은 점점 더 바빠지고 사랑은 점점 식어 가고 있습니다.
죄인인 인간은 자기만을 사랑합니다. 남을 위한 배려를 할 수 없는 not able not to sin의 상태가 되어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하버드 대학의 하비 콕스는 현대를 가리켜 익명의 시대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현대의 사람들은 다른 이들에게 방해받기 싫어하며 다른 이들에게 관심 갖는 것도 싫어하고 혼자만의 생활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동체의 모임은 점점 홀대를 받고 인터넷 앞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고 익명이 보장되는 사이버 세계가 현실 세계를 대치해 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 나, 나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자신만을 위하는 존재이며 스스로 사랑을 할 수도 없으며 평화를 만들어 낼 수도 없으며 양보하고 이해하며 지상낙원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은 언어도단임을 스스로가 증명해 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교회들 중에서도 그러한 지상낙원을 추구하고 약속하는 곳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오늘 본문에서처럼 메시아 왕국,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천명을 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이 땅에 이루어질 천년왕국을 기다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떵떵거리며 번영을 누리며 세상을 이기며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곳이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땅에 속한 것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천년왕국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 교회가 믿는 바는 이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는 이미 임했으며 영적으로 완전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 나라 그 하늘 왕국은 이미 영적으로 완성이 되었고 곧 가시적으로 임할 것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천년왕국은 예수님께서 초림 하셨을 때에 이미 이루어진 것이지 먼 훗날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말씀을 하셨을 때 “가까이 왔다”는 말 “엥기조”는 완료 동사라 했지요? 천국, 즉 하나님 나라가 너희들 가까이 이미 와 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12장28절에 보면
(히12:28)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으니, 감사를 드립시다. 그래서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도록 섬깁시다.
이미 진동치 못할 나라를 우리가 받았다고 과거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 계시록의 그 찬란한 새 하늘과 새 땅이 기록되어 있는 21장 22장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요한에게 그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보여 주셨습니다. 요한은 그 완성되어 있는 하나님 나라를 보고 계시록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 나라는 이미 영적으로 완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으며 영적으로는 완성되었고 이제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가시적으로 우리 눈앞에 내려 올 것을 믿습니다.
교회는 에클레시아입니다. 에크는 “밖으로” 라는 접두사라고 했지요? 그럼 세상 밖으로 건져내어진 자들이 교회인데 어디로 건져내어진 것입니까? 하나님 나라로 옮겨진 것입니다.
구천을 떠도는 것이 아닙니다. 천년 왕국의 천년은 상징적이며 영적인 것이지 언젠가 이 역사에 다가올 시간은 아닌 것입니다. 계시록의 천년 왕국은 이미 시작되었고 우리는 지금 그 천년 왕국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초림 하시고 부터 재림하실 때까지의 기간을 우리가 교회시대라고 하는데 그 기간을 천년왕국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신학 용어로 무 천년설이라고 합니다. 즉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생긴 교회 자체가 천년 왕국의 시작이며 그것은 영적인 것이지 이 땅의 것으로 나타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이 땅에서의 천년 왕국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요한 계시록 20장에 나오는 천년 왕국이 이 땅에 실제적으로 가시적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믿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천년 왕국에 대한 학설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살펴본 무 천 년 설과 전 천년설과 후 천년설 이렇게 세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
무 천년설은 우리가 지금 살펴 본대로 천년이라는 것은 영적이며 상징적인 교회시대를 말하는 것이지 실제로 이 땅에서의 천년동안의 기간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 천년설은 천년 왕국 전에 예수께서 재림하신다하여 전 천년설입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이 교회시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까지가 끝날 무렵 이 땅에 7년 대 환난이 온다고 합니다. 교회들과 유대인들 믿지 않는 자들 모두 그 환난 기간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 7년 대 환난을 통과한 후에 예수께서 재림하시고 예수님과 성도들이 천년동안 이 땅을 다스리는 천년 왕국이 시작됩니다. 그 천년 왕국에는 여전히 죄와 사망이 있습니다. 타락하는 자들이 생깁니다. 천년이 끝나게 될 때 사탄이 반역하는 나라들을 모아서 곡과 마곡의 전쟁을 일으키게 됩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멸하시고 불신자들이 부활하여 최후의 심판이 있을 것이며 사탄과 어둠의 세력들, 불신자들은 영원히 불 못에 던져지게 된다는 것이 전 천년설입니다. 그러나 그 학설에는 약점이 있습니다. 이 지상 적인 천년 왕국에 영화롭게 된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들이 내려와 죄와 죽음이 있는 곳에서 공존한다는 것은 성경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다스리는 곳에서 죄와 사망과 반역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역사적 전 천년설이라 합니다.
그리고 전 천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다른 한 부류는 세대주의적 전 천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이 사람들의 주장은 거의 이단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아마 많은 한국 교회가 이 세대주의적 전 천년설을 지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 교회의 역사가 100년밖에 안되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한국 교회들이 바른 교리를 정립하지 못하고 표류하고 있을 때 스코필드 박사의 스코필드 주석이 한국에 들어오고 세대주의가 급속히 퍼졌습니다. 게다가 어네스트 앵글리라는 사람이 “휴거”라는 책을 써서 전 세계적으로 대 히트를 쳤습니다. 그 책이 바로 세대주의적 해석으로 성경을 풀어 소설화 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중고등부까지 읽어야 하는 필독 도서였습니다.
그래서 세대주의적 전 천년설이 자연스럽게 교회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세대주의자들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을 합니다. 그래서 굉장히 과학적이고 논리적입니다. 그렇지만 교계에 많은 오해를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세대주의 자들은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를 별개의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신약의 교회들에게는 구약이 아무 상관이 없는 책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스라엘과 교회 두 부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교회의 구원의 방법을 달리 정하셨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구약의 언약의 성취를 도모하셨지만 이스라엘이 거부했기 때문에 , 유대인들로 만드시려 했던 왕국은 잠깐 보류하시고 교회들을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무엘하7장에 나오는 다윗언약을 이스라엘을 통해 이루려 하셨는데 이스라엘이 거부하는 바람에 잠깐 보류하시고 교회를 구원하시기로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 육적 이스라엘 왕국은 이 땅에 세워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교회시대가 끝나고 예수님께서 공중 재림을 하십니다. 교회들은 예수님의 공중 재림 시에 모두 휴거를 합니다. 그리고 7년간 혼인잔치를 하고 지상에서는 7년간 대 환난이 있다고 믿습니다. 7년 대 환난 기간 동안에 적그리스도가 맹위를 떨치고 7년 대 환난 기간 동안 이스라엘의 남은 자 144.000 명이 구원을 받고 그들의 활약으로 허다한 무리가 구원을 받게 되며 그 환난 기간 동안 이스라엘에게 잘 해준 사람들을 양이라 하고 그들을 핍박한 사람들을 염소라 한다고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의 심판을 해석합니다. 7년 대 환난이 끝날 즈음 땅의 왕들과 짐승들의 군대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대항하여 아마겟돈 전쟁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내려오셔서 그 원수들을 멸하시고 아마겟돈 전쟁을 종결하십니다. 그리고 유대인들과 7년 환난동안 순교한 신자들이 천국에서 다시 내려와서 천년 동안 다스리는 이스라엘 왕국이 회복되며 구약의 이사야나 예레미야 서 같은 선지 서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모든 예언이 다 이루어집니다. 천년 왕국이 끝날 즈음에 사탄이 잠깐 옥에서 풀려 나와 천년 왕국에 사는 사람 중에 믿지 않는 사람들을 모아 곡과 마곡의 전쟁을 일으키지만 예수께서 이제 영원히 그들을 불 못에 던져 넣으시고 영원한 천국이 온다는 것이 세대주의적 전 천년설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미 우리 교회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나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들을 통해서 올바른 성경 교리에 대해서 잘 배우셨으니까 들으시면서 말이 안 된다 하실지 모르겠지만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그럴듯한 시나리오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가 바른 교리를 정립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른 교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절대 미혹되지 않습니다.
이 세대주의 전 천년설의 문제점은 제가 말씀 드리지 않아도 아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스리시는 왕국에 여전히 범죄가 남아있고 예수님을 공격하는 자들이 생긴다는 것도 우습지만 이미 천국에 가있던 사람들이 내려와서 이 땅에서 천년을 살다가 다시 올라간다는 것도 말이 안 됩니다. 그들의 자녀들이 타락한다는 것도 어불성설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주장대로 이스라엘과 교회는 완전히 다른 것을 이야기한다면 구약은 우리 교회들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책입니다. 오늘부터 구약 성경은 다 찢어 버릴까요?
성경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세대주의적 전 천년설을 주장하는 분들이 7년 대 환난이라는 기간을 잡은 것은 다니엘 서 9장의 내용에서 나온 것입니다.
(단9:24-27) 24 하나님께서 너의 백성과 거룩한 도성에 일흔 이레(또는 '주간')의 기한을 정하셨다. 이 기간이 지나가야, 반역이 그치고, 죄가 끝나고, 속죄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이 영원한 의를 세우시고, 환상에서 보이신 것과 예언의 말씀을 이루시고, 가장 거룩한 곳에 기름을 부으며(또는 '가장 거룩한 것' 또는 '가장 거룩한 분'), 거룩하게 구별하실 것이다.
25 그러므로 너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아 알아야 한다. 예루살렘을 보수하고 재건하라는 말씀(또는 '명령')이 내린 때로부터 기름을 부어서 세운 왕(또는 '메시아')이 오기까지는 일곱 이레가 지나갈 것이다. 그리고 예순두 이레 동안 예루살렘이 재건되어서, 거리와 성곽이 완성될 것이나, 이 기간은 괴로운 기간일 것이다.
26 예순두 이레가 지난 다음에, 기름을 부어서 세운 왕이 부당하게 살해되고, 아무도 그의 임무를 이어받지 못할 것이다. 한 통치자의 군대가 침략해 들어와서, 성읍과 성전을 파괴할 것이다. 홍수에 침몰되듯 성읍이 종말을 맞을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전쟁이 끝까지 계속되어, 성읍이 황폐하게 될 것이다.
27 침략하여 들어온 그 통치자는 뭇 백성과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굳은 언약을 맺을 것이다. 그리고 한 이레의 반이 지날 때에, 그 통치자는 희생제사와 예물드리는 일을 금할 것이다. 그 대신에 성전의 가장 높은 곳에 흉측한 우상을 세울 것인데, 그것을 거기에 세운 사람이 하나님이 정하신 끝 날을 맞이할 때까지, 그것이 거기에 서 있을 것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인간 세상의 종말, 즉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오는 시기를 70이레로 기한을 정하셨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칠십 이레가 가면 이 세상의 종말이 오는 것입니다.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 왕 때 성전을 재건하라 명령하셨습니다.
그 때로부터 성전이 재건 될 때까지가 일곱이레요 기름 부은 왕이 오실 때까지가 62이레입니다. 그럼 7더하기 62하면 얼마입니까? 69이레지요. 그럼 세상의 종말까지 얼마나 남은 것입니까? 한 이레 남았습니다. “이레”라는 것은 뭐지요?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닷새, 엿새, 이레의 그 이레입니다. 7이라는 것입니다. 세대주의자들은 이것을 7년으로 잡아서 다리오 왕 원년서부터 70이레 즉 490년 후에 이 세상의 종말이 오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490년이 지난 지 오래입니다. 아직 종말이 오지 않았지요? 그래서 남은 한 이레 7년을 뒤로 뺀 것입니다. 그래서 그 7년이 지나면 종말이 온다, 하나님 왕국이 임한다 해서 7년 대 환난이라는 것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7년 대 환난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물론 대 환난의 시기는 있지요. 바로 지금이 그 대 환난의 시기입니다. 여러분 세상을 너무 호락호락하게 보시면 안 됩니다. 여러분은 지금 성경이 말씀하고 계신 대 환난의 시대를 살고 계시는 것입니다. 왜 여러분의 삶이 그렇게 힘이든지 아시겠어요?
그럼 지금 이 다니엘서의 이야기는 무슨 뜻이냐? 27절을 다시 한 번 보세요.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마지막 한 이레 7이 남았지요?
그런데 그 한 이레의 절반에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제사와 예물을 금지한다고 합니다.
제사와 예물이 금지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성전이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제사와 예물을 갖다 바치던 성전이 언제 파괴됩니까? AD70년 로마의 타이터스에 의해 성전이 파괴됩니다. 이제 그 때부터 종말까지 몇 이레가 남았습니까? 반 이레가 남았지요? 반 이레는 얼마입니까? 3과 2분의1
그 때부터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를 우리는 교회시대, 은혜의 시대, 삼년 반, 한때 두 때 반 때, 1260일, 42개월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계시록이나 묵시문학에 자주 나오는 숫자들이지요? 그 숫자들이 바로 우리 교회시대, 그리고 개인 적으로는 교회의 인생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7년 대 환난이 언제 올까 두려워하지 마세요. 여러분은 지금 그 대 환난의 시기를 잘 견디고 있은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가 고난을 안 당하는 게 이상한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후 천년설을 주장하는 분들이 이렇게 주장합니다. 이제 세 번째 설로 넘어가는 겁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고난도 없고 실패도 없이 점점 승승장구하여 그리스도의 푸른 계절이 이 땅에 오게 되어 자연스럽게 천년 왕국으로 이어질 것이며 천년동안 세상 모든 민족이 모두 복음화가 되어 그야말로 지상천국이 이루어 질 것이며 그 천년 왕국이 끝나면 예수님께서 재림하신다고 주장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고난이나 핍박에 관한 내용은 이미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AD70년 이전에 다 이루어진 것이고 교회에는 이제 고난이나 핍박은 없으며 우리는 북진, 서진 , 동진, 남진하여 세계를 복음으로 정복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선교대회 같은 데 가면 이런 구호 많이 들 듣지 않으십니까? 나가서 승리하자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분명 우리는 승리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모습의 그런 승리가 아닙니다. 우리의 승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승리인 것입니다. 사탄이 결박되었고 우리가 승리하고 있다는 것은 오늘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세계 어느 구석에 있든지 구원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한 번도 실패 한 적이 없습니다. 아프리카 오지에 숨어 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해 내지 못하지 않으십니다. 바로 그 승리인 것입니다. 영적인 승리인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이 땅에서 잘 먹고 잘살게 되고 높은 자리에 앉게 되는 그런 승리가 아니라 영적인 승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승리의 모습은 이 땅에서 벌거벗고 십자가에 매달리는 모습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리는 모습으로 보이는 승리입니다. 톱으로 켜이며 온 몸의 피를 모두 쏟아내는 모습의 승리입니다. 그러한 죽음이 하늘에 계신 영광의 왕의 대관식으로 이어졌던 것처럼 우리의 고난의 모습은 영적인 승리를 반증하는 것입니다.
(벧전2:21) 바로 이것을 위하여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여러분이 그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시려고, 여러분에게 본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의 능력으로 병이 나아야 한다고요? 예수를 믿으면 예수의 이름으로 부자가 되어야 한다고요? 예수를 믿으면 예수의 능력으로 출세를 해야 한다고요?
성경 어디에 그런 구절이 있습니까? 우리는 분명 승리하지만 가시적으로 볼 때는 우리는 매일 매일 지는 모습으로 가는 것입니다.
(계13:5~7) 5 그 짐승은, 큰소리를 치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입을 받고, 마흔두 달 동안 활동할 권세를 받았습니다.
6 그 짐승은 입을 열어서 하나님을 모독하였으니, 하나님의 이름과 거처와 하늘에 사는 이들을 모독하였습니다.
7 그 짐승은 성도들과 싸워서 이길 것을 허락받고, 또 모든 종족과 백성과 언어와 민족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았습니다.
짐승이 마흔 두 달 동안 성도들을 이기는 권세를 받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지는 모습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한군데만 더 찾아보겠습니다.
(계11:1-12) 1 나는 지팡이와 같은 측량자 하나를 받았는데, 그 때에 이런 말씀이 내게 들려왔습니다. "일어서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을 측량하고, 성전 안에서 예배하는 사람들을 세어라.
2 그러나 그 성전의 바깥 뜰은 측량하지 말고, 내버려 두어라. 그것은 이방 사람들에게 내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 거룩한 도시를 마흔두 달 동안 짓밟을 것이다.
3 나는 내 두 증인에게 예언하는 능력을 줄 것이다. 그들은 천이백육십 일 동안 상복을 입고 예언할 것이다."
4 그들은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님 앞에 서 있는 올리브 나무 두 그루요, 촛대 두 개입니다.
5 그들을 해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서, 그 원수들을 삼켜 버릴 것입니다. 그들을 해하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6 그들은, 자기들이 예언 활동을 하는 동안에, 하늘을 닫아 비가 내리지 못하게 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물을 피로 변하게 하는 권세와, 그들이 원하는 대로 몇 번이든지, 어떤 재앙으로든지, 땅을 칠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7 그러나 그들이 증언을 마칠 때에, 아비소스('밑바닥이 없는 깊은 곳'을 일컫는 그리스어)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싸워서 이기고, 그들을 죽일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무슨 말씀이 생각나십니까? 사도 바울이 고린도 전서에서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죽이기로 작정한 자들처럼 미말에 두셨다고 하지요? 우리는 세상에서 이렇게 죽는 모습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8 그리고 그들의 시체는 그 큰 도시의 넓은 거리에 내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 도시는 영적으로 소돔 또는 이집트라고도 하는데, 곧 그들의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곳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모습으로 우리는 가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뭡니까? 배반당하고 오해받고 고난 받고 죽는 것입니다.
9 여러 백성과 종족과 언어와 민족에 속한 사람들이 사흘 반 동안 그 두 예언자의 시체를 볼 것이며, 그 시체가 무덤에 안장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10 그리고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이 그 시체를 놓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서로 선물을 보낼 것입니다. 그것은 이 두 예언자가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을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를 증거 하는 삶이 세상에게는 고문이었다는 말입니다.
11 그러나 사흘 반이 지난 뒤에, 생명의 기운이(또는 '영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그들 속으로 들어가니, 그들이 제 발로 일어섰습니다. 그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12 그 두 예언자가 "이리로 올라오너라" 하는 큰소리가 하늘로부터 자기들에게로(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내게로') 울려오는 것을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이 그것을 지켜 보았습니다.
우리는 총 칼을 동원하여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푸른 계절을 만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출세하여 떵떵거리며 “봤지? 예수 믿으면 이렇게 잘 살게 된다.” 이런 모습으로 싸우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고난과 아픔 속에서도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승리입니다. 우리는 순교하는 겁니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죽는 것입니다. 왜 계시록에서 우리 모든 성도들을 가리켜 순교자라 부르는지 아십니까? “예수 믿을래? 안 믿을래? 예수 믿으면 죽인다.” 그래서 죽는 것은 차라리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랑하는 가족에게 미움을 받고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그 복음을 붙들고 가슴으로 울면서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바로 순교입니다.
“내 가족의 기분을 이렇게 까지 상하게 하면서 내가 꼭 그렇게 유별나게 굴어야 하나? 나만 흔들리지 않으면 되지 뭐, 지금은 가족들 기분 맞춰 주자” 그건 효도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며 우정도 아닌 자기 도피입니다. 지금 당장 편하고 싶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예수 때문에 순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 입니다.
하나님께서 요한 계시록의 일곱 교회에게 무어라고 말씀하십니까?
‘이기는 자는, 이기는 자는, 끝까지이기는 자는‘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자들에게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게 하리라,
둘째 사망의 해를 당치 아니하리라,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꼭 이겨야만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뒤집어 생각해 보면 우리는 반드시 천국에 가게 될 것이기 때문에 꼭 이기게 될 것이란 것을 확증해 주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겨야 합니다. 그리고 이길 겁니다. 그리고 지금 이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고 계십니다.
(계12:5-6) 5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6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일천 이백 육십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그러나 세상은 우리가 패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이기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승리는 바로 그런 승리입니다. 우리 힘으로 그리스도의 푸른 계절을 이 땅에서 만드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독립운동을 하던 우리 조상들을 생각해 보세요. 그들에게 광복의 소망이 없었다면 그들이 어떻게 그 어려움을 감수했겠습니까? “너희들은 아무리해도 일본의 손에서 놓여날 수 없어, 그러니까 애초에 포기해” 누군가가 그런 정답을 미리 알려 줬다면 무슨 기운이 나서 싸울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소망을 가진 것입니다. 광복은 반드시 온다. 해방의 날은 반드시 온다. 그러니까 조금만 참자. 이까짓 추위, 배고픔 , 조금만 참자. 그렇게 견뎌 낸 것입니다.
조두남 선생이 만주 목단강 부근에서 살고 계셨을 때입니다. 하루는 기골이 장대한 독립군 청년이 말을 타고 선생님을 찾아왔더랍니다. 그리고는 두루 마리를 하나 내밀었는데 그것은 누군가가 지은 대한 독립군가 가사였습니다. 그는 조두남 선생에게 정중하게 부탁했습니다. 선생님, 우리 독립군가를 좀 만들어 주십시오. 며칠 내로 다시 오겠습니다. 중요한 전투가 있어서 저는 그 곳에 다녀와야 합니다.
조두남 선생이 독립군가를 다 만들어 놓고 그 독립군 청년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 청년은 끝내 오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 전투에서 전사를 했거나 감옥에 투옥이 되었을 것입니다. 조두남 선생이 그 청년 독립군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며 만든 노래가 바로 선구자입니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 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 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눈에 보이지 않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도 그렇게 목숨 걸었던 우리 선배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승리했다고 너희들은 절대지지 않는다고 싸움의 결과까지 명확하게 보여 주신 싸움에 어찌 우리가 이렇게 나약하게 주저앉아 계십니까? 일어서세요, 타협하지 마십시오.
끝까지 가십시다.
여러분, 하나님의 교회는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늘에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속한 것이라면 예수님은 그렇게 죽으시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현장에서 십자가를 뽑아들고 마징가 제트가 되셔서 로마 군인들을 다 때려죽이고 이스라엘에게 자유를 주셨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 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증거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보여주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 나라 자체인 것입니다. 그 교회들이 왜 이 땅에 그렇게 연연하며 살고 계십니까? 저 영광스러운 천국을 바라보십시오. 잔치 준비를 끝내놓고 보좌 우편에 서서 우리를 내려다보시며 응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제36장 교회 (4) 교회의 본무-1 교회, 거룩을 향하여 가는 자들
(살전4:3-8)
3 하나님의 뜻은, 여러분이 성결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음행을 멀리 해야 합니다.
4 각 사람은 자기 아내를 거룩함과 존중함으로 대할 줄 알아야 합니다(또는 '자기 아내를 자기 몸처럼 대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는 '자기 몸을 거룩함과 존중함으로 대할 줄 알아야 합니다').
5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사람과 같이, 색욕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6 또 이런 일에 탈선을 하거나, 자기 형제자매를 해하거나,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에도 말하고 경고한 대로, 주님께서는 이런 모든 일을 징벌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7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신 것은, 더러움에 살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에 이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8 그러므로 이 경고를 저버리는 사람은, 사람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시는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난 시간에 교회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것이라는 것을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하늘에 속한 자들답게 하늘의 것을 추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맺었습니다.
그러면 하늘의 것을 추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즉, 이 땅에서의 교회의 본무(本務)는 무엇인가에 대해 오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우리가 잘 아는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부터 복습을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이 우주가 창조되기 전에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하나님 나라가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삼위 하나님께서 충만한 거룩과 기쁨과 안식 속에 거하시던 곳이었습니다.
언젠가 이 우주는 모두 불타 없어져 버릴 것입니다. 그러면 그 후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역시 하나님 나라입니다. 거기에는 창조 전의 하나님 나라와 사뭇 다른 것이 있습니다. 삼위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바로 교회가 그 곳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 나라에서 충만한 거룩과 기쁨과 안식 속에 존재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충만한 거룩과 기쁨과 안식을 어떤 한 무리와 공유하고 싶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누리시는 모든 것을 함께 누리게 해 주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시고 무소 부재하신 시간과 공간의 구애를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시간과 공간의 제한이 없는 어떤 것을 계획하셨다면 곧 그것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그 능력의 하나님께서 그냥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들어서 “뿅”하고 넣으시면 될 것을 왜 이 우주를 창조하시고 시간이라는 것을 두셨으며 역사를 경륜해 가실까요? 왜 하나님의 백성들은 꼭 이 광야의 시간을 지나가야 할까요? 어차피 하나님의 백성들의 목적지는 그 충만한 기쁨과 안식이 있는 하나님 나라인데 왜 찰나에 불과한 이 광야를 꼭 지나가야 하는 것입니까?
바로 “거룩”을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다움을 배우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들의 이 땅에서의 유일한 해야 할 일은“자신들의 거룩”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민수기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머릿수를 세지요? 그래서 민수기(numbers)입니다. 처음에 애굽에서 몇 명이 나왔다고 합니까? 장정만 60만 명, 그들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광야에서 다 죽습니다. 그리고 민수기 마지막에서 가나안에 들어가는 새로운 사람들의 머릿수를 세는데 몇 명입니까? 60만 명입니다. 즉 우리의 인생, 교회의 인생에서는 반드시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되어서 가나안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그 거룩을 배우고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벌거벗은 아담과 하와를 의의 흰옷을 입은 요한 계시록의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가시기 위해 이 우주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이 역사에 던져 넣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에덴에서 벌거벗고 사는 인간들을 만드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계시록 21장22장의 그 의의 흰옷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 사는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그것을 이루시기 위해 에덴에서 벌거벗은 모습으로부터 시작하신 것입니다. 에덴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시려고 했는데 인간들 때문에 실패해서 또 다른 방법들을 동원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처음부터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도하시기 위한 계획을 가지고 창조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 교회는 이 땅에서 거룩한 백성으로 지어져 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골1:21-22) 21 전에 여러분은 악한 일로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었고, 마음에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었습니다.
22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의 육신의 몸으로 여러분과 화해하셔서, 여러분을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으로 자기 앞에 내세우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향하신 목적은 우리 교회를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하나님 앞에 세우는 것입니다.
(마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에서 살 자들이기 때문에 그 거룩함, 온전함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하나님 나라에 못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이 역사에 던져 넣으셔서 성화의 과정을 겪게 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완전 성화는 이 땅에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우리의 거룩을 요구하고 계시고 훈련하라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죽는 날까지 거룩을 향해 달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그 수준까지 가게 될 것입니다.
(엡4:13)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반드시 그렇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그 거룩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금방 성인이 될 것 같은 착각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보낼 때 그들을 가리켜 ‘신자다, 성도다‘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씁니다. 고린도 교회가 어떤 문제 속에 있었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그들은 근친상간을 했고 우상을 섬겼고 분파를 이루어 싸웠고 은사 문제로 골머리를 썩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신자다, 성도다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라 가는 단계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슨 업적을 쌓지 않은 것에 대해 책망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다움을 소홀히 할 때,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품이나 인격에 미달 될 때는 경고를 하십니다.
(히5:12-13) 12 시간으로 보면, 여러분은 이미 교사가 되었어야 할 터인데,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적 원리를 남들에게서 배워야 할 처지에 다시금 놓여 있습니다. 여러분은 단단한 음식물이 아니라, 젖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13 젖을 먹고사는 사람은, 누구나 다 어린 아기이므로, 옳은 가르침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예수 믿은 햇수가지고 따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오래 예수를 믿어도 여전히 젖 먹는 수준에 머무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무엇이 옳은 말씀인지 분별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이 땅에서 그렇게 거룩을 향해 자라 가는 것을 본질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교회가 이 땅에서 무언가 큰 업적을 이루어 하나님의 일을 도와야 하는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해서 하나님의 점수를 따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심지어 구원도 우리가 뭔가를 해서 하나님께 점수를 얻어야 가능한 것인 양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이단이라 합니다. 구원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그것을 손상시키는 교리는 절대 용납이 안 되는 것입니다.
(마7:13-15)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14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너무나도 좁고, 그 길이 험해서, 그 곳을 찾아오는 사람이 별로 없다."
15 "거짓 예언자들을 삼가라. 그들은 양의 탈을 쓰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굶주린 이리들이다.
우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구원을 얻습니다. 그런데 마치 이 구절은 우리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래서 이단들이 이 구절을 대면서 “봐라, 우리가 이렇게 노력해야 한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눅13:23-24) 23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24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들어가려고 해도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좁은 문은 들어가기를 힘써도 못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약을 올리는 것도 아니고 이게 도대체 무슨 말씀일까요?
(요10:7-10) 7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들이 드나드는 문이다.
8 나보다 앞에 온 사람은 다 도둑이고 강도여서, 양들이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9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이 문으로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들어오고 나가면서 꼴을 얻을 것이다.
10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려고 오는 것뿐이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서 풍성함을 얻게 하려고 왔다.
그 우리가 들어가야 할 좁은 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인 것입니다. 그 좁은 문은 노력해서 열심히 업적을 쌓아서 들어 갈 수 있는 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힘써 노력하고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전적인 은혜로 우리에게 선물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나님께 점수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이단 중의 이단인 것입니다.
(엡2:8-9) 8 여러분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9 구원이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님은, 아무도 그것을 자랑할 수 없게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일단 이렇게 우리의 행위와 우리의 구원, 하나님의 백성의 자격, 교회의 자격은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우리가 어디서부터 착각을 하느냐 하면 우리는 뭔가 다른 사람들과 달라서, 구원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을만한 실력이 있는 사람이므로 이제 뭔가 하나님을 위해 할 일이 있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뭔가 달라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똑 같은 죄인이었는데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은혜가 우리를 뚫고 들어와서 우리를 구원해 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받은 죄인으로서 거룩이라는 목표지점을 향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거룩하기 때문에 불러낸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만들기 위해서 불러내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오해 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죄인들인 애굽 사람들과 다른 선민이라 생각했습니다. 선민인 자기들이 죄인들인 애굽 사람들에게 고통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의인들인 자기들을 불러내셨다고 착각을 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똑같은 죄인이었습니다. 그들이 뭐가 잘나서가 아니라 수효가 적은 연고로 불러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을 불러내셔서 교회를 설명하실 수도 있었고 앗수르를 사용하셔서 교회를 설명하실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의인이었다면 왜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셔서 시내 산으로 먼저 데리고 가셨겠습니까?
왜 거기서 율법을 주셨지요? ‘너희는 이제 구원받은 자들이므로 거룩하게 살아라.‘ 하고 거룩을 가르치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교회의 유일한 본무(本務)는 거룩하게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에베소서에서 공부한 것처럼 우리를, 교회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예수님이라는 머리에다가 몸으로 붙여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교회”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피가 통하고 한 영으로 묶이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하면 마치 우리가 하나님을 도와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치 우리가 움직이지 않으면 하나님의 손발이 묶일 것 같은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의도에서 나온 행위는 오히려 하나님의 분노만 격발케 한다는 것을 성경에서 읽으면서도 그렇습니다.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 자존심을 지키겠다는 것이지요. 어떻게 내가 아무 것도 안 하고 열매를 따느냐 는 것입니다. 참 훌륭한 겸손 같지만 그것이 바로 자기를 나타내고 싶어 하는 인간의 원죄의 정체 아닙니까? 아무리 하나님이라 해도 내 체면상 거저는 못 받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론 첫 시간에 살펴 본 베드로의 이야기를 보세요. 베드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만 우리가 구원 될 수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뭔가 자기들도 할 것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으신다고 하니까 “안 된다”고 꾸짖은 것입니다. 성경이 뭐라고 말씀하고 있는지 보십시오. 그런 베드로를 향해서 “사탄”이라고 호통을 치시고 뭐라 하십니까?
(마16:27) 인자가 자기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자기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터인데, 그 때에 그는 각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갚아 줄 것이다.
베드로를 꾸짖으신 후에 예수께서 오실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시겠다고 하십니다. 베드로의 행위 같은 것은 “혼이 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행위는 아니란 것입니다. 그럼 무엇을 해야 하느냐?
마16장24절에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즉 신앙이라는 것은 Doing의 문제가 아니라 Being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무엇을 하겠다고, 나를 위한답시고 십자가를 가로막고 서는 행위를 하지 말고
자기를 부인하는 자,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살아 내는 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의지해서 살아가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 교회의 목표요 책임이요 본질은 바로 성품과 인격에 관한 것이지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런데 자꾸 우리는 “유대인 나쁜 놈들, 내가 그 때 있었다면 예수님을 잡아가려고 했던 그 놈 들과 목숨 걸고 싸웠을 텐데” 내가 나의 생각으로 예수를 위해 뭔가를 하려고 합니다. 그게 베드로라니까요. 우리는 예수님을 도와 무엇을 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거룩을 이뤄가야 하는 자들입니다. 이 땅에서 무슨 업적 쌓는 것 아닙니다.
(마7:21-23) 21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
우리가 행해야 하는 것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해야 하는 것이지 “선지자 노릇한 것과 귀신 쫓아낸 것, 그리고 수많은 권능을 행한 것”이런 것은 교회의 본질이 아닌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내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24절부터 나오는 이야기가 뭡니까?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을 비교해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반석 위에 지은 집, 즉 예수 그리스도를 근거로 하여 나온 행위는 하나님께 칭찬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에 감격해서 나온 행위가 아닌 것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것입니다.
둘 다 집은 지었습니다. 오히려 모래 위에 지은 집이 더 훌륭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이 우주가 불 탈 때 함께 불에 타버릴 것입니다. 우리가 똑같은 행위를 하면서도 어디서 근거하여 나온 행위냐에 따라 그 결과는 극과 극으로 갈린다는 것입니다.
(빌2:1-8) 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 어떠한 격려나, 사랑의 어떠한 위로나, 성령의 어떠한 교제나, 어떠한 동정심과 자비가 있거든,
2 여러분은 같은 생각을 품고,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고, 한 마음이 되어서, 나의 기쁨이 넘치게 해주십시오.
3 어떤 일을 하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서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
4 또한 여러분은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아 주십시오.
5 여러분은 이런 태도를 가지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께서 보여 주신 태도입니다(또는 '여러분은 이런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
6 그분은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8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이 말씀 5절부터의 내용은 너희가 어떤 일을 할 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죽기까지 자기를 낮추시고 복종하신 그 예수의 마음으로 겸손히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일을 할 때입니까? 너희가 사랑을 하고 긍휼을 베풀고 권면을 하고, 교제를 하고 자비를 베풀고 할 때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착한 일을 할 때 , 착한 일 했다고 거만 떨지 말고 겸손히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으로 그 행위들이 나오는지를 점검하라는 것입니다. 아니면 너희는 모래 위에 집을 짓고 있는 사람들이며 예수께서 그들에게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는 말씀을 하실 것이란 것입니다.
그런 일들을 자기 자랑삼아 하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다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은 자랑을 하지요? 왜 무슨 선한 일을 할 때면 일부러 사람 많은 곳에서 합니까?
왜 명품이다. 좋은 차다. 좋은 집이다. 자랑을 합니까? 자기 안에 자랑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면 적인 아름다움, 훌륭한 인격과 성품이 없으니까 다른 것으로 포장을 해서 자랑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관심 없습니다. 조금 부러워 해 주는 것 같지만 금방 자기 문제에 몰두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오히려 질투나 시기를 하지 않으면 다행이지요. 금방 앞에서는 부러워하는 척 하다가 뒤돌아서면 어떤 꼬투리를 잡아서 욕을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자랑으로 나오는 선한 행위들은 거룩과는 상관없는 것들입니다.
사도행전의 스데반의 죽음을 보십시오.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고 그 모습이 천사 같았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좌 우편에 서서 그를 지켜보시고 계실 정도로 그는 훌륭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단 한 명도 회심시키지 못하고 그냥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돌에 맞아 죽으면서 그가 한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를 돌로 찍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는 거룩한 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죽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폼 잡으려고 그런 이야기했겠습니까? 사람은 죽음 앞에서는 가장 진실해 지는 법입니다.
그 자리로 너희들 모두가 자라나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고 안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너희가 얼마나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신분에 맞게 변했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베드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로 3000명씩 회개하고 돌아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말 한마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감옥에서도 천사가 와서 감옥 문을 열어 주어 탈출을 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어떻게 됩니까? 또 감옥에 가서 그 때는 실컷 두들겨 맞고 나옵니다. 왜, 베드로를 때리는 자들의 손목이 부러지지 않았을까요? 왜 그 때는 천사를 시켜 감옥 문을 부수지 않으셨습니까?
그들은 실력자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실력자요? 이런 실력자요.
(행5:40-41) 40 그리하여 그들은 사도들을 불러다가 때린 뒤에,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고서 놓아 주었다.
41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 것을 기뻐하면서, 의회에서 물러 나왔다.
그들은 주님께서 자기들을 예수님을 위해 매를 맞고 능욕 당할 수 있는 자로 여겨 주심을 오히려 기뻐하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들이 어떤 일을 해 주기를 원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런 실력자로 변해 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바쁜 사도 바울을 계속 감옥에 넣고 매를 맞게 하십니까? 하나님의 일이 목적이라면 그가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일을 더 할 수 있게 돈도 갖다 대 주시고 투옥도 막아주시고 하셨어야 옳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그런 것들을 막아주시지 않으셨을까요? 왜 죽은 사람까지 살려 낼 수 있었던 그가 결국 사도행전 마지막에 로마로 묶여서 끌려가는 것으로 끝날까요?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해 나가십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누가 가십니까? 예수님께서 가시지 않습니까? 성령님께서 가시지 않습니까? 우리가 선교라는 주제로 공부할 때 살펴 보았잖아요? 하나님은 사도 바울의 거룩이 목적이시지 그가 다른 이들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그를 쓰신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 있었을 때 하나님의 일은 더 활활 불이 붙었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의 거룩을 만들어 가시면서 그 길에서 하나님의 일에 사도를 부르신 것입니다. 사도의 거룩을 위해서. 이렇게 교회의 본질, 교회의 본무는 얼마나 기독교적인 열심을 갖고 주를 위한 일을 하고 업적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어 있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서는 하나님의 뜻에 맞는 행위가 나오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순서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선순위를 어디에다 두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목표이시지 우리를 이용해서 일을 시키시는 분 아니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거룩을 이루어 가면서 순교도 하고 선교도 하고 전도도 하고 봉사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거룩이 만들어져 가는 길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그 분의 일에 동참하는 기쁨을 주시는 것입니다.
(요6:28-29) 28 그들이 예수께 물었다.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됩니까?"
29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의 일이 뭐라고요?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를 제대로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예수는 알지도 못하면서 선교다 전도다, 봉사다, 여전도 회다, 남전도 회다 이런 거 하면서 자기 자랑을 위해 뛰어다니는 것은 하나님의 분노만 격발케 할 뿐입니다.
먼저 예수를 아십시오.
예수를 공부하십시오.
그리고 그 은혜가 못 견디게 감사해서 가만히 있으실 수 없거든 겸손하게 다른 지체들을 위해 섬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제37장 교회 (5) 교회의 본무-2 교회, 율법을 즐거워하는 자들
(롬 10:4)
4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믿는 사람을 의롭게 해주시려고 율법에 끝마침이 되셨습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교회의 본무(本務)가 거룩을 향하여 가는 것이라는 아주 기초적인 교회의 본무(本務)에 관해 공부했습니다. 어떠세요? 여러분 일주일 동안 거룩을 열심히 연습하셨습니까? 우리 신앙의 선배들처럼 목록을 적어가며 연습하셨습니까? 어떠셨습니까? 잘 되던 가요? 시도도 안 해 보셨나요? 제가 설교하고 저 만 하고 있나요?
머리로만 알고 있고 행함이 없는 것은 죽은 믿음이라고 야고보 사도께서 말씀하시던데.
우리는 계속해서 교회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 땅의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며 영적으로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모델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증으로, 즉 계약금으로 와 계신 성령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미 그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맛보고 있고 그 나라를 살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곳입니다.
나라, 국가라는 것은 그 요소를 국민 주권 영토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는 하나님 나라 국민이고 하나님은 우리를 주권을 가지고 통치하시는 곳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러면 통치가 있는 곳에는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 물리학에서도 작용 반작용이라는 뉴턴의 법칙이 있지요? 마찬가지로 통치가 있으면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 그 통치에 굴복하는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며 이미 그 나라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순종하는 자리로 계속해서 자라가야 한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 예수를 잘 믿고 그 분이 살아내신 그 삶을 살기를 소망하는 것이다”라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난주까지 우리가 내린 결론이지요?
오늘은 교회의 본무 두 번째 시간으로 참 교회들은 왜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 수 밖에 없고 그 삶을 소원하는가에 대해 공부하겠습니다.
교회 안에는 분명 알곡과 가라지가 공존합니다. 누가 알곡이고 누가 가라지인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할지라도 강도, 도둑놈, 사기꾼 등 악당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반면에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흠 잡을 곳이 없는 사람도 정작 예수님을 알지 못 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이고요.
그러나 그가 정말 알곡이라면 그 사람은 매일 매일 조금씩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기 위해 애를 쓰게 됩니다. 아니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비록 실패하더라도 안간힘을 쓰며 거룩을 향해 일어섭니다. 참 교회들은 범죄 했을 때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괴로워하고 고민 하게 되며 하나님께 죄송한 마음이 들게 됩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켜라 하신 것을 지키고 싶어 하고, 하지 말라 하신 것을 금하려는 마음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22장에 천국에 관한 비유가 나옵니다. 왕이 아들의 혼인잔치에 사람들을 초청합니다. 사람들이 오지 않습니다. 왕이 종들에게 길거리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모두 불러 모으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잔치에 온 사람 중에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묶어서 어두움에 내 던져 버립니다. 무슨 말입니까? 교회 안에서 알곡과 가라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혼인잔치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진짜들은 예복을 갖추더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삶에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인 거룩이 나타나더라는 것입니다. 그게 나타나지 않는 사람은 다 어두움에 내치게 되고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는 어떤 이야기가 있습니까?
주인이 밭에다가 좋은 씨를 뿌려 두었는데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습니다.
종들이 와서 주인님 밭에 가라지가 많습니다. 뽑아버릴까요? 합니다. 주인이 보더니 “음 원수가 와서 뿌리고 갔구나.” 합니다. 그리고는 알곡까지 뽑히지 않도록 놔두라고 하지요?
언제까지 그냥 두라고 하십니까? 추수할 때까지, 그리고 “추수할 때 다 태워 버리자” 하십니다. 이 땅에 종말이 올 때까지 교회 안에 가라지는 존재하는 것입니다.
(마13:47-50) 47 또 하늘 나라는 바다에 그물을 던져서, 온갖 고기를 잡아 올리는 것과 같다.
48 그물이 가득 차면, 해변에 끌어올려 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내버린다.
49 세상 끝 날에도 이렇게 할 것이다. 천사들이 와서, 의인들 사이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서,
50 그들을 불 아궁이 속에 던질 것이니,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이렇게 교회 안에는 가짜들이 늘 섞여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가짜인 줄도 모르고 열심히 앉아있기도 합니다.
(벧전4:16-17) 16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 고난을 당하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17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심판이 우리에게서 먼저 시작되면, 하나님의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의 마지막이 어떠하겠습니까?
(겔9:5-6) 5 또 그는, 내가 듣는 앞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저 사람의 뒤를 따라 성읍 가운데로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쳐서 죽여라. 불쌍히 여기지도 말고, 가엾게 여기지도 말아라.
6 노인과 젊은이와 처녀와 어린아이와 부녀들을 다 죽여 없애라. 그러나 이마에 표가 있는 사람에게는 손을 대지 말아라. 너희는 이제 내 성소에서부터 시작하여라." 그러자 그들은 성전 앞에 서 있던 장로들부터 죽이기 시작하였다.
마지막 심판 때 하나님께서 가라지 들을 다 죽여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랬더니 어디서부터 죽이면서 갑니까? 성소에서부터 성전 앞에 있던 장로들부터 죽이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교회 안에 가짜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가짜들이 저마다 자기는 진짜인줄 알고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심판 때 그들이 어떻게 한다고요? “주님 내가 주의 이름으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했습니다.”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맞는 것인 줄 알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양과 염소의 심판에서도 “주님 내가 언제 안 했습니까?” 하고 따지고 듭니다. 불쌍한 거지요. 평생 동안 하고 싶은 것도 제대로 못하고 그게 옳게 믿는 것인 줄 알고 따라 간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잘 못 간 거예요.
왜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 가짜들을 그냥 놔두실까요?
그 가짜들이 교회에 피해를 주지 않을까요?
구속사를 잘 보세요. 사탄은 예수님을 죽이면 하나님의 계획이 틀어질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것이야 말로 참 승리였습니다. 사탄은 이스라엘을 실패시키면 하나님의 계획이 좌절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그를 미워하여 그를 애굽에 팔아 버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선으로 바꾸셔서 민족을 구원하는 방법으로 쓰셨습니다. 가라지 들이 교회 안에 있는 것이 우리 교회들에게 피해를 줄 것 같지만 그것이 사실은 교회를 더욱 든든히 하고 훈련하는 도구로 쓰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놔두시는 것입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그럼 진짜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거룩을 향해 달려가는 자들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해서 우리는 그 순종의 자리로 갈 수 있게 되는 것이며 그 삶을 사모하게 되는지 제가 오늘 그 비밀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율법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간혹 교회 안의 사람들이 구약의 율법을 들고 와서 “이거 우리가 지켜야 되는 것 아니냐”고 물으십니다. 돼지고기 안 먹어야 하고 안식일을 지켜야 하고 십일조를 내야한다고 합니다.
율법이 무엇인지 알아야 어떤 것은 지켜야 하고 어떤 것은 안 지켜도 되는지 알 것 아니에요.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성경의 원어인 헬라어로 딱 아홉 개밖에 안 되는 단어로 된 굉장히 짧은 문장입니다. 그러나 이 안에는 복음에 관한 성경 교리가 다 들어있어요. 참 놀라운 것입니다. 교리 적인 측면에서 거의 완벽에 가까울 만큼 복음의 핵심을 농축시켜놓은 것이 로마서 10장 4절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이것을 복음의 대헌장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을 우리가 살핌으로써 복음의 요체를 다시 한 번 명쾌하게 정리하고 우리의 책임과 의무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확인해 보겠습니다.
본문에서 가장 중심 되는 두 단어는 ‘율법’이라는 단어와 ‘마침’이라는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뜻이 무엇일까? 그리고 율법의 마침이 됐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이 두 가지를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우선 ‘마침’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텔로스’라는 단어인데요, 원래 ‘텔로’라는 말은
멀리 있는 목표를 말하죠. 그래서 우리가 망원경을 텔레스코프(telescope)라고 말하죠. 텔레폰(telephone)이라는 말도 멀리 있는 사람에게 소리가 가 닿도록 한다는 이런 뜻이 있어요. 그래서 ‘텔로스’라는 말은 멀리 있는 목표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목표라는 의미와 함께 ‘성취 혹은 완성’이라는 뜻이 있고, ‘종결 혹은 마지막’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려고 열심히 노력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율법은 뭔가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어떤 목표 지점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도 율법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히브리어로 “토라”라고 합니다.
우리가 “토라” 하면 모세 오경을 가리키는 말로 알고 있는데, 맞습니다. 구약이 완성된 이후에 구약을 기술적으로 나눌 때 “토라” “느비임” “게투빔”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누고 모세 오경 부분을 “토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토라”라고 쓸 때는 “율법” “하나님의 법” 이라는 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이 “토라”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무엇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지시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율법, 하나님의 법은 무엇인가를 가리키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지금부터 3400년 전에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푸셨습니다. 해방되어서 광야를 거쳐서 가나안 땅으로 가는 그들에게 시내 산에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유대인들은 그 당시에 온 인류의 대표로서 그것을 받은 것입니다.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주고자 한 것이 아니었고, 원래 하나님은 모든 인류에게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시내 산 이전에도 하나님은 인간에게 율법을 주신 적이 있습니다. 어디죠?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절대 먹지 말아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선악과라는 것은 어떤 형태를 가지고 있는 과일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 율법을 지키기만 하면 벌거벗은 몸에다가 거룩이라는 흰옷을 입고 영원히 하나님 나라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타락을 했고 그 벌거벗은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의의 흰옷을 입히시는 전 과정이 기록된 것이 성경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까지에 걸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시고 그 것을 지킬 수 없는 인간을 어떻게 가나안에 데리고 들어가시는 지를 설명해 주십니다.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던 의도는 율법을 통해서 우리의 불가능함을 발견하고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 받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 율법이 가리키고 있는 바, 너희를 진정으로 구원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라!”라는 것이 율법을 주신 목적이에요.
워낙 율법은 하나님의 성품의 표현입니다. 여러분이 율법에서 법(法)이라는 개념을 일단 다 떨쳐버리세요. 율법에 대해서 여러분이 법칙, 규칙이라는 말을 일단은 버리어요. 율법 안에 뭐가 있냐하면 제한되어 있지만 하나님의 성품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이라는 말은 또 바꾸어서 말하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이 워낙 지녔어야할 성품이라는 말과 같죠. 그것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만드신 때 묻지 않은 인간의 온전한 성품이 율법에 그려져 있어요.
십계명은 매우 간단하지만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부모를 공경하고 배우자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이 들어있습니다. 그것은 계명이라기보다 원래 인간이 그렇게 살도록 지어진 인간의 원래 적인 성품, 삶의 모습이 거기 묘사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을 상징하는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실 때는 말하자면 거울로 주신 것입니다.
완전한 인간의 성품이 있는데 타락하게 되어 많이 망가져 있잖아요? 그래서 완전한 성품인 그 율법을 보면 내가 얼마나 일그러졌는가를 알 수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주신 것이에요. 그래서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라는 것입니다. “이거 지키면 구원해 줄께”가 아니라 “너희는 못 지킨다. 그러니까 ‘난 이런 불가능한 자입니다’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해라, 그 때 내가 해결책을 제시 하마“ 이런 의도로 주신 것입니다.
(롬7:7) 그러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을 할 것입니까? 율법이 죄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에 비추어 보지 않고서는, 나는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율법에 "탐 내지 말아라" 하지 않았으면, 나는 탐심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율법을 통해서 내가 저지르는 것들이 죄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거울을 보지 않으면 자기의 허물을 잘 보지 못해요. 그리고
로마서 7장 9절에 이런 말씀이 나오죠.
(롬7:9) 전에는 율법이 없어서 내가 살아 있었는데, 계명이 들어오니까 죄는 살아나고,
율법을 몰랐을 때는 내가 굉장히 괜찮은 사람이고 사는데 아무 지장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율법이라는 거울을 보니까 내가 너무너무 흉하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정말 나는 너무너무 망가진 인간이구나.’ 라는 것을 깨닫고, 그렇게 망가진 것을 고치고 또 그렇게 망가지도록 내가 하나님께 반역했던 죄를 용서받고 정말 회복된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서, 그것을 가능케 해주시는 하나님께 겸손하게 나오도록 하기 위해서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실 때 그러한 인간의 온전한 모습을 담은 법, 규례를 주셨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뭐를 주셨냐하면, 희생 제사, 속죄 제사의 방법을 자세하게 묘사해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이 율법은 인간이 정말 그렇게 살아야 마땅한 가장 이상적인 인간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 법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만일 그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 벌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벌이 무엇인가 하면 사형입니다.
‘살인한 자는, 간음한 자는 돌로 쳐 죽여라.’ 뭐 여러 가지의 형벌이 나옵니다. 율법에서 죄의 모양을 여러 가지로 묘사를 했지만 그 근본 뿌리가 뭡니까? 죄의 본질이 뭡니까? 불순종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것이 왜 죄가 되어 전 인류가 죄인이 된 것입니까? 과일을 먹은 행위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법에 대한 불순종입니다. 그래서 어떤 한 가지라도 지키지 않으면 인간은 불순종의 죄를 짓는 것이고 그것은 사형입니다.
(약2:10-11) 10 누구든지 율법 전체를 지키다가, 한 조목이라도 어기면, 전체를 어긴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11 "간음하지 말아라" 하신 분이, 또 "살인하지 말아라" 하셨습니다. 당신이 비록 간음은 하지 않아도, 살인을 하면, 결국 당신은 율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일점일획이라도 남김없이 지켜져야 합니다. 형량이라는 것은 그 죄를 범한 대상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제가 우리 아들 머리를 한 대 쥐어박은 것으로는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른의 머리를 쥐어박으면 고소당합니다. 부시 대통령의 머리를 쥐어박으면 그 자리에서 경호원들에게 사살됩니다. 그 대상이 하나님이시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우리는 아무리 사소한 죄를 지어도 사형입니다. 그 하나님이 너무 크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히9:22) 율법을 따르면, 거의 모든 것이 피로 깨끗해집니다. 그리고 피를 흘림이 없이는, 죄를 사함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피 흘림이란 말은 상징적인 말이에요. 왜냐 하면 유대인들은 생명이 피에 속해 있다고 생각했어요.
레위기에 이렇게 말씀해요. “모든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느니라.” 그래서 피 흘림이란 말은 생명을 잃음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피 흘림, 생명을 잃음 없이는 죄 사함이 없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구약 시대에도 짐승의 피를 흘려 제사를 지낸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것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상징하는 그림자일 뿐이었습니다.
자! 이 대목에서 제가 여러분에게 또 한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왜 그러면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탁 주시지 왜 헛갈리게 구약시대에는 율법을 제시하고 동물의 피로 드리는 희생 제사를 주고 한참 지난 뒤에야 예수를 보내셨는가? 그런 질문 안 해보셨어요? 왜 성경을 십자가부터 시작하시지 구약을 거쳐서 한참 뒤에야 십자가를 보여주십니까?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계시의 점진 성이다 그렇게 말해요. 계시의 점진 성!
우리가 만일 비가 내리고 천둥과 번개가 치는 이 원리를 설명하려고 할 때 유치원 아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어요? 가장 단순한 그림으로, 그냥 크레파스로 종이에다가 “여기 구름이 있지. 여기 비가 이렇게 내려.” 이렇게 밖에 못 그려줘요. 그런데 이것을 초등학교 들어가고 중학교 들어가면 조금 달라지죠. 중학교 들어가면 구름이 플러스 전기와 마이너스 전기가 있고 부딪히면 소리가 나고 불빛이 생기고 하는 것이라 설명할 수 있겠지요? 더 지나서 이제 대학교나 대학원에 기상학과에 가면 훨씬 더 정확하고 깊고 그런 넓은 지식으로 그 기상 현상을 설명해 줍니다.
구원 계시는 생각보다 퍽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출애굽 그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자가를 바로 탁 제시했다면 못 알아들었을 거예요. ‘이게 뭔가?’
그래서 그 당시에는 아주 희미하고 예비적인 계시로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율법을 주시고 율법을 어겼을 때 누군가 대신 죽는 희생 제사를 통해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그림자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포함한 모든 구약성경의 계시는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도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라고 자꾸만 우리에게 사인을 보내주고 있는 셈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갈3:19-21) 19 그러면 율법은 무엇 때문에 주셨습니까? 그것은 약속하신 9)자손이 오실 때까지 죄를 밝히시려고 덧붙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율법은 천사들을 거치고, 중개자의 손을 거쳐서 제정하신 것입니다. 20 그런데 그 중개자는 한쪽에만 속하여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21 그렇다면 율법은 하나님의 약속과는 반대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주어진 율법이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것이었다면, 의롭게 됨은 분명히 율법에서 생겼을 것입니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즉 타락한 죄 지은 인간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좀 보라고 거울로 주신 것이라는 거죠.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중보는 누구입니까? 중보는 모세죠) 모세에게 천사들이 갖다 줘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중보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만일 인간이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존재였다면 인간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율법을 잘 지켜서 의에 이르렀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을 만나게 됐을 것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그렇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이 그 율법을 잘 지켜서 의를 성취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고 못할 것을 뻔히 알고 계셨고 그들이 율법이라는 거울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죄 성에 절망한 나머지 겸손히 하나님께 머리 숙이고 나오라고 주신 것이 율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를 정말로 구원할 수 있는 분은 바로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라고 계속 가리키고 있는 것이 율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라는 말은 율법이 가리키고 있던 바 그 목표에 도달했다는 것이죠. 즉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분의 살아가신 생애와 그분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그 사역을 통해서 율법을 처음 주실 때 하나님 마음속에 품고 있던 그 계획이 다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 될 수 있는가를 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4절입니다.
(갈4:4-5) 4 그러나 기한이 찼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여인에게서 나게 하시고, 또한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
5 그것은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자녀의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는데, 율법 아래 오셨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어야 됐을까? 인간은 율법에 묘사된 그러한 온전한 성품을 가지지 않으면 절대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 놓일 수가 없어요. 마태복음 5장 48절에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 하라” 이렇게 말했어요. perfect! 하나님 아버지께서 perfect하신 것처럼 너희도 perfect해야 된다. 그러니까 정말 그 성품에 있어서 완벽한, 너무나 고상하고 아름답고 성결하고 거룩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렇게 안 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과 저는 불행히도 타락해 있습니다. 아담 이후에 모든 자들은 출생할 때부터 영적인 생명이 없는 상태에서 태어납니다. 우리는 그분에게 도저히 가까이 갈 수 없을 만큼 더럽고 망가진 존재입니다. 어떠한 인간도 율법에 묘사된 것 같은 그런 온전한 인성을 가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롬3:20) 그러므로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인식할 뿐입니다.
아무도 그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낼 자는 없다는 것이고 율법은 그냥 거울에 불과하다는 거예요. 거울! 내가 얼마나 불완전한가를 확증해주는 거울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시고 함께 율법 아래 놓였어요.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이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야할 궁극적인 성품인데 아무도 그렇게 살아 낼 수가 없으니까 예수님께서 인간과 똑같은 모습을 하시고 내려오셔서 우리를 품에 안으시고 살아 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세례 사건을 보세요. 세례 요한의 세례는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죠? 예수님은 죄가 없기 때문에 죄를 씻을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원래 신약성경에서 세례라는 단어 자체가 연합을 말하는 것이에요. 연합! 유니온(union), ‘어떤 것과 같은 성질이 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세례 받았다는 말은 우리와 같이 되어 주셨다는 상징입니다. 우리와 같은 죄인의 신분으로 자기를 낮추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대표가 되기 위해서예요. 이제 죄인의 대장이 되어서, 대표가 되어서 우리 모두를 당신의 실존 안에 품으시기 위해서 세례 요한의 세례를 통해서 자신을 우리와 일치시킨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예수님은 완전한 순종의 삶을 사셨어요. 전적인 순종.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인간의 가장 완전한 삶의 모습을 사셨어요. 원래 율법이 그려내고자 했던 바로 그 삶을 살아내신 것입니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에요. 불순종이 모든 죄의 뿌리예요. 그래서 에베소서에서도 너희가 전에는 불순종의 자녀들이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온전하게 율법대로 사신 삶의 핵심은 성부 하나님께 대한 완벽한 순종이었습니다. 그 순종의 절정이 뭐냐 하면 십자가예요. 빌립보서 2장에 보면
(빌2:5-7) 5 여러분은 이런 태도를 가지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께서 보여 주신 태도입니다.
6 그분은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8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정말 철저하게 하나님께 순종했었는데 얼마나 완벽하고 철저하게 순종하셨는지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순종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 십자가는 우리가 받았어야할 죄의 대가를 치르신 것입니다.
그것을 설명하시려고 구약시대에 인간들에게 율법과 희생 제사라는 것을 주신 것입니다.
(히10:1) 1 율법은 장차 나타날 좋은 것들의 그림자일 뿐이요, 실체가 아니므로, 해마다 계속해서 드리는 똑같은 희생제사로써는 하나님께로 나오는 사람들을 완전하게 할 수 없습니다.
구약시대에 소를 잡고 양의 피를 뿌려서 죄를 용서받는 그것을 상징으로 보여주셨지만
그것은 ‘정말 완전한, 단 한번만 드려도 영원히 효력이 있는 완벽한 속죄의 제사를 드릴 분이 온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에요. 그분께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예수님 자신은 죄가 없는 순결한 분이셨습니다. 의로운 삶을 사셨습니다. 그런데 그는 세례 받으심으로 우리와 일치, 연합이 되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걸머지신 것이에요. 돌로 쳐 죽여야 할 간음한 여인의 죄가 되셔서 흙에다가 예수 님 자신의 이름을 써넣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돌에 맞아 죽으시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잔인한 죽음을 통해서 율법의 정죄를 만족시킨 것입니다. 율법에 나타난 완벽한 아름다운 인간의 삶을 그대로 살아내심으로써 성취하셨고 또 그렇게 살지 못했던 우리들의 죄의 저주를 대신 받으심으로써 율법의 모든 요구를 완벽하게 도달하고 성취하셨어요. 그래서 율법은 이제 정죄의 기능으로서, 우리의 구원의 방법으로서의 기능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기 때문에 율법이 폐지됐다 그렇게 말합니다.
골로새서 2장 14절입니다.
14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불리한 조문들이 들어 있는 빚문서를 지워 버리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박아, 우리 가운데서 없애 버리셨습니다.
이렇게 묘사를 하고 있죠.
요한복음 19장에 보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다 이루었다 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것은 율법의 목표에 도달하는 것, 율법을 성취하는 일을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외치셨고, 다 이루었다고 외치셨고, 그 부분에 대해서 성부 하나님께서 approve하신 것이 부활이에요. 그것이 로마서 4장 25절이죠.
(롬4:25) 예수는 우리의 범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시고, 또한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살아나셨습니다.
대 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 완전한 제사를 드리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죽습니다. 살아서 못 나옵니다. 예수께서 살아 나오셨다는 것은 그 제사가 완전한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의 십자가가 율법의 모든 요구를 이룬 바 됨을 부활로서 확증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처음 주셨을 때 그 마음에 품으셨던 것이 성취된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마침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의가 전가되었습니다. 의의 흰 옷이 입혀 진 것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하나님께서 지으신 인간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이지 않으면 살수가 없어요. 마치 땅에서 뿌리 뽑혀진 나무처럼, 그 나무가 얼마 있지 않으면 정말 죽어버리듯이 그 나무가 다시 땅에 심기지 않으면 살수가 없어요. 세상에 태어난 자연적인 인간은 땅에서 뿌리 뽑힌 나무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땅에, 하나님 나라로 가서 심겨져야 되겠는데 그 가운데는 엄청난 계곡이 있어서 인간의 어떤 노력으로도 거기는 넘어 갈 수가 없다고 그랬어요. 거기를 넘어가려면 의가 필요해요. 의라는 다리가 필요해요. 만일 율법을 완벽하게 지킨, 즉 율법에 나타난 그 인간의 모습을 완벽하게 살 수 있다면 그것은 의가 되요. 그래서 그 사다리로 하나님께 갈 수 있어요. 그런데 아무도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성경이 말했고, 여러분과 저의 실존의 삶이 그것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의를 만들어서 그 사다리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어떻게?
여기에 기독교 구원 진리의 가장 중요한 원리가 있어요. 바울 신학의 가장 요체이지요? 그것이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union christ)
기독교 진리의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와 내가 연합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비 중의 신비이고, 초경험적인 사건이고, 은혜 중의 은혜예요. 그분과 연합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 그가 행하신 모든 일, 그가 하나님께 드린 온전한 율법의 순종, 이런 것들이 다 우리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이에요? 그와 연합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롬6:3)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하는 세례를 받은 우리 모두가, 그분의 죽으심과 연합하는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굉장히 중요한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분과 함께 우리 옛사람은 죽었어요. 그리고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자! 본문으로 돌아가서 이러한 그 엄청난 은혜, 신비의 극치인 이 은혜의 선물을 누가 받느냐는 것이죠. 여기 보면 ‘모든 믿는 자에게’, 10장 4절에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하나님께 갈 수 있는 그 엄청난 ‘의’라는 큰 위대한 다리를 누가 선물로 받느냐? ‘믿는 자’라는 거예요. 믿는 자! 지구상에 태어났다 죽은 모든 사람들 중에서 그리고 살아 있는 모든 인간 중에서 오직 믿는 자에게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만 그 선물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는 자라는 말에 유의를 해야 되요. 이 안에 많은 뜻이 내포되어 있고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첫 번째로 믿는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믿으면 안 되느냐?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이라는 그 말속에 삼위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면, 하나님만 믿으면 안 되느냐? 그건 안 됩니다. 구원받지 못해요. 지금 바울이 구원 문제로 애타하는 대상이 누굽니까? 유대인들. 이들은 하나님을 너무 잘 믿었어요. 열심히 믿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구원에서 제외되어 있지요?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믿고 의지하고 사랑 안에서 선한 삶을 살고 싶습니다.”해도 안돼요, 구원받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목표에 도달하시고 성취하심으로 그리고 그분이 나와 연합되어있기 때문에 나도 그분처럼 율법의 모든 요구를 이룬 것으로 여겨진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성품과 그분의 온전하신 의와 그분이 행하셨던 모든 선한 일들, 또 그에게 일어난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들 이런 모든 것들이 나의 것이 되었다는 것을 여러분이 믿으셔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까? 더 나아가서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으세요? 그분의 인격과 그분의 하신 일을 알고 계십니까?
그리고 두 번째로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 님 안에 들어오기 전에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에 의해서 완전히 정죄 된 자였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되요.
내가 율법이라는 거울을 봤을 때 너무나 망가진 송장과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 자체가 모순이에요. 왜냐 하면 그것이 아니면 그리스도는 필요 없어요. 여러분이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말을 했다면 그 이면에는 나는 절망적인 죄인이라는 말이 같이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을 뿐만 아니라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도록 새사람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롬6:4)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죽으심과 연합하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살리심을 받은 것과 같이, 우리도 새로운 생명 가운데서 살아가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를 주님과 연합시켜서 십자가에서 같이 죽게 하신 이유는 우리가 새 생명 가운데서 살게
하기 위해 그랬다는 것이죠. 새사람은 이제는 율법에 매이지 않습니다. 왜? 이미 예수님께서 그렇게 다 완벽하게 이루신 율법의 모습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그렇게 되어서, 율법을 이루어서 하나님께로 가야겠다는 이런 생각은 전혀 필요 없어요.
그러나 이제는 내가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분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서,
아니 그 이전에 이렇게 사는 것이 정말 인간답게 사는 것이고 내가 가장 행복하게 사는 길이고 생명으로 충만한 삶인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율법에 기록해 주셨던 많은 하나님의 성품과 삶의 방식과 교훈들을 기쁨과 즐거움으로 받아들여서 그렇게 살기를 즐거워하겠죠?
우리가 거듭나게 되면 어린 아기입니다. ‘야, 내가 하나님의 의를 다 받아서 하나님 안에 살게 된 자로서 이제는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복된 것일까?’ 고민해 봅니다. 잘 모르죠, 금방 태어났으니까. 아기니까. 그런데 성경을 보니까 “ 아니, 율법 속에, 율법에 쓰인 이 방법들이, 이것이 기가 막힌 방법이고 이렇게 사는 것이 정말 잘 사는 것이구나. 나도 이렇게 살아야 되겠다.” 이렇게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구원받은 자들은 이렇게 됩니다. 시편119편입니다.
(시119) 10 내가 온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찾습니다. 주님의 계명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33 주님, 주의 율례의 도를 내게 가르쳐 주십시오. 내가 언제까지든지 그것을 지키겠습니다.
97 내가 주의 법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온종일 그것만을 깊이 생각합니다.
127 그러므로 내가 주의 계명을, 금보다, 순금보다 더 사랑합니다
믿는 자들 참 교회들, 가라지가 아닌 알곡들은 이런 고백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는 율법을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그것이 뭐 꿀처럼 달고 금보다 더 귀하고 누가 그럴 수 있겠어요? 그것이 그냥 나의 법칙으로, 지키지 못하면 벌 받을 수밖에 없는 법으로 있을 때 누가 그것을 좋아하겠어요? 그런데 이제는 그런 것은 다 사라지고 내가 믿는 자가 되어서 모든 의가 다 내게 와서 이제는 하나님 안에 들어와 있어서 다시 율법을 보니까 이건 너무나 기가 막힌 것입니다. 이렇게 살면 정말 신나고 너무 복되고 너무 행복한 삶이겠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그렇게 살고 싶고, 그러니까 이것을 밤낮 보고 싶어지고, 그냥 달고 귀하고 이렇게 된다는 것이에요. 살아가다가 또 실수하고 실패하고 잘 못 지킬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아요. 많이 어겨도 괜찮아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러니까 이제는 아무리 실패해도 결코 정죄가 안 되는 완전하고 영원한 보장이 딱 주어져 있습니다. 그 안에서 이제는 우리가 기쁘게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어 그 사랑하는 분이 이렇게 살라고 말씀하신대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이제는 우리에게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법칙도 아니고, 그렇게 못 지키면 벌 받는다는 그런 법도 아니고, 우리의 친근한 동무요 길잡이요, 안내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그렇게 고백하는 것이죠.
우리 참 교회들은 그런 거룩한 것들이 몸에서 배어 나와야 합니다. 툭 치면 나오고 툭 치면 나오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한국 신자들은 툭 건드리면 나오는 것이 “아멘” “할렐루야”입니다. 그런데 삶은 개판입니다. 아멘, 할렐루야 하지 말고 그렇게 살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것이 교회의 본무 입니다.
우리 본문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롬10:4)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믿는 사람을 의롭게 해주시려고 율법에 끝마침이 되셨습니다.
헬라어로 아홉 단어밖에 안 되는 이 구절 속에 복음의 모든 내용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자주 상기하시고 묵상하세요.
제38장 교회 (6) 교회의 본무-3 하나 되게 하심을 힘써 지키는 사람들
(엡4:1-6)
1 그러므로 주님의 일로 갇힌 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불러 주셨으니, 그 불러 주신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2 언제나 겸손함과 온유함을 지니십시오.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면서, 오래 참으십시오.
3 여러분은, 성령이 여러분을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주신 것을, 힘써 지키십시오.
4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한 희망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과 같이,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
5 주님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6 하나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유의(또는 '천지 만물') 아버지이시며,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하여 일하시고, 만유 안에 계십니다
계속해서 교회 론을 살피고 있습니다. 교회론 여섯 번째 시간이고 교회의 본무 3번째 시간입니다. 지난주까지 우리는 교회의 본무는 거룩을 향해 전진하는 것이며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통치를 기쁘고 달갑게 받아들이는 자들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율법이 우리를 얽어매는 정죄의 수단, 혹은 우리를 구원하는 조건이 아니라
우리가 마땅히 살아야 할 하나님 백성의 성품이요 삶의 방법이기 때문에 그 율법을 즐거워 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 연습하고 훈련하고 하면서 그 거룩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가야하는 자들임을 아울러 확인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삶에서 그 거룩은 나오지 않고 “아멘” “할렐루야”만을 외치는 종교 행위는 마치 청와대에 들어가서 5년 내내 대통령 일은 안하고 “난 청렴해” 이거 알리기 위해 칼국수만 먹다 나온 어떤 양반과 같은 우스꽝스러운 짓인 것입니다. 칼국수만 먹지 말고 나라를 책임지는 자로서 일을 했어야지요. 요즘 교회가 그런 겉만 번드르르한 종교행위들 만을 하고 있다니까요.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모델로 이 땅에 서 있어야 하고 그 나라를 증거 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 국가의 삼 요소 중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주권 즉,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한국에 있는 미 대사관은 어느 나라입니까? 미국입니다. 주한 미군 영내에서 한국 법이 통용됩니까? 아니요. 그곳은 한국 영토에 자리 잡고 있지만 조지 부시의 통치 아래 있는 곳이기 때문에 미국인 것입니다. 이렇게 국가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영토도 백성도 아니고 바로 통치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서도 그 통치에 항복하는 순종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 그 모습이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기에 우리는 이 땅에서 그 순종의 모습을 삶으로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순종의 당위성에 대해서 조금 더 강조를 하고 오늘의 본론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거룩한 삶을 살아내야 하는가?
우리가 교회론 첫 시간에 공부한 마태복음16장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상기시켜 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도로와 그의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에 하나님 나라의 열쇠까지 주셨습니다. 그들이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20절에 뭐라고 말씀하시느냐 하면
(마16:20)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엄명하시기를, 자기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왜 그러셨을까요? 분명 하나님 나라의 도래라든가 개인 구원에 관한 주님의 구속사건, 그리고 그 분의 수난에 관해서는 공생애 초기부터 언급을 하십니다. 니고데모에게도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고 인자가 광야의 놋 뱀처럼 들려야 한다고 자신의 수난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십니다 그런데 왜 유독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 요구되고 있는 교회의 설립에 대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때까지 비밀에 부치라고 하십니까? 예수님의 수난이 뭐죠? 하나님의 뜻에 대한 철저한 순종의 백미입니다.
교회는 바로 그 순종을 전제하지 않고는 세워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그 통치권이 발휘되어야 하는 곳이기에 예수님께서 교회에 관해서 만큼은 그 순종의 예표인 예수님의 수난 때까지 함구령을 내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뜻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무슨 업적을 쌓고 사업을 성공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교회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너희의 하나 되게 하심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자답게 합당하게 행하라는 구절의 “합당하게”는 “악시오스”라는 말인데 그 말은 의복에 대해 사용했던 단어입니다.
예를 들어 젊은이에게는 합당하지만 나이가 든 사람에게는 합당하지 않은 옷이 있지요.
80세 되신 할머님께서 빨간 미니스커트에 망사 스타킹 신으시면 이상한 것처럼, 낭랑 18세가 고쟁이를 입는 것도 이상하지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입어야 할 어울리는 옷이 있는 것입니다. 그 옷을 입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이고 그 옷이 바로 순종이라는 옷인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그 순종의 옷을 입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을 하게 되면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는 것입니까? 바로 거룩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거룩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완전한 순종은 같은 것이죠.
우리가 이것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본질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라는 것을 놓치면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최종적인 계획, 그 분의 뜻, 그 분의 요구, 통치권 그런 것보다 나의 기쁨, 나의 행복으로 신앙을 정의합니다.
그래서 교회 일도 자기의 만족, 자기의 기쁨, 자기의 행복, 자기의 자랑을 위해서 하게 됩니다.
(롬10:2-3) 2 나는 증언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 열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열성은 올바른 지식에서 생긴 것이 아닙니다.
3 그들은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고,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힘을 쓰면서, 하나님의 의에는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열심히 하는 것이 능사가 아닌 것입니다. 자기 의를 세우고 자기 기쁨과 만족을 위한 것은 복종치 아니한 것이라는 겁니다. 그것은 우리 신앙의 중요한 원리와 방향을 상실한 것입니다. 핵심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한 유명한 말이 있지요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나름대로 열심을 부려 보겠다고 제사에 쓸 좋은 가축을 살려서 데리고 온 사울에게 한 말입니다.
우리 교회는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부른 것처럼 ,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부른 것처럼 우리의 구원에 감격하고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 해야할 역할이 있는 것입니다. “나는 구원받았으니 이제 할 일은 없다” 로 가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교회로서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증거 하는 자리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 나라의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요? 바로 순종인 것입니다.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신 그 예수님의 순종을 살아내는 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이것인데 하나님이 저것을 하라하면 기쁘게 그 길을 가는
자기 부인의 삶이 바로 교회의 삶인 것입니다.
나는 부자로 살고 싶지만 아버지가 내게 가난하고 병든 삶을 살아달라고 하시면 그냥 안달복달하지 않고 그렇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난 왜 이 모양으로 생겼을까를 고민하지 마시고 나를 보며 위로 받을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밤12시에 라면 두 개 끓여 먹고 자도 살이 안찌는 체질이 되게 해 주세요”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식탐을 절제 하라고 물만 먹어도 살이 찌는 체질을 주셨으니 그렇게 절제하면서 살겠습니다.” 이런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사탄의 시험은 전부 “네가 최종 결정권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아담에게도 분명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음에도 그 통치권을 엎어버리라는 요구를 했습니다. 예수님께도 “넌 하나님의 아들이잖아 이 돌이 떡이 되게 해봐. 성전에서 뛰어내려봐, 내게 절만 해. 그럼 저 세상을 다 줄게”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순종하십니다. 자신이 순종해야 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뿐이심을 천명하십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복종하십니다.
이렇게 우리 신자들의, 교회의 신앙의 핵심은 순종입니다.
(롬1:5) 우리는, 그 이름을 전하여 모든 이방 사람으로 하여금 믿어서 순종하게 하려고, 그를 통하여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았습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이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까? 순종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롬16:25-26) 25 [하나님께서는 내가 전하는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가르침을 통해서,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감추어 두셨던 비밀을 계시하심으로써, 여러분의 믿음을 굳세게 하여 주십니다.
26 그 비밀이 지금은 예언자들의 글로 밝히 공개되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모든 이방 사람들에게 알려져서, 그들이 믿고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네, 우리의 믿음은 순종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순종을 하는 자들에게 이런 명령이 떨어집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통해 교회에게 어떻게 이야기하시는지 보세요.
(벧전1:14-16) 14 여러분이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가 되었으니, 전에 알지 못할 때에 가졌던 욕망을 따라 살지 말고,
15 여러분을 불러 주신 그 거룩한 분을 따라 모든 행실을 거룩하게 하십시오.
16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라"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거룩과 순종은 뗄 래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순종은 거룩을 향해 가는 길이고 거룩은 순종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교회에게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교회야, 너희는 하나님께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라”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지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지요? 순종해야지요.
그러면 지금부터 왜 우리에게 하나 되게 하심을 힘써 지키라고 하시는지 그 이유를 살펴 보겠습니다. 아울러 하나 되게 하심을 힘써 지키는 것이 어떻게 거룩과 순종과 관계가 있는 것인가 까지 공부를 하겠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한 몸입니다. (union christ)하나로 연합된 자들입니다. 하나 되게 하심을 힘써 지키라는 것은 바로 그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으로 연합된 현실을 교회는 힘써 지켜야 한다는 것인데요.
(롬12:5) 이와 같이, 우리도 여럿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있으며, 한 사람 한 사람은 서로 지체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한 몸이기 때문에 한 몸인 지체들끼리 “우리는 하나”라는 것을 늘 확인하고 그 하나 됨이 깨지지 않도록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그 하나 됨을 지키는 것을 얼마나 강조하고 있는지 보세요.
(갈5:19-21) 19 육체의 행실은 분명합니다. 곧 음행과 더러움과 방탕과
20 우상 숭배와 마술과 원수맺음과 다툼과 시기와 분노와 이기심과 분열과 분파와
21 질투와 술취함과 흥청거리는 연회와(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질투와'와 '술취함' 사이에 '살인'이 첨가되어 있음), 또 이와 비슷한 것들입니다. 내가 전에도 여러분에게 경고하였지만, 이제 또다시 경고합니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입니다
이 구절은 성령의 열매와 반대되는 교회가 경계해야 할 일들입니다. 그 중에 부도덕한 일 빼면 다 뭡니까? 전부 하나 됨을 깨는 것입니다. 교회가 특히 경계해야 할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의 열매는 뭔가요?
(갈5:22-23) 22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23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금할 법은 없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교회가 하나 되게 하는 데 필요한 것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 되게 함을 지키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한다고 합니까?
1 그러므로 주님의 일로 갇힌 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불러 주셨으니, 그 불러 주신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2 언제나 겸손함과 온유함을 지니십시오.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면서, 오래 참으십시오.
3 여러분은, 성령이 여러분을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주신 것을, 힘써 지키십시오.
갈라디아서의 성령의 열매와 똑같죠?
이렇게 이 땅에서 교회가 맺어야 할 성령의 열매는 결국 우리가 하나 되는 데 필요한 것입니다. 거룩한 자들은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고 그 성령의 열매는 결국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키는 데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키는 것이 거룩을 향해 가는 길이고 그 길에 필요한 것이 바로 순종이라는 것입니다.
(고전6:1-8) 1 여러분 가운데서 어떤 이가 다른 사람을 걸어 소송할 일이 있을 경우에, 성도들 앞에서 해결지으려고 하지 않고,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소송한다고 하니, 그럴 수 있습니까?
2 여러분은, 성도들이 세상을 심판할 것임을 알지 못합니까? 세상이 여러분에게 심판을 받겠거늘, 여러분에게 가장 작은 사건 하나를 심판할 자격이 없겠습니까?
3 여러분은, 우리가 천사들도 심판할 것임을 알지 못합니까? 그러한데, 하물며 이 세상 일들이겠습니까?
4 그러니 여러분에게 일상의 문제에서 생기는 소송이 있을 경우에, 여러분은 교회에서 멸시하는 바깥 사람들을 재판관으로 세우겠습니까?
5 나는 여러분을 부끄럽게 하려고 이 말을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신도들(형제) 사이에서 생기는 문제를 해결해 줄 만큼 지혜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까?
6 그래서 신도가 신도와 맞서 소송을 할 뿐 아니라, 그것도 불신자 앞에서 한다는 말입니까?
7 여러분이 서로 소송을 제기하는 것부터가 벌써 여러분의 실패를 뜻합니다. 왜 차라리 불의를 당해 주지 못합니까? 왜 차라리 속아 주지 못합니까?
8 그런데 도리어 여러분 스스로가 불의를 행하고, 속여 빼앗는데, 그것도 신도들에게 그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아무리 정당하다 할지라도 그 정당함을 입증하기 위해 교회의 하나 됨이 혹 깨지게 된다면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속임을 당하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하나가 됨을 힘써 지키는 것은 그렇게 자기의 정당함을 입증하는 것이나 자기의 유익보다 더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내가 옳으냐 그르냐를 증명하는 곳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변화되어 있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저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실력자가 되어 있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지, 내가 옳으니까 저 놈은 벌을 받아야 된다는 정당함을 입증하고 주장하는 곳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 되게 하심을 지킴으로써 그런 실력을 키울 수 있습니다.
분명 교회 안에서도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그런 시험이 올 때가 있습니다. 확 관계를 깨고 싶은 시험이 올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시험을 통해서 용서와 인내와 사랑과 온유 같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실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그런 시험이 올 때마다 관계를 깨버리면 어떻게 그 성품을 배우겠습니까?
학교에서 선생님이 어떤 시험 문제를 냅니까? 누구나 다 아는 쉬운 문제를 시험 문제로 내는 선생님은 없습니다. 학생들이 가장 모를 것 같은, 가장 이해하지 못 했을 것 같은 것을 문제로 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학생들을 골탕 먹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학생의 약점을 보완하고 모르는 것을 알게 해서 보다 나은 실력을 키워 주기 위함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꼭 그렇게 시험이 오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다 지킬 수 있는데 이것만은 안돼” 그러면 하나님은 꼭 그걸 들고 나오십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그 부분을 고치라는 것입니다.
(엡2:20-22) 20 여러분은 사도와 예언자의 터 위에 세워진 건물이요, 그리스도 예수 스스로가 그 모퉁잇돌이십니다.
21 그리스도 안에서 건물 전체가 서로 연결되어서, 주님 안에서 성전으로 자랍니다.
22 여러분도 그리스도와 연결되어서 함께 건물을 이루어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거하실 곳이 되어갑니다.
우리 교회는 주안에서 성전으로 함께 지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고대 시대의 성벽은 어떻게 쌓는다고 그랬죠? 정형화된 벽돌이 없기 때문에 아랫돌 윗돌을 이가 잘 맞게 정으로 깨서 쌓아나간다고 했지요.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거울이 되어주고 시금석이 되어주고 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교회의 일원 각자가 서로에게 상대방의 약점을 깨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늘 문제가 있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 이 지상의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지상의 교회라는 훈련소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잘 훈련받고 정금 같이 되어서 그 하나님 나라로 가는 것입니다.
저는 운동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어떤 운동이든지 파트너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웨이트 트레이닝을 해도 파트너가 있으면 challenge도 되고 혼자 심심하지도 않고 운동이 두 배는 더 잘 됩니다. 마라톤 기록이 어떻게 나오는지 아십니까? 자기와 버금가는 라이벌이 함께 뛰어 주어야 기록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교회가 한 몸으로 함께 가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회”라는 무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기독교는 개인 구원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항상 “교회”의 구원을 이야기합니다. 우리 각자의 구원은 그 “교회”의 구원이라는 어마어마한 프로젝트의 일부인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 떨어져서 독불장군으로 거룩을 향해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네가 정당하다고 하더라도 손해나 불이익을 감수하고라도 하 나됨을 꼭 지켜내라는 것입니다. “여기는 아닌가봐”하고 분열하게 되면 우리가 거룩한 자로 지어져 갈 길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렇게 하나 되게 하심을 지킴으로써 자신의 거룩을 만들어 가고, 그렇게 실력자가 되어서 제한적이나마 천국의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 되게 하심을 힘써 지켜내다 보면 거기서 사랑과 온유와 인내가 자라게 되고 그러한 성령의 열매들이 맺혀지게 되면 하나 되게 하신 것이 더욱 더 견고해 지게 되고 이렇게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를 따질 수 없는 것 같이 거룩과 순종과 하나 되게 하심을 지켜내는 것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본질이며, 책임이며, 의무이며, 핵심이며, 본무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기와 다툼과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질투와 원수 맺는 것을 지양하고 서로 사랑하며 섬김으로 하나 되게 하심을 지켜내야 하는 것입니다.
(갈6:1) 1 교우(형제) 여러분, 어떤 사람이 어떤 죄에 빠진 일이 드러나면, 성령의 지도를 받아 사는 여러분은 온유한 마음으로 그런 사람을 바로잡아 주고, 자기 스스로를 살펴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교회 안에서 형제가 범죄를 하게 되면 너희가 서로 바로 잡아주라는 것입니다.
이 “바로잡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카탈티조” 라는 말인데 이 말은 “완성시키다. 수리 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correct의 뜻이 아니라 restore라는 말입니다.
팔이 부러지면 그 것이 나을 때까지 “목아 , 네가 수고 좀 해라”는 말입니다.
목이 그렇지 않아도 돌을 얹고 다니느라 수고가 많은데 거기다 팔까지 걸어놓으면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그러나 그 팔이 나아서 완전히 건강한 한 몸으로 수리 될 때까지 “네가 수고 좀 해라” 그러시는 것입니다.
다리가 하나 부러지면 그 다리가 나을 때까지 두 팔이 목발을 잡는 수고를 감당해 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완전한 한 몸이 되도록 힘쓰라는 것입니다.
서로 서로 도우라는 말씀입니다. 당연합니다. 우리는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서로 도우며 자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삶에 동참하는 것이며 천국 백성의 삶이기도 한 것입니다.
(고후8:9)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부요하나, 여러분을 위해서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가난하심으로 여러분을 부요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 나의 가진 것을 나누고 나는 가난하게 되는 것이 예수 님의 삶이셨습니다.
(빌2:3-5) 3 어떤 일을 하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서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
4 또한 여러분은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아 주십시오.
5 여러분은 이런 태도를 가지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께서 보여 주신 태도입니다(또는 '여러분은 이런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고전12:11) 이 모든 일은 한 분이신 같은 성령이 하시며, 그분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각 사람에게 은사를 나누어 주십니다.
교회에 필요한 모든 것은 교회 안에 다 나누어 주셨습니다. 각 각이 교회 안에서 제 역할만 제대로 수행해 내면 우리 교회는 부족한 것 없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자기 것인 줄 알고 자기만을 위해서 쓸 때 교회가 제대로 자라갈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선물을 받습니다. 그 은사의 종류에는 지식, 물질, 건강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목적에 쓰라고 위임을 받은 청지기, Manager일 뿐입니다. 어떤 목적이요? 교회가 거룩한 백성으로 잘 지어져 갈 수 있게끔 교회의 각 구성원에게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 배고픈 자들이 있을 테니까 그들의 허기를 채워 주라고 누구에게는 빵을 듬뿍 주셨고, 이해력이 부족하고 머리가 안 좋은 자들도 있을 테니 누구에게는 지혜를 듬뿍 주셨고, 사랑에 굶주린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고 사랑의 마음을 듬뿍 부어 주시고, 힘쓸 일도 필요할 테니 누구에게는 힘도 주고, 이렇게 각자에게 맡겨놓은 역할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기만을 위해서 쓸 때 배고픈 자는 계속 배고프고 말씀에 굶주린 자는 계속 그렇게 갈급하기만 하고 사랑에 굶주린 사람은 계속 사랑에 굶주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청지기입니다. 청지기는 영어로 Manager라는 뜻입니다. 매니저는 최고 권위자가 아닙니다. 그 매니저가 제 역할을 못 해낼 때 최고 권위자에 의해 그는 Fire될 것입니다.
사장이 “직원 교육을 맡기면 충실하게 교육을 시켜야 합니다. 사장이 직원들의 월급을 맡겼으면 사심 없이 나누어주어야 하는 것이 매니저입니다”
사랑, 온유,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불쌍히 여김, 긍휼, 선을 행함, 열심, 대접 골고루 여러분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것을 지체들과 나누기만 하면 부족한 것이 없는 것이 예수님의 몸입니다. 그래서 나누어야 합니다.
(히13:16) 선행과 친교를 게을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런 제사를 기뻐하십니다.
(행20:35) 나는 모든 일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습니다. 이렇게 힘써 일해서 약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주 예수께서 친히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 하신 말씀을,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나누어 줄 수 있다는 것은 복 받은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은혜를 모르는 자들은 자기 것을 남과 나누지 못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복은 하나님으로부터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필요한 것을 받아 챙기고 내 형제 자매들을 통해 나의 유익을 챙기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라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의 복은 happiness입니다. 우리의 복은 Blessing입니다. happiness는 happen에서 나온 말입니다. 우연히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복 Blessing은 Bleeding에서 나온 말입니다. 우리의 복은 피를 흘리는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삶이었고 우리의 삶이어야 하기 때문에 축복을 Blessing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복 받은 자들은 바로 그런 삶을 사는 것입니다. 몸은 살아있어야 합니다. 몸이 살아있다는 것은 각 부분이 제 역할을 제대로 할 때 살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역할을 제대로 못해내면 불구인 모습의 교회가 세상에 비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 주신 것들을 나누어야 합니다.
(요일3:17)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 형제나 자매의 궁핍함을 보고도, 마음 문을 닫고 도와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 안에 머물겠습니까?
(엡4:28) 도둑질을 하는 사람은 다시는 도둑질을 하지 말고, 수고를 하여, 제 손으로 떳떳하게 벌이를 하십시오. 그리하여 오히려 궁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 있도록 하십시오.
그래서 사도행전의 초대교회에는 핍절한 사람이 없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핍절한 사람이 없다는 것은 그곳이 바로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하늘나라를 세상에 보여주며 살아야 하는 자들입니다. 서로 도와야 합니다.
(잠17:5) 가난한 사람을 조롱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것이다. 남의 재앙을 기뻐하는 사람은 형벌을 면하지 못한다.
자기가 많이 좀 가졌다고 가난한 사람 모욕하지 마십시오.“ 얼마나 능력 없고 게으르면 저렇게 가난할까” 하지 마십시오. 친구들끼리 모여서 밥 먹을 때 혹시 돈을 못 내는 사람 있거든 “넌 왜 맨 날 밥값 안내니?”하고 망신주지 마시고 남 몰래 슬쩍 대신 내 줄 수 있는 교회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가스비가 없어서 교회를 못 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밥값이 없어서 친구들을 못 만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잠 잘 곳이 없어서 학교 시작을 못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더러 건축 헌금하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여러분보고 선교 헌금하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지체들이 홀로 시들어 가고 있는 모습은 그냥 보고 넘기면 안 되지 않습니까?
여러분 그런 필요가 있을 때는 헌금에 힘쓰셔야 합니다.
(고후8:1-4, 13-15) 1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마케도니아 여러 교회에 베푸신 은혜를 여러분에게 알리려고 합니다.
2 그들은 큰 환난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기쁨이 넘치고, 극심한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넉넉한 마음으로 남에게 베풀었습니다.
3 내가 증언합니다. 그들은, 힘이 닿는 대로 구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힘에 지나도록 자원해서 하였습니다.
4 그들은, 성도들을 구제하는 특전에(그, '은혜') 동참하게 해 달라고, 우리에게 간절히 청하였습니다
13 나는, 다른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고, 그 대신에 여러분을 괴롭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평형을 이루려 합니다.
14 지금 여러분의 넉넉한 살림이 그들의 궁핍을 채워 주면, 그들의 살림이 넉넉해질 때에는, 그들이 여러분의 궁핍을 채워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평형을 이루는 것입니다.
15 이것은 성경에 기록하기를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았다" 한 것과 같습니다.
초대교회는 이렇게 남을 도울 수 있는 복된 자리에 자기도 참여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을 하며 살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교회이신 여러분,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보내셨을 때에는 우리더러 “교회야, 내 자녀들아, 이제 너희들의 진가를 보여줄 때가 왔다. 네 것을 나누어 저들을 도우라, 그래서 세상을 향해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보여줘라” 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도울 수 있는 자들이 복 받은 자들입니다.
저 혼자 복 받은 사람으로 살아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여러분도 그 자리로 초대하고 싶습니다. 나누십시오, 섬기십시오. 나에게 교회로 허락하신 내 이웃에게 어떤 필요가 있는지 궁금해 하십시오. 저는 우리 교회에 힘든 사람, 어려운 사람들이 더 많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 우리 이렇게 하나님께서 분부하신 하나 됨을 지키고 있습니다.”
“나의 지체들을 이렇게 우리가 섬기고 있습니다.” 하면서 하나님 나라 백성들답게 사는 모습을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세상 사람들아 이것이 바로 교회가 사는 모습이다. 이렇게 자기 것을 나누며 남을 세워주는 천국의 삶이 바로 여기 있다”라고 세상에 보여 주고 싶습니다.
왜요,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증거 해야 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입니다. 한 몸입니다. 그래서 교회입니다. 여러분의 몸을 돌아보십시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마25:34-36) 34 그 때에 임금은 자기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창세 때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35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 할 것이다.
여러분 , 여러분은 마지막 때에 이 칭찬을 들으십시오. 잘 하였도다, 내 아들아, 잘 하였도다 내 딸들아” 그 하나님의 칭찬을 들으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교회시대를 살아가는 교회는 이 세상 현실과 천국 현실이 오버랩 되어 있는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그래서 국가의 구분이 있고 사회의 구분이 있고 가족의 구분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현실도 살아내야 하기 때문에 현실에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천국의 백성으로도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하나로 통일된 ‘애나케 팔라이오’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삶은 교회에서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양쪽 현실을 다 살아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땅의 종말이 오고 우주가 불타 없어진 다음에는 국가적, 사회적, 가족적 구분이 없어집니다. 그 때 그 곳 그 하나님 나라에서는 이제 교회가 국가가 되고 교회가 사회가 되며 교회가 민족이 되고 교회가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그 천국의 모습을 여러분은 교회 안에서 살아내어야 합니다.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그 분들이 여러분의 가족입니다.
아니 여러분의 몸입니다. 그 들을 섬기십시오.
제39장 교회 (7) 교회와 목사
(딤후4:1-5)
1 나는 하나님 앞과,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분의 나타나심과 그분의 나라를 두고 엄숙히 명령합니다.
2 그대는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하게 힘쓰십시오. 끝까지 참고 가르치면서, 책망하고 경계하고 권하십시오.
3 때가 이르면, 사람들이 건전한 교훈을 받으려 하지 않고,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들으려고, 자기네 욕심에 맞추어 스승을 끌어들일 것입니다.
4 그들은 진리를 듣지 않고, 허탄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5 그러나 그대는 모든 경우에 정신을 차려,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그대의 직무를 완수하십시오.
(딛2:1)
1 그대는 건전한 교훈에 맞는 말을 하십시오
장로교 헌법24조에 목사의 의의가 나옵니다.
목사는
1.예수 그리스도의 양인 교인을 양육하는 목자이며
2.목사는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교인들을 깨우치는 교사이며
3.목사는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하는 전도 인이며
4.목사는 그리스도의 설립한 율례를 지키는 자인 고로 하나님의 도를 맡은 청지기이다
위의 모든 내용은 한마디로 요약을 하면 목사는 바른 말씀을 전하여 그리스도의 양들을 양육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도 목자를 주시는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렘3:15) 그 때에 내가 마음에 맞는 목자들을 너희에게 세워 주겠다. 그러면 그들이 지식과 훈계로 너희를 양육할 것이다.
성경에 따르면 교회는 장로들이 다스리게 되어있습니다. 그들은 치리를 맡습니다. 치리를 맡은 장로 중에 치리와 말씀 선포를 함께 하는 장로를 목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사는 바른 말씀에 근거하여 교회를 치리하며 바른 교리로 교회를 양육하는 사람입니다.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성숙해 집니다.
(갈4:19) 나의 자녀 여러분, 나는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습니다.
말씀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켜 갑니다. 그래서 사탄은 교회가 생긴 이래로 교회 안에서 말씀의 비중을 약화시키는 전략을 써 왔습니다. 말씀보다는 신비적인 체험이나 주관적인 경험 , 종교적 열심 등을 동원해서 되도록 말씀을 가까이 할 수 없게 만듭니다.
세상이 계속해서 우리에게 흥미 있는 볼거리를 끊임없이 제공하고 시간가는 줄 모르는 재미들을 만들어내고 손만 뻗으면 언제든지 쾌락의 늪에 빠질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것은
모두 우리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기 위함인 것입니다.
목사의 딱딱한 교리 설교보다는 화끈한 성령체험이 훨씬 덜 따분합니다. 그래야 뭔가 믿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성경공부보다는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TV 드라마 파리의 연인이 더욱더 흥미롭습니다. 예배보다는 골프가 훨씬 재미있습니다.
예전에 제가 시골 할머니 댁에 가면 거기는 배터리가 라디오보다 더 큰 트랜지스터라디오가 유일한 매스미디어, 문화 수단이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밤 어느 집 사랑방에 모여 말씀 공부하는 것이 그 동네 사람들의 자발적인 '마실'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 옛날에 데이빗 브레이너드나, 조나단 에드워드나, 마틴 로이드 존스나 존 캘빈 같은 대 신학자들이 나올 수 있었습니까? 그 때는 우리가 시간을 빼앗길 만한 것이 지금처럼 그렇게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너무 바쁩니다.
그래서 주일 예배 때나 성경공부 때 설교를 길게 하는 사람은 인기가 없습니다. 죄악시합니다.
오죽하면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설교 학 시간에도 25분에서30분 내에 설교를 끝내라고 가르칩니다. 물론 이야기의 요점을 찾지 못하고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 하고 그러면서 시간을 끄는 사람은 욕먹어도 싸죠. 그렇지만 어떤 때는 시간을 조금만 더 쓸 수 있으면 좀 더 이해하기 쉽게 그리고 좀 더 깊게 설명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을 때가 많습니다. 더 설명하고 싶은데 자꾸 시간을 보고 시간에 쫓기게 됩니다.
말씀을 깊이 공부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빨리 끝내고 밥 먹고 교제하고 집에 가서 비디오보고 친구들하고 영화보고, 식구들하고 외식이나 하고 이런 것이 오히려 우리의 생각을 점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떨 때는 “내가 뭐 하러 사서 미움을 받나” 이런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한번은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그 목사님도 설교를 조금 길게 하시는 편입니다. 어떤 집사님이 대놓고 “목사님 설교 좀 짧게 하시라”고 면박을 주셨답니다. 목사님이 그 날은 화가 나셔서 “아니 김 집사님, 집사님은 비디오는 하루에 몇 편씩 몇 시간을 보시면서 어떻게 설교 한 시간이 길다고 그러십니까?” 그랬더니 그 집사님이 “목사님 그럼 목사님도 설교를 파리의 연인처럼 재미있게 해 보세요. 그럼 몇 시간이고 들을 수 있어요” 그러시더랍니다. 본전도 못 찾았지요.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너희는 구원을 받아야 한다.” “너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시체다” “구원받은 자답게 피 흘리기까지 싸우며 살아내라” “신자에겐 고난이 필수다, 그러나 끝까지 싸워 이겨라” 뭐 별로 우리를 즐겁게 해 주는 내용이 없습니다. 소망이라는 것이 있긴 있는데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천국에 대한 소망뿐입니다.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그런데 몇 시간이고 사람들을 붙들어 놓는 재주 좋은 사람들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난해하고 이해하기 힘든 재즈 같은 음악에 비해 듣기 편하고 부드러운 음악을 easy listening음악이라고 하지요? 그들은 그런 듣기 좋은 설교를 합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천국의 소망보다는 이 땅에서의 부귀영화를 약속해 줍니다. 게다가 가끔 오르간 반주 울적하게 깔아놓고 속이 후련하게 울려 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때때로 병도 낫게 해주고 막 쓰러트려 주기도 합니다. 그들은 예수의 이야기보다 세상의 도덕과 윤리와 꿈과 비전, 성공을 이야기해 줍니다.
이건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만을 이야기하는 인기 없는 설교자들하고는 차원이 다릅니다.
눈에 보입니다. 기적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그러한 집회를 선호합니다.
그 곳에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능력 있는 종이 훨씬 인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마지막 때가 되면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나올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너희는 영분별을 잘 해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마24:3-5,11-13) 3 예수께서 올리브 산에 앉아 계실 때에, 제자들이 따로 그에게 다가와서 여쭈었다. "이런 일들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선생님께서 오시는 때와 세상 끝 날에는 어떤 징조가 있을 것인지를, 저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4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누구에게도 속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5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는 '내가 그리스도다' 하면서, 많은 사람을 속일 것이다,
11 또 거짓 예언자들이 많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을 홀릴 것이다.
12 그리고 불법이 성하여,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을 것이다.
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요일4:1-3) 1 사랑하는 여러분, 어느 영이든지 다 믿지 말고, 그 영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가를 시험해 보십시오. 거짓 예언자가 세상에 많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2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을 이것으로 알 수 있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오셨음을 시인하는 영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입니다.
3 그러나 예수를 시인하지 않는 영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영입니다. 그것은 적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여러분은 그 영이 올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영이 세상에 벌써 왔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세상에 거짓 선지자들과 참 선지자가 공존하고 있다는 겁니다. 거짓 선지자도 목사 노릇을 잘 하고 있고 참 선지자들도 목사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거짓 선지자가 가르치고 이끄는 교회를 우리는 거짓 교회라고 하고 참 선지자가 이끄는 교회를 우리는 참 교회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제가 참 목사인지 어떻게 아시죠? 불안하지 않으세요?
사도들의 시대에 이미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나와 있었습니다. 하물며 지금은 어떻겠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어떤 이야기를 전하고 다녔는가하면
(렘23:16-17) 16 "나 만군의 주가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스스로 예언자라고 하는 자들에게서 예언을 듣지 말아라. 그들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고 있다. 그들은 나 주의 입에서 나온 말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마음 속에서 나온 환상을 말할 뿐이다.
17 그들은 나 주의 말을 멸시하는 자들에게도 말하기를 '만사가 형통할 것이다. 주의 말씀이다' 한다. 제 고집대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도 '너희에게는 어떠한 재앙도 내리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한다.
(렘14:14-16) 14 주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그 예언자들은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고 있다. 나는 그들을 예언자로 보내지도 않았고, 그들에게 명하지도 않았고, 그들에게 말하지도 않았다. 그들이 이 백성에게 예언하는 것은, 거짓된 환상과 허황된 점괘(또는 '우상 숭배와')와 그들의 마음에서 꾸며낸 거짓말이다.”
15 주께서 그 예언자들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들은 내가 보내지도 않았는데,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였다. '이 땅에는 전쟁과 기근이 없을 것이다' 하고 말한 예언자들은 전쟁과 기근으로 죽을 것이다.
16 그 예언을 들은 이 백성도, 기근과 전쟁에 시달리다가 죽어서, 예루살렘 거리에 내던져질 것이며, 그들을 묻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아내들과 아들딸들도 그와 같이 될 것이니, 이것은 내가 그들 위에 재앙을 퍼부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 복음이 뭔지도 모르고 예수가 누구인지도 정확하게 알지 못 하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천국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듣고 싶은 말“평안하다, 평안하다” “아무 일 없을 거야” “ 다 잘 될 거야” 이런 이야기를 해 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 자들을 보낸 적이 없다”
오늘 본문 3절과 4절을 표준 새 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딤후4:3-4) 3 때가 이르면, 사람들이 건전한 교훈을 받으려 하지 않고,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들으려고, 자기네 욕심에 맞추어 스승을 끌어들일 것입니다.
4 그들은 진리를 듣지 않고, 허탄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진짜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은 어떤 이야기를 전했습니까?
“빨리 회개해라” “도끼가 이미 악한 열매를 맺는 나무뿌리에 놓여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아, 거룩하게 살아라. 피 흘리기까지 노력해라. 너희 구원을 이루어 가라” “믿는 자들에게는 고난이 온다, 피 흘리기까지 싸워라” 듣기 좋은 말은 한 마디도 없습니다.
예레미야처럼 성전에 제사지내러 가는 사람들을 막아서서 “너희는 여기가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이런 맞아 죽을 이야기만 합니다.
열왕기상22장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BC931년에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과 남 유대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이 두 나라가 잠깐 관계가 호전되었던 시기가 바로 아합 왕 때입니다.
아합 왕이 북 이스라엘의 왕이고 여호사밧이 남 유대의 왕이었을 때입니다. 남 유대의 여호사밧이 아합 왕을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아합 왕이 여호사밧에게 둘이 연합하여 아람을 치자고 제안을 합니다. 아람은 바벨론이지요. 굉장히 센 나라입니다. 그랬더니 여호사밧이 “우리 하나님의 뜻을 알아봅시다. 이스라엘에 선지자가 몇 명이나 있습니까?” “400명 있습니다.” “그럼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어떤지 물어봅시다.”
시드기야를 비롯한 선지자400명이 모두 왕이 듣기 좋은 말만 합니다. “당장 올라가십시오, 하나님께서 아람을 왕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여호사밧이 묻습니다. “이게 다입니까? 다른 선지자는 없습니까?“ ”한명 있긴 있는데 그 사람은 내게 좋은 이야기를 해 줘 본 적이 없소“‘나는 그래서 그를 싫어합니다.” 여호사밧이 아합에게 “하나님의 선지자에게 그렇게 이야기하면 안 된다고 충고를 하고 미가야를 데려오게 합니다.”
이렇게 가짜 선지자들은 왕이 듣기 좋은 말만 합니다. 진짜 선지자는 뻔히 당할 것 알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전하는 사람입니다.
가짜 선지자들은 회중이 듣기 좋은 말만 해주기 때문에 모두에게 인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모두에게 인기가 좋은 사람은 가짜다.
(눅6: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할 때에, 너희는 화가 있다. 그들의 조상이 거짓 예언자들에게 그와 같이 행하였다."
그러나 참 복음이 전해질 때 예배당 안에 있는 가라지 들은 답답해합니다. 지겹습니다. 못 듣겠습니다. 자꾸 찔리니까요. 그래서 목사를 욕합니다. “지만 잘났냐?”
그리고 거짓 선지자들의 공통점이 기적과 이사를 동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힘은 사탄도 줄 수 있다고 성경이 이야기합니다.
(살후2:9-12) 9 그 불법자가 오는 것은 사탄의 작용을 따른 것인데, 그는 온갖 능력과 표징과 거짓 이적을 행하고,
10 또한 모든 불의한 속임수로 멸망 받을 자들을 속일 것입니다. 그것은, 멸망 받을 자들이 자기를 구원하여 줄 진리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11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미혹하게 하는 힘을 그들에게 보내셔서, 그들로 하여금 거짓을 믿게 하십니다.
12 그것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기뻐한 모든 사람들에게, 심판을 내리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택함을 받지 못한 자들은 그런 것을 좇아 다니며 광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들과 기적들을 행하여 보여서, 할 수만 있으면, 선택받은 사람들까지도 홀릴 것이다
(계19:20) 그러나 그 짐승은 붙잡혔고, 또 그 앞에서 이적들을 행하던 그 거짓 예언자도 그와 함께 붙잡혔습니다. 그는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과 그 짐승 우상에게 절하는 자들을 이런 이적으로 미혹시킨 자입니다. 그 둘은 산 채로, 유황이 타오르는 불바다로 던져졌습니다.
(신13:1-5) 1 너희 가운데 예언자나 꿈으로 점치는 사람이 나타나서, 너희에게 표적과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고 말하고,
2 실제로 그 표적과 기적을 그가 말한 대로 일으키면서 말하기를 '너희가 지금까지 알지 못하던 다른 신을 따라가, 그를 섬기자' 하더라도,
3 너희는 그 예언자나 꿈으로 점치는 사람의 말을 듣지 말아라. 이것은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가 정말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주 너희의 하나님을 사랑하는지를 알고자 하셔서, 너희를 시험해 보시는 것이다.
4 너희는 주 너희의 하나님만을 따르고 그분만을 경외하며, 그분의 명령을 잘 지키며, 그분의 말씀을 잘 들어라. 그분만을 섬기고, 그분에게만 충성을 다하여라.
5 예언자나 꿈으로 점치는 자들은 너희를 미혹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이집트 땅에서 너희를 인도해 내시고 그 종살이하던 집에서 너희를 속량하여 주신 주 너희의 하나님을 배반하게 하며, 주 너희의 하나님이 가라고 명하신 길에서 너희를 떠나게 하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런 자들은 죽여야 한다. 그렇게 하여서 너희는 너희 가운데서 그런 악을 뿌리째 뽑아 버려야 한다.
마태복음 7장에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니까 이적을 행한다는 것이 진짜 목사라는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애굽의 술사들도 지팡이를 뱀으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들도 강을 피로 만들어 버리는 기적을 행했습니다. 그 술사들도 물을 피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귀신들린 여인도 사람들의 앞 일을 귀신같이 맞췄습니다. 사탄도 그런 능력을 사람에게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고 천국의 소망을 확인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전적으로 의지하게 된 사람은 그런 이적이 필요 없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말씀이 정말 살아서 우리를 변화시켜가고 하늘의 비밀을 깨닫게 해주고 계신 그 기적을 경험한 사람은 다른 기적과 이사가 필요 없습니다.
(딤후3:16) 모든 성경(또는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모든 성경은 교훈과)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감동으로”라는 “떼오 프뉴스토스”는 “하나님의 입김이 쏘인”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입김이 들어가자 인간이 생령이 된 것처럼 이 말씀에는 그 하나님의 생명력이 살아 숨 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우리를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르게 하고 의로 교육하여 성화를 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나는 정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인데 이 말씀이 나를 바꿔가는 그 경험을 한 사람은 다른 기적이 필요 없습니다.
말씀을 읽지 않고 공부하지 않는 사람들은 절대 자기가 변할 거라고 김치 국 마시지 마십시오.
(사34:16) 주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아라. 이 짐승들 가운데서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것이 없겠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짐승은 없을 것이다. 주께서 친히 입을 열어 그렇게 되라고 명하셨고 주의 영이 친히 그 짐승들을 모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직접 모으시고 해 놓으신 천지의 주재 만유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있는데 다른 기적이 왜 필요합니까?
그 말씀이 온전히 믿어지지 않는 사람들이 다른 것으로라도 그 공허를 채우고자 할뿐입니다. 믿어지는 사람이 왜 다른 것의 도움이 필요하지요?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구하지만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 자랑할 것이 없다는 대 사도의 외침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들려야 합니다.
그리고 참된 교회의 교사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하도록 가르칩니다. 성경이 그렇게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고후4:18)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골3:1-2) 1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심을 받았으니,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2 여러분은 땅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지 말고, 위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십시오.
구약 시대에는 참 풍요를 우리에게 선물해 주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이었기 때문에 당시 인간들이 가장 가치 있게 여겼던 것으로 그 풍요를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은 가축이 많고 자식이 많으며 재물이 많고 땅이 많고 건강한 것으로 표현을 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오셨고 더 이상 그런 상징적인 것들로 하늘의 것을 설명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오늘날까지도 그 구약의 축복의 개념을 교회에서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명기 28장의 그 복으로 오늘 날의 복을 설명합니다.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고, 머리가 될지언정 꼴 리가 되지 않고 등등. 고린도 후서 3장의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을 약속하고 소망하게 만듭니다. 구약의 모든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이 땅을 소망하게 만듭니다.
예수를 믿으면 이 땅의 것을 축복으로 받는다고 가르치는 것은 바른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들은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해 주는 노략질하는 이리라고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마7:13-15)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14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너무나도 좁고, 그 길이 험해서, 그 곳을 찾아오는 사람이 별로 없다."
15 "거짓 예언자들을 삼가라. 그들은 양의 탈을 쓰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굶주린 이리들이다.
거짓 선지자들은 크고 넓은 문을 제시하지만 하나님의 참 선지자들은 좁은 문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참 선지자들은 늘 외로웠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맡겨진 양을 잘 양육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양들의 고기와 털이 필요한 자들이기 때문에 양 한 마리 한 마리가 자기의 재산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이가 썩든 말든 그들이 좋아하는 초콜릿, 소다, 정크 풋 다 먹게 해줍니다. 그들의 건강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양들이 자기를 좋아해 주고 토실토실 살만 쪄 주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이야기만 해 주지요.
(미3:5-6) 5 "예언자라는 자들이 나의 백성을 속이고 있다. 입에 먹을 것을 물려 주면 '평화'를 외치고,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면 전쟁을 벌일 준비를 한다. 6 '그러므로 너희가 밤을 만날 것이니, 너희가 환상을 볼 수 없을 것이요, 흑암을 만날 것이니, 점을 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예언자들에게는 해가 져서 낮이 캄캄할 것이다.
(미3:11) 이 도성의 지도자들은 뇌물을 받고서야 다스리며, 제사장들은 삯을 받고서야 율법을 가르치며, 예언자들은 돈을 받고서야 계시를 밝힌다. 그러면서도, 이런 자들은 하나같이 주께서 자기들과 함께 계신다고 큰소리를 친다. '주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우리에게 재앙이 닥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양들을 생각해서 초콜릿 너무 많이 먹지 마, 소다도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정크 풋도 절제해 이렇게 그 양들을 생각해서 사사건건 지적했던 목자들은 한마디로 인기가 없었습니다. 누가 자기의 죄를 지적하는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누가 고난을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저쪽에서는 축복을 이야기하는데 이쪽에서는 계속 고난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가나안에서도 계속해서 대적들과의 전쟁을 시키셨겠습니까? 너희들이 가야할 목적지는 가나안도 아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에 문제를 주시고 시험을 주시는 것은 이 땅의 것들에 소망 두지 말고 하늘에 소망을 두라고 계속 포기시키고 잃어버리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땅의 것에 눈 두고 살지 맙시다.”
그러니까 점점 외면당하는 것입니다. “아이고, 도대체 불편해서 못 들어 주겠네” 그리고 거짓 선지자들에게 몰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 사도는 자기가 세운 교회에다가 계속해서 이런 편지를 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고후11:4) 어떤 사람이 와서, 우리가 전하지 않은 다른 예수를 전해도, 여러분은 그러한 사람을 잘도 용납합니다. 여러분은 우리에게서 받지 않은 다른 영을 잘도 받아들이고, 우리에게서 받지 않은 다른 복음을 잘도 받아들입니다.
(갈1:6-10) 6 여러분을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불러 주신 그분에게서, 여러분이 그렇게도 빨리 떠나 다른 복음으로 넘어가는 데는,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7 실제로 다른 복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몇몇 사람이 여러분을 교란시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시키려고 하는 것뿐입니다.
8 그러나 우리들이나, 또는 하늘에서 온 천사일지라도,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한 것과 다른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한다면, 마땅히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9 우리가 전에도 말하였지만, 이제 다시 말합니다. 여러분이 이미 받은 것과 다른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누구이든지, 저주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10 내가 지금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드리려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람의 환심을 사려 하고 있습니까? 내가 아직도 사람의 환심을 사려 하고 있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닙니다.
사도가 얼마나 그 것이 가슴이 아팠으면 이렇게 두 번이나 강조해서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이야기를 했겠습니까? 사도가 이야기합니다.
나도 너희를 기분 좋게 해 줄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에게 좋게 하랴?
그리고 사도는 이렇게 개탄합니다.
(고후2:17)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서 먹고 사는 장사꾼이 되었습니다마는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답게,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보시는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늘 외로웠습니다.
(딤후4:16-18) 16 내가 처음 나를 변론할 때에, 나의 편에 서서 나를 도와 준 사람이 하나도 없고, 모두 나를 버리고 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허물이 돌아가지 않기를 빕니다.
17 주께서 내 곁에 계셔서, 나에게 힘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나를 통하여 전도의 말씀이 완전히 전파되게 하시고, 모든 이방 사람이 그것을 들을 수 있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주께서 나를 사자의 입에서 건져내셨습니다.
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구원하셔서, 그분의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분께 영광이 영원무궁 하도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
디모데서는 사도 바울의 마지막 서신서입니다. 사도 바울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위대한 종 아닙니까? 엄청난 지식의 소유자이며 대단한 열정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가르침을 받고 양육을 받은 사람들이 다 어디 갔습니까? 노 사도의 마지막이 이렇게 외롭습니다.
지금 이 사역의 말미에 사도의 곁에 한 사람도 남아있지 않고 모두 자기를 버렸다고 합니다.
적어도 사도 바울 하면, 그의 곁에는 제자들과 후배들과 교인들이 그를 숭앙하며 “우리 목사님, 우리 목사님” 하고 떠받들어야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은 사도의 마지막이 이처럼 외로운 것을 구태여 우리에게 보여주십니까? 이 길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갈 길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이를 악 물고 잘 해내면 사도 바울처럼 되는 것입니다. 비단 목사의 삶뿐이겠습니까? 여러분 , 여러분 모두가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입니다.
혹시 여러분이 기대한 대로 여러분의 삶이 흘러가지 않는다고 해서 당황해 하지 마세요.
이런 슬픈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겨울에 아기를 업은 아주머니가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습니다.
그 아주머니는 처음 가는 그 곳 역을 혹시 놓칠까봐 일어서서 계속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한 신사가 물었습니다.“왜 그렇게 서성거리냐고” 아주머니가 대답을 했습니다“저는 어디어디를 가고 있는데 혹시 그 역을 놓칠까봐 그렇다고” 신사가 말했습니다. “바로 다음 정거장이 그 곳이니까 안심하고 기차가 서면 내리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이내 기차가 섰고 아주머니는 그 신사에게 확인을 했습니다. “여기가 맞느냐고” 신사는 귀찮아서 밖을 내다보지도 않고 맞다니까 왜 이렇게 귀찮게 구냐고 면박을 주었습니다. 이미 밤12시가 넘은 시각에 그 아주머니가 아기를 업고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기차에서 내렸습니다. 그런데 그 신사가 다음 정거장에서 기차가 섰을 때 창밖을 보았습니다. 그 아주머니가 찾던 역이 바로 그 역이었습니다. 차장에게 물었습니다. 좀 전에 섰던 그 역은 어디냐고? 그 차장이 말했습니다. “거기는 기차에 손 볼 곳이 있어서 잠 간 정차했던 곳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음날 벌판에서 한 아주머니가 아기를 꼭 품에 안고 있는 것이 동네 사람들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여러분, 안내자를 잘 못 만나면 그렇게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23:13-15, 33) 13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닫기 때문이다. 너희는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14절 없음)
15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개종자 하나를 만들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하나가 생기면, 그를 너희보다 배나 더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33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심판을 피하겠느냐?
(고후11:13-15) 13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들이어서,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입니다.
14 그러나 놀랄 것은 없습니다. 사탄도 빛의 천사로 가장합니다.
15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이 의의 일꾼으로 가장한다고 해서, 조금도 놀랄 것이 없습니다. 그들의 마지막은, 그들이 한 대로 될 것입니다.
여러분, 사탄도 광명한 천사의 모습으로 위장을 하고 거짓 선지자들도 의의 선지자로 둔갑을 해서 우리를 미혹합니다. 무엇으로 참인지 거짓인지 구별하시겠습니까?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성경대로 말씀을 바로 전하는지 성경대로 교회 멤버들을 양육하고 있는지 그것을 보십시오.
교회가 얼마나 큰지, 목사가 얼마나 많이 배운 사람인지, 교인들의 생활수준이 어떤지 그런 것으로 판단하지 마시고 그 교회가 성경대로 행하고 바른 교리 위에 서있는지를 보세요.
그리고 여러분의 목사가 타협하지 않고 바른 말씀, 바른 복음만을 전할 수 있기를 늘 기도해 주십시오. 늘 기도해 주세요.
제40장 교회 (8) 교회, 오직 예수로만 위로를 삼는 자들
(마2:16-18)
16 헤롯은 박사들”( 또는 '점성가들'. 그, '마고스')에게 속은 것을 알고, 몹시 노하였다. 그는 사람을 보내어, 그 1)박사들에게 알아본 때를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가까운 온 지역에 사는, 두 살짜리로부터 그 아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였다.
17 이리하여 예언자 예레미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18 "라마에서 소리가 들려 왔다. 울부짖으며, 크게 애곡하는 소리다.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우는데, 자식들이 없어졌으므로, 위로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유다 왕 아하스에게 “너희는 내 백성이므로 내가 분명히 너희를 아람과 북 이스라엘로부터 건져 낼 것이다. 그런데 내가 왜 고통을 원천 봉쇄하지 않고 너희들을 고통 가운데 두는 지 아니? 그것은 너희가 너희의 죄를 알게 하고 너희가 회개하고 정하게 되게 하기 위해 그러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를 공격하는 그 무리는 나의 도구일 뿐이다. 그들은 반드시 심판을 받아 멸망할 거야. ”스알야숩, 마헬살랄 하스바스“
그리고 그 성경을 읽는 교회들에게 “교회야, 그 모든 일들이 처녀가 잉태하여 아이를 낳는 것으로 시작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태가 지금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서 이 이사야서를 인용한 것은 예수님은 바로 “스알야숩” 남은 자들을 돌아오게 만드시러 오셨고 그 남은 자를 제외한 다른 존재들에게는 “마헬살랄 하스바스” 심판의 존재로 오셨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럼 임마누엘에 대한 설명은 끝났습니다.
두 번째로
마태복음2장4절부터 보시면
(마2:4-6) 4 왕은 백성의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을 다 모아 놓고서, 그리스도가 어디에서 태어나실지를 그들에게 물어 보았다. 5 그들이 왕에게 말하였다. "유대 베들레헴입니다. 예언자가 이렇게 기록하여 놓았습니다.
6 3)'너 유대 땅에 있는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통치자들 가운데서 가장 작지 않다. 네게서 통치자가 나올 것이니, 그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일 것이다(또는 '다스릴')
이렇게 미가서의 구절을 인용합니다.
미가도 역시 이사야와 호세아와 동시대에 활약했던 선지자입니다. 그 혼란스러웠던 아하스 왕 때 미가 역시 미가서 전체에 남 유다가 바벨론에게 끌려갈 것인데 그 절망 중에서 너희 남은 자를 불러오실 것이라는 예언을 했습니다. 미가서 3장부터 나오는 이야기가 전부 “이스라엘아 하나님께서 너희를 갈아엎어 버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가 쫓겨난 자와 내가 환난 받게 한 자를 모아 남은 백성이 되게 하여 이제부터 영원히 그들을 치리하리라 하셨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마태는 미가의 이러한 전체 사역의 내용을 대표해서 6절 말씀을 쓴 것입니다.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미가 서를 직접 몇 구절만 보시면 이러합니다.
(미4:8-11) 8 너 양 떼의 망대야, 도성 시온의 산아, 너의 이전 통치가 회복되고 도성 예루살렘의 왕권이 네게로 돌아올 것이다.
9 어찌하여 너는 그렇게 큰소리로 우느냐? 왕이 없기 때문이냐? 어찌하여 너는 아이를 낳는 여인처럼 진통하느냐? 자문관들이 죽었기 때문이냐?
10 도성 시온아, 이제 네가 이 도성을 떠나서, 빈 들로 가서 살아야 할 것이니, 아이를 낳는 여인처럼, 몸부림치면서 신음하여라. 너는 바빌론으로 가야 할 것이다. 거기에서 주께서 너를 건지시고, 너의 원수에게서 너를 속량하실 것이다.
11 그러나 이제 많은 민족이 연합하여 너를 칠 것이다. 그들은 이르기를 "시온은 망해야 한다. 이제 곧 우리는 이 도성이 폐허가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한다.
이 구절은 ‘교회야, 너희는 아이를 낳는 여인처럼 고통을 당할 것이다. 그것은 너희를 정하게 만드시기 위한 하나님의 손길이다. 그러나 너희는 거기에서 건짐을 받게 될 것이다.’라는 내용입니다. 어떻게? 바로 뒤의 내용을 보세요.
(미5:2-3) 2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의 여러 족속(히, '천 천' 또는 '통치자들') 가운데서 작은 족속이지만,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다. 그의 기원은 아득한 옛날, 태초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3 그러므로 주께서는 해산하는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까지, 그의 백성을 원수들에게 그대로 맡겨 두실 것이다. 그 뒤에 그 형제, 사로잡혀 가 있던 남은 백성이,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그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너희를 그 대적의 손에 붙여 두시겠고 그 후에는 남은 자가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아기가 베들레헴에서 나면 이제 “스알야숩” 남은 자들만 돌아오고 그렇지 못한 자들은 “마헬사랄 하스바스” 멸망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나오는 선지자의 예언이 마태복음 2장15절의 말씀입니다.
(마2:14-15) 14 요셉이 일어나서, 밤 사이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15 헤롯이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이것은 주께서 예언자를 시켜서 말씀하신 바.”( 호 11:1)"내가 이집트에서 내 아들을 불러냈다"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었다.
이 말씀은 호세아서에 나오는 말이지요? 호세아도 역시 이사야와 미가와 함께 동시대에 사역하던 사람입니다. 호세아서의 전체 내용은 여러분이 너무 잘 알죠?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자기 백성들이 하나님을 배신 한 것이 얼마나 가슴이 아픈 것인지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창녀 고멜과 결혼하라고 합니다. 고멜은 아이 셋을 낳고도 계속해서 남편을 배반하고 나가서 바람을 피웁니다. 결국 모든 남자에게 버림을 받고 노예 시장에 팔려 갑니다.
하나님은 호세아를 시켜 은15냥과 보리 한 호멜 반으로 창녀 고멜을 사 오라고 하십니다.
보리 한 호멜 반은 은 15냥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합이 은 30냥이지요?
은 30냥은 출애굽기21장 32절에 따르면 사람의 목숨의 대가입니다.
(출21:32) 소가 남종이나 여종을 받아 죽게 하였으면, 소 임자는 그 종의 주인에게 은 삼십 세겔을 주고, 그 소는 돌로 쳐서 죽여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목숨의 대가로 은 30냥에 팔린 것이지요.
이렇게 그냥 죽어 마땅한 자들을 그 고통에서 구해 내시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 주신 것이 호세아서입니다. 그 인용된 부분을 보겠습니다.
(호11:1-11) 1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다
2 그러나 내가 부르면 부를수록, 이스라엘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갔다. 짐승을 잡아서 바알 우상들에게 희생 제물로 바치며, 온갖 신상들에게 향을 피워서 바쳤지만,
3 나는 에브라임에게 걸음마를 가르쳐 주었고, 내 품에 안아서 길렀다. 죽을 고비에서 그들을 살려 주었으나, 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4 나는 인정의 끈과 사랑의 띠로 그들을 묶어서 업고 다녔으며, 그들의 목에서 멍에를 벗기고 가슴을 헤쳐 젖을 물렸다.
5 이스라엘은 이집트 땅으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다. 그들이 나에게로 돌아오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6 전쟁이 이스라엘의 성읍을 휩쓸고 지나갈 때에, 성문 빗장이 부서질 것이다. 그들이 헛된 계획을 세웠으니 칼이 그들을 모조리 삼킬 것이다.
7 내 백성이 끝끝내 나를 배반하고, 바알을 불러 호소하지만, 그가 그들을 일으켜 세우지 못할 것이다.
이 나쁜 녀석들 너희는 모조리 멸망할 것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그러다 갑자기 8절부터 반전이 일어납니다.
8 에브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원수의 손에 넘기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처럼 버리며, 내가 어찌 너를 스보임처럼 만들겠느냐? 너를 버리려고 하여도, 나의 마음이 허락하지 않는구나! 너를 불쌍히 여기는 애정이 나의 속에서 불길처럼 강하게 치솟아 오르는구나.
9 아무리 화가 나도, 화나는 대로 할 수 없구나.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망시키지 않겠다. 나는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니다. 나는 너희 가운데 있는 거룩한 하나님이다. 나는 너희를 위협하러 온 것이 아니다."
10 주께서 사자처럼 부르짖으신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주의 뒤를 따라 진군한다. 주께서 친히 소리 치실 때에, 그의 아들딸들이 서쪽에서 날개 치며 빨리 날아올 것이다.
11 애굽 땅에서 참새 떼처럼 빨리 날아오고, 앗시리아 땅에서 비둘기처럼 날아올 것이다.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불러내었는데 너희는 계속 나를 배반하고 죄를 짓는구나. 내가 너희를 멸망시켜 버릴 것이다. 너희는 그렇게 멸망당해도 싼 인간들이다. 그러나 교회야, 내가 어찌 너희를 버릴 수 있겠느냐? 너희가 아무리 그렇게 타락해 있고 범죄 한다고 해도 내 사랑이 너희를 버릴 수 없게 하는 구나. 너희의 속을 완전히 바꿔 버리기 전에는 너희는 아무리 내가 남편이 되어서 너희를 끌고 가도 너희는 변하지 않는 구나. 그래서 내가 그러한 너희를 구원해 내기 위해서 한 방법을 마련했다. 메시야를 보내어 너희를 구원해 내겠다.
너희 속을 완전히 바꿔 버리겠다. 내 영을 너희 속에 넣어버리겠다. 그리고 너희 마음 판에 나의 법을 새겨 버리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가 예수님의 탄생과 호세아서의 말씀을 연결시킨 것은 바로 그 의미를 전달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는 말은 그 전체를 대표하는 말입니다.
그럼 이제 제일 해석하기가 어렵다고 하는 오늘 본문의 내용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예수께서 태어나시던 밤에 별 하나가 동방 박사들의 눈에 띄었습니다. 동방 박사들은 이방 종교를 믿는 점성술사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들은 이교도들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기 위해 사용하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별이 왕의 탄생을 가리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물을 가지고 별을 좇아갔습니다. 그런데 이 멍청한 별이 바로 예수님께로 안 가고 헤롯의 궁으로 이 동방박사들을 데리고 갑니다. 헤롯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에돔 사람입니다. 헬라 사람들과의 친분으로 왕이 된 사람입니다. 헤롯은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늘 불안했습니다. 그런데 동방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찾습니다. 왕은 자신의 후손이 되어야 하는데, 헤롯은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동방박사들에게 그 왕이 어디에 계신지 알게 되면 자기에게도 꼭 알려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동방박사들에게 천사들이 나타나서 헤롯에게 가지 말라고 알려 줍니다. 헤롯은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베들레헴과 그 가까운 온 지역에 있는 두 살 미만의 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습니다. 그 별이 동방박사들을 헤롯 궁으로 데리고 가지만 않았어도 무고한 두 살 미만짜리 아이들이 안 죽었을 거 아닙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그 별을 헤롯 궁으로 보내셨을까요?
그리고 천사들을 보내서 동방박사들도 피하게 하시고, 요셉과 마리아와 예수님도 피하게 하셨으면서 왜 두 살 미만짜리 아이들은 피할 길을 주지 않으셨나요?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사건을 통해서 “교회”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 이야기가 바로 오늘 본문 17절과 18절입니다.
(마2:17-18) 17 이리하여 예언자 예레미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18 "라마에서 소리가 들려 왔다. 울부짖으며, 크게 애곡하는 소리다.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우는데, 자식들이 없어졌으므로, 위로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이 말씀은 예레미야 31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예레미야는 스바냐, 하박국, 다니엘, 에스겔 등과 동시대에 일한 선지자입니다. 그는 남 유다에서 활동을 하면서 남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할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러면서 남 유다를 향해 “항복하라”고 권면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매국노라고 오해를 받고 동족들로부터 심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만 했을 뿐인데 그는 그런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늘 울고 다녔습니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
예레미야가 전한 본래의 뜻은 정치적, 군사적 항복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바벨론을 들어서 매를 대시는 것이니까 얼른 너희들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꾸지람과 매를 순순히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30장에서 33장까지를 죽 읽어보면 이스라엘이 이제 하나님 앞에 매를 맞지만 멸망당하지 않고 회복 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오늘 마태복음에서 인용된 예레미야 31장15절은 그 전체의 내용을 담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구절은 17절까지의 내용을 함축해서 써 놓은 것입니다.
(렘31:15-17) 15 "나 주가 이렇게 말한다. 라마에서 슬픈 소리가 들린다. 비통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 라헬이 자식을 잃고 울고 있다. 자식들이 없어졌으니, 위로를 받기조차 거절하는구나.
16 나 주가 이렇게 말한다. 이제는 울음소리도 그치고, 네 눈에서 눈물도 거두어라. 네가 수고한 보람이 있어서, 네 아들딸들이 적국에서 돌아온다. 나 주의 말이다.
17 너의 앞날에는 희망이 있다. 네 아들딸들이 고향 땅으로 돌아온다. 나 주의 말이다."
라헬이 두 아들이 잡혀가서 울고 있지만 그 아들들은 하나님께서 다시 보내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하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라헬은 야곱의 아내입니다. 야곱의 이름은 이스라엘이지요. 그에게는 네 아내와 열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 라헬과 라헬의 두 아들 요셉과 베냐민을 아주 사랑했습니다.
요셉은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낳았고 에브라임은 북 이스라엘을 이루고 있는 지파 중에 제일 큰 지파였습니다. 그래서 ‘에브라임아’ 하면 북 이스라엘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었고 이스라엘 전체를 가리켜 “에브라임아” 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라마는 베냐민 지파의 성입니다. 그래서 라헬의 두 아들 하면 이스라엘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신약 식으로 하면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서의 내용은 이스라엘을 라헬의 두 아들로 의인화해서 하나님의 구속 사건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라헬의 두 아들이 붙들려 가서 라헬은 그들이 죽은 것으로 알고 통곡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살려서 돌려보내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죽어야 할 자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이며 복음인 것입니다. 마태가 예수님의 탄생과 그 이야기를 연결시킨 것은 예수님은 그 일을 하러 오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두 살 미만의 아이들은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죄를 지을 시간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죽었습니다. 죽음은 무엇의 결과입니까? 죄의 삯은 사망이라 했습니다. 사람이 죽는 다는 것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기들이 죽는 다는 것은 그 아기들이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롬5:12-14) 12 그러므로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또 그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온 것과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게 되었습니다.
13 율법이 있기 전에도 죄가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14 그러나 아담 시대로부터 모세 시대에 이르기까지는 죽음이 지배하였습니다.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죽음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아담은 장차 오실 분의 모형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난다는 것입니다. 그 죄가 얼마나 지독한지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끌고 나오셔서 남편으로 곁에서 끌고 가는데도 전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속을 완전히 바꿔 버리기로 하신 것입니다. 완전히 새 사람으로 재창조 해 버리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렘31:31-33) 31 "그 때가 오면,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유다 가문과 새 언약을 세우겠다. 나 주의 말이다.
32 이것은 내가 그들의 조상의 손을 붙잡고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오던 때에 세운 언약과는 다른 것이다.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은 나의 언약을 깨뜨려 버렸다. 나 주의 말이다. 33 그러나 그 시절이 지난 뒤에,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언약을 세울 것이니, 나는 나의 율법을 그들의 가슴 속에 넣어 주며, 그들의 마음 판에 새겨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여기서 두 살 미만의 아기들이라는 것은 그렇게 원죄로 말미암아 결국 죽어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인간의 절망, 죄악 된 본능, 그 뿌리 , 해결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제시하시고 그 것을 죽여 버리시고 다시 살려 내시기 위해 예수가 이 땅에 온 것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두 살 미만의 아이들이 죽는 것을 보면서 ”우리 인간은 무슨 방법이 없는 존재들이구나.“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모든 인류가 이렇게 죄 아래 있었는데 , 그래서 다 죽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 교회를 살려내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렇게 하나님께 대우를 받은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 위로를 받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라헬은 위로 받기를 거절했다고 했습니다. 왜 입니까? 이 세상 어떤 것도 자식이 죽은 것을 위로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힘든 시험이 닥치면, 하나님, 빨리 이 문제 해결해서 나를 위로해 달라고 떼를 씁니다. 그 문제 해결이 정말 우리를 위로합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위로는 오직 죽은 자를 살려내신 그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돈으로 여러분의 위로를 삼으시겠습니까? 명예로 여러분의 위로를 삼으시겠습니까?
예수님은 그것을 주시러 오신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아들로 말미암아 슬피 우는 라헬에게 자식들을 살려 보내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그 분의 자녀들이 화목 되게 하시기 위해 우리의 죄를 도말하시고 우리에게 의의 옷을 입히시고 살려내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유일한 위로입니다. 여러분, 다른 곳에서 위로를 찾지 마십시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구원의 복된 소식이 여러분의 위로가 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에게 그 구원의 복된 소식을 설명해 주시기 위해, 별을 헤롯 궁으로 보내셔서 헤롯을 동원하시고, 아기들을 죽게 놔두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이미 깨닫고 계신 여러분, 여러분의 성탄절은 1년 365일 아니, 매분 매초 성탄절입니다. 로마의 태양신 미투라의 축일이었던 그 한날을 세상 사람들처럼 광분하며 보내지 마시고 우리 예수님 오신 참 의미를 깊이 새기시며 감사와 감격으로 그 날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제41장 교회 (9) 교회와 복음
(창12:1-3)
1 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3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설교는 구사되는 단어가 다르고 전개되는 내용은 다를지라도 모두가 한 곳으로 수렴되어야 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라는 복음으로 결론이 나야 합니다.
서머나 교회가 개척되고 제가 많은 설교를 했지만 그 모든 설교는 복음을 설명하기 위한 것들이었습니다. 제가 몇 차례 복음의 개요를 이러저러한 각도에서 설교를 했습니다만 오늘은 조금 더 자세히 히브리 문화와 언어, 사상, 그리고 관습 등을 살피면서 여러분들에게 정확하게 개념 정리를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생명, 삶, 죽음, 복, 의” 이런 철학적이고 추상적인 개념들을 좀 더 실제적이고 실존적인 관점으로 정의를 내려 드리겠습니다.
제가 최대한 쉽게 설명을 하려고 노력을 하겠습니다. 그래도 조금 힘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처음에는 조금 이해하시기 힘드시더라도 여러 번 들으시고 완전히 이해하실 때까지 열심히 공부하세요.
우리가 성경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히브리 사람들의 언어와 사상 그리고 문화와 습관, 그들의 배경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먼저 히브리 사람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개념을 우리가 살피고 넘어가겠습니다.
성경에는 “살았다” 혹은 “죽었다”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어있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다시 살았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개념은 우리의 것과 조금 다릅니다.
이러한 히브리 사람들의 삶과 죽음에 관한 개념을 먼저 알아야 성경이 이야기하는 복음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창2:7) 주 하나님이 땅(히, '아다마')의 흙으로 사람(히, '아담')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지으신 존재에 생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창세기 2장에서 쓰인 생기라는 단어는 (네솨마)인데 여러분이 잘 아시는 “르와흐”와 같은 말입니다.
생기를 불어넣었더니 그 존재가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생령이 되었다“는 말을 히브리 원어로 보면 ”하이 네페쉬 하야“입니다 /하이는 “살아있는”의 뜻이고 네페쉬 하야는 being "존재“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에는 생령이 되었다 는 말이 became living being라고 번역이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헬라 문명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알렉산더의 팍스 로마나가 이 시대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헬라의 이원론으로 많은 사고를 합니다. 그것은 히브리 사상과는 많이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는 데 조금 어려움을 겪을 때도 있습니다.
헬라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받은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티끌로(흙으로)(아파르) 사람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living 네페쉬가 되기 전의 네페쉬를 만들어 놓으신 거죠.
그 사람은 그냥 인형에 불과했습니다. 눈동자도 안 움직이고 그냥 마네킹 같은 것이었는데 거기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그 존재가 살아서 말도 하고 피도 통하고 그렇게 된 것으로 이해를 합니다.
그러나 히브리 사람들이 쓰는 이 “네페쉬”라는 말의 의미는 그런 움직이지 않는 인형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 사람들이 쓰는 이 “네페쉬” “존재”라는 이 말의 개념은 육신과 정신, 성품, 인격 등 사람이 사람이기 위해 필요한 모든 영적, 육 적 요소를 다 포함해서 네페쉬(존재)라 이야기 합니다.
우리 조상들이 어떤 사람의 사람됨을 판단할 때 무엇을 근거로 합니까? “신언서판”이라고 하지요. 그 사람의 신수(육신)과 언변, 그 사람의 글과 판단력 이 모든 것은 그 사람의 성품과 인격을 나타내지요. 그 것이 그 존재를 특징짓는 요소들이라고요. 그러니까 김성수가 김성수이기 위한 모든 외양, 성품, 인격, 의식, 무의식 모두를 가리켜 “네페쉬”“존재”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이 “네페쉬”라는 단어를 우리가 종종 spirit이라고 번역하는 “르와흐”라는 단어와 heart라고 번역하는 “레브”라는 말과 혼용해서 씁니다. (네페쉬,르와흐,레브)라는 단어들을 히브리 사람들은 생명, 생기, 호흡, 영혼, 기운, 존재 이런 뜻으로 혼용을 해서 씁니다. 그렇다고 그 말들이 정확히 동의어는 아닙니다.
좀 더 정확히 그 단어들의 뜻을 보면 “르와흐” spirit은 “네페쉬, 존재”가 어떤 일을 수행할 때 그 일을 수행하는 힘, 즉 operation power을 말합니다. 그리고 히브리 말 “레브, heart”는 네페쉬가 어떤 것을 기획하고 의도하고 계획하는 역할을 합니다. 네페쉬는 르와흐나 레브를 다 포함한 전체 존재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기능적인 면에서 조금 다릅니다. 그런데 네페쉬, 르와흐, 레브가 혼용되어 쓰입니다. 생명, 생기, 호흡, 영혼, 기운, 존재 이렇게 같이 쓰인다고 했습니다.
조금 이해하기 편하게 제가 설명을 해 드리면,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계십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 세 분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각기 다른 기능으로 일을 하셨습니다. 성부하나님께서는 계획을 하셨고 성자 하나님은 실행에 옮기셨고 성령하나님께서는 적용을 해 나가셨습니다. 그런데 이 세분 하나님은 그냥 “하나님”으로 대표됩니다. 그러나 기능이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이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예수님”으로도 불립니다. 그 하나님은 “성령님”으로도 불립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존재에 대한 개념이 이런 것입니다. “존재”는 네페쉬 라고 불리지만 그 네페쉬는 spirit, heart를 포함하고 대표하는 단어입니다. 그 네페쉬는 르와흐라고도 부를 수 있습니다. 그 네페쉬는 레브라고도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존재” 하면 “네페쉬”라고 대표하여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네페쉬, 존재”는 육신과 영혼, 정신, 생각 모든 것이 포함 된 종합 적인 것입니다.
이런 사상 때문에 그들에게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개념이 쉽게 이해가 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안다”라고 하면 그냥 피상적으로 어떤 대상을 조금 안다는 정도가 아니라 부부 관계처럼 그 대상을 완전히 이해하고 자기 네페쉬 속으로 끌어들인 것을 “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깊은 우정과 사랑의 관계를 “안다”고 합니다. 육체와 영혼과 생각을 따로 떨어뜨려 생각하지 않습니다.
“묵상을 한다.”는 개념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는 “묵상”하면 “단순히 눈으로 보고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시편1편에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한다고 나와 있지요? 그것을 우리는 단순히 성경을 깊이 읽고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히브리 사람들이 묵상을 한다고 하는 것은 그냥 눈으로 보고 생각하는 것만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적용하고 실천하는 것까지를 모두 포함한 것을 “묵상 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네페쉬” “존재”는 의식과 무의식 그리고 육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서구 사상은 무의식 상태에서 죄를 지은 것은 죄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무의식 상태에서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이 입증만 되면 형량이 조금 가벼워집니다. 그러나 히브리 사람들은 생각이 다릅니다. 의식이건 무의식이건 그것은 모두 네페쉬, 존재 의 것이기 때문에 그 존재가 책임을 지어야 합니다. 그들은 생각과 행동을 따로 떨어뜨려 생각하지 않습니다. 생각을 했으면 이미 그 네페쉬는 그 존재가 생각을 한 바로 그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지나가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것이 이미 간음한 것” 이라고 말씀 하셨을 때 그들은 쉽게 이해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네페쉬 , 존재는 그냥 죽어있는 인형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하이 네페쉬 하야”“living being"이 되기 전에 그냥 인형이었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보고 말하고 생각하고 하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도 하나님께서 하늘의 새와 물고기를 창조하시는데 그들을 가리켜서도 “네페쉬”라는 단어를 씁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생기를 불어 넣으셨나요?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늘을 날고 물에서 헤엄을 쳤습니다. 인간도 역시 그렇게 존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으셨더니 그 존재가 “하이 네페쉬”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보고 말하고 생각하고 있다고 해서 그 것이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되지요?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죽었다는 개념은 이러합니다.
이 존재“네페쉬”가 존재하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그러니까 건강, 지식, 지혜, 인격, 성품 등등)그 모든 것을 그들은 “생명”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존재가 그 생명력을 100% 소유하고 있는 상태를 “happiness"(행복)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그 행복을 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처음에 창조되었을 때에 생기가 불어넣어져서 인간이 하이 네페쉬 하야(living being)생령이 되었습니다. 100%의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상태가 행복한 상태였습니다. 비록 죄를 지을 가능성은 있었지만 죄를 짓기 전에는 100%의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죄를 지었습니다. 그 죄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질병과 고난과 죽음이 들어왔습니다. 인간에게 질병과 다툼, 고난 등이 닥치게 되면 인간은 아프고 고통스럽고 슬픕니다. 100%의 만족한 생명력을 소유하지 못하게 됩니다. 부족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죄인으로 나기 때문에 질병과 고통과 사망에 노출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늘 뭔가가 부족합니다. 가슴 한 구석이 뻥 뚫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 것을 채우기 위해 노력을 합니다. 돈도 벌고 공부도 하고 일도 하고 사랑도 합니다. 그러나 그 부족은 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죄가 해결되지 않으면 절대 그 구멍은 메워지지 않습니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육신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나이가 들고 늙어가면서 생명력은 점점 줄어들지요? 힘도 빠지고 외모도 늙어갑니다. 결국에는 모든 생명력을 쏟아 내어버린 시체가 되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죽음을 향해 생명력이 조금씩, 조금씩 소진되는 그 죽음을 향한 전체의 과정을 “죽었다”라고 표현합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길갈에서 할례를 행합니다. 남자들이 고통스러워합니다. 여호수아 5장8절에 “그들이 낫기를 기다리매” 거기서 쓰인 단어가 역시 “하야”입니다. 그들이 “살아나기를 기다리매” 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히브리 사람들은 생명력이 꽉 차 있지 않고 죽음으로 향해 가는 모든 과정에 있는 사람을 “죽은 자”혹은 “약한 자” “병든 자”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은 죄의 삯으로 “사망”이라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죽게 되어있습니다. 누구도 그 죽음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 죽음을 향해 하루하루 늙어가고 생명력을 소진해 가고 있는 자들을 가리켜 히브리 사람들은 “죽은 자”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 죄인들을 가리켜 “죄와 허물로 죽은 자”라는 말을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약해졌던 생명력이 다시 회복되어 지면서 100%의 만족, happiness로 향해 가는 길을 “살았다”라고 합니다. 모두가 죽어야 하는데 어떤 한 무리가 그 죽음의 길에서 돌이켜 살아났다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이 지구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죽어 가는 자, 죽은 자“들과 ”살아난 자“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마치 대구역에 있는 우동 집에서 우동을 먹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같은 모양을 하고 같은 행위를 하고 있지만 어떤 사람은 부산으로 내려가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서울로 올라가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어떤 사람은 죽어가고 있고 어떤 사람은 살아나고 있는 것입니다. 죽어 가고 있는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선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살아나고 있는 악당이 존재 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살아난 자인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한 가지 우리가 잘 알아두어야 할 개념을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그렇게 어떤 존재가 살아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생명력을 가리켜 “바라크” “복”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복의 개념하고는 완전히 다릅니다.
창세기 1장22절에 하나님께서 새와 물고기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셨다”라고 합니다.
(창1:22) 하나님이 이것들에게 복을 베푸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여라. 새들도 땅 위에서 번성하여라" 하셨다.
새하고 물고기한테 무슨 복을 주신 것입니까? 재물을 주셨나요? 자식을 많이 낳게 해 주셨나요? 좋은 대학을 들어가게 해 주셨나요?
성경이 말하는 복은 “ 하나님께서 어떤 존재를 만드실 때 그 존재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존재로서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복(福)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새에게 있어서 복은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의도하신 대로 하늘을 잘 날아다니면 “복을 받은 것”입니다. 물고기가 원래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물에서 잘 헤엄쳐 다니면 그 존재는 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새와 물고기를 만드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셨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존재가 존재하게 되는 “생명” “복” “바라크”라는 것은 누가 주십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복을 받았다”라는 말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라는 말은 정확하게 동의어입니다.
모든 존재는 하나님께서 주신 그 복으로 말미암아 행복하게 되어있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네페쉬에게 주신 복, 그 생명력으로 말미암아 파생되는 것을
부유함이라든지, 건강이라든지, 자식이 많아지는 것이라든지, 오래 사는 것으로 표현을 해 놓은 것입니다. 분명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의 결과입니다. 오해하지 마시고 잘 들으세요.
사람들은 그런 것이 있으면 잠깐이지만 행복해 합니다. 그런데 그 복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때에만 참 복인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복을 받았다는 말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말이 정확하게 동의어라고 했지요? 그래서 복은 하나님이 함께 계실 때 참 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짓자 하나님께서 떠나가 버리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바로 죽여 버리지 않으시고 인간에게 여전히 한시적인 생명력은 남겨두고 떠나버리셨습니다. 그래서 그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그 복의 파생물인 복의 모양이 나타납니다. 끝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들으세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창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베푸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하셨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고 인간들에게 “너희는 이렇게 살아라.”라는 의도하심이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네페쉬”에게 그렇게 살 수 있는 능력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살아내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 그것이 바로 “복”입니다. 그것을 그들은 생명이라고도 표현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사탄의 유혹에 빠져서 타락을 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서 떠나셨습니다. 원수가 되어버렸습니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주시면서 약속하신 대로 “너희가 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하신 그 죽음을 향해 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인간을 떠나 버리셨지만 육체적인 생명을 끊어버리지는 않으셨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를 금방 죽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히브리 사람들의 사상에서는 그 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그들에게는 자기 존재 안의 생명력이 모두 쏟아져서 시체가 되어지는 그 곳을 향해 가는 과정이 모두 “죽음”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갈라져서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참 복을 잃었습니다.
왜요? 참 복이 뭐라 했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복음 비로소 참 복이 된다고 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죽음을 향해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간에게는 한시 적인 생명력이 부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력에서 생기는 부와 건강과 장수 같은 것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떠나버린, 죽음을 향해 돌진하고 있는 소멸되어 가는 복의 모양일 뿐입니다. 그렇게 소멸되어 가고 불타버릴 것들을 우리는 진정한 복이라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떠난 복의 모양들은 제로섬의 법칙 아래 있게 됩니다. 누군가가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저기 저편의 누군가가 가난해지게 되어있습니다. 누군가가 높이 올라가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밟아야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시험에 붙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떨어져야 합니다. 그것은 복이라고 하지 않고 오히려 “악”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떠난 그 모든 것들은 “악”인 것입니다. “죄”인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죽어 가는 이 세상, 우리 주변에 풍요한 사람, 건강한 사람, 멋진 사람들을 두어서 우리로 하여금 부러움으로 몸서리치게 하시는지 아십니까? 참 복을 회복한 자가 누릴 것은 “너희가 지금 부러워하는 것을 다 합쳐서 거기다가 억만 배를 곱한 것 이상의 행복이다”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참 복을 받은 자들은 그 어마어마한 것들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거기서는 제로섬의 법칙이 없습니다. 모두가 풍요하고 모두가 왕입니다. 모든 교회가 예수님과 함께 만물을 다스릴 것입니다. 우리는 그 참 복에 대한 힌트만 얻으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그렇게 “죽음을 향해 갈 수밖에 없는 자” “죽은 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껍데기뿐인 복을 진짜 복인 줄 알고 착각하며 희희낙락(喜喜樂樂)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모두 불타 버릴 것들이지요.
그 복을 잃은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어떤 무리를 택하셔서 다시 그 진짜 “복”을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모든 인간이 죽음을 향하여 가고 있는 “그 죽은 삶”을 살고 있는데 어떤 자들을 살리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그 처음 시작을 가시적으로 보여 주시는 곳이 바로 오늘 본문인 창세기의 아브라함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인 갈대아 우르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아브람에게 찾아가셨습니다. 오늘날 이라크 지방이지요, 이미 그 때 당시 수세식 화장실이 있었던 풍요로운 곳이었습니다. 그 역시도 풍요는 누리고 있었지만 우상을 만들어 팔던 죽어 가는 자, 죽은 자였습니다. 그에게 찾아가셔서 내가 복을 줄 테니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의 개념으로 보면 아브람은 이미 충분히 “복”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가 네게 복을 줄 것이고, 너를 복의 근원으로 만들겠다고 하시고는 삭막한 광야로 내 모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삭막한 광야로 내 몰린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이며, 복 받은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눈에 보이는 풍요와 안락함을 주시기 위해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건져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의 번영과 번성을 주시기 위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비옥한 갈대아 우르와 삼각주 땅인 애굽에서 건져내셔서 먹을 물도 제대로 없어서 바닷물을 끓여 먹어야 하는 가나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십니다. 무엇을 주시려고요? 복을 주시려고요. 진짜 복을 주시려고요.
아까 히브리 사람들의 복의 개념이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셨을 때 의도하신 대로 충만한 생명력을 가지고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을 복이라 한다고 했지요?
바로 그 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조금 못 배우고 못 살고 못 생겼다고 해서 “아이구, 지지리도 복도 없는 놈” 하면 그 사람은 성경이 말씀하고 계시는 “복”이 뭔지 정말 모르시는 겁니다.
산상수훈을 한번 보겠습니다.
(마5:3-10) 3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
5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7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자비함을 입을 것이다.
8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9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릴 것이다.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우리가 산상 수훈을 보는 관점을 조금 달리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산상 수훈을 볼 때에 복 있는 자는 애통해야 하고, 마음이 가난해야 하고, 마음이 청결해야 하고, 핍박을 받아야 한다는 관점에서 보는 것 보다 “누가” 복을 받을 수 있느냐의 관점으로 눈을 돌려야 합니다.
세상 적인 시각으로 볼 때 애통하고, 마음이 가난하고, 핍박을 받고, 그러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천하에 복도 없고 재수 없는 사람처럼 보일지라도 그가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는 복 받은 사람일 수 있다는 관점으로 보아야 합니다.
“나는 구원받았는데 왜 마음이 가난하지 않지? 나는 구원받았는데 왜 마음이 청결하지 않지? 열심히 노력해야해“ 이런 짐을 지우려는 것이 아니라 복이라는 것은 너희가 생각하는 이 세상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라는 것을 설명하시기 위함입니다.
사람이 자비하게, 깨끗하게, 청결하게, 온유하게 살면 세상에서는 바보 취급을 당합니다.
사업을 할 때 온유한 마음으로 사업을 하면 손해를 보기 마련입니다. 자비를 베풀면 어차피 자기 것에서 나누어주어야 하기 때문에 자기의 소유가 줄어드는 것입니다. 의에 주려하면서 의롭게 살려고 하면 “그래 너 잘났어.” 하는 소리밖에 못 듣습니다.
한마디로 산상 수훈의 내용처럼 살면 세상에서는 바보 취급받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볼 때 그렇게 바보 같고, 슬프고, 애통하고, 미련해 보여도 그는 복 받은 사람일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고 “지지리도 복도 없는 인간”이라고 섣불리 이야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요? 복이라는 것은 이 땅의 풍요를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복 받은 자로 완벽한 삶을 살다 가신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의 삶이 어떠셨나요? 이 땅에서 풍요와 번영을 누리다가 가셨나요?
성경의 복은 우리가 태초에 지어진 그 복 받은 자로 회복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의도하신 대로 순종하는 자가 되어,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늘의 모든 것을 누리게 되는 것을 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시편128편:1) 주님을 경외하며, 주의 명에 따라 사는 사람은, 그 어느 누구나 복을 받는다.
무엇이 복이라고요?
여호와와 관계가 회복되어 그 분을 알아보고 그 분의 크심을 알게 되고, 그 분을 경외하며, 그 분의 뜻에 순종하며, 살게 되는 것을 우리는 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의”라는 것은 무엇인지 공부하겠습니다.
우리가 “의”하면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면으로 많이 해석을 하지요? 성경이 말하는 “의”는 그런 의미와는 조금 다릅니다.
성경은 타락한 모든 인간을 가리켜 불의한 자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지옥에 간다면 “불의” 때문에 가는 것입니다.
(벧전3:18) 그리스도께서도 죄를 사하시려고 단 한 번 결정적으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곧 의인이 불의한 사람들을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고난을 받으신'). 그것은 그가 육으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셔서, 여러분을(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불의(不義)”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히8:12) 나는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더 이상 그들의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
도대체 “의”가 무엇이고 “불의”한 것이 무엇이기에 그 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죽으셨어야 했는가 말입니다. 그 의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창세기 15장으로 가야합니다.
창세기 1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 창세기 12장의 내용을 조금 더 자세히 설명을 해 주십니다. 네 자손이 저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될 것이라고 하시니까 아브라함이 믿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롭다 칭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면서 그를 의롭다 칭해 주십니다.
(창15:6) 아브람이 주를 믿으니, 주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아브라함이 이 장면에서 무엇을 했기에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셨습니까? 아브라함이 죄를 멀리하고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하나님의 정하신 수준까지 잘 살아냈기 때문에 그가 의롭게 된 것입니까? 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면서 거기서 의를 이야기하실까요?
우리가 알고 있는 서구 사상의 영향을 듬뿍 받은 “의”가 뭡니까? 어떤 도덕적 윤리적 수준을 정해놓고 거기에 맞게 살아내는 것을 우리는 의롭다고 하고 그 수준에 못 미치는 것을 불의 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조차도 “의” 하면 “예수님이 우리 죄를 다 사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죄가 없어졌고 그래서 우리는 “의”를 얻었다“라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의”라는 것은 그런 서구의 사고에서 나온 “의” “justice"와는 많이 다릅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의에 대한 개념은 이러합니다.
네페쉬, 존재는 항상 관계를 갖고 살게 됩니다. 네페쉬와 네페쉬와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 네페쉬는 그런 관계 속에서만 존재 할 수 있습니다. 그 관계의 대상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게 됩니다. 그러니까 부모 자식 간의 관계에서는 부모가 자식에 대해 기대하는 것이 있지요? 마찬가지로 자식은 부모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습니다. 자식은 부모에게 순종을 해야 하고 부모는 자식을 보호하고 양육해야 합니다.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떤 요구가 있습니까?
인간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 분을 의지하고 의뢰하며 살아가야 하고 하나님은 그 인간을 보호하시고 사랑하시는 관계의 요구가 있습니다.
바로 그 관계가 요구하는 바대로 살아 내는 것, 그 관계에 걸 맞는 행위를 하고 그 관계의 대상이 원하는 대로 살아 주는 것을 ”의“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의”라고 하는 것이 이상한 데에 쓰일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유다의 며느리인 다말이 시아버지인 유다를 속이고 후사를 얻기 위해서 시아버지와 동침을 합니다. 그런데 유다가 나중에 며느리가 후사를 얻기 위해 그랬다는 것을 알고 “네가 나보다 의롭다” 히브리어로는 “짜다크”라고 이야기합니다. 다말이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는 화형에 처해 질 일을 했습니다. 유다가 화형을 해버리려고 하지요?
그러나 다말은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 속에서 최선을 다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의롭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은 의로우시다”라고 말할 때 “하나님은 죄가 없으시고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완전하신 분이시다”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의로우시다”라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어떤 대상과 맺은 언약의 관계를 끝까지 지키신다.”는 말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그 언약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역할을 실패치 않으시고 끝까지 해 내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언약의 관계로 묶여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의를 보이십니다. 어떻게 보이십니까?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몰살시키십니다. 이스라엘 이외의 다른 민족들에게는 피도 눈물도 없는 분처럼 대하십니다.
그런데 히브리 사람들은 그것을 “의롭다”라고 표현을 합니다.
사사기5장에서 하나님께서 가나안 왕 야빈과 시스라와 그의 군대를 모두 몰살시키신 후에 드보라가 찬양을 합니다. 이른 바 “드보라의 노래”입니다. 거기에서 드보라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가리켜 “의로우신 일”이라 합니다. 우리의 의에 대한 개념으로 따지면 어떻게 어린아이, 부녀자까지 모두 몰살시키는 하나님을 “의롭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히브리 사람들의 의에 대한 개념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네페쉬 들이 그 관계에서 요구되는 삶을 성실하게 살아내는 것을 ”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그 “의”에는 관계 당사자에 대한 이해와 순종과 경외감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타락을 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떠나셨습니다. 그들은 진정한 복을 잃어 버렸고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게 된 사망의 지배를 받는 죽은 자들이 되어버렸습니다.
아브라함도 그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가 어떤 요구도 하지 않았고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여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아보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그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떤 힘에 의해 그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순종을 하게 된 것입니다. “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 관계가 요구하는 것을 아브라함이 순순히 따르겠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은 “의로 여기셨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과 언약의 관계에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습니까?”하고 질문하실 분이 계실 겁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실 때 목적이 있으셨습니다. 의도가 있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을 주시면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했습니다. 그렇게만 하면 우리는 영원한 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었습니다.
(신6:25) 우리가 주 우리의 하나님 앞에서, 그가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충실하게 지키면, 그것이 우리의 의로움이 될 것이다.'"
그 언약은 인류의 대표인 아담에게 하셨지만 우리 전 인류에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서에서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아담이 그랬던 것처럼 언약을 어겼다고 말씀하십니다.
(호6:7) 그런데 이 백성은 아담처럼(또는 '아담에서' 또는 '사람처럼') 언약을 어기고 나를 배반하였다
아담은 그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에서 자신이 해야 할 몫을 해내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불의”라고 이야기합니다.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네페쉬”가 그 관계에서 요구되는 행위를 하지 못했을 때 우리는 “불의하다”고 한다고 했지요? 그래서 우리는 불의한 자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불의한 자들 중에 어떤 무리를 “의롭게” 만드시기로 했습니다. 그러니까 원래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의 관계가 요구하는 삶을 살 수 있게 회복을 시키시기로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첫 모델을 바로 아브라함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미 타락을 했기 때문에 인간이 다시 의롭다 하심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능력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인간을 의롭게 만드시는데 그 것을 아브라함에게 미리 보여 주십니다.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에게 너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될 것이다“하고 하시고 아브라함이 그것을 믿자 그를 의롭게 여기십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어떻게 이루실 것인지를 아브라함에게 보여주시는데 제물을 쪼개놓고 하나님께서 언약을 하십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홀로 그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십니다.
히브리 사람들 언약, 계약을 할 때 쪼갠 고기 사이로 언약의 당사자가 함께 손을 잡고 걸어가게 되어 있다고 했지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다시 원래의 하나님과의 관계로 회복시키시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 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 아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죽이시기로 결정하시면서 까지 그 언약의 관계를 지켜내시기로 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목숨을 끊으시겠다는 결정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 하나님은 그 약속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그 언약은 끝까지 지켜진 것입니다.
(히6:13-14) 13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당신보다 더 큰 분이 계시지 않으므로, 당신 스스로를 두고서 맹세하여
14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을 주고, 너를 번성하게 하겠다"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목숨을 걸고 우리를 의롭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롬4:25) 예수는 우리의 범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시고, 또한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살아나셨습니다.
(롬3:24) 그러나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을 힘입어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다가 우리를 붙여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의 목숨을 끊어버리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과 관계회복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의롭다 하심을 입는다.”는 말의 진의 인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목숨을 끊으시면서 까지 언약 관계 당사자들을 건져내시는 그 하나님을 우리는 “의롭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 전 인류를 다 건지시지 않으셨나? 그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 절망에서 건져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자고요.
(롬5:1)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롬4:2-3) 2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게 되었더라면, 그에게는 자랑할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3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의로움으로 인정하여 주셨다" 하였습니다.
(갈3:6-7) 6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더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그에게 의로움으로 여겨 주신 것"과 같습니다. 7 그러므로 여러분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아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를 선물하시는 데에 다른 방법을 쓰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 붙여 놓으신 줄 아십니까? 그것은 다시는 그 “의”의 상태가 “불의”의 상태로 되지 않게 하시기 위해 예수님께 붙여 놓으신 것입니다. 아예 연합 시켜버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배신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타락할 수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영원히 그 “의”를 소유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라고 하시는 대로 영원히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다시는 타락을 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이제 의롭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시고 인간에게 요구하시고 의도하신 내용을 지켜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떤 명령이지요? 우리가 문화 명령이라고 하는 내용입니다.
(창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베푸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하셨다
바로 이 요구가 복을 받고 의롭게 되어진 영생을 얻은 자들에게 다시 요구되어지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렇게 살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거든요.
(마28:19-20)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너희들은 이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어 하늘나라를 선포하라. 하나님을 증거 하라 “복음으로 그들을 정복하고 다스리라” 고 지상 대 명령이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하신 대로 완전하게 재창조되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그 나라를 자랑하고 그 나라만을 소망하며 그 나라로만 위로를 받는 참 복을 받은, 의롭다 하심을 받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된 교회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죽었다는 것이 무엇인지, 살았다는 것이 무엇인지, 복이 무엇이며, 생명은 무엇인지, 의는 무엇이며,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그 은혜와 사랑의 깊이를 아시겠습니까? 그것을 아시는 분들을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 들은 바로 이 복음으로만 위로를 받습니다. 다른 위로는 거절하는 자들입니다. 그것들은 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곧 소멸되어버릴 것이고 불 타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이 복음이 돋을새김으로 양각되어 있으면 된 것입니다.
저는 바로 이 복음을 더 깊이 더 명확하게 여러분 마음속에 새겨 드리기 위해 수많은 설교를 던지는 것입니다. 교회인 여러분, 여러분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다 할지라도, 여러분이 생각할 때에 “내가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것 같다” 고 느낄 만큼 힘이 들 때에도 여러분은 이 복음 만으로 기뻐하시고 행복해 하시는 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감옥에 있을 때 찬양을 하고, 실컷 두들겨 맞고 나오면서 하늘을 보며 기뻐했다는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가지고 있었던 진정한 행복과 기쁨을 여러분이 정말 아시게 되길 원합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시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지금 여러분을 초대하고 계십니다.
(요5:24-25) 24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의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영생을 얻고, 심판(또는 '정죄')을 받지 않는다. 그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 갔다.
25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그리고 그 음성을 듣는 사람은 살 것이다.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 여러분에게 지금 생명과 복과 의가 무엇인지 , 우리는 어떤 지경으로 떨어져야 할 존재인지 그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셔서 하신 일이 무엇인지 선포가 되었습니다. 그 말씀을 받아들이십시오. 예수를 믿으십시오.
죽은 자들이 생명의 말씀을 들을 날이 오나니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예수님의 그 초청을 받아들이십시오.
제42장 교회 (10) 사랑의 공동체
(고전11:17-34)
17 다음에 지시하려는 문제에서는, 내가 여러분을 칭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모여서 하는 일이 이로움을 주지 못하고, 해를 주기 때문입니다.
18 첫째로, 여러분이 교회에서 모일 때에 여러분 가운데 분열이 있다는 말이 들리는데, 나는 그것이 어느 정도는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19 하기야 여러분 가운데서 바르게 사는 사람들이 밝히 드러나려면, 여러분 가운데서도 당파도 없을 수 없을 것입니다.
20 여러분이 분열되어 있으니, 여러분이 한 자리에 모여서 먹어도, 그것은 주님의 만찬을 먹는 것이 아닙니다.
21 먹을 때에, 사람마다 제가끔 자기 음식을 먼저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배가 고프고, 어떤 사람은 술에 취합니다.
22 여러분에게는 먹고 마실 집이 없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교회를 멸시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내가 여러분을 칭찬해야 하겠습니까? 이런 점에서는 칭찬할 수 없습니다.
23 내가 여러분에게 전해 준 것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빵을 드시어서
24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위하여 깨어진') 내 몸이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25 식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시고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 너희가 마실 때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26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선포하는 것입니다.
27 그러므로 누구든지, 합당하지 않게 그 빵을 먹거나 주님의 잔을 마시는 사람은,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28 그러니 각 사람은 자기를 살피십시오. 그런 다음에 그 빵을 먹고, 그 잔을 마시십시오.
29 주님의 몸을 분별함이 없이 먹고 마시는 사람은, 자기에게 내릴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30 이 때문에 여러분 가운데는, 몸이 약한 사람과 병든 사람과 죽은(그, '잠자는') 사람이 많습니다.
31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살피면, 우리는 심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32 그런데 우리가 주께로부터 심판을 받아서 징계를 받는 것은, 우리가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33 그러므로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먹으려고 모일 때에는, 서로 기다리십시오.
34 배가 고픈 사람은 집에서 먹도록 하십시오. 그것은, 여러분이 모이는 일로 심판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밖에 남은 문제들은, 내가 가서 처리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에 존재해야 할 유일한 목적이 뭡니까?
행복입니까? 거룩입니까? 뭡니까?
그럼 그보다 먼저 하나님께서 왜 하나님의 백성들을 건져내셨습니까? 왜 하나님의 백성들을 창조해서 이 땅에 던져 놓으신 것입니까? 거기에 대한 탁월한 대답이 바로 이사야 43장입니다. 그 중 두 절만 찾아 읽고 넘어가겠습니다.
(사43:7,21) 7 나의 이름을 부르는 나의 백성, 나에게 영광을 돌리라고 창조한 사람들, 내가 빚어 만든 사람들을 모두 오게 하여라' 하고 말하겠다."
21 이 백성은, 나를 위하라고 내가 지은 백성이다. 그들이 나를 찬양할 것이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 땅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고전6:19-20) 19 여러분의 몸은 성령의 전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아서 여러분 안에 모시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스스로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20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여러분을 사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십시오.
(고전10:31)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이 어떤 삶입니까?
공부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까?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까? 축구 경기에서 골 차 넣고 상대방 골키퍼는 낙심해서 풀이 죽어 있는데 그라운드에 무릎 꿇고 앉아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입니까? 어떤 삶입니까?
성경에 나오는 영광이라는 단어 “독사”라는 단어는 어떤 사물이나 존재의 내용이 밝게 밝혀지는 것을 “독사, 영광”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성품, 속성, 거룩하심, 아름다움, 존귀함 이러한 하나님에 관한 내용들이 신자들의 삶에서 나타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입니다.
그 하나님의 속성, 성품이 가시적으로 가장 잘 나타난 것이 어디입니까?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헬라사람들이 빌립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러 왔을 때 예수님께서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말씀은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담을 허물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만드실 날이 왔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십자가를 지시는 사건을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그 십자가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다 표현이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십자가를 한번 생각해 보자고요. 십자가에는 죄를 벌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죄를 가까이 하실 수 없는 거룩하심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긍휼하심과 그 저주 속에서 그들을 건져내시는 “사랑” 그러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그 분의 속성이 함축되어 표현되어 있기에 그 십자가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 모든 하나님의 성품, 속성을 한 마디로 요약을 하면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그 모든 하나님의 속성은 한 마디로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는 말이 있지요?
거기서 독생자 “모노게네스”라는 말은 단순히 only son의 의미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단어는 “독특한 것, 사랑 받는 것, 유일무이한 것을 나타낼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 추악하고 더러운 죄인들을 위해 하나님의 가장 귀한 것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성품을 한마디로 요약한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면 우리 신자들, 교회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면 우리 신자들이 이 땅에서 반드시 그리고 마땅히 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호감을 가지는 정도의 국어사전에 나오는 사랑이 아니라,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을 원수를 위해 내어 주는 하나님의 사랑을 해야 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어떤 율법사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어왔을 때 ”주 너의 하나님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눅10:25-28) 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서, 예수를 시험하여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26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
27 그가 대답하였다. "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28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러면 살 것이다."
(마5:16)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다시 한 번 확인하지요? 우리 교회가 이 땅에서 유일하게 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서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세상 사람들이 체감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우리 신자의 본무입니다. 그런 사랑을 하는 자들을 우리가 “거룩한 자들“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날 교회가 거기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엉뚱한 일들을 하다가 다 망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었던 고린도 교회가 그랬습니다.
성찬식이라는 것은 포도주와 떡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복음”을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고 실제로 먹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것입니다.
새 언약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창조된 자들의 특권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25절을 보세요.
(고전11:25) 식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시고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 너희가 마실 때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고대 사람들이 언약을 할 때는 항상 제물을 쪼개놓고 피의 언약을 한다고 했지요?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쪼개놓고 하나님의 백성들과 영원히 깨어지지 않을 새로운 언약을 하시는 사건입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타락으로 일그러진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재통일되어, 재창조되어, 새롭게 창조되어 하나가 되었음을 고백하며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기념하는 것이 성찬식인 것입니다.
이렇게 성찬의 의미는 눈에 보이는 복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때는 거의 매일 성찬식을 거행했다고 합니다. 성찬식도 지금 로만 카톨릭의 영향을 받아 이렇게 작은 떡과 작은 포도주 잔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성도들이 식사를 함께 하면서 성찬식을 거행했습니다. 그러니까 potluck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부자들도 있었지만 아주 가난한 노예들이나 잡상인 같은 하층 평민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부자들은 시간이 많았고 먹을 것도 풍부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모일 때 미리 와서 좋은 자리에 앉아 다른 이들을 기다렸습니다. 노예들이나 가난한 상인들은 늦게까지 일을 하고 문 닫고 정리하고 그 교회의 모임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니까 집 안의 식당과 거실은 이미 부자들이 다 차지하고 있었고(50-60명 앉았다) 노예들이나 가난한 사람들은 감히 그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밖의 뜰에서 밥을 먹고 성찬식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의 부자들이 다른 교회의 지체들이 오기도 전에 자기들 배가 고프다고 미리 음식을 다 먹어 버리고 심지어 어떤 이들은 얼큰하게 포도주에 취해 버린 것입니다.
심지어 나중에 늦게 온 사람들이 먹을 것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먹어 버려서 나중에 온 사람들이 쫄쫄 굶고 성찬에 참여하지 못하는 일까지 벌어진 것입니다. 나중에 온 사람들은 자기들이 먹을 것을 준비 할 수도 없는 가난하고 무지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밥을 못 얻어먹고도 오히려 부끄럽게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아주 심하게 고린도 교회를 책망하는 내용이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고전11:22,34) 22 여러분에게는 먹고 마실 집이 없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교회를 멸시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내가 여러분을 칭찬해야 하겠습니까? 이런 점에서는 칭찬할 수 없습니다.
34 배가 고픈 사람은 집에서 먹도록 하십시오. 그것은, 여러분이 모이는 일로 심판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밖에 남은 문제들은, 내가 가서 처리하겠습니다.
이 책망은 단순히 부자와 가난한 자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 교회에 사랑이 없느냐”라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에베소서 공부할 때 배웠지만 교회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새롭게 태어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교회는 육적인, 물질적인, 유물론 적인 세계관과 그러한 원리에 의해 움직여지는 ‘조직’이 아닙니다. 교회는 영적인 것으로 판단되고 정의되고 영적인 원리에 의에서 움직여지는 ‘조직이 아닌 하나의 몸’인 것입니다.
(요6:63)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다. 육은 아무 데도 소용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그 말은 영이요, 생명이다.
(골3:9-11) 9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옛 사람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 버리고,
10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이 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져서,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
11 거기에는 그리스인도 유대인도, 할례자도 무할례자도, 야만인도 스구디아인도, 종도 자유인도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시요,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교회는 그가 처해있는 문화나 관습, 그리고 (각자의 세계관을 형성케 한) 과거의 경험이나 상처 등으로 상대를 판단하고 인식하는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주인과 노예라는 신분으로 살았던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이 여전히 교회 안에서도 그러한 신분 적 편당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당하고만 살았던 하층 서민 출신들이 자신들의 상처나 쓴 뿌리들을 여전히 가슴 속 깊이 간직하고 자기 자신들을 부끄러워하였고 부자들을 시기하고 미워하였습니다. 그리고 부자들은 은근히 그들을 업신여기고 무시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이들이 먹든 말든 상전들인 자기들만 먹으면 된다는 식의 이기심과 그들의 그런 행동으로 인해 상처를 받은 사람들의 상실감과 미움으로 가득 찬 어처구니없는 성찬식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얼마나 열심히 믿느냐“로 여러분의 신앙의 경중을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은 ”얼마나 열심을 내느냐“보다 ”무엇을 믿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인다.”라는 말이 몇 번 나오는지 아십니까? 다섯 번이나 나옵니다.
고린도 교회는 열심히 모였습니다. 열심히 성찬식도 거행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엉터리였습니다. 많이 모여서, 열심을 내서 얻은 결론이 뭡니까?
(고전11:27-32) 27 그러므로 누구든지, 합당하지 않게 그 빵을 먹거나 주님의 잔을 마시는 사람은,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28 그러니 각 사람은 자기를 살피십시오. 그런 다음에 그 빵을 먹고, 그 잔을 마시십시오.
29 주님의 몸을 분별함이 없이 먹고 마시는 사람은, 자기에게 내릴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30 이 때문에 여러분 가운데는, 몸이 약한 사람과 병든 사람과 죽은 사람이 많습니다.
31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살피면, 우리는 심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32 그런데 우리가 주께로부터 심판을 받아서 징계를 받는 것은, 우리가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열심히 죽어라고 모여서 성찬식을 행했는데 결과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러니까 내용이 잘 못된 열심은 오히려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아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는 알긴 아는 것 같은데, 알면서도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요? 왜 그럴까요? 성경이 말하는 “안다” “기노스코”라는 것은 어떠한 내용이 내 안에 바로 인식이 되어서 나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는 것을 “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각과 행동이 자기가 알고 있는 내용을 따라주지 않을 때 우리는 그것을 “안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모른다.”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많이 안다고 자랑하지 마시고 그 앎이 여러분의 생각과 행동을 얼마나 바꾸었는지를 돌아보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정말 바로 알고 계십니까? 그 바로 알고 있는 내용을 근거로 열심을 내고 계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알지도 못하고 열심도 안내고 계십니까? 바로 알고 믿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성찬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타락으로 일그러진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재통일되고, 재창조되어서(새롭게 창조되어) 하나가 되었음을 고백하며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찬식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육적인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평등을 삶으로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거기까지가 복음을 바로 아는 자들의 삶입니다.
교회 안에서 “명예가 있고 없고, 돈이 많고 적고, 얼굴이 잘 나고 못나고, 많이 배우고 못 배우고“의 모든 육적인 차별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앞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입니다. 교회를 잘 생각해 보세요. 아무리 잘 난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을 받은 것이고 아무리 못 난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대가로 치러진 귀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찬식을 행하면서 서로에 대해 아껴주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과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다시 재차 확인하시고 다짐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고전10:16-17) 16 우리가 축복하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닙니까?
17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가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모두 한 빵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제 삶은 여전히 교회 멤버들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입만 열면 험담하고 남 잘되면 배 아파하고 그러면서 열심히 모여서 예배드리고 찬송하고 성찬식하고 한다면 그게 어찌 바로 알고 믿는 자들이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그러한 자들은 가짜다“라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아니, 가짜 정도가 아니라 그건 예수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라고 말합니다.
(고전11:27) 그러므로 누구든지, 합당하지 않게 그 빵을 먹거나 주님의 잔을 마시는 사람은,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고전8:9-13) 9 그러나 여러분에게 있는 이 자유가 약한 사람들에게 걸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10 어떤 약한 사람이, 지식을 가진 여러분 가운데 누가 우상의 신당에 앉아서 먹는 것을 보면, 그 양심에 용기가 생겨서, 그를 본떠서,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게 되지 않겠습니까?
11 그러면 그 약한 신도는 여러분의 지식 때문에 망합니다. 그리스도는 그 약한 신도를 위해서도 죽으셨습니다.
12 이렇게 여러분이 형제자매들에게 죄를 짓고, 그들의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입니다.
13 그러므로 음식이 나의 형제자매를 걸어서 넘어지게 하는 것이면, 나는 그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이라도 걸려서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한 몸, 즉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교회의 멤버들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무시하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모독하는 것이고 그것은 죄라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가지고 로만 카톨릭이나 무지한 개신교 목사님들이 성찬식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최근에 지은 죄들을 다 회개하고 참여해야 한다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죄라고 협박을 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정말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의 그러한 죄 때문에 살이 찢기시고 피를 흘리시는 수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죄인이라고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성찬식에 참여해야 할 가장 크고 훌륭한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하는 것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한 몸, 즉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교회의 멤버들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무시하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모독하는 것이고 그것은 죄이므로 바로 알고 성찬식에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성찬식을 행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바로 알고 행하라는 것이지요. 사랑을 근거로 하지 않은 것은 아무리 거룩하게 보여도 다 그리스도의 몸을 욕되게 하는 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을 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자들인데 하라는 사랑에는 관심이 없고 성찬식하고 예배하고 찬송하고 봉사만 하고 있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냐는 말입니다.
우리 몸은 외부에서 세균이나 바이러스나 이물질이 들어오면 그것을 물리치기 위해서 항체라는 것을 형성합니다. 자기 자신의 몸속에 있는 세포에 대해서는 절대 그런 항체를 형성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기 몸에 있는 조직에 대해 스스로 항체를 형성하는 병이 있습니다.
그것을 자가 면역성 질환이라고 합니다. 자기 몸의 연골이나 신장, 간, 갑상선 같은 것을 그 항체가 공격을 합니다. 그래서 서서히 죽어 가는 것이 “자가 면역성 질환”이라고 합니다. 류마티스 관절염 같은 것이 그런 것이지요. 자기 몸의 항체가 자기 몸의 조직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자꾸 분열을 초래하고 교회 멤버들을 미워하고 하는 것은 자가 면역성 질환처럼 그리스도의 몸을 서서히 죽여 가는 중대한 범죄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을 또 찢어 발기는 것입니다. 그건 정말 큰 죄인 것입니다.
(마18:35) 너희가 각각 진심으로 “형제나 자매를 용서하여 주지 않으면, 내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구원을 취소하시겠다는 말입니다. 구원이 취소 될 수는 없지요. 그런데도 왜 이렇게 과격하게 말씀하십니까? 그런 행위가 안 나오면 지옥 간다는 말이 뭐예요? 교회로 불림을 받은 사람들은 반드시 서로 용서하고 용납하는 행위가 나와야 한다는 말입니다.
(마5: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성내는 사람은, 누구나 심판을 받는다. 자기 형제나 자매를 모욕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의회에 불려 갈 것이요, 자기 형제나 자매를 바보라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지옥 불 속에 던짐을 받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창녀에게 이렇게 저주의 말을 퍼부으신 적 있으신가요? 예수 님 곁에서 함께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살인강도에게 그런 저주의 말을 하셨습니까?
유독 형제를 용서하지 않고, 형제를 미련하다 하고, 형제에게 노하고 형제에게 “이 밥통 같은 놈아”라고 모독을 하는 자들에게 “심판”을 들먹이시며 너희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경고를 하셨습니다. 이것은 교회는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은 반드시 지켜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늘 말조심하시고 남 욕하지 마시고 뒤에서 험담하지 마시고 헐뜯지 마세요. 자꾸 자기에게서 그런 행위가 나오면 가슴을 쥐어뜯으면서 주님 앞에 도우심을 구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교회의 정체성을 늘 잊지 마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서로 사랑하셔야 하는 한 몸입니다. 오히려 내가 손해보고 , 나를 죽여서 상대방을 살려야 하는 교회인 것입니다.
(골3:12-15) 12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거룩하고 사랑받는 사람답게, 동정심과 친절과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듯이 입으십시오.
13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용납하여 주고, 서로 용서하여 주십시오. 4)주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사랑은 온전하게 묶는 띠입니다.
15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하게 하십시오. 이 평화를 누리게 하시려고, 여러분을 한 몸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또 여러분은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롬15:1-7) 1 믿음이 강한 우리는 믿음이 약한 사람들의 약점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에게 좋을 대로만 해서는 안 됩니다.
2 우리는 저마다 자기 이웃의 마음에 들게 행동하면서, 유익을 주고 덕을 세워야 합니다.
3 그리스도께서도 자기에게 좋을 대로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되기를 "주님을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떨어졌다" 한 것과 같습니다.
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것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려고 한 것이며, 성경이 주는 인내와 위로로써, 우리로 하여금 소망을 가지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5 인내심과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같은 생각을 품게 하시고,
6 한 마음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려고 여러분을 받아들이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서로 받아들이십시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우리를 기쁘게 하기 위해 사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의 기쁨을 위해 살라고 보내진 자들입니다. 그게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이고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이 드러나는 삶,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는 이 땅에서 뭐 대단한 것 이루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거 연습하다가 올라가는 것입니다. 작은 것부터 하나하나 연습하세요. 어떻게 생각하면 아주 쉬워요. 오늘 본문33절을 보세요.
(고전11:33-34) 33 그러므로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먹으려고 모일 때에는, 서로 기다리십시오.
34 배가 고픈 사람은 집에서 먹도록 하십시오. 그것은, 여러분이 모이는 일로 심판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밖에 남은 문제들은, 내가 가서 처리하겠습니다.
아주 간단하지요?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그러십니까? “제발 예배당 좀 크게 지어다오” 그러십니까? “헌금 좀 많이 해다오” 그러시나요? 아닙니다. “나중에 굶는 형제들이 생기지 않도록 밥 먹을 때 좀 기다려 줘라, 정 배가 고프면 집에서 먹고 와라”입니다. 나의 지체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작은 것부터 배려하는 것, 그것이 바로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하고 큰일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조금 섭섭하게 대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들게 만든 지체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 여러분은 그들을 적으로 간주해 버리면 안 됩니다. “무슨 사연이 있겠지. 어려서부터 사랑을 못 받고 자라난 사람은 자기가 사랑을 못 받는다고 생각하면 금방 실망하고 삐진다고 하던데 저 사람은 그런 불쌍한 환경에서 자랐나보다” “남에게 늘 학대만 받던 사람들은 굉장히 공격적인 사람이 된다던데 저 사람이 바로 그런 환경에서 살아왔겠구나.”하고 다양성을 인정해 주세요. 그리고 함께 기도해 주십시오. 여러분 여러분의 필요를 구하는 기도 말고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것으로 인해 얼마나 기도해 보셨습니까? 다른 이들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생각하며 얼마나 기도해 보셨습니까?
저는 오늘부터 다음 주일 예배 때까지 금식하면서 그 문제만을 놓고 기도할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너무 이기적입니다. 너무 계산적이에요. 이제 우리의 기도의 내용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삽니다.
여러분 성령 충만이 뭡니까? 거품 물고 쓰러지는 것이 ‘성령 충만‘입니까? 방언하고 예언하는 것이 ’성령 충만‘입니까?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신 성령의 조명을 따라 하나 됨을 지켜내는 것이 바로 ‘성령 충만’입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되실 생각 마시고 곁에 있는 형제자매를 먼저 사랑하십시오.
마지막으로 에베소서 4장 1절에서 3절까지를 읽고 마치겠습니다.
(엡4:1-3) 1 그러므로 주님의 일로 갇힌 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불러 주셨으니, 그 불러 주신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2 언제나 겸손함과 온유함을 지니십시오.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면서, 오래 참으십시오.
3 여러분은, 성령이 여러분을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주신 것을, 힘써 지키십시오.
제43장 교회 (11) 온전함을 향하여 온전케 되어지는 교회
(요17:20-23)
20 나는 이 사람들을 위해서만 비는 것이 아니고, 이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나를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21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여 주십시오.
22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인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23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은,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께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를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기도를 예수 그리스도의 ‘대 제사장적 기도’라고 부릅니다.
그 기도는 전부 예수님의 제자들과 또 그 제자들의 말을 듣고 앞으로 예수를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 교회를 하나님의 자녀로 완성시키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부탁을 드리고 가신 내용이 전부 그 기도 안에 들어 있습니다.
주님은 일부러 그 기도를 큰 소리로 제자들에게 들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 기도를 글로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그 기도를 기록으로 남겨서 앞으로 오게 될 교회들에게 꼭 전하고 싶으신 메시지가 있으셨던 것입니다. 결국은 우리 교회에게 주시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 기도의 내용은 결국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이신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함께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결론으로 모아집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님의 백성들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대속 사역으로 완전하게 건져냈으니까 “이제 그들을 이 땅에서 지키고 보호하셔서 그들이 이 시간 속에서 자기들의 신분에 맞는 사람으로 변해 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라는 것이 이 위대한 기도의 내용인 것입니다.
23절에 보시면 하나님의 교회가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계십니다. 거기서 쓰인 “온전함“이라는 단어는 ”텔레이오“”perfect"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 “perfect"로 향해 가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세전에 부르시고 자녀를 삼으시고서도 바로 천국에 넣지 않으시고 이렇게 역사를 운행하시며 우리에게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 내내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become what you are!) 그 말이 무슨 말인가?
(고전5:7) 여러분은 새 반죽이 될 수 있도록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십시오. 여러분은 누룩을 넣지 않은 반죽입니다. 우리들의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습니다
이상한 말이지요? “너희는 이미 누룩 없는 자가 되어 있다. 그러니까 누룩 없는 자가 되어라 “as you really are “진짜 너“”지금 그렇게 맥없이 죄에 무너지는 그런 옛 습관에 젖어있는 너 말고 예수님께서 완전하게 바꾸어 놓으신 진짜 너“가 되기 위해 누룩을 없애라.
노력해라. become what you are! 역시 already , not yet의 원리입니다.
누룩은 죄이지요? 그 ”진짜 나“를 향해 가면서 이 땅에서 우리가 젖어있던 그 죄의 찌꺼기들을 하나하나 버려 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렇게 온전하게 만들어 가시기 위해서 여러 가지 상황과 여건들을 허락하시면서 열심히 끌고 가십니다.
(엡4:7-13) 7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선물의 분량을 따라 은혜를 주셨습니다.
8 그러므로 성경에 이르기를 "그분은 높은 곳으로 올라가셔서, 포로를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주셨다" 합니다.
9 (그런데 '그가 올라가셨다'는 것은, 그분이 땅의 낮은 곳으로 내려오셨었다는 것이(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먼저 내려오셨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10 내려오셨던 그분이,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려고 하늘의 가장 높은 데로 올라가신 바로 그분이십니다.)
11 그분이,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예언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도자로, 또 어떤 사람은 목회자와 교사로 삼으셨습니다.
12 그것은 성도들을 준비시켜,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13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은 온전함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가기 위해서 온전하게 되어가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12절에 나오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에서의 ‘온전케 하다‘는 카타르티스모스’ equip이라는 뜻입니다. 운동선수들을 선수답게 만들기 위해 훈련시키고 무장시킬 때 쓰는 단어입니다.
오합지졸들을 훌륭한 프로 선수로 키워 내는 과정을 가리킬 때 쓰는 말입니다.
(갈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여기서 쓰인 범죄 한 자들을 “바로잡고“가 바로 그 단어입니다.
그러나 13절에 쓰인 온전함이라는 단어는 전혀 다른 단어입니다. 13절에 쓰인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에서의 ‘온전함‘은 ”perfect"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가 오늘 본문인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에 나오는 온전함 ”텔레이오스“”perfect"라는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는 “perfect" ”텔레이오스“ 그 온전함을 향해서 온전케 되어지는 과정을 밟고 있는 것입니다.
그 거룩을 향해 가는 길에 허락되어진 공동체가 바로 교회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교회의 직분들을 죽 나열해 놓고 “그것이 다 성도들의 온전함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도 알곡들끼리 모여서 지상의 천국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삐치고 싸우고 다투고 끌어안고 끌어안는 듯이 하다가 내 동댕이치고 하면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그런 것들을 통하여 온전하게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게 교회입니다. 훈련소 같은 곳입니다.
제가 논산 훈련소에 있을 때 훈련소 동기들 중에 정말 이기적인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보통 훈련소에서는 서로 고생하는 처지이기 때문에 무엇이든 나누고 함께 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는 혼자 PX에 가서 초코파이, 사이다, 우유 이런 것 사 가지고 관물 대에다 숨겨 놓고 밤마다 혼자만 먹는 애들이 있습니다. 정말 밥맛입니다. 그래서 그런 아이들은 쉬는 시간에 축구를 한다거나 함께 모여서 간식을 먹는다거나 할 때 절대 끼워주지 않습니다. 늘 외톨박이입니다. 그렇게 일주일만 가면 그런 아이들이 관물 대에다 숨겨 놓은 초코파이 다 꺼내서 나누어주기 시작합니다. “나눠 먹자!” “우리 엄마가 소시지 반찬은 나만 먹으라고 그랬어, 그러니까 너는 네 김치 먹어, 나는 내 소시지 먹을 테니까, 금 넘어 오지 마” 이렇게 집에서는 절대 고쳐지지 못했던 치사한 습관이 훈련소라는 공동체 안에서 일 주일 만에 고쳐지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렇게 여러 종류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숙한 사람, 성숙하지 못한 사람, 알곡, 가라지 들이 모여서 버려야 할 것 버리고 익혀야 할 것 익히며 하나님의 백성답게 온전함을 향해 지어져 가는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become what you are)
그러니까 신자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들, 모든 상황들, 모든 여건들은 신자가 온전하게 되는 것을 목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이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신자의 신앙생활에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교회의 존재 목적을 잘 못 이해하고 있고, 목표지점을 잘못 잡게 되면 교회는 교회 본연의 임무를 잃어버리고 엉뚱한 일만 하다가 망해 버리게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신자들은 이 땅에서 신앙생활을 통해서 ,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그들에게 주어지는 여러 가지 환경과 여건들을 통해서 온전함을 향해 한발 한발 가게 되어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 면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허락되는 가정도 역시 마찬가지지요? 그 온전함을 훈련하고 연습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작고 그렇지만 효과적인 공동체가 바로 가정입니다. 가정도 역시 그리스도인의 온전함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는 부부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온전함을 잘 훈련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실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남자는 여자 없이 완전할 수 없고 여자는 남자 없이 완전할 수 없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상호 보완적으로 지어졌습니다. 각자가 홀로 존재할 때는 절대 온전하지 못하게 지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와 남자는 서로 가지지 않은 부분에 대해 동경하고 그리워하고 호기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성간에 서로 끌리는 것은 절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만일 남자만 모이는 교회, 혹은 여자만 모이는 교회, 그런 교회가 있다면 사람들이 모일까요? 남자가 있는 곳에 여자가 모이고 여자가 있는 곳에 남자가 모이는 것입니다. 그게 절대 잘 못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서로에게 끌리도록. 남자와 여자는 우열의관계도 아니고 상하의 관계도 아니고 주종의 관계도 아닙니다.
남자는 여자가 갖지 못한 것을 보완해 주고 여자는 남자가 갖지 못한 것을 보완 해 주도록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입니다. 그들은 동등하게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하도록 명령을 받았습니다.
(창1:27-28)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누구에게?)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렇게 남자와 여자는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 다른 모양을 하고 있지만 그 서로 다른 것으로 하나를 추구하며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배우도록 지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들은 하나님과 단절이 되었고 그들은 자기의 힘으로 자신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에 힘을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힘을 추구하는 인간들은 외형 적으로 볼 때 힘이 없고 연약한 여자들을 약자로 취급했고 힘이 강한 남자들을 그 위에 군림하는 강자의 위치에 올려놓았습니다. 그게 다 죄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유사 이래로 늘 남자들은 여자들 위에 군림해 왔습니다. 오죽하면 유대인 남자들은 매일 기도할 때마다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과 노예로 태어나지 않은 것과 이방인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에 대해 깊은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으로 기도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밥상에서 함께 식사를 하지 못했었습니다. 한 술 더 떠서 며느리는 거의 부뚜막에서 식사를 해결하곤 했습니다.
게다가 성경에 있는 “남자는 여자의 머리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 하라.” 같은 구절들이 마치 남녀 차별을 조장하는 듯한 뜻으로 곡해가 되어지면서 교회 안에서도 남녀의 차별이 있어왔습니다. 지금도 어떤 교회에서는 밥도 남자가 다 먹고 나서 여자들이 먹는다고 합니다.
고린도서에 나오는 남자는 여자의 머리라는 말의 그 머리라는 단어는 boss라는 뜻이 아닙니다. 거기서 쓰인 “켑할레”라는 헬라어는 source라는 뜻입니다. source of life(생명의 근원)이라는 뜻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여자가 남자의 갈비뼈로 지어진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남자의 머리이고 남자는 여자의 머리라는 뜻은 창조의 실행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남자가 창조되었고 그 남자의 뼈로 여자를 지으셨다는 질서의 측면을 강조하시는 구절인 것입니다.
그리고 고린도 전서 14장에 나오는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 하라는 구절은 당시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여인들의 행태에 대한 다분히 지역적인 예를 가지고 교회의 질서를 강조하는 구절입니다. 당시 남자들에게 억압받고 핍박받고 언제든지 남자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정당한 이유가 있을 때는 남편이 여자를 사사로이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남자가 여자가 마음에 안 들면 언제든지 구실을 들어 이혼을 할 수 있었던 그런 시대에 복음이 전해지면서 여자들이 기고만장해 졌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여자들이 마땅히 여자로서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키지 않고 목소리가 커지고 하면서 예배에 방해가 되었습니다.
고린도 전서 11장에 보면 여자들이 교회에서 숄을 쓰고 기도를 해야 했는데 여자들이 그 자유를 지나치게 남용해서 머리를 산발을 하고 기도를 했습니다. 당시에는 고관들의 정부들이나, 아프로디테 신전에서 일하는 창녀들이나 노예들을 제외한 모든 여자들이 평소에도 숄을 쓰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예배를 하러 온 여자들이 창녀들처럼 머리를 산발하고 그대로 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가 하면 14장에 나오는 대로 여자들이 교회 안에서 지나치게 말이 많고 오히려 교만해져서 예배에 방해가 되었었습니다.
고린도 전서 14장 35절에 쓰인 “너희 여자들이 교회에서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다”는 말은 여자들은 예배 시간에 입 꼭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말은 여자들이 예배 시간에 재잘 재잘 떠드는 것에 대한 경고인 것입니다. 거기서 “말하다”라고 쓰인 헬라어 단어“랄레오”는 “재잘 재잘 떠들다“라는 말입니다. ”떠들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말 많은 여자들이 마치 자기들만 복음을 아는 것처럼 교만하게 목소리를 높여서 떠들어대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36절에서
(고전14:36)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서 나왔습니까? 또는 여러분에게만 내렸습니까?
라고 이야기 한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만 임한 것처럼 그렇게 까부느냐?” “너희는 질서와 예의도 없느냐?”에 대한 경고이지 무조건 모든 여자는 남자의 아래에서 침묵하고 교회에서도 아무 소리하지 말아야 하고 밥도 남자가 다 먹고 난 다음에 먹어야 하고 그런 뜻이 아닌 것입니다. 만일 바울이 남녀 차별의 의도로 그런 말을 했다면 이런 구절은 뭡니까?
(갈3:28)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고전11:11-12) 11 그러나 주님 안에서는, 남자 없이 여자가 있을 수 없고, 여자 없이 남자가 있을 수 없습니다.
12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과 마찬가지로, 남자도 여자의 몸에서 났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다 하나님에게서 생겨났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무슨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있느냐?(male nor female)
성경에 나오는 그런 구절들은 단지 “여자들이 지나친 방종으로 절제를 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교만해 져서 교회의 예배에 혼란과 무질서가 야기되고 있으니 좀 calm down 하고 자중해라“라는 의도에서 충고하는 말들인 것입니다. 절대 남녀 차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찌 되었든 여자들은 그러저러한 이유로 남자들과 그렇게 차별을 받아 오다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20세기가 지나면서 미국이 세계 초강대국으로 자리 매김을 하게 되면서 차츰차츰 여권 신장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산업이 발달하고 고용이 증대되면서 여자들이 직장을 가지기 시작했고 경제력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까지는 남자가 벌어다 주는 것에만 의존하던 여자들이 이제 스스로 경제력을 갖게 됨으로 해서 남자에 대한 의존 의식이 점차 없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자 혼자 하기에는 벅찼던 가정일 들도 세탁기나 전기밥솥, 청소기, 좋은 세제 같은 유용한 ‘문명의 이기‘들이 등장하면서 여자들이 시간을 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페미니즘”이라든가“여권신장” 같은 구호들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게 도를 넘어서 “매 맞는 남편들”이 등장하고 직장 상사인 여자들이 남자 부하 직원을 성추행을 하는 그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제 점점 남녀의 구별이 없어지고 있습니다. unisex mode라고 해서 남자가 여자 옷을 입고 여자가 남자 옷을 입는 것이 무슨 대단한 인권 해방인양 유행이 되어버렸습니다.
심지어 최근에 한국 기독교 여성 신학자 협회에서는 주기도문에 나오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어머니”로 바꾸자고 공식적으로 신학계에 입장을 표명하기도 했습니다.
그 동안 여자들이 얼마나 남자들에게 억압당하고 착취당하고 했으면 그럴까 하는 측은한 마음도 없지 않지만 그런 시도들은 성경이 말하는 남녀의 동등함과는 아주 거리가 먼 것입니다.
서두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남자와 여자가 이 땅에 구별되어 존재하는 유일한 목적은 서로 다른 자들이 각자의 장점을 가지고 상대방의 부족한 것들을 채워 줌으로써 둘이 하나가 되어 온전함을 이루도록 그렇게 구별되어 지어진 것입니다.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 내가 가진 최고의 것들을 이용해서 내가 죽고 상대방이 온전해 지게 되는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를 훈련하고 연습하게 하시기 위해 남자와 여자가 구별되어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것이 다양한 군상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하나로 통일되는 것을 말하는 것처럼 남자와 여자는 그 다름이 어떻게, 어떤 원리로 하나가 되는지를 훌륭하게 연습할 수 있는 차이를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달팽이처럼 인간도 암 수를 한 몸에 붙여 놓으셨을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이 뭡니까? 인간의 구원은 단순히 죄에서 해방된 것을 구원이라 하지 않습니다.
죄에서 해방되어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이 되는 것까지가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남자와 여자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남자의 남자다움과 여자의 여자다움이 회복되어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그러니까 남자가 여자 옷을 입고 여자 가 남자 옷을 입고 여자가 남자를 부리는 위치에 서고 남자에게 명령하고 하는 것이 바람직한 남녀평등이 아니라 남자는 더욱 남자다워지고 여자는 더욱 여자다워지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남자가 남자다워지고 여자가 여자다워지는 것을 “남자는 밖에 나가서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벌고 여자는 집안에서 열심히 밥하고 설거지하고 빨래나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먹고 사는 문제에 있어서의 역할 분담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것은 문화적인 차이 속에서도 금방 발견할 수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남자가 밥을 하고 남자가 반찬을 합니다. 미국에서도 여자만 음식을 하고 여자만 설거지를 하지 않습니다. 남자가 여자보다 음식을 더 잘하면 남자가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남자가 여자보다 더 깔끔하게 청소를 잘하면 남자가 청소를 하는 것입니다. 여자가 찌개를 끓였는데 자기 입으로 그게 된장찌개라고 말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게 된장찌개인 줄 모르는 그런 요리 실력인데 반면에 남자는 요리를 잘한다면 남자가 요리를 하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가 정의 내려놓은 남자와 여자의 역할이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을 정의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남자가 남자다워지고 여자가 여자다워 진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범죄 함으로 타락을 하고 아주 이기적인 존재로 변해 버렸지요? 그 이기심을 이타심(나를 죽여 남을 먼저 생각하는)으로 바꾸는 연습을 하는 것이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그러니까 남자가 남자다워지고 여자가 여자다워진다는 것은 남자는 남자의 장점인 힘과 너그러움과 포용력과 인자함으로 여자를 잘 섬겨서 그 여자가 더욱 하나님의 형상으로 온전하게 지어져 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남자다워지는 것입니다. 근육이나 키우고 무력이나 쓰고 하는 것이 남자다움이 아닙니다. 남자의 남자다움은 그가 얼마나 너그러우며 그가 얼마나 인자하며 그가 얼마나 포용력이 있느냐로 가늠이 되는 것입니다.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자가 여자다워지는 것은 성형 수술해서 예뻐지고 좋은 옷 사 입고, 좋은 화장품 쓰고 명품 백 들고 다니는 것이 여자다운 것이 아닙니다. 여자가 진짜 여자다워지는 것은 여자가 가진 장점인 아름다움과 따뜻함과 섬세함과 부드러움을 최대한 발휘해서 상대방을 섬겨서 그 상대방이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으로 지어져 갈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을 “여자다운 여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진짜 힘입니다.
여자가 남자 옷 입고 다니고 “남자도 담배 피우고 술 마시는데 여자라고 왜 못하냐?“는 식의 오기로 그런 것이나 하고 하는 것이 여자의 우월성을 증명하고 자기를 남자와 평등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신22:5) 여자는 남자의 옷을 입지 말고, 남자는 여자의 옷을 입지 말아라. 주 너희의 하나님은 이렇게 하는 사람을 싫어하신다.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의복에 관한 규례가 아닙니다.
여자는 여자답게 남자는 남자답게 서로에게 맡겨진 역할을 충실하게 해 내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수준으로 자라 가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근본주의 교회에서는 여자들이 바지를 못 입습니다. ‘여자는 계속 여자답고 남자는 계속 남자 답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꾸 여자가 남자 흉내 내려고 하지 마시고 남자가 여자 흉내 내려고 하지 마세요.
남자들이 왜 귀걸이를 하고 다닙니까? 여자들이 왜 군복을 입고 다녀요?
그렇게 어떻게 해서든 자기를 증명해서 “난 남자보다 강한 여자야“라는 것을 입증해 보이고 싶으세요? 이 땅에 태어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다 역할이 달라요. 그러나 그 역할은 모두 연출가이신 하나님께서 맡기신 역할입니다. 그 역할을 충실히 해 낼 때 드라마는 성공적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부 그 역할에 충실하기로 결단하고 예수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엑스트라이지만 예수를 믿고 어떻게 해서든지 엑스트라에서 주인공으로 캐스팅되고 말리라“ 그것을 우리가 health and wealth gospel"번영의 신학”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저주받을 신학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가장 기초적이고 근본적인 남자와 여자의 역할의 구분도 못 하면서 다른 역할들을 해 내신다는 것입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이렇게 남자와 여자는 특히 부부는 서로 다른 두 존재가 서로의 장점으로 상대방을 섬겨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가는 목적으로 구별되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남자와 여자가 왜 구별되어 존재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정의가 명확하지 않은 사람들이 이성을 만나면 생각하는 게 뭐겠습니까? sex밖에 없습니다.
이성인 상대방이 왜 나와 구별되어 존재하는지에 대한 정의가 내려져 있지 않은 사람들은 자기와 다른 이성의 사람을 만나게 되면 생각나는 게 sex밖에 없는 겁니다. 죄인들의 욕심은 그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다른 것으로 자기의 쾌락의 도구로 쓰고 싶은 것밖에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타락한 죄인들은 아담 이래로 모두 간음이라는 죄에 노출되어 있는 것입니다. 창세 이래로 이 땅에 존재한 모든 무리의 사회법에 “간음”이 들어가 있는 것을 아십니까? 간음은 인류 공통의 관심사이며 인류의 보편적인 죄입니다.
아이가 태어나고 사춘기가 되면 성호르몬이라는 것이 분비되면서 성욕이라는 것이 생기게 됩니다. 그런데 아직 성호르몬 분비가 채 일어나지도 않은 초등학교 1학년 2학년 아이들이 포르노에 중독이 되는 것이 사회 문제로 떠오르는 것을 보면 “성적인 범죄나 성도착“은 단순히
성욕에 의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8살짜리 아이가 인터넷 포르노에 중독이 되어서 엄마가 혼을 냈더니 아이가 울면서 그러더랍니다. “엄마, 참 이상해 안 보려고 하는데 컴퓨터만 켜면 자꾸만 보고 싶어” 이러한 성적인 범죄는 인간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린 이기적이며 자기의 힘만을 추구하는 타락한 죄인들의 대표적인 성향인 것입니다. 상대방을 이용해서 나의 만족을 채우고 나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 그래서 성경에서도 돌로 쳐서 죽일 수 있는 범죄에다가 간음을 넣어 놓은 것입니다.
남녀 간의 성적인 결합은 하나님께서 부부에게만 허락하신 아름다운 선물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자기가 가진 다른 것으로 상대방을 섬기며 둘이 하나가 되어 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몸으로 느낄 수 있는 하나님의 귀한 선물입니다. 그래서 부부간의 육체적인 결합은 부부 사이의 친밀감을 더해 주고 깊은 하나 됨을 경험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라 하면서도 그러한 육체적 간음을 하는 자들은 아직도 인간 존재의 의미, 남녀가 구별되어 존재하는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자들인 것입니다.
성 관계는 성경에서도 명시하듯이 사회 법 상으로 공인된 부부간에서만 용인이 되는 것입니다.
다음 달에 약혼할 사이라 할지라도 절대 용납되지 않는 것입니다.
힘을 추구하는 타락한 남자들이 자기 힘을 과시하기 위해 많은 섹스를 갖고 싶어 하는 것을 아십니까? 죄인들이 궁극적으로 많은 섹스를 갖기 위해 힘을 , 돈을, 명예를 추구한다는 것을 아십니까? 타락한 여자들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이용해서 남자가 가진 힘을 자기의 소유로 만들려고 한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게 모두 이기적이며 교만한 죄의 뿌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난 자들은 자신들의 존재의 의미를 발견한 자들입니다. 왜 남자와 여자가 존재하는지 왜 교회가 존재하는지 왜 나에게 이해 못할 상황들이 일어나는지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들을 자신의 거룩과 온전함을 위해 선용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 남녀가 만나 연인이 되고 연애를 하면서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를 섬기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온전한 수준으로 자라가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만나기만 하면 그저 성적인, 육체적인 것만을 탐닉하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상대방이 안 해줬다고 늘 다투고 삐치고 헤어지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행위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선물을 주었습니다. 그 선물을 준 사랑하는 사람을 최대한으로 모욕하는 방법이 뭡니까? 그 선물을 발기발기 찢어 버리는 것입니다. 땅에 내 던지고 밟아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부에게만 주신 귀한 선물을 엉뚱하게 오용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주 효과적으로 모욕하는 것입니다. 살인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을 죽임으로써 하나님 자신을 모욕하는 것이라면 간음은 하나님의 선물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두 가지 죄는 돌로 쳐서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혼인 외의 성 관계는 하나님에 대한 모욕일 뿐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가혹한 폭력이기도 합니다. 그 상대방을 이용해서 나의 쾌락을 구하는 이기심의 발로입니다. 상대방이 나중에 어떻게 되든 말든 자기는 아무 상관없이 지금 나의 욕구만 채우면 된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그 상대방이 나중에 혼인을 한 후에 남편으로 아내로 순결하고 성실하게 쌓아가야 할 온전함의 길에 지뢰를 설치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절대 혼인 외의 성 관계는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이곳에 많은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연인 사이인 친구들도 많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여러분이 상대방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고 무엇을 요구하고 있으며 어떻게 함께 온전함을 향해 가고 있는지 고민해 보십시오. 그저 만나면 상대방을 이용해서 내가 어떻게 편해질까?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이용해서 내가 기뻐질까? 만을 생각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혹시 상대방이 나중에 다른 사람과 결혼해서도 나는 절대 잊지 말아 주었으면 하는 이기적인 생각에 상대방에게 자기를 깊이 심어 놓으려는 그런 노력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건 폭력입니다. 모욕입니다. 이제 멈추십시오.
그리고 자꾸 하나님을 알아 가십시오. 그 욕정의 여인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를 만나자 그 녀에게 참 만족이 왔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 예수가 없는 자들이 만나기만 하면 생각하는 게 추잡한 짓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서로를 통해 하나님을 알아 가고 신자의 삶이 무엇인지를 배우며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지어져 가야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통해 나의 만족을 채우려는 시도는 혹 여러분이 결혼을 한다고 해도 여러분의 신앙생활의 큰 적이 될 것입니다.
(고전5:1-8) 1 여러분 가운데 음행이 있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자기 아버지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일까지도 있다고 하니, 그러한 음행은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2 그런데도 여러분은 자만하고 있습니까? 오히려 여러분은 그런 음행을 통탄하고, 그러한 일을 저지른 자를 여러분 가운데서 제거해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3 나로 말하면, 비록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는 것과 다름없이, ( 또는 '그러한 일을 저지른 자를 우리 주 예수의 이름으로 벌써 심판하였습니다. 4. 여러분이 함께 모일 때에……')그러한 일을 저지른 자를 이미 심판하였습니다.
4 우리 주 예수의 이름으로 여러분이 함께 모일 때에, 나의 영이 우리 주 예수의 권능과 더불어 여러분과 한자리에 있으니,
5 그러한 자를 사탄에게 넘겨 주어서, 그 육체는 멸망을 당하고, 그 영은 주님의 날에 구원을 얻게 해야 할 것입니다.
6 여러분이 자랑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적은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게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7 여러분은 새 반죽이 될 수 있도록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십시오. 여러분은 누룩을 넣지 않은 반죽입니다. 우리들의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습니다. 8 그러므로 우리는 묵은 누룩, 곧 악의와 악독이라는 누룩을 넣은 빵으로 절기를 지키지 말고, 성실과 진실을 넣어서 만든, 누룩 없이 된 빵으로 지킵시다.
음행을 하는 고린도 교회 사람들에게 바울이 엄히 경고하는 대목입니다. “나는 음행한 자들을 사단에게 내어 주었다. 그러니 회개하고 구원 받아라“ ”누룩을 버려라“ 누룩은 죄입니다.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지킬 때 집안에 누룩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하나님께서 그 집을 멸해 버리셨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구원을 얻은 자들은 그 죄의 습관, 경향, 누룩을 자꾸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유월절은 언제입니까? 매일 매일이 우리 교회의 유월절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교회는 매일 매일을 그 구원의 감격으로 살아가야 하는, 매일 매일을 유월절로 지켜야 하는 자들입니다. 누룩을 버리십시오. 우리는 본능적으로 더러운 것들을 우리 몸 밖으로 버리는 행위를 해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화장실을 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거듭난 자들은 본능적으로 더러운 것들을 피하고 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죽은 자들은 그냥 더러운 세상 원리에 젖어 있다가 사망으로 가게 되지만 살아있는 자들은 더러운 것들이 오면 피합니다. 살아있는 돼지는 먹을 것을 주면 열심히 먹습니다. 파리가 붙으면 열심히 쳐내면서 먹을 것을 먹습니다. 죽은 돼지는 먹을 것에는 반응하지 못합니다. 그 죽은 돼지에는 파리가 붙어서 알을 낳고 구더기가 되어서 순 식간에 뼈만 남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죄를 쳐내는 피나는 노력을 하실 것입니다.
자꾸 자꾸 여러분의 속을 하나님으로 채우세요. 피 눈물 나는 노력을 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공허하게 비워두지 마세요. 공허한 마음은 늘 무언가를 채우려 시도를 합니다. 거기에 하나님을 채우셔야 합니다.
(잠4:23) 그 무엇보다도 너는 네 마음을 지켜라. 그 마음이 바로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여러분, 마음은 생각과 행위의 컨트롤 타워입니다. 온통 불륜 이야기 투성이인 비디오, TV 같은 것 너무 많이 보지 마세요. 여러분의 마음을 지키십시오. 우리 안에 채워 넣은 것이 밖으로 나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전 그래서 요즘 인터넷에도 잘 안 들어갑니다. 맨 보이는 게 더러운 범죄들뿐이라 아예 보지 않습니다. 더러운 것들은 피하세요.
죄는 계속해서 죄를 낳습니다. 인간은 죄를 지으면 의식적으로 하나님을 피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한번 두 번 숨게 되면 계속해서 어두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성도들의 그러한 죄를 발견하게 되면 교회 앞에 드러내 놓고 회개하게 하고 고치게 하고 바로잡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치리입니다.
만일에 우리 교회 안에서도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람직하지 못한 누룩들이 발견이 될 때는 반드시 교회에서 치리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올바른 교회의 표지3가지가 무엇입니까?
올바른 말씀 선포, 올바른 성례, 올바른 권징입니다.
요즈음은 개나 소나 전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니까 그 권징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혹시 손님 떨어져 나갈까봐 절대 교인들에게 싫은 소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올바른 교회는 성도가 잘못했을 때 반드시 징계를 해야 합니다.
바울이 음행을 한 자들을 사단에게 내어주었다는 것은 그들을 교회라는 공동체에서 잠시 내 쫓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 있는 곳이 교회라면 그 무리에서 쫓겨난 자들은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교회 밖의 세상은 사단의 통치가 있는 곳입니다. 그것을 사단에게 내어 주었다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진짜 교회가 맞다 면 그 사람은 절대 그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한 달간 교회 출석을 하지 마세요.” 내지는 “두 달간 공중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내지는 “세 달간 예배 참석을 못 합니다” 교회의 재판부가 이런 판결을 내려 버리는 것입니다.
요즘처럼 교회가 타락을 해버린 상태에서는 그게 무슨 큰 벌이겠는가 싶겠지만 진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들과의 교제 권에서 밀어내어 버리면 견디지 못합니다.
전쟁 중에 전투기 조종사들에게 내리는 가장 큰 징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전투가 있을 때 전투에 참가하지 못하게 하고 내무반에서 바둑이나 두게 하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벌이냐? 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명예를 목숨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pilot들에게는 그것보다 큰 벌이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들의 무리에서 잠시라도 쫓아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큰 벌인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함께 신앙 생활하는 교회 지체들에게 악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했을 때 여러분은 쫓겨 날 각오를 하십시오. 공공연하게 술을 마신다던지, 도박을 한다던지, 교회의 멤버들 끼리 서로 다퉈서 그 다툼의 여파가 교회의 하나 됨을 방해한다든지 해서 아직 믿음이 연약한 지체들의 신앙에 해가 된다면 여러분은 반드시 징계를 받게 될 것입니다. 직분 자는 영원히 직분에서 탈락시켜 버릴 것이고 공개적으로 교회 앞에서 자기 죄를 시인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러다 교인들 다 나가면 어떡합니까?’하고 걱정하실 분들이 계실 텐데 괜찮습니다. 이 땅의 교회는 그렇게 망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만들어지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앞으로 더욱 더 힘써 여러분의 삶에 남아 있는 누룩을 쳐서 없애십시오. 이제 말뿐인 그런 어린 유아기 적 신앙에서 좀 벗어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그 “perfect" 한 곳으로”온전한 곳으로“ 열심히 함께 갑시다.
제44장 교회 (12) 교회와 직분
(골1:25-29)
25 나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남김없이 전파하라고 맡기신 사명을 따라, 교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26 이 비밀은 영원 전부터 모든 세대에게 감추어져 있었는데, 지금은 그의 성도들에게 드러났습니다.
27 하나님께서는 이방 사람 가운데 나타난 이 비밀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가를, 성도들에게 알게 하려고 하셨습니다. 이 비밀은 여러분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요, 곧 영광의 소망입니다.
28 우리는 이 그리스도를 전파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사람으로 세우려고 모든 사람에게 권하며, 지혜를 다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칩니다.
29 나도 이 일을 위하여, 내 속에서 능력으로 활동하시는 그에게 힘을 얻어서 수고하고 있고, 애쓰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교회는 온전함(텔레이오스, perfect)를 향해서 (카타르티스모스)온전하게 되어져 가는 과정 속을 살아가는 자들이라는 것을 공부했습니다. 우리는 그 삶을 신앙생활이라고도 부르고 나그네 인생길이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마땅히 올바른 말씀과 올바른 성례와 올바른 권징, 치리를 행사함으로 교회의 멤버들이 거룩하고 온전하게 지어져 가는 데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함을 성경을 통해 확인을 했습니다.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서 그렇게 온전한 자로,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신부로 지어져 가는 길에 하나님의 방법이요 수단으로 주어진 것이 지상의 교회라면 그 지상의 교회 안에서의 직분은 어떻게 정의가 되어져야 하는가에 대해서 공부를 하겠습니다.
여러 말 할 것 없이 이미 결론은 내려졌지요? 교회의 직분이라는 것이 거룩하게 지어져 가야하는 교회 안에 있는 것이니 만큼 교회의 모든 직분도 역시 성도들의 거룩함을 위해 성도들의 온전함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엡4:11-12) 11 그분이,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예언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도자로, 또 어떤 사람은 목회자와 교사로 삼으셨습니다.
12 그것은(그러한 직분들은) 성도들을 준비시켜,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맞지요? 교회는 이렇게 온전함을 향해(perfect, 텔레이오스)로 자라가야 하기 때문에 구원을 얻은 교회가 소유한 것을 새 생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다르게 표현할 수도 있잖아요? “새 신분, 새 운명, 새 지위“ 이렇게 표현해도 되는데 굳이 새 생명이라고 표현을 하는 것은 ”자라남“이라는 힌트가 그 단어 안에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 ‘교회의 자라남‘에 기여하는 것이 교회 자신이요 또 교회 안의 직분들입니다.
이 지상의 교회는 여러 종류의 각기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살림을 꾸려 나가야 하기 때문에 조직이라는 것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영적인 유기체입니다. 유기체라는 것은 한 생명이라는 말입니다. 하나의 생명으로 통일이 된 유기체에 왜 조직이 필요한가?
유기체인 교회라는 것은 천상의 완성된 교회, 영적인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지상의 가시적인 교회는 그 자체가 유기체는 아닙니다. 많은 가라지 들이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도 아직 온전한 유기체로서의 삶을 배워야하는 이 광야 땅을 살아내야 하고 여전히 육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먹어야 하고 마셔야 하고 그들이 함께 모이는데 비가 오면 비를 피해야 하고 바람이 불면 바람도 막아야 합니다. 거기에는 당연히 일손이 필요하고 그 일손들을 규모 있게 움직이는 리더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또 성도들을 가르치고 양육하는 데에 있어서도 여전히 인간이 가진 한계 때문에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일들을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그 일을 감당해 내기 위해서 조직이라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당연히 그 조직에는 직분과 직책이라는 것이 있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도 유다처럼 돈궤 맡은 자가 있었던 것처럼 당연히 공동체에는 직분과 직책이 있습니다. 여기서 직분이라 함은 직무상의 본분을 말하는 것이고 직책이라 함은 직무상의 책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함께 모인 사람들이 모두 완전하게 성화가 된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면 왜 그러한 ‘질서’가 필요하며 왜 조직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러나 이곳에는 영 우리와는 딴 길로 가고 있는 “프쉬키코스”도 있고 새 생명을 받기는 받았는데 지금 젖이나 이유식을 먹고 있는 “살키코스”들도 있고 성숙한 “프뉴마 티코스”도 있고 하기 때문에 조직과 질서가 필요한 것입니다. 아니면 금방 난장판이 되어버리게 되니까요. 왜 목사만 설교를 합니까? 집사들도 돌아가면서 설교해도 되잖아요? 왜 교회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지요? 질서의 차원에서 그러는 것입니다. 신학교에서 뭐 대단한 것을 배운다고 신학교를 졸업해야 목사 안수를 줍니까? 질서의 차원에서 그러는 것입니다. 신학교 졸업한 가짜들도 얼마든지 많아요. 그러나 질서의 차원에서 신학교를 졸업한 사람에게 목사 안수의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안수도 꼭 안수 받은 목사들과 장로들이 안수를 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어떤 사람이 어느 날 꿈에 계시를 받고 와서 “하나님이 오늘부터 나더러 목사를 하라고 그랬다”하면서 자기들끼리 모여서 안수 주고 설교시키고 할 거라고요. 그러면 개나 소나 다 목사 되고 성경 가르치고 그렇게 되니까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러니까 질서의 차원에서 조직과 직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본 대로 그러한 교회 공동체의 직분과 직책은 모두 성도들을 온전케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그러한 직분과 직책이 조직체의 ‘운영’으로 초점이 맞춰지면 안 되는 거예요. 교회는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이끌려 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교회 안에서의 직분과 직책이 세속적 교회들이 추구하는 훌륭한 운영, 이윤이 남는 운영을 목표로 하는 것이라면 교회의 직분 자들은 모두 세상의 전문가들로 구성이 되는 것이 제일 이상적입니다. 정말 교회의 일이라는 것이 그런 세상의 전문적인 지식과 능력으로 잘 되어가던가요? 대학교수님들이 주일학교 교사 잘하는 것 보셨어요? 성악가들이 성가대에 들어가서 그 성가대가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셨습니까? 훌륭한 CPA가 교회의 재정을 맡으면 교회의 재정이 훨씬 좋아지나요? 교회의 일은 그렇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직분 자들의 조건을 제시할 때 그들이 가진 능력을 논하지 않습니다.
(딤전3:1-13) 1 이 말은 옳습니다.( 주석자들에 따라 '이 말은 옳습니다'를 3:1 하반절과 연결시키기도 함.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이 말은 일반적으로 용납되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맡고 싶어하면(에피스코페스, 내려다 보다, 돌보다-목사나 장로 그리고 그 밖의 사역 자), 그는 훌륭한 일을 바란다고 하겠습니다.
2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받을 일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인색하지 않으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3 술을 즐기지 않으며, 난폭하지 않고 너그러우며, 다투지 않으며, 돈을 사랑하지 않으며,
4 자기 가정을 잘 다스려서 자기 자녀들로 하여금 아주 공손히 복종하게 하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5 (자기 가정을 다스릴 줄 모르면, 어떻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볼 수 있겠습니까?)
6 또 새로 입교한 사람도 안 됩니다. 그러면 그가 교만해져서, 악마가 받을 심판에 떨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7 감독은 또한, 교회 밖의 사람들로부터도 좋은 평판을 받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그래야 그가 비방을 받지 않으며, 마귀의 올무에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8 이와 같이 집사들도 신중하며, 한 입으로 두 말을 하지 않으며, 술을 탐닉하지 않으며, 부정한 이득을 탐내지 않으며,
9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간직한 사람이라야 합니다.
10 이런 사람들을 먼저 시험해 보고, 책망받을 일이 없으면, 집사의 일을 하게 하십시오.
11 이와 같이 여자들도 신중하며(또는 '그들의 아내들' 또는 '여자 집사들'), 험담하지 않으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성실한 사람이라야 합니다.
12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며, 자녀와 자기 가정을 잘 다스리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13 집사의 직무를 잘 수행한 사람들은 좋은 지위를 얻게 되고,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에 큰 확신을 얻게 됩니다.
교회의 직분 자들은 남들에게 좋은 평가를 얻고, 가정을 잘 다스리고, 술을 즐기지 않고 신앙이 깊은 사람들이면 되는 것입니다. 거기 어디 ‘교회의 직분 자는 돈이 많아야 하고 경영 능력도 있어야 하고 추진력도 있어야 하며 머리도 좋아야 한다.’라는 구절이 있습니까?
교회의 직분 자들은 성도들의 온전함을 위해 존재하는 자들이지 결코 교회를 운영하는 사람들이 아닌 것입니다. 교회는 능력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능력을 발휘해서 훌륭한 업적을 만들어 내는 곳이 아닙니다.
그렇게 직분과 직책이라는 것이 성도들의 온전함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 교회 안에서 제일 중요한 분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여러분입니다. 여러분을 온전하게 만들어 천국에 데리고 가고 싶으셔서 하나님께서 소모품으로 세우신 것이 바로 직분 자입니다. 목사가 그렇고 장로가 그렇습니다. 안수 집사가 그렇게 사역자들이 그런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소모되어져 가면서 그 직분을 통해 직분 자 자신들도 거룩하고 온전하게 지어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직분이라는 것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목사, 장로, 어떤 부서 팀장, 어떤 부서 회장, 부회장 이런 자리는 그 자리에 앉을 만한 능력이 있어서 앉게 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앉혀놓지 않으면 그나마 신앙생활도 잘 하지 못할 사람들을 앉히시는 것입니다.
저 같은 사람은 목사를 시켜놓지 않으면 절대 주일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할 사람이기 때문에 이렇게 목사를 시켜서 꼭 붙들어 놓으시는 것입니다. 재미난 것이 얼마나 많은데 꼬박 꼬박 주일을 챙겨요? 제가 목사가 아니면 무슨 이유로 하루에 서너 시간밖에 못 자면서 성경을 공부하겠습니까? 보고 싶은 영화, 소설, 뮤지컬, 콘서트, 하고 싶은 게 얼마나 많은데요. 그리고 언제나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능력도 있고요. 전 절대 그렇게 제 자의로 성경을 열심히 공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 자식 성경은 읽혀야겠고 다른 것은 몰라도 주일정도는 지키게 해 주시려고 목사를 시켜놓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저의 목사라는 직분은 저를 거룩하게 만들고 아울러 저의 그 직분으로 말미암아 다른 지체들에게 유익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직분입니다. 여러분은 목사 안 시켜도 신앙생활 성실하게 하실 수 있는 분들이기 때문에 그냥 놔두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치 교회의 직분이 교회의 계급이 되어 버렸습니다. 목사 밑에 장로, 장로 밑에 집사, 집사 밑에 평신도 그렇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는 계급이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는 에베소서의 말씀처럼 거룩이라는 목표지점을 향해서 함께 손을 잡고, 함께 연결되어 가는 형제자매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우리 목사, 장로, 집사 다 없애 버릴까요? LA에도 그런 교회 있지요? 그 교회에는 목사만 있어요. 그럴 거면 목사는 왜 있습니까? 우리도 다 없애 버릴까요? 어떤 분들은 “교회는 직분 자들 때문에 망했다“고 폭언을 서슴지 않으시면서 ‘목사 장로 집사 제도를 없애자‘라고 분개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별로 그렇게 좋은 소리도 못 듣습니다. 그런데 왜 직분 자들이 필요하지요? 교회의 거룩을 위해 필요하다니까요. 그렇게 실수 많고 흠 많고 여물지 않은 직분 자들의 실수와 실패로 본인들이 큽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들 속에서 신자들이 크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여러분이 보시기에 엉터리 같아 보이는 장로, 집사, 목사, 사역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교회는 무슨 일하는 단체가 아닙니다. 직분 자와 신자들이 함께 손을 잡고 거룩을 향해 지어져 가는 공동체입니다.
재정 운영을 잘 못해서 교회 전체가 거리로 나앉게 되었다고 해도 그것으로 당사자와 교회의 멤버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배워야 할 뭔가를 배웠으면 되는 거예요. 집사들이 담합을 해서 엉터리 같은 목사 데려다가 부흥회를 했어요. 그 설교를 듣고 하나님의 진짜 교회가 “참 세상에는 가짜들도 많구나.” 라는 것을 배웠다면 그것은 “잘 한 거예요”
교회는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만 배우면 되는 거예요. 그거 야무지게 배워서 졸업학점 채우면 하나님께서 불러올리시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떤 사람을 판단할 때에 그가 한 일을 가지고 평가를 합니다. 그것을 성과주의, 세속주의라고 합니다. 보리 고개를 없앤 박정희 대통령, 소 한 마리 팔아서 자수성가한 정주영 회장, 노예를 해방시킨 링컨 대통령, 이등 박문을 암살한 안중근 이런 식으로 그들이 해 놓은 일을 가지고 사람을 평가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해 놓은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분명 우리에게 무언가를 행하라고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요구되는 행함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의 능력으로 만들어 내놓는 업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7:15-23) 15 "거짓 예언자들을 삼가라. 그들은 양의 탈을 쓰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굶주린 이리들이다.
16 너희는 그 열매로 그들을 알아야 한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따며,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따겠느냐? (분명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열매가 있습니다)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그런데 그 열매는 자기가 맺는 것이 아니라 좋은 나무가 맺는 것입니다. 그 좋은 나무에 붙어 있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19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찍어서 불 속에 던진다.
20 그러므로 너희는 그 열매로 그 사람들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착각하지 말라 ‘이런 열매는 아니다‘라고 21절부터 확실하게 첨언을 하십니다)
21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열심을 내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궁금하지요? 그러면 도대체 무엇을 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인가?)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
선지자 노릇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습니다. 분명 무언가를 행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에게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지옥으로 떨어져라‘하고 말씀하십니다. 도대체 뭐가 잘 못된 것이지요?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한 것이 나쁜 일입니까? 아니죠. 훌륭한 일입니다. 그런 것들이 모두 사도들이 행했던 일들 아닙니까? 분명 행한 것입니다. 사도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고 천국에 갔습니다. 그런데 왜 주님은 똑같은 일을 한 어떤 사람들한테는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사도들이 행한 행함과 그들이 행한 행함이 무엇이 다른 것입니까? 바로 다음절에 그 답이 나옵니다.
(마7:24-27) 24 "그러므로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다 자기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고 할 것이다.
25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서, 그 집에 들이치지만, 무너지지 않는다. 그 집을 반석 위에 세웠기 때문이다.
26 그러나 내 말을 듣고서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고 할 것이다.
27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서, 그 집에 들이치면, 무너진다. 그리고 그 무너짐은 엄청날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행한 일 그러니까 예수를 알고 복음을 알고 행한 일은 좋은 열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행한 것이 아닌 것 그러니까 복음이 무엇이고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지 못하고 행한 행함은 모두‘지옥에 들어갈 일’ ‘불법’이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우리가 어떤 일을 행하고 난 뒤에 그것이 ‘자기의 열매’가 되어서 자기 자랑이 되고, 자기 의가 되어서 주님 앞에 가서도 저는 “이러 저러한 일을 분명히 했습니다.”라고 하나님 앞에 제시를 하는 자는 따 가짜라는 것입니다.
선지자 노릇도 하고 귀신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하고도 그것을 자기의 자랑으로 차곡차곡 쌓아 놓은 사람들은 오히려 지옥에 들어갈 범죄 행위를 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 일을 얼마나 신중하게 해야 하는지 아시겠지요? 자칫하면 열심히 해 놓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되는 결과가 나오니까요. 그러니까 자신 없으면 아무 일도 안 하는 게 상책입니다.
(눅17:7-10) 7 너희 가운데서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다고 하자. 그 종이 들에서 돌아올 때에 '어서 와서, 식탁에 앉아라' 하고 그에게 말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8 오히려 그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너는 허리를 동이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야, 먹고 마셔라' 하지 않겠느냐?
9 그 종이 명령한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을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우리는 쓸모 없는 종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여라."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렇게 무슨 일을 하고도 전혀 생색을 낼 수 없는 무익한 종으로 일을 해야 하는 자들입니다. 전혀 자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이고 자연스럽게 나와야 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전혀 자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최후의 심판 때, 양과 염소의 심판 때 양들이 자기들이 한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양들은 자기가 한 일을 가지고 자기를 증명하고 자기의 자랑을 삼지 않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마25:31-39) 31 "인자가 모든 천사와 더불어 영광에 둘러싸여서 올 때에, 그는 자기의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을 것이다.
32 그는 모든 민족을 자기 앞으로 불러모아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갈라서,
33 양은 그의 오른쪽에, 염소는 그의 왼쪽에 세울 것이다.
34 그 때에 임금은 자기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창세 때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35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 할 것이다.
37 그 때에 의인들은 그에게 대답하여 말하기를 '주님, 우리가 언제,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리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리고,
38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리고,
39 언제, 병드시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갔습니까?' 할 것이다.
‘너희가 이러저러한 행위를 했기 때문에 내가 너희를 천국에 보낸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갸우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했지?‘ 전혀 기억이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우리의 ‘행할 일‘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양들이 한 일이 전부 어떤 일입니까? 우리 예수님이 겪으신 고난에 동참한 일이지요? 우리 주님이 주리셨을 때 주님께 음식을 드리고 우리 주님이 목마르실 때 주님께 물을 드려 마시게 하고 우리 주님이 나그네 되셨을 때 주님을 영접하였고 우리 주님이 벌거벗으셨을 때 옷을 입혔고 우리 주님이 병드셨을 때 수발을 했고 우리 주님 옥에 갇히셨을 때 찾아가서 뵈었다고 합니다. 이게 “우리 성도들이 행해야 할 일“입니다.
보세요. 우리는 이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는 어떤 업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선교를 해서 5,000명이 구원을 받았다고 해 보자고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는 5,000명이 돌아 온 것이 아닙니다. 그건 어차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니까요.
선교에 참여한 사람들이 선교활동을 통해 사랑의 마음을 품게 되고 인내하게 되고 온유한 심령으로 변해가게 되는 것을 열매라고 하는 것입니다.
병든 사람이 기도를 열심히 해서 병이 나은 것을 열매라 하지 않습니다. 병든 사람이 그 병을 통해 인간의 유한함과 생명의 부질없음과 하나님 나라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것을 열매라고 하는 것입니다. 공부를 잘해서, 사업을 잘 꾸려서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 믿는 자로서 뽄떼를 보여주는 것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열매가 아니라 사업이 망했어도 하나님으로만 기뻐할 수 있는 그 그리스도인의 희락을 열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교회가 해야 하는 일이요, 직분 자들의 일인 것입니다.
그러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온유함 같은 열매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들입니다. 환난이 없이 어떻게 인내를 배웁니까? 고통이 없이 어떻게 하늘의 희락을 깨닫습니까? 훈련교관이 없이 어떻게 온유함을 배웁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면서 그러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열매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부지불식간에 조금씩 조금씩 맺혀지기 때문에 양들이 나중에“우리가 언제 그랬어요?”라고 묻게 되는 것입니다. 그 열매들은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에 의해 맺혀지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좋은 나무인 예수님께 붙어만 있으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인생의 성공과 실패의 개념이 바뀌게 됩니다. 내가 이루어 놓은 일을 절대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 일이 성공을 하든, 실패를 하든 그 일들을 통해 나를 만져 주시고 나를 거룩하게 만들어 가시며 내 안에 열매를 맺게 하시는 주님으로 인해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배반을 당하고 때로는 멸시를 당하고 때로는 수치를 당하면서도 내 안에 그리스도가 맺으시는 열매가 맺혀진다면 그 삶은 성공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아, 나 같은 인간은 그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시키셔서 이렇게 열매를 맺어가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이게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이 세상에서 어떤 보상을 받게 된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모두 적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벨이 어떤 보상을 받았습니까? 가인에게 맞아 죽었습니다. 노아가 심판 전날까지 무슨 보상을 받았습니까? 세상 사람들의 조롱거리만 되었지요? 바울을 비롯한 우리 사도들이 예수를 믿고 어떤 보상을 받았습니까?
죽도록 두들겨 맞기만 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고 이 세상의 것으로 보상을 받았습니까? 예수를 믿으면 예수의 거룩을 따라 우리도 거룩해 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거룩하게 된 자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거룩으로 가는 길은 오히려 고난이요 환난이요 핍박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가 환난을 당하느냐? 기뻐해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교회에도 여러 직분 자들이 서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명심하십시오.
그 직분은 교회를 유익하게 하며 교회의 온전함을 위해 쓰여야 하며 자기 자신의 거룩을 훈련하는데 쓰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직분이 하는 일은 절대 자랑이 될 수 없는 것이고 때로 그 직분으로 인하여 고통스럽고 외로운 일을 겪게 된다하더라도 여러분은 그 것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게 되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잘 참아내십시오. 그리고 나의 거룩을 위해 그 일에 불러주신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나는 나의 자랑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의 형제자매들의 온전함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자신을 드러내지 마시고 남을 높여 주시고
많이 들어주시되 말을 많이 하지는 마십시오. 불평불만을 공론화 시키지 마십시오.
우리는 불평과 불만이 생기게 되면 그 일과 관계된 사람들 그 불평불만으로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놓고 기도를 하기로 한 그리스도인들 아닙니까?
그런데 왜 뒤에서 불평을 하고 불만을 가집니까? 거기는 두 가지 이유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난 그래서 거기 참여 안 할 거야’라는 불참에 대한 변명이거나 ‘난 그럼에도 참여 한다’라는 교만한 마음 둘 중에 하나입니다. 제발 좀 더 성숙해 지십시오. 그런 불평과 불만은 전염이 강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런 부정적인 생각과 불평불만으로 다른 형제자매의 신앙에 악 영향을 주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논쟁하지 마십시오. 논쟁은 지면 억울하고 이기면 원한만 남기는 것이 논쟁입니다.
각 자의 자리에서 자기 일만 열심히 하세요. 자기의 거룩만 열심히 챙기십시오.
그러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의 표어를 하나 지었습니다. 아마 제가 은퇴할 때까지 우리 교회의 표어로 쓸 작정입니다. “너나 잘해”
여러분이 각 자가 맡은 각자의 자리에서 신앙생활을 해 나가시면서 섭섭하고 불만스럽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이 생길 때 늘 기억하십시오. “너나 잘해”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그 참 열매들을 주렁주렁 맺게 될 것입니다.
제45장 교회 (13) 교회! 무엇을 위해,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
(엡2:1-10)
1 여러분도 전에는 범죄와 죄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2 그 때에 여러분은 범죄와 죄 가운데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살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을 따라 살았습니다.
3 우리도 전에는 그들 가운데서 모두 육신의 정욕대로 살고, 육신과 마음이 바라는 대로 행하여,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날 때로부터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
4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가 넘치는 분이셔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5 범죄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6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하늘에 함께 앉게 하셨습니다.
7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로 베푸신 그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를, 앞으로 올 모든 세대에게 드러내 보이시려는 것입니다.
8 여러분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9 구원이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님은, 아무도 그것을 자랑할 수 없게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10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면서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 번 수요 성경 공부 때 모든 인간은 누구나 마음속에 네 가지 질문을 갖게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첫 번째가
1)우주와 세상의 기원과 구조가 무엇인가?
2)인간은 어떤 존재이며 나는 누구인가? (What is man? who am I?)
3)인간과 이 세상이 당면하고 있는 큰 문제가 무엇인가? (What is our problem?)
4)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What can we do about it?)
이 질문들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해야 우리가 당면한 문제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입니다. 모든 인간은 자신들의 문제를 인식하고 있으며 그 문제의 해결책을 나름대로 내 놓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품고 있는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으로 나온 것들이 바로 종교이며 이념이며 사상입니다.
춘추 전국 시대를 살았던 공자는 인간의 문제를 예의 결여로 보았습니다. 임금과 신하간의 예가 결핍이 되어 끊임없는 쿠데타가 일어나고 또 부자간의 예와 형제간의 예와, 사제 간의 예와 이웃 간의 예의 결핍으로 인간 세상이 이렇게 평화를 잃게 된다는 것이 공자의 해석이었습니다.
그래서 유교는 예를 회복하는 것이 인간이 당면한 고통에서 해방되는 유일한 길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유교에서 말하는 구원은 예의 회복입니다. 그래서 유교에서는 “수기(修己) 치인(治人)” “자신의 도덕적 수양을 쌓는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습니다.
유교에서 인간에게 꼭 필요한 수양의 덕목으로 꼽는 것이 “사덕 오상”이라고 해서 “인 의 예 지 신“입니다. 그리고 대인 관계에서는 항상”삼강 오륜”에 입각해서 행동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삼강은 “부위자강”(아들은 아버지를 섬기는 것이 근본이다)
“군위신강“(신하는 임금을 섬기는 것이 근본이다)
“부위부강”(아내는 남편을 섬기는 것이 근본이다)
오륜은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남편과 아내는 분별이 있어야 한다) “장유유서” “붕우유신”(친구 사이에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삼강오륜에 입각해서 대인관계를 가지게 되면 평화가 온다는 것이죠. 이렇게 잘 살아내면 우리 인간이 겪고 있는 고통과 악의 문제가 해결이 될 것이라는 것이 유교입니다.
우리 한국에도 이미 BC3 세기경에 위만 조선으로부터 한사군이 설치되는 과정에서 유교가 전래되어졌습니다. 그러니까 벌써 2,000년 넘게 유교의 그늘 아래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 인간의 문제가 이 “예의 문제”입니까? 우리 힘으로 그것이 되던가요?
이 유교가 가장 폭 넓게 전파되고 나라의 국교처럼 되었던 때가 언제입니까? 조선시대입니다. 예가 가장 강조되었던 시대입니다. 그러나 그 조선왕조 500년 동안 우리 조상들은 가장 많은 내분을 겪었습니다. 공자의 가르침을 받들었던 중국의 왕조도 세계 어느 나라 못지않게 당파 싸움과 피 비린내 나는 쿠데타로 점철된 나라입니다.
그 것으로는 문제가 풀리지 않습니다.
고타마 싯타르타(석가모니)는 우리 인간이 당면하고 있는 고통의 문제를 힌두교 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았습니다. 힌두교는 기원전 3,000년경부터 존재했던 것입니다. 이 힌두교는 종교라기보다는 생활양식이나 철학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이 힌두교는 창설자도, 선지자도, 교리체계도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냥 다산과 성장에 관심을 두고 사는, 타락한 인간들의 생활양식이 종교화 된 것입니다.
힌두교에서는 인간 세상에 나타나는 고통과 행복과 선과 악 같은 것들은 모두 우주의 중심에 존재하는 브라만 이라는 진리의 투영이라고 봅니다. 그 브라만 안에는 고통과 행복과 선과 악의 개념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것이 인간 세상에 투영이 되면서 인간들이 그 현상들과 사건들을 고통으로, 행복으로, 선으로, 악으로 느끼는 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인간의 감정들은 다 허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가짜 느낌에 속지 말고 그 모든 것들이 허상이라는 것을 깨닫고 브라만 안으로 자신을 일치시키라는 “몰아 일체”의 사상이 힌두교의 가르침입니다. “무념무상”
BC600년경에 그 힌두교에 개혁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개혁 힌두교가 나왔습니다. 그 하나가 “마하비라”라는 사람이 창시한 “자이나 교”이고 다른 하나가 “고타마 싯타르타”가 창시한 “불교”입니다. 이 두 종교는 개혁 힌두교입니다.
고타마 싯타르타는 힌두교에서 희생제사와 카스트 제도를 없애고 불교를 창시했습니다.
그러나 힌두교나 불교나 자이나교 모두 그 맥은 같습니다.
인간은 인간이 처한 고통의 문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대오각성(大悟覺醒)” “견성(見性)오도(悟道)” 그 모든 것이 허상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반야심경”이라는 것을 한 두 번씩은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마하반야 바라밀다 심경 관자재보살...색즉시공 공즉시색” 모든 현상은 “공”"허상“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반야 바라밀“ 지혜를 얻어서 열반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힌두교나 불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구원은 이렇게 모든 것이 허상이라는 깨달음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방법은 윤회와 환생을 통한 업보로도 구원에, 즉 불교 용어로 열반에 이를 수 있다고 합니다. 업보라는 것은 “카르마” 전생에 지은 악행을 이생에서 갚는 것을 말합니다. 계속해서 다시 태어나서 그 업을 하나하나 갚아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급기야 열반에 이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중간에 대오각성을 하게 되면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게 되고 극락왕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 인간의 문제가 깨달음에 의해 해결이 되나요? “우리가 겪는 모든 악과 고통은 다 허상이라는 것만 깨달으면” 인간은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까?
세 번째로 물질주의와 성공주의를 포함하고 있는 자연주의를 한번 생각해 보지요. 자연주의는 무엇을 자연주의라고 한다고 했습니까? 초월적인 영역과 초월적인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의 근본은 물질이라고 보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이 눈에 보이는 물질은 영원 전부터 어떠한 모양으로든 존재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물질과 역사는 점점 더 발전하고 진화해서 마침내 유토피아가 이루어 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 자연주의입니다. 거기에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개입해서 도움을 준다거나 초월적인 존재가 역사를 운행한다거나 하는 것을 어리석은 자들의 맹신이라고 비웃는 사람들입니다.
그 자연주의가 본 인간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인간은 아직 충분히 교육받지 못했고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 평화를 못 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더 많이 교육하고 더 많이 훈련시키고 더 많이 노력하면 분명 유토피아는 온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당면한 고통의 문제는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 자연주의 시대정신의 정점에 있는 아주 중요한 이데올로기가 바로 공산주의입니다.
19세기 중반에 독일의 칼 마르크스에 의해 주창이 되었던 이데올로기입니다.
여러분,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언뜻 생각하기에 공산주의는 물질주의와는 아주 반대되는 이념인 것처럼 보이지만 공산주의야말로 물질주의, 자연주의의 정점에 있는 이데올로기입니다.
칼 마르크스는 유대인입니다. 그리고 독일 국교회 목사님의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의 할아버지가 루터 교 목사님이셨고 아버지도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칼 마르크스도 신학을 공부했고 신학생 시절에 그가 쓴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에 관한 논문은 유명합니다. 그는 천재적인 철학자였고 사회학자였습니다. 헤겔과 루드비히 포이에르 바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대학 때는 청년 헤겔학파들의 모임인 “박사클럽”에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헤겔의 변증법은 정반합의 개념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정반합이라는 것은 어떠한 이론이 나오면(these) 언젠가 그에 대한 반대 이론이(anti these) 나오게 되고 그리고 양쪽을 적절히 수용하는 합의(syn these)결과가 도출된다는 이론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합”은 “정반”의 결점을 털어 내고 장점을 통합하는 것입니다.
헤겔의 역사관은 바로 이 정반합 역사관입니다. 어떠한 시대정신이 오랫동안 세상에 존재하다보면 반드시 그 시대정신에 반하는 시대정신이 나오게 되고 그 두 시대정신의 장점을 모두 품고 있는 새로운 시대정신으로의 발전, 이것이 반복되는 것이 바로 역사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역사는 반드시 발전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어려운 말로 변증법이라고 하지요. 칼 마르크스는 헤겔로부터 이 변증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루드비히 포이엘 바하로부터는 유물론을 배웠습니다. 포이엘 바하는 인간의 존재를 인간이 먹는 것으로 정의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지요? “Human is what he eats" 잘 본거죠. 타락한 인간들이 무엇을 추구하면서 사는지 정확하게 인식한 사람입니다.
포이엘 바하가 지적한 것처럼 우리 타락한 인간은 전부 자기 먹을 것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삽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언어들을 잘 생각해 보세요. 어른을 만나면 하는 인사가 뭡니까?
“식사 하셨어요?” “친구들에게 흔히 하는 인사가 뭐죠?” “언제 밥 한번 먹자”
자기의 경제 상태나 상황을 남에게 말할 때는 “먹고 살만 합니다” 그러죠?
타락한 인간은 이렇게 전부 먹는 것, 자기 배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포이엘 바하도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물질, 먹는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아주 극단적인 물질주의자였습니다.
그리고 포이엘 바하는 종교를 정의하기를 “종교는 한계 상황에 봉착한 인간이 그 한계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라고 정의를 했습니다.
극단적인 물질주의자였던 포이엘 바하는 생각하기를 한계상황에 봉착한 인간이 그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많은 물질을 생산해 내야 하는데 종교에 심취한 인간들은 자기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많은 물질을 창출함으로 그 한계 상황을 극복하려 하지 않고 전부 신에게 매달려 자기들이 할 일을 게을리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종교는 민중의 악이다” “종교는 아편이다”라고 서슴없이 외쳤습니다.
철저한 물질주의자인 포이엘 바하는 초월적인 영역과 초월적인 존재에게 나약하게 매달리는 인간들이 어리석고 무지하게 보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헤겔에게서는 변증법을 그리고 루드비히 포이엘 바하에게서는 유물론을 배운 칼 마르크스는 새로운 변증법적 유물론인 “공산주의”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변증법, 정반합에 등장하는 시대정신 대신에 “경제“와 그로 말미암아 파생되는 ”계급“을 집어넣었습니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경제와 계급의 정반합에 의해 발전해 간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마르크스의 역사발전 5단계를 보면 역사가 이렇게 발전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원시 공산사회, 고대 노예사회, 중세 봉건사회, 근대 민주사회, 미래(또는 현대)공산사회
원시 시대에는 계급도 없고 경제적 불균형도 없는 공산사회였다는 것입니다. 공동으로 생산하고 공동으로 분배가 되는 사회였다는 것이죠. 그러다가 직업이 분화가 되고 산업이 발달하면서 노동을 하지 않고 노동자들을 다스리고 착취하는 어떤 무리가 생겨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그것을 계급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렇게 계급이 생기게 되면 하부 계급에 있는 사람들의 불만이 점점 커지게 되고 그들의 불만이 폭발하게 되어 혁명이 일어나게 되고 다시 그들이 지배계급이 되고 그리고 또 다른 계급이 지배계급으로 등장하는 계급의 정반합을 역사의 발전 과정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역사의 진행과정을 “계급투쟁”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마르크스가 잘 본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의 계급이 나뉘어져 있는 계급사회를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자본주의의 약점은 점점 부가 소수의 계급에게 편중이 되고 노동자들은 점점 힘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빈익빈 부익부“가 자본주의의 대표적인 특징입니다. 이게 마르크스가 본 자본주의에 대한 평가였습니다. 정확하죠.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 자본주의 국가들이 점점 그렇게 확연하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상위 1%의 계급을 위해 나머지 99%가 죽을힘을 다해 노력 봉사하는 모양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점점 증가하게 되지요? 그로 말미암아 생산을 담당하는 사람은 점점 늘게 되는데 부가 한 쪽으로 편중이 되다보면 어떻게 됩니까? 살 사람이 별로 없으니까 재화의 수요가 줄어들겠죠? 상품의 수요가 줄어들면 당연히 실업이 늘어나게 됩니다. 밥을 굶는 자식들을 위해 한 조각 빵을 훔친 사람들이 감옥으로 가고 있는 동안에 한 쪽에서는 수 억 원 짜리 물방울 다이아가 매진이 되는 그런 현상이 실제로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힘이 없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그 빈곤의 악순환을 깰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그 성과의 대부분은 자기 위의 계급인 부르주아가 가져갑니다. 그래서 빈부의 차가 점점 심화됩니다. 그 빈곤의 악순환을 무엇으로 깰 수 있지요? ”혁명“입니다. 혁명으로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를 밟고 일어서는 것입니다. 그 프롤레타리아는 숫자가 많기 때문에 그 프롤레타리아가 혁명에 성공을 해서 그들이 지배계급이 되면 부가 공평하게 분배가 되고 이 땅은 다툼과 시기와 경쟁이 없는 유토피아가 될 것이라는 것이 마르크스의 이론입니다.
그래서 마르크스가 엥겔스와 함께 공동으로 집필한 ”공산당 선언“의 마지막에는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로 끝을 맺는 것입니다. 단결해서 뭐 하라는 거죠? 혁명을 일으키라는 것입니다. 6.25를 전후해서 공산당들이 왜 지주들을 그렇게 죽창으로 처참하게 죽였는지 아시겠지요?
칼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혁명을 이렇게 예찬합니다.
“혁명을 통해 세상이 바뀌면 생산을 할 수 있는 기술은 이미 충분히 발달해 있어서 생산물은 계속해서 많아지고 또 부를 손에 쥐고 있던 일부 소수의 계급이 없어지게 되므로 모든 사람이 공평하고 행복하게 살게 되는 그런 사회, 경쟁과 투쟁과 악재가 없는 그러한 지상 천국이 오게 될 것이다“ 마르크스는 그러한 공산사회에서 살게 될 인간을 ”새로운 사회주의 적 인간“이라고 불렀습니다. 경쟁과 시기와 다툼을 버리고 나를 죽여 남을 살리는, 남을 위해 사는 그러한 인간군이 생겨나게 될 것이라는 것이죠. 그 새로운 사회주의 적 인간이 마치 그리스도인을 말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리고 실제로 프랑스 대혁명의 결과로 프랑스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혁명에 성공하고 지배계급으로 자리 매김을 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프랑스 대혁명의 성공으로 마르크스는 자신의 공산주의 이론에 더욱 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공산주의에 전 유럽과 아시아, 아메리카, 전 세계의 지식인들이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일제 말기부터 조선의 지식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 이 공산주의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이론상으로는 너무 좋으니까요. 이 이론처럼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는 이론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까 거의 대부분의 가난한 지식인들이 거기에 열광한 것입니다.
마르크스의 장례식에서 엥겔스가 읽었던 조사가 그것을 입증해 줍니다.
“유럽의 정부들은 절대 왕정과 공화정을 막론하고 그를 추방하였고 부르주아들은 보수파와 급진파를 막론하고 날조된 비방을 그이게 가했습니다. 그는 그 모든 것을 거미줄처럼 옆으로 밀쳐 버리고 무시해 버렸으며 오직 어쩔 수 없는 경우에나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죽어서 시베리아의 광산 노동자들로부터 유럽 전체와 아메리카 대륙을 넘어 캘리포니아에 이르는 수백만 혁명 동지들의 존경과 사랑과 애도를 받고 있습니다. 이제 나는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 많은 적대자들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개인적인 적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실제로 칼 마르크스는 방법을 잘 못 선택했던 사람이지만 그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열정은 누구도 따라 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마르크스는 그렇게 인간의 문제를 가난과 물질적인 궁핍과 계급의 갈등으로 보았습니다.
그것만 없어지면 인간은 그들이 갖고 있는 탐욕과 경쟁과 갈등의 문제로부터 구원을 받게 되고 행복하게 될 것이란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마르크스가 놓친 게 뭡니까? 인간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죄인들은 절대 자기를 죽여 남을 위해 살 수 없습니다. 계급투쟁으로 옛 계급을 몰아내면 모든 사람이 평등한 사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상위 계급이 나타납니다. 김일성 김정일을 비롯한 공산당 간부들이 그들 아닙니까? 그들이 정말 새로운 사회주의 적 인간이 되어서 자기를 희생해서 남을 살리는 사람들인가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인간의 문제가 정말 돈과 물질의 부족과 계급의 갈등에서 오는 것입니까?
만일 그 것이 사실이라면 공산주의도 하나의 구원의 방법일 수 있지요? 예수가 왜 필요합니까? 돈만 충분히 주고 공평한 사회만 만들어 주면 구원이 되는데...
이 미국의 수많은 부자들이 정말 행복합니까? 대학 때 제 친구들 중에 그런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돈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많아요. 부모가 집 안 곳곳에 엄청난 현금을 감춰 두어서 자기가 필요할 때마다 빼다 쓰는데도 부모가 얼마가 빠졌는지 모를 정도로 엄청난 부자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물론 환경도 좋았지요. 그런데 그 아이들 중 한 명은 자살했고요. 두 명이 마약 사범으로 감옥에 갔다 왔습니다. 인간은 그런 것으로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물질적인 필요나 명예가 채워진다고 해서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우리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 보세요. 힘을 추구하는 사람들 중에 가장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대통령 아닙니까? 그 분들 지금 다 뭐하고 사세요? 혹시 돌 맞아 죽을까봐 지금도 경호원들 데리고 다니면서 삽니다.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갑니까? 남들 눈 때문에 사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삽니까? 그 자식들 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인간은 환경을 윤택하게 바꾸어 준다고 해서 절대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왜 한진, 두산, 현대, 쌍용 이런 재벌 그룹 자식들이 서로 형제간에 법정투쟁까지 하면서 멱살잡이를 하고 있습니까? 인간은 그렇게 좋은 환경을 만들어 준다고 해서 행복해지지 않다는 것을 역사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천국 가고 싶으시죠? 왜 가고 싶으세요? 만일 여러분이 천국 가시고 싶은 이유가 “거기는 나에게 너무나 좋은 집과 환경과 거처가 제공 될 곳이기 때문에 가고 싶다“라고 생각하고 계시다면 그건 너무나 가난한 소망입니다. 그건 자연주의자들이나 공산주의자들의 관심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 좋은 차 좋은 집 가져 보신 적 있으시지요? 아니면 정말 갖고 싶었던 것을 가져 보신 경험이 있으실 거예요. 그 기쁨과 행복이 얼마나 오래가던가요? 물질과 재화는 우리에게 궁극적인 만족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만일 천국이 그렇게 금으로 은으로 만들어진 좋은 환경을 제공하는 곳이기만 한 것이라면 우리는 거기서도 이내 싫증이 날겁니다. 싫증이 나는 곳이 어떻게 영원하겠습니까?
천국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지 내가 원하는 환경이 제공되고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 채워지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공산주의의 구원관은 그렇게 물질적인 것입니다.
과학문명주의는 어떻습니까? 그들은 인간의 문제를 풀 수 있는 길은 과학 문명의 발달 뿐이라고 믿는 자들입니다. 과학문명이 더욱 더 발달해서 더 많은 재화의 생산이 일어나게 되고 인간의 질병이 극복이 되면 인간은 그 고통의 굴레에서 해방될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인 여러분의 구원관은 무엇입니까?
what is our problem? 우리의 문제가 뭡니까?
우리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타락을 하게 되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이 된 것입니다. 그게 우리의 문제입니다. 우리 인간은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이 combine되어 지어진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육적인 양식도 먹어야 하지만 영적인 양식도 먹어야 합니다. 그 영적인 양식은 하나님으로부터만 주어집니다. 그런데 그 양식의 공급 통로가 죄로 인해 막혀 버린 것입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그게 뚫려야 합니다. 그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우리는 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독교가 제시하는 인간이 당면한 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의 회복을 목표로 삼고 사는 사람들도 아니고, 인간의 모든 고통은 허상이며 가짜라는 것을 깨닫는 것을 목표로 삼고 사는 사람들도 아니고, 풍족한 물질을 목표로 삼고 사는 사람들도 아닙니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목표로 사는 사람들입니까?
하나님과 화해 한 자로 영원히 그 분과 함께 살게 되는 초월 적인 저 하나님 나라를 목표로 삼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힘과 물질을 목표로 삼고 사는 한, 절대 우리에게 안식과 평안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펴 본 것처럼 세상의 종교와 시대정신과 이데올로기가 힘과 권력과 자기 자랑을 좇아 사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와 정 반대의 시대정신으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예전에는 대구 경북 소위 TK가 힘을 쓰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때는 TV연속극에도 호남 사투리가 안 나왔습니다. 그 때는 호남 사람들이 마음대로 고향을 밝히는 것도 힘들 정도로 지연이 힘을 썼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정권이 바뀐 뒤에는 호남 사람들이 힘을 쓰는 시대가 되었죠.
제가 미국에 오기 전에 국민회의라는 정당에서 잠깐 일을 했었습니다. 청년특위라는 곳에서 일을 했습니다. 그 청년특위에 부산 출신인 친구가 하나 있었습니다. 나중에 대선이 끝나고 청와대 비서실로 들어간 친구인데, 당시 청년특위를 관할하고 있던 분이 이름만대면 여러분도 다 아시는 당의 실세였습니다.
그 분이 첫 회의를 주관하시면서 돌아가면서 특위 위원들의 고향을 물어보셨습니다. 제 옆에 있던 그 친구는 분명 고향이 부산이었는데 “자네 고향이 어딘가?” 그러니까 “저 목포 옆입니다” 그러는 거예요. 그걸 물어 본 분이 고향이 목표였거든요. 그러니까 그 분이 “그래 목포 옆 어디야?” 그러니까 “목포에서 배타고 3시간 거리입니다” “그래 거기가 어디지?” 그러니까 머뭇머뭇 거리면서 대답을 못하더라고요. 그냥 “부산“그러면 되지 왜 목포 옆이라고 그래요? ”목포에서 배타고 세 시간” 어떻게 해서든지 그 힘에 붙어보려고 하는 것이지요.
힘을 좇아 사는 사람들은 그렇게 피곤해요. 잘 들여다보면 참 우스워요.
정치인들 보세요. 무슨 정치 철학이나 소신 같은 것은 찾아볼 수가 없어요. 철이 바뀔 때마다 힘 있는 쪽에 붙는 거예요. 여러분도 그런 삶을 사시겠습니까?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지요?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까?
내생을 준비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했는데 우리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합니까?
(딤전4:6-8) 6 그대가 이런 교훈으로 형제자매를 깨우치면, 그대는, 믿음의 말씀과 그대가 지금까지 좇아온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아서,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또는 '집사')이 될 것입니다.
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물리치십시오. 경건함에 이르도록 자기를 훈련하십시오.
8 육체의 운동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 훈련은 모든 면에 유익하니, 이 세상과 장차 올 세상의 생명을 약속해 줍니다.
(딤전6:6-10) 6 자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경건이 큰 이득을 줍니다
7 우리는 아무것도 세상에 가지고 오지 않았으니, 아무것도 가지고 떠나갈 수 없습니다(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없다는 것도 확실합니다').
8 우리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9 그러나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유혹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도 해로운 욕심에 떨어집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을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합니다.
10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좇다가, 믿음에서 떠나 헤매기도 하고, 많은 고통을 겪기도 한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딛2:11-14) 11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나타났습니다.( 또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습니다')
12 그 은총은 우리를 교육하여, 불경건함과 속된 정욕을 버리고, 지금 이 세상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게 합니다.
13 또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복된 소망을 갖게 합니다. 곧 위대하신 하나님과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게 합니다. 14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모든 불법에서 속량하시고 깨끗하게 하셔서,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당신의 백성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벧후2:9) 주께서는 경건한 사람을 시련에서 건져 내시고, 불의한 사람을 벌하셔서, 심판 날까지 가두어 두실 것입니다.
(벧후3:10-13) 10 그러나 주님의 날은 도둑 같이 올 것입니다. 그 날에 하늘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사라지고, 원소들은 불에 녹아 버리고,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일은*(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것은 타 버릴') 드러날 것입니다.
11 이렇게 모든 것이 녹아 버릴 터인데, 여러분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생활 가운데서,
12 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 날을 앞당기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날에 하늘은 불타서 없어지고, 원소들은 타서 녹아 버릴 것입니다.
13 그러나 우리는 그의 약속을 따라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정의가 깃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하루하루 경건을 연습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경건”이라고 번역이 된 “유세베이야”는 “거룩”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처럼 힘을 좇고 명예와 권력을 좇아 그 것으로 나의 만족을 삼는 사람들이 아니라 거룩함을 연습하고 훈련하며 새 나라를 준비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거기에 진정한 평화와 안식이 있다는 것을 맛보며 또 세상에 보여주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작금의 교회는 어떻습니까? 신앙생활마저도 자기의 이익을 위해 합니다.
남들에게 나를 자랑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자연주의자들이나 성공주의자, 물질주의자, 공산주의자들과 조금도 다름없는 생활입니다.
(딤전6:5) 그리고 마음이 썩고 진리를 잃어서, 경건을 이득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 사이에 끊임없는 알력이 생깁니다(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그런 사람들과는 상종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가 더 있음)
자기의 거룩조차도 자기 자랑과 자기 이익을 위해 이용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죄인입니다.
여러분, 이제 2006년 새해가 밝아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새달 새해, 새 시간을 나누어 주셨을까요? 어차피 이날이 저 날 다 나은 것이 없고 다 같은 날인데 왜 이렇게 금을 그어주십니까? 우리에게 자꾸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지난 2005년 송구영신 예배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새 도화지”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었지요? 한 해 동안 그 새 도화지에 어떤 그림을 그리셨습니까?
한번 마음속에 펴 보세요. 대부분 망치셨죠? 구겨 버리세요. 그리고 다시 새 도화지를 받아서 시작하십시오. 그리고 그 새 도화지에는 이런 그림을 그리세요. 우리 함께 유다서를 큰 목소리로 읽고 마치죠.
(유1:1-25) 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동생인 나 유다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곧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랑하시고(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거룩하게 해주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켜 주시는 이들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2 자비와 평화와 사랑이 여러분에게 가득하기를 빕니다.
3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우리가 함께 나눈 구원에 관해서 편지를 써 보내려고, 여러 가지로 애써 준비를 해 왔는데 이제 여러분에게, 간곡한 권고의 편지를 쓸 필요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에게 한 번 결정적으로 전해진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여러분이 힘써 싸우라는 것입니다.
4 어떤 침입자들이 여러분 가운데 몰래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옛날부터 정죄를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들입니다. 그들은 경건하지 못한 자들로서,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남용해서 방종한 생활을 하고, 오직 한 분이신 통치자요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5 여러분이 이미 다 알겠지만, 내가 다시 여러분의 기억을 일깨워 드리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주께서는 백성을 이집트에서 한 번 결정적으로 구원해 내시고서, 그 다음에 믿지 않는 자들을 멸하셨습니다.
6 또 자기네가 통치하는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자기들의 거처를 떠난 천사들을, 그 큰 날의 심판에 붙이시려고, 영원한 사슬로 매어서 어둠에 가두어 두셨습니다.
7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와 그 주위의 성들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음란함에 빠져서 다른 육체를 좇았으므로,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써,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8 이와 마찬가지로, 이 사람들도 몽상에 빠져서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스러운 존재(또는 '천사들을')들을 모독하고 있습니다.
9 천사장 미가엘은 모세의 시체를 놓고 악마와 다투면서 논쟁을 할 때에, 차마 모욕적인 말로 단죄하지 못하고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바란다'고만 말하였습니다.
10 그런데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자기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은 욕합니다. 그들은 이성이 없는 짐승과 같이, 무엇이든지 본능으로만 알고, 바로 그 일로 멸망합니다.
11 그들에게 화가 있습니다. 그들은 가인의 길을 걸었으며, 삯을 바라서 발람의 그릇된 길에 빠져들었으며, 고라의 반역을 따르다가 망하였습니다.
12 이 사람들은 자기들만을 생각하면서, 염치없이 먹어 대므로, 여러분의 사랑의 식탁을 망치는 암초입니다. 그들은 바람에 밀려다니는 구름 곧 비를 내리지 않는 구름이요, 가을이 되어도 열매 하나도 맺음이 없이 죽고 또 죽어서 뿌리째 뽑힌 나무요,
13 자기들의 수치를 거품처럼 뿜어올리는 거친 바다 물결이요, 길을 잃은 별들입니다. 짙은 어둠이 영원히 그들에게 마련되어 있습니다.
14 이런 사람들을 두고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은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보아라, 주께서 수만 명이나 되는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오셨으니,
15 이것은 모든 사람을 심판하시고, 모든 불경건한 자들이 저지른 온갖 불경건한 행실과, 또 불경건한 죄인들이 주님을 거슬러 말한 모든 거친 말을 들추어내서, 그들을 정죄하시려고 하는 것이다."
16 이들은 불만에 쌓여서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들이요, 자기들의 욕심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입으로 허풍을 떨다가도,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는 남에게 아첨을 합니다.
17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예고한 그 말을 기억하십시오.
18 그들은 여러분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는 여러분을 조롱하는 자들이 나타나서, 자기들의 경건하지 못한 욕정을 따라 살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19 이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들이며, 성령을 받지 않고 본능대로 사는 자들입니다.
20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가장 거룩한 여러분의 믿음을 터로 삼아서, 스스로를 세우고, 성령으로 기도하십시오.
21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면서 스스로를 지키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기다리십시오.
22 의심을 품는 사람들을 동정해 주고,
23 불구덩이에 빠진 사람들을 끌어내어 구원해 주십시오. 또 본능적인 욕정에 빠진 사람들에 대해서는 욕정으로 더럽혀진 그들의 속옷까지도 미워하되, 그들에게는 조심스럽게 자비를 베푸십시오.
24 여러분을 넘어지지 않게 지켜 주시고, 흠이 없는 사람으로 자기의 영광 앞에 기쁘게 나서게 하실 능력을 가지신 분,
25 곧 우리의 구주이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께, 영광과 위엄과 주권과 권세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 전에서부터 이제와 영원까지 있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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