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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발라 신비주의 ] 카발라 신비주의에 대한 연구

신비주의와 카발라


신비주의와 카발라





오컬트하면 서양의 신비학을 얘기하는데 서양의 신비학이
라하면 카발라를 빼고 얘기할 수 없습니다. 카발라는 흔
히 유대 신비주의라고 말합니다.

신비주의는 신과의 직접적 만남과 합일을 추구하는 가르
침을 말합니다. 모든 종교에는 그런 집단이 있습니다. 예
를 들어 기독교에는 십자가의 성요한, 아빌라의 테레사,
엑크하르트같은 이들이 기독교 신비주의를 대표합니다.
이슬람교에서는 수피즘이라고 하는 신비주의적 전통이 있
죠. 그리고 유대교에는 카발라라고 하는 신비주의가 있습
니다. 흔히 말하는 유대교는 랍비적인 유대교라고 합니다.
랍비는 유대교의 율법선생을 말합니다.

여러 종교가 외견상으로는 서로 다른 듯하고, 그 때문에
숱한 갈등이 있어왔지만, 모든 종교에서 신비주의 부분만
큼은 서로 일치합니다. 신비주의 안에서는 모든 종교적
가르침이 한 뿌리에서 나왔고, 추구하는 것도 같은 곳임
이 분명해집니다. 왜냐면 신비주의야말로 모든 종교적 가
르침의 본질적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이들은 역사적으로 볼 때 언
제나 소수였고, 세속적인 종교 세력으로부터 번번히 박해
를 받아왓습니다. 그래서 신비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교리
를 함부로 공개하지 않았고, 선택된 제자들에게만 비밀리
에 전하거나, 암호화해서 아무나 그 내용을 알아볼 수 없
게 했습니다. 물론 그들은 알고 있는 것(깨달은 것) 중에
는 필설로 설명할 수 없는 것도 있었겠죠. 그래서 신비주
의자들의 비밀스런 전통이 더 강화되었을 겁니다.

예외적으로 신비주의자들이 정치적으로 득세한 경우가 있
는 데 그곳이 바로 티벳입니다. 그러나 현재는 티벳마저
도 중국 인민군에 의해 무자비하게 파괴되고 있습니다.
중국 공산 정권이 가장 철저히 파괴하려드는 것은 바로
티벳의 문화입니다. 티벳의 문화야말로 신비주의적 토대
위에 세워진 문화입니다.

중국 공산당의 티벳침공과 그 이후의 파괴 행위는 단순한
정치적 목적을 위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를 빛과 어둠의 전쟁인 아마겟돈의 연
속이란 시각에서 볼 때, 티벳의 파괴는 그동안 다른 종교
에서도 진행되어온 신비주의적 가르침과 전통에 대한 파
괴, 억압, 말살 행위의 일환인 것입니다.

세상에는 사람들 안에 거하는 신성을 부정하고, 사람들이
그 신성을 깨닫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자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들은 대개 정치적, 경제적 권좌를 차지하고
앉아서 사람들이 신비적 가르침과 접하는 것을 교묘하게
방해하고 대신에 엉뚱한 길로 가게 하려 합니다.

그러나 신과의 직접적인 만남과 합일은 모든 신의 아들딸
들의 권리이고, 존재이유입니다. 우리는 모든 종교의 신비
주의적 가르침 속에서 그에 이르는 열쇠를 발견할 수 있
습니다.

카발라라고 하는 유대 신비주의를 얘기하기에 앞서 유대
신비주의의 뿌리를 약간 짚고 갈 필요가 있습니다. 거기
서 우리는 신비적 추구의 전형을 볼 수 있습니다.

알려진 유대 신비주의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은 메르카바
신비주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에스겔 예언자가 목격
한 신의 메르카바(보좌-수레)의 환상을 토대로 한 것입니다.
수백년 동안 신비가들은 에스겔서 1장에 기록된 체험을 다
시 재현해보고자 노력해왔습니다.

에스겔서 1장의 기록을 보면:

"내가 보니 북방에서부터 폭풍과 큰 구름이 오는데 그 속
에서 불이 번쩍번쩍하여 빛이 그 사면에 비취며 그 불 가
운데 단 쇠 같은 것이 나타나 보이고..... 그 속에서 네 생
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 모양이 이러하니 사람의 형상
이라. 각각 네 얼굴과 네 날개가 있고 "

구름 안에서 에스겔은 신의 수레를 봅니다. 그것은 황옥
같은 돌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는 커다란 바퀴를 가진
불같이 빛나는 물체였습니다. 각각의 바퀴 옆에는 네 마
리 짐승이 하나씩 있었습니다. 그 생물의 머리 위에는 수
정 같은 하늘의 형상이 펴 있었습니다.

에스겔서 1장 26-28절은 이렇게 나와잇습니다.:

"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내가 본즉 그 허리 이상의 모양은 단 쇠 같아서 그 속과
주위가 불 같고 그 허리 이하의 모양도 불 같아서 사면으
로 광채가 나며
그 사면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곧 엎드리어 그 말씀하시는 자의 음성을 들으니라"

어느날 에스겔이 하늘을 올려다보니 놀라웁게도 하늘이
열렸습니다. 신은 그에게 일곱계의 천국과 그분 자신을
보여주었습니다. 신은 그에게 직접 말을 하며 그의 머리
에 손을 얹어주었습니다. 이러한 상호교류가 우리와 마찬
가지로 지상에 살던 한 사람에게 일어났습니다. 에스겔의
이러한 신비체험은 많은 신비가들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이를 메르카바 신비주의라고 부릅니다.

에스겔서 1장에 나오는 신의 보좌-수레는 고대에 출현한
유에프오나 우주선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라에리안들은 그 우주선을 타고온 자들이 바로 인류를
창조한 우주인이라 하고 그들 우주인을 엘로힘이라고
부릅니다. 무지한 고대인은 그들을 신으로 착각했다는
주장입니다. 그것은 유물론에 찌든 머리에서 나온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생각입니다. 에스겔이 본 것은
어디서 날라온 우주선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내면에
거하는 신성의 모습입니다.


메르카바 신비주의가 언제 출현했는지는 확실히 모릅니
다. 그러나 이 신비주의의 흔적은 기원전 3세기부터 나타
납니다. 대표적인 것인 에녹서입니다. 그 책은 에녹이 천
국으로 올라가 여행하며 높은 보좌와 그 위에 앉아 있는
영광스런 분을 본 일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메르카바 신비주의는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번성합니다.
기독교에도 그 영향이 보이는데, 바울이 낙원에 붙들려가
서 발설할 수 없다는 기록이나, 계시록에 묘사된 보좌에
앉은 이같은 것이 그것입니다.

이들 신비가들은 상부 세계를 자세히 묘사했습니다. 그들
은 일곱 층의 천국과 그곳의 궁전을 가듣 채운 천사들,
그리고 수레의 앞에서부터 흘러내리는 불의 강, 그 강을
건너는 다리 등을 목격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주된 목적
은 보좌에 앉은 이를 뵙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신비가는 그런 체험을 여행처럼 그렸고, 어떤 이는
"가슴의 가장 내밀한 곳"으로의 여행이라 했습니다. 그러
한 내밀한 곳으로의 여행이야말로 내면에 거하는 신을 발
견하는 모든 신비가들의 공통적인 보배입니다.

물론 이 메르카바 신비주의도 유대교내의 반신비주의 흐
름에 훼방을 받습니다. 에스겔서는 일반에게 읽히는 것이
금지되기도 했습니다.


카발라라고 알려진 신비주의 운동은 1200년대에 프랑스의
프로방스에서 출현했습니다. 14세기까지 카발리스트들은
자신들과 자신들의 가르침을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러왓
습니다. 예를 들자면 자신들의 가르침을 '내면의 지혜', 자
신들을 '이해하는 자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다가 14세
기에 와서야 카발라라는 이름이 널리 쓰이게 됩니다.

카발라의 문자적 의미는 '전통'입니다. 이는 "받음" 또는
"전달된 가르침"이라고도 번역될 수 있는데, 그것은 유대
신비가들이 자신들의 교리는 수천년 동안 세대에서 세대
로 구전으로 전해왔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언제 카발라가 시작되었는가는 학자들에 의하면 "유대 종
교사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라고 합니다. 유대 신
비가들은 그 기원이 아담에게까지 이른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았을 때, 그 율법의 비
밀교의적인 부분이 바로 카발라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학자는 그런 생각에 반대합니다. 그들은 카
발라가 12-13세기 경에 유대철학의 합리주의(이성주의)에
반발하여 새로 생겨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또 어떤 학
자는 카발라가 그리스-로마 시대 초기 생겨나 구전으로
전해오다가 중세에 와서야 유대교 문헌으로 표면에 떠오
른 것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카발라는 유대 신비주의 사상과 다른 계통의 신비주의 위
에 세워진 것이지만, 그런 전통과는 전혀 색다른 요소들
도 있습니다.

카발리스트들은 토라를 비밀교의적으로 해석합니다. 그들은
토라의 단어들을 통해서 신은 그 자신과 우주의 진리를
드러낸다고 믿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을 앎으로써 오는 커다란빛을 견딜
수가 없기 때문에....신성은 토라 안에서 숨겨진 형태로
계시된다. 성서는 "높은 곳에 있는 것"의 진정한 본성과
이 세계의 창조에 이른 신성의 비밀한 과정에 관한
힌트들이 흩어져있다. 현교적이고 대중적 의미에서
계시는 주로 신성의 의지, 선한 삶을 살기 위해 사람이
따라야할 계명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비교적 계시는
신성의 진리에 관한 것이고, 우주의 내밀한 작용에
관한 비밀의 네트웍인 것이다."

정통 랍비들은 신과 인간의 관계와 어떡하면
사람이 성경에 제시된 계명들을 완수할 수
있는 지에 집중하고 신의 본성이 신적인 영역
에 대해서는 탐색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반면
카발리스트들은 역동적이고 실천적인 신비주의
를 통해 바로 그 신비들을 추구하였습니다.

카발리스트들은 이 세계에 살아있는 영혼의
목표는 그 영혼이 천국의 높은 곳에서 누리던
최고의 지각을 깨닫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카발리스트들에게 있어서 신비주의 과학의
지식은 영혼이 신에게 붙도록 인도하는 다리
였습니다.

카발리스트 중에 가장 탁월한 두명의 대가가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모세 데 레옹'
입니다. 그는 스페인의 레옹에 살았는데
바로 조하르를 쓴 사람입니다. 조하르는
광약서(The Book of Splendor)라고도 하는데
카발라적인 사상을 묘사한 최초의 책입니다.

"조하르는 그 전부터 있어온 모든 카발라 사상의
위대한 요약집으로 저자 자신의 시적 상상력에
의해 재작업되고 통합된 작품이다. 앞선 세대에서
희미한 암시나 애매한 표현 속에 담겨있던
개념들은 고대 지혜의 일부로서 완전히 만개
하기에 이르렀다."

전통적으로 조하르는 2세기의 신비가인 랍비
시메온 벤 요하이의 것이라고 알려져 왔습니다.
그러나 최근의 철저한 조사결과 13세기에
모세 데 레옹에 의해 쓰여진 것임이 판명되었
습니다. 학자들은 조하르가 모세 데 레옹에
의해 쓰여진 것임을 인정하면서도 그가 더 상위
의 , 더 오래된 소스로부터 도움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소스는 바로 시메온 벤 요하이일 것이라고
봅니다. 즉 그의 영이 모세 데 레옹에게 조하르
를 불러줬거나 아니면 모세 자신인 시메온 벤
요하이의 환생일 수도 있을 겁니다. 조하르의
어떤 부분은 자동필사에 의해 쓰여진게 분명하다
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조하르는 1500부터
1800년의300년간 성경이나 탈무드와 같은
권위를 지닌 정경으로 취급되어 왔었습니다.

또 다른 카발라의 대가는 이삭 루리아입니다.
그는 1534년 예루살렘에 태어났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엘리야 예언자가 루리아의 아버지에게
나타나 카발라의 가르침을 드러낼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합니다. 루리아가
여덟살에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소년은 어머니
와 더불어 카이로로 이사갑니다. 그는 금새
탈무드의 천재로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어린 나이에 그는 8년간의 조하르 공부를
시작합니다. 그는 조하르의 신비에 더깊이
파고들기 위해 나일 강가의 조그만 오두막에
서 홀로 거하며 고행의 생활을 합니다.
거기서 그는 일주일에 오일씩 명상하고
조하르를 공부합니다. 공부와 기도와 금식으로
2년이 흘렀을 때 엘리야가 나타나 그에게
비전을 전수해주었다고 합니다.

엘리야는 그에게 팔레스타인으로 가라고
지시했고, 그는 1570년에 팔레스타인의
사페드에 옵니다. 당시 사페드는 아주
번성하던 영적 공동체였습니다. 그야말로
유대인의 샹그릴라였습니다.

거기서 사람들은 금새 그가 선생임을
알아보았습니다. 거기서 그는 가르쳤으나
2년도 못되어 죽게 됩니다. 그는 스스로
지은 저서는 별로 없으나 그의 제자들은
그가 가르친 가르침을 수천 페이지나
기록했습니다.

루리아는 여러가지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가르침
말고도 실천적인 가르침을 많이 남겼는데 그 중에서도
그의 추종자들에게 어떤 특정한 영적 자질, 특히
기쁨(joy)을 함양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중요하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또한 분노의 죄를 피하도록
학생들에게 충고했습니다. 다른 죄들은 영혼의
"손발들"을 다치게 하지만 분노의 죄를 영혼 전체를
다치게 한다고 루리아는 말했습니다. 루리아는
말하길 분노는 지극 높은 영혼으로 하여금 그 사람
에게서 떠나게 만들고, 성내는 사람은 "낯선 신"
에 의해 채워지게 된다고 했습니다.

분노의 결과는 그 누구에게 있어도 정말로 심각
합니다. 억제되지 않은 분노를 발산하는 자는
실제로 그 자리에 자기 영혼의 일부를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매일 매일 내면으로부터 분노가 솟아나 자신의
존재를 점령해 버리지 못하게 할 때 당신은
신성한 사랑의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분노를
일으키지 않고서 자신의 카르마나 심리적 문제들
과의 만남을 헤쳐나갈 수 있을 때 당신은 최종적
만남을 위한 준비가 되어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신비가들이 추구하는 한가지 만남, 즉
당신의 참자아와의 만남입니다.

카발라의 중심 테마는 신입니다. 카발리스트들은 신이 열가지
모습으로 자신을 현현했다고 합니다. 그 열가지 모습을 세피롯이
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열가지로 나타나기 이전은 그야말로 무
입니다. 하지만 그 무(nothing)는 단순한 없음이 아닙니다. 오늘
은 주로 그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드립니다.
"무로부터 열 세피롯이 나왔다. 아홉도 아니고 열하나도
아니고 열이다. 지혜로써 이해하고 이해로써 지혜로와져라.
그것을 시험해보고 그것을 탐색해보라"
- 세페 옛치라 -
태초에 무(nothing)가 있었다.
"신성한 무(Divine Nothing)"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것은 숨겨진 초월적인 신이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창세기의 하느님조차도 나타나지 않았다.
창조 이전의 신을 나타내는 말로 카발리스트들이
쓰는 말은 "아인 소프(Ein Sof)"입니다.
아인소프는 "끝이 없는" 또는 "무한자"라는 의미입니다.
아인소프는 최초 원인입니다. 그것은 궁극의
실상이며 - 현현되지 않은 것이고, 가늠할
수도 묘사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창조는 무형의 아인소프의 숨겨진 깊은
곳으로부터 시작되어 일련의 현현(emanation 발산)으로
전개되었다. 이 드라마의 중심에는 단 하나의 빛이
있었으며, 그 점이 빛을 내고 "거룩한 씨앗"
을 심은 자이니, 그로 인해 빛의 폭발(빅뱅)로
묘사되는 우주의 잉태가 일어났다.

조하르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왕(아인소프)의 의지가 나오기 시작함에 따라
그는 최상의 순수한 빛에 표시들을 새겨넣었다.
가장 은밀한 곳 안에서, 수수께끼의 아인소프,
무형 속의 안개로부터 어둠의 불꽃이 솟아 나와
주위로 고리를 형성하였으니, 그것은 흰빛도 아니고,
검은 빛도 아니고, 붉은 빛도 아니고,
녹색 빛도 아니며, 그 어떠한 색도 아니었다.
재어졌을 때라야 비로소 그것은 빛을 발하는
색을 내었다. 그 불꽃 속 깊은 곳으로부터 샘이
흘러나왔으며 그로부터 아인소프의 신비스런
봉인 속에 숨겨진 색들이 아래로 그려졌다.
그것은 뚫어 헤치고 나갔으나 아직 그것을 둘러싼
에테르를 헤치고 나가지는 않았다. 그것은 그 자신의
헤쳐나가는 힘에 의해 단일의 숨겨진 숭고한 점이
빛을 내기 전까지는 전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점 너머는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것
은 "태초"라고 부르나니 - 그것이 일체의 최초 발설이다.
"태초"는 스스로를 펼쳐서 그 자신을 위한,
자신의 영광과 찬미를 위한 궁전을 마련하였다.
거기에 그것은 세계의 유익을 위한
자손을 낳을 목적으로 '거룩한 씨앗"을 심었다.
씨앗이 들어가자 마자 궁전은 빛으로
가득 채워졌다. 그 빛으로부터 다른 빛들이
쏟아져 나왔으며 불꽃들이 대문들을 통해서
나아가 모든 것에게 생명을 주었다.
16세기의 카발리스트 랍비 이삭 루리아는
다른 창조설을 제시합니다.
다른 카발리스트들이 창조가 확대작용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반면 루리아는
수축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것을 루
리아는 '침첨(tzimtzum)'이라고 부릅니다.
루리아에 의하면 무한자인 아인소프는
자신의 중심점으로 스스로를 수축한 다음,
진공을 창조해내기 위해 점 둘레의 원쪽으로
물러납니다.
아인소프가 수축한 이유는 유한 세계의 창조가 일어
나기 위해서 무한자는 자신의 유한한 창조가 자신과는
별도로 존재할 수 있는 텅 빈 공간을 정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는 겁니다.
진공의 가장 자리로부터 아인소프는
일체의 창조를 착수할 빛
줄기를 내보내었다. 아인 소프의 빛은 열가지
신성한 발산(emanation)으로 현현되었다.
발산된 각각의 것은 특별한 그릇
에 보존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들 그릇 중에 일부는 그
빛을 지탱할 수 없어 결과적으로 깨어져 버렸다.
그 결과 신성한 빛의 분광들과 그릇의 파편들이
흩어져 물질세계를 낳게 되었다.
과학자나 유대 신비가들의 우주론처럼
힌두교의 창조설도 "무"로부터 시작됩니다.
리그베다의 창조의 노래를 보면,
존재하지 않음도 없었고,
존재함도 없었으며,
공기의 영역도 없었고
그 너머의 창공도 없었다.
그 때는 죽음도 없었고
불멸함도 없었으며
밤과 낮을 가르는
아무런 표시도 없었다.
숨도 없어
스스로의 본성으로 숨쉬는
그 하나가 있었나니
그를 떠나 아무 것도 없었다.
암흑이 거기 있었다.
처음에 암흑 속에 숨겨진
그 일체는 무차별적인 혼돈이었다.
그때 존재하던 모든 것은
공허하고 형체가 없었나니,
따스함의 큰 힘에 의해
그 단일함이 탄생했도다.
그리고 태초의 욕구가 일어났으니
그것은 영의 원초적 씨앗이고 맹아였다.
가슴의 생각으로 구하는 성자는
비존재 안에서
존재하는 것의 관계를 발견하였다.
구약 성서 창세기의 시작부분도 한번 봅시다.
조하르는 그 구절들이 아인소프로부터의
발산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가
르칩니다. 창세기를 보면
태초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으셨다.
그 때 땅은 형체가 없었고 공허하였다.
그리고 어둠이 깊은 것의 표면 위에 있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이 물들의 표면 위로 움직였다.
그리고 하느님이 " 빛이 있어라."하니 빛이
있었다. 하느님이 빛을 보매 그것이 좋았더라.
하느님은 어둠으로부터 빛을 갈라놓았다.
그리고 하느님은 빛을 날이라 불렀고
어둠을 밤이라 불렀다.
그리고 저녁과 아침이 오매 첫 날이었다.
어둠으로부터 빛을 가름은 루리아의 수축 개념과
비교될 수 있습니다. 최초에는 어둠, 무(nothing)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빛이
생겨났고, 그것이 창조의 과정을 착수했습니다.
아인소프로 얘기되는 신의 개념은 유대사상에 있어서 카발라
에 이르러 표면적으로 등장한 개념입니다. "아인소프는 토라, 예
언자들, 경전들 또는 랍비의 말 속에 암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봉사의 대가들인 카발리스트들은 그에 대한 작은 힌트를 받았
다."
카발리스트들은 스스로를 봉사의 대가라고 불렀습니다. 그렇게
부른 이유는 나중에 다시 말씀드리겠지만, 자신의 기도나 덕행이
우주의 조화와 균형 회복에 중요하다고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유한한 마음은 무한자를 담을 수 없기 때문에
아인소프는 설명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고
카발리스트들은 말합니다. 그것은 일체 원인의 원인이고,
모든 뿌리의 뿌리이지만... 아무런 흔적도 발견될 수
없고, 어떠한 수단이나 방법을 쓰더라도 생각은
거기에 이를 수 없다고 조하르는 말합니다.
모든 존재의 뿌리에 있는 정의할 수도 없고 한정할
수도 없는 신의 개념은 도교의 '도'나 힌두교의
절대자 브라흐만의 개념과 유사합니다.
아인소프와 마찬가지로 '도'는 뭐라 정의할 수도 없
고, 알 수도 없고, 영원하며, 이름이 없습니다.
"무명은 천지의 근본이다.
도의 성품을 말하자면 모양도 없고,
형체도 없다. 도는 크지만 이름이 없다."
케냐 우피니샤드는 절대자 브라흐만에 대해 이르길,
" 마음이나 눈이나 귀나 말로 그에 관해
그 어떤 것도 얘기해 줄 수 없다.
왜냐하면 눈도 귀도 마음도 그에게 이를 수 없기 때
문이다. 오직 그 만이 그 모든 기관을 통해
행위하는 자이다. 그러나 그의 본성은 그들 중
어느 것에 의해서도 파악될 수 없다."
기독교 신비가는 "지성에 의해 지각되는
일체의 지고한 원인은 지성에 의해 지각된
그 어느 것도 아니다.. . 그는 말도 아니고
관념도 아니고. . . 정의될 수도 없고,
이름붙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다."
아인소프가 알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카발리스트들은 그에 대해 얘기를 많이 합니다.
어떤 이는 그것을 "원초의 의지" 또는
모든 "의지의 의지"라고 부릅니다.
어떤 이는 그것을 "순수한 생
각" 또는 "끝이 없고 한정없는 생각"이라고
말합니다.
아인소프가 미현현되고, 묘사할 수없고,
알 수 없는 것이라면 우리는 다른 형태로
신을 그리고 알아야 합니다. 카발리스트들은
아인소프가 그 자신을 세피롯(단수형은 세피라)이라
하는 열가지 신의 면모로서 드러낸다고 말합니다.
설명할 길 없는 아인소프는 세계 창조를
시작하기에 앞서 그 자신의 수준 또는 단계들을
먼저 창조해야 했다. 여기서 세피롯
이 나온다.
세피롯은 아인소프의 빅뱅으로부터
방사된 구(공)들입니다. 그것들은 신적, 인간적
작용 반작용의 패턴을 이루고 있습니다.
카발리스트들은 아인소프로부터 아래로 뻗어나오는
형태로 그 패턴을 도형화했는데
그것을 '생명 나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또한 사람의 형태로 세피롯을 묘사했는데,
그것을 아담 카드몬이라고
부릅니다.
세피롯: 신성한 현현
신은 왜 세피롯을 창조했는가?
이사야 티쉬비는 말하길 카발리스트들은
"그 자신 존재의 깊은 곳에 고하는 숨겨진
신 아인소프는 그 자신을 드러내고,
그의 숨겨진 권능을 풀어놓고자 한다.
그의 의지는 그의 빛에서 나온 빛줄기의 발산을
통해 스스로를 실현한다.
그 빛줄기들은 잠복상태를 깨트리고 나와
신성한 현현의 세계인 세피롯의 순서대로 배열된다"
세피롯(sephiroth, sefirot)이란 말은
히브리어 '사피르(sappir :사피이어 또는
'번쩍이는 빛'이란 뜻)'에서 나온 말이라고 일부 카
발리스트는 말합니다. 왜냐하면 세피롯이
우리들에 신을 조명해주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다른 카발리스트들은 세피롯이 '말하다
'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사퍼(saper)'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왜냐면 세피롯은 우리들에게
신에 관해 얘기해 주기 때문이라는 겁니
다.
랍비 아리예 카프란은 세피롯의
출처인 사퍼(saper)라는 단어에는 세가지 의미를
기본적으로 함축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첫째로 선포하다 또는 설명하다.
둘째로 기록하다 또는 명하다.
세로 그리다 또는 세다.
카프란은 설명하길,
세피롯의 첫 번째 기능은 신의 위대함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들을 통해서 우리는
신에 대해 명상하고 신에 대해 얘기할 수
있게 된다.
두 번째로 신은 세피롯을 통해 피조물에 대해
자신의 섭리를 표현하고 명령을 내리고 사건들을
기록한다. 이런 맥락에서 세피롯은 신의 책이다.
마지막으로 세피롯은 신의 영광을 그려 그것을
숫자의 유한한 영역으로 가져온다.
신은 무한하고 잠재적으로 기초적 개념의 무
한한 숫자를 다 포괄하지만 세피롯은
그것들을 열로 제한한다.
세피롯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하는 곳은
'세퍼 옛치라(Sefer Yetzirah : "형성의 서"
또는 "창조의 서")라는 책에서인데, 이 책
은 우주론에 관한 가장 오래된 히브리서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수의 카발리스트들은 그 책을 자기들 공부의 기초석으로
여기며, 그 책없이는 카발라의 신비들이 이해될 수 없다고 생각
한다"
전설에 의하면 제사장 멜키지덱이 세퍼 엣치라에
기록된 가르침을 아브라함에게 계시했고,
아브라함은 그 가르침을 기록했거
나 아니면 입으로 아들들에게 전했다고 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의로움의 왕이자 살렘의 왕이며
지극히 높으신 분의 제사장인 멜키지덱은 사람과
우주 그리고 신에 관한 비밀스런 가르침의 지식으로
아브라함을 입문시켰다(비전을 주었다). ...
멜키지덱은 영원토록 살아있는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불린다. . . 천상적인 사람과 지상적인
사람 간의 그 만남으로부터 후대에 카발라라고
알려진 영적인 계통이 나오게 되었다.
세페 옛치라에 나오는 세피롯의 묘사를 보자면,
십은 형언할 수 없는 세피롯의 숫자다. . . .
세피롯의 시작은 끝남이 없고 가이없는 기원을
가지고 있다: 그들 각자는 광대한 거리이다. . . .
유일하신 주 하느님, 신실하신 왕께서는 당신의 거룩
한 자리에서 이 모두를 세세토록 영원히
다스리신다. 그의 용모는 번개 속에서 번쩍이는
것처럼 빛나는 불꽃이며, 볼 수도 없고,
한도 없다... 그들의 끝은 그들의 시작과 같다.
그것들은 지글 지글 타오르는 숯의 표면으로부터
위로 솟아오는 빛나는 불꽃과 같다.
세퍼 옛치라는 세피롯을
'신성의 발산(divine emanation)'이라
고 했고, 조하르는 그것을 신의 속성 또는 신이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대리자로 묘사했습니다.
각각의 세피라는 신을 지각하고
받아들이는 다른 방법들입니다.
18세기의 카발리스트 랍비 모세 루자토는
세피롯을 아이소프의 빛의 강도를 낯추어 주는
'변압기'로 묘사했습니다. 즉 세피롯은
아랫 단계의 창조 세계가 신의 거대한 빛으로
인해 파괴되지 않고 계속 존속할 수 있도록 빛을
낯추어 전달해 준다는 것입니다.


세피롯은 그를 통해 변화와 변형이 일어나는 수단이다.
세피롯은 유한한 우주를 무한한 신과 이어주는 다리이다.
라고 퐁세라는 사람이 말했습니다.

세피롯과 아인소프와 관계에 대해 여러 견해가 있는데,
일부는 세피롯은 아인소프가 일을 하기 위해 만든 수단
또는 도구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세피롯은 아인
소프의 에센스라고 합니다. 그래서 세피롯과 아인소프는
동일한 것이고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런 의견들에 대해 코르도베로는 세피롯이 신의 에센스이
자 동시에 도구라고 가르칩니다.

조하르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신, 아인소프)은 그들(세
피롯)이고, 그들이 그것이다. 불타는 숯의 불꽃처럼 그것
은 나눌 수 없다."

아인 소프와 세피롯의 관계에 대해 조하르는 "그것은 사
방으로 빛을 비치는 등과 같다. 그러나 우리가 가까이 다
가가 그 빛들을 살펴보면 오직 등 자체만이 존재함을 보
게 된다."

루자토는 아인소프와 세피롯에 대해 말하길, "모든 세피
롯은 무한자 그 자신의 빛 말고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분
과 세피롯 간에는 그분이 원인이고 그것들이 결과라는 것
만 빼고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분께서 그들을 옷입히
다'는 표현은 그분이 세피롯들을 채널로 유지하고 그들을
통해 세상을 다스리고 통치하기 위해 세피롯에 영원히 생
기를 불어넣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가 '그분은 셋이고 세분은 하나이다'라고 한다면 카
발리스트들은 '그분은 열이고 열은 하나이다'라고 한다고
13세기의 카발리스트 아브라함 아불라피아는 말했습니다.

어떻게 하나의 아인소프는 열 개의 세피롯이 되었을까?
루자토에 의하면 아인소프는 세피롯을 창조하기 위해 자
신의 무한성을 제한했다고 합니다. 즉 아인소프는 그의
무한하고 헤아릴 수 없는 빛을 감추며 동시에 그 빛을 뻗
혀 내보내서 세피롯을 창조했다고 합니다.

조하르가 묘사한 발산 과정을 보자면, 먼저 아인소프의
신비로부터 아둠의 불꽃이 나옵니다. 어둡다고 한 것은
감춰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불꽃으로부터 "공기" 또는
"에테르적인 오라"라고 번역된는 것(케테르)에 둘러쌓인
샘이 분출됩니다. 그 샘은 그것을 둘러싼 오라(케테르)를
헤치고 나가는 힘에 의해 단일의 숨겨진 점이 빛나게 되
기 전까지느 전혀 알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점이 두 번째 세피롯인 호크마입니다. 케테르가 호크
마를 발산한다음, 호크마는 그 근원인 케테르에 붙어 케
테르에 의해 비춰지길 갈망합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커튼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런 분할은 "호크마의 본질
적 존재가 손상되어 발산 과정이 교란되지 않게 하기 위
해" 세워진 것이라고 합니다.
호크마는 케테르보다 낮은 진동입니다. 그래서 호크마는
베일을 뚫고서 케테르로 다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
나 호크마의 욕구가 너무 커서 그 커튼을 통해 빛줄기가
끌려와 호크마로 하여금 빛의 빛으로 빛나게 만듭니다.

그리고 호크마는 자신을 뻗혀서 궁전을 만드는 데 그것이
세 번째 세피라인 비나입니다. 그리고 호크마의 빛 혹은
씨앗이 비나의 궁전 혹은 자궁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리
하여 '빛의폭발(빅뱅)'로 묘사되는 우주적 잉태가 뒤 따
르게 됩니다.
조하르는 비나를 "쏟구쳐 흘러나가는 강"으로 묘사합니다.
나머지 일곱 세피롯은 "어머니의 자궁 속에 있는 태아처
럼 비나 속의 존재로 나타내 진다. 발산의 과정이 계속되
면서 그들은 탄생의 신비를 통해 일곱 자녀로 발산된다."

이리하여 열 개의 세피롯이 나오는데 이들이 생명 나무를
구성합니다. 이들의 이름을 보면
케테르(Keter : 왕관)
호크마(Hokhmah : 지혜)
비나(Binah : 이해)
헤세드(Hesed : 사랑/자비)
게부라(Gevurah : 정의/심판)
티페렛(Tiferet : 아름다움/연민)
네차(Netzah ; 승리)
호드(Hod : 광휘/장엄)
예소드(Yesod : 기반)
말쿠스(Malkut : 왕국 )

말쿠스는 쉐키나(Shekhinah 신성의 현존)라고도 부릅니
다. 이는 신의 모성적인 측면입니다. 이는 신성의 에너지
를 우리의 세계로 내려보냅니다. 그 에너지가 우리를 유
지시켜주고 양육시켜주는 것입니다. 또한 말쿠스는 세피
롯의 사다리를 통해 아인소프에게로 올라가는 상승길의
관문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생명나무 안에 있는
신의 힘에 접근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대가 얘기하는 이 나무는 무엇인가? 복되신 거룩한 분
의 일체 권능이 마치 나무처럼 층층이 배열되어 있도다.
그리고 물을 주면 나무가 열매를 내듯이. 그곳은 복되신
거룩한 분의 물로 채워질 때 신성의 권능을 발한다.
복되신 거룩한 분의 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지혜이다.
그것은 의로운 영혼들이다." - 바히르-

생명 나무에서 세피롯은 세 개의 원주 또는 기둥으로 집
합을 이룹니다. 나무의 오른 쪽 기둥은 호크마, 헤세드,
네차로 이루어집니다. 이 기둥 속의 세피롯은 남성적 양
성적 극성을 가집니다. 왼쪽 기등은 비나, 게부라, 호드
로 이루어집니다. 이 기둥의 세피롯은 여성적, 음성적 극
성를 가집니다. 중앙의 기둥은 꼭대기에 케테르, 중앙에
티페렛, 그 밑에 예소드, 그리고 맨 밑에는 말쿠스로 이루
어져 있습니다.

세 기둥은 각기 나름대로의 특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
른쪽 기둥을 '자비(Mercy)의 기둥'이라고 하고, 왼쪽의 기
둥을 '심판(Judgement)의 기둥 또는 엄격함(Severity)의
기둥'이라고 합니다. 이 두기등은 우주의 상극적인 힘들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오른쪽 기둥은 확대되는 힘을 가지고
있고, 왼쪽 기둥은 제한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극단은 연민(Compassion)의 특성에 의해 균형을
이루게 되는데, 바로 중앙의 기둥이 그런 힘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앙의 기둥을 연민의 기둥 또는 평형
의 기둥이라고 부릅니다. 연민으로써 자비와 심판의 양
극단의 균형을 이루고 조화시키는 것이 바로 우리 세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확대와 제한의 상극적이고도 보완적인 힘들은 평형을 이
루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발산자로부터 나온 빛 중에
자비와 심판, 그리고 연민을 담지않고 잇는 빛은 없다. 이
들 빛은 깨별적으로 분리되서 나오는 법이 없다. 대신 세
기둥으로부터 이미 서로 엉킨 채로 나온다. 세계의 다스
림을 감독하는 것은 심판, 자바, 연민의 원리의 이러한 융
합인 것이다." 모세 루자토는 말했습니다.

*영어로 Mercy와 Compassion은 대개 둘 다 자비로 번역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둘을 구분하기 위해
Compassion을 연민으로 번역합니다만 올바른 번역이라고
는 할 수 없습니다.

Mercy는 어머니가 자녀에 대해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푸
는 것과 같은특질입니다. Compassion은 선생이 제자에
게 주는 사랑과 같은 특질입니다. 그건 무조건적이지 않
습니다.

대사들 중에 관세음보살은 Mercy의 대사이고 예수 그리
스도나 로드 마이트레야는 Compassion의 대사입니다. 관
음이 신성한 어머니의 화신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나 로드
마이트레야는 그리스도의 화신입니다.

신의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무조건적이어야만 한다고 주
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카발라의 가르침은 무조건적인
사랑과 조건적인 사랑이 다 있고 그것이 서로 균형을 이
루어야함을 알 수 있습니다.

무조건적인 사랑만을 주장하는 이유는 아무리 악을 행해
도 용납될 수 있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 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죠. 악을 행한 자는 그 악업에 의해 스
스로 속박당하게 됩니다. 이런 속박하는 힘이 바로 심판
의 기둥이 구현하고 있는 힘입니다.

생명 나무 상의 세피롯을 구분하는 또 다른 방법은 그것
들을 세 개의 삼개조(triad)로 나누는 것입니다. 첫 번째
삼각형은 케테르, 호크마, 비나로 이루어지며, 지성의 영
역을 나타냅니다.

처음의 삼개조는 "세계 이전의 사고 작용의 역동적 기능
을 상징한다. 따라서 그것은 원형적 모델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신의 사고 작용을 나타낸다."라고 챨스 퐁세라는
사람은 말했습니다.

신에게도 사고 작용이 있으며, 그는 바로 지금 그대를 통
해 사고한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
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도 있던 이 마음을 품어라(그
마음이 그대 안에 있게 하라.)" 달리 말하면, 케테르, 호크
마, 비나인 그 마음이 그대를 통해 생각하시고, 그대 안에
서 그분의 생각의 대상을 깨닫는 신의 마음이 되게 하라.

케테르(왕관)는 생명 나무의 최상위의 세피롯입니다. 케테
르와 아인소프는 영원히 공존하며 거의 동일한 것입니다.
아인소프처럼 케테를는 "무(Nothing)"로 인식되면서 동시
에 "의지(Will)"로 인식됩니다. 조하르에서는 케테르 안에
있는 "무한한 의지"의 발현을 "거룩하신 옛 분(the Holy
Ancient one)"이라고 부릅니다.

케테르는 아인소프와 가깝기 땜에 알 수가 없다고도 합니
다. 조하르는 케테르를 "알 수도 없고 파악될 수도 없으
며, 위 세계의 가장 난해한 머리"라고 했습니다.

케테르는 모든 것을 그 안에 담고 있고, 모든 것의 총합
이며, 아무런 특수성(개체성)도 갖고 있지 않은 보편성이
다. -조하르-

모든 것이 그 안에 있다.
왜냐하면 세피롯의 내적인 힘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의 구조가 케테르 안에 잇다.
이 세피라 안에는 앞도 없고, 뒤도 없고,
왼쪽도 없고, 오른 쪽도 없다.
그것은 "무관계의 단일체(Indifferent Unity)"라고 불린다.
- 13세기의 찬가 -

무관계의 단일체는 불교의 "미분화된 여여함
(Undifferentiated Suchness)" 같은 겁니다. 불교에서 여여
라는 용어는 설명할 길 없는 실상을 전하기 위해 사용됩
니다. 이 실상이 절대자이며 - 궁극자이고, 걸림이 없는
것이고(unconditioned), 일체 만물의 참된 본성입니다.

호크마(Hokhmah : 지혜)

호크마는 두 번째 세피롯입니다. 호크마는 생명 나무의
오른 쪽 기둥인 자비의 기둥에서 가장 상단에 잇는 세피
라입니다. 호크마는 창조의 최초점 또는 원점입니다. 그것
은 아인소프와 케테르의 의지 작용을 통해 발현된 것입니
다.

호크마가 두 번째 세피라임에도 불구하고 카발리스트들은
호크마를 "태초, 시작"이라고 부릅니다. 왜냐면 "케테르는
영원하고 시작이 없지만 호크마 케테르의 밖으로 나타난
신성의 첫 빛줄기기 때문이다." 조하르는 호크마는 "신성
한 생각"이며 케테르와 마찬가지로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생각은 모든 것의 시작이다. 그 안에서 그것은 생각이고,
그것은 내적인 것이고, 비밀하며 알수 없다."

호크마는 창조의 청사진과 원형들을 담고 있습니다. 조하
르를 인용해보면, "비밀 중의 비밀한 이(아인 소프 혹은
케테르)가 자신을 드러내고자 했을 때, 그는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하나의 점(호크마)를 만들었으니, 그것이 생각
이 되었다. 그는 거기서 모든 것을 디자인했다. 그는 거기
서 모든 도안을 했다.

장차 존재할 모든 것이 하느님 안에서 나온 무한하게
작은 한 점 안에 이미 존재했습니다. 호크마는 빅뱅이라
는 빛의 대폭발 직전의 한 점입니다.

호크마는 남성적 생식 활동의 원형이라서 종종 압바
(Abba), 즉 아버지로 불립니다. 따라서 호크마(지혜)는 일
체 창조의 아버지입니다.

제벤 시몬 할레비라는 사람의 말을 빌리면 "호크마는 신
의 마음과 인간의 마음 안에서 "내적 지성"으로 작용한다.
호크마는 번득이는 천재성, 영감 또는 계시로 체험된다. ..
. .이 곳으로부터 가장 심오한 사상과 고찰이 나온다. . .
독창성은 그 표시이다."

비나(Binah 이해)

비나는 첫 삼개조의 세 번째입니다. 비나는 생명 나무의
왼쪽 기둥인 심판 또는 엄격함의 기둥의 최상단에 있는
세피라입니다. 이 세피라는 호크마의 팽창하는 본성을 견
제합니다.

비나는 이해, 지성, 통찰력, 또는 분별력으로 번역되는
말이라고 합니다. 호크마가 남성적이고 활동적인 반면 비
나는 여성적이고 수동적입니다. 호크마가 압바, 아버지라
고 불리는 것처럼 비나는 임마(Imma), 어머니라고 불립니
다. 그녀는 신성한 어머니 또는 최상의 어머니입니다.

호크마와 비나는 오리지날 양부모입니다. 그들 둘이서 나
머지 일곱 세피롯을 창조했고, 그 다음으로 생명이 있고
없는 모든 피조물들을 창조했습니다. 비나는 일체의 피
조물이 나온 큰 어머니의 자궁이면서 또한 마지막 때에
모든 것이 되돌아갈 사랑스러운 분이라고 합니다.

케테르, 호크마, 그리고 비나의 첫 삼개조는 사람의 몸의
머리에 해당하고 또한 히브리 문자 쉰(shin)에 해당합니
다. 그 문자는 왕관처럼 생겼습니다. 영어의 E 자를 왼쪽
으로 90도 기울여 놓은 것과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쉰이
란 문제는 불의 요소하고 연관되어 있다고 하는군요.

세퍼 옛치라는 천국이 불로부터 창조되었다고 합니다. 케
테르 호크마, 비나의 첫 삼개조는 두 번째 삼개조를 낳습
니다.

두 번째 삼개조는 헤세드, 게부라, 티페렛으로 이루어지
면, 신의 윤리적 완전함과 도덕적 힘을 나타냅니다. 첫 번
째 삼개조가 지성의 영역을 나타내는 것처럼, 두 번째 삼
개조는 영혼의 영역을 나타냅니다.

헤세드(Hesed : 사랑)

헤세드는 네 번째 세피라로, 헤세드라는 히브리어는 사랑,
자비, 은총, 자애로움을 의미합니다. 헤세드는 생명 나무
의 오른쪽 기둥인 자비의 기둥의 가운데 위치합니다. 이
세피라는 때로 헤세드 대신 게둘라(Gedullah 위대함)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다섯 번째 세피라는 게부라(Gevurah)인데, 의미는 "권능",
힘, 엄격함입니다. 종종 딘(Din)이라고도 불리는데 의미는
심판 또는 정의입니다. 게부라는 생명 나무의 왼쪽 기둥
인 심판의 기둥의 가운데 위치합니다. 헤세드와 게부라는
감정의 수위를 지배한다고 합니다.

헤세드와 게부라는 상호 보완적인 짝으로 작용합니다. 그
들은 각각 사랑/자비의 극단과 정의/심판의 극단을 나타
냅니다. 이 짝에서 카발라의 우주의 견제와 균형 체계를
볼 수 있습니다.

헤세드와 게부라는 신적인 인격의 두 측면으로 제한없이
흘러넘치는 사랑과 엄격한 침판, 은총과 제한이다. . .
심판이 사랑에 의해 부드러워지지 않으면 딘은 호되게 째
찍질하여 생명을 파괴하기에 이른다."

헤세드는 아인소프의 에센스를 무제한하게 발산하고 확대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게부라는 반대로 헤세드의 화대
를 저지하여 신의 선하심을 제한합니다. 카발라의 견제와
균형 체계를 퐁세는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신의 힘(Power)인 게부라는 정의와 통제의 세피라이며
벌을 내릴 수 있다. 그 특성은 여성이며, 자비의 풍요함을
제한한다. 마찬가지로 힘(Power)의 가혹함은 자비에 의해
완화된다. 그렇게 둘은 조화 상태로 존재한다.

게부라는 신의지의 축소의 전형이다. 자비는 생명을 주는
힘이고, 그 작용에 있어서 늘 생산적이기 때문에 아무런
제한도 받지 않고 그 자체를 표현하도록 방치하는 건 지
혜롭지 못한 일일 것이다. 그런 이유로 게부라(심판, 권력,
정의)가 창조되야할 것들을 조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비
의 자애로움과 창조성이 없다면 엄격한 심판관의 역할을
하는 정의는 대상을 비존재의 상태로까지 축소시킬 것이
다.( 심판은 자비를 완화시키고, 자비는 심판을 완화시킨
다)
네 번째 세피라(헤세드)의 위험성은 과도하게 확장하려는
경향에 있다. 다섯 번째 세피라(게부라)는 축소시키려는
경향에 그 위험성이 있다. 둘은 함께 중간점을 만들어 낸
다. 이들 두 힘의 혼인으로부터 아름다움(티페렛)이 탄생
된다. 그것은 조화롭게 균형을 이룬 모든 것을 나타낸다.

이는 부모가 아이를 대하는 일과 비견될 수 있는데, 아이
들에게 너무 엄하면 아이들이 파괴될 수 있습니다. 정신
적, 정서적으로 심하면 신체적으로 파괴될 수 있습니다.
엄한 부모는 아이를 왜소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반대로
너무 사랑을 주기만 해도 아이를 버리게 됩니다.



여섯 번째 세피라는 티페렛으로 "아름다움" 또는 "장식"
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세피라의 위치는 중심의 기둥인
연민(Compassion)의기둥 중앙에 위치하기 때문에 생명
나무의 중앙이 됩니다. 중간의 기둥의 이름이 연민의 기
둥인 것은 바로 이 티페렛의 다른 이름인 라하밈
(Rahamim 연민이란 뜻)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기 때문입
니다.

티페렛은 자비와 심판의 양극단를 조화 속으로 가져가는
중재자입니다. 이 세피라는 온전함(wholeness)과 균형
을 나타냅니다.
티페렛은 "생명 나무의 균형점이고 완벽한 대칭적 중심이
다. 신성의 나무에 있어서 테페렛은 모든 심장의 심장이
고, 인간의 심령에 있어서 티페렛은 그 개인의 핵심인 자
아이다."라고 할레비는 말합니다.

카발라에서 티페렛은 "천국" "태양" "왕"이라고 불리며,
"복되신 거룩한 분(the Blessed Holy one)"이라고도 불립
니다. 티페렛은 호크마와 비나의 아들이라고도 합니다.

조하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복되신 거룩한 분에게 한
아들이 있으니, 그는 세계의 이끝에서 다른 끝까지 빛난
다. 그는 크고도 억센 나무로, 그 머리는 천국에 이르고,
그 뿌리는 거룩한 땅에 묻혀 있다."

"그 분의 아들의 이름이 무엇이뇨? 이스라엘이 그의 이름
이다. 이렇게 기록된 바와 같이, "나의 첫 아들, 이스라엘"
모든 믿음의 열쇠들은 이스라엘로부터 매달려 나온다. . .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에게 왕관을 쒀워주고, 헤아일 수
없는 왕관으로 그를 축복했다.. . .그에게 심판과 연면의
왕관이 주어졌으니. 심판을 받을 자에게는 심판을, 자비를
받을 자에게는 자비를 주도다. 위와 아래의 모든 축복이
이 아들의 것이로다.

이 아들은 지상의 이스라엘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의 신
성한 원형인 티페렛을 말합니다. 조하르는 이 티페렛과
하나가 된 사람들을 얘기하는데, 모세에 대해 말하길, "복
되신 거룩한 분(티페렛)은 그를 결코 떠난 적이 업다. 쉐
키나(말쿠스의 다른 이름)가 그와 함께항상 있었다."

이 말은 "모세가 육신을 가진 상태로 티페렛까지 올라갔
고" 따라서 "모세와 쉐키나(티페렛의 신성한 배필)는 실
질적으로 혼인으로 결합된 상태였다"고 해석된다고 합니
다.

조하르는 야곱에 대해서도 말하길, "야곱은 구원되어 완
전해져서 완전한 구로 높여져 이스라엘이라 불리게 되었
다. 그는 높은 단계와 전적인 완전함을 성취했다! 그는 "
널판 가운데 있는 중간 띠는 이 끝에서 저 끝에 미치게
하라(출애급기 26:28)"고 기록된 바의 중간 기둥이 되었
다."

'중간 띠'는 '오른 쪽과 왼쪽의 균형을 맞추고, 상부와 하
부 세피롯을 결합시키는 티페렛이다. 야곱은 이제 중심을
잡고, 온전해져서 티페렛 이스라엘(이스라엘의 아름다움)
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티페렛은 신약성서의 그리스도와 너무도 흡사합니다. 그
러나 조하르는 예수를 거명하지는 않지만 유대인은 예수
가 필요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는데, 그것은 조하르가 유
대인은 모두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입장을 취했기 때문
입니다. 하지만 카발라는 예수의 역할과 "하느님의 아들"
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요한이 "세상에 나온 모든 이를 비춘 참된 빛"이라고 썼
을 때 그는 티페렛 즉 아들을 묘사했던 것인데, 그 아들
이 예수 안에서 육신으로 살아있다고 요한은 믿었습니다.
그 빛, 아들, 티페렛은 또한 말씀, 보편적 그리스도로 알
려져 있습니다. 그 보편적 자아는 우리들 각자의 상부자
아로 개별화되어 있습니다. 그 상부 자아는 우리의 내면
적 그리스도 또는 매면의 메시아입니다.

요한 복음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와 함께 거하더
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하느님의 아들, 티페렛, 보편적
그리스도가 예수의 인간적 틀 안에 육신으로 거하는 것
을 얘기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열 세피롯의 열가지 권능
을 마스터했을 때 우리들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거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는 여러 환생과 비전을 거치면 육신인 상태로 티페렛
의 상태를 성취했습니다. 또한 나머지 아홉 세피롯의 원
리들을 다 구현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안에 하느님
의 충만함이 육신으로 거한다"고 썼습니다.

티페렛과 나머지 아홉 세피롯을 완전히 내적으로 마스터
한 이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또한 메시
이라고 불립니다. 메시아는 히브리어 Mashiah에서 나온
건데 "기름부음받은 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는 같은
의미의 그리스어 Christos에서 나온 말입니다. 메시아, 그
리스도는 열 세피롯의 열가지 빛으로 '기름부음받은 이
"을 말합니다. 그때 그는 바로 '생명 나무" 자체인 것입니
다.

그리스도, 메시아, 티페렛의 화신은 하나만 있는 것은 아
닙니다. 티페렛의 화신이 되는 것이 모든 종교의 신비가
들의 목표입니다. 그들이 그런 말로 표현을 하건 안하건
관계없이. 왜냐면 모든 신비가들은 상부 자아와의 직접적
인체험과 합일을 추구하니까요.

예수를 비롯 여러 하느님의 아들들은 세피롯을 완전히 실
현한 것이고 우리는 그 목표를 향해 아직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복된 자는 악인의 꾀를 좇
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
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시편의 노래처럼 우리는 아인소프의 시냇물로 양육되는
생명 나무의 형상대로 지어졌습니다. 우리간 생명 나무에
나타난 열 개의 덕을 소화하고 티페렛과 합쳐질 때 우리
는 생명 나무의 열 개의 과일을 맺을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 나무의 잎은 마르지 않을 것이고 우리가 하는 일은
다 번성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심장의 심장인 티페
렛, 아들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 나라의 신비에 대한 가르침에서 예수는 생명 나무와
모든 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씨앗을 비유합니다. "하늘
나라는 사람이 땅에 심은 무화과 나무의 씨와 같으니, 그
것은 가장 작은 씨앗이지만, 그것이 자라면 어떠한 초목
보다도 큰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가 와 그 가지에 깃들
이게 된다."

여기서 가지에 깃드는 새는 티페렛의 가슴으로 날아올라
하느님의 아들들 사이에 피난처를 구하는 영혼들을 말합
니다.

많은 하느님의 아들들이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들
사이에는 특별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피시안
시대의 원형적인 그리스도, 아바타르이기 때문입니다. 그
역할 안에서 예수는 지난 2000여년 간 세상의 죄, 부정적
카르마를 져왔습니다. 즉 그는 우리의 비행의 완전한 결
과로부터 우리를 지켜준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 카르마를 갚아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 죄의 짐을 대신 짐으로써 예수는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여 스스로의 짐을 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입
니다. 예수 덕분에 우리의 빚은 2000여년 간 연장되어 왓
지만, 지금은 만기가 도래했습니다. 오늘날 피시안 시대에
서 아쿠아리안 시대로 넘어가면서 예수는 하나씩 하나씩
우리 자신의 짐을 져야할 책임을 각자에게 넘겨주고 있습
니다. 바울의 말대로 "모든 사람은 자기의 짐을 져야 합
니다."

루리아의 카발라에서도 마찬가지로 메시아는 우리의 모든
행동의 결과로부터 우리와 세상을 구해주는 구세주의 역
할을 맡고 있지 않습니다. 카발리스트들은 개인과 세계의
구원은 근본족으로 메시아의 일이 아니라고 이해했습니
다. 우리들 각자에게 보속의 책임이 있으며, 우리의 모든
행동과 기도가 그 과정을 앞당기기도 하고 방해하기도 한
다는 것입니다.

거숌 숄렘은 이렇게 말합니다,
"메시아는 모든 만물의 유배 상태로부터의 메시아적인 보
속에 대한 상징이자 보증이 된다.. . . 보속( Redemption :
되찾음,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은 보 속의 특수한 기능이
위임된 인물로서 메시아의 역할이 아니라 그대의 행위. .
.나의 행위이다. . . .더이상 보속은 역사 자체가 종말에
이르는 재앙으로 간주되지 않고, 우리들 모두가 참여하는
과정의 논리적 결과로 여겨진다. 루리아에 있어서 메시아
의 도래는 우리 자신이 작성한 문서 위에 더해지는 서명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피시언 시대를 위한 티페렛의 대표자로서 예수는 살아있
는 모범이고 그리스도성의 길을 보여주는 안내자입니다.
그는 상부자아 그리고 티페렛과 어떻게 합일을 이루어내
는 지를 입증해보이기 온 것이고, 우리도 그를 따라할 수
있게 하고자 온 것입니다.

카발라를 가지고 예수의 가르침을 조명해보면 그동안 기
독교나 유대인들에 의해 그릇 해석되어온 성서 구절들의
의미를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 아
버지께로 갈 자는 아무도 없느니라." 여기서 나는 예수의
인간적 자아가 아니라 하느님의 보편적인 아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보편적 그리스도, 티페렛, 중재
자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수 없다. 여기
서 보편적 그리스도는 단 하나가 아닌 다수의 하느님 아
들들 안에 인격화(personify)되어 있으며, 그가 바로 우리
영혼이 신과의 합일을 달성할 수 있도록 우리를 비전의
길로 데려가는 이 입니다.

또 다른 말을 보자면,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
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
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
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
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여기서 예수와 다른 모든 하느님의 아들들 안에 화현된
보편적 그리스도가 바로 포도나무이자, 생명 나무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가지입니다. 가지가 나무로부터 영
양을 공급받아 유지되듯이 우리는 생명 나무를 이루는 세
피롯에 의존합니다. 세피롯은 아인소프의 에센스를 우리
에게 전합니다. 보편적 그리스도인 티페렛 안에서 살고
움직이는 제자는 세피롯의 풍성한 열매를 낼 것이기 때문
에 풍요로운 영적 삶을 누리겠지만, 티페렛과 다른 세피
롯을 떠나선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없이 너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말을 달리
해석하면, 하느님의 아들(티페렛)의 연민으로 자비(헤세
드)와 심판(게부라)의 특질들을 조화시키지 않는다면 우
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즉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이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티페렛을 통해서 오는 온전함과 균
형이 필요하다는 애깁니다.

부처님의 중도가 바로 티페렛의 길입니다. 팔정도가 바로
티페렛의 길입니다.

정통 기독교는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아무도
이를 수 없다'는 말이나 '하느님의 독생자'에 대한 개념을
잘못 해석하여 예수만이 하느님의 아들이고 나머지 인간
은 예수와는 전적으로 다른 일개 피조물로 봅니다. 카발
라나 힌두교, 불교의 가르침을 토대로 본다면 그런 주장
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 금새 드러날 것입니다. 그
러나 예수만이 하느님의 아들이고 나머지는 전부 죄인이
라는 신학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
다.

나그 함마디에서 발견된 영지주의 문서 중에 하나인 '섹
스투스의 선고"라는 곳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선한 사
람은 하느님의 선한 작품이다. . . 하느님에게 합당한 사
람은 사람들 가운데 있는 하느님이다. 그리고 그는 하느
님의 아들이다."

야고보의 비밀서에서 예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에게
진실로 말하노니, 나의 초대로 하늘 나라에 들어갈 자는
아무도 없고 오직 너희 자신이 충만해졌을 때만 들어갈
것이다....나보다 더 훌륭해져라. 너희 자신이 성령의 아들
이 되라!"

또다른 영지주의 문서인 빌립보의 복음서는 예수를 따르
는 자는 "더 이상 기독교인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된" 사
람이라고 말합니다. 거기에 나오길, "그대가 영을 보았으
며, 영이 될 것이고, 그대가 그리스도를 보았으면, 그리스
도가 될 것이며, 그대가 성부를 보았으면, 그대는 성부가
될 것이다."

도마 복음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네가 마셨기 때문에,
너는 내가 나누어 준 비등하는 샘에 취하게 되었다. . .
내 잎으로부터 나온 것을 마신 자는 누구나 나처럼 될 것
이다. 나 자신은 그가 될 것이다. 그리고 숨겨진 것들이
그에게 드러날 것이다."

예수가 말하는 비등하는 샘은 이인소프와 보편적 그리스
도, 티페렛의 샘입니다. 카발라에서 세피롯은 아인소프의
에센스를 전달하는 그릇입니다. 티페렛은 상위 세피롯을
통해서 내려오는 아인소프의 에센스를 합당한 자에게 나
누어줍니다. 사랑과 감사의 마음으로 그 영원한 생명의
물을 마시고 소화하는 자는 "나, 티페렛과 같이 될 것이
며, 티페렛의 화신이 내가 그대가 될 것이다"는 약속입니
다.

셰계 종교의 신비주의들은 유일한 근원의 새암으로부터
마시는 자는 그 근원 자체가 되리라는 보편적인 진리를
이구동성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힌두교의 서사시 마하바라타에서 성자 사나트 쿠마라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절대자 브라흐만은 모든 피조물 안
에 깨어있다. 그를 아는 자는 일체의 피조물의 가슴 속에
거하는 만유의 아버지를 안다. . . 브라흐만을 아는 자는
브라흐만과 똑같다."

중국의 주희는 말하길, "도의 실상을 알려면, 자신의 본성
안에서 그것을 찾아야 한다. 각 사람은 그 안에 의의 원
리가 있으니, 그것을 도라고 부른다."

사이초는 말하길, "오 부처님, 제가 당신께 절할 때, 또
다른 부처가 부처께 절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내게 알
게 하신 이는 바로 당신, 부처님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세 번째 삼개조 : 네차, 호드, 예소드

세 번째 삼개조는 네차(Netzah), 호드(Hod), 예소드
(Yesod)로 이루어집니다. 첫 번째 삼개조가 지성의 여역
을 나태고, 두 번째 삼개조가 영혼의 영역을 나타내듯이,
세 번째 삼개조는 자연의 영역을 나타냅니다. 네차. 호드,
예소드는 세계에 대한 지배와 인도를 나타냅니다.

네차는 일곱 번째 세피라이며, 생명 나무의 오른쪽 기둥
인 자비의 기둥의 맨 아래에 놓여있습니다. 네차는 승리
라는 의미이며, 때로는 "인내"를 뜻하기도 합니다.

호드는 여덟 번째 세피라로 생명나무의 왼쪽 기둥인 심판
의 기둥의 맨 아래에 위치합니다. 호드는 "광휘" 또는 "장
엄"이란 뜻입니다.

네차는 헤세드(사랑/자비)의 발현이고, 호드는 게부라(심
판/정의)의 발현입니다. 이 둘은 신이 세계를 다스리는 도
구일 뿐만 아니라 예언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Halevi는
네차와 호드가 행위의 작동적, 도구적 수준을 나태낸다고
해석합니다. 그는 말하길 인간의 몸에서 네차는 자동 체
계를 비롯한 불수의적인 작용을 지배하고 호드는 수의 작
용을 지배한다고 합니다.

아홉번째 세피라인 예소드는 "기초(Foundation)"이라는
의미로 중간의 기둥인 연민의 기둥에 속하며, 티페렛과
말쿠스/ 아들과 어머니 사이에 위치합니다. 어떤 카발리
스트는 그것을 예소드 올람(Yesod Olam), "세계의 기초"
이라고 부릅니다.

Matt는 "예소드는 우주의 생식적인 생명력을 나타낸다.
그것은 또한 자디크(Zaddiq 의로우신 이)라고도 불린다.
'의로운 자는 세상의 기초이다'는 잠언의 말은 그에게 해
당되는 것이다.. 예소드는 우주의 기둥이다. 그 위의 세
피롯의 빛과 힘은 그를 통해서 마지막 세피라인 말쿠스에
게도 전달된다."


말쿠스/쉐키나 - 신의 여성적 측면

열번째 세피라는 말쿠스(Malkhut)입니다. 말쿠스는 왕국
(Kingdom)이란 의미입니다. 말쿠스는 물질 우주르르나타
내며, 영적 힘과 물리적 힘들이 만나는 지점입니다. 학자
숄렘은 말쿠스와 관련된 왕국(kingdom)이란 단어가 "세계
속에서의 신의 다스림(God's dominion) 혹은 힘(power)"
을 지칭한다고 합니다. 사람과 관련해서 말쿠스는 육체에
해당됩니다. 생명 나무 상에서 말쿠스는 연민의 기둥의
기저부이고 생명나무 전체의 기저부에 위치합니다.

"신은 말쿠스에서의 현현을 통해 자신의 완성된 개별화
(individuation)에 도달한다. 거기서 신은 '나(I)'라고 불린
다. 이러한 개념은 발현의 과정을 통해서 '무(아인소프/케
테르)가 '나(인격성 : personhood)'로 변모했다'는 말로 요
약된다."

무(無)를 나타내는 히브리어 '아인(ayin)'을 이루고 있는
세 개의 히브리 문자를 다시 배열하면 '나'를 나타내는 히
브리어 '아니(ani)'가 된다고 합니다. 이는 아인(무)이 세
피롯을 통해 한 단계 한 단계 펼쳐져서 결국 말쿠스의 아
니, 즉 신성한 에고, 나(I)가 되었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말쿠스는 두 세계의 연결부입니다. 상부 세계에서 볼 때
말쿠스는 생명 나무의 가장 아래에 있는 세피라입니다.
우리의 세계인 하부 세계에서 볼 때 그녀는 가장 높은 지
점입니다. 따라서 말쿠스는 세피롯의 신성한 힘들이 이
세계 속으로 흘러드는 통로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지상
에 있는 우리들이 신에게 이르기 위해 거치는 문의 역할
도 합니다. 그녀는 또한 가장 접근하기 쉬운 신의 존재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말쿠스는 흔히 쉐키나(Shekhinah : Divine Presence 신성
의 현존하심)로 불립니다. 전통적 유대 사상에서 쉐키나는
이 셰계 안에 계신 신의 현존이고 그 활동입니다. 카발라
는 여기에 중요하고도 새로운 차원을 더합니다. 즉 쉐키
나는 신의 여성적 측면이 됩니다. 학자 숄렘은 이렇게
말합니다.

"신의 여성적인 요소의 발견이야말로 카발리스트들이 취
한 가장 중요한 진전 중에 하나이다. 엄격한 랍비적, 비-
카발리스트적인 유대인들로부터 자주 극단적인 우려를 사
온 .. 창조의 신적인 안내자로서 쉐키나의 여성적 원리에
대한 이러한 신화적 개념은 유대 민중들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그것은 유대 사상 안에 여전히 잠재해있
는 원초적인 종교적 충동 중에 하나를 카발리스트들이 벗
겨내었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하부 세계의 가장 높은 점이자 시작 점으로써 쉐키나는
세계의 어머니이자 그 지배자로 묘사됩니다. 그녀는 특히
이스라엘의 자비로운 어머니입니다. 그녀는 우리 세계를
낳고 유지시켜 줍니다. 그녀는 상과 벌을 내립니다. "창조
는 쉐키나의 작품이다. 그녀는 어머니가 자녀를 돌보듯이
피조물을 돌보신다."

비나와 말쿠스 둘다 신성한 어머니의 역할을 하지만, 비
나는 "상부의 어머니" 또는 "상부의 쉐키나"이고 말쿠스
는 "하부의 어머니" 또는 "하부의 쉐키나"입니다.

카발라에서 쉐키나는 영혼을 상징하고, 이스라엘의 공동
체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의공동체는 신의 모든
아들과 딸들의 신비적 몸을 말합니다. 말쿠스/쉐키나는
호크마와 비나의 딸입니다. 또한 말쿠스/쉐키나는 티페렛/
왕의 신부이자 배필입니다.

호크마와 비나의 남성적 여성적 세피롯이 짝을 이루듯이
티페렛과 쉐키나는 짝을 이룹니다. 그러나 두 짝 간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호크마와 비나는 중단됨이 없는
결합 상태에 있는 반면 티페렛과 쉐키나는 그렇지 못합니
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 떨어져 있습니다. 이스
라엘의 죄는 쉐키나로 하여금 그녀의 자녀들과 함께 유배
를 떠나게 했습니다.

전통적 유대 사상도 유배에 대해 언급을 합니다만, 신의
여성적 측면으로서 쉐키나에 대한 카발라의 해석은 그 유
대 개념에 독특성을 부여합니다. 예를 들어 탈무드는 이
스라엘의 자녀들이 유배된 곳이면 어디든지 쉐키나가 따
라갈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학자 숄렘은 이를 가르켜 말
하길 " 탈무드에서 그것은 신의 현존하심이 유배된 이스
라엘과 항상 함께 하리라는 것을 의미할 뿐이지만, 카발
라에서는 신 자신의 일부분이 신으로부터 유배된 것을
의미한다"

조하르는 그것을 다음같은 말로 그렸습니다. "그것은 마
치 아들에게 화가난 왕과도 같다. 왕은 벌로 아들에게 그
에게서 떠나 머나먼 땅으로 가라고 명했다. 왕비가 이를
듣고서 말하길, "나의 아들이 머나먼 땅으로 가버리고, 왕
은 그를 궁궐에서 추방했으나 나는 그를 버리지 않으리
라. 우리 둘다 왕궁으로 되돌아 오거나 아니면 둘이 함께
다른 곳에서 살리라."'

신은 추방된 백성들에게 그가 그들을 버리지 않으리라는
보증으로 쉐키나를 그들에게 버냈다고 조하르는 말합니
다. 왜냐하면 신은 자기의 연인을 떠날 수가 없기 때문입
니다. 조하르는 쉐키나에 대한 신의 헌신을 "가죽 일을
하는 사람들의 거리에 사는 여인을 사랑하게 된 남자"에
비유합니다. 그녀가 거기에 없었더라면 그는 결코 그곳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사랑하는
연인이 그곳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거리는 향을 파는 사
람들의 거리처럼 되어서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향기를 발
견할 수 있는 곳이 된 것입니다.

카발라는 티페렛과 쉐키나의 결합 상태의 교란을 우주적
대 재앙으로 묘사합니다. 왜냐면 그들의 이별은 신성한
힘들이 이 세계로 흘러드는 것을 멈추게 했기 때문입니
다. 말쿠스는 아인소프로부터 흘러오는 신성한 힘이 이
세계로 전달되는 마지막 세피라인데, 추방된 이후로 "창
조 세계로 전달해야할 상부의 힘들과의 항상적인 결합 상
태로부터" 단절되게 되었습니다.

조하르는 어러한 우주적 불균형의 결과를 이렇게 묘사합
니다. 쉐키나가 유배지로 갈 때, "모두다 울며 비탄과 애
도의 노래를 지었다. .. . 그녀가 그 전 상태와 다른 변화
를 겪은 것처럼 그녀의 남편(티페렛)도 그랬다. 그의 빛은
더 이상 빛나지 않았다. . ..그 날 이후로 성전은 파괴되
었고, 천국들은 본래의 빛으로 빛나지 않았다. 문제의 비
밀은 축복은 남자와 여자가 함께 있는 그곳에만 거한다는
것이다."

신의 여성적 측면의 유배와 더불어 천국의 수문들은 글자
그대로 닫혀버렸습니다. 세피롯으로부터 오는 아주 작은
신성한 에너지의 흐름만이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 새어나
올 수 있었습니다.

13세기의 카발리스트인 랍비 기카틸라는 티페렛과 말쿠스
의 이별로 인해 야기된 재앙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창조의 시작 초기에 쉐키나의 에센스가 하부 세계에 있었
다. . . . 그녀가 아래에 잇었기 때문에 하늘과 땅은 결합
되어 있었고, 서로를 완전케하며, 서로를 채우고 있었다.
수로와 샘들은 위로부터 아래로의 흐름을 이루며 완벽하
게 작용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주, 그분에게 복이 있으라,
께서는 위로부터 아래로 모든 것을 채우셨다. 그런데 아
담이 와서 죄를 지었다. 선들은 훼손되었고, 수로들은 부
서졌고, 못들은 물이 끊어졌다. 쉐키나는 물러갔고, 결합
을 단절되어 버렸다.

그러면 누가 무엇이 티페렛과 쉐키나를 재결합시켜 이 세
계로 신성한 에너지의 흐름이 다시 들어오게 할 수 있을
까? 이것이 카발리스트들이 제기한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
다.

그 답은 : 우리들 각자입니다. 쉐키나와 티페렛의 영구적
인 결합은 이 세계의 선과 죄의 균형에 달려있다는 것입
니다. 조하르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세계에서 의로운 자들이 늘어날 때 대지(쉐키나)는
결실을 내고 모든 것으로 채워질 것이다. 그러나 악한 자
들이 늘어난다면, 기록된 바와 같이, "물이 바다에서 사라
질 것이다."
[쉐키나는] 위로부터 오는 모든 것을 모으고, 모은 모든
것을 가두어두고서 이슬처럼 몇 방울만을 흘려 보낸다.
왜냐하면 아래의 믿음이 충분치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녀가 그녀 안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믿음을 발견한
다면 아무런 제한 없이 모든 방면으로 빛을 쏟아낼 것이
다. 그리고 그들도 한정없이 그녀에게 선물들을 바칠 것
이다. 그러나 그들을 제한하고 그녀를 제한하여 그녀를
막혀있게 하는 것은 아래 세계에 있는 자들이다."

쉐키나와 티페렛의 분리를 복구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또 다른 요소는 남자와 여자의 성스런 혼인이라고 합니
다. 카발리스들은 인간적 혼인이 쉐키나와 티페렛의 신적
인 혼인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그 일이 일어나는 것을 도
울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혼인한 신비가들은 자신들의 성적 결합이 티페렛과 쉐키
나의 신성한 결합을 기념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조하르
는 " 모세의 부모의 욕망이 쉐키나를 결합시키는데 모아
졌다."고 합니다. 모세 콜도베로에 의하자면 그 말은 "그
들의 욕망은 쉐키나를 결합시키기 위한 것이엇다. 그는
티페렛에 집중했고, 그의 아내는 말쿠스(쉐키나)에 집중했
다. 그의 결합은 쉐키나와 합쳐지기 위한 것이었고, 그녀
는 거기에 대응해서 쉐키나가 되는 것에 집중하면서 그녀
의 남편인 티페렛과 결합한 것이다."

"따라서 카발라는 독신주의를 거부하고 혼인을 육체의 유
혹에 대한 양보로 보기보다 가장 거룩한 신비로 본다. 모
든 참된 혼인은 신과 쉐키나 간의 결합의 상징적 실현이
다."라고 숄렘은 말했습니다.

우리들 각자는 개별적으로 말크스/쉐키나와 특별한 관계
를 가질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의로울 때 쉐키나는 우리
와 함께 머물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의로운 신비가는 "쉐
키나의 수족과 같다"고 했습니다. 반대로 죄인은 자신의
몸을 훼손시켜 "배필(쉐키나)이 거할 곳이 없게 한다"고
합니다.

조하르는 모세와 쉐키나를 파트너로 묘사했습니다. 쉐키
나는 그를 떠난 적이 없었고, 그녀는 그와 항상 결합되어
잇었습니다. 모세는 모든 이의 전형입니다. 매트는 이렇
게 말합니다.

인간이 쉐키나를 직접 체험할 수 있을까? 탈무드는 이 질
문을 웅변적으로 제기한다. "인간이 쉐키나 뒤로 걸어가
는 것이 가능할까? 쉐키나와 합쳐지는 것이 가능할까?"
아니다. 그보다는 선한 행위를 함으로써 신을 모방해야
한다.

카발라는 그보다 더 대담하다. 조셉 기카틸라의 말에 의
하자면 "랍비가 말한대로 인간이 쉐키나와 합쳐지는 게
가능할까? 그것은 분명히 가능하다!"


말쿠스/쉐키나와의 결합( cleaving to Malkhut/Shekhinah) 은 세
피롯의 힘에 접근하는 열쇠입니다. 조하르는 쉐키나야말로 티페
렛과 모든 세피롯에 이르는 문이라고 말합니다.

생명 나무[티페렛]에 이르는 길은 누구뇨? 그것은 위대한 배우
자이다. 그녀는 저 위대하고도 강력한 나무에 이르는 길이다. . .
. .이 문(말쿠스)을 통해서 들어오지 않는 자는 제 세계로 들어갈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높고도 은밀하고도 숨기워진 거룩한 왕
(호크마)이 있어 스스로를 위해 여러 문을(세피롯)을 만들었으니,
그 문들의 맨 끝에 특별한 문을 만들어 놓은 것과도 같다. . . .그
는 말하길, 내가 있는 곳으로 오고자 원하는 누구에게나 이 문
이 내게로 인도하는 첫 문이 될 것이다. . . 하나를 취하는 자
는 누구나 다른 것들도 취하리니, 그것은 모두가 하나라. 왜냐하
면 그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사야 티쉬비는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말쿠스에 도달하게 되면 그는 이미 최고의 호크마에 도달한 것
이나 마찬가지이다. 왜냐면 세피롯의 체계는 통일의 세계이기 때
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말쿠스의 문을 열 것인가? 카발라에 의하자면 그
문을 여는 열쇠는 기도와 선한 행위을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뒤에가서 좀 더 얘기하기로 하고 신의 여성적 측면인 신성
한 어머니와 우리와의 관계를 좀 더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머니는 당신의 첫번째 선생입니다. 영원한 자궁이신 그녀는
당신이 빛의 옷을 입고 대중앙 태양으로부터 나온 이래로 당신을
나아왔습니다. 당신의 영혼이 하부 세계로 내려갈 필요가 있게
되자 그녀는 당신의 여행을 위해 다른 체(體)들을 지어주셨습니
다. 당신이 성령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첫 숨을 쉬었을 때 당신
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그녀의 눈이었고, 당신의 존재에 넘쳐
난 것은 그녀의 빛나는 사랑의 미소였습니다. 그녀는 당신이 새
몸으로 들어갈 때 첫번째로 환영의 말을 한 "태초의" 말씀입니다.

어머니이신 신은 당신의 형체를 지었고, 이 세계를 운항해갈 도
구들을 주었습니다. 그녀는 당신 안에 영원한 생명의 씨앗을 봉
인해두었습니다. 그것은 가슴의 빛으로 일광욕을 하기 전까지 잠
복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녀는 생명의 샘입니다. 물질 우주 상에서 신성한 어머니의 속
하지 않은 곳은 아무 곳도 없습니다. 그녀는 문명을 유지하고
거기에 부속된 생의 세세한 모든 것을 유지시킵니다. 그녀는 과
학에도, 기술에도, 정치에도, 경제에도, 건강, 교육, 예술에도 환경
에도,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녀는 불이고 바람이고, 물이고 흙입
니다. 그녀는 자연입니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신성한 어머니가 우리에게 필요한 시기
에 살고 있습니다. 여인들은 전례없이 높은 비율로 낙태를 하고,
여인들은 강간당하고 성적으로 시달리며, 우리의 아이들은 바른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거리에서 뿐만 아니라 학
교와 가정에서도 폭력에 둘러쌓여 있습니다. 정부와 경제는 우리
의 지도자들이 뼈대가 없는 지라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고통들을 기도와 봉사를 통해 신성한 어머니에게
붙음으로써 치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신성한
어머니를 인격화(personify) 해 온 이들에게 강력한 헌신의 관계
를 세움으로써 우리의 기도의 효과를 증대시킬 수 있습니다.
예수의 어미니이신 성모 마리아, 힌두교의 여신인 파르바티, 락슈
미, 자비의 보살인 관세음보살, 그리고 리지웨의 성녀 데레사같은
이들이 그런 위대한 빛들입니다.

신성한 어머니 그리고 그녀의 많은 화신들과 우리의 관계를 이해
함은 생의 모든 곳에서 발견되는 여성적 원리에 대한 우리의 관
계를 파악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남자와 여자 모드에
게 여성적인 부분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직관적이고 섬세한 쪽입
니다. 그것은 내면의 아이(inner child) 이며 영혼입니다. 신성
한 어머니에 붙고자 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여성을 어떻게
다루는지 - 우리의 자신의 영혼과 타인의 영혼을 어떻게 다루는
지를 조사해보아야 합니다.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 보십시요: 비나와 말쿠스, 여성 그리고 태
양를 입고 달을 밟고 계신 여인에 대한 나의 관계는 어떠한가?
어머니의 아들, 신성한 남아에 대한 나의 관계는 어떠한가? 그의
그리스도적인 에센스는 나와 그녀의 자녀들의 가슴 속에서 결실
을 맺어가고 있는데. . . 그녀의 자손, 신성한 남아의 빛을 지니
고 있으나 박해를 받고 있는 그들에 대한 나의 관계는 어떠한가?
신성한 어머니의 자녀와 그녀의 모든 창조 세계를 양육하기 위해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심령안에 남아있는 미해결된 갈등들은 신성한 어머니와의 불화로
귀결됩니다. 그런 갈등들을 푸는 것은 신성한 어머니와 화해하
는 길입니다. 신성한 어머니에 대한 관계는 이 생에서 지상적인
어머니에 대한 관계 속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풀
때 필요하다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습니다.

신성한 어머니와 친해지고 그녀의 평화가 당신 지체 속의 다툼을
잠재우게 하십시요. 우주적 자궁 속으로 들어가 그녀가 지키고
있는 생명 나무를 통한 재탄생을 알도록 하십시요. 신성한 어머
니에 대한 헌신을 추구하고, 그녀와 함께 당신의 심령을 치유하
고, 봉사와 선행을 지구를 치유함에 따라 점차로 신성한 어머니
는 말쿠스/쉐키나의 문을 당신에게 열어줄 것입니다.

어머니는 우리가 우리 자신과 남들에게 자비와 정의와 연민을 펴
줌으로써 우리 자신의 가슴을 열 때 그녀의 가슴에 이르는 문을
열어줍니다. 일단 말쿠스에 이르는 문이 당신에게 열리고 나면
당신은 비전을 하나 하나 통과하면서 다른 세피롯들의 문으로 들
어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는 말쿠스/쉐키나의 문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파멸로 이르는 문고 넓고도 커 많은 이들이 그리로 가
나 생명에 이르는 문은 좁고도 작아 그걸 찾는 자가 적다."

당신이 준비가 되었을 때 신성한 어머니는 당신이 말쿠스/쉐키나
의 문을 지나 그녀의 발에 입맞출 수 있도록 허용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영원한 생명의 사다리의 첫 다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
거기서 당신의 존재 이유를 실현하십시요. 예소들의 다음같은 부
름을 듣게 될 때까지, " 좀 더 높이 올라오라. 너는 말쿠스/쉐키
나에서 몇가지 작은 일에 충실했도다. 예소드의 문으로 들어가라.
나는 네가 많은 것을 다스릴 수 있도록 해주겠노라."


준(準) 세피라(The Quasi Sefirah), 다아트( Da'at)

생명 나무 상에는 비밀스런 특성을 지닌 세피라가 또 하나 있는
데 그것을 다아트( Da'at) 라고 하며, 그 의미는 "지식"입니다. 다
아트는 생명나무의 중앙 기둥 위에 위치합니다. 그것은 케테르
(왕관)과 티페렛(아름다움/연민) 사이에 위치하고 호크마(지혜)와
비나(이해) 아래에 위치합니다. 숄렘은 다아트가 호크마와 비나
의 조화의 일종으로 그 둘 사이에서 나타난다고 합니다. 카발리
스트들은 다아트를 비(非)-세피라 또는 준(準)-세피라로 봅니다.
그것은 별개의 세피라가 아니라 "케테르의 외적인 측면"입니다.

할레비는 다아트를 신적인 영감으로 묘사합니다. "인간적인 용어
로 말하자면 다아트는 그 어느 곳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신으
로부터 직접 오는 지식이다. 그것은 지혜(호크마)의 드러남과는
사뭇 다르다. 그것은 목격될 뿐만 아니라 알려진다. 그것은 이해
(비나) 또는 깊은 숙고로부터 나오는 것과도 다르다. 최고 세피라
의 아이인 다아트는 관측일 뿐만 아니라 되어짐(becoming) 이
다."

일부 전통에서는 다아트를 기적적인 능력의 원천으로 봅니다. 이
삭 루리아의 제자들 중에 일부는 다아트라고 불리는 비밀스런 특
성을 가진 빛을 불러내려 공중으로 날라다녔다고 합니다.


뇌전( Lighting Flash)

케테르로부터 말쿠스로 세피롯이 현현하는 모습을 그린 도표 중
에 '뇌전( Lightning Flash)'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세페옛치
라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들의 모양은 번쩍이는 번갯불과
같으며, 볼 수도 없고, 그 끝도 없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세피롯이 빛을 발한다는 의미거나 세피롯
은 섬광같은 순간 동안만 볼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또
다른 카발리스트들은 '뇌전( Lightning Flash)'이 세피롯의 현현
을 묘사할 뿐만 아니라 신성의 힘들이 생명 나무를 통해서 지그
재그로 내려오는 것을 묘사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생명 나무의 패턴은 '발현하는 모든 것의 모델이다. . . 생명 나무
안에 펼쳐진 관계들은존재 전체의 근저에 있다. 따라서 세피롯
의 성질들은 어떤 분야의 지식에서도 볼 수 있다. 생명 나무의
세피롯들은 신성의 전류가 흐르는 회로의 기능 체계라고 볼 수
있다."고 할레비는 말합니다.

신성의 섬광은 확대하는 성질의 자비의 기둥에 있는 세피라로부
터 수축적인 심판의 기둥에 있는 세피라로 다시 조화시키는 성질
의 연민의 기둥에 있는 세피라로 계속해서 지나갑니다. 섬광은
케테르에서 시작하여 호크마와 비나로 해서 다아트로 흘러갑니
다. 다음으로 그것은 확장적인 세피라인 헤세드로, 그 반대적인
게부라로, 다시 티페렛의 균형으로 갑니다. 여기서 다시 네차, 호
드, 예소드 그리고 말쿠스에 이릅니다.

'뇌전( Lightning Flash)'이 세피롯을 지나갈 때 일어나는 창조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할레비는 책을 쓰는 걸 예로 들고 있습니
다. 케테르(왕관)는 창조적 원리라고 합니다. 아이디어는 호크마
(지혜) 속에 품고 있지만 아직 형태가 없습니다. 비나(이해) 안에
서 아이디어는 모양을 갖추게 됩니다. 저자는 예를 들어 어떤 주
제에 집중된 책을 쓰기로 했다고 합시다.

그 아이디어는 몇 년 동안이고 심중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다
가 다아트(지식)를 통해 집중됩니다. 헤세드(자비/사랑)에 이르면
작가의 내부에서 형성되어 오던 창조적 아이디어들의 윤곽을 그
리기 시작합니다. 게부라(정의/심판)를 통해서 책에 어떤 것을 포
함시킬 지 판단하고 잽니다. 그리하여 헤세드의 모든 아이디어들
을 구체적이고 한정적인 개념으로 만듭니다.

책이 형태를 갖게 됨에 따라 그 뚜렷한 본질 또는 특질인 티페렛
(아름다움/연민)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네차(승리)는 책이 전체
적으로 쓰여지는 지점입니다. 호드(광휘/장엄)를 통해 신체의 생
명력은 펜이 종이 위로 움직이게 합니다. 예소드(기반)는 집필을
체계화하고 그 사람의 필체로 다듬습니다. 말쿠스(왕국)는 책의
물질적 발현입니다.

이상의 예는 인간적 생명 나무 안에 그려져있는 '뇌전(
Lightning Flash)' 대략적인 윤곽입니다. 우주의 모든 창조의 과
정은 동일한 패턴을 따라 이루어 진다고 할레비는 얘기합니다.


퍼온 곳
초현상연구회
http://chs.new21.net/